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부릅니다.
지리산이 부릅니다.
그리고 마고 할매가 부르십니다.
매달 가야하는 곳인데 한 달 걸렀더니 지리산 여기저기서 아우성입니다.
이번 일요일은 해밀의 지리산둘레길 팀이 지리산 언저리를 걷는 날.
이번 구간은 궁항마을에서 삼화실.
낙동정맥이 지나는 양이터재를 만나는 구간.
아주 뜻 깊은 구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리산이라도 그 근방만을 슬쩍 다녀오기에는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하루 먼저가서 그 부근의 지리를 걷고는 다음 날 아침에 합류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토요일 산행 종착지를 둘레길의 하동 궁항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대중교통수단이 있는 곳으로?
그러자.
그렇다면 백무동으로 올라 한신계곡 ~ 세석 ~ 삼신봉 ~ 상불재 ~ 쌍계사로 하산해서는 하동에서 자고 아침 첫 차로 궁항마을 부근으로 이동을 하면 되겠지.
검색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동이라는 동네가 참 이상하군요.
어떻게 된 동네가 오전 시간 대에는 궁항마을이나 그 부근의 다른 어떤 곳으로도 가는 버스가 드뭅니다.
통학하는 학생도 없고 통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차로?
더군다나 하동읍보다는 청암쪽이 운행 버스가 더 많은 느낌.
진주가 가까워 청암이 중심지?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대중교통으로 궁항마을에 10시 정도까지 가는 버스는 없음!
그렇다고 택시로 이동하기에는 좀 억울하고.....
어쩔 수 없이 이번 주 둘레길은 포기하고 일요일 산행을 아예 쌍계사에서 화엄사로 이동을 해, 화엄사 ~ 코재 ~ 성삼재 ~ 만복대 ~ 세걸산 ~ 세동치로 가서는 전라북도 학생수련원으로 하산을 하여 고남형과 저녁을 먹고 귀가를 하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일기 예보를 봅니다.
날씨는 쾌청!
오랜만에 세석에서 보는 남부지리는 어떨까?
세석평전은 영신봉과 촛대봉으로 인해 그 중요성과 아름다움이 부각되는 곳이지......
아!
그리고 삼신봉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지리 주릉을 보고 싶다.
날씨만 받쳐준다면 왕시루봉에서 길상봉(노고단) ~ 반야봉 ~ 묘봉 ~ 칠선봉 ~ 영신봉 ~ 천왕봉 ~ 써래봉 ~ 구곡산.......
남쪽으로는 금오산을 보면서 남해의 여러 산들도 봐야지.......
산죽밭을 거닐다 불일암을 보고 불일폭포를 보면서 고운도 보고 보조국사 지눌선사도 만나봐야지.
불일평전에 가서는 변규화 선생님도 뵙고 정비석 선생이 이름한 봉명산방이라는 글씨도 보고 싶다.
변규화 선생이 안 계시니 이제 도올 선생은 발길을 끊으셨나?
어쨌든 그분의 흔적도 보고 싶은데.....
아!
지리산! 지리산이여!
2023. 02. 03. 23:30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합니다.
오늘은 만석.
며칠 전부터 계속 만석임에도 겨울이라 그런가 증차는 하지 않는군요.
모르긴 몰라도 클릭하는 조회수를 봐서 증차를 검토하는 거 같습니다.
가을에는 4편까지 증차를 하던데.....
03:40
백무동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히터를 하도 빵빵하게 틀어서 더워 죽는지 알았네.....
이 백무동 터미널에 내리면 우선 마음이 깨끗해지고 편안해집니다.
비단 마고할매를 곧 만나리라는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죠.
하차하자마자 깨끗한 화장실이 있어 아무리 춥더라도 잠시 그 화장실의 난방 혜택을 볼 수 있고, 밝은 불빛 아래에서 산행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할 일을 다하고는 랜턴을 켜고 지리로 듭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보름이군요.
그것도 정월 대보름.
그래서 그런지 그 큰달이 약간 찌그러졌군요.
오늘따라 국공초소에서 직원이 나와서 환송까지 해주시는군요.
함께 탄 사람들 대부분 장터목 방향으로 좌틀합니다.
오늘도 한신 계곡은 나 혼자구나!
그들이 택하는 루트는 분명 일출산행을 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그냥 최단 루트로 올라 인증 사진이나 남기자는 것이겠죠.
그런데 조금 가는데 앞에 불빛이 하나 보입니다.
제 불빛을 보자 그 사람이 더 저를 반기는군요.
"이 길이 세석으로 가는 길 맞죠?"
처음 가보는 사람인가?
"맞기는 한데.... 이 길로 처음 가보시는 건가요?"
"네."
"내려온 적도 없고요?"
"예."
"하긴 외길이니 그냥 오르기만 하면 되니까 길 놓칠 염려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람을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연하선경을 보려면 이 길로 올라 세석에서 가는 게 맞죠?"
연하선경?
연하선경이라는 말에 솔깃하여 "연하봉 때문에 가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종주 산행을 할 때 멋지다는 생각이 들 때 인솔하던 대장님이 그러시더군요. 여기가 연하선경이라고...."
선경은 경치가 좋은 곳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연하라는 글자가 들어가니 해가 지는 저녁노을 속에 그윽하게 운무가 내리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곳이 바로 연하봉 주위라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저는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분은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거 같습니다.
"혹시 그 연하선경의 '연하'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사실 저는 그 분과 그저 산인사 정도만 나누고 제가 갈길을 가려했었는데 그만 '연하선경'이라는 말에 발목을 붙들리고 말게 된 것이죠.
"글쎄요...."
말을 꺼낸 김에 계속 이어갑니다.
"이 지리산만큼 우리나라 역사 중 비극적인 한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도 드뭅니다.
최근에 이 지리산에서 벌어진 일이 여순 사건 다음에 발생한 한국 전쟁의 후유증이죠.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이 지리산만큼은 그렇지 못했죠.
빨치산 유격대원 중 자수하거나 체포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투쟁을 하고 있을 때 성질 급한 이 지리산의 주인들은 그동안 오르지 못했던 이 지리산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산으로 올랐습니다.
사실 저는 지리산의 주인이 있다면 아마 진주 사람들이나 구례 사람들을 먼저 꼽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진주 사람들에 앞서 1955. 05. 05. 구례중학교 오종수 선생님을 위시하여 뜻있는 분들이 백두대간의 끝 구례를 연하향煙霞鄕이라 부르며 그곳에 둥지를 틀어사는 자신들을 연하인이라 부르면서 이런 지리산을 흠모하여 모인 자신들의 모임을 연하반煙霞伴이라 스스로 불렀죠.
그들은 그렇게 연하반 산악회를 조직한 후 지리산 종주 산행에 올랐죠.
당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오르는 길은 당연히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철쭉으로 덮인 길상봉(노고단) 오르는 길을 두 번의 실패 끝에 세 번째 등정에 성공하고 그러고는 종주 산행에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노고단에 외국인선교사 별장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지나는 동안 남은 거라고는 굴뚝만이 집 채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줄 정도였으니 그 광경을 어떤 이는 '폐허의 라마羅馬Rome'를 보는 듯했다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 연하반 산악회가 처음 지리주릉 종주를 할 때에 벽소령 외에는 능선에 물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들은 노고단에서 물을 배 터지게 먹은 후 반야봉을 지나 벽소령까지 하룻거리 산행을 했어야 했는데 중간에 물이 떨어져 실신 지경에까지 이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창기 지리산 종주 산행의 성공 여부는 곧 물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죠.
어쨌든 얼마 뒤 그 구간에 이 연하반 산악회에 의해 발견된 물이 바로 지금의 연하천 대피소의 연하천 샘물이 되었으며, 그들이 비를 피하려 큰 바위 밑의 굴로 들어갔는데 그 굴이 형제봉 아래 부자암의 연하굴이며, 지금의 일출봉에서 뒤를 돌아보며 본 그 멋진 바위봉이 연하봉이 되었으며, 그 일대 활처럼 굽은 그 능선 부근이 노을과 적당하게 어울리며 운무를 접한 것을 보고 바로 연하선경이라 부르게 된 것이죠."
"역사 선생님이세요? 왜 그렇게 잘 아세요?"
깜깜한 길.
봉평이라면야 9월이나 되면 비록 보름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흐드러지게 핀 하얀 메밀꽃으로 주위를 살필 수 있으련만 이곳은 함양땅 거기에서도 깊숙이 숨어 있는 마천면의 백무동이라는 곳이어서 비록 오늘 같은 보름달에 의지하려 해도 둘러싼 능선 때문에 달빛마저 비싼 곳이니 둘이 나누는 얘기에 아까워할 필요는 없을 터!
"한 마디 더 할까요? 지금 이 오른쪽의 계곡 이름이 뭔지 아세요?"
"한신 계곡이라고는 알고 있는데...."
"그러면 왜 한신계곡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인지 아시나요?"
"글쎄요. 한신계곡이라는 것도 이번에 산행 준비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인데 혹시 초한지에 나오는 그 한신 때문인가요?"
한신이라니까 머릿속에 그 한신만 떠올랐다고 합니다.
"맞아요. 한신과 유방의 그 한신 맞습니다."
어진 수령이었던 김종직의 인품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촛대봉으로 오르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부드러운 영신봉 라인에 바위가 몇 개 북쪽과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게 눈에 들어온다. 기도꾼들에 의하면 이 영신봉의 바위들은 유달리 기가 세어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이 있거나 인심이 흉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중 무속인들은 영험한 기운을 영웅으로부터 찾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영신봉 동쪽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그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석평전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계곡이 자연스럽게 ‘한신계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45쪽
"하여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성리학에 물든 사람들의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그 사고방식 때문에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그 사건의 연장이 삼전도에서 국치로 이어졌으며 조선 중기 이후 내내 우리나라 발전을 저해한.......하여간 외교에 관한 한 무능한 정권이었죠."
예로부터 우리나라 무속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도 석가나 공자 외에 옛날 중국의 지략과 무공이 출중한 영웅들 즉 관우, 장비, 유비, 제갈공명, 한신 등을 섬기는 사례는 빈번했다고 한다. 한국민속종교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무속세계에서 중국 신령을 모시는 전래풍습은 임진왜란 때부터라고 한다. 명군明軍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崇明사상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관우의 경우는 ‘군신軍神’ 혹은 ‘재물의 신’으로 여겨져 명의 요동에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도시에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으며 민가에서조차 관우의 초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명은 1598년 4월 당시 한양 남대문 부근에 주둔 중이던 경리어사 양호(둘레길 제20구간에서 조경남 얘기를 할 때 나오던 원숭이 부대를 이끌었다는 장군)에 의해 관우사당이 지어져 남관왕묘라 불렸으며 같은 해 5월 13일 관우의 생일에는 선조도 참배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1599년에는 두 번째 사당을 건립할 것을 강요하여 1601년 완공된 것이 동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로 지금 동묘로 불리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시기에 명군의 참전과 주둔이 조선에 남긴 문화의 영향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실체라고 보는 시각(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도 있다. 그래서 한양을 비롯하여 여러 곳 특히 지리산과 가까운 남원에 관우 사당이 세워지는 등 이러한 풍조는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선조를 비롯하여 유학을 넘어 유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은 명나라에 대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명이 조선을 구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고 이는 명에 대한 모화의식을 깊게 해 주었으며 명이 망한 뒤에도 ’대명의리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여 민중에게는 위와 같이 중국은 물론 중국의 영웅들까지 받드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서인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나라를 또 한 번 쑥대밭으로 만든 1627년 1월 정묘호란과 1636년 12월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45쪽 각주
평탄한 길을 쉽게 올라갑니다.
"예전에는 이 한신계곡을 내려오거나 올라갈 때 세 번은 물길을 건너야 했어요,
그래서 여름철 장마 때에는 이 한신 계곡을 피했어야 했어요.
그걸 무시하고 그냥 내려오다가 불상사가 난 적도 있었고...."
등로에 눈은 별로 없는데 가끔 물길을 벗어난 물이 얼어붙어 조금은 우회를 하거나 로프를 잡고 올라가기도 해야 하는군요.
아이젠을 차도 어림없을 정도인 곳도 있고....
"오늘 쌍계사로 가서 고운 최치원을 보신다고 하셨죠? 그런데 해운대가 왜 해운대인지 아세요?"
"고향이 부산이세요?"
오히려 제가 되묻습니다.
"예. 어떻게 아셨어요?"
기출문제였습니다.
"4년 전 KBS에 근무하던 PD 한 분이 해운대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었는데 그분이 저와 얘기를 나누다 똑같은 질문을 하셨어요. 그때도 이렇게 대답을 했을 겁니다.
'고운은 최치원의 호이고 자가 해운이며 시호가 문창 아닙니까. 지리산에는 기돗발이 잘 받는 곳으로 지리 10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문창대이고 불일암 부근으로 가면 청학대와 청학봉이 있고 또 저 세석에서 시루봉 가는데 청학연못이 있으니 이 지리산에서 청학을 타고 노니는 분이 바로 고운이었잖습니까?'
그런 고운이 지리 북부의 함양군수까지 했었으니 점필재 김종직이 그러하듯 고운 역시 지리산을 보고 흠모하며 살았으니 이 지리산이 고운의 제2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죠."
두어 시간 함께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오르다 보니 많이 친해졌습니다.
큰 어름덩이가 된 바위 옆을 지날 때에는 손을 잡아주며 이끌어 주기도 하고 자신의 다리가 짧다는 불평도 다독여주기도 합니다.
지금 삼성에 다니고 있는데 50이 살짝 넘은 나이라 명퇴를 고민한다는 말까지도하고.....
큰 애는 이번에 제대를 하고 들째는 지금 고3이 됐다 하고.....
삼성에 명퇴라는 말이 국골을 떠올리며 '나무지게'님을 잠깐 소환합니다.
" 제 산친구 중에도 삼성에서 명퇴한 지 좀 지난 친구가 있는데 산사진 찍기를 주특기로 하는 등 나름 무지 보람된 생활을 하고 사는데.... 내가 보기에는 늘 산이 옆에 있어서 그런 거 같습디다."
지리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오른쪽으로 실폭포가 보이는데 폭포가 흐르는 암벽이 지금은 어름벽이 됐군요.
랜턴 꺼도 될 텐데.....
드디어 뒤로 시야가 터집니다.
북부지리를 봅니다.
투구봉을 보고 삼봉산을 보며 오도봉, 오도재, 법화산....
그 뒤로 연비산....
이른바 임천(연지)지맥이죠.
"시간을 내셔서 백두대간 한 번 해보세요.
더 많은 환희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늘 공부를 하시면서요."
07:20
백두대간에 올라섭니다.
"우측의 영신봉에서 좌측의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이 줄기가 바로 백두대간 길이죠."
당연히 남쪽으로 조망이 터지는군요.
천천히 올라와도 3시간 조금 더 걸렸습니다.
지리 남부를 봅니다.
당겨보죠.
좌측 뒷줄부터 수어지맥의 억불봉 그리고 호남정맥의 백운산, 한재 그리고 도솔봉.....
그리고 좌측으로 촛대봉.
지금까지 동행했던 그 분과 세석 대피소 사거리에서 헤어집니다.
세석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바로 능선을 타겠다고 하는군요.
잘 가시고....
다음에 또 만날 일 있겠죠.
산사람이니까.....
세석대피소 취사장으로 들어갑니다.
어제 먹다 남아 가지고 온 치킨 두 쪽을 주식으로 징키스칸을 한 잔 합니다.
다 먹고 나니 한두 사람씩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벽소령 정도에서 출발한 사람들인가?
공사를 마친 세석대피소.
분소로 승격을 했더군요.
무엇보다 화장실은 더없이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장터목이 제일 불결한 화장실로 자리바꿈을 하겠군요.
발가락이 좀 시리지만 바람은 그렇게 심하지 않으니 괜찮을 거 같습니다.
취수장 물은 얼었고.....
아래 있는 취수장은 가동이 됩니다.
이 세석평전은 정말이지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예전 그러니까 15세기 정도에는 이 세석평전을 저여원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석평지로 바뀌었다가 세적평전을 거쳐 지금의 세석평전으로 불리게 된 것이죠.
즉 1903년 안익제가 세석평전으로 불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죠.
우측 세석평전은 저여원沮洳原이라 부르던 곳이다. 물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옛 선인들은 물 많고 농사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너른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가? 옛 선인들도 도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혼란스러운 정국을 피하려 무릉도원 즉 이상향을 찾으려고 많이들 돌아다닌 것 같았다. 청학동, 별천지, 동천洞天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무릉도원은 사람들에 따라 ①불일암이 있는 쌍계사 일대로 보기도 하고 ②지금의 청학동 혹은 ③이 세석평전을 그곳이라 부르기도 했다.
저여원이라고도 불렀던 세석평전은 청학동이기도 했다
지리산의 이런 '이상향'은 삼신산 중에서 방장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과 관련하여 고운 최치원(857~ ? ), 쌍명재 이인로(1152~1220)를 거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 같다. 신라의 최치원 같은 경우에는 신라정부에서 유학파인 자신의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정부에서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임을 간파하고는 아예 짐을 싸들고 지리에 들어와 지리산 신선이 되어버렸고, 고려의 이인로 역시 자신의 문장 역량이나 능력을 정부에서 알아주지 않음을 한스러워하였던 인물이다. 어쨌든 이들이 남긴 그 문장들이 후세에 많이 읽히면서 조선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지리산의 전설 우천 허만수 선생은 이 세석에 움막을 지어놓고 생활을 하면서 등로를 개척하고 지도를 제작해 나눠주고, 길을 잃은 산꾼들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산꾼들 구조 활동도 하는 등 지리산을 사랑하며 도인 같은 생활을 하였다. 33살 때 지리에 들어와 30년 가까이 지리산 생활을 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천 선생.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지리산에서 영생하기 위하여 홀연히 사라진 것이라고 하던데... 그런 지리산 중에서도 세석이다.
점필재는 이곳을 지나면서 어떻게 보았을까?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沮洳原)에 다다랐다. -중략-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었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중략-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 전게서 443쪽
눈이 별로 없습니다.
아이젠을 벗는데 손이 무척이나 시리는군요.
거림삼거리를 지나,
낙남정맥길을 만납니다.
영신봉에서 창불대를 지나는 정맥길은 공단에 의해 비탐구간으로 지정되어 영신봉 ~ 일반등로, 헬기장 ~이곳까지는 온전한 정맥길을 걸을 수 없죠.
그걸 억지로 걷기라도 하면 사이비 정맥꾼들이 "굳이 가지 말라는 길을 왜 가느냐'며 비난을 하기 일쑤고....
어쨌든 참 정맥꾼들은 이곳에 이르러 정식으로 정맥길을 만나 진행하게 되는 것이죠.
조망이 트이는 곳.
여기서 앞줄의 횡천지맥과 그 뒤의 호남정맥을 봅니다.
내삼신봉 우측으로 쇠통바위가 보이고 호남정맥과 수어지맥은 첫 번째 사진에서 본 대로....
제단을 보고,
물도 없는 음양수를 봅니다.
직진합니다.
솜대.....
바위만 나타나면 울프같이 올라가 조망을 합니다.
우측으로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중앙에 황장산.
그 뒤로 왕시루봉.
황장산 앞 줄 우측의 앞당재.
반야봉을 중심으로 그 앞줄 우측의 묘봉
묘봉에서 좌측으로 갈라진 능선을 따르면 칠불사가 나올 것이고....
반야봉 좌측 줄에는 불무장등과 길상봉(노고단)이 이중으로 겹쳐 보이는군요.
덕평봉과 칠선봉 라인도 선명하고....
지나온 낙남정맥 라인.....
촛대봉과 우측 나뭇가지에 숨은 시루봉.
조금 더 걸어가니 왕관 모양의 촛대봉과 시루봉이 확연합니다.
당겨봅니다.
어디 그러면 청학연못 좀 찾아볼까?
시루봉에서 내려와 능선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바로 인공연못이 하나 있는데....
우측 바위 쪽이 아닐까?
이 봉 아래로 촛대봉능선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가면 과연 커다란 너럭바위를 찾을 수 있는데 그 바위에는 ‘鶴洞壬’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인공연못이 있으며 그 아래 조금 내려가면 샘물이 있는 ‘박지泊址’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지형과 1879년 송병선이 볼 때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작은 못小池’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냐 하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 못의 발견자는 우천 허만수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우천은 ‘지리산 달인’ 성락건에게 은밀히 얘기해 줬고 성락건은 평소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석=청학동’이라는 신념대로 못의 이름을 ‘청학연못’이라고 사람들에게 귀띔을 해준다. 그렇게 전해준 이름이 지리산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리99팀’에게 알려지면서 그 이름은 지리산꾼들 사이에 퍼진다.
문제는 축조 시기와 선인들이 답사한 이 청학연못의 정확한 이름을 밝히는 데 있다. ‘지리 99팀’의 ‘가객’은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겸암일기의 돌문과 돌샘 즉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 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石門)에 이르고 그 돌문(石門)을 지나 40리가량 가면 1천 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 호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石泉)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가 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는 내용을 들어 1570년 경이라고 본다.
반면 도솔산인 이영규는 위 류운룡은 화개동천에서 출발하여 횡천지맥을 거쳐 삼신봉에서 낙남정맥에 들은 다음 세석으로 올랐다고 진행 코스를 설정한다. 그러고는 위 루트 상의 ‘돌문’은 낙남정맥 상의 삼신봉 바로 아래에 있는 지금의 ‘석문’을 이르는 것이고 ‘돌샘’ 역시 지금의 ‘음양수샘’을 말하는 것이니, ‘돌샘’은 이 ‘작은 못’과 전혀 관계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위 송병선에 앞서 이곳을 지났던 하달홍의 1851년 산행기에는 이 ‘작은 못’에 대한 기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못의 축조 시기는 1862년 진주 단성민란 때 피신을 온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인공 못을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못의 이름은 불일폭포에 있는 청학연과 구분하여 이곳 세석평전이 예전에는 적석평積石坪이라는 지명을 가졌음에 착안하여 세석연못 혹은 적석연못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생각건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산길을 가장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능선이며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닌 다음에야 계곡을 건너 마주 보이는 능선을 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유운용의 돌문과 돌샘은 지금의 낙남정맥 상의 석문과 음양수샘으로 보는 이영규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성낙건 선생은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다면 세석 이외에는 불가능하다.”는 평소의 소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 연못을 청학연못이라 부른 것은 불일폭포의 청학연과 혼동을 하여서 붙인 게 아니라는 점, 지금은 어느 정도 청학연못이라는 이름으로 세인들에게도 정착된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그 이름만큼은 지금의 청학연못으로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
촛대봉에서 하나 더 추가해 본다면 지금의 시루봉1578m은 사실 떡시루 모양을 하고 있어 예전의 촛대봉 이름을 자신이 도용한 모양새가 되긴 하였지만 겉모양으로 봐서는 누구라도 수긍할 것 같다.
- 전게서 447쪽
바위 하나 지나고......
의신마을 갈림길을 지납니다.
이 길이 샘골 루트입니다.
샘골은 아무래도 여름에 가야 제격이지.
올여름에는 네 명 정도 포섭하여 의신마을 내려가는 세개골 개울 옆의 '대성주막'에서 토종닭 한 마리 시켜놓고 하룻밤 자고 와야겠습니다.
도토리묵과 걸쭉한 동동주는 기본이고.....
시원한 개울물에 발도 담그고.....
여름이 기다려지는군요.
바위를 우회하면,
석문이 나옵니다.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의 형 류운용은 이를 돌문이라 불렀죠.
조금 전 청학연못을 얘기할 때의 바로 그곳이죠.
세석평전과 촛대봉.
황금능선의 구곡산.
멀리 진양호가 눈에 들어오고 우측에 나뭇가지가 가린 오대주산.
좌측이 낙남정맥길의 외삼신봉.
중앙의 삼신봉에서 우측으로 가지를 친 횡천지맥.
그 두 번째 봉우리가 내삼신봉.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배가 고픈 게 힘이 쪽 빠지는군요.
칭기즈칸 때문인가?
잡목과 무명봉 때문에 정작 삼신봉은 가려져 있고.....
부드러운 정맥길.....
중앙에 삼신봉은 아직도 가려 있는데 우측으로 내삼신봉이 먼저 얼굴을 드러내는군요.
왕시루봉에서 반야로 이어지는 능선.
이곳에 올 때마다 뵙는군요.
삼신봉으로 오릅니다.
그리고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지리 주릉을 감상합니다.
아!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능선이 그려집니다.
좌측 세석부터 촛대봉 ~ 가짜삼신봉 ~ 연하봉 ~ 일출봉 ~ 제석봉 ~ 천왕봉 ~ 써래봉......
덕평 ~ 칠선 ~ 영신 ~ 촛대
그러고 보니 거림 쪽에서 올라오는 분들은 이 촛대봉을 제1봉 혹은 하봉, 제석봉을 중봉 그리고 천왕봉을 상봉이라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천이나 거림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영신봉보다는 시루봉甑峰1703.1m(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다.
이 촛대봉은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김종직과 하달홍은 이 촛대봉을 중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특히 김종직은 증봉甑峰이라고 불렀으며,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 송병선은 촉봉燭峰 그 외 시루봉, 수리봉, 취봉鷲峰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인데 유몽인의 경우 사자봉으로 불렀다.
4월 5일 갑술일. -중략-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사자 한 마리 안 사는 우리나라에 웬 사자봉?"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도솔산인 이영규는 이에 대해 “이 역시 불교식 이름으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탔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인다. 그런데 촛대봉은 뭐고 증봉, 시루봉은 뭔가? 생긴 게 그렇게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12구간을 지나면서 살펴봤다.
사실 이 촛대봉1703.1m은 지리산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는 봉우리이다. 영신봉16516m보다 조금 더 높아서 그런가 아니면 생긴 모양 때문에 그런가? 어쨌든 이 촛대봉에는 몇 가지 더 살펴볼 게 있다. 우선 다음 글을 읽어보자. 1879년 송병선이 쓴 두류산기인데 이 촛대봉과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 졸저 전게서 446쪽
반야 ~ 날라리 ~ 묘 ~ 명선........
길상(노고단) ~ 불무장등 ~ 반야.....
내삼신봉......
왕시루봉.
그런데 삼신봉 남쪽 사면에서 무슨 제문 읽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리산의 주인 진주 분들이 시산제를 올리고 있군요.
그분들 방해 안 되게 저는 조심스레 주위만 조망합니다.
횡천지맥과 멀리 호남정맥의 백운산.
청학동.
낙남정맥의 외삼신봉.
당겨서 희미하게나마 금오산을 봅니다..
다른 것도 아닌 시산제를 올리는데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절을 올립니다.
그분들은 시산제를 마치고 우측 식당으로 이동을 하는데 그 먹거리가 장난이 아닙니다.
'멋거리 산악회'란 이름의 진주 분들 정말이지 사나이다움에 감복을 했습니다.
35년 전통의 멋거리 산악회.
이름만큼이나 멋진 분들이었습니다.
청주淸酒에 막걸리濁酒.
참 의미 있는 상표가 눈길을 끕니다.
1592 막걸리.
역시 진주대첩을 이끌었던 후손들 답게 철저한 민족정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보니 족보가 까지고....
다 아는 분들이군요.
그 자리에서 도솔산인 이영규님과 즉석 통화가 이루어지고.....
늑대 형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그렇게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이분들 내려가서 한 잔 더 하잡니다.
심지어 '장이사'님은 아예 진주로 가서 마시고 내일 올라가라고 채근을 하십니다.
제 일정은 여기서 무너집니다.
도장골이나 제대로 봤으니 그냥 하산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쌍계사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고 이 상태로 내일 산행도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여기서 나머지 산행을 포기하고 청학동으로 하산을 합니다.
할매께 다음 주 다시 오겠노라고 말씀을 드리고....
15일부터 산방기간이니까 오려면 2월 14일까지는 와야 했으렷다!
막힌 정맥길을 보고 우틀합니다.
낯익은 청학동.
덕산으로 나가 샤워를 하고 원지로 가서 남부터미널 행 버스를 타고 귀경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