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에 들다.
존경하는 산친구 분들의 모임인 해밀에서 금남정맥에 든다고 합니다.
금남정맥.
정맥의 꽃이라고 하죠?
연석산, 운장산을 시작으로 칠백이고지 부근의 암봉을 보면서 대둔산과 계룡산 등 호남의 북쪽과 호서지방의 남서쪽 명산들을 다 헤집고 지나니 그런 별칭이 붙었으리라 짐작합니다.
4년 전 전 구간을 홀로 산행을 했으니 구석구석 추억이 묻어 있는 곳도 많습니다.
나아가 호남알프스를 할 때의 그 멋진 정경은 아직도 눈에 삼삼합니다.
그 금남정맥 출정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정산행을 하기로 합니다.
사실 이 금남정맥은 산경표의 기본 정신과 합당치 않는 부분이있기는 합니다.
여러분도 눈치채셨겠지만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보기로 하고 우선 그 족보에 눈을 돌려봅니다.
주화산珠華山? 주줄산珠崒山?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조선이 낳은 천재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일본 유학을 접고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일제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지키기 위해 약관의 나이인 1910년에 ‘조선광문회’를 설립하게 되죠.
출판사를 겸하고 있던 일종의 법인체였습니다.
이 조선광문회의 첫 작업이 역사 서적으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그리고 동국통감 등의 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리 서적으로는 산경표에 앞서 제일 먼저 간행한 것이 1912년 출간 된 이중환의 택리지입니다.
당연히 영인본 작업이었습니다.
택리지는 산경표의 원전?
저는 개인적으로 산경표의 원전原典 아니 모체母體를 이중환의 택리지로 보고 있습니다.
비단 육당이 이 택리지를 소개하기를 “우리나라 지리서 가운데 가장 정요精要한 것이며 또한 인문지리학의 최초 발명이다.”라고 극찬을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아가 이 소개문에서 택리지가 이미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된 책일 정도로 글로벌한 책이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뭐 사실은 그랬습니다.
이 책은 1881년 일본 외무성 소속의 외교관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가 일본어로 번역을 하여 ‘조선팔역지朝鮮八域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출간되었던 그것이기도 합니다.
조선 침략을 위하여 조선의 문학, 역사, 철학 나아가 인심까지 파악할 수 있는 인문지리학서로서 이만한 게 없다고 본 것이겠죠.
한국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고 있는 최혜주 교수(한양대 동아시아연구소)는 일본이 조선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단체로 1891년 결성된 동방협회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나 식민사관의 대표학자인 이마니시 류, 정치인으로는 이또 히로부미 등 군관계, 상공인, 학자, 언론인 특히 친일파 박영효, 김윤식, 윤치오, 이지용 등도 이 협회 회원입니다.
이 동방협회 회보에 조선팔역지 즉 택리지가 자주 거론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조선침략을 위한 필독서였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일본을 통해서만 세계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의 존재가 알려졌던 게 사실일 때 서양인으로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지리에 관련한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독일의 헤르만 라우텐자흐(Hermann Lautensach, 1886~1971가 바로 그입니다..
1930대 한국의 지리, 역사, 자연과 고문화 그리고 각 지방의 풍속과 일제의 식민지로서의 한국을 연구한 책인데 그 제목이 바로 코레아KOREA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코레아에서 "이중환의 저서를 제외하고 이러한 책들의 지리적 내용은 주로 산악, 하천 그리고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층까지의 관청이 소재한 도시명과 그 특징을 열거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택리지의 특장特長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중환의 가장 열렬한 팬은 사실 위에서 언급한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1856~1935)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산맥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급했다고 '산경파 교도敎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논문 '조선산맥론'에 이중환의 택리지의 팔도총론 도입부를 아예 통째로 인용합니다.
즉 '곤륜산의 한 줄기가 대사막의 남쪽을 지나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이 되었고, 이곳부터 줄기가 크게 끊어져 요동평야가 되었다. 그 들판을 건너서 다시 솟아나 백두산이 되었다. 곧 산해경에서는 이 산을 불함산이라 부른다......중략...한 줄기가 조선산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고토는 여기서 산맥을 배우게 되었고 택리지의 산수편으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산줄기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고는 태백산맥을 만들고 소백산맥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이중환의 택리지.
그 정도로 외국에서도 알아주었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국외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던 책이었습니다.
당시 대중교양서 내지는 베스트셀러였다(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서문)는 것이죠.
이렇듯 조선 후기의 전통지리학과 역사지리학을 확립한 책으로 평가받는 택리지를 정인보같은 대학자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는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수학적이요, 이중환의 택리지는 철학적이며, 대동지지는 정지靜止요 구분區分이며 이중환의 그것은 활현活現이요 융관融貫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했으니 재삼 다른 이들은 일부러 거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이산 - 주줄산珠崒山, 주화산珠華山
각설하고 우리가 지금 금남정맥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 관련 항목을 택리지에서 찾아보기로 하죠.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편山水篇을 보면 '백두대간이 속리산과 덕유산을 지나면서 갈라짐이 더욱 심해진다.'고 나와 있습니다(俗離德裕二山分擘尤多).
그리고 '덕유산의 정기는 서쪽으로 이어져 마이산과 추탁산이 되고, 마이산 서쪽과 북쪽으로 뻗은 두 산줄기가 진잠(대전 유성, 공주 부근)과 만경에서 그쳤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후일 산경표에서 금남호남정맥이 지금의 금남기맥(대동금남정맥, 신산경표의 금강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분화하는 모습입니다.
- 실제 산경표에는 금남기맥(대동금남정맥, 금강정맥)은 편제되어 있지 않음
마이산이라는 이름은 공정대왕(정종)이 명명한 이름이라고 밝힌 이중환은 마이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지며 주줄산珠崒山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 일설에 의하면 마이산은 태종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하지만 택리지에는 정종이라고 못박았음
주줄산珠崒山을 찾아서.....
그리고 이 주줄산이 전라도 산줄기의 주축이 됨을 아울러 밝히고 있습니다.
주줄산?
현대 지도를 찾아보면 그 어디에도 주줄산이라는 산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찾아봐야죠.
먼저 이제부터 오늘 우리가 진행하는 금남정맥의 뿌리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 근거 문헌의 기본은 택리지와 산경표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줄기의 계보는 백두대간이 영취산에서 갈라져 금남호남정맥이 되고 다시 삼정맥 분기봉에서 가지를 쳐 금남정맥이 됩니다.
즉 백두대간 - 금남호남정맥 - 금남정맥 순입니다.
산경표를 보면 백두대간의 육십치 - 장안치 - 본월치 - 백운산으로 이어지게끔 표기되어 있어 자칫하면 지금의 영취산도 없고 장안산도 없는 관계로 그들의 존재유무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다행히 금남호남정맥 편에서 장안산 ~ 노치로 이어가면서 금남호남정맥의 시작은 장안산 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도 #1 대동여지도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부근
나아가 대동여지도에는 영취산의 위치가 지금의 위치와 동일하여 찾는 이의 마음을 적이 안심시켜 주기도 합니다.
다만 대동여지도의 장안산의 위치가 좀 애매하기는 합니다.
즉 한남금북정맥 자리가 아닌 백두대간 상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경남 안의현(지금의 안의면)의 군현 지도와 전북 장수현(장수군) 군현 지도가 서로 상이한 점이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즉 이 대동여지도는 고산자가 직접 발품을 팔아 만든 지도가 아니고 각 군현지도를 취합聚合하여 제작한 지도이기 때문에 각 지방 지도 간의 오차를 인정해야 한다면 이것도 그냥 무시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산자는 측량기사가 아니고 세계 최고의 지도제작자였다는 얘기죠.
조약봉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이제 금남호남정맥은 장안산을 지나 그 유명한 마이산을 거쳐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분기점으로 옵니다.
참고도 #2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금남정맥 갈림봉 부근 산경도
현대 지도의 산경도를 보면 조약봉585m이라는 봉우리가 나오는군요.
이 지도는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이 만든 지도로 사실 조약봉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임의로 만들어 붙인 이름입니다.
나라에서 공인한 산이름이 아니라는 얘기죠.
뿐만 아니라 등산지도 가령 진혁진 개념도 같은 부류를 제외한 여타 지도 가령 영진지도나 동아지도 같은 곳에도 역시 조약봉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볼 때 진혁진 지도는 그저 산행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개념도이므로 신산경표의 산경도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는 단산單山 산행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김형수님의 '한국 555 산행기'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줄기 산행을 하는 분들도 김형수님의 지도만큼은 후한 점수를 줍니다.
단산 산행 위주의 등산지도이면서도 그 산줄기의 이음을 꼼꼼하게 표기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살펴본 김형수님의 이 부근 지도 즉 마이산이나 운장산 편을 보면 '주화산'이라는 글자가 이 삼정맥 분기봉 쪽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우형님을 말씀드릴 때 다시 거론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산줄기파'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는 '서레야' 박건석 선생을 생각해 봅니다.
이분은 임의로 산이름을 만들어 그 이름을 컴퓨터로 출력을 한 뒤 이를 코팅하여 이 봉우리 저 봉우리에 갖다 붙임으로써 산줄기파들은 물론 뜻 있는 분들로 부터 호된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걸 의식하지 않고 오늘도 어느 무명봉에 그 엉터리 이름으로 작명한 코팅지를 붙이고 있을 겁니다.
이유는 소위 '봉따먹기' 기록의 숫자 늘리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박성태 선생은 그분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은 나름대로 깊은 연구를 하여 '신산경표'라는 활자화 된 책을 만들었고, 그것을 보급함으로써 우리나라 산줄기 문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구태여 박건석 선생이나 박성태 선생 등 두 분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산이름을 임의로 만들었다는 데 있을 겁니다.
박건석 선생은 별론으로 하고 박성태 선생께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위 지도를 보면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금남호남정맥에서 호남정맥과 오늘 우리가 진행하는 금남정맥이 갈리는 그 봉우리에 조약봉이라는 산 이름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강조하거니와 이 조약봉은 나라에서 공인한 즉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나오는 그런 산이름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전 우리 조상들 그 누구도 조약봉이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이중환이나 김정호조차도 몰랐던 산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도 #3 조약봉
보시다시피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는 물론 영진지도에도 이 분기봉은 다만 565.3m로 고도만 표기되어 있을 뿐 산이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바로 옆에 조약치라는 고개가 있어 이 고개 이름에 착안하여 조약봉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느낌은 강하게 오긴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조약봉은 박성태 선생께서 정맥을 설명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여놓은 이름입니다.
가령 섬강지맥(신산경표 상 영월지맥 일부) 을 걸을 때 우리가 인식했던 '삼계봉'이라는 산이름과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삼계봉 역시 평창군, 홍천군, 횡성군 등 세 개의 군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무명봉인 1104.6봉에 박성태 선생께서 편의상 붙여 놓은 이름 아닙니까?
한강기맥과 섬강지맥(선생은 영월지맥)의 설명의 편의성 때문이었습니다.
이 삼계봉 역시 박성태 선생의 작품이지 국가에서 공인한 이름은 아니라는 얘기죠.
하지만 이런 '봉따먹기'와 무관하고 오히려 산줄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산이름은 조금 더 사용하다보면 필경 그 이름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니 그럴 거라면 하루빨리 누군가의 발의에 의하여 지명위원회에 회부되어 공식적인 이름으로 부여받아야 할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유래는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대동여지도를 볼까요?
참고도 #4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금남정맥 갈림봉 부근
보시다시피 대동여지도에도 이 분기봉은 그저 무명봉에 불과합니다.
다만 그 위에 주줄산(珠崒山, 한글로 누군가가 주화산으로 표기한 곳)만이 큰 산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택리지에서 얘기하던 그 주줄산珠崒山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봅니다.
운장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산경표』·『택리지』 등에는 주줄산(株崒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의해 1:50,000 지도를 만들면서 운장산과 주줄산이 병행되어 표기되다가, 1918년 지도부터는 운장산으로만 표시되고 있다. 이것은 ‘주줄산(株崒山)’의 한자가 어렵기 때문에 지도 제작 과정에서 한자가 쉬운 ‘운장산(雲長山)’으로 바뀐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운장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시대 정여립 사건과 관련이 있는 송익필의 자가 운장(雲長)이었던 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송익필에 관련된 전설은 독제봉[운장산 서봉]과 오성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송익필은 정여립을 체포할 당시 진안 현감 민인백과 같은 서인 계열이었다.
주화산珠華山은 가공된 이름인가?
그렇다면 산세가 빛나고 화려하다는 의미라고 읽힐 수도 있는 주화산은 과연 실재하는 산이름이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주화산이라는 이름을 근자에 쓰신 분은 바로 우리에게 산경표를 발굴하여 전해준 우리나라 대동여지도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인 이우형(1934~2001) 선생이십니다.
1980년 인사동 고서적 책방에서 산경표를 발견한 선생은 그에 따라 산경도를 그립니다.
그러고는 산경표의 내용에 따라 주화산이라는 산이름을 부여합니다.
그것을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 조석필 선생이 발끈하며 반박을 하였습니다.
- 다만 조석필 선생도 산줄기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무명봉인 이 삼정맥 갈림봉을 이우형 선생의 제안에 따라 주화산이라는 이름을 빌어 설명을 하긴 하였음.
주화산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주줄산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여기서 잠깐 지금의 금남호남정맥의 끝을 보죠.
참고 사진 #1
이곳이 주화산이자 일명 조약봉이라고도 한다는 것입니다.
조약봉을 괄호 처리한 것을 보면 주 이름은 주화산이고 그 이명이 조약봉이라는 뜻입니다.
박성태 선생이 이우형 선생에게 밀린 모양새입니다.
어쨌든 이 이정표는 진안군청 작품입니다.
산이름의 표기의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 정도면 우리나라 지자체도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느낌입니다.
정맥이라는 산줄기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참고도 #4의 한글 주화산은 누군가가 부기한 이름입니다.
그러면 조금 전 이야기 했듯이 주화산은 어디서 온 이름일까요?
우선 인터넷의 검색창에 주화산을 치면 바로 관련 내용이 뜹니다.
옮겨볼까요?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주화산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의 경계에 있는 565m의 산이다. 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5° 50′, 동경 127° 19′에 있다. 모래재 터널에서 북쪽으로 700여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봉우리이다.
[명칭 유래]
예전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2000년대 이후 산악인들이 주화산이라 이름 지었다.
[자연환경]
산악인들은 이 주화산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 부근을 기점으로 금강[정자천], 섬진강[부귀천], 만경강[완주군 소양면 소양천] 등 3개 강의 수계가 나누어진다.
주화산이 산악인이 만든 이름이라고요?
그것도 2000년 대 이후에!
천만의 말씀!
말도 안 되는 얘기!
인터넷의 폐해!
누가 하나 긁적거려 놓으면 마치 그것을 자기가 만든 것인양 임의로 퍼나르고는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우형님이 산경도를 그린 건 1980년대입니다.
그 실체를 찾기위하여 산경표를 보겠습니다.
먼저 차례대로 금남호남정맥 편을 봅니다.
참고도 #5 금남호남정맥 편
위 산경표의 금남호남정맥 편을 보면 마이산 - 주화산珠華山 - 금산정맥錦山正脈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금산정맥은 금남정맥의 명백한 오기입니다.
이번에는 금남정맥 편을 봅니다.
참고도 #6 금남정맥 편
위 금남정맥 편을 보면 마이산 - 주줄산珠崒山으로 되어 있고 이명으로 주줄산酒崒山 혹은 酒耳山으로도 불린다고 써있습니다.
이는 필사본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배껴서 주줄산을 주화산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이 영인본을 제작할 때 인쇄공의 실수로 활자를 뽑으면서 珠崒을 珠華로 오독誤讀하여 활자를 잘못 뽑아 인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가지게 합니다.
이는 바로 밑의 금남정맥을 금산정맥으로 잘못 인쇄된 부분에 비춰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위 산경표에는 물론 다른 고서에도 주이산까지는 불렀던 이명이 있기는 하지만 주화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주줄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용담조에도 같은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고산조, 금산조에는 주췌산珠萃山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정오표에서 주줄산珠崒山으로 수정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해가 가시죠?
한자가 비슷하니 필사를 할 때 술에 취해서 썼는지 아니면 프로포필 같은 주사를 맞고 썼는지 그건 알 수가 없지만 유사한 글자로 써진 것으로 봐서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전의 주줄산은 현재의 운장산으로 보는 게 맞으며 주화산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찬성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줄산이 현재의 운장산이면서 삼정맥 분기봉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하듯이 마이산 - 주줄산으로 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우문愚問에 불과합니다.
간단하게 설악산과 지리산을 보면 됩니다.
즉 노고단도 지리산이요 천왕봉도 지리산이잖습니까?
굳이 우리 선조들은 이 갈림봉 같은 작은 봉우리는 크게 주줄산에 포함된다고 보았을 겁니다.
안산이나 황철봉도 설악산으로 보고 있듯이 말입니다.
아무렴 명색이 군자君者이자 사대부士
이는 택리지의 "(주줄산의) 북쪽에 있는 용담은 시내와 산이 기이한 곳이다. 주줄천과 반일암이 있어 병란을 피할 만한 곳이다."라고 적고 있어 지금의 주자천이 예전에는 주줄천이었다는 것만 봐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주자천을 검색하면 나오는 설명도 마찬가지로 아주 잘못된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자천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예전에는 ‘추줄천(酋崒川)’ 혹은 ‘수성천(壽成川)’이라고도 불리었다. 『여지도서』에 “[주자천은] 추줄산[현 운장산]에서 발원하고 달계천(達溪川)[현 금강]으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성천을 “추줄산에서 발원을 하여 달계천으로 들어간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호남 읍지』에는 “주자천은 수성천의 상류이며 별칭으로 추줄산에서 발원하여 ‘추줄천’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죠?
인터넷에 떠 있는 내용이라고 함부로 신뢰하면 큰일납니다.
추줄천이라는 단어도 주줄酒崒의 주酒에서 삼수 변을 빼먹고 쓴 글씨 아니겠습니까?
주자천이라는 이름은 대동여지도에도 나오는 이름이라 동의를 할 수는 있으나 주출천이 아닌 추줄천이라는 이름은 역시 명백한 오기라 보여집니다.
문제의 원인은 줄崒자가 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였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줄산을 주이산 혹은 운장산으로 부르는 것은 위와 같은 문헌에 의하더라도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주화산은 주줄산의 오기임이 명백한만큼 삼정맥 분기점의 산이름을 주화산이라고 하거나, 주화산이라고 불러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삼정맥 분기봉을 조약봉으로 부르는 것은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이 중요한 곳에 위치한 봉우리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이 산줄기들을 설명할 때 매번 '금남호남, 호남, 금남 등 삼정맥분기봉'이라는 긴 이름을 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작명을 하는 게 부르기 쉽고 기억 내지는 기록의 편의성 때문 아닙니까?
갑자기 캐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이름이란 게 그럴 겁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라고도 믿어지는 몽골 사람들의 이름을 분석해 보면 다 자연이나 생활 습관과 관련된 뜻들입니다.
아까도 잠시 봤지만 조석필 선생도 부득이 하게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주화산을 사용하였잖습니까?
이번에 나선 분이 바로 박성태 선생이십니다.
선생께서는 이러한 불편을 극복하고자 한 가지를 제안하십니다.
즉 무명봉으로 그냥 놔둘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조약치라는 고개가 있고 이 봉우리가 세 개의 정맥과 관련 있는 봉우리이니 아예 '조약봉'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신산경표에 터잡아 그린 산경도에 '조약봉'을 넣습니다.
선생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산꾼들에게도 회자膾炙될 정도로 보급도 많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 봉우리가 완주군과 진안군에 걸쳐 있는 봉우리이고 특히 진안군에서는 이 산줄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을 하고 있는만큼 하루빨리 지명위원회를 열어 이 산이름을 공식화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금남호남정맥이라는 겹침줄기 문제
그리고 이 금남정맥에 오기까지 경유했던 한 산줄기에 주목합니다.
바로 금남호남정맥에 관해서입니다.
우리는 간幹은 기본 산줄기요, 맥脈은 거기서 가지를 친 가지 산줄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맥이나 지맥은 당연히 대간 혹은 자신보다 더 상위 개념의 산줄기에서 가지를 친 산줄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지맥은 支脈 혹은 枝脈 등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하다.
이럴 때 대개 支脈은 산맥을 얘기할 때 쓰이는 개념이고 枝脈 은 산줄기를 얘기할 때 쓰이는 의미이므로 용례가 사뭇 다름
그러니 정맥은 당연히 대간으로부터 분기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지맥도 아닌 정맥이 자기보다 상위등급인 대간도 아닌 같은 부류의 정맥 즉 금남호남정맥에서 가지를 쳐서 호남정맥이나 이 금남정맥이 설정됐다는 점에 이르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좀 상해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산경표란 책이 우리에겐 바이블과 같은 성전이니 감히 거기에 의심을 갖는다거나 오류를 건드린다는 것이 불경죄에 해당되기에 그걸 건드리거나 훼손하면 안 될까요?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합리적인 의심을 갖는 게 인간이라면 그걸 한 번 분석이나 해보죠.
그렇다고 청담 이중환 선생이나 여암 신경준 선생 나아가 육당 최남선 선생이 무덤에서 깨어나 몽둥이 들고 쫓아오지는 않으실 거니까 말입니다.
우선 정맥의 요건은 대간에서 분기하여야 한다는 명제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그러려면 정맥은 10대강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도 머릿속에 넣어야 합니다.
자, 그럼 들어가 보기로 하죠.
다시 쓰기도 귀찮으니 전에 제가 썼던 글 중에 발췌를 했습니다.
이렇듯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에 의해 빼앗긴 우리 산줄기 이름을 되찾고 거기에 더하여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있는 산줄기를 찾아 그것들을 지도에 긋고 이름까지 부여해주는 데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물론 대동여지도 같은 고지도에 나오는 지명을 지금 지도에 대입하여 하나하나 꿰맞추는 데는 사실 무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단 그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지도 제작 취지에 맞춰 최대한 근접하게 작업을 하여 지금의 산경도가 그어진 것이라 이해하는 데서 본 작업도 터 잡은 거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선구자들의 절실한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산맥타령이나 하고 있을 끔찍한 현실을 생각해보면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닐 듯 싶다.
산경표라는 지리서를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 즉 산줄기 주행의 오류를 시정, 겹침줄기 문제점 해소 나아가 그 하위개념인 기맥과 지맥을 확립하고는 거기에 걸맞은 이름을 부여하여 세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통일된 산줄기 이름을 부르게 할 수 있게끔 한 박성태 선생의 작업은 실로 위대한 그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선생의 이 작업은 우리나라 지리학 역사의 반열에 서는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일 것이다.
산줄기 주행의 오류 시정
- 이하 산경표와 신산경표 등에 나오는 지명 즉 대동여지도 등에 나오는 옛 산이름 등은 현재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나오는 그것들과 최대한 일치하게끔 표기된 것이라 인정하기로 한다.
산경표는 원칙적으로 지형적 원리에 따라 선을 그으면서 10대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를 큰산줄기로 삼았고 신산경표 역시 이 원칙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즉 정맥은 10대강을 구획하여야 하므로 원산경표가 당시의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정맥의 주행이 도읍지 혹은 도성을 지나는 형식으로 그어진 것들을 자연스럽게 그 하구로 주행하게끔 유도하였는 바, 이로써 한북정맥은 한강 하구로 가게 되었고, 호서정맥과 금강정맥은 금강 하구로, 호남정맥은 섬진강 하구로 그리고 낙동정맥과 낙남정맥 등은 낙동강 하구로 각 가게 되었다.
- 호서정맥이나 금강정맥, 관북정맥, 해서정맥 등의 이름은 산경표가 아닌 신산경표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자세한 것은 졸고拙稿 '월간 산 2014. 5월호 ~ 2014. 12월호' 중 '7정맥 가이드' 참조
이는 북한 쪽의 관북정맥이나 해서정맥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맞춰 그 이름에도 변화를 주어 금남정맥은 금강하구로 주행을 하므로 원산경표와 구분하기 위하여 금강정맥으로, 금북정맥의 경우에는 호서정맥 등으로 그 이름도 현실에 맞게 변화를 줬다.
겹침줄기 문제의 해소
사실 신산경표의 최대 특장(特長)이라고 한다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정맥들의 끝을 10대강의 하구로 진행케 했으며 한남금북정맥이나 무명으로 있던 겹침줄기들의 문제도 해소하면서 그에 따라 명칭도 새롭게 확정한 것에 있다 할 것이다.
참고도 #7 북한 백두대간의 겹침줄기들
즉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의 겹침줄기('가' 줄기)와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의 겹침줄기('나' 줄기) 그리고 남쪽의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 등이 문제의 그것들이다.
우선 참고도 #7의 지도를 보면 10대강인 청천강이 백두대간에서 바로 발원하는 물줄기가 아니고 백두대간 상의 소마대령 분기점에서 서쪽으로 약 56.7km 진행한 곳에 위치한 웅어수산2019m에서 가지('가' 즐기)를 친 청북청맥과 청남정맥의 분기점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그리고 예성강 역시 바로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강이 아닌 백두대간이 남진하여 약643.1km 지점에서 만나는 두류산1323m에서 서진하는 줄기('나' 줄기)가 87.1km지점에 이르러 양지봉 분기점을 만나서 두 갈레로 갈라지게 되는 이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강이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청천강이나 예성강은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10대강에 포함되지 않고 정맥에서 발원하는 강이 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오류가 된다.
즉 10대강은 대간과 정맥 사이에서 발원하는 강이라는 대원칙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리 선조-산경표의 저자가 여암 신경준이 아니라는 다수설의 입장을 따름-들은 교묘한 방법을 동원했다.
즉 이 두 줄기에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산경표에서는 이를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 같이 독립된 정맥 이름을 부여함이 없이 그냥 무명(無名) 즉 이름이 없는 줄기로 남겨두었다(박성태 說).
무명줄기라 함은 대간의 연장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즉 위 '가', '나'줄기는 정맥이 아니라 백두대간이라는 말이다.
- 굳이 이름을 부여하자면 청아대간淸亞大幹이라고도 쓸 수 있겠으나 쓸데 없는 걸 양산하는 모양이니 자제한다.
그러니 백두대간과 청북, 청남정맥 등이 갈리는 그 사이에서 10대강 중 하나인 청천강이 발원하게 되고 이는 '10대강은 대간과 정맥 사이에서 발원하는 강이라는 대원칙'에도 합당하게 된다.
선생은 이점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산경표는 청천강 쪽은 더 긴쪽인 청북정맥 쪽으로 붙여 그 끝은 압록강 하구로 가게 하면서 그 이름은 기존의 청북정맥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관서정맥으로, 짧은 쪽인 청남정맥은 대동강 하구로 향하게 하고 그 이름은 청천정맥으로 변화를 꾀했다.
마찬가지로 두류산에서 갈라지는 줄기는 더 긴 쪽인 해서정맥에 그 겹침줄기 두류산~양지봉 분기점을 포함시키고 그 줄기의 끝을 기존의 장산곶에서 대동강 하구로 향하게 하면서 다만 그 이름만은 해서정맥으로 그대로 두었고, 양지봉 분기점에서 남진하는 임진북예성남 정맥은 그 이름만 예성정맥으로 단순화하는 변화를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언뜻 산자분수령에도 합치되고 모든 문제는 해결된 듯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즉 '산자분수령의 제2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점이 불만이다.
분명 신산경표에서는 '정맥은 10대강이 바다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게끔 그렸다.
참고도 #8 신산경표의 북한 쪽 산경도
하지만 그냥 합수점이 아니고 정맥이 발원시킨 그 물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위 참고도 #8의 산경도를 보면 관서정맥이든 청천정맥이든 청천강과는 관련이 없는 압록강이나 대동강으로 가면서 그 이름만 청천강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을 '커다란 오류'로 지목하고 싶다.
차라리 관서정맥이라는 이름이 청북정맥에서 청천강의 이름을 없앤 줄기의 대체 이름이었다면 '이 줄기의 끝이 당연히 압록강으로 가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명을 하게 되었다.'는 취지였다면 백번 동의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신산경표의 제안에 따라 압록강으로 가는 줄기는 관서정맥, 대동강 하구가 아니라 청천강 하구로 가는 것은 청천정맥(참고도 #8, '다'줄기) 혹은 청남정맥, 대동강 하구로 가는 것은 해서정맥 혹은 대남정맥, 예성강 하구로 가는 것은 예성정맥 등으로 그리게 되었을 것이고 북한의 4개 정맥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필자의 아쉬움과는 상관없이 박성태 선생의 이런 작업은 남쪽의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절차를 거쳐 한남금북정맥은 금북정맥에 포함시키되 그 정맥의 끝을 금강으로 가게하고는 그 이름을 호서정맥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금남호남정맥의 경우에도 그것을 더 긴쪽인 호남정맥에 편입시키는 한편 금남정맥은 그 끝을 역시 금강 하구로 주행을 변경시키면서 이름도 금강정맥으로 바꾸어 남한의 1대간 9정맥을 1대간 7정맥으로 변경 시키는 작업이 완성되었으니 사실 이것이 실제 신산경표의 핵심이라고 부를만도 하다.
그런데 원산경표에서 남한의 이 두 겹칩정맥 즉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은 북한의 '가'줄기와 '나'줄기 등의 무명줄기와는 달리 왜 자신의 고유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똑같은 겹침줄기인데도 말이다.
'종북 줄기'거나 '좌파 줄기'가 아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생긴 모양이 '촛불' 모양이 아닌 '태극기' 문양 같아서였을까?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이미 눈치채셨을 것이다.
참고도 #9 남한 쪽의 겹침정맥
그렇다.
아까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바로 10대강의 문제다.
북한 쪽의 '가'와 '나' 줄기가 각 분기하면서 그 사이에서는 10대강인 청천강과 예성강 등이 발원하지만 남한 쪽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 사이에서는 10대강과 관련 없는 지천支川이나 만경강이 발원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남한 쪽 두 겹침줄기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즉 백두대간에서 이들 두 겸침정맥이 갈라질 때 그 사이에서 금강과 한강 그리고 섬진강의 본류 혹은 지류 등이 발원됨을 본 것이다.
이 점이 두 줄기에 힘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부득불 10대강을 발원시키는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을 없애지 못하고 존치시키면서 이름까지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줄기와 산줄기!
이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우리 선조들은 인식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산경표인 것임을 우리는 새삼 확인하게 된다.
금강정맥은 뭐고 금남기맥은 또 뭔가?
그러면 '금강정맥'이니 금남기맥이니 하는 용어들은 또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다.
이는 산경표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다.
필요에 의해 이우형 선생이나 박기성 선생, 박용수 선생, 조석필 선생 등을 거쳐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에 이르러 용어의 정리 내지는 통일을 본 것일 뿐이다.
이럴 때 머릿속으로 떠올려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이다.
신산경표는 이 점을 철두철미하게 관철시키셨다.
물론 여기에는 지금도 무수한 저항이 뒤따른다.
산경표 교도들의 '성전聖典인 산경표'를 감히 건드렸다는 불만이고 항의다.
참고도 #10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산경도
위 참고도 #10을 보면 산경표 금남정맥의 끝은 부여의 금강 좁게는 백마강의 조룡대로 진행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호남정맥의 끝은 백운산에 머물러 있다.
산경표를 보고 그린 지도는 여기까지이기 때문이다.
필자와 이 정도까지 산경山經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어!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은' 어디에?"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그걸 바로 잡는다.
바로 박성태 선생이다.
아까 한 얘기를 반복한다.
선생은 옛 왕조가 있던 부여의 조룡대로 달려가고 있는 정맥의 끝을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충실하게끔 금강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호남정맥의 끝도 백운산에서 그친 것을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는 광양만 하구 즉 망일포구로 돌린다.
그러고는 합수점으로 가지 않고 일개 무명봉(=조약봉)에서 맥을 다하는 금남호남정맥을 본다.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대겠다는 전주곡이다.
금남호남정맥을 제외한 두 줄기의 도상 거리를 측정한다.
조약봉 분기점 ~ 외망포구까지의 도상 거리 약 454.5km, 반면 조약봉 ~ 금강하구언까지의 도상거리는 약 109.3km.
여기에 '승자독식제'를 적용한다.
따라서 겹침정맥인 금남호남정맥의 69.6km를 호남정맥이 가져가 약 524.1km로 정리한다.
이제 금남호남정맥은 적어도 신산경표의 산경도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연유로 금남정맥은 69.6km를 빼앗긴 채 109.3km만 가지게 되고 그 이름은 기존 산경표의 금남정맥과의 구분을 위해서 개명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금강을 책임지고 있는 줄기이기 때문에 '금강정맥'으로 이름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금남정맥 등 3개의 정맥이 '호남정맥'과 '금강정맥' 두 개로 정리가 되고 산경도의 지도도 바뀌게 된다.
금남정맥이라는 이름의 변천사變
이제 다 끝났는가?
아니다.
금강기맥 혹은 금남기맥 등의 이름을 정리하여야 마무리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참고도 #11 금남정맥, 금강정맥, 금남기맥
우리는 처음에 산경표를 따라 걸으면서 이 부근에서 만난 정맥은 금남정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금강정맥이 나오고 금남기맥이 나오고 또 대동금남정맥이니 하는 용어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뭐가 맞는 거고 뭐가 틀리는 건가?
이에 대한 정답은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일 것이다.
그것을 접근하고 진행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점만 확실하게 해 두고 싶다.
위 참고도 #11을 보면 기존의 즉 원산경표의 금남정맥은 노란선 + 녹색선이다.
그런데 이 금남정맥이 합수점으로 가지 않기 때문(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그 끝을 군산의 금강하구언으로 돌렸다는 것도 이미 지적했다.
그 작업은 신산경표가 맡아서 수행을 했다.
그 결과물이 감색선이다.
그리고 명명하기를 금강정맥이라고 했다는 점도 이미 얘기했다.
그러므로 신산경표가 얘기하는 금강정맥 루트는 노란선 + 감색선이 된다.
이제부터는 신산경표의 관점이다.
금강정맥을 설정하고 나니 이제 나머지 자투리의 처리가 문제가 된다.
신산경표는 이때 기맥岐脈이라는 계급을 이용한다.
즉 ①정맥급의 세력을 가졌으면서도 10대강을 끼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된 산줄기 가령 땅끝기맥, 영산기맥에 기맥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②이번 케이스같은 폐족廢
그리고 그의 원래 이름이 '금남'이었으니 '금남기맥'으로 붙이자고 한다.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이름.
바로 대동금남정맥이다.
참고도 #12 대동금남정맥 . 조은산 선배님 블로그에서 퍼옴
이 대동금남정맥은 참고도 #11의 감색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용어는 신산경표가 생기기 전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도 순전히 '설명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위 지도는 대동여지도이다.
그러니 대동금남정맥의 '대동'은 대동여지도에서 따왔다는 말이니 곧 대동금남정맥은 원산경표의 금남정맥에 상대되는 개념인 것이다.
고산자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함에 있어 그 발문에 "南流爲鴨綠 東分爲豆滿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고 적고 있다.
즉 백두산 주위를 설명하면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되고 동으로 흘러 두만강이 된다. 山自分水嶺 남북으로 구불거리며 이어져 연지봉, 소백산, 설한 등의 고개가 되었고..."라고 썼다.
참고도 #13 대동여지도
바로 위 지도 우측의 386자의 한자로 된 글이 바로 대동여지도 발문이다.
우측에서 4번째 줄 여섯번 째 글에 바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부분이 대동여지도 숭실대 본에는
‘東分爲豆滿江自分水嶺’으로 되어 있어 오히려 산자분수령이 아닌 강자분수령으로 읽힐 수 있는 오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산자분수령의 올바른 해석은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고 하여 '자自'를 부사 '스스로'가 아닌 조사 '~으로부터'라고 해석을 하여야 한단다.
그리하여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뻗어서 연자봉, 소백산, 설한 등의 고개가 된다."고 읽어야 한다는 것(전북대 교수 이강원. 2005. 1. 28. 박수진, 손일 교수 공동논문 'DEM을 이용한 산맥의 확인과 현행 산맥도의 문제점 및 대안의 모색에서 발췌)이다.
그러면 우리도 굳이 그 부분을 그렇게 해석하여야 할까?
그 '산자분수령'이 산경표 안으로 들어오면 해석을 달리하지 않을까?
고산자가 이 발문에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을 쓰고 위 지도에서 보듯 이미 산경표의 실체와 존재를 알고 있었던 고산자는 이 대동금남정맥 혹은 신산경표의 금강정맥 그러니까 위 지도의 감색선 자세히는 노란선 + 감색선을 녹색선보다 굵고 짙게 그림으로써 다른 정맥과 그 등급을 같이 했다는 점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고산자는 산경표의 금남정맥보다는 즉 사대부들에 의하여 그어진 그런 줄기보다는 실제 산줄기에 충실하고자 중인의 입장 아니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사실대로 산줄기를 그렸고, 그 산줄기는 당연히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의해 금강하구로 가는 산줄기를 정맥의 주줄기로 보았던 것이다.
후세의 사람 누군가는 그것을 대동여지도에서 주창한 금남정맥이라고 하여 '대동금남정맥'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대동금남정맥을 다시 체계화 한 이가 바로 박성태 선생인 것이다.
그러니 택리지에서 이 줄기가 만경으로 가는 것을 산경표가 유교적인 입장에서 그 끝을 백제의 도읍지로 잠깐 틀었었고, 그것을 고산자는 대동여지도에서 바로 잡았는데 최근 '무명씨無名氏'에 의해 '대동금남정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신산경표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 금강정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시 정리한다.
금남기맥이니 금강정맥이니 하는 이름들은 '신산경표'라는 책 발간 이후 그러니까 2009년도 이후에 정립된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걷고자 하는 금남정맥은 신산경표가 아닌 원산경표 그러니까 산경표에 따라 걷는 길이다.
용어만큼은 확실하게 정리한 다음 걷자는 것이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이 작업은 마찬가지로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 그리고 금북정맥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기존 남한 1대간 9정맥은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이 없어지고 금북정맥의 끝은 금강하구로 가면서 그 이름은 호서정맥, 금남정맥 역시 그 끝이 금강으로 가면서 그 이름을 금강정맥으로 개명작업을 마치게 되면서 1대간 7정맥으로 바뀌게 된다.
이게 신산경표의 내용 중 정맥에 관한 부분이다.
어떻게 좀 이해가 되셨나요?
이 작업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신산경표가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을 금과옥조로 삼아 산경표 교도들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왜 7정맥을 만들려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금남정맥을 진행하는 것은 부여 조룡대로 가는 것이긴 하지만 이는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위배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을 하고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제에 대동금남정맥이라고도 불렸던 금강정맥도 걸어보는 게 몸으로 이런 점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상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연구하여 살펴본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발견했을 때 언제라도 그 의견을 개진해 주신다면 우리 산줄기를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한편 박성태선생의 치적이라 일컬어지는 기맥과 지맥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산으로' 박흥섭 같은 이는 차라리 새로운 산경도 즉 수경水經에 따른 그러니까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충실한 산경도를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대한산경표'라 하여 그걸 듯한 이름까지 부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작업에 필자도 동참하여 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데...
사실 필자나 '산으로' 박흥섭님의 의도가 위와 같은 박성태 선생님의 근본 취지에 부합만 할 수 있다면 멋진 작품으로 승화되길 기대해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고민을 해봅니다.
산 행 개 요
1. 산행일시 : 2017. 2. 5. 일요일
2. 동행한 이 : 해밀 산악회 정맥 팀
3. 산행 구간 : [금남정맥 2회차] 전주공원 ~ 조약봉 ~ 보룡고개 ~ 699.3봉 ~ 황새목재 ~ 연석산 ~ 운장산 서봉 ~ 피암목재
4. 산행거리 : 16.04km (올해 누적 산행거리 :109.34km)
구 간 | 거 리 | 출발시간 | 소요시간 | 비 고 |
전주공원 |
| 09:40 |
|
|
조 약 산 | 0.94km | 10:00 | 20 |
|
보룡고개 | 3.42 | 11:53 | 113 | 40분 행사 |
699.3봉 | 1.44 | 12:47 | 54 | 20분 오찬 |
황새목재 | 1.17 | 13:44 | 57 |
|
연 석 산 | 4.76 | 16:16 | 152 | 10분 휴식 |
운장산서봉 | 2.27 | 17:42 | 86 |
|
피암목재 | 2.04 | 18:51 | 69 | 10분 휴식 |
계 | 16.04km | 09:11 | 07:31 | 실 소요시간 |
산 행 기 록
지도 #1
09:40
4년 만에 찾습니다.
호남정맥을 할 때 들렀던 곳이니 격세지감입니다.
금남정맥은 금남호남에서 바로 이어가면서 지났으니 다른 이들과 다르게 한 번은 생략한 모양새입니다.
행장을 갖추고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삼정맥 분기봉인 조약봉에서 안산제까지 올릴 모양이고 짐 한 덩어리를 제 배낭에 넣었으니 자못 묵직함이 어깨에 전해옵니다.
해밀산악회의 특징.
안산제와 종산제만큼은 확실하게 치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서 오는 이 산과 산줄기를 잠시 빌려쓰다 가는 것이니 산신께 치렛거리나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러니 제물 하나하나 정성스레 준비하여 오는 것이니 행사 자체가 격식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09:48
임도를 타고 가거나 호남정맥으로 들러 조약봉으로 오르는 길도 있으나 가장 가까운 길은 그래도 임도를 따르다 지도 #1의 '가'의 지점에서 계곡을 따르는 게 제일 낫습니다.
그러다 좌측 낮은 비알을 치고 100여m 정도 오르면,
09:54
바로 임도가 나오고 여기가 조약치입니다.
벌써 덥습니다.
오늘 비가 예보되어 있지만 12시경 부터는 맑아진다는 예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옷도 챙기긴 했지만 날이 포근하여 장갑은 여벌로 하나 밖에 챙기지 못한 점이 찝찝합니다.
더욱이 가방을 바꿔 오는 바람에 아이젠을 챙기지 못했으니 ....
이부장님께서 쓰시다 보관하고 있는 한 벌의 아이젠을 빌리기는 하였지만 한 짝은 사용불가한 것이군요.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배낭에 넣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합니다.
10:01
옷을 갈아입는 등 게으름을 피우다 올라가니 삼정맥분기봉인 조약봉입니다.
진안군 부귀면에서 시작한 산행은 이 조약봉에 이르러 완주군 소양면을 만나게 됩니다.
아까 실컷 얘기했으니 이제는 이런 코팅지나 안내판은 안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를 올려야죠.
총무님은 나물, 누구는 과일, 어느 분은 전.
봉회장님은 젯술로 국화주.
저는 입만 가져왔습니다.
대신 포터의 역할은 했으니 그나마 덜 미안합니다.
경건하고 제를 올립니다.
공교롭게도 제주祭主와 주제자 두 분 다 제가 전역한 맹호부대 선배님들이시군요.
정성스런 제가 끝나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저로서는 음복주를 큰잔으로 두어 잔 받아 마십니다.
속으로는 산신령님께 우리 대원들의 무탈한 산행을 기원드리면서 말입니다.
이한검 대장님이 금남정맥 방향으로 자신의 표지띠와 제 것을 각 하나씩 걸어둡니다.
40분 정도 행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금남정맥 산행을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진안군과 완주군의 군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입봉으러 가는 길.
우측으로 진안써미트골프장이 보이는군요.
봉우리 두어 개를 힘겹게 오르내립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
저걸 또 치고 올라가야 하는군요.
그러고보니 생김새가 삿갓笠같이 생겼군요.
11:14
그래서 입봉笠峰입니다.
헬기장으로 조성된 입봉에서 4등급삼각점(진안403)을 확인합니다.
사진을 찍는 등 상당한 시간을 까먹고는 보룡고개로 방향을 틉니다.
산양삼 재배지의 녹슬은 철망과 부탄가스통을 보면서 정맥길을 걷습니다.
좌측으로 이동통신중계기가 보일 무렵 새롭게 설치한 녹색 펜스를 만납니다.
펜스를 넘어,
지도 #2
오늘 구간 중 가장 위험한 곳인 중앙분리대를 넘어야 하는 곳입니다.
횡단보도가 없음을 아는 운전자들이 탄력을 받기 위하여 더 가속을 하는 구간입니다.
미리 분리대를 넘어가 부귀면 방향에서 올라오는 차량에게 속력을 늦춰달라고 수신호를 보냅니다.
한 5분 간 보룡고개가 시끄럽습니다.
우측에 보이는 축대에서 좌틀하여,
정맥 들머리로 들어섭니다.
이정표는 운장산 서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부터 호남알프스를 만나는 699.5봉까지는 군소리말고 그냥 묵묵히 올라가야만 합니다.
보룡고개가 해발 460.3m이니 240m정도를 한방에 올려야 하니 좀 버겁다는 얘깁니다.
12:18
일렬로 혹은 일행과 좀 떨어져서 묵묵히 올라갑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상을 펴려고 하는데 갑자기 싸락눈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대강 막걸리 한잔 먹고 일어섭니다.
몇 분은 비닐타프를 치고 몇 분은 매트를 둘러쓰고....
앉아 있어봤자 한기만 느낄테고...
12:35
일어납니다.
12:47
그러고는 호남알프스를 만난는 699.3봉입니다.
여기서 좌틀하면 율치 ~ 원등산 ~ 위봉산을 거쳐 종남산 ~ 송광사로 진행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보통 호남알프스라고 하면 위 루트를 거꾸로 진행한 다음 여기부터는 금남정맥 루트를 이용 서봉 ~ 운장산까지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운장산 동봉 ~ 복두봉 ~ 구봉산 ~ 양명주차장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제가 걸은 바로는 실거리 46.16km 1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율치같은 곳에서 중간 보급을 받은 다음 가벼운 배낭으로 진행을 하면 한방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2:54
눈이 많이 쌓이고 있습니다.
자켓을 벗고 아예 우의로 갈아 입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날은 우의가 제격입니다.
13:00
676.7봉에서 삼각점을 확인하고,
13:09
701.9봉도 편하게 진행합니다.
이미 세 번 째 지나는 루트이므로 눈에 익은 곳이라 몸이 잘 적응을 합니다.
머릿속에는 황새목재만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황새목재가 나와야 연석산을 오르게 되고 그래야 서봉을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날 서봉의 모습은 어떨까 너무 궁금해지기만 합니다.
13:29
내려가자,
13:42
496.9봉은 황새목재입니다.
억새가 다 누워있군요.
우측의 민가는 작년에 짓던 황토방도 다 완공을 하였고 개 짓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이 황새목재에서 651.8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윤형철조망으로 진출입을 막아놨습니다.
이해합니다.
얼마나 많은 산객들이 이 농장으로 와서 물을 부탁하고 뭘 부탁하고 ....
한두 사람이라면야 이해를 하겠지만 주말만 되면 들아닥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성가실 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합니다.
그런 성가심이 결국 철조망이라는 장애물을 생각하게 했고 그 철조망이 산객과 민간인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객들의 자제가 요청되는 대목입니다.
그 황새목재에서 뒤를 돌아봅니다.
작품입니다.
13:45
대원들을 다 올려보내고 이한검대장님과 뒤에서 슬슬 출발합니다.
계속 오름이죠?
중간에 대여섯 봉우리를 넘기는 하지만 길게 보면 거의 일직선을 꾸준하게 올라간다고 보면 됩니다.
산죽밭에서 눈이나 털어내면서 가면 되죠.
여름이었으면 신경 좀 썼을 법한 곳.
하지만 산죽만 있는 게 아니죠?
전나무 같은 것도 자주 볼 수 있고,
지도 #3
그냥 일반 참나무나 그외 이름 모를 나무도 자주 봅니다.
조망터를 그냥 지나야 하는 이쉬움이 있으나 이런 날은 그냥 눈만 보며 걸을 수밖에....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이런 눈구경을 언제할 수 있습니까?
15:43
그러다보니 벌써 연석산 바로 아래에 있는 821.2봉 전위봉입니다.
괜찮은 날씨 같으면 우측의 궁평리 뒤로 펼쳐지는 운장산 가지줄기들을 볼 수가 있으며 멀리 덕유산과 지리산도 볼 수가 있을 텐데....
좌측의 호남알프스 라인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고....
15:44
797.1봉에서 우틀하고,
15:51
완만한 821.2봉도 지납니다.
지도 #4
연동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16:16
바로 연석산입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우틀합니다.
대원들도 야간 산행이 필수적임을 깨닫고 좀 서두르는 분위기입니다.
이제부터 만항재까지는 무조건 내리막입니다.
만항재하니까 대간길이 생각나는군요.
16:32
여름에 이 만항재를 지나다보면 꼭 몇 분이 누워서 오수를 즐기는 곳입니다.
적당히 그늘도 지고 다시 올라갈 걸 생각하니까 한숨 때리고 가는 게 육체건강에 좋다는.....
16:45
이 멋진 공간을 지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군요.
이렇게 무거운 눈에 적당히 휘어진 소나무도 볼 수 있고....
17:01
전나무 군락지를 보면서도 묵묵히 비알을 오르면서 고도를 높입니다.
17:04
계단이 나오는군요.
이 계단은 운장산을 지나 구봉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7:12
드디어 바위 구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로프 구간 하나를 지나고,
로프를 잡으며 그 구간을 지나려니 장갑이 흠뻑 젖습니다.
기온이 그나마 높고 찬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입니다.
만약 차가운 바람에 온도가 낮았으면 바로 동상으로 갈 그런 모드입니다.
제2 바위 구간은 좌측으로 우회하여 통과하고.....
17:42
그러고는 운장산 서봉입니다.
정상석을 봐야죠.
보시다시피 궁항리 방면은 그저....
산바라기님에 이어 회장님께서 정상에 올라가셔서 노익장을 과시하십니다.
지칠 줄 모르는 건강을 과시하시는 회장님.
오래오래 산행을 즐기십시오.
지도 #5
17:47
뒤에 오시는 분들이 상당히 체력이 떨어졌다고 하시는군요.
이한검 대장님이나 젊은총님이 잘 모시고 오리라고 믿고 하산을 서두릅니다.
피암목재 까지는 2,3km.
뭐 다 왔다는 얘기겠죠.
하지만 겨울철 하산길.
그리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죠.
특히 저는 한 쪽 발만 아이젠을 했으니 스틱에 들어가는 힘이 더 조심스럽게 느꺄집니다.
18:01
우틀하고....
18:17
바위 구간 하나를 지나 갈림길에서 우측을 따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부장님께서 차량 라이트를 환하게 켜시고는 대원들을 맞이하십니다.
오늘 새차 고사를 지내려고했는데 하산 시간이 늦어져서 부득불 시산제 때로 미루게 됐군요.
아쉽습니다.
18:51
상당히 늦은 시간입니다.
그래도 대원들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쳤고 이부장님께서 눈이 많이 오기 전에 서둘러 고개 정상에 올라오시는 바람에 통제를 받지 않고 올라오셔서 무난하게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는 길에 들른 '화심순두부.'
예전 추억을 기억 나게 하기에 충분한 맛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