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1
이번 6구간은 산청읍을 지나게 되는 만큼 주변 인물들과 사적지를 찾아보며 지나가는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고는 산청읍을 나오면서 지리산 동부능선의 맹주이자 덕천지맥의 중심인 웅석봉1099.9m을 바라보면서 걷게 되니 이제야 비로소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에 있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 지리산 때문에 호남평야라는 곡창지대가 왜놈들로부터 보호되어 나라가 망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게 됐다는 지형학적인 측면에서 이 지리산을 관찰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민초들이 있었으며 경의사상으로 무장이 된 의병들이 있었고 그 배후에는 남명 조식이 있었으니 이런 걸 느끼면서 걷는 게 지리산 둘레길의 참맛일 겁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5구간의 끝이자 6구간의 시작인 수철리 마을회관 앞입니다.
수철리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지난 번 자세히 들여다 봤죠.
'물'의 고대어는 '믇' 혹은 '묻'이었으며 따라서 물 옆의 골짜기나 마을의 경우 '뭀울' 혹은 '뭇막' 이라 하였다. ‘뭇+울>무싀울>무시울’, ‘뭇+막>무수막>무쇠막’ 등으로 변하여 오늘날에도 무싀울, 무시울, 무쇠막 등의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잠작하다시피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무水+쇠鐵=수철리水鐵里가 된 것에 불과하다. 지리산 자락의 두 군데 이외에도 '수철리'라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데 모두 하천가에 있는 마을이다. 비슷한 예로 필자의 고향이기도 한 서울의 한강 가에 있는 금호동金湖洞도 원래 이름이 '무수막'이었고 도봉동의 한 골짜기 마을도 무시울이었다. 물의 마을이란 뜻으로 물막>무수막>무쇠막 이라 불리다가 훗날 사람들이 무쇠솥 운운하며 말을 지어내어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쇠 ‘금金’을 따와서 금호동이라 한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제철산업은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해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 제철산업이 항구 도시에서 발달하듯이 그 당시에도 대부분 큰 강가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외국에 반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철저하게 금지시킬 정도였다. 국가 권력과 지원이 미치지 않는 지리산 골짝 마을에서 제철製鐵을 할 수도 없었으며 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수철리'는 무쇠 솥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쇠막이라는 옛 지명대로 '물 옆에 있는 마을'정도의 뜻이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섬강 주변 마을 이름인 '문막'도 동일한 어원에 속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56쪽
'철鐵'자가 들어갔다고 하여 제련소니 무쇠 솥이니 하는 쪽에서 그 어원을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 수철리에서는 확실하게 필봉산과 왕산이 조망됩니다.
가운데 깊게 파인 곳.
쌍재입니다.
언덕을 내려가니 지막마을로 들어섭니다.
우측으로 오르면 소위 지막계곡으로 여름에는 발디딜 틈조차 없는 이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한 유원지입니다.
향양천 계곡을 따라 야영장까지 조성되어 있으니.....
지막2교를 지나 지막교에서 직진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걸음을 멈추기로 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이라 했습니다.
동래성을 격파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문경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을 하다 한 무리는 호남평야를 병참기지화 할 목적으로 금산을 거쳐 전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황진이 웅치(熊峙 곰티재, 호남정맥 제1구간)와 이치(梨峙 금남정맥 배티재의 한자어)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이들의 남진을 저지하였죠.
또 남해를 지나 서해로 돌아 전라도와 경기도를 공격하려 했던 왜군의 해군은 이순신 장군에 막혀 작전에 차질을 빚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리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려는데 지리산이 버티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하동을 거쳐 진주로 통하여 구례로 혹은 함양을 통해 남원으로 진격을 하려하였으나 함양은 팔량치에서 남원의 의병 조경남이, 진주나 의령 쪽은 의병 곽재우 등이 왜군을 격파하는데 앞장섰었죠.
바로 이 의병들의 모태가 된 사람이 바로 강우학파의 비조 남명 조식이 있었습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는 동갑으로 퇴계는 강좌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남명은 출사를 고사하고 오로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은 강우학파의 비조로 '경의사상'이 그의 모든 것을 얘기해주죠.
즉 책상머리에 앉아 글만 읽는 것이 아닌 ‘경의(敬義)’를 몸으로 실천하여 학문과 덕행을 쌓으라는 것이죠. 그러니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절제된 가치관으로,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고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실천궁행(實踐躬行: 실제로 몸소 이행)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학풍 즉 남명학파가 결성되게 되어습니다.
이러한 학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가하여 학문의 실천을 몸소 보여준 학인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란이 터질 것을 미리 감지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글만이 아닌 무를 겸비할 수 있도록 '경의사상'을 가르쳤던 남명 조식은 환갑이 되던해인 1561년 지리산 아랫자락 덕산 산천재에 자리를 잡고 후학을 양성합니다.
그런 남명에게 특히 애제자라는 칭호가 붙는 5명의 제자를 남명오현南冥五賢이라 부릅니다.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 1620) 등이 그들인데 이중 덕계는 산청의 이 지막 사람으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독학을 한 소위 자기주도 학습법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책도 구할 수 없어 몇 권이 안 되는 책을 수 천 번 읽어 혼자서 그 뜻을 깨우쳤다 하고 30이 넘은 나이에 남명 제자로 들어걸 때는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던 터라 남명도 늘 그를 "오선생'이라 부르며 대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급제를 하여 43세에 출사를 하게 되자 덕계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한 64세의 남명 선생은 지리산 산천재에서 송별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 밤머리재로 향하는 43세의 덕계를 십리 밖까지 배웅하며 덕교에 있던 나무 그늘에서 술자리를 다시 베풀었는데 이때 덕계는 말 위에서 내려오다 떨어져 이마를 찧었다고 합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송객정(送客亭)이라 하고 마을을 면상촌(面傷村)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제지간의 정겨운 풍경을 떠올려지는 대목입니다.
북천(北川)을 건너 십리를 간 뒤 송객정(送客亭)에서 쉬었다. 옛날 노선생[남명(南冥) 조식(曺植)을 가리킨다.]이 덕계(德溪 : 오건(吳健))를 보낼 때에 반드시 멀리 이 정자까지 같이 왔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도 늙은 나무가 정정하고 위에는 낙마파(落馬坡)와 면상촌(面傷村)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덕계가 선생께 하직하고 물러나와 동문의 여러 선비들과 실컷 마시고 헤어져서 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져 얼굴을 다쳤는데, 이 때문에 땅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 1877년 허유의 두류록 중
덕계 오건은 제자들의 명단을 적은 ‘덕천사우연원록’에 가정 먼저 나오며 1572년 남명 장례식에 덕계는 제자 대표로 동쪽에 먼저 서고 수우당 등이 차례대로 섰다고 합니다. 덕계는 남명 생존 시 가장 먼저 이름을 떨치면서 후학을 양성한 사람으로 남명 문인의 좌장 격인 인물로 처사로 일관한 이가 수우당이고, 의병장으로 실천가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그리고 스승의 뜻을 언제나 놓지않고 의리로 일관한 이가 내암 정인홍이라면 학행일치의 삶을 살아온 이는 바로 이 덕계 오건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덕계 오건의 고장이 바로 이 지막마을인데 덕계로 인해 춘래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졌고 臺에 춘래대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덕계선생장구지소德溪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도 그로 인해 새겨진 것입니다.
춘래春來란 덕계가 스승인 남명을 만나면 '봄과 같이 따스함을 느껴 스승이 오는 것이 마치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거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곳을 선유동이라 불렀으며, 오건선생이 자연동천紫煙洞天 즉,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선계仙界라 덧붙였지만, 지금은 계곡 가까이 석축을 쌓아 민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옛 정취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춘래대 암벽 위에 있는 춘래정이라도 멋지게 바람을 맞고 서 있었더라면 눈을 감은 채, 옛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으련만 완전 폐기로 방치되어 있으니 안카깝기만 하군요.
왕산에서 쌍재로 내려오는 줄기 모습.
그러고는 고동재와 산불감시탑이 있었던 641.4봉 그리고 쌍재 전경입니다.
도로를 따라 지막마을 표지석이 있는 입구로 나옵니다.
밤머리재로 오르는 길이기 때문이죠.
둘레길 개통 당시의 루트는 지막 마을 표지석 맞은편 길을 따라 신촌교를 지나 평촌마을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공사가 한창이어서 이렇게 우회도로로 진행을 했었는데....
지도 #2
좌측으로 보니 중앙으로 용두봉342.2m이 조망되고 그 우측으로는 와룡산416.7m과 상여봉508.9m입니다.
와룡산은 상여봉에 묻혀서 그 윤곽만 볼 수 있군요.
웅석봉 올라가는 길.
좌측 대장1교에서 건너온 길은 우틀하면 기산612.9m으로 올라 웅석봉으로 오르게 됩니다.
대전 · 통영 고속도로의 차량의 질주하는 소리가 더 시끄러워지고....
고속도로 뒤로 산청의 진산 꽃봉산237.5m이 손짓하고, 그 꽃봉산 뒤로 둔철산823.4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청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입니다.
대장교를 건너면,
금서천이,
경호강에 합류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껏 엄천(임천)으로 주행을 하던 물줄기도 남강을 만난 다음 산청으로 들어오게 되면 잠시 경호강으로 그 이름을 바꿉니다.
예전 중국을 그렇게도 숭상(?)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조상들 덕입니다.
하동의 악양이 중국 호남성의 그곳을 빼다 박았다고 억지로 치부를 하였다면, 이 산청은 중국 절강성 소흥현의 산음과 비견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남강이 산청에 들어오면 경호강이 된다
이 산청의 예전 이름은 산음이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경덕왕( ? ~ 765)은 지품천현이었던 이 산청을 산음으로 바꿨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리다가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소흥시紹興市)의 빼어난 산수와 비견比肩된다고 하여 거기서 따온 이름이란다. 그래서 중국 산음에 경호강이 있으니 이 남강도 산청으로 들어서면 특히 경호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단성의 끄트머리까지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 경호강의 본 이름은 남강이다. 이 남강이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지리산의 동쪽 영역을 한정한다는 것이다. 즉 남강을 만나면서 지리산의 모든 맥들은 다 끝나게 된다. 그러니 덕천지맥이나 지리태극종주, 남강태극종주, 하다못해 진양태극종주는 물론 지리동부능선까지도 모두 그 맥의 끝은 이 남강까지 인 것이다. 남강과 지리산과의 관계는 이것만 이해해도 된다.
- 졸저 전게서 159쪽
그런데 정말 산청은 장난이 아닙니다.
지리산 북서쪽에서 흘러온 이 물 뒤로 용두봉과 444.6봉 그리고 그 우측으로 와룡산과 상여봉이 에워싸고 있고,
경호1교 뒤의 옥산의 옛 환아정 자리는 주위 풍광과 어우러져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시가 저절로 나올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음풍농월이라는 말이 고대로 어울리는 곳입니다.
저 꽃봉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강과 둘러보는 지리산이나 둔철산 그리고 와룡산의 맛은 또 어떨까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될 것 같지 않으니 올라가봐야겠습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웅석봉을 보고,
좌측으로 환아정이 있던 산청초교와 그 뒤의 용두봉을 봅니다.
경호1교를 건너면서 좌측을 보면 경호교 앞 우측으로 산청초등학교가 보이는데 그 초교 본관 자리에 예전에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누각으로 알려진 큰 정자였다. ‘환아換鵝’ 하니까 중국 산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왕희지(307~365)가 떠오른다. 환아정과 관련한 얘기를 들어볼까?
환아정이라는 정자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산청지에는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가(경호강)에 임해 굽어보고 있다. 현감 심린이 건립할 때 당시 저명한 선비였던 화산(花山) 권반權攀(1419∼1472)이 우군 왕희지의 고사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우암 송시열과 백헌 이경석의 기문이 있다.”고 적었다.
권반이 ‘백아환자白鵝換字’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1950년 3월 1일 01:00 원인 불상의 화재로 또 소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는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고는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 정유재란 뒤 복원한 환아정을 본 김회석(1856~1934)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그렸는데 이런 환아정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남주헌(1769~1821)은 함양군수 재직 중이던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산행 도중 산음에 들러서는 이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이렇게 그렸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필자 주 왕희지)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둘러보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山鏡水繞空臺 계산경수요공대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춘년상사회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왔네
그러면서,
籠鵝已去沙鷗至 농아이거사구지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난봉동객래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그런데 그 경호강과 어우러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회계산이 어디인가?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나와 있는 이 회계산이 현대 지도에는 위치가 불분명하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고 하고,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럴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산청군 하수 종말 처리장 옆에 있는 231.7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정도의 조망의 봉우리에 그 수려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까?
- 졸저 전게서 159쪽 이하
그리고 좌측 기산.
기산 줄기 뒤로 웅석봉 줄기.
웅석봉1099.9m.
꽃봉산을 보고......
웅석봉이 있는 덕천지맥 줄기.............
꽃봉산 오르는 길 옆에 있는 비석.
오랜만에 보는 문구입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유신헌법의 잔재.
그 경력이 있던 분위 비석이군요.
강재범이라는 분인데 그분이 이 내리교 가설을 할 때 도움을 주셨군요.
불망비입니다.
그 옆으로는 정자도 있고......
내리교를 건넙니다.
고속도로 좌측의 기산과 우측의 문필봉.
내리교 다리를 건너면 길은 두 갈레로 갈립니다.
A코스 내리교 ~ 지성(1.1km) ~ 지곡사지(1.7km) ~ 선녀탕(1km) ~ 바람재(2.6km) ~ 성심원(1.9km)의 8.3km 구간과
B코스 내리교 ~ 내리한밭(1.6km) ~ 바람재(2.6km) ~ 성심원(1.9km)의 6.1km의 구간이 그것입니다.
A코스는 산으로 올라 선녀탕을 경유하는 코스인 반면 B코스는 경호강을 따라 거의 천변을 걷는 코스입니다.
우리는 B코스로 진행할 것이니 일단 A코스로 가봅니다.
산청 한방리조트를 지나고,
천변을 따라 걷습니다.
아침 바람이 아주 시원합니다.
저 통영 ~ 대전 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지나 작은 봉우리 뒤로 거슬러 올라가겠죠.
중앙으로 천왕봉에서 출발한 덕천지맥이 밤머리재를 넘어 좌측으로 진행하고, 우측으로는 기산 줄기 하나를 내어놓는 모습이 확연하게 들어옵니다.
화살표 부분이 밤머리재에서 올라온 봉우리가 우틀한 안부입니다.
우측으로는 기산.
그리고 필봉산.
이제는 필봉산 좌측으로 왕산도 보이는군요.
지곡1교를 건너면서,
06:32
그러고는 바람재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선녀탕 쪽으로 진행했다면 여기서 만났겠죠.
지도 #3
직진합니다.
우측 중앙에 울석봉 전위봉이 보이고.....
죽어라고 짖어대는 민가 두어 곳을 지나,
맑은 계류를 건너자마자 좌틀하여,
과수원을 따라 걸으면,
산청 축산물 폐기처리장이 나옵니다.
좌측으로 정곡리에서 정곡천이 흘러나와 남강에 합류되는 모습을 봅니다.
중앙 우측 뾰족한 봉이 정수산829.8m에서 내려온 240.8봉.
07:00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제6구간의 종점인 섬심원에는 다 온 모양입니다.
길이 두 갈레로 나뉩니다.
좌측과 우측 길입니다.
성모상이 있는 우측으로 들면,
주차장이 있고 좌우측으로 성심원 관련 시설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내리교에서 이곳까지 쉬엄쉬엄 1시간이면 오는군요.
이 성심원은 한센인 요양시설로 1959년 개원하였으니 벌써 만 60년이 다 되어간다. 재단법인 프란체스코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로 지금은 한센생활시설인 ‘성심원’과 중증장애시설인 ‘성심인애원’이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뒤로는 웅석봉이,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설립된 성심원은 처음 개원 당시에는 40여 명으로 시작을 하였으나 지금은 600명이 넘는 큰 천주교 공동체 마을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유의배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본당 주임신부로 40년을 한결같이 이들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졸저 전게서 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