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두대간에 입문 하게 된 경위
돌이켜보건대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하게 된 시기는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아마도 신문지상을 통하여 '이우형님- 이분이 편찬한 산지도로 산행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음-' 어떤 책을 발굴하였는데....
즉 산맥개념이 아닌 대간, 정맥, 기맥 등의 개념으로 산줄기를 정립하여야 한다는 골자의 기사를 접하면서였다.
그러고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사회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산은 명산 위주로 안내 산악회 혹은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습성에 충실하였다.
그러던 2004년 봄.
안내산악회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남덕유 ∼ 북덕유 무박 산행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생각만 하더라도 일반 등산안내 지도상에 나와 있는 산 이외의 길을 간다는 것은 '개척' 수준의 노력을 하여야 하고 그 것은 감히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당연히 주위에서 백두대간을 했다는 사람이 없는 고로 그런 나의 생각은 머리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종주 산행을 위주로 산행을 즐겼던 나는 덕유의 장쾌한 능선을 밟으며 삿갓봉이며 무룡산, 동엽령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우리 일행(당시 3명) 앞에는 아무도 치고 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이른 시간이라 반대방향에서 오는 그 누구도 만나 일이 없었다.
송계 삼거리에 앉아 약간은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귀봉 방향에서 한 사람(약 40세가량으로 기억 함)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혼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 쪽 길이 정규 등산로인 것은 알지만 일반적인 루트는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산인사를 나누고 잠시 쉬는 그 사람에게 "어느 쪽에서 오는 것이냐."고 묻자 알지도 못하는 지명을 꺼내며 "백두대간 종주 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백두대간!
그렇지.
백두대간.
"그런데 그 길을 어떻게 알고 혼자서 다니느냐."는 우문(愚問)을 던지자,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우답(愚答)을 듣게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음식물을 나눈 다음 그 사람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사당동에는 참 많은 '찌라시'들이 전봇대며 가로등, 나무 등에 많이도 매달려 있다.
그 중 하나를 떼어서 읽어보면 백두대간 대원들을 모집한다는 문구도 많이 보았으나 역시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열심히 산에는 다닌다.
고대산, 축령산, 운악산, 지리산, 설악산, 속리산, 오대산, 덕유산.....
2008. 10.
꼭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이 가고 싶어 기차 예약을 하려 하였으나 이미 매진이 되어 하는 수없이 안내산악회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송암산악회'에 예약을 하게 되었고 그 회원들과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다.
멋들어진 억새를 배경으로 사진도 멋들어지게 찍고 함께 둘러 앉아 밥을 먹으며 그들이 건네주는 막걸리도 얻어 마시게 되었고 공짜로 얻어먹는 게 미안하여 내가 두 통과 안주꺼리를 사와서 마시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던 중, 백두대간 이야기가 나온다.
2009. 1. 3.부터 지리산 권역의 웅석봉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량도 괜찮은 것 같은데 대간을 한 번 타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으로는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 이야기를 하며 충분하다고 한다.
일단은 알겠다고 이야기하며 그 날 산행을 무사히 마친다.
백두대간이라.
잡지 '사람과 산'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던 터라 '산악문화'에서 나오는 종주지도집을 주문하고 관련 종주기 책도 구입하여 읽어 보았다.
등산화도 160,000원이나 주고 새로 구입하였다.
스틱도 '레키'로 바꿨다.
배낭도 40리터 정도 것을 구입했다.
불필요하게 오케이 매장을 들락거렸다.
2. 백구대간 입문
2009. 1. 3.
선릉역에서 버스를 타고 지리산 밤머리재에 도착하여 웅석봉 산행을 시작한다.
송암산악회의 김동호 대장님은 대간의 남쪽 끝은 천왕봉이 아닌 그 줄기가 물로 떨어지는 웅석봉까지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전날 마신 술의 영향으로 상당히 힘든 산행을 했다.
역시 대간 산행은 무리인가라는 자괴심을 갖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2주 후.
이번엔 무박산행으로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봉∼하봉∼쑥밭재∼윗새재로 가는 코스다.
천왕봉에서의 일출과 상고대, 설화 등 그 멋진 지리산을 이번엔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
소위 알바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다른 사람들은 일부러 써리봉 ∼ 치밭목 산장을 택하였지만 나는 중봉 아래에 있는 '출입금지' 표시를 순진하게 믿고 그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이다.
물론 제일 먼저 내려와서 세 시간 가량을 혼자서 보냈지만....
다음은 지리산 종주 구간을 건너뛰고 성삼재∼고기리, 그 다음 2주 후에는 고기리∼통안재.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지도책을 꺼내 놓고 새로 구입한 '한국의 산줄기' 전도(全圖)를 보면서 진부령에 도착할 날만 꿰고 있는데 앞으로 3년 후에나 그곳에 도착한다고 하니 한숨만 나온다.
매주 토, 일요일을 운행할 경우 8월까지는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큰 딸에게는 "네가 공부를 하느라 고생을 할 때 아빠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산을 오르면서 너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꼬셨다.
나의 성격을 아는 옆지기는 묵묵부답.
다만 여기에 변수가 있었다.
만약 LG TWINS의 성적이 좋다면 ?
그러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결단을 내려야만 하였다.
그래서 고기리 ∼ 통안재 구간은 선두에 달라붙어 기량 테스트를 했다.
무난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2009. 3. 6. 21:53 전라선 기차를 타고 남원에 내려 잠시 눈을 붙인 다음 택시를 타고 권포리로 이동하여 지난 번 하산한 그 구간을 이어 3. 7. 06:10 통안재에서 산행을 시작하면서 나의 '나홀로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3. '홀대모'와의 만남
등산 장비는 가리지 않고 구입을 하였는데 그래도 백두대간을 탄다고 하는 내가 갖출 것은 다 갖추어야 하지 않는냐는 쓸 데 없는 당위성의 개념을 가지고 '오케이아웃도어'를 접하게 되었다.
인터넷 때문이었다.
그곳에 게재된 산행기를 읽으면서 선답자들의 실력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성향 그리고 후답자들을 위한 배려 등에 관하여 공감을 하게 되었으며 이런 점은 미력하나마 내가 산행기를 작성하면서 나의 미천한 경험을 후답자들이 피해가게끔 하려는 나의 조그만 배려로 표출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그 글을 읽노라면 가끔 등장하는 '홀대모'라는 용어가 눈에 띄었다.
당연히 '홀로 대간을 산행하는(가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이해를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곳은 대간이 아닌 생판 듣지도 가보지도 못한 고개 이름이나 봉 그리고 재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대간을 끝내고 정맥 혹은 기맥 정도에 들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섰다.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은?
얼마 뒤 하릴없이 '오케이'를 뒤지다 카페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체질적으로 인터넷 카페를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 나타난 소위 신천지가 거기 있었다.
2009. 4. 8.
대간에 든 지 만 한 달이 되어서였다.
이때부터 나의 대간 운행은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홀대모의 격려를 받으며 그들이 겪은 경험을 보며 이제는 거의 다 낡아 없어졌지만 그래도 흔적이 남은 표지띠, 가끔은 글씨 등을 확인하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중간에 만난 다정님의 버섯으로 영양보충을 하면서,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조고문님, 평산지기님, 무원마을님, 두루님, 대박님, 산냄시님, 에이원님 등으로부터 조언을 받으면서 거침없는 산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2009. 8. 15.
청옥산을 지날 때에는 황태자님을 만나 좋은 인연을 가져 이번 한계령∼진부령 구간을 운행할 때에는 우정산행을 함께 하는 영광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번 9. 10. 평일 산행으로 구룡령∼조침령 구간을 운행할 때에는 연속종주 산행을 하고 계시던 노산객을 만나 소중한 경험도 들을 수 있었다.
한편 대간에 매진하고 있던 2009. 4. 초경 어느 산을 지나다 잠시 쉬고 있을 때 전화기를 켜자 날라 온 메시지 하나.
후배로부터 '7080 다모아' 카페를 오픈했으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의 산행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참여하여 대간 때문에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미니 카페'에서도 대간의 마지막 구간을 능력에 맞춰 같은 구역을 운행하는 고마움도 또 받았다.
이렇게 나의 대간 '홀대모'는 내가 스스로 정의한 바와 같이 굳이 '홀로'라는 의미는 숫자 '혼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의 '홀로'를 뜻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산행이었기에 외롭다거나 무섭다는 느낌은 단 한 번 이외에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단 한 번 무섭다는 공포감도 이제는 완전히 없어졌다.
즉 함백산 너머 '비단봉'에서의 가짜 멧선생 사건.
그 후 나는 많은 풍력발전소를 봤지만 그 바람개비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멧선생'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들은 절대로 내가 공격을 하지 않는 한 스스로가 알아서 도망을 간다는 평범한 사실을 떠올리며....
4. 어려웠던 구간
가. 대야산 구간
통제가 된 구역인 버리미기재를 통과하기 위하여 하는 수없이 남진을 택하였다.
2009. 4. 26. 04:35 연풍에서 택시를 타고 비가 기분 나쁘게 내리고 있는 어두운 새벽에 철책을 우회하여 곰넘이봉을 넘어 평탄한 길을 운행하고 만난 대야산 직벽.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오른 대야산.
올라가면서도 마치 내가 암벽등반가로 착각을 하게 할 정도로 아찔했던 그 사면은 무턱대고 올랐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반문도 가능케 하였던 곳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수낭(水囊)의 물꼭지가 빠져 물이 다 없어지는 바람에 아찔했으나 다행히 고모샘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구간이어서 더 기억에 삼삼하다.
나. 함백산 구간
2009. 7. 24.
제 산행기를 읽으셨던 분들은 다들 배꼽을 꼭 잡고 계셨겠지만 그 상황에서의 나는 정말로 간절했던 그것이었다.
그때는 얼마나 당황했던지 '평산지기'님께 전화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근처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분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군산에 사시는 '자유인'님으로부터 해답을 얻고는 머쓱한 상태로 그 위기를 탈출했던 기억.
짐작컨대 그 '자유인'님의 답변이 나의 그 상황과 너무나 똑 같았고 즉석으로 주변 상황을 해 주셨던 것을 보면 아마도 '자유인'님도 그 장소에서 똑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
다. 희양산 구간
편협한 나의 현 정치에 대한 의식이 정진하는 스님들의 원력(願力)을 느꼈던 구간이었다.
즉 이런 곳에 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으나 땡불자인 나는 당시 실망하였던 불교계에 대한 반발로서 여러 가지 사안을 떠올리며 구시렁거리며 지름티재 바로 앞의 감시탑 부근을 운행하고 있었는데 비록 비가 내리고 있어 시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목책을 지나 직진을 하면 될 것을 지도를 보면서도 쓸 데 없는 의심을 하며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불필요한 알바까지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봉암사를 향해 삼배를 올리고 그 구간을 지났던 기억이 있다.
5. 중복 구간 - 안내산악회와 함께 한 구간
굳이 안내산악회와 함께 한 구간인 성삼재 ∼ 통안재 구간을 다시 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리고 대간 운행 중에 개인적으로 관광버스를 타고 성삼재에서 내려 대원사까지 마친 구간까지 다시 할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하였다.
즉 대간 구간을 계획하였고 그 구간을 운행하였으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왜 혼자냐 둘이냐 아니면 안내산악회가 왜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꼭 거기에 ‘홀대모’를 개입시켜야 하느냐는 문제다.
나아가 ‘홀대모’의 회원이 아니면서 혼자서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부분에 대한 기록이 나에게는 없다.
즉 선두 꽁무니만 쫓아가느라고 제대로 된 지명도 익힐 시간을 갖지 못했고 내가 어느 구간을 어떤 경로로 얼마 만에 갔다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늘을 보고 마루금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나라의 산하를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리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다시 그 구간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지리산 구간 중 성삼재 ∼ 사치재 구간을 2009. 7. 26.에, 성삼재 ∼ 중산리 구간은 8. 9.에 각 다시 운행하였던 것이다.
안내 산악회에 관한 나의 단견을 고려해 보더라도 정말이지 나는 송암산악회의 김동화 대장님께 항상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도 월악산에 있을지도 모르고 치악을 종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즉 나는 안내산악회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다.
다만 그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 즉 막걸리통과 빈 깡통 그리고 물통 등은 제발 가지고 되돌아갔으면 나아가 후미 대원을 위한 안내 종이 즉 화살표가 그려진 복사용지는 제발 후미 대장이 수거하여 가지고 갔으면 하는 희망이다.
6. 글을 마치며
대간을 운행하면서 나는 정말이지 행복하고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느꼈다.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것도 고마왔고 이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도, 이렇게 숨 쉬고 있다는 것도 고마웠다.
이렇게 튼튼하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도 고마웠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옆지기에게도, 항상 ‘대단한 아빠’라고 치켜 세워주는 사랑하는 딸들에게도, 항상 댓글로 나의 운행을 감시하고 격려해 주신 ‘홀대모’ 선배님들께도 그리고 내가 대간 끝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산행 참여’를 독려하지 못하고 있는 ‘7080 다모아’님들께도, 금요일만 되면 어디론가 내빼는 ‘국장님’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고 내 몫까지 챙겨서 일을 하여야 하였던 사무실 직원들께도......
알프스리조트 옆 철망에 주머니에 남아 있는 마지막 리본을 달면서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던 그 눈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난다.
이제 이글을 마치면서 한 마디 더 하고 싶다.
정말.
정말이지 고맙습니다.
총 운행 거리 : 734.65km
총 소요 시간 : 6개월 6일 (2009. 3. 7. ∼ 2009.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