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오와 걷는 지리산' 서문 중에서
암중모색暗中摸索인가요?
지난 번 지리동부를 하며 로키문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새깁니다.
화대종주를 하고 싶다는 얘기였습니다.
'홀가분' 대장님께 얘기를 전하니 신년 첫 산행이 어떠냐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콜!
12명으로 성원이 구성됩니다.
멤버 면면이 대단한 분들입니다.
차량 섭외나 뒤풀이 장소 등 홀대장님의 수고가 많습니다.
사실 화엄사~대원사를 잇는 ‘화대종주 코스’는 이미 고전classic route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한때 산꾼들의 로망이었던 코스가 있었다.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배낭의 무게 등으로 일시종주가 어려웠던 때 지리의 가장 긴 능선으로 알려진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코스로 이를 줄여서 ‘화대종주’라 불렸다. 44.2km나 되는 그 긴 거리를 당시 꾼들은 1박2일, 2박 3일로 걸었다. 그렇게 난이도 있는 코스로 알려졌다. 아직 ‘extreme'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거리를 일시에 종주한다는 건 아무래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리라. 그런데 체력도 좋아졌고 장비도 좋아진 지금 그 ‘화대종주’를 ‘일시종주’라는 이름으로 ‘한방’에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코스가 됐다. 이 화대종주의 44.2km는 공단에서 측정한 숫자이므로 이제 ‘화대종주 44.2km’는 공식 거리로 못 박으면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이 코스는 대원사~치밭목대피소~중봉~천왕봉의 대원사 코스와 지리 주릉 그리고 주릉의 코재~화엄사의 이음이다. 생각해보면 산경표가 알려지기 이전인 1990년 까지는 중거리 산행을 꿈꾸는 이들이 꼭 한 번쯤은 걷고 싶어 하고 동경하던 그런 종주코스였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알려지고 정맥, 지맥 산행이 일반화 되면서 예전의 명성은 약간 빛을 바랜 느낌은 있다. 하지만 매년 시행되는 ‘화대종주 산악마라톤 대회’와 항상 지리산을 그리거나 예전 시절을 꿈꾸는 올드팬들로 꾸준하게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지리산하면 그래도 ‘화대종주’이기 때문이다. 연기조사가 창건한 양대 사찰은 산청군과 구례군을 대표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화엄사는 544년, 대원사는 548년으로 창건 연대는 각 다르지만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종찰로, 대원사는 선불간경도량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구니 도량으로도 유명한 대원사가 있는 유평계곡은 지리산 중봉과 새봉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은 덕천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그 길이만 해도 약 12km 정도 되니 그 계곡의 아름다움이란 필설로 다하긴 어려울 것 같다. - - '현오와 걷는 지리산' 화대종주 코스 중에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버스가 구례에 들어서자 준비 모드로 들어갑니다. 저도 단팥삥을 먹으면서 음료수로 입가심을 하고 미리 약도 먹습니다. 예전에 교통사고 후유증이 있던 것이 재발이 됐나? 자꾸 왼쪽 날갯죽지가 욱신거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입니다. 산 행 개 요
1. 산행일시 : 2019. 01. 05. 토요일 2. 동행한 이 : 홀가분, 이한검, 날다람쥐, 산수, 강산, 맹이, 로키문, 타이슨, 나무꾼, 산그리며, 복이언니, 현오 등 12명 3. 산행 구간 : 화엄사~노고단~연하천~벽소령~세석~장터목~백무동 4. 산행거리 : 34.4km (올해 누적 산행거리 : 51.15km)
구 간 거 리 출발시간 소요시간 비 고 화 엄 사 02:50 노 고 단 7.0km 05:13 143 연 하 천 10.5 09:30 197 벽 소 령 3.6 11:10 100 15분 휴식 세 석 6.3 14:38 208 주차장 1.0 16:40 계 34.4km 13:50 13:35 실 소요시간
거 림
6.0
16:33
115
7
산 행 기 록
2019. 1. 5. 02:40
화엄사 주차장에 하차하여 장비를 점검합니다.
02:50
그러고는 화대종주 start line 앞에 섭니다.
화대종주의 화엄사부터 대원사까지의 거리는 44.2km.
공단에서 50m 줄자로 체크한 거리니까 아무래도 확실할 겁니다.
화대종주는 다른 코스와는 달리 스타트 라인과 피니시 라인이 명백하기 때문에 기록 경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바로 이곳이 스타트 라인이 되겠고 대원사 게시판 앞이 피니시 라인이 됩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자기 자신의 기록을 체크하는 갓고 화대를 즐기는 또 다른 재미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록은 'J3 클럽'의 '미소맘'이 가지고 있는 7시간 43분입니다.
기념 촬영을 하고,
44.2km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지리산에서는 지리태극종주에 이은 두 번째 중거리 코스인 만큼 자기 페이스 조절이 중요합니다.
고수들이니 잘 알아서 하시겠죠.
03:22
연기암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지나,
04:04
중재를 지납니다.
선두는 벌써 멀리 내뺕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앞서가는 대원들을 쫓아가기 참 힘들군요.
도대체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넙적다리로 전달되는 축에 고장이 났나?
04:53
드디어 코재입니다.
백두대간 주릉에 거의 다 왔다는 얘기!
그나저나 머릿속을 떠도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포기'라는 단어입니다.
이거 이러다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가 지리가 이렇게 힘들기도 오랜만이라는 느낌입니다.
며칠 전 신정일 선생님이 보내준 니체의 글이 떠오릅니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그래.
시련이다.
내게 포기란 없다!
05:01
드디어 지리주릉입니다.
대간을 하는 사람이면 "드디어 대간에 올라섰다."고 해야 하고,
화대를 하는 사람이라면 "드디어 지리 주릉에 올라 섰다,"고 얘기해야겠죠.
우틀하여 대간길인 지리주릉을 걷습니다.
05:03
무넹기입니다.
물을 넘겨준다는 의미죠.
즉 만수천이 되어 남강으로 흐러들어 갈 물을 마산천으로 흘려보내 섬진강이 되게 한다는 애기입니다.
무넹기?
그런데 갑자기 장감독이 큰소리를 친다.
“형 지금 이 길이 백두대간 능선이잖아! 그런데 왜 이 물은 능선을 따라 흐르다 왜 우측 만수천 쪽으로 안 가고 화엄사 쪽으로 가는 거야! 거긴 섬진강으로 가는 방향이잖아.”
그렇다. 다리를 건너 성삼재로 향하다보면 코재 바로 전에 왼쪽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이 물은 분명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은 장감독이 지적하듯 만수천으로 가야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의 예외란 말인가?
미리 얘기하자면 이 물은 노고단 물이 맞고 이 수로는 인공수로이다. 예전 화엄사 부근 그러니까 구례의 들에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때 이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사 쪽으로 넘겨주기 위해 인공 수로 하나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이 수로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물을 넘겨주었다.’고 하여 무넹기이다. 그리고 이 물은 낙동강이 아닌 족보에도 없는 섬진강으로 가게 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70쪽
그런데 추위 때문에 다 얼어 붙었습니다.
도로를 따릅니다.
돌계단으로 올라 노고단 대피소로 오르면 대피소 좌측으로 안내판이 하나 보입니다.
05:16
노고단에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 휴양지 얘깁니다.
즉 이것에 관한 얘깁니다.
지리산과 기독교
1905년 미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카스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은 조선에서, 미국은 필리핀에서 각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하자는 취지의 협정이었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도 승리로 이끈 일본의 군사력이었으니 미국도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밀약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은 한층 가까워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조선을 합방하고는 1912년 그동안 눈독을 들이던 천연 보고 남부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일대를 학술 목적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동경제국대학과 규슈대학에 '지리산 전남연습림'이라는 이름으로 관리권을 넘긴다. 지리산 남부와 호남정맥의 광양 백운산 일대의 산림이 아무런 절차 없이 일본 땅이 된 것이다.
한편 한일합방 이전에도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 땅을 밟은 미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된 뒤에도 달라질 게 없었다. 당시 조선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말라리아, 세균성 이질 등 여름철 풍토병 때문에 선교사의 자녀 10명 중 8명이 사망했고, 67명의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보건 문제에 취약했다. 그래서 1922년 미국 남장로 교회에서는 저간의 사정을 조선총독부에 고하고 휴양시설 건립을 허가 받는다.
그들이 길지로 선정한 곳이 지리산의 노고단 부근이었고 그들은 그때부터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1940년경까지 약 15년 동안 노고단 부근에 호텔과 주택, 교회, 수영장 그리고 9홀 규모의 골프장과 스키장 등 56동의 건축물을 지었으며 여기에는 한국인 직원 50여 명이 상주하며 관리하였다. 이 건축 자재들은 지리산 일대에서 채취하고 벌채한 돌과 나무였음은 물론이다.
선교사 측에서는 “이곳은 사치품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피난처였고, 선교사들에게 성서 교육을 하는 곳이었으며, 성서 한글 번역 작업을 했던 공간으로 초창기 한글 문법을 정리해 한글 정착에도 큰 역할을 했다. 개신교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도 의미가 깊은 곳”이라는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어쨌든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해방이 되었다. 인근 주민들이 일부 내부시설물들을 떼어가기도 했고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설물에 대한 소각 등으로 인근 산림까지 피해를 주게 되었다. 그 후 전투기의 폭격과 군시설물의 설치, 불법 도벌 등으로 훼손은 더 극심해졌으나 1967년 12월 29일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복원과 보존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진 4〉 노고단에 있는 선교사 유적지.
현재 노고단에는 호텔시설이었던 석조건물 한 동만이 그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서 있다. 그 후, 1960년 경 부터 지리남부의 왕시루봉에도 위 남장로회에서 1차 때와 같은 이유로 장소만 바꿔 휴양지가 조성되었다. 1962년 휴 린튼(한국명 인휴, 1926∼1984)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이 단지는 현재 집 10채와 교회 1채, 창고 1채 등 총 12채가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미국·영국·호주·노르웨이 등에서 온 선교사들이 자국의 건축 양식에 온돌과 아궁이를 가미해 지은 집들이어서 건축학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실제 지금도 철제 변기, 세면기, 침대나 벽난로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휴양촌의 설립자 휴 린튼은 현재 세브란스 병원에서 외국인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인요한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1895년 호남 지역에 파견된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이 공로로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인요한은 1959년 태어났는데 1993년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했고, 26차례 방북해 북한 결핵 퇴치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여 2005년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그는 위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의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1984년부터 지금까지 자비를 들여 수양관을 관리해왔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겨 노고단 예배당 유적과 왕시루봉 선교사 수양관 등 두 곳을 등록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사실 이곳 왕시루봉 일대는 1300m 정상부에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 있으며, 정상에서 전망하는 수려한 경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2017년 3월부터 2027년 2월까지 출입금지구간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리산 반달곰의 중요서식지로 확인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여러 희귀생물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리산의 핵심 보존지역이기 때문에 이런 사업은 환경관련 단체로부터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사진 5〉 왕시루봉에 있는 선교사 유적지.
또한 화엄사 측은 “이미 2008년에 순천 성지화운동본부에서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던 기독교계의 전례로 보아 문화재 보존 사업만을 한다는 것은 이를 믿을 수 없으며, 왕시루봉은 기독교 성역화를 넘어 인요한씨 개인 가계家系의 성역화 사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인요한 측은 “왕시루봉 유적은 문화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이미 용역조사를 통해 관련 전문가들의 판단으로 문화재 지정을 진행할 것이며, 성역화사업은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녹녹치 않은 분위기이다.
이에 화엄사 측은 “문화재 지정 등을 통해 향후 성역화를 위한 기반으로 삼을 것을 우려한다.”고 밝혔으며 나아가 “문화재 지정이 되면 관리를 위해 상시 출입이 진행되고, 주변정비와 함께 향후 유적지 방문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출입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리산 생태계의 훼손은 심해 질것으로 예상한다.”고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05:18
그러고는 노고단 대피소입니다.
노고단 대피소는 함태식 선생과는 떼레야 뗄 수 없는 곳이죠?
고 함태식 선생과 노고단산장
지금의 노고단 대피소는 노고단 산장이었다. 서부지리의 관문 구례를 떠나 처음 만나는 대피소이기도 하다. 아니 산장이었다. 당시에는 이 노고단 산장을 비롯해 치밭목, 로타리 등 8개의 산장이 있었다. 이 산장은 조선시대 때 각 봉우리의 정상부 부근에 있던 암자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였다.
그러던 것이 여순사건에 이어 한국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노고단에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되자 아무래도 지리산을 먼저 찾은 이들은 구례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노고단으로 소풍을 온 기억이 잠재해 있었을 것이니 능히 그럴 법도 하다. 그 실례가 1955년 5월 5일 결성된 구례의 ‘지리산 산악회’의 전신 ‘연하반 산악회’이다. 구례중학교 교사였던 우종수 선생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산악회는 두 번이나 길상봉吉祥峰 등정에 실패한다. 미로같이 얽힌 작전용 소로와 잡초 그리고 잡목 때문이었다. 악착같은 집념으로 결국 그해 5월 말 세 번째 시도에서 성공을 하게 되는데 이때 길상봉 인근에 있던 선교사 별장들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던 1970년. 등산객들이 늘어나게 되자 한라산 용진각을 시작으로 설악산의 장수대, 백담, 희운각 등의 뒤를 이어 1971년 지리산 길상봉에도 무인대피시설 당시 용어로는 ‘산장’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니 그 이름이 노고단 산장이었다. 무인시설이다 보니 관리가 형편없었는데 이때 지리산에 무인대피시설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접한 故 함태식 선생은 잘 다니던 직장을 내동댕이치고는 산장관리인을 자처하고 이곳에 들어오게 된다. 1972년 8월의 일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선생은 등산로 안내는 물론 조난객 구조, 주변 청소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지리산의 노고단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던 선생이 1988년 1월 9일 17년을 헌신하며 지키던 기존 노고단 산장이 폐쇄되고 3층짜리 노고단 대피소가 새로 지어짐에 따라 같은 해 1월 31일 피아골로 내려온다. 떠밀려 내려온 것이다. 861번 도로의 개통으로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을 대비한 공단 측의 얄팍한 상술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선생이 노고단에서 쫓기다시피 피아골로 내려올 때 그 눈 덮인 지리산 길을 여섯 명의 군인과 선생의 조카 그리고 청년 한 명이 짐을 옮겨 주었단다. 눈이 수북이 쌓여 무릎까지 빠지는 산길을 힘들게 걸어 질매재를 거쳐 피아골 삼거리의 썰렁한 대피소로 내려간 것이다. 선생은 그때의 참담했던 심사를 '귀양을 떠나는 선비의 심정'에 비교했단다. 선생의 비애감이 느껴진다.
'허허로움 때문이었을까. 질매재에 이르는 길은 유난히 멀고 험하게 느껴졌다. 아마 귀양을 떠나는 선비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이다. 나는 질매재에 이르러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구부숨한 봉우리 위로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 쌓인 흰덤봉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 줄기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대피소 식당에는 몇몇 사람이 이른 아침을 먹고 있군요.
우리 대원들은 어디쯤 기고 있을까?
아이젠을 착용하고 우측 돌계단으로 오릅니다.
05:41
길상봉.
즉 노고단 정상은 오르지 못하니 통과.
길상봉을 좌로 우회하여 진행합니다.
공단에서 길상봉이라는 이름 대신 노고단이라는 제단 이름으로 모든 걸 표기하니 이제는 길상봉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노고단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한편 산악신과 산천신 제사는 나라에서 직접 관장하였는데 제단을 마련하거나, 단이 없으면 3칸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된다. 현재 화엄사 옆 남악사가 세 칸으로 지어진 사당이다. 노고단의 이전 이름은 노구당老嫗堂이었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05:57
노고단 고개 초소를 지나 노고단이 있는 길상봉을 우회하여 진행한다. 10여분 지나면 우측으로 ‘국립공원특별보호구역 안내판’이 붙어 있고 그 뒤에 서 있는 유명을 달리한 산꾼을 위한 비목碑木은 이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루터기 정도만 남겨둔 채 삭아가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안내판으로 막힌 이 길이 노고단에서 바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05:58
사실 예전에는 안내판으로 막힌 이 길이 노고단에서 바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안내판을 지나 100여m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역시 출입금지 펼침막이 왕시루봉 루트를 안내해준다. 왕시루봉은 KBS 중계소를 지나 문수대에서 연결이 되기도 하지만 길 찾기는 이곳이 더 부드럽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06:15
지도와는 다른 곳에 표기된 돼지령을 지나,
06:22
피아골 삼거리를 지납니다.
여기서 우틀하며 피아골.
주릉은 좌틀입니다.
연곡사가 있어 연곡천이라 부르는 지천을 합류한 내서천 옆 865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이름도 유명한 피아골이다. 피아골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조금은 섬뜩한 감을 준다. 빨치산이나 한국전쟁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 이 일대에는 피밭 즉 稷田이 많아 ‘피밭골’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적이 안심들을 하게 된다. 그 피아골로 올라가는 길에 고찰 연곡사가 있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06:30
임걸령입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야죠.
06:52
우측으로 붉은 기운이 돕니다.
지리산에 아침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07:03
반야봉 입구인 노루목입니다.
노루목에 관해서는 둘레길 제3구간에서 운봉을 떠나 산내면으로 들어오면서 장항동을 내려올 때 자세히 살펴봤다. 즉 노루목은 장항獐項이라는 한자로 쓰나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어서 노루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명이다.
반야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여기서 좌회전하여 한다. 주릉 종주를 할 경우 반야봉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시간이 없다, 너무 된비알이다.”라는 핑계로 지리산 산행 목적을 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수신앙의 중심지로서 반야봉이 가지고 있는 역할, 서부 지리산의 맹주로써 천왕봉과 대비하여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중량감, 천왕봉의 천왕이 우리 민족 신앙의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반야봉의 반야는 어떠한 번뇌라도 깨뜨릴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뜻함 등을 고려해본다면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말 아쉬움이 큰 곳이다.
이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운이 두 갈레로 갈라져 하나는 노고단을 거쳐 차일능선을 타고 화엄사로 흐르고 다른 하나는 불무장등을 타고 내려가 연곡사와 칠불사로 흐른다고 하니 그 기운을 받기 위해서라도 반야봉은 꼭 들러야 할 곳이다.
그뿐인가! 저 반야는 불교적 의미 말고도 귀녀鬼女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반야봉은 흡사 여자의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젖무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 전설대로 하자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일까. 남도 땅에서는 제일 큰 산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무덤의 둥근 모양은 자궁을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은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리산의 여신령은 자궁을 많이 지니고 있어 의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자리를 마련해 준 것인가.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07:13
노루목이 반야봉 입구라면 이곳은 출구가 되겠군요.
바로 옆이 묘향대로 들어가는 출입구이겠고...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대臺'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유명 수도처에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짓는 형태로 변했는데 어쨌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臺라 칭한다 한다. 그러니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발췌
날라리봉 즉 삼도봉을 오르면서 반야봉을 봅니다.
07:22
반야봉에서 내려와 삼거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지리 주릉에 붙으면 이내 ‘날라리봉’1501m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삼도봉이다.
우측 숲 안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를 따르는 능선은 불무장등을 지나 당재에서 왼쪽으로 들면 칠불사로, 오른쪽으로 들면 연곡사로 각 진행을 하게 된다. 반야봉의 기운도 그렇게 흐른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길목에 있는 불무장등이라는 봉우리의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다.
불무장등이라는 지명은...
어떤 이들은 산의 모양 가지고 이름과 연결시켜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풀무)와 같은 형상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그래서 불무장등이라는 거다. 또 다른 이들은 보통은 不無長嶝이라고 써서 '우두머리 봉' 혹은 '높은 산' 정도로 보기도 하는데 그 의미도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산 이름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 즉 지명이 있다. 사람은 이름이 있어 이를 통해 그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있듯이 지명은 그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이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따라서 지명은 지역의 역사, 형상, 풍속, 의식, 도덕, 종교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지명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흐르면 처음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이름으로 변해 있어 엉뚱한 의미로 불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우리 고유 글이 없다가 한자가 들어오면서 한자식으로 발음을 하다가 다시 한글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걸 일제강점기 때 그들의 편의대로 일본식 한자로 바꾼 경우도 많아 정확한 뜻을 알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살펴보자. 사실 지리산 자체가 승도僧都 혹은 불도佛都라고 하였으니 불교 용어와 관련지어 본다. '불무'라는 발음에 주의한다. 지리의 서쪽을 책임지는 제1봉이 반야봉이다. 이 반야봉이 지리산에서 갖는 지위를 느껴보기 위해 반야봉으로 올라보면 더 확실해진다. 대저 반야는 지혜요 문수를 일컫는다 했다. 화엄사와 연곡사 등을 개창하였다는 연기조사鷰起祖師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았다. 그래서 이 화엄사가 있는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라는 것도 둘레길 제14구간에서 이미 살펴봤다.
어쨌든 이 반야般若라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 반야봉의 기氣를 받아서 내려가는 줄기 즉 이 긴 능선의 이름은 '반야장' 그리고 그 능선 중의 첫 봉우리이니만큼 '반야장등'이라고 써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야봉'과 '반야장등'의 '반야'가 중복이 되는데 지명에서는 가급적 이런 중복 현상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반야의 다른 이름인 '불모'를 썼고 '불모장등'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모장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불무장등'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불모'란 발음이 '불무'가 된 것이다. 이럴 경우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날라리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불무장등 ~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뻗치는 길고 큰 줄기(長嶝)가 된다는 ‘지리 99팀’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시 지리산하면 ‘지리 99’팀의 연구가 돋보인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증에서 발췌
잡목 뒤로 불무장등을 보고....
멀리 촛대봉과 그 우측의 시루봉을 볼 수있는 곳도 이곳입니다.
07:30
긴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07:37
호남정맥을 조망할수 있는 화개재입니다.
예전에 이곳에는 뱀사골 산장이 있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얘기 하나가 있다. 예전 뱀사골 대피소가 있을 때 얘기다. 그 대피소에서 필요한 물품을 운반할 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반선을 이용하지 않고 이 목통계곡을 이용하여 아기자기한 계곡을 따라 화개재로 올랐다는 얘기다. 그러니 칠불사에서 샘터 ~ 헬기장을 이용하여 토끼봉으로 오르는 루트도 양호하지만 능선보다는 계곡을 선호하는 꾼들에게는 숨어 있는 루트라는 얘기다. 그곳을 오른다면 예전에 마을이 있던 연동마을 터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증에서 발췌
이 전망대 좌측에 연동마을과 목통계곡으로 진행 할 수 있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곧 지워질 것을 생각하니 좀 아쉽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 루트가 벽소령종단도로나 성삼재 도로인 861번 도로 중 천은산 ~ 성삼재 ~ 달궁 구간을 개통시키는데 한 역할을 하였다면 좀 믿기 어랴워집니다.
이따 벽소령을 지나면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07:50
토끼봉 오르는 도중에 일출을 봅니다.
08:18
정말 힘듭니다.
약 때문인가?
특히 오르막을 오를 때에는 몇 번이고 쉬어야 숨을 가다듬어야 하니....
와지마 고이찌와 경기할 때의 유재두가 과연 이랬었나?
아무래도 삼각고지 삼거리에서 음정으로?
08:20
아!
그런데 천왕봉이 보이니....
우측으 촛대봉과 시루봉이 보이니 촛대봉 좌측이 영신봉.
구름은 소용돌이 치는 모양으로 보이고....
날씨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이렇게 모든 걸 열어주는데 몸은 이게 뭔가!
아!
지리의 여유로움이여!
토끼봉과 반야봉.
이렇듯 칠불사는 불교 음악의 연구뿐만 아니라 가락국의 신비와 불교의 전파과정을 푸는 열쇠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이 칠불사 우측 뒤편이 바로 토끼봉과 연결되는 등로로 지리 주릉으로 오를 수 있는 최단거리 코스다. 서부 지리의 중심이었던 반야봉에서 정동쪽 즉 묘방卯方을 바라 볼 때 그곳에 위치한 봉우리가 바로 묘봉卯峰인 토끼봉이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지도 #2의 '가'의 곳을 지나고,
09:12
이렇게 멋지게 찍으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좌측으로 천왕봉 중앙에 촛대봉 그리고 그 우측으로 낙남정맥이......
09:25
덕평봉을 지나,
긴 나무데크를 걸어,
09:30
연하천대피소입니다.
간간이 우측으로 빠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다 대성리의 빗점골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그 빗점골이다. 다시는 민족의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을 하다보면 긴 나무데크를 걷게 되고 그러고는 연하천대피소이다.
이 연하천 대피소의 연하천煙霞泉이라는 이름은 사실 지형이나 풍광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것이다. 단지 지리산지구 공비토벌 작전이 끝난 이듬해인 조금 전 얘기한 구례의 연하반 산악회의 작품에 불과하다. 즉 자연을 그리워하여 병을 얻었다는 뜻의 천석고황泉石膏肓과 같은 뜻의 연하고질煙霞痼疾에서 가지고 온 말인 ‘연하반 산악회’는 지리 주릉 종주 중 자신들이 발견한 샘물의 이름을 연하천이라고 했으며, 나아가 장터목을 가던 중 제석봉과 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오묘한 풍광을 보여주는 봉우리를 연하봉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장터목에서 야영을 할 때 발굴한 샘물을 마침 같은 날 득녀를 한 대원의 딸에게 ‘산희山姬’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 샘물도 ‘산희샘’이라 명명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어쨌든 연하천 대피소는 임걸령 샘물과 더불어 지리산에서는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여기서 가지고 온 떡을 먹습니다.
15분 정도 머물다 자리를 뜹니다.
별 생각 없이 가지고 온 약을 또 먹고....
09:54
지리 북부능선이 갈리는 이른바 삼각고지 삼거리입니다.
여기서 내려갈까 생각했는데 지갑이니 차 열쇠가 다 버스에 있음을 뒤늦게 기억해 냅니다.
하는 수없이 버스 있는 곳으로 가긴 가야하는데....
벽소령에서 의신마을로 내려가면?
그러면 택시든 버스든 뭘 타고 화개까지 나가야 할 텐데 지갑이 없으니....
화개 양희수 기사에게 전화를 하면 되긴 퇼 텐데...
에라 그냥 가자.
그런데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갈 수나 있을까?
거기에 거림까지 6km는?
일단 벽소령까지 가보자.
10:00
삼각고지를 지나면서,
뒤로 명선봉을 보고....
우측으로 골따라 화개천이 흐를 절터골 방향을 봅니다.
우측으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인 화개단맥이 흐르니 좌측 움푹 패인 곳이 당재입니다.
이 당재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가 되는 곳이기도 하니 이제 하동군 화개면을 떠나 구례군 토지면으로 들어간다. 처음 만나는 마을이 농평마을이다. 여전히 둘레길 이정목이 안내를 한다. 통꼭지봉에서 내려오는 줄기 너머로 왕시루봉이 보인다. 상운사를 지나니 민박집들이 즐비한 당치마을이다. 당재마을이라고도 한다.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바로 앞이 형제봉의 부자바위이고 바로 앞봉 넘어에 벽소령 대피소가 보이는군요.
연하천 지나면 바로 벽소령인데 오늘은 왜 저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멀리 섬진강 건너 호남정맥.
10:32
형제봉에 올라 다시 주릉을 감상합니다.
삼각고지를 지나면 암봉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조금 조심을 하면서 걷게 된다. 천왕봉 하부의 개천문 같은 곳을 지나면 예전의 비박굴 앞의 이정표는 이 봉우리의 큰 바위 두 개를 지칭해 형제바위라고 부르면서 전체를 묶어 형제봉이라고 한다. 이 바위는 옛날 지리산에서 수행을 하던 형제가 성불成佛한 후, 지리산녀의 유혹을 뿌리치려고 오랫동안 등을 맞대고 서 있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바위를 분명히 부자바위父子巖라고 표기해 놓았다. 그러면서도 봉우리 이름은 형제봉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어찌된 일인가? 부자바위가 있으면 부자봉父子峰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또한 성불을 하기 전이라면 몰라도 성불까지 한 다음에 무슨 지리산녀의 유혹에 형제의 의까지 끊으면서 돌까지 되었는지 스토리가 너무 작위적이다.
형제봉 이야기
더군다나 마천의 삼정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이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부자암봉父子巖峰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 '지도'와 산꾼들이 그 곳을 형제봉兄弟峰이라고 부르고 있어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들이 형제봉을 부자암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증거와 그 증거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산에 의지하여 사는 그 주변 마을의 주민 아니겠는가? 산 이름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그 산 주위의 주민들이 불러주던 이름이 그 산 이름으로 굳어지는 것.
삼정마을(양정, 음정, 하정)을 끼고 흐르는 광대골의 전래설화 “나무꾼과 선녀”에서 유래한 이야기인데 금강산의 얘기와 거의 같다. 다만 삼부자三父子는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어미를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렸다는 얘기고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버린 바위덩어리들을 부자바위라고 불렀단다. 특히 하정마을 사람들은 이 부자암을 기리기 위해 1976년에 “석문암계”라는 친목계를 조직을 해서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부락의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매년 초복이면 전설속의 나무꾼인 인걸의 삼부자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부자바위를 내려오자마자 산꾼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벽소령대피소가 나온다. 둘레길 제4구간을 지나면서 자세히 보았던 벽송사 관련 얘기를 또 해야겠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그 형제봉 아니 부자봉 정상의 모습입니다.
부자봉과 그 좌측의 명선봉 그리고 그 뒤 좌측이 반야봉.....
이 문은 무슨 문이라 불러야 하나....
지리 북부능선의 좌측 별바위등과 우측의 삼정산
산죽 밭을 헤치고 나아가면 이내 별바위등1399.5m이다. 좌측으로 작은 바위가 하나 있다는 것 이외에는 봉우리로서의 기능이 무엇인가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한다. 오히려 손으로 산죽을 헤치고 지나야 할 정도의 봉우리이다.
별바위등을 내려와 다시 봉우리 두 개를 지나면 등로 좌측으로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잡목에 가려 주위를 살펴볼 기회가 없었으니 바위 위를 올라 주변을 살펴본다. 지나칠 때는 몰랐었지만 여기서 지나온 별바위등을 보면 저 봉우리가 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 이해가 간다.
즉 저 별바위의 '별'은 우리 중세국어의 '벼로' 또는 '별ㅎ'에서 온 말일 것이다. 곧 '낭떠러지', '비탈진 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11:09
그러고는 음정으로 빠지는 벽소령 대피소입니다.
여러 달 동안의 공사를 끝내고 드디어 오픈했군요.
세석을 거쳐 거림까지가 장장 12.3km...
하루 산행 거리로군요.
벽소령 길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의신으로 거기는 그렇고....
갑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보가 날아듭니다.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군요.
급히 문자를 보냅니다.
"지금 지리산이다. 바로 못 가서 미안하다. 내일 들를게...."
미국에서도 David의 조의문자가 날아들고....
중학교 친구인데 예전에 재수할 때 녀석의 고향인 예산까지 가서 당시 귀했던 닭백숙까지 먹었던 일이며....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미국 친구 녀석과 수담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길을 걷고....
11:40
바른재입니다.
여기서 벽소령 종단도로를 만납니다.
이제는 차는 물론 사람도 다니지 않다보니 이곳이 과연 도로였나 하는 생각이 들만도 합니다.
의신방향.
음정방향.
저 숲 뒤로 도로가 훤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임도 수준의 길은 누가, 왜, 뭐 하러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고 보니 음정에서 올라오는 임도는 이 벽소령 대피소 코밑까지 아주 넓게 이어져 있음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길의 도로사정도 아주 좋아 작은 트럭이나 사륜 구동 차들이 오고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길은 무엇일까?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핑계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나마 지리 북쪽의 양정, 음정 주민들은 이 도로를 산간지대 경작이나 토봉土蜂 등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면 지리 남쪽의 삼정마을 주민들에게는 신흥~삼정 약 7km의 거리 정도만 생활 편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아가 삼정삼거리에서 벽소령대피소로 오르는 지름길(4.1km)마저 1995. 9. 5.부터 영구 폐쇄되어 ‘벽소령 종단도로’는 이제는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 종단도로의 흔적이 끊기는 지점이 바른재이다. 지금은 고개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곳. 그곳에서 왼쪽 바위 옆으로 들어간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역서 연동마을은 아까 화개재에서 잠깐 언급했던 곳이죠.
12:01
덕평봉 전위봉을 지나,
12:15
선비샘을 지납니다.
덕평봉은 우회하게끔 등로가 조성되어 있고 선비샘에서 마실 물을 보충한다. 이 물은 세개골로 내려가 대성골로 이어진 다음 화개천이 되어 섬진강으로 들어갈 것이다. ‘세개골’이라! 작은 세개골과 큰 세개골로 나뉘는데 그렇다면 영신봉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낙남정맥으로 펼쳐지는 그 라인을 볼 수 있는 칠선봉의 조망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진행한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123:22
조망처에서 영신봉과 낙남정맥을 봅니다.
촛대봉은 머리만 살짝 보이는군요.
세개골.
제일 뒷줄이 횡천지맥.
13:04
선두 홀가분대장님이 11:38에 이곳을 통과했다니 무려 1시간 반 차이가 나는군요.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어쩌다 이런 일이.....
앉은 김에 죽치고 앉습니다.
천왕봉 뒤로 중봉과 하봉의 소년대와 영랑대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파인더를 좀 더 우측으로 돌리니 앞의 1562.3봉(현지에는 칠선봉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봉)과 그 뒤로 영신봉이 명백합니다.
낙남정맥과 그 뒤줄 좌측이 외삼신봉1286.7m.
횡천지맥 라인이 명백하게 보이는군요.
음.......
천왕봉을 좀 당겨보고....
너무 농땡이를 피우게 되는군요.
반대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들이 오는군요.
방을 빼주고.....
13:21
조금 전 얘기했던,
가짜 칠선봉입니다.
영신봉 부근은 바위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 부근은 암자가 기도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그랬습니다.
큰 바위 밑 석간수가 있는 곳.
그런 곳은 틀림없이 기도터가 있죠.
촛대봉으로 오르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부드러운 영신봉 라인에 바위가 몇 개 북쪽과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게 눈에 들어온다. 기도꾼들에 의하면 이 영신봉의 바위들은 유달리 기가 세어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이 있거나 인심이 흉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중무속인들은 영험한 기운을 영웅으로부터 찾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영신봉 동쪽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그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석평전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계곡이 자연스럽게 ‘한신계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 개탄한 글을 하나 볼까? 1924년 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인 시대일보의 기사이다.
청학동을 찾아다니는 제군들아! 사람은 정신을 먼저 미신으로부터 타파하여야 될 것이다. 청학동은 진실로 미신의 한 주요물이 되었다. 거금 삼백 여 년 전 한 도인의 秘書를 보건대 청학동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데, 장차 삼제갈 팔한신(三諸葛 八韓信)이 날 것이요, 그 동리를 복거(卜去)한지 십 리 이내에 車馬가 영문(盈門)이라 하였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한 도승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세무청학동(世無靑鶴洞)이라 하였다.
도인은 있다 하고 도승은 없다 하니 청학동은 진실로 전무후무한 혹세무민의 산물이다. 선영구토(先塋舊土)를 다 버리고 세탁가업(世倬家業)을 빙자하여 그야말로 당대 발복지인 청학동을 찾아 천 리를 멀다 않고 내왕하는 인사들아. 참으로 가석가애(可惜可哀)한 제군이다. 내일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사를 전람하면 알 것이다.
수 십 년 전으로부터 청학동을 찾으려고 지리산 남록에 거류하는 수 천 명의 경과를 보건대 십년 이내의 車馬 영영문(盈迎門)은 고사하고 반년 이내에 남에게 압박만 많이 받는다 한다. 현금(現今) 세소간(世所間)에 청학동이라는 곳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 세석평지 혹은 잔돌평지이라 하는 데는 평원광록이 주위 사십 리나 되고, 자좌 우향(子坐 于向. 정북에서 정남방향)으로 되어 미신에 혹한 자의 눈으로는 한번 혹할 만도 하다.
-------------------- 중략 ------
諸君아!
청학동을 찾아 제갈(諸葛), 한신(韓信) 같은 자손을 바라는 것보다 청학동을 찾는 그 경비로 현대에 상당한 교육을 가르쳐 제갈, 한신 같은 사람을 배워서 성공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청학동인가 하노라.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13:53
175계단을 오릅니다.
175계단을 오르면 항상 떠오르는 추억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예전 이 계단이 없을 때 이곳을 오르내리려면 로프와 바위의 틈새를 번갈아 잡으며 진행하느라 장갑 한 켤레 정도는 흙투성이가 될 각오쯤은 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비라도 오는 날이거나 해빙기였다면 장비나 옷가지도 시원치 않았던 그 시절 저체온증 걱정도 해야 했었다. 그 구간이다. 175계단을 힘겹게 오르면 우측으로 옛 영신사 터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제석봉 아래 장터목 대피소가 보이는군요.
14:04
좌고대를 봅니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중들이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다행히 좌고대는 예전과 달리 지금은 등로 바로 옆에 있다. 흙이 굳고 돌이 많은 건조지에서 사는 미어캣meerkat 같이 생겼는데 정상부는 한 사람이 올라가서 절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다. 좌고대를 지나 너럭바위를 지나면 영신봉 정상부와 낙남정맥 길은 비탐구간으로 막아 놨다, 훼손이 심해서이다.
- '현오와 걷는지리산' 중에서 발췌
영신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세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금줄을 넘어 저벽을 따라 내려가는 루트로 점필재 김종직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揖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은 서쪽에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그리고 낙남정맥 헬리포터 루트와 바로 옆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곳 등입니다.
좌고대를 지나 아벽 구간에서 지나온 봉들을 감상합니다.
14:27
영신봉 정상 바로 아래 낙남정맥과 교차하는 길입니다.
참 힘듭니다.
선두는 장터목에서 출발했을 거고....
촛대봉과 시루봉.
이 사진 한 장 건지려고 악착같이 걸은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을에찍은 그것에 비해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눈이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이동 통신 장치가 있는 곳이 한신바위죠.
그러니 제석봉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신능선으로 올라 영신봉 바위 밑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이 기도터가 한신바위이고 운장바위이니 이 계곡 이름이 자연스럽게 한신계곡이 된 게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14:38
잠깐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고....
기사님은 거림에 와서 쉬고 계시다 하고.....
낙남정멕 루트가 아닌 일잔 등로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거림초소까지가 6km이니 버스 있는 주차장까지 약 7km는 걸어야겠습니다.
거림삼거리를 지나면서 아이젠을 풉니다.
15:06
세석교를 지나면서,
잠시 세 개의 삼신봉을 봅니다.
추모비를 지나 바위를 돌아 오르면 정상석 하나가 덩그러니 박혀 있는 삼신봉1288.7m이다. 이곳이 행정구역상으로는 하동군 화개면과 청암면 그리고 산청군 시천면이 만나는 이른바 삼면봉이다. 삼면봉인만큼 이 삼신봉이 지리산에서 갖는 비중은 그만큼 크다. 우선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즉 신을 세 분이나 모시고 있어서 三神峰인가? 삼신봉은 이 아래에 있는 삼신동三神洞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왔을 것이다.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흥사神興寺 등 세 개의 ‘神’자가 들어간 사찰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삼신동이라 이름했다고 유몽인(1559 ~ 1623)이 전하니 필시 이 봉우리도 이 동네 이름을 따서 붙였을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물론 산경표에도 등재되지 않았던 이름이었고 일제강점기만 해도 무명봉이었던 삼신봉이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나라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힌 60년대 이후가 아닌가 보여 진다. 일제 때 만들어진 지도만 보아도 사실 지금의 내삼신봉1355.1m에 2등급삼각점(하동 27)이 있는 등 이 1355.1봉이 이 부근에서는 대장 봉우리로 인식되었었지만 군계이자 면계 역할을 하는 1288.7봉의 역할이 새삼 드러나게 되니 1355.1봉에 비해 비록 66m 정도가 더 낮고 삼각점 또한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어엿하게 삼신봉1288.7m이라는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산꾼들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1288.7봉이 이 지역의 맹주가 되자 기존 대장 역할을 하던 1355.1봉을 모른 척할 수 없어 금강산에 있는 외금강이나 내금강에 착안하여 낙남정맥 방향으로 흘러가는 1286.7봉을 특히 외삼신봉, 횡천지맥 방향의 2등급 삼각점이 있던 1355.1봉을 특히 내삼신봉이라 부르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남부지리에는 세 개의 삼신봉으로 정리가 된다.
그러고 보니 이 삼신봉이 남한 9정맥 중 하나인 낙남정맥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청학동이 있으니 지어준 그 신령스러운 이름에 걸맞게도 보였다. 한편 낙남정맥과 이 가지 줄기 사이에서는 횡천강이 발원하게 된다. 그 말은 곧 이 횡천강이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강 즉 섬진강과 만나는 그 합수점에서 이 가지 줄기도 그 맥을 다하게 된다는 얘기와 같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이 가지줄기의 도상거리가 약34.6km가 되고 여기에 큰 줄기 요건과 합수점 요건을 충족하게 되니 지맥의 3요건을 갖추게 되어 횡천지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15:13
무명교를 지납니다.
15:40
북해도교를 건너는데 이 다리가 자못 의미 있는 곳이죠?
즉 님측 입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청학연못으로 들어가게 되고,
북측 좌측으로 희미한 길을 따라 진행하면 소위 '거림옛길'로 '우천 허만수'선생 움막터로 진행하게 되는 길이죠.
소위 음양수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입니다.
15:45
남측 임구 우측으로 오르면 촛대봉 남릉능선으로 오를 수 있는 중요한 포스트가 되는 곳이고....
그 입구 표시....
그런데 이 119 구조목이 좀 이상합니다.
현위치 번호는 제대로 되어 있는데 방향표시는 무조건 '하산하면 1400고지'라고 표기되어 있군요.
작년에 '국가지점번호'를 넣으면서 새로 다 교체한 것이죠.
16:28
거림 마을입니다.
16:30
출입문을 빠져 나오면서 이제 속세로 듭니다.
13시간 40분을 지리에 있었군요.
걸었니 안 걸었니 해도 그렇게 오래 지리에 있었으니....
16:33
이곳까지가 세석대피소 거리를 재는 기점입니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1km를 더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오는데 부산에서 았다는 아주머니 세 분이 자기들끼리 그 맛있는 곶감을 먹기가 미안했던지 곶감 두 개를 건네주면서,
"세석에서 내려오시나요? 저희는 부산사는데 산에 자주 오니까 반가워서요."
"예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사님과 환담을 나누다 보니 유평마을 천왕봉 식당입니다.
이 식당 음식이 장난이 아닙니다.
"어떻게 경상도 음식 같지 않습니까?"
홀가분 대장님을 선두로 다람쥐님등 대원들이 속속 도착합니다.
11명 화대 전원완주!
축하드립니다.
뒤풀이를 거나하게 즐기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넘는군요.
그나저나 이거 억을해서 어쩌죠!
거창하게 시작한 화대종주였는데....
4월로 못박았는데 아무래도 그때까지 기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겨울 화대!
복수혈전을 꿈꿉니다.
좀 억을하다는 생각 때문이죠.
퇴계 이황의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산을 즐기는 사람은 기록을 남겨야 하고, 기록이 있음으로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는 글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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