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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고남 님과 지리서부능선을 걷다(구인월 ~ 덕두산 ~ 바래봉 ~ 세동치)

 

온몸이 지끈거리고 쑤시고....

좌측 날갯죽지에서 오는 시큰거림은 어깨를 타고 손날까지 내려오고....

넙적다리의 근육은 다 풀려서 이 상태에서 10km를 별 지장없이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요즘 몸 상태입니다.

사무실 일과 원고 정리 때문에 12월 중순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산행을 못했으니 엉망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올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사실 운동 선수나 산꾼들에게 동계 훈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겨울에 근육을 다져놔야 더운 여름을 보내고 가을까지 그런대로 먹고 산다는 얘기인데......

워밍업 장소로 다시 지리산을 택합니다.

아무래도 그냥 손 뻗히기엔 지리산 만큼 너그러운 곳은 없다는 판단에서 이기도 합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얘기는 핑계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실은 이 모습이 보고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거기서 바라보는 지리의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동부능선과 새봉을 거쳐 와붕산 ~ 독녀암으로 이어지는 능선.

그 능선이 임천을 건너 법화산과 삼봉산 그리고 투구봉으로 이어지는 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지리의 겨울 아니 설경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겠죠.

사진 몇 장 보내면서 저를 약올리려는(?) 심사는 분명 아니겠고....

겨우 목요일로 시간이 잡힙니다.

"내일 첫 차로 내려갑니다."

3월 까지는 시간이 있다고 하니 만만한 사람은 그래도 지리에 기대어 살고 있는 고남 님입니다.

"그러면 7시에 남원역으로 갈게요."

뭐 그럴 필요까지...

익히 혼자 인월을 경유 서부능선을 진행한 경험이 있으니 그 시간에 맞춰 시내버스가 있는 걸 알고 있는지라....

"버스 타면 전화할 테니 그때 나와서 내 버스에 타면 될 텐데..."

2019. 2. 21. 04:50

집에서 나와 걸어서 광명역으로 갑니다.

05:25열차를 타고 남원역에 도착하니 07:07.

2년 전에 탔던 07:10 버스가 없어지고 07:35에나 있군요.

25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전화를 걸고는 느긋하게 사전 준비 작업을 하고....

정시에 도착하는 인월행 버스를 타고 가다 여원재 바로 전 정류장에서 고남님과 합류합니다.

인월에 내려 아침을 먹고 김밥 두 줄을 싸서는 구인월로 들어섭니다.

08:57

구인월교를 건넙니다.

이하 해당되는 곳의 관련된 얘기는 곧 출간될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인용토록 하겠습니다.

인월은 예로부터 역이 설치되어 있던 곳일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다. 인월의 둘레길 안내센터에 들러 지도 하나를 얻고는 구인월교로 람천을 건넌다.

람천은 주촌천이 발달하여 형성된 물줄기이다.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물줄기는 그만큼 지리산의 골이 많고 또 깊다는 반증이겠다. 우측으로 덕두산1151.5m이 보이고 그 아래 민박마을이 달오름 즉 월평마을이다,

 

 -  근간 '현오와 걷는 지리산' 89쪽

람천을 건너면서 멀리 황산 자락을 봅니다.

 

우측으로 구인월이 보일 즈음 그 뒤로 태조 이성계의 황산698.7m이 보인다. 구간을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나면 좌측에서 풍천이 내려와 이 람천으로 합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두대간의 봉화산919.7m에서 내려온 물이다. 람천과 풍천. 지리의 북쪽을 흐르는 물줄기들이다. 지리의 골이 많고 깊은 만큼 물줄기도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우선 람천을 중심으로 지리의 북쪽 물줄기를 살펴볼까?

 

백두대간 산줄기는 백두산을 떠나 금강산 ~ 설악산 ~ 덕유산을 지나 백운산에 접어들면서 지리산권에 진입을 하게 된다. 그러고는 남원시 운봉읍, 주천면,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고리봉1305.4m에 이르러 북동쪽으로 가지를 하나 치게 된다. 이 줄기가 소위 지리서부능선임은 제1구간 때 이미 봤다. 이때 백두대간과 이 지리서부능선 사이에 골이 하나 형성이 되고 그 골을 따라 물줄기가 하나가 발원하게 됨은 자연의 섭리이다. 이 경우 주천면 쪽으로 흐르는 물은 원천천이 되어 요천으로 흡수된 다음 섬진강이 되고, 운봉읍으로 흐르는 물은 주촌천이 되며, 산내면 쪽으로 흐르는 물은 만수천이 된다. 지금의 산내면 원천리와 삼화리, 입석리 일대의 옛 지명은 만수동 또는 내원동이었다. 그러니 만수천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고, 지리산 일만 골짝의 물길이 모였다고 하여 만수천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 만수천의 그 이전 이름은 황계黃谿"였다.

 

이렇듯 지리산 반야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람천, 임천, 엄천이라 불리는 샛강들이 지리산의 한 축을 이루는 천혜의 자연경관이다. 섬진강이 백사장을 이루고 황포돗대가 떠있는 강다운 대하大河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지리의 북동쪽을 흐르는 이 샛강들은 강의 이미지 보다는 골짝을 감아 흐르는 전형적인 살여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물굽이마다 한 폭의 동양화이고 여울목마다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월에서 경호강까지의 약 34km인 작은 하나의 산골짜기 샛강을 두고 여울목마다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은 산세를 닮아 기개가 드높은 지역민들의 고집이 베인 하나의 지리산 풍류를 엿볼 수 있음직도 하다.

 

  - 졸저 전게서 90쪽

 

좌측으로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시작점이 보이는군요.

 

마을 입구인 람천 제방 길에서 지리산 둘레길 제3구간이 시작된다. 콘크 리트 포장길 위로 경운기를 타고 농사일을 나가는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고는 구간 길을 나선다. 안내 글에는 등구재와 다랭이논 정도가 보인다. 지리산 둘 레길이 그렇게 단순할 것만 같지는 않다. 더욱이 둘레길 20.5km는 좀 길다. 어떤 얘기가 숨어 있을까? 궁금하다.

- 졸저 전게서 89쪽 

09:03

구인월 삼거리를 지납니다.

이때 고남 님이 인월에 대해서 한 말씀 하시는군요.

즉 인월引月이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른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간벌과 벌목 작업 현장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럴 즈음 좌측으로 드디어 인월면소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운봉을 지나 인월로 들어선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은 1380년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와 싸울 때 날이 어두워지자 달을 끌어들여밝힌 다음 그 기운으로 승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는 것이 그보다 약 440여 년 전인 940년 그러니까 고려 태조 때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역을 설치하면서 남원부 운봉현 인월역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이성계가 달을 끌어 전쟁에 이용했다는 설"은 역시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인용한 것으로 믿을 바 못 된다. 한편 지금의 인월면은 1998년까지만 해도 남원군 동면 인월리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 졸저 전게서  83쪽 

좌틀하여 구인월마을회관 앞을 지납니다.

구인월 마을회관은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이다

지리서부능선을 진행한다는 것은 곧 지리태극종주 루트 중 북서쪽 구간을 진행한다는 것과 같다. 지리태극종주지리서부능선이기 때문이다. 그 종주 코스의 들머리이자 날머리가 바로 이 구인월 마을회관이다. 그런데 지리태극종주 코스는 보통 사리마을회관을 들머리로 하여 날머리로 이곳을 잡는다. 그럴 경우 90km가 넘는 길을 40시간 넘게 잠도 자지 않고 걸어 수면 부족과 체력 소진으로 탈진상태에 있을 태극산꾼들의 종착역인 이곳은 참으로 신비한 장소로 여겨진다. 분명 그 '힘듦과 피곤함'이 절정에 달했음에도 이곳에 도착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람과 희열'로 승화가 된다. 이 이상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이 구인월 마을회관을 필자는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이라고 부른다.

 

인월에서 구인월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월교를 건너야 한다. 월평리가 인월리로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이제는 월평마을이 월평리의 흔적만 말해줄 따름이다. 그 인월리의 구인월마을회관이 이 코스의 시작이다. 그러니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구인월마을회관을 지나면 재실齋室을 지나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는 덕두산을 가리키고 있고 덕두산과 구인월마을(월평마을)3.4km의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졸저 전게서 ' 474쪽 이하 

진주강씨 재실을 지나고....

09:12

이제 본격적으로 지리의 춤으로 듭니다.

언제나 포근한 지리의 품.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이런 생각이 곧 지모신앙地母信仰의 연원인 것 같습니다.

09:25

잠시 우측으로 조망이 터지는 곳을 보니....

1380년 저 지긋지긋한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한 태조 이성계의 산대첩의 현장인 황산을 봅니다.

정면으로 황산이 다가온다. 황산은 운봉과 인월 사이에 있는 큰 신산神山이다. 이성계가 저 황산에서 왜구들을 쳐부술 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수십 척 혹은 수백 척의 배를 몰고 수시로 나타나서는 불을 지르고 곡식을 빼앗고 양민을 죽이거나 잡아 가는 왜구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고 있었다. 귀족들은 민초들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데만 눈이 어두워 아무 군사도 없고 더욱이 바다 수비는 제대로 하지 않아 왜구들은 팔도강산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 당시 왜구는 어떤 존재였을까? 우선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떠오른다. 만파萬波는 만 가지 풍파이고 식적息笛이 그것을 잠재우는 피리이니 통일 신라 시대 이후 나라의 풍파의 뿌리혹은 나라의 우환덩어리는 늘 왜구였다. 그 왜구를 퇴치시키려 용을 통해서 보낸 물건이 바로 만파식적이라는 피리이니 왕들은 죽어서까지 저 왜구들의 노략질을 걱정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점필재가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라고 한 취지를 백번 이해할 수 있겠다.

그 왜구들의 근거지는 주로 대마도, 일기도, 송포 등이었는데 특히 대마도와 송포가 문제였다. 당시 대마도의 적정 인구는 4~5 천명 이하라고 한다. 그런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15세기 대마도의 인구는 36,000명이 넘었다 한다.

14세기 중반 남북조로 분열된 일본은 내란에서 패배한 인구가 대마도로 대거 몰려들었다. 거기에 자연스러운 인구 증가가 한몫 더 거들었으니 대마도의 이런 환경 변화는 생활난을 거들었고 결국 왜구들은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 타깃이 바로 고려와 조선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왜구들은 전란의 경험으로 이미 해적의 수준을 넘어 정규군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즉 장수는 말을 타고 갑옷을 입었으며 부대는 400~500척의 대 선단으로 꾸려졌으며 병력 또한 수만이나 되었던 것이다.

 

사실 왜구의 침공은 신라시대부터 꾸준했었다. 그런데 1223~1392년 조선이 개국을 할 때까지가 가장 심했던 바, 연구에 의하면 특히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부터 조선 개국년도인 1392년까지의 출몰 횟수는 무려 400여 회에 달했다고 한다. 진포대첩의 원인이 된 노략질이 그 사건 중 하나였고, 육지로 상륙한 진포대첩의 잔당을 격파한 사건이 바로 황산대첩이었고 그 전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저 황산과 우측의 지리산 서부능선이 내려오는 그 사이의 맞닿은 듯한 좁은 곳으로 우측의 이 람천이 흘러간다. 그러니 함양 땅에 들어온 왜구들이 남원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저 병목 같은 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그걸 노렸다.

 

운봉지雲峰誌를 볼까?

 

신우辛禑때 왜구가 함양을 도륙하고 다시 남원산성을 공격했다. 왜구는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른 후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나라의 안팎이 크게 진동하자 태조가 변안렬과 함께 남원에 이르렀다. 아침에 사람들을 경계시킨 뒤 동쪽으로 운봉을 넘어가니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 밖에 되지 않았다. 황산의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에 올랐는데 길 오른편 험한 지름길이 있었다. 험한 길로 들어서자 왜구의 기예부대가 갑자기 뛰어나왔다. 태조가 50여발의 화살을 쏘아 그들의 얼굴을 맞히자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거꾸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구가 산에 근거해 방어를 굳건하게 했는데 태조가 군사들을 지휘해서 요해처를 분담하고 다시 소라를 불어 병사를 정돈한 후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태조가 즉시 여덟 명을 죽이자 왜구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기발도라는 적장을 태조가 그의 용기와 기예를 아깝게 여겨 생포하려 하였으나 이두란이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아기발도가 구리 가면과 철갑을 입고 있어 화살을 쏘아도 들어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화살을 쏘아 그의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두란이 뒤이어 화살을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왜구의 기가 꺾였다. 마침내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온통 붉은 빛이었다. 처음에는 왜구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았지만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가 성모상과 가섭석상을 벤 뒤에 떠났다.

 

하여간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나라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왜구들은 화개재에 올라 백두대간 길을 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사로 들어간다.

영신사는 영신봉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던 암자였다. 그 암자 바로 뒤에 가섭존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걸 해하였다는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유두류록과 김일손(1464 ~ 1498)'두류기행록'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졸저 전게서  74쪽 이하 

09:36

능선 삼거리에서 우틀하며 능선에 합류합니다.

지적삼각점 같은 것을 하나 보고....

람천 건너 투구봉과 삼봉산 라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중간이 백운산이겠고 그 뒤가 와불산에서 내려오는 라인인 독녀암(함양독바위)이니 곧 '점필재 루트'입니다.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함양군수로 있던 1472814일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예전 말로는 유람이었지만 그 유람이 지금의 산으로 오면 현대어로는 등산 아니겠는가? 그들은 천왕봉~영신봉 등을 들르고는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다. 점필재가 훌륭하게 45일 일정의 산행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 지났던 루트가 바로 이 길이다.

점필재는 일행들과 헤어져 등구재를 넘어 오도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갔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부 김숙자에게 수학하여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절의節義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김일손, 남효온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에게 학통이 계승되면서 점필재는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러나 147012월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함양 학사루에 있던 유자광의 현판을 불태우게 되는데 이게 후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어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 졸저 전게서  102쪽 이하 

이해하지 못 할 분들....

산꾼이 '태백산맥'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만 해도 수치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산학회'라니....

지질학자도 아닌 산꾼이 태백산맥에서 붤 배우겠다는 건지.....

그냥 수식어로 사용한 겁니까?

모르긴 몰라도 백두대간에 대한 반동으로 결성한 단체인 거 같은데 제발이지 용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0:32

흥부골 자연휴양림 정문 앞으로 내려온다. 휴양림 안으로 들어가면 덕두 산과 바래봉으로 오를 수 있는 등로가 나온다. 그러니 구인월이나 이 흥부골 자연휴양림을 통하여 지리서부능선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안 내판을 보고 왼쪽으로 돌자마자 바로 우측 계곡 방향으로 이정표가 보인다. 계곡에는 무인쉼터가 있다.

 

- 졸저 전게서 86쪽 이하 

거기서 존경하는 이한검 대장님 표지띠를 봅니다.

반가운 마음에 한 장 찍어서 한검 대장에게 날립니다. 

요즘 돈 버시느라 바쁘시죠?

오늘의 상고대.

이게 전부입니다.

인월산이라고도 불리는 덕두산에 오르기 바로 전 흥부골자연휴양림(2.5km)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지리산둘레길 제2구간에서 만났던 그 휴양림이다. 그러고는 300m를 더 진행하면 덕두산1151.5m에 오를 수 있다. 조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덕두산에서 2등급 삼각점(운봉22)도 확인한다. 이 덕두산이 지리산에서 갖는 위상은 어떨까? 필자는 별 특이할 것도 없는 이 덕두산에 이 아닌 이라는 명찰을 달아준 이유를 지리서부능선의 첫 봉우리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지리산의 시작인 곳이라는 얘기다. 백두대간이 아닌 지리산만 놓고 볼 때 덕두산이 서부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봉우리인 만큼 산속의 산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본 것이다. 이 덕두산을 오름으로써 이제 지리의 빗장을 열고 그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게 된다.

 

- 졸저 전게서  475쪽 이하 

이런 제 지론에 고남님이 제동을 겁니다.

어디 덕두가 감히 '산'이라는 계급을 붙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동네 사람들도 덕두봉이아고 부르지 절대 덕두산이라 부르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죠.

모름지기 지명이란 그 동네 사람들이 쓰고 있는 걸 붙여줘야 하고 또 그게 맞을 겁니다.

그 이름에는 그 동네 사람들의 역사와 종교, 관습 등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죠.

지리의 동북부를 조망하기엔 조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육안으로는 다 볼 수 있습니다.

아!

천왕이여!

천왕봉이여!

봉우리 하나 하나를 읽어줍니다.

아니 불러줍니다.

좌측 와불산부터 하봉 영랑대와 소년대 그리고 중봉을 불러주고 천왕봉은 건너 뜁니다.

중봉이라고 불렸던 제석봉, 장터목, 일출봉과 연하봉.

그리고 몇 개의 바위의 연합체인 촛대봉.

그리고 영신봉, 칠선봉.....

좌측 아래로 창암산 우측으로는 북부능선.....

못참겠습니다.

어서 바래봉으로 올라가야지....

올해 마지막 상고대이려나?

설마하니...

그럴 리가 있겠나요?

드디어 투구봉과 그 뒤로 삼봉산이 드러나니 그 좌측이 팔량재 지나 임천지맥(신산경표에서는 연비지맥).

그러니 삼봉산 우측이 법화산이니 지난 겨울 저 루트를 함께 진행했던 고남 님의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군요.

덕두산에서 작은 봉우리 세 개 정도를 넘으면(1.4km) 지리서부의 중심 바래봉1186.2m으로 오를 수 있다. 바래봉은 운봉읍, 인월면, 산내면 등 세 개의 읍·면이 만나는 이른바 삼면봉이다. 이 능선에서 인월면과 산내면의 면계인 왼쪽 능선을 따르면 964봉을 지나 둘레길 제3구간이 지나는 배너미재(舟踰岾)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 이 바래봉에서는 반야봉은 물론 천왕봉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앞으로 진행할 세걸산과 만복대 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우측으로는 구룡폭포에서 넘어오는 둘레길 1구간은 물론 고리봉에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이 수정봉을 지나 고남산에서 백운산으로 흐르는 모습은 물론 성산과 황산 등 운봉의 모든 산들을 다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이 바래봉의 자랑이다.

 

- 졸저 전게서 475쪽 이하

 

산 아래 있는 마을이 산내면.

그 주유재를 넘으면서 좌측 뒤로 드디어 임천지맥의 투구봉1032.5m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우측으로 조금 이따 진행할 등구재와 백운산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이 주유재가 인월면과 산내면의 면계였다. 이제 산내면 면소재지인 장항리로 들어선 것이다. 지리산() () 깊숙이 들어앉은 동네()라 하여 산내면이다.

가운데 줄이 삼봉산에서 내려오는 줄기가 등구재를 넘어 백운산 금대봉으로 내려오고...

그 뒷 줄기가 법화산 라인.

그 뒤가 왕산. 필봉산 라인....

지리 주릉과 북부능선.

우측 반야봉이 슬쩍 보이니 그 좌측이 묘봉에 삼각고지.

북부능선의 영원재를 중심으로 우측의 영원봉과 그 좌측의 삼정산.

영원재 뒤의 부자봉(형제봉으로 굳어지기는 했으나 삼정분들은 부자봉으로 부른다고 하니...).

반야봉과 그 우측의 길상봉(노고단).

오늘 고남님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저 때문인데....

이따 얘기하기로 하고....

오!

지리서부능선.

좌측부터 종석대~ 만복대 ~ 고리봉 그리고 세걸산이 달려오는군요.

우측의 수정봉을 보고는 지금의 백두대간길을 그려보고 그 뒤로 구룡폭포의 예전 백두대간길까지 그려봅니다.

곡중분수계니 하천쟁탈이니 하는 얘기도 해가면서....

백두대간은 생물生物이다

문제는 이 구룡폭포가 가지고 있는 지위의 문제이다. 구룡폭포로 내려가는 원천천은 물줄기가 좁고 상당히 빠르다. 관련하여 좀 어렵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관련된 문제이니 짚고 넘어가자.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신생대 제4기 정도 그러니까 2~3백만 년 전에는 백두대간이 지금의 고남산~여원치~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백면과 주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다가 728.8봉에서 덕치리 방향으로 꺾여 지금의 구룡폭포를 넘어 906.2~1109.3봉을 지나 잠시 서시지맥 길을 따라 만복대로 가는 루트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생대 제4기 이후 우리나라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다음 이 부근에서 두부침식頭腐浸蝕으로 인해 하천쟁탈stream piracy이 일어났다.

 

 

<사진 6하천 쟁탈로 바뀐 백두대간길

 

살펴보면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다음 북류 및 동류하여 엄천강을 지나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 쪽으로 골짜기를 더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그 유역을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60 도로 중 백두대간이 지나는 ’~‘구간의 좌측은 하천쟁탈의 흔적으로 지금은 주천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주촌천' 즉 무능하천은 물이 흘러 그 물은 북동진하여 람천에 합류되어 남강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곧 낙동강의 최상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럴 경우 고리봉~고기3거리~노치마을~759.2봉의 라인은 백두대간이 아닌 것이 된다. 반면 만복대~1109.3~906.2~728.8~ 759.2(일명 덕운봉)라인이 원백두대간 라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의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라인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divide in v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재 운봉 고원의 남서쪽에 치우쳐 위치한 백두대간의 분수계가 수만 또는 수십만 년 후에는 고원의 중앙부로 이동될 가능성이 높다.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여! 고리봉에서 내려와 고기삼거리~노치마을의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 약2km 구간을 그냥 걸을 일이 아니다. 도로 왼편은 섬진강 최상류 지류인 원천천 유역으로, 원천천이 두부침식으로 분수계를 넘으면서 과거 낙동강 최상류 구간을 쟁탈한 곳이라는 사실과 도로 오른편은 여전히 낙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면서 원천천은 급경사의 사면을 따라 활발하게 두부침식을 하면서 분수계를 넘고 하천쟁탈을 하였기에,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동강 최상류 구간보다는 침식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 바닥의 고도는 왼편이 오른편에 비해 10cm가량 더 낮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래야 백두대간이 더 재미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는 둘레꾼들도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50쪽 이하

수정봉 ~ 주지봉 ~ 여원재.....

그리고 고남산.

여기서 보니 역시 운봉의 진산이자 주산은 고남산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풍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나 봅니다.

공원에서 우회전하여 람천 제방 길을 따라 걷는다. 그 람촌 뒤로 고남산846.4m이 한결 가까워졌다. 1380. 9. 진포대첩으로 퇴로를 잃은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 우왕의 명을 받은 태조 이성계 저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재계를 하고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고남산은 태조봉으로도 불린다. 문헌에는 적산赤山, 고조봉高租奉, 제왕봉帝王峰, 일광산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정상에는 KT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는 석축으로 쌓은 3층 천제단이 있는데 황산대첩 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올라 전승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신기교를 건너 도로를 따르다 잠시 뒤를 돌아 운봉의 진산인 성산533.5m을 보는 여유를 갖자. 저 성산은 운봉의 진산鎭山이며 주산으로 본 반면, 반야봉은 운봉의 안산案山이라고 김선신(1775 ~ ? )은 두류전지에서 얘기했다.

 

* 두류전지는 다시 한 줄기가 북쪽으로 흘러 유치柳峙와 적산赤山이 된다. 적산에서 남쪽으로 흘러 성산이 되니 운봉현의 주산主山이다.”라고 하여 이 성산을 운봉의 주산으로 보았다. 한편 적산의 ', , ' 등의 뜻을 가진 지명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바뀐 이름이다. 그러니 원래는 'ᄇᆞᆰ산' 즉 산악숭배사상의 소산인 '신성한 산'의 의미였다.

 

* 진산鎭山과 주산主山은 마을이 기대고 있는 뒤쪽의 산세를 이르는 말인데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 다만 굳이 구분하자면 진산은 전통적 산 개념의 독특한 표현이자 장소의 상징 정도로 본다면 주산은 풍수상 명당을 형성하는 주맥主脈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점이 다르다 하겠다.

 

- 졸저 전게서 72쪽 본문과 각주 

 

지금의 운봉 시내 

며칠 전 고남 님이 찍은 운봉 시내

보면 볼수록 고남산의 위용이 대단합니다.

그 뒤의 요천 건너 천황봉을 보면서 갑오농민항쟁 때의 방아치 전투를 얘기합니다.

농민군이 대패를 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박봉양은 영남지방에서 막강한 지원을 받았을 것 이다. 하지만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를 운봉고원이라는 지형에서 찾고 싶다. 즉 방아산성은 마한이나 백 제 때 운봉지역이 고원지대라는 걸 염두에 두고 조성한 석성이다. 그런데 이 석성은 운봉 쪽에서 보자면 그저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이백이나 산동에서 보자면 640m나 되는 상당한 고봉이다. 그러니 그 우측의 고남산이 846.8m이고 보면 운봉을 치고 인월을 지나 산청으로 진격을 하자면 어차피 여원 재(477m)가 아닌 방아치가 유격전술에 용이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유복만, 남응삼이 이끄는 농민군은 해발 640m의 거친 서쪽 사면을 치고 올라가야 하지만 민 보군은 100m 정도만 오르면 되며 더욱이 부근에 산재해 있는 직경 30cm 정도의 돌을 굴려 공격을 하니 농민군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투가 되고 말았다.
- 졸저 전게서 70쪽 각주

지리산에 오면 고남님이 있어 항상 마음이 편합니다.

얼마 전 촤종 수정분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는 과정에서 사진 한 장이 마음에 안 듭니다.

부득이 대체할 사진으로 피바위 사진을 하려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이 변변치 못합니다.

할 수 없이 고남님께 연락을 하여 사진 몇 장 찍어서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고 흔쾌히 승낙을 한 고남님이 사진 촬영을 하고 돌아나오다 그만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사단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지까지 찢어지고 무릎은 상하여 잘못하면 큰 변고가 생긱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 여파 때문인가요?

엉치뼈 부근이 조금 안 좋다고 합니다.

아마 근육이 좀 놀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병원 가서 사진 한 번 찍어보세요.  

문제의 사진입니다.

덕분에 멋지게 실리게는 됐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주유재로 내려가는 길에서 우리는 직진을 해야죠.

이쪽 길도 한 번 가야 하는데....

오아산 우측 너머로 정수산까지 보이는데 오늘은 영....

정말 대단한 지리산입니다.

예전 양떼목장의 흔적을 봅니다.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습니다.

양들의 천국이었던 운봉목장

그 멋진 풍경을 보면서 내려오면 온통 철쭉나무이다. 봄의 바래봉은 철쭉을 보러온 상춘객들로 몸살을 앓을 정도이다. 예전에 이곳에 국립종축장의 운봉목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에 면양사업의 일환으로 바래봉, 팔랑재 부근에 목장을 만들어 1972년부터 1976년까지 5년 간 호주에서 면양 2,717두를 들여와 사육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무란 나무, 풀이란 풀들은 다 뽑아내고 새롭게 목초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때 독성이 있어 철쭉은 건들지 않는 면양의 특성 때문에 철쭉만은 남겨두게 되었다. 역시나 먹성 좋은 면양들은 다른 나무와 풀은 다 먹으면서도 철쭉만은 건드리지 않아 오히려 지금 이렇게 철쭉만 더 번성하게 된 것이다. 양떼들이 놀던 구간은 바래봉~부운치였다. 그러니 그 구간은 목초지 철망이 처져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실제 이 면양목장의 제1차 후보지는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의 외곡마을이었다. 일본 규슈대학교의 연습림으로 이용되었던 이곳은 최적의 면양후보지로 꼽혀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시범 목장으로 조성되기까지 하였다. 550ha에 이르는 광대한 분지에 초지를 조성하여 각종 조사도 마치고 면양 사육에 최적이라는 판정까지 났는데 돌연 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러고는 이 운봉고원으로 옮겨오게 되었는데 그 취소 이유가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이라나?

 

- 졸저 전게서 476쪽 본문과 각주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야죠?

1년 365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바래봉 샘터를 지난다. 예전 양떼 감 시사가 있던 자리는 초소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측으로 차량이 드나들던 넓 은 임도는 바래봉 삼거리가 되었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임도를 따르면 용산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봉읍으로 나가 둘레길 제1구간의 종점이자 제2구간의 시점인 운봉초교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직진을 하여 성삼재를 향해 걷는다. 이 지리서부능선 중 목장자리였던 바래봉~부운치의 4km 능선은 그야말로 철쭉천국이다. 지리산 철쭉하면 세석철쭉인데 그 이름을 무색하게 할 정도 다. 다 저 면양 덕분이다.
나무 계단 좌측으로 팔랑마을 하산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예전의 등로를 나무 데크로 유도하여 우회하게끔 새로운 등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양쪽으로 억새풀이 큰 키를 자랑한다. 가을이면 이 억새가 꾼들을 부를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477쪽

 

바래봉을 돌아보고,

팔랑마을 삼거리를 지나 나무데크를 따라 이동합니다.

12:08

1034.3봉을 지나 싸가지고 온 김밥을 먹습니다.

참으로 ...

보면 볼 수록...

12:57

1121.9봉을 지나,

아쉬움에 다시 바래봉을 보고....

13:04

부운마을 삼거리를 지나,

13:29

1142.6봉을 지납니다.

상부운 마을.

반야봉과 세걸산.

13:55

오늘은 워밍업을 하러 왔고 또 고남님 컨디션이 좀 그러니 세동치로 빠집니다.

덕산삼거리를 지나,

14:39

전북학생교육원으로 나옵니다.

이 엄청난 시설을 이렇게 썩히고 있으니....

 

택시를 불러 운봉읍으로 나갑니다.

단골집에서 둘이 뒷풀이를 하고...

덕분에 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고 귀가를 합니다.

어밍업을 했으니 이번 주말 산행을 한 탕 하고 다음 주에 예정된 충북알프스 산행은 잘 치러 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