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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남의 글

이우형

일제가 날조하고 후대 학자들의 우매함 때문에 잘못 전해졌던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기록을 바로 잡느라 숱한 고생을 하셨던 형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산과 이우형


 

 

그는 1960년대 초 성우활동을 하면서 동료 성우인 박용기, 신원균 등과 어울려 산에 다니기 시작했고, 1965년 서울시산악연맹 발기인의 한 사람인 청운클럽 최명길 회장을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하게 되었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재직할 때 동료 성우들과 ‘산수회’란 산악회를 만들었고, 1967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등산수첩」을 펴냈다. 이 등산수첩은 동료 성우인 신원균, 박용기 씨, 산악인 최명길, 안병석 씨 그리고 그(그때 이름은 李又迎으로 썼다)자신이 편집위원이 되어 3년간의 자료수집과 반년간의 제작과정을 거쳐 만든 책이다.

260쪽 비닐커버로 장정된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마치 등산백과와도 같이 온갖 것이 다 들어있다. 등산의 의의와 형식, 등산의 계획과 준비, 등산장비, 등산의 보행술, 산에서의 기상, 산에서의 식량, 산에서의 위생, 산에서의 예절, 지도 읽기 등을 비롯 중요 산의 등산 코스도와 도별 전국 주요관광지안내, 천연동굴, 등산용어집에 심지어 전국 중요 사찰의 위치와 개관, 전국의 능원묘 지, 온도표, 입출입시각표, 역간거리표 까지 곁들여 등산에 관한 자료가 없을 당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60년대 우리나라의 산악운동은 5.16군사정변이후 유사단체통합령에 의해 대한산악연맹이 결성되고,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자리를 잡아 가고 있을 때였으나 산악문화면에 있어서는 전문 서적이나 잡지하나 없었다.

등산수첩을 펴낸 그가 등산잡지 발간을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968년 당시 등산 잡지는 공교롭게도 두 군데서 시작하고 있었다. 김초영 씨(사잔작가)와 그가 추진하는 ‘산수’와 필자와 장남석 씨가 추진하는 ‘등산’이 그것 이었다. 필자가 이우형 씨를 만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광고를 맡기로 했던 김초영 씨가 도중에 손을 떼는 바람에 잡지는 고스란히 그 혼자 떠 맡게 되어 회현동 작은 여관방에서 밤을 새워가며 창간준비를 하였다.

두 잡지는 우여곡절 끝에 그 이듬해에 창간되었는데 1969년 5월초 ‘등산’이 5월 호로 창간되고, ‘산수’는 뒤이어 6월 호로 창간되었다. 그런데 문공부에 등록된 번호는 ‘산수’가 라-1157호(1969.5.6)이고, ‘등산’은 라-1158호(1969.5.6)로 등록된 날자는 같으나 등록번호는 ‘산수’가 앞섰다.

당시 한국직장산악인협회 부회장이던 김용성 씨의 도움으로 조선호텔 뒤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7월 호와 8월 호를 펴냈으나 자금난 때문에 통권4호를 9,10월 합본호로 내고는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장비업체가 없어 광고수입이 거의 없었고, 판매도 1,000부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자금력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더구나 월간지가 1년에 두 번 이상 결호되면 문공부에서 폐간조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 해 말 ‘산수’는 폐간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동아방송국에서 성우활동을 하면서 기층문화 연구 모임인 민학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72년 2월에는 서울시산악연맹에 산악조난구조대가 발족되면서 초대 대장을 맡았고, 1974년 12월 서울시산악연맹과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가 합동으로 구조대를 만들었을 때도 대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서울 근교의 도봉산 일대는 불량배들과 가출한 청소년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전문 산악인이 아니고는 등산하기도 두려웠다. 특히 1971년에 건립된 도봉산장은 불량배들의 온상이었는데 구조대가 들어 오면서부터 불량배들을 몰아내고 황폐해진 산장을 보수하게 되었다. 서울시산악연맹 이원직 회장이 희사한 17만원으로 산장 보수비에 충당하고 최창민, 김경배, 조원길, 민병학 등 구조 대원들과 함께 노력봉사로 산장보수를 마쳤다.

이후 도봉산장을 근거로 활동을 시작한 구조대는 인원이 30명으로 늘어 6명 5개조로 편성하여 매주 토요일이면 1개 조씩 도봉산장에 대기하였고 나머지 조는 부근 암장에서 바위를 하다가 사고가 접수되면 함께 구조활동에 임하였다. 당시 구조대에는 활동비가 지원되지 않아 구조활동에 필요한 부식비나 간단한 장비 구입을 비롯 사고처리 뒤 막걸리 값까지 그의 주머니에서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


 


 

1975년 1월 그는 제주적십자사 산악안전대의 초청으로 후배 김경배와 함께 훈련강사로 제주도에 오게 되는데 이것이 제주 산악인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소탈한 성격의 그는 대인 관계가 원만하였고, 정이 많았으며 특히 산악 후배들의 일이라면 만사 제쳐 놓고 나서는 성품이었다. 자연 서울보다 뒤져있는 제주의 후배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잡지를 그만 둔 뒤 등산지도 제작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제주도 관광지도 제작을 결심한 것도 이 때였다. 현지조사를 하느라 제주도에 수시로 드나들었고 제주도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지냈지만, 1977년 「종합제주도총도」를 만들면서부터 그는 제주도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되었다.

1979년 5월 29일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 박훈규가 제주도 출신 고상돈(1977년 에베레스트 한국인 최초 등정자)씨와 함께 알래스카 맥킨리봉 웨스트버트레스 루트로 한국인 최초의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다가 일행이 안자일렌에 묶인 채 1,200미터를 추락한 사고가 일어났다. 고상돈 씨와 일행이었던 이일교는 현장에서 사망했으나 박훈규는 심한 동상에 걸린 채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그 해 6월 박훈규는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양쪽 발가락과 왼손 그리고 오른손가락 2개를 절단하고 말았다. 이 때 1년 여를 하루같이 찾아와서 간호하고, 격려해 준 사람이 그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불구의 몸이 되어 절규하며 생을 포기하려 까지 했던 박훈규에게 그는 형님이라기 보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1980년 10월 경기도 광주의 한남공원묘원에 묻혀 있던 고상돈의 유해가 제주도 1100고지에 이장될 때도 그는 만사 제쳐 놓고 뛰어 다녔고, 제주도를 찾을 때면 동년배인 김승택씨를 비롯 양하선, 박용철씨 등과 어울려 술잔을 기우렸고, 취기가 오르면 특유의 큰 목소리로 아랑곳 하지 않고 ‘옹달샘’노래를 밤새도록 불러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배들에게도 대뜸 ‘개새끼들’이라고 거친 말을 썼으나 그것도 격이 없는 후배에게만 그랬다. 그런 그를 후배들은 잘 이해했고 그를 ‘개아방’으로 깍듯이 모셨다.

1981년 1월에 제주산악회는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하였고 그는 제주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제주 후배들을 위해 당시 제주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자일, 카라비너, 미제 설피 등을 구해 보내 주고, 1984년 제주산악회 20주년 때에는 그가 손수 제작한 한라산 등산지도 1,000부를 보내주기도 했다.

서울과 제주의 가교 역할을 하며 제주 사람이 아니면서도 제주 사람들과 흉허물없이 지냈던 그 였기에 그를 아는 제주 사람들은 그를 “마음이 비단 같은 사람이고, 인간 냄새가 물씬 나는 사람”이라고 못내 아쉬워 한다.



대동여지도와 이우형


그가 지도를 가까이 하게 된 것도 산 때문이었다. 등산수첩을 만들고, ‘산수’를 창간할 때 부록으로 들어 갔던 등산지도도 일일이 그가 조사를 했고, 손수 그렸다. ‘산수’를 접고 산행으로 허탈한 마음을 달랬던 그에게 지도는 큰 낙이었고 또 하나의 해야 할 과제였다.

매일 지도를 들고 방송국에 출근하는 그에게 동료 성우들은 “대본 대신 왠 지도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지형도를 사느라 자주 드나들었던 중앙지도문화사에서 어느날 직원이 그에게 말을 붙였다. “보아하니 광산업자나 부동산업자 같지는 않은데 무슨 지도를 그렇게 자주 사가느냐”고 묻자 그가 “등산을 좋아 하기 때문에 지도 보는 것이 취미”라고 하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사장(김명택 씨)이 “우리도 등산지도를 만들 계획인데 같이 일해 보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지도 편집을 맡았고, 1973년에 제주와 경주 관광지도가 그의 손을 거쳐 출간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지도업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잡지 ‘등산’을 펴내던 필자도 전주가 손을 떼는 바람에 잡지를 이신상 씨(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이던 노산 이은상 씨의 동생)에게 넘겼고, 이신상 씨도 1년을 겨우 버티다 신우회(당시 정계, 언론계 실력자들의 모임으로 조선일보사 방일영, 신직수, 안경렬 씨 등이 회원이었음)로 넘어 가게 되자 손을 떼고 한국소문사란 회사에서 일본 지도 제작을 하고 있었다.

1977년 그가 제주도 지도를 제작하자고 필자를 찾아 왔다. 편집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필자는 사장의 허락을 받아 조사, 편집은 그가 하고 제작은 필자의 회사에서 하게 되었다. 당시 필자의 회사는 한국 내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의 지도를 제작하여 수출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최신 기법으로 지도를 제작하고 있었다. 지도에 관심이 많은 그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지도가 1978년 8월 1일에 ‘세계문화사’의 이름을 빌어서 발간된 「종합제주도총도」이다. 이 지도는 크기가 4.6반절지(B2판)로 등고선에 채단식 단채를 넣고 입체감 나게 음영까지 넣어 8색도로 인쇄한 지도로 그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이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처음 발간된 종합관광지도였다.

 


 

직접 조사하느라 제주도를 내 집 같이 드나 들면서 제주도를 샅샅이 뒤져 알려져 있지 않은 제주의 비경과 풍물을 지도에 표현하였고, 관광지에 일일이 설명을 부기하였다. 또 제주도 사진 작가인 고길홍 씨의 사진을 모아 ‘삼다도사진첩’을 부록으로 곁들여 지금 내 놔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지도로 평가된다.

그는 이 지도 한 장으로 일약 유명해져 도하 신문에 그에 관한 기사가 앞 다투어 실렸다. 당시 제주신문에 난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렇다. “제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등산 때문이었으나 올적마다 원색의 찬란한 제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가 없는 것이 안타까워 언젠가는 꼭 내 손으로 어딜 내 놔도 부끄럼이 없는 지도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다” 또 “지도의 특색은 지금까지의 지도와는 달리 보는 지도에 읽는 지도로 바꿔 놓아 지명의 유래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제주에 관한 서적을 모두 읽었다”

3,000부를 찍은 제주도 지도가 괜찮은 반응을 보이자 이듬해 4월에는 종합경주관광총도를 펴냈다. 출판사를 가지고 있지 않던 그는 이번에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친구 출판사인 창민출판사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이렇게 지도제작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그는 성우활동도 집어 치우고 지도제작에만 전념하게 되는데 뜻밖의 큰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80년 1월 17일 중부경찰서에서 조사할 일이 있다고 그를 불렀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로 출두하였다. 그때 그를 취조하던 정보과 형사가 그에게 그랬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렇게 눈치도 없냐. 이렇게 찾아오면 어떡허냐”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별 것 아닌 일이니 잠시 피해 있으면 해결될 일이였다는 뜻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불법지도 간행, 배포혐의로 입건 구속되고 말았다. 측량법에 민간에서 지도를 제작 배포하려면 지도를 제작한 후 국립지리원의 측량성과 사용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 때 그는 그런 법이 있는지 조차 몰랐었다. 그가 구속되자 성우협회를 비롯 산악인들이 합세하여 그를 구명하고자 서울지검에 탄원서를 냈고, 제주 산악인들도 산악계와 관광업계를 돌며 진정서를 작성하여 관계요로에 제출하였다. 신문에서도 ‘현대판 김정호’를 살리자고 연일 기사가 실렸다.

이같이 법의 온정에 호소하는 여론이 일어나자 2월 4일 서울지검 이광수 검사는 그를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어 줬다. 당시 이 검사는 “이 씨의 피의 사실은 충분히 인정되나 이 씨가 순수한 동기에서 관광안내도 등을 지도에 기입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주었던 점을 참작하여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히고, 지도를 발행한 창민출판사의 송재홍 사장에 대해서는 측량법위반 혐의로 약식기소 30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하고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때 제주도의 박훈규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인데 매일 오다시피 하던 그가 며칠째 나타나지 않자,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휠체어를 탄 채 중부서로 달려 갔으나 면회도 못하고 돌아 오고 말았다. 며칠 뒤 나타난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디 좀 갔다 왔어” 라고 태연한척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됐고 이때부터「현대판 김정호」란 닉네임이 따라 다녔다. 한번 혼이 난 그는 제주도총도와 경주총도를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재간행하고 1981년 12월에는 충주호 수몰로 인한 중원문화권 유적조사에 사업에 참여하여 이후 중원문화권유적분포지도를 제작하였다.

1983년 2월에는 지리산 등산지도를 펴 내면서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려고 출판사를 인수(당시는 군부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라 출판사 신규등록을 중지하여 기존의 출판사 명의를 사고 팔았었다)하여 도서출판 광우당(匡祐堂)을 설립한다. 바를 광자를 쓴 광우당은 세상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하라는 뜻에서 친구 박용기씨가 지어 준 이름이다.

출판사 사무실을 집 근처인 용산구 서부이촌동 천일빌딩으로 이전하고 첫 사업으로 안내산행으로 유명한 안경호 씨와 공저로 전국 170개 산을 묶어 「산으로 가는 길」이란 등산코스 안내집을 출간했다. 특수 바인더로 제책 된 이 책은 개념도에 음영을 넣은 새로운 기법의 등산안내도로 당시에는 꽤 인기가 있던 책이다.

어느 날 대동여지도를 연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지리학과 졸업생들이 그를 찾아와 지리학을 전공한 학생들인데 대동여지도를 보여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충격을 받았고, 대동여지도를 연구만 할게 아니라 복간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접한 대동여지도는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에서 3분의 1로 축소한 영인본 뿐이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대동여지도 원본이 있다는 곳은 국립중앙도서관이고 규장각이고 어디든 찾아 다녔다. 그 결과 그가 본 대동여지도 원본은 20점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원본대로 복간하기 위해서는 원본을 손에 넣어야 만 했다. 인사동에 있는 고서점 통문관에 누가 팔려고 맡겨 둔 대동여지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갔으나 너무 고가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매일 찾아와 지도를 보여 달라는 그의 끈질긴 열성에 탄복한 주인 이겸노 씨는 대동여지도 원본을 선듯 빌려 주었다.

재빨리 원본을 제판용 카메라로 촬영하고 훼손되거나 가필된 부분은 그동안 봐 왔던 이본(異本)과 일일이 대조하며 원도 복원에 온 힘을 기울였다. 원래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이기 때문에 목판은 뜰 때마다 성과가 다르고 사용하는 사람이 보기 편하도록 채색을 하고 적당한 크기로 접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봤던 20여 점의 원본도 어느것 하나 완전한 것은 없었다. 그의 손을 거쳐 현대 기술로 복원된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선생이 찍어 낸 목판본 보다 더 선명하고 완전하였다.


 



1985년 12월 20일 드디어 대동여지도가 복간되었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 124년만의 일이다. 100부를 만들어 그간 신세 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95,000원에 판매하였다. 최근에는 이 복간 본도 희귀 본이 되어 고서점에서 2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고 한다.

언론에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것은 당연하고 그는 또 ‘고지도 연구가’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쌍용 그룹의 김석원 회장이 그에게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200부를 더 제작하였다. 김 회장은 다음과 같은 인사장을 붙여 배포하면서 대동여지도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고 한다.

「……전략 애석하게도 대동여지도를 이룬 소중한 목판들은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목판에서 떠낸 원본만이 보물 제850호로 남아 있습니다. 평소 고산자 선생의 높은 뜻에 감명과 존경심을 가져 왔던 제가 이번에 지도 연구가이신 이우형 씨의 도움을 얻어 당시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한지로 제작방법도 같이 하여 200부 한정으로 대동여지도를 재현시켜 세상에 내어 놓게 되었습니다. 선각자이신 고산자 선생의 지극하신 애국심을 높이 기리면서 선생의 땀이 점철된 대동여지도의 복간본을 올립니다」




대동여지도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발행된 ‘산경표’를 접하게 된다. 조선후기 영조 때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의 저서로 알려진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알기 쉽도록 체계화 한 기록인데 이 ‘산경표’로 인해 그의 연구 영역은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로 확대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산맥 이름인 태백산맥, 소백산맥은 언제부터 쓰여 졌으며, 선조들이 사용했던 산줄기 이름인 백두대간은 왜 사라진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되었다. 멀리 일본 국회도서관 까지 뒤져가면서 그는 결론을 얻어 낸다.

구한말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호시탐탐 조선을 삼키려는 일제는 1900년 초 조선반도의 자원조사를 위해 지질학자 고도분지로(小藤文次朗)를 파견하여 지질조사를 시켰고, 1905년부터 조선반도의 지도제작을 위해 측량을 시작했다. 우매한 조선 백성은 영문도 모른 채 일제에 고용되어 측부 노릇만 했다.

고도분지로가 귀국하여 제출한 보고서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산맥이름이 있었다. 분개한 그는 이 사실을 세간에 널리 알리고 우리 산줄기 찾기에 나섰다. 이때부터 백두대간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이슈가 없었던 산악계에서는 백두대간 종주산행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백두대간으로 그가 유명해지자 모 맥주회사에서는 백두대간을 광고로 쓰겠다면서 그에게 맥주를 대주기도 했다.

1987년에 그는 지도제작 전문가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또 해낸다. 중고등학생이 교과서로 배우는 사화과부도와 지리부도 제작이다. 교학사의 제의로 저자 계약을 마친 그는 기존 지도제작의 기술을 뛰어 넘는 기법을 고안하여 당당히 문교부 검인정에 합격하고 교과서 저자가 됐다.

1990년 10월에는 김정호 선생이 대동여지도 목판 제작 전에 필사본으로 제작한 ‘동여도’를 ‘대동여지도’와 비교하여 대동여지도 만들 때 누락된 지명 7,400여 개를 3분의 2로 축소한 대동여지도 영인본에 제자리를 찾아 별색 활자로 첨쇄하는 복간본을 제작하고 그간 연구한 성과를 한데 묶은 「대동여지도의 독도」를 펴낸다. 이 책에서 그는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는 한 시대의 문화, 과학을 집약한 것으로 문헌과 사료로서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우리 조상의 얼과 살아 있는 우리 땅의 지도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인식해야 한다”고 피력한다.

그는 이어 초등학교 5학년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의 오류된 내용을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 지금까지 사용되었던 문교부 발행 초등하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인 「국어읽기」에 수록된 김정호 단원은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도 그가 찾아 냈다. 이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가 조선의 양반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천민출신의 김정호가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미화하면서 사실을 왜곡 변질시켜 식민사관에 교묘히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오류를 고치고자 관계 당국에 건의하여 1993년 교육과정 개편 때 교과 내용이 바뀌었으나 일부 문구만 바뀌고 본질적인 내용은 그대로 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 자신과 전문가들의 연구성과를 제시하며 실무 담당자들과 의견을 좁혀 갔다. 이후 개정된 실험본 교과서에도 일제의 식민사관과 역사 왜곡은 그대로 였다. 시범교육 후 그대로 확정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교육 연구부장인 이인제 박사를 찾아 갔다.

그간의 연구성과를 제시하고 끈질기게 재고를 요청하자 평소 김정호에 관심이 컸던 이 박사는 그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이렇게 해서 「국어읽기」 교과서의 고산자 김정호 단원은 다섯 쪽의 수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대동여지도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방안 가득히 대도여지를 펼쳐 놓고 밤새도록 김정호 선생과 술잔을 주고 받으며 푸념 섞인 대화를 했던 그는 생몰 연대가 분명치 않고 후손도 없는 김정호 선생을 위해 제사를 모실 생각을 한다. 첫번 제사는 1993년 신촌의 봉원사에서 박용기 씨,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박사, 성남해씨, 필자 등이 모여 김정호 선생의 구혼제를 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김정호 선생이 처음으로 젯상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 차례모임은 1997년 11월 8일 삼성출판박물관에서 가졌는데 격식과 규모를 갖춘 차례 모임이었다. 이날 모임은 고지도학계, 지도업계, 문화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 전통방식으로 젯상을 차리고 박용기 씨가 제주가 되어 옛 제례의식에 따라 차례모임을 가졌다. 차례 뒤에는 김정호 선생의 지지와 학문(성신여대 양보경 박사), 김정호의 생애와 사상(이상태 박사), 초등학교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의 개정(이인제 박사)이란 주제로 강연도 있었다.

누가 작성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파일에서 찾은 공적조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이우형은 고지도 연구에 입문한 이래 2001년 4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국토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고지도 연구와 전통지리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우형은 우리 국토와 그 위의 모든 자연, 인문, 사회, 문화를 담고 있는 고지도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의 국토관과 지역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투영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와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문화 유산인 대동여지도를 일반 국민들이 공유할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하였으며, 지도 보급과 전통지리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우형의 삶


그는 1934년 12월 30일 아버지 이상직 씨와 어머니 이명기 씨 사이에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 났다. 위로 누나가 세 분이고 형님이 계시다. 기록에 그가 태어난 곳이 부산 동래로 되어 있으나 실은 당시 은행원이었던 아버지가 전라도 광주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라 그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때 대동아전쟁이 터져 어린 나이에 일제가 시키는 강제노역에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물자가 모자랐던 일제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운동장에 구덩이를 파고 호박이나 옥수수를 심게 했고 군복에 단추 달기도 시켰다. 그도 단추를 달면서 서툰 솜씨에 손가락을 무수히 찔렸고, 아버지의 고집대로 창씨 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피가 터지도록 종아리를 맞았다고 한다.

3학년까지 다니다가 은행에서 쫓겨 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1947년 3월 아현국민학교를 졸업했다.(탤런트 이순재 씨가 동기라고 한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었고, 1953년 3월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그 해 12월 학생 신분으로 기독교중앙방송국 제1기 성우 공채에 응시하여 심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성우 주상현 씨와 고은정 씨가 입사동기이다.

1954년 1월에는 영장을 받고 육군에 입대했고 1957년 10월에 제대했다. 이듬 해인 1958년 3월에는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62년까지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그만 두고 여러 방송국을 돌며 프리랜서로 성우 활동을 했다.

그의 이력에서 보듯이 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고 다재 다능하여 중학교 때 교회주보를 프린트로 칼라 인쇄를 해냈고 잠간이지만 대학에서도 학보를 만들었으며, 군에서도 육군사관학교에 복무하면서 출판 일과 방송 일을 했다고 한다.

부인 권정자 씨와는 부인이 이화여대를 졸업할 때 누님의 소개로 만났는데 부인 집에서는 연기자라고 반대를 했으나 끈질긴 구애에 넘어 가 1969년 10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가정을 꾸렸지만 결혼 할 때가 잡지 ‘산수’를 그만 둔 직후라 역마살이 도져 집을 나서기 일쑤였다.

가정은 뒷전이고 자기 하고 싶은 일만 몰두하는 남편이 야속했으나 부인은 은행에 다니며 생활을 꾸려 나갔다. 독수공방하는 날이 늘어 나고 가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을 지켜 보던 부인은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가만히 보니 남편이 하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도 일치한다고 깨닫고 남편을 이해하고 남편이 하는 일에 내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본성이 착한 그는 집에 있을 때면 좋은 남편이었고, 애들에게는 둘도 없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재경, 재윤 두 딸 일이라면 끔찍하게 했다 한다. 애들 먹을 간식도 해주고, 애들 데리고 산에 가고, 심지어 애들 학교 소풍 때도 손수 먹을 것을 챙겨 따라 나섰고, 혹 애들이 필통을 두고 학교에 가면 들고 뛰는 성미였다. 지금도 부인은 자기한테는 무관심 했지만 애들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고 한다. 둘째가 재수할 때는 학원 마칠 때 까지 그 좋아 하는 술도 안 마시고 애를 데리러 갔다고 한다. 그는 하우스보다 홈의 중요성을 중시하였고,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강조하였다.

그는 건강체질이 아니면서도 술과 담배를 무척 좋아 했다. 자연 술에 관한 일화도 많다. 술자리가 벌어지면 일찍 끝나는 법이 없었다. 안주 남았다고 술 시키고 술 남았다고 안주 시키고 그의 술버릇을 아는 후배들은 그가 술 먹자고 하면 꽁무니를 뺄 정도였다. 필자도 술은 못하지만 자주 그와 술자리에 어울렸고, 취기가 오르면 유난히 큰 목소리로 지도 얘기, 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출판사를 했으나 사람 좋아 하고 술 좋아 하는 그가 돈을 모을리 만무했다. 항상 쪼들리는 그의 생활을 알고 있던 미국에 있는 형님은 그를 미국으로 불러 드릴려고 많은 애를 썼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와 필자는 이상하리만치 같은 길을 걸었다. 산을 좋아 한 것도, 책을 좋아 한 것도 또 우연이지만 등산 잡지를 시작한 것도 그리고 지도 일을 한 것도 그래서 그와는 많은 일을 같이 했다.

90년 후반이 되자 그의 나이도 60이 넘게 되었고 출판사 일도 힘에 부친 지 오랫동안 연구의 산실이었던 천일빌딩의 사무실을 정리하였다. 꼭 필요한 자료만 집으로 가져 가고 많은 책과 자료들은 대동여지도 복간에 참여 했던 김규원 씨에게 보관시켰고, 등산장비는 싸서 제주도의 박훈규에게 보냈다. 그가 만들었던 라이트 테이블 몇 대를 지금도 필자가 사용하고 있다.

모든 것을 정리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 동안 연구하고 구상했던 것을 집대성하여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를 펴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의 소개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때 그에게 일생에 있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간 고지도에 관한 연구도 같이 하고, 교분이 두터웠던 성남해 씨로부터 1999년 5월 24일 자로 내용통고서가 날라 들었다. 내용은 국사편찬위원인 이상태 씨가 저술한 ‘한국고지도의 발달사’란 책에 자신의 연구 자료를 표절했고, 이우형이 펴낸 ‘대동여지도의 독도’란 책의 내용 역시 자신의 연구성과를 표절하였다고 하며 심지어 이상태와 이우형이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내용이었다.

이후도 성남해 씨는 국사편찬위원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며 이상태 씨를 매도하였고, 그와도 내용통고서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는 필자를 찾아 와 주고 받은 내용통고서를 보여 주며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며 몹시 마음 아파 했으며, 그간 쌓아 온 인간관계의 허무함에 크게 낙담하였다. 중간에 필자가 나서 화해를 시키려 했으나 두 사람 다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0년 11월 1일 대한측량협회에서 제1회 측량의 날을 개최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포상자 명단에 성남해 씨가 산업포상을 수상한다고 해서 이 기회에 두 사람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그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같이 참석하자고 권했더니 그는 선 듯 응해 주었다. 성남해 씨에게도 그 날 이우형 씨도 참석한다고 전하면서 이 기회에 화해하라고 했으나 성남해 씨는 석연찮은 목소리로 참석하는 것은 좋지만 이미 늦었다는 말을 했다.

당일 그의 차를 타고 같이 대회에 참석하여 성남해 씨의 수상을 축하 해 주고 학술발표를 들으려 할 때 별안간 그가 쿡쿡 찌르며 나가자고 하였다. 대회장 옆 커피숍에 안자마자 그는 논문집을 펴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성남해 씨가 발표하려했던 ‘조선 10리와 대동여지도의 축척’이란 논문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필자가 1986년 7월호 측량지에 발표한 이정고(里程考)의 본 취지는 전년에 발표한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축척과 자(尺)연구는 100리척에 의한 거리와 일제의 10리제도와 조선 전통의 10리의 혼선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려한대로 이우형 씨의 ‘대동여지도의 독도’와 이상태 박사의 ‘조선시대 지도연구’에 의하여 회자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하필이면 연구논문에 까지 그렇게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필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원고 집필도 힘들어 글 쓰는 후배 민병준을 불러 대필을 시켰지만 결국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하여 낮에는 원고를 쓴다고 집에 나가곤 했으나 필자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하루는 김규원 씨를 데리고 국수전골이 먹고 싶다고 찾아 왔으나 막상 국수전골은 들지를 못했다.

2001년 4월 29일. 그는 모든 것을 남겨둔 채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용산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는 산악계, 지도업계, 방송계, 고지도계, 문화계 등 다양한 부류의 조문객들이 찾아 와 생전 그의 삶을 가늠해 보는 듯 했다. 그 때 박물관에 계시는 학예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고지도를 정리하고 고증할 때 꼭 계셔야 할 분인데 너무 빨리 가셨다”고

형님, 이제 형님 글 다 썼습니다. 형님이 남기신 자료 다 뒤지고 형수님, 친구, 후배들 만나 형님얘기 듣고, 형님이 만든 지도 일일이 찾아가며 형님얘기 정확히 쓰려고 애썼지만 미흡한 점 많을 겁니다.

형님 집에 찾아 갔더니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셨고, 공부 잘 했던 두 따님도 좋은회사에 다니고 형수님도 편안하시더라구요. 왜 그런 말 있지요 “죽은 뭐만 불쌍하다”고, 성남해 씨도 2003년 6월 10일 세상 떠났습니다. 부디 만나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산자 김정호 선생과 형님의 업적을 기리고 뒤를 잇기 위해서 ‘이우형기념사업회’도 만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 너무 많아 ‘바람’처럼 사셨던 형님, 오늘도 제주의 드넓은 산록을 내려다 보시지는 않는지요.


<2004년 제주산악회 창립 40주년 특집호에 기고>

 

출처 : 최선웅의 산과 지도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