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은 유일하게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와 함께였고 중간에 백두대간을 만났었습니다.
그래서 1구간은 백두대간과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의 길이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제 2구간은?
네. 동학혁명과 태조 이성계의 구간 즉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구간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봉건주의를 타파하려는 사회개혁운동인 동학혁명과 가별초와 신진사대부를 등에 업고 조선개국에 성공한 이성계가 그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황산대첩을 음미할 수 있는 구간이라는 것이죠.
우선 이번 구간에 살펴보아야 할 주요 포인트를 정리해 보면,
1. 서림공원
2. 방아치 전투
3. 비전마을
4. 동편제
5. 황산
6. 법계도
7. 피바위
8. 팔량재
9. 지리태극종주, 서부능선
이 정도로 정리가 될 거 같습니다.
지난 구간 지났던 노치마을을 지나면서 우리는 이제 백두대간을 왼쪽에 두고 보면서 걷게 됩니다.
이제는 백두대간을 다시 만날 일이 없게 되죠.
아쉬운 마음에 머릿속으로 그 대간길을 조금만 따라가 볼까요?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노치마을을 지난 백두대간 길은 수정봉을 지나 영실靈室이 있는 주지사住智寺를 거쳐 여원치라고도 불리는 연재에서 24번 도로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연재에서 다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을 만나게 됩니다.
즉 이 길은 예전 조선시대 10대 간선로 중 전주와 고성을 잇는 10대 통영별로로서 남원부와 운봉현 구간 중 일부 구간이죠.
다시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 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명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4월 1일에야 다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그에게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터에 임하라는 백의종군'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제수받기 전까지 백의종군하며 움직인 동선動線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고 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데 4월 24일부터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도원수 권율이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된다.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다.
지난번에 공부했었죠.
참고로 백두대간 얘기 좀 더하죠.
백두대간을 하는 분들은 이 주지사 부근에 이르러 사면치기를 하느라 이 주지사 옆 영실靈室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영실이란 산꼭대기 주변 기도하기 좋은 굴을 이야기합니다.
곧 석실이죠.
이 주지사의 영실은 지리산의 묘향대, 영신대, 우번대, 촛대봉의 사자바위 등과 더불어 기도발이 잘 받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연재 영실의 명성 때문에 기도객을 위하여 주지사라는 절이 지어졌을 정도입니다.
한편 이 남원 부근은 고려말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했던 곳이었죠.
이 연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당시 이 연재에 있던 주막집 사건입니다.
즉 그 주막을 운영하던 여인네가 그 왜구들에게 가슴을 성추행 당하게 되었는데 쪽발이에게 당한 수모를 참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부엌칼로 그놈이 만진 자신의 가슴을 자르고는 자결을 하고 말았죠.
얼마 뒤인 1380년 5월 400~500척으로 대선단을 꾸린 왜구들이 진포(지금의 군산 부근)에 들어와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하삼도를 노략질하다가 나선과 최무선의 함포에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진포대첩)
이 중 살아남은 일부 왜구들이 옥천 ~ 상주 ~ 성주 등 내륙지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약탈과 방화를 하면서 고려군을 무찌르게 됩니다.
급기야 그 무리들이 함양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고려군은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북방에 있던 이성계를 삼도 도순찰사로 삼아 왜구 토벌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이 연재에 CP를 차리고 전투를 지휘하게 됩니다.
이때 참모들과 작전도 짜고 고남산에도 올라 산신령께 재계도 드리는데 어느날 밤 꿈에 웬 노파가 나타나 전략을 알려주게 됩니다.
이성계는 그 전략을 토대로 전투에 임했고 그래서는 황산대첩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1 설은 연재에 있던 그 주막의 여인네가 노파가 되어 나타나서 전투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여 이성계는 이 연재 부근에 있는 석벽에 한쪽 가슴을 가린 여인상을 새기게 하고(마애석상磨崖石像) 산신각을 하나 지어주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산신각을 여원女院이라고도 불렀고 따라서 이 고개를 女院峙라고도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노파가 곧 지리산신이라는 것이죠.
여원재에서 남원 방향 도로로 약 100m 정도 내려가면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원재마애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안내 푯말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자락 아래로 신작로 같은 너른 숲길이 이어진다. 산자락 아래가 이백면 양가리와 운봉읍 장교리를 잇는 ‘여원재 옛길’이고, 남원과 인월-함양을 잇던 조선시대 간선도로인 통영별로 ‘응령역-인월역’ 구간 길이다. 숲길을 잠시 내려서면 오른쪽 절벽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을 만난다. 이 마애불 오른쪽에는 1901년 운봉 현감 박귀진이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설화를 새긴 명문이 있다. 즉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노파(지리산 마고 할미)의 계시를 받아 왜구를 섬멸하였고, 이는 지리산신이 나타났던 것으로 여겨 불각佛閣을 짓고 모시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66쪽
한편 전남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 조은숙은 지리산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여원재가 있음을 찾아낸다. 즉 이태조가 왕이 되기 위하여 지리산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 바로 이 여원재이고 이 여원재에서 기도하는 숨은 이유는 이태조가 그러했듯이 자신들 즉 동학농민혁명의 주재자들도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었음을 은근히 암시했다는 것이다. 동학이 주창하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명제 아니던가. 임금도 하늘이고 양반이나 상민도 하늘이며, 종도 하늘이니 그 주인도 하늘이요,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도 하늘이라는 거 아니던가.
소설 속의 손화중은 여기서 지리산의 ‘마고 할미’를 끌어들인다. 모든 산의 신이 남자임에 반해 이 지리산만큼은 여신이 주재를 하고 있다는 데 착안했을 것이다. 곧 그 지리산의 산신이라는 엄청난 ‘빽’을 끌어들였으니 추종하는 세력들의 믿음도 그만큼 더 확고해졌을 것이다. 나아가 유교사회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던 여성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할 수 있게끔 저변을 확대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니 이 여원재 길은 동학혁명 당시 혁명군과 민보군이 함께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동학 얘기는 다음 구간에 나눠서 하자.
- 졸저 전게서 67쪽
이 정도로 정리를 하고 2구간의 츨발지인 서림공원으로 들어갑니다.
남쪽 방어대장군 뒤로 비석 여러 개가 줄지어 서있다. 운봉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군데로 모은 것이란다. 그중 제일 좌측에 있는 우측 상단이 깨진 비석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일목장군 ‘박봉양 장군비’라고 표기된 이 비석에 새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跡碑라고 새겨져 있다. 갑오년에 도적을 때려잡은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라는 말일 게다.
방어대장군女, 남쪽 과 진서대장군男 북쪽
1. 서림공원
둘레길 제2구간 안내 표지판을 지나자마자 서림공원이다. 이 공원은 서천리 선두숲으로 불렸었다. 서림공원에 들어서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석장승이 먼저 눈에 띈다. 운봉 전체를 지키는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 운봉사람들이 각별히 아끼는 석장승들이다. 이는 마을 입구나 사찰 입구에 서 있으면서 잡귀를 막기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 벽사신앙辟邪信仰의 한 유형이다. 이런 장승을 벽사장승辟邪長生이라 한다.
상원대장군
한편 둘레길 3구간 부근에 있는 실상사에 가면 이런 돌장승 세 기를 볼 수 있고,
제4구간이 지나는 벽송사에 가면 목장승 두 기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 공원의 두 장승을 순수한 벽사신앙이라고 본다면 실상사와 벽송사의 그것들은 사원장승이면서 토착 신앙과 불교 신앙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간' 70쪽
이곳에는 여러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운봉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군데로 모은 것입니다. 많이 마모가 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 중 제일 좌측에 있는 일목장군一目將軍'박봉양 장군비'라고 써진 '갑오토비사적비'라는 게 눈에 띕니다.
2. 방아치 전투
토비討匪라니!
그렇겠죠.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반란군이니 토비라고 한 거로군요.
더군다나 조선 정부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백성을 진압하던 팀이었으니....
A : 관암재 B : 부동촌 C : 방아재 D : 방아산성 E : 연재(여원치)
어쨌든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跡碑라고 하면 갑오농민혁명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는 1894. 11. 3. 운봉 → 영남으로 진출하려던 유복만, 남응삼의 혁명군이 요천이 뒤로 흐르는 남원 산동의 부동촌에 배수의 진을 친 다음 관암재에 진을 친 박봉양의 운봉 민보군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1. 14. 농민군이 방아치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되었던 바, 아마 이 사적비는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비석 같습니다.
1894년 11월 박봉양은 지방의 유생, 향리들을 주축으로 민보군을 편성하여 수성군과 함께 남원에서 경상도로 진출하려던 김개남, 최승우, 남응삼의 농민군에 대항할 준비를 한다. 당시 농민군은 요천이 뒤로 흐르는 남원 산동의 부동촌에 배수의 진을 친 다음 관암재에 진을 친 박봉양의 운봉 민보군과 맞서게 된다. 그러던 11. 14. 농민군이 백두대간 상의 방아치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되었고 이 사적비는 민보군이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비석이다.
이왕 갑오농민항쟁 얘기가 나왔으니 지리산과 관련해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이 지리산은 근대에 들어 집권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의 피난처가 된다. 부패한 관리들에 대항하는 농민항쟁은 지리산 남동쪽의 소읍 단성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불씨는 환곡還穀 문제였다. 즉 단성 현감 임병묵과 이서吏胥들의 폭정을 중앙정부와 대구 감영에서조차 모른 척하자 결국 단성농민항쟁이 터졌고 이는 1862년 진주농민항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덕산농민항쟁을 거쳐 드디어 영호남이 합쳐져 동학농민전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 졸저 전게서 71쪽
재미있는 것은 송기숙 같은 이는 소설 '녹두장군'을 통하여 혁명군 전봉준, 김개남 등이 주둔하고 있던 지리산 권역인 남원의 교룡산성이나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들여져 있는 백두대간 상의 여원재 등을 설화적 공간으로 상정하여 역성혁명을 이루려는 민중들의 정치적 지향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 매천 황현 같은 유학자들은 대부분 '강상綱常의 윤리倫理'를 부정하고 무력으로 관아를 점령하는 전봉준이나 김개남의 동학군을 붓으로 심판하는 입장을 취했지 않습니까.
특히 매천은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바탕한 역사서를 통하여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 기록이 바로 '오하기문梧下紀文'입니다.
매천 같은 이가.....
다른 이도 아닌 매천 같은 사람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시 유교 혹은 유학이라는 게 양반 층 혹은 일부 계층의 의식을 얼마나 뿌리 깊게 지배하고 있었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하긴 요즘도 '국모니 국부니' 하는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에 얽매어 있는 부류들도 있는 판이니.....
하지만 매천은 자신이 견문見聞한 질서 정연한 농민군의 모습을 보고는 노략질 부분, 살인 부분, 민폐 부분, 질서를 지키는 부분, 여성 해방을 부르짖은 신분 문제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을 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박맹수 논문, 지리산권 동학농민혁명의 실상과 동아시아적 의미
결국 이는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보는 이들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백두대간에서 조금 빠진 곳에 있는 산성.
바로 방아산성입니다.
그런데 모산성은 위치가 조금 다른 곳 아닌가요?
백제에서는 아막성이라 부르고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던 것인데 이 아막성은 복성이재 가기 전에 있는 성이죠.
뜻이야 지리산의 성모가 엄산→어미산→암악雌岳→아막阿莫이니 결국은 같은 뜻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지도에서 보듯 동학군이 주둔하고 있던 부동치에서 민보군은 관암재 즉 해발 750m 정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학군이 고도 500여m를 치고 올라가 민보군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위에서 돌만 굴려도 아니 그 돌을 피해서 능선까지 진입을 했다고 해도 이미 지친 상태의 그들을 제압하기란 ......
운봉고원이라는 지형적 난이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 방아치 전투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제13구간 악양을 지날 때 또 나오는 인물입니다.
바로 김개남이죠.
김개남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김개주의 실존인물입니다.
김개남은 전봉준 다음으로 남접의 지도자였으며 그와는 한날한시에 체포된 인물이죠.
김개남의 본명은 김기범이죠.
개벽은 남쪽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스스로 開南으로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소설 속의 김개주는 지리산 연곡사에 불공을 드리러 온 윤씨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게 되고 그 김환은 최참판 댁의 며느리인 별당아씨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시기적으로는 1897년부터 1908년까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줄거리 중 김개남과 관련 있는 부분만 봅니다.
때는 구한말인 1897년 무렵, 경상도 하동의 평사리에는 5대째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만석꾼 최 참판 댁을 중심으로 농민들인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최씨가의 유일한 혈육인 어린 서희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할머니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하녀 봉순이를 동무하며 자라고 있고, 머슴으로 들어온 구천이는 무언가 많은 고뇌와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
구천이는, 최 참판 댁의 정신적 지주인 윤씨 부인이 청상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훗날 동학당 접주가 되어 사형당하는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게 된 아들 '환'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동학당에 참가했던 환은 몸을 숨기기 위해 구천이란 가명으로 최 참판 댁에 찾아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이복형인 최치수의 부인 별당 아씨와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별당 아씨와 함께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고남산
3. 비전碑殿마을
성산과 고남산을 보면서 람천 제방길을 걸으면 ,
좌측으로 황산이 보이면서 정면으로는 멀리 임천지맥이 지나는 삼봉산의 전위봉인 투구봉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비각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이곳이 바로 비전마을입니다.
예전에 碑를 관리하는 집殿이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실 지리산을 유람하던 옛 선비들에게 이 비전마을은 하나의 성지순례지 같은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펼치던 청계도인 양대박(1543~1592)은 1586. 9. 3. 이곳을 지나면서 비전마을의 유래를 설명한다.
'느지막이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황산의 비전에서 잠시 쉬었다. 이 비석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칭송한 비다. 전殿은 비碑를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비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보다 25년 정도 지난 1611. 3. 29.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은 지리산 산행을 하고는 유두류산록을 남겼는데 그의 글에는 비전을 세우게 된 경위가 들어 있다.
'요천을 거슬러 올라 반암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1578년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이 전액篆額을 썼다.'
그러니 위와 같이 비전마을은 비전碑殿이 있어서 비전마을이지 비전碑前이어서 비전마을이 아니다.
- 졸저 전게서 81쪽
다산 정약용은 이 비문을 읽고서는 황산대첩으로 이미 이성계에게 천명이 내렸다고 하면서 '신무神武로써 승리를 거둔 것이지 인력人力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하였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비전마을도 거의 다 왔다. 좌측으로 어휘각이 보이고 그리고 연이어 황산대첩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도 보인다. 대첩교를 건너 먼저 어휘각을 본다. 이 어휘각은 태조 이성계가 1381년 황산대첩의 공이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닌 휘하 장수와 병사들의 공이라 하여 8원수 4종사의 명단을 바위에 새긴 후 그 위에 각을 세워 후손들에게 그 뜻을 기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뜻은 565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 탈 없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17일 새벽 저 잔인한 왜적은 이런 귀한 뜻이 새긴 바위의 글자를 정으로 쪼아 그 흔적을 없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 있던 황산대첩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각난 황산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는 각閣의 이름이 대첩비각大捷碑閣에서 파비각破碑閣이 되었고,
이런 연유로 어휘각의 바위는 지금 그 흔적만 볼 수 있게 됐다.
- 졸저 전게서 79쪽
일제는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난 뒤 '문록경장의 역'에서 완수하지 못한 과업을 완수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하죠.
여기서 문록文祿은 임진왜란을 말하고 경장慶長은 정유재란을 뜻합니다.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아시죠?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를 산맥으로 바꾸게 된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인 고토 분지로 말입니다.
1901년 겨울 이곳을 지나던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分次郞는 ‘조선기행록’에도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고토 분지로는 누구인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산줄기를 하는 산꾼들에게는 신경준이나 김정호 못지않은 유명한 인사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여기서 고토분지로를 등장시킨 이유는 그가 기존 우리나라의 산줄기 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즉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는 우리나라 지리교육의 근간을 완전히 바꾸게 된 근거를 제공했다. 애초 우리 민족은 백두대간 이하 1정간 13정맥이라는 산줄기와 그 주위를 에워싼 한강, 대동강, 낙동강 등의 물줄기들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며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백두대간이니 낙동정맥이니 하는 산줄기를 우리 산맥 체계로 알고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런 우리 민족의 산줄기 인식 체계를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통하여 지질학적 개념 가령 태백산맥이니 낭림산맥이니 하는 산맥 체계로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산줄기의 중심 백두대간은 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대륙의 관문인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최고봉이자 문수 신앙의 성지 지리산까지 간단없이 이어지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이다. 고토 분지로는 그 백두대간이라는 나라의 큰 산줄기를 다섯 조각으로 토막을 냈다. 그러면서 그것도 모자라 그 토막에서 백두산은 완전히 빼버렸다. 그러고는 그 토막에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 인식 개념인 산줄기를 한자화한 ’산맥山脈‘ 개념을 도용하여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 졸저 전게서 79쪽
고토는 아버지가 번사(燔師)였는데 그는 1880년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따라 국비로 독일 유학을 떠난다. 서양지질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1886년 동경제국대학의 지질학과 교수가 된다. 그는 그때부터 황무지였던 일본 지질학을 이끌게 된다.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오키나와(琉球) 제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대만 같은 곳으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물론 일본 정부가 겉으로 내세우는 것은 학술조사이지만 실제는 자원 침탈을 위한 지질조사였다.
이미 얘기했듯이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하자원, 토지자원, 산림자원, 수력자원 등을 약탈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질, 지형 등의 조사가 필요했다. 이미 일제는 고체 등 몇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제대로 공부를 한 일본인의 조사보고서가 필요했다. 고토는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 교수였다. 외국 탐사 경력도 충분했다. 동방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사상은 황국사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이도 한창때인40대 중반이다. 이런 고토보다 조선의 지질조사 작업에 안성맞춤인 사람은 절대 없었다.
음흉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민간기구 차원의 학술조사로 모양새를 갖췄다. 동방협회였다. 고토는 그렇게 동방협회의 지원도 받게 된다. 그는 1900년부터 2차에 걸쳐 조선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답사한다. 광산, 지질조사가 주목적이었다. 조선의 전반적인 정세도 정탐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그는 조선 북부지방을 조사할 때에는 간도지역의 개발 가능성까지도 조사하였다.
“그럼 지질조사를 어떻게 한 거야? 당시 조선 땅은 인프라infra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든 게 불편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온 사람인데 웬만한 불편은 감수했겠지. 조랑말 타고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으니 오죽했겠어. 탐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 중 하나가 이 ‘조선산맥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야. 거기에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 이름이 올라간 거고.”
“조선산맥론?”
“그래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
고토의 두 차례 지질조사
군산항으로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은 (주)조선목포영사관 군산분관 영사 주임 아사야마 겐죠(淺山顯藏)였다. 그는 조선인 길 안내원 2명을 소개하고 교통수단이 될 조랑말 44 필도 건네준다. 그러고는 그들을 조선인 복장으로 위장시킨다.
이렇게 6명이 약 70일 일정으로 제1차 조선반도 지질탐사대를 구성한다. 탐사책임자는 물론 동경대학 지질학과 제1회 졸업생이며 일본 지질학계의 태두(泰斗)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였다. 그의 손에는 1894년 발행된 미쯔하시(三橋僊史)의 ‘조선지명안내’ 책자와 일본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1:50,000지도가 들려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토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이중환의 택리지를 독파했다는 데 있다. ‘조선팔역지(朝鮮八域地)라고 일역(日譯)된 이 택리지를 읽고 고토는 조선의 인문지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뒤에 자세히 본다.
고토는 지질학자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독일인 고체(Gottsche)는 그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왔다. 물론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고서였다. 고토는 이 고체의 자료를 참고한다. 그는 주로 노두(露頭)를 근거로 지형, 지질일반, 암석학적 분석을 한다. 즉 절벽이나 경사면 등에 노출된 암반이나 돌을 보고 그 일대의 지질을 추정하는 방식이다.
고토의 작업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땅속으로 들어가 보거나 다른 어떤 기계를 가지고 정밀하게 측정을 해본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으로 1900년 8월에 시작한 조사 작업은 1901년 3월 1차 조사를 마치게 된다. 이 결과물을 가지고 고토는 일단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 간 그는 그것들을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라는 논문을 쓰고 이를 동방협회 회보에 올린다. 그러고는 같은 해 8월에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조선북부를 탐사를 한다. 그렇게 해서 1902년 발표한 논문이 ‘조선북부의 지세’이다.
즉 그는 1900년 8월 ~ 1901년 3월 그리고 1901년 8월 ~ 1902년 3월 두 차례 266일 동안 총6,300km를 다니면서 광물조사 를 하였다. 하루에 평균 23km 정도 걸었다는 얘기다. 당시의 도로 사정과 계절적 요인을 따져보면 상당히 어려운 환경조건이다. 아무리 40대 중반의 고토라도 고개나 강의 절개지 그리고 바닷가를 관찰하면서 걷기가 쉬웠을까?
필자 같은 산꾼도 매일 23km 걷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에 부친다. 고토는 그걸 다 감수하고 걸었다. 어찌 보면 그런 상황에서 얻은 자료는 얼마나 부실한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얻은 지질자료를 기초로 두 편의 논문을 정리한 것이 1903년 발표한 조선산맥론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다.
이 논문은 고토가 지질학자이면서 철저하게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침략의 앞잡이임을 보여준다. 즉 그는 역사학자 못지않은 조선의 고대사와 근대사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물론 그 지식은 황국사관의 입장에서 철저히 조작된 사실(史實)이다. 이런 것들이 그가 조선에 온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03쪽 이하
그의 글을 봅니다.
운봉읍내에서 4km 떨어진, 앞에서 언급한 풍극의 입구에 '비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일본으로 보아서는 운이 없었던 전장이었다. 왜냐하면 군기가 빠져 동요마저 일으키던 조선군이 압도적인 적을 두 번이나 물리쳤기 때문이다.
사당이 셋 있는데 팽나무숲에 의해 그늘이 져있다. 한 곳에는 1594년 일본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는 비명이 들어 있고, 이는 화강암에 새겨졌다. 두 번째는 일본 남부의 극악무도한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 장군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는 훌륭한 사당이다. 그 후 이 장군은 힘을 길러 고려의 마지막 왕을 폐하고 현재 왕조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세 번째 사당이 가장 크지만 나는 그 안의 있는 내용물의 특성을 알 수 없었다.
- 코토 분지로 저 '조선기행록' 손일 옮김 푸른길 간 115쪽
4. 동편제
비전을 지나 마을로 들어설라치면 판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과 송만갑의 출생지가 바로 이곳 비전마을의 첫 번째 집인 것이다. 송흥록의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고 열린 문으로 들어서면 깨끗하게 정돈된 몇 채의 초가가 판소리에 문외한인 이들을 친숙하게 맞아준다. 근처 황산 기슭에 ‘국악의 성지’가 있으니 이 일대가 다 동편제의 메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운봉은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을이며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문화재였던 명창 박초월의 고향이기도 하다. 박초월이 살았던 집 역시 위 송흥록의 집과 함께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이밖에 운봉은 남원이나 구례 등과 접해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명창들은 서로 오가면서 공부도 하고 친하게 지냈을 것이다. 이렇듯 운봉은 국악인들의 고향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속의 고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남원과 지리산 일대가 판소리의 본고장이 되었을까?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있지 않았을까? 뒤에 15-A 구간에서 칠불사를 들를 때 거문고 얘기와 함께 다시 들어볼 것이다.
- 졸저 전게서 82쪽
5. 황산 가는 길
저 황산과 우측의 지리산 서부능선이 내려오는 그 사이의 맞닿은 듯한 좁은 곳으로 우측의 이 람천이 흘러간다. 그러니 함양 땅에 들어온 왜구들이 남원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저 병목 같은 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그걸 노렸다.
운봉지雲峰誌를 볼까?
신우辛禑때 왜구가 함양을 도륙하고 다시 남원산성을 공격했다. 왜구는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른 후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나라의 안팎이 크게 진동하자 태조가 변안렬과 함께 남원에 이르렀다. 아침에 사람들을 경계시킨 뒤 동쪽으로 운봉을 넘어가니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 밖에 되지 않았다. 황산의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에 올랐는데 길 오른편 험한 지름길이 있었다. 험한 길로 들어서자 왜구의 기예부대가 갑자기 뛰어나왔다. 태조가 50여 발의 화살을 쏘아 그들의 얼굴을 맞히자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거꾸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구가 산에 근거해 방어를 굳건하게 했는데 태조가 군사들을 지휘해서 요해처를 분담하고 다시 소라를 불어 병사를 정돈한 후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태조가 즉시 여덟 명을 죽이자 왜구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기발도라는 적장을 태조가 그의 용기와 기예를 아깝게 여겨 생포하려 하였으나 이두란이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아기발도가 구리 가면과 철갑을 입고 있어 화살을 쏘아도 들어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화살을 쏘아 그의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두란이 뒤이어 화살을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왜구의 기가 꺾였다. 마침내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온통 붉은빛이었다.. 처음에는 왜구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았지만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가 성모상과 가섭석상을 벤 뒤에 떠났다.
하여간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나라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왜구들은 화개재에 올라 백두대간 길을 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사로 들어간다.
영신사는 영신봉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던 암자였다. 그 암자 바로 뒤에 가섭존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걸 해하였다는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유두류록과 김일손(1464 ~ 1498)의 '두류기행록'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졸저 전게서 77쪽
지도를 보면 정봉이 나오는데 바로 정산봉을 얘기하는 거 겠고....
그리고 명석재도 나오죠?
명석재鳴石岾는 백두대간에서 이 황산으로 오는 길에 지나는 고개입니다.
황산전투가 벌어지기 전 왜구들이 인월에 침입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할 때 이 인근의 돌들이 적개심에 울면서 이 명석재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왜구와 싸울 때 일익을 담당하려고 싸움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나서기도 전에 이성계가 전투를 다 끝내버려 그 아쉬움에 울음을 터뜨린 이 고개를 울독치라 불렀고 이를 한자화하여 명석재 혹은 명석치로 불렀다고 합니다.
바로 앞봉이 정봉.
한편 여기서 신우辛禑는 조선의 사가史家들이 고려 우왕을 폄하하는 표현으로 노국공주가 신돈辛敦과의 사이에서 우왕을 낳았다는 취지에서 신우라고 부른 것입니다.
한편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는 북방으로 쳐들어오는 홍건적, 나하추 등을 격퇴하는 동북면의 장수일 뿐 고려 남방의 백성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던 인물이었는데 바로 이 황산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중앙무대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성계 부대는 여진족, 몽골족 등이 혼합된 다민족 혼성부대여서 기마와 활에 강한 부대였습니다.
당연히 이성계에게는 여진족 출신의 의형제 이지란(이두란이라고도 함)이 있었고 이 이지란은 명궁이어서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훗날 조선으로 귀화를 하게 됩니다.
황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국악의 전당'
좌측으로 이동을 하여 저 계단을 오릅니다.
국악의 전당 마지막 건물 좌측의 토굴은 득음굴이라 하여 소리를 하는 곳입니다.
이정표를 따라,
좀 가파른 길을 20여 분 오릅니다.
고남산을 조망하고....
그러고는 황산에 오릅니다..
황산에 오르면 좌측으로 요천지맥의 흐름이 보이며 우측으로 함양의 대봉산과 천황봉이 보이며
임천지맥의 주봉인 연비산843.1m과 중앙의 오봉산878.5m이 보이며 지맥은 그 우측으로 조경남의 팔량재로 이어집니다.
팔량재 중앙에 멀리 남강지맥의 황매산이 보이고....
팔량재 우측으로 지맥은 투구봉1032.5m으로 올라 삼봉산1186.7m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 가운데 백운산904.1m 이나 그 우측의 창암산924.9m이 지리 동부능선의 하봉이나 중봉 그리고 천왕봉에 눌려 아주 낮게만 보입니다.
남쪽으로는 덕두산과 그 우측의 바래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바로 앞줄이 백두대간의 매봉을 읽고 뒷줄 중앙의 백운산과 서래봉이 읽혀지고 그 우측으로 빼빼재까지 조망 가능합니다.
하산길입니다.
제가 있을 경우 좌측 군화동으로 진행도 가능한데 길눈이 어두우신 분들은 오던 길을 그대로 내려가시는 게 낫습니다.
군화동 루트는 앞사람 꼬리를 못 잡을 경우 알바하기 십상입니다.
군화동 길은 조망 하나만큼은 끝내줍니다.
백두대간의 수정봉과 연재가 다 보이고 고남산으로 이어진 대간길의 방아치나 방아산성도 다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방금 지나온 비전마을과 동편재 마을도 조망 가능합니다..
6. 법계도비法界圖碑
군화동을 지나 구도로를 따라 걸으면 화수교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두 기의 탑이 보인다. 좌측 비에는 원명당 종범대선사부도탑이라고 적혀 있고 우측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이라고 적혀 있는데 우측 비에는 자잘한 글씨로 복잡하게 뭔가가 적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칠불'부터 계승되어온 법통을 써 놓은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불가의 족보인 것 같다. 기독교로 얘기하면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인가? 제1불인 비바시불부터 7조인 석가모니불까지 적혀 있고 그다음이 전법원류傳法源流 제1조 마하가섭을 시작으로 아난존자, 제27조 반야다라까지가 서천조사 즉 인도사람이고 제28조가 보리 달마를 시작으로 제33조 혜능을 거쳐 제56조 청공까지는 중화조사로 중국사람 그리고 우리나라는 제57조 태고 보우를 시작으로 제61조 지엄, 제63조 휴정, 그러고는 제78조가 바로 이 원명 종범 스님으로 적혀있다. 그런데 파派에 따라 제78조를 향곡 혜림, 제79조는 진제 법원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불조정맥佛祖正脈를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법계도法系圖가 된다.
- 졸저 전게서 84쪽
7. 피바위血巖
위에서 언급한 유몽인을 통하여 황산대첩의 또 다른 얘기를 들어볼까?
지난 고려 말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 땅에 '황산黃山'이라는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샛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황산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켜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대적하여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다.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지난 정유1597년 왜란 때, 양원 등이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다.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가 피를 흘렸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라고 하였다. 아! 이곳은 태조대왕께서 위대한 공을 세우신 곳이니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할 때 신이 알려주신 것인가 보다.
그리고 위 유몽인의 글에서 우린 뚜렷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피바위’에 대한 얘기다. 즉 피바위와 관련한 안내 글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황산전투 시 아군이 수많은 왜구들을 죽이게 되어 그 피가 람천을 차고 넘쳤으며 이때 이 피가 바위에 물들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이 바위를 ‘혈암血巖’ 또는 ‘피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 유몽인의 글을 보면 피바위는 황산전투가 있은 지 약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과 관련된 현상이라는 거 아닌가? 괜스레 황산대첩의 이성계와 피바위를 연결시킨 모양새이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이 피바위가 붉은색을 띠는 것은 이 바위에 철분이 많아서 생긴 현상이란다.
- 졸저 전게서 83쪽
하긴 어느 글을 보면 이곳이 '황산벌 싸움'이었다는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곳은 황산黃山이죠.
하긴 유몽인도 荒山을 黃山으로 표기하는 우를 범하긴 했습니다.
어쨌든 잘못하면 이성계 = 계백장군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또 사실은 이 바위에 철분이 많아서 생긴 현상이라는 것인데....
유몽인에게 한 표를 던집니다.
8. 팔량재
너른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간벌과 벌목 작업 현장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럴 즈음 좌측으로 드디어 인월면 면소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운봉을 지나 인월로 들어선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은 1380년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와 싸울 때 날이 어두워지자 달月을 끌어들여引 밝힌 다음 그 기운으로 승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는 것이 그보다 약 440여 년 전인 940년 그러니까 고려 태조 때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역驛을 설치하면서 남원부 운봉현 인월역印月驛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이성계가 달을 끌어 전쟁에 이용했다는 설"은 역시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인용한 것으로 믿을 바 못 된다. 한편 지금의 인월면은 1998년까지만 해도 남원군 동면 인월리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 졸저 전게서 85쪽
산모퉁이를 돌아드니 우측 아래로 흥부자연휴양림이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멀리 임천지맥의 흐름이 보인다. 우측 투구봉으로 오르는 능선 바로 좌측의 고개가 바로 팔량재(치)다. 그 고개를 넘으면 함양군 함양읍이니 저 팔량재가 곧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되는 셈이다. 저 팔량재가 왜 중요할까? 저 팔량재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곳이다. 곧 백제로서는 아막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성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최소한 3차에 걸친 대공방전이 있었다고 하니 저 팔량재는 백제는 신라를, 신라는 백제를 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니 팔량재는 지난 구간 살펴본 여원치(재)와 더불어 신라와 백제의 국경 전쟁으로 그 사이에 있는 운봉은 잠시도 숨고를 틈이 없었을 것 같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영호남이 이보다 잘 융합한 곳이 없다는 얘기와 같다. 함양 땅인 옛 천령군에 속했던 운봉이 남원군 소속으로 관할이 바뀐 게 갑오경장 후인 1896년이니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팔량재가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왜구가 등장한다. 진포대첩에서 패배한 잔류군이 김천, 상주를 거쳐 팔량재를 넘었고,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로 들어온 왜구는 남원성을 치기 위하여 이 팔량재를 넘어야 했다.
* 지리산으로 인해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통로는 3개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통로는 왜구들의 루트와도 일치한다. 북쪽부터 보자면 함양의 황석산성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으며 중간은 저 팔량재가 그리고 지리산 남부로는 구례의 석주관 등이다. 석주관 얘기는 뒤에 제17구간인 가탄 ~ 오미 구간을 지나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연전연승을 거두던 왜구들에게 나라의 정규군들은 다 도망을 가게 되자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장정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의병에 가담하여 싸움터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때 주천면 은송리(내송마을)의 젊은 유생 조경남 장군은 백전백승의 명의병장이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에서 의병이 일어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육지에서는 남명의 제자 곽재우, 정인홍, 조경남 등의 의병이 강우지역 가령 황석산성, 팔량재, 석주관 등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려는 왜구의 육군을 차단하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해상을 장악함으로써 호남의 곡창지대를 보호할 수 있었고 이는 이곳이 왜군의 병참기지화를 막는 결과가 된 것이다.
산청, 함양, 곡성, 구례, 순창 할 것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로 왜적들을 무찌르고 다녔다. 때마침 조장군은 전라도 출신 8명의 장사와 어울려 이곳 고개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들은 힘을 합해 팔량재에 성을 쌓아 왜적과 대항하여 크게 이겼다. 이와 같이 8명의 어진 장사가 이 고개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다는 유래로 그 후 고개 이름을 ‘八良岾팔량재’라 일컫게 되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못지않은 위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특히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 활동이 다수 나오는데 위 곽재우가 남명 조식의 외손주 사위이고 내암 정인홍, 김성일과도 연결이 되니 다 경의敬義를 중시한 남명학파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 졸저 전게서 86쪽
8. 지리태극종주
이곳 월평마을에서 잠깐 우측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자. 100여 m 정도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舊인월이다. 마을 입구에는 구인월마을회관이자 경로당이 깨끗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이른바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이라 불리는 곳인데 제4부에서 자세히 본다.
- 졸저 전게서 89쪽
나라의 산 지리산을 걷는다는 것! 갖가지 치사致辭는 접어두더라도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고 멋진 일이다. 백두산을 떠난 산줄기가 그 긴 여정을 끝내고 지리로 들어와 고단한 몸을 누인 모습. 어느 방향에서 보건 아주 편안하게 보인다. 서쪽 반야봉에서 발을 편안하게 펴고 머리는 천왕봉에 둔 모습이니 어련하겠는가. 그렇게 서쪽 노고단이나 반야봉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천왕봉까지 이어짐을 볼 수 있다.
지리의 북쪽 삼봉산에서 봐도 그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북쪽이라면 오히려 멀리 남덕유산에서 보는 게 나을 것도 같다. 남쪽은 호남정맥의 끝 도솔봉이나 백운산 정도에서 보면 그 모습이 더욱 확연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동쪽은? 웅석봉 정도에서 볼까?
그런데 웅석봉 부근에서 주릉을 바라보면 천왕봉에 가려 제대로 보이는 게 없고 다만 우측으로 바래봉이니 덕두산이 휘어져 돌출된 모습으로 보인다. 지리 서부의 끝 반야봉에서 바래봉이나 덕두산을 볼 때, 반대로 지리 동쪽의 끝 천왕봉에서 웅석봉 연봉을 바라볼 때 그 모습들은 신기하게 서부의 끝은 북쪽으로, 동쪽의 한 끝은 남쪽으로 휘어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꾼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지도는 이런 상상을 부채질한다. 지도를 놓고 마루금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일은 꾼들의 일상사이기도 하다. 그런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지리동서남북종주 코스가 만들어졌다. 발걸음 빠른 꾼들은 구간을 나누어 종주하다 보니 일시종주라는 유혹에 빠지게 됐고 또 그것을 해냈다. 이른바 'extreme'이라는 단어가 자극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리남북종주’와 ‘지리동서종주’였다.
그런데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꾼들은 ‘지리동서종주’ 마루금을 그리면서 묘한 모양을 발견하게 된다. 성삼재에서 바래봉 방향으로 끝이 휘어져 올라간 모양이나 천왕봉에서 하봉 쪽으로 휘어 올라가던 마루금이 밤머리재에서 다시 휘어 꺾어지는 모양이 흡사 태극문양 같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서부능선+주릉+동부능선’에서 동부능선의 끝에 조금 변형을 주어 웅석봉에서 성심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어천마을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게 원시原始 지리태극종주 코스인 것이고 이때가 1990년대 말이었다.
그런데 지도를 놓고 마루금을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동쪽 부분이 덜 휘어져 태극이라는 문양에 부족한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성심원 방향을 어천 방향으로 유도하긴 했건만 의도적으로 ‘태극종주코스’를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지리의 서부와 동부를 잇는 기존 코스만 생각한 결과였고 한계였던 것이다. 장거리 산행 클럽인 'J3 클럽'의 방장 배병만은 여기에 주목했다. 그러고는 기존에 있던 틀은 무시하고 지리가 가지고 있는 봉우리를 놓고 제대로 된 태극 문양을 긋는다. 그러다 보니 지리의 동부 쪽이 대폭 수정된다. 기존의 웅석봉 ~ 어천 방향이 웅석봉 삼거리에서 바로 직진을 하여 수양산 방향으로 그 끝을 튼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완성된 해가 2001년이었다. 이것이 요즘 장거리 산꾼들에게 '고수高手로의 관문關門(?)'의 필수 코스인 '지리태극종주' 코스 즉 '지태智太'이다. 구인월~덕두산~바래봉에서 성삼재를 잇는 ‘서부(북)능선+지리 주릉+동부 능선’의 동부능선 중 웅석봉+ 마근담봉+수양산을 첨가하여 도상거리 약 90.5km로 지리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 지리산의 경계를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리태극능선 종주코스를 확정하여 산행을 즐기는데 문제가 생겼다. 즉 이 태극종주 코스의 서쪽 끝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는데 동쪽 끝은 좀 어수선해진 것이다. 무슨 문제일까? 좀 살펴볼까? 확인해보면 배병만은 기존의 웅석봉~어천마을 코스를 수정하여 웅석봉~수양산~시무산으로 가는 루트①을 택했는데(다른 루트와 구별하기 위해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수양태극종주Ⓑ’라 함) 최근 이 '지리태극종주' 코스에 아종亞種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즉 마근담봉에서 이방산으로 진행하는 코스 즉②이방태극종주 코스가 생겼고, 또 석대산으로 진행하여 망대산이 있는 남강으로 가는 루트인 소위 ③남강태극종주Ⓒ 코스도 생겼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덕천지맥의 끝을 수정하여 진양호로 가는 루트인 ④진양태극종주Ⓐ도 생겼으니 동쪽 끝만 4개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태극종주루트가 지리의 동부 경계를 확정시키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①②는 덕천강, ③은 남강과 덕천강의 합수점 부근, ④는 남강에서 각 끝나게 되니 이는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산경표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도 되겠다. 주의하여야 할 것은 위 4대 '태극종주'에 대한 얘기는 지리의 동부만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좋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산 이름이나 능선 그리고 산줄기 이름들은 고유명사이므로 한 번 굳어지면 이걸 고치기도 상당히 힘이 든다. 그리고 '다양성‘이란 사상이나 생각의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굳이 이런 사실적인 것까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세분시킨다면 이는 다양성보다는 ’난잡‘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지리태극종주 코스는 배병만이 이 개념을 제안한 뒤 산꾼 대부분이 이를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하여 지금은 '지태'하면 '구인월~웅석봉~수양산~사리마을'로 굳어졌다. 여기에 태극모양도 아닌 다른 코스를 굳이 ‘태극’이라는 이름을 빌려 코스를 돌린다면 그것들에 대한 아종亞種이 또 여러 개 생길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그 혼란스러움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산꾼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즉 산꾼들에게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인한 폐해가 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리태극종주 코스하면 현재 모든 산꾼들이 동의하여 진행하듯 순수하게 ‘웅석봉 ~ 수양산 ~ 사리마을’을 잇는 코스로 한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것이 후에 지리태극종주를 토대로 통계자료를 만드는 일이 생길 때 꾼들의 자료 하나하나가 귀중한 자료가 되어 수록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 졸저 전게서 5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