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점에서 왼편으로 흘러오는 물줄기를 따라 시오 리쯤 올라가면 거림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당시에는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다 쓰러져가는 빈집 한 채가 메밀밭 속에 외따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 물줄기는 또 두 갈래로 갈라진다.
우리 환자 트 일행은 그중 오른쪽 물줄기를 따라 다시 오 리쯤 골짜기를 올라가서 숲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물줄기 가까이는 사람 통행이 있을 위험성이 있으니까 계류가 보이지 않는 지형을 고르다보니 바위 사이에서 10여 명의 용수用水는 될 만한 석간수가 솟고 있어 그 근방에 산죽과 억새를 베어 'ㅅ'자 초막 두 개를 엮었다.
(중략)
그래도 훗날에는 환자 트가 피습되는 일이 종종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환자 트는 거의 안전지대라고 해도 좋았다.
이태의 체험적 소설 남부군 중 저자가 거림을 통해 도장골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대목입니다.
남부군.
조선유격대 남부군의 준말이죠.
영화로도 제작된 작품이었고.....
출판사의 책 소개를 보면 “북한 정권에게마저 버림받은 채 남한의 산중에서 소멸되어간 비극적 영혼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 냉혹한 자가自家 숙청 등 빨치산 사회 내부의 적나라한 모습과 한계 속에서 드러나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등 베일에 가려진 지리산 빨치산에 관한 첫 실록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지리산 여느 골짜기, 여느 능선이 안 그렇겠냐마는 도장골 역시 그런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골짜기로 묘사됩니다.
대저大抵 지리는 보는 이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나 사무침은 다르리라고 봅니다. 그 골이나 능선들은 각기 나름대로 자신들 만의 것을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신계곡은 폭포로, 뱀사골은 소沼와 징담澄潭으로, 칠선계곡은 적요한 원시자연경관으로 그리고 국골은 끊이지 않는 작은 폭포의 이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보여줍니다. 저는 늘 그려봅니다. 이들을 다 간직하고 아니 이들을 조금씩이나마 보여주면서 지리의 참맛을 온전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속살은 없을까? 99골이나 되는 지리를 조금씩이나마 한 줌 한 줌 모아 한 곳에 모아둔 곳은 혹시 없을까? 없기야 하겠냐마는 혹시나 있다 하더라도 그 넓디넓은 지리산에서 그런 곳을 찾기란 혹시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가 아닐까? 지명에서 그런 곳을 찾아봅니다. 예전 산행기에서 그런 대목이 떠오릅니다. 악어봉을 찾으러 갔을 때 들른 달천지맥입니다.
그때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달천지맥이라...
달천지맥은 비록 백두대간의 하늘재와 마역봉 사이에서 분기한 지맥으로 비록 36.4km의 짧은 산줄기로 동생인 신선지맥과 함께 달천 동부를 아우르고 있는 산줄기입니다.
달천은 백두대간이 속리산 천왕(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을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죠.
길이가 무려 116km에 이르는 큰 물줄기이지만 대간과의 거리가 짧아 지맥은 두 개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달천하면 생각나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오누이의 전설이죠.
'달래나 보지'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냈는데 여기서 그 남동생이 자살한 물줄기가 바로 '달래강'이 되었다는 것이죠.
달래강은 곧 '달내'이고 달내는 '달천'이니 이를 국어학적으로 보면 (물건 등을) '달라'라는 발음이 '달래'와 같아 생긴 말에 불과합니다.
섬진강의 이전 이름은 두치강豆恥江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들어와 이 강의 나루터에 도착하자 나루터 일대에 수많은 두꺼비가 몰려들어와 울부짖었다. 이 때문에 왜군들이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에 두치강이라 부르던 강 이름을 이때부터 섬진강으로 바꾸었다.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전설이다. 유사한 전설이 또 있는데 다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우리가 옥편을 보면 섬蟾에는 ‘두꺼비’란 뜻 말고 ‘달月’이라는 뜻이 하나 더 있음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달을 섬궁蟾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예로부터 달에는 두꺼비가 살았다고 하는 설화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섬토蟾兎라는 말도 달을 이르는 말인데 이 역시 달나라에 금두꺼비와 옥토끼가 살고 있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섬진이라는 이름은 달月 + 나루津의 조합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니 '높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우리말 '달'을 月이나 鷄를 쓰는 대신 蟾을 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경우 예전 이름 두치강의 두치도 한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우리말 '머리재' 즉 '높은 고개'에서 왔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즉 豆恥는 頭峙였다는 것이다. 지리산의 웅장함에서 이렇게 일반적인 이름이 조금 색다르게 변화한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니 섬진강을 머리재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시도 때도 없이 약탈을 일삼는 왜구에 대한 지겨움에 두꺼비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니 달(月)達 = 高 = 頭, 豆이니 곧 달 = 山이어서 달천은 물맛이 좋아서 감천甘川이나 덕천德川이 아니라 속리산의 가장 높은 곳達에서 흘러내리는 물이기 때문에 달천인 것입니다.
이 글을 쓸 때 KBS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마침 부산의 감천마을의 생활상을 방송하던데 그 감천마을의 '감甘'도 그 훈이 '(맛이)달다'에서 착안하여 생긴 말로 그 '달'은 '達'에서 온 말이니 達 = 高 = 山 즉 '높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달동네는 바로 달을 가까이 볼 수 있는 높은 고지에 있는 동네라는 말이 아니라 그 말 자체로 산동네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송호열님의 '한국의 지명변천' 26쪽을 보면 감은 검 즉 神에서 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때의 儉은 주로 곰, 검, 거북 등의 의미로 변하여 한자로는 龜, 黑, 漆, 玄 등으로 표기하였으며 고마, 가마, 곰, 감 등으로 변하여 신성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천은 위치상으로 보나 그 유래로 보나 신성하다는 의미보다는 높은 곳에 위치한 산동네로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이렇듯 고대의 우리말 중 ‘山’은 ‘達’이었습니다.
국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달’을 뿌리로 하는 말은 시간이 흐르며 지역에 따라 ‘닫’ 혹은 ‘돋’으로도 쓰이게 됩니다.
그러니 산의 깊은 골짜기라는 말은 ‘돋 + 안쪽 골’ > ‘돋의 안골’ > ‘도댠골’ > ‘도잔골’ > ‘도장골’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결국 도장골은 산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는 보통명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 국어의 ‘도장’이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인 규방閨房이었음을 이런 쓰임새가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은밀하고 안으로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방이라는 의미겠죠.
이렇듯 ‘도장골’은 ‘안방처럼 아늑한 골짜기나 마을’로 해석이 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골짜기나 마을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안방처럼 아늑할 때 붙는 이름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 말이 변형되어 식량창고로 쓰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도장골은 이 정도의 의미에서 생긴 이름일 것입니다.
이러니 제발이지 “예전에 한 장수가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이 산속에 도장을 차려 놓고 무술을 연마하여 외적을 물리쳤다.”라거나 “산신령이 꿈에 도장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나무들을 점지해 준 골짜기”라는 소설들은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 지리에 맛을 들인 후배들이 어디서 '도장골'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그곳 안내를 부탁합니다.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그곳을 안내해 달라고?
일단 그러겠노라고 얘기는 해놨는데 비탐구간이기도 한 그곳이 능선도 아니니 잘못하다가는 괜히 고생만 하다가 혹시나 계곡이어서 사고가 날지도 모를 노릇.
9월 초로 예정을 해 놓습니다.
그런데 미리 예습을 해야 하나?
중요한 몇 곳이 있기도 하고 분명 새벽에 도착하여 들머리도 찾지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줘서도 안 되니 사랑하는 그들에게 그곳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미리 선답한답시고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날짜를 정했던 7. 21.은 태풍때문에 거림입구에서 삼겹살만 먹다 돌아오고....
친구들이 도와준답시고 8. 20. 남부터미널에 집결하였다가 또 비소식에 사당동에서 밤새 술만 푸다 관악산행.
8. 27. 또 비소식.....
이제 미룰 날짜도 없으니 8. 29. 22:30 무조건 남부터미널로 나갑니다.
예의 23:59 버스를 타고 원지로 향합니다.
원지에 도착하니 8. 30. 03:00.
PC방으로 가서 영화 한 편을 보니 5시가 넘는군요.
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도시락 하나를 먹고 06:25에 도착하는 거림행 버스를 기다립니다.
5,500원을 내고 버스에 오르니 청학동까지 갔다가 나오면서 거림을 들르는군요.
지도 #1
07:47
오랜만에 훤할 때 거림으로 출장을 온 듯한 느낌입니다.
사모교思母橋도 건재하고....
노모는 일어나셨을라나?
없어진 아들을 확인하고는 얼마나 실망하실까....
07:52
좌측은 거림 ~ 세석대피소로 오르는 정규 탐방로.
우측은 도장골로 오르는 비탐방구간,
직진하여 길상암, 길상선사를 따릅니다.
도장골.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도장골의 물이 세석에서 내려오는 물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물에 '내대천'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경학의 개념으로 본다면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갈리는 그 지점에서 나오는 물을 원천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럴 경우 당연히 북해도골, 자빠진골, 음양수골, 큰광변도골 등 여러 개의 골들을 모은 정규탐방로의 그 골을 가령 '거림골' 혹은 '세석골'이라 이름하여 그 골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에 '내대천'이라 표기하여 원천으로 삼음이 마땅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어쨌든 도장골에 여러차례 큰 사태가 난 것을 반영하듯 집채 만한 커다란 바위들이 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길상선원.
07:57
그리고 바로 위의 길상암.
우측 길 정면으로 펜스가 쳐져 있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이 보입니다.
주민들이 설치한 고로쇠 수액 호스hose를 따라가면 펜스를 넘어 온 길과 접속을 하게 됩니다.
좌로는 맑은 물이 보이고.....
08:03
펜스에서 약 400m 올라온 지점.
공단에서 설치한 경보기가 보입니다.
접근을 하면 바로 경보음이 울리게 되어 있죠.
08:04
경보기를 우회하자마자 바로 이번에는 카메라가 나옵니다.
저 앞을 지나면 바로 모니터링 될 것입니다.
그러면 거림탐방소의 근무자가 바로 뛰어나올 것이고 그럴 경우 하산하는 팀이라면 바로 단속이 될 것이겠고....
등로는 반들반들.....
골치기도 좋지만 요며칠 계속 비가 온 뒤라 가능하면 등로를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이 길들은 약초꾼도 다니고 나물을 캐러 다니는 마을 사람이 다니던 길이기도 했지만 조금 더 다른 의미 아니 시간 여행을 최근으로 좀 앞당긴다면 주로 남부군과 빨치산들이 많이 이용한 곳입니다.
그 후에는 토벌대도 드나들었고 1960년대가 지나면서 비로소 산꾼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을 겁니다.
소沼.
이렇게 맑고 깨끗한 소沼를 좀 더 어려운 한자로는 징담澄潭이라고 하죠.
어쨌든 이 도장골을 진행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골치기, 등로 이용 그리고 잡치기 등일 것입니다.
골치기야 뭐 골을 따라 오르면서 미끄럼에만 유의를 하면 될 것이고......
‘도장골은 아직 등산 지도에서조차 전혀 길 표시가 돼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밀금폭포와 윗용소까지 길이 반들반들하게 잘 이어져 있다. (중략) 이곳에 생각보다 길이 잘 나 있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윗용소와 와룡폭포 사이의 깊숙한 곳에 빨치산 지휘소 캠프가 있었다. 그 흔적인 토굴식 집들이 망가진 채 지금도 대규모로 남아 있고 돌담자리도 그대로 있다. 빨치산의 일부가 도장골 깊숙이 지휘소 겸 후송병원을 차린 것은 이곳이야 말로 감쪽같이 숨겨진 곳이자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이기 때문이다.’
최화수는 그의 저서 ‘지리산 365일’에서 이 이영회 부대 주둔지와 ‘환자 트’를 엮어 ‘빨치산 대규모 캠프’라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트’란 아지트의 준말로 빨치산들은 모든 용어를 나름 줄여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가령 보급투쟁은 ‘보투’, ‘총사령부’는 ‘총사’ 같은 식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방식과 같습니다.
그런데 꼭 만나려한 이영회 아지트가 보이지 않는군요.
공단에서 그 흔적들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역사의 산교육장을 관라의 편의라는 명목을 위해서 그 흔적을 다 지워버리려 하다니....
그런데 등로를 이용한다면 커다랗게 자란 산죽밭을 헤치고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올라야 합니다.
산죽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저로서는 이럴 때 음악을 틉니다.
산신령과 주인인 야생동물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미리 서로 원하지 않는 조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만큼 효과적인 게 사실 없습니다.
오늘은 John Lennon의 '#9 dreams'부터 듣습니다.
환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선율과 아름다운 가사는 이곳 숲의 주인들로부터도 충분히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등로는 이렇게 바위도 나타나지만,
주主는 이렇게 산죽밭입니다.
"내가 이런 평범한 길을 보려 이 도장골로 왔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도장골에 대한 회의감이 들 무렵.
08:39
너른 반석이 나타나며 시끄럽게 왼쪽 귀를 자극하던 그 물소리들의 실태를 숲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민낯을 확인하게 돕니다.
그저 음악 속의 "현오"리고 부르던 소리가 아니라 바로 대놓고 부르는 소리입니다.
"오래오래"라고 하면서 먼저 사라진 산친구의 부름 같습니다.
등로는 여기서 계류를 건너 반대편 숲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산죽밭은 걸어야 하는 무료함을 벗어나고 잠시나마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면 잠시 골치기를 해도 좋을 법한 곳입니다.
큰 바위와 작은 바위를 차례로 지나 오르다 보면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여러 형태로 들을 수 있고,
그리고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산행.
내 멋대로 내 생각 나는 대로 즐기면 됩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럴 때 학창시절 현대문 공부를 한답시고 읽어댔던 교과서외의 지문 프루스트의 산문을 외워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야심은 광영보다 사람을 더 취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제가 제일 즐기는 대목 즉 '욕망은 꽃을 피우나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게 한다.'는 그의 지론에 늘 고개를 끄떡이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국골이나 한신을 보다 이곳을 오르다 보면 좀 실망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폭포만 보러 온 곳도 아니요 징담만 보러 온 곳도 아닙니다.
너무 골로만 올랐으니 다시 산죽이 그립군요.
대강 흔적을 찾아올라,
09:03
길을 제대로 찾고는 아무데나 표지띠 한 장을 걸어놓고 지도 #1의 '다'의 곳에서 거꾸로 등로를 내려갑니다.
들머리를 확인하고자 함입니다.
09:09
OK.
아까 눈여겨 봤던 곳이 바로 정상적인 루트 맞습니다.
'나'를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골치기를 하든 아니면 이 산죽밭을 따라 고행을 즐기든 그건 순전한 자기 몫입니다.
이게 바로 제 3의 방법 즉 잡치기죠.
잡雜.
참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09:21
산죽밭을 헤치는 등로가 지겨워질 무렵 좌측으로는 큰 절벽이 길의 진행을 막으니 다시 골을 따르게 됩니다.
09:25
커다란 사태로 바위가 많이 떠내려 왔군요.
계류를 건너 이번에는 골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너덜이기에는 너무나 큰 바위들.....
진화의 흔적입니다.
10:08
작은 폭포.
국골에서 많이 보던 것들입니다.
조금 큰 것들도 있고.....
도장골이 좋은 점 하나 더!
통신 두절입니다.
긴급전화 이외에는 이른바 '서비스 불능'지역입니다.
전화나 메시지도 전달이 안 됨은 물론 인터넷도 안 됩니다.
그저 머릿속으로의 상상과 명상 그리고 집중만 허용되는 곳입니다.
10:11
그렇게 다시 골의 왼쪽으로 건너 진행을 합니다.
10:15
오른쪽으로 건너니 좀 규모가 있는 너른 폭포를 봅니다.
우측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그냥 올라가면 일출봉 능선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바위 우측으로 조심스럽게 오릅니다.
그 빠른 물살 위로,
제법 큰 규모의 폭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와룡폭포입니다.
지도의 표기와는 달리 지도 #1의 '라'의 곳입니다.
와룡이라.
제갈량의 아호죠?
일찌기 서서(유비의 초기 참모. 맞나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는 유비에게 이야기합니다.
와룡이나 봉추(방통의 아호) 중 한 사람만 얻어도 한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물론 유비는 그 와룡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던 것이고.....
어쨌든 와룡이 여기 있고 바로 위로 올라가면 한신(바위)이 있으며 그 바로 옆에 운장(관우)가 있으니 이 지리산 하고도 영신봉 부근에는 삼국지의 영웅과 초한지의 호걸이 다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영신봉 일대의 바위가 그만큼 비결쟁이들에게는 영험한 곳이고 기도발이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의 전설 우천 허만수 선생은 이 세석에 움막을 지어놓고 생활을 하면서 등로를 개척하고 지도를 제작해 나눠주고, 길을 잃은 산꾼들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산꾼들 구조 활동도 하는 등 지리산을 사랑하며 도인 같은 생활을 하였다. 33살 때 지리에 들어와 30년 가까이 지리산 생활을 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천 선생.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지리산에서 영생하기 위하여 홀연히 사라진 것이라고 하던데... 그런 지리산 중에서도 세석이다.
점필재는 이곳을 지나면서 어떻게 보았을까?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沮洳原)에 다다랐다. -중략-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었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중략-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사진 8> 촛대봉과 시루봉. 촛대봉의 예전 이름 중 시루봉이라는 이름도 가졌었다.
어진 수령이었던 김종직의 인품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촛대봉으로 오르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부드러운 영신봉 라인에 바위가 몇 개 북쪽과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게 눈에 들어온다. 기도꾼들에 의하면 이 영신봉의 바위들은 유달리 기가 세어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이 있거나 인심이 흉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중무속인들은 영험한 기운을 영웅으로부터 찾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영신봉 동쪽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그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석평전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계곡이 자연스럽게 ‘한신계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 개탄한 글을 하나 볼까? 1924년 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인 시대일보의 기사이다.
청학동을 찾아다니는 제군들아! 사람은 정신을 먼저 미신으로부터 타파하여야 될 것이다. 청학동은 진실로 미신의 한 주요물이 되었다. 거금 삼백 여 년 전 한 도인의 秘書를 보건대 청학동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데, 장차 삼제갈 팔한신(三諸葛 八韓信)이 날 것이요, 그 동리를 복거(卜去)한지 십 리 이내에 車馬가 영문(盈門)이라 하였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한 도승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세무청학동(世無靑鶴洞)이라 하였다.
도인은 있다 하고 도승은 없다 하니 청학동은 진실로 전무후무한 혹세무민의 산물이다. 선영구토(先塋舊土)를 다 버리고 세탁가업(世倬家業)을 빙자하여 그야말로 당대 발복지인 청학동을 찾아 천 리를 멀다 않고 내왕하는 인사들아. 참으로 가석가애(可惜可哀)한 제군이다. 내일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사를 전람하면 알 것이다.
수 십 년 전으로부터 청학동을 찾으려고 지리산 남록에 거류하는 수 천 명의 경과를 보건대 십년 이내의 車馬 영영문(盈迎門)은 고사하고 반년 이내에 남에게 압박만 많이 받는다 한다. 현금(現今) 세소간(世所間)에 청학동이라는 곳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 세석평지 혹은 잔돌평지이라 하는 데는 평원광록이 주위 사십 리나 되고, 자좌 우향(子坐 于向. 정북에서 정남방향)으로 되어 미신에 혹한 자의 눈으로는 한번 혹할 만도 하다.
-------------------- 중략 ------
諸君아!
청학동을 찾아 제갈(諸葛), 한신(韓信) 같은 자손을 바라는 것보다 청학동을 찾는 그 경비로 현대에 상당한 교육을 가르쳐 제갈, 한신 같은 사람을 배워서 성공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청학동인가 하노라.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44쪽
저는 이 영신봉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비결쟁이들과 관련 조금 더 깊은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결과물을 아래와 같이 적었던 것이죠.
예로부터 우리나라 무속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도 석가나 공자 외에 옛날 중국의 지략과 무공이 출중한 영웅들 즉 관우, 장비, 유비, 제갈공명, 한신 등을 섬기는 사례는 빈번했다고 한다. 한국민속종교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무속세계에서 중국 신령을 모시는 전래풍습은 임진왜란 때부터라고 한다. 명군明軍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崇明사상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관우의 경우는 ‘군신軍神’ 혹은 ‘재물의 신’으로 여겨져 명의 요동에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도시에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으며 민가에서조차 관우의 초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명은 1598년 4월 당시 한양 남대문 부근에 주둔 중이던 경리어사 양호(둘레길 제20구간에서 조경남 얘기를 할 때 나오던 원숭이 부대를 이끌었다는 장군)에 의해 관우사당이 지어져 남관왕묘라 불렸으며 같은 해 5월 13일 관우의 생일에는 선조도 참배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1599년에는 두 번째 사당을 건립할 것을 강요하여 1601년 완공된 것이 동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로 지금 동묘로 불리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시기에 명군의 참전과 주둔이 조선에 남긴 문화의 영향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실체라고 보는 시각(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도 있다. 그래서 한양을 비롯하여 여러 곳 특히 지리산과 가까운 남원에 관우 사당이 세워지는 등 이러한 풍조는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선조를 비롯하여 유학을 넘어 유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은 명나라에 대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명이 조선을 구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고 이는 명에 대한 모화의식을 깊게 해주었으며 명이 망한 뒤에도 ’대명의리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여 민중에게는 위와 같이 중국은 물론 중국의 영웅들까지 받드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서인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나라를 또 한 번 쑥대밭으로 만든 1627년 1월 정묘호란과 1636년 12월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45쪽 각주 34.
그러니 지리산 한 골짝 한 골짝마다 다 사연이 숨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와룡폭포의 상단부 모습입니다.
상단부하니까 설악의 토왕성 폭포 상단부가 생각나는군요.
언젠가 그 토왕성 폭포 상단부에서 노적봉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요?
늘 상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또 올라가야죠.
10:37
골이 나뉩니다.
지도 #1의 '마'의 곳으로 중요한 point입니다.
바로 우측이 바른개골(연하봉골로도 불림)로 오르는 곳이니 이곳이 바로 도장골의 촛대봉골과 바른개골의 합수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바른개골을 따라 오르면 요사이 새롭게 지어진 이름인 화장봉1693.6m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좌측도장골 중에서도 촛대봉골로 오릅니다.
11:08
촛대봉골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죽밭과 이렇게 계류를 오가며 오르게 되고....
물론 등로는 좌측 계류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진행이 되지만 조금이라도 더 골을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등로에는 나름 표시를 해가며 오릅니다.
11:10
지도 #1의 '바'의 곳.
여기서 다시 골이 나뉩니다.
즉 우측으로 진행을 하면 새로운 이름인 삼신봉으로 오르는 골이라 하여 삼신봉골로 진행이 되고 좌측은 여전히 오리지널 촛대봉골입니다.
그러면 그 촛대봉골의 위세라도 과시하듯 긴 폭포 하나가 떨어집니다.
이제 이 정도에서 골을 버리고 촛대남릉에 붙기 위하여 좌측으로 붙습니다.
등로는 명백합니다.
우측 골을 따라 오르는 등로도 보이지만 시루봉1578.0m을 겨냥하고 그 길로 올라 청학굴과 청학연못을 답사하는 게 오늘 산행의 목표이니 촛대봉골의 물줄기는 그저 눈팅만 합니다.
다만 저 골을 타고 올라가 촛대봉으로 바로 오를 그날을 상상으로만 즐기면서.....
그렇게 3시간 정도를 함께 한 도장골의 물들과 이만 작별을 합니다.
사실 뭐 그리 아쉬울 것만도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음 코스를 바른개골로 잡았으니 말입니다.
또 다음 주에 이곳을 다시 올 것이고.....
등로는 선명하게 잘 나 있고....
흐린 안개 구름 뒤로 능선이 보이고 봉우리가 보였다가 사라집니다.
연하능선의 지선 같습니다.
11:42
죽은 산죽.
우측으로 도솔암 가는 선명한 길을 지나면 죽은 산죽 밭을 지나게 된다.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삼필사설三必死說을 떠올리게 된다. 고도를 떨어뜨리는 암벽구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이내 1169.4봉 아래에 있는 고개이다. 마천 삼정리 사람들과 산내의 부운리 사람들이 교류하던 길이었을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93쪽
11:45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경사가 급해지는 것을 보니 시루봉 구역 안으로 든 것 같습니다.
11:50
조망만 좋았다면 여기서 연하봉이니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까지 다 볼 수 있었을 것인데.....
시루봉의 암봉은 돌아서,
바위틈과 나무 뿌리를 잡으며 올라야 합니다.
며칠 전 인수봉을 올랐다고 하는 산우의 글과 그림.
두고두고 나를 보려면 조심해서 암장을 올라라고 했죠?
그곳에 올라 이어지는 남릉을 봅니다.
이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1036.4봉을 지나 바로 거림으로 떨어지겠죠.
천왕봉!
바로 좌측과....
발 아래.....
발 아래와 좌측 사이....
12:15
그러고는 시루봉 정상,
이 봉우리의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되신다면...
영신봉에서 좌측 촛대봉을 보고 찍었을 때 우측의 기생화산 같이 보이는 봉우리.
그렇죠?
바로 이 봉우리.
촛대봉으로 오르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툭 튀어 나온 봉우리.
바로 저 봉우리 위에 서 있는 겁니다.
구름이 없었더라면.....
바람이 셉니다.
금방이라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질 것도 같습니다.
다시 산죽을 뚫고.....
12:23
텐트 두 동을 칠만 한 곳.
지도 #1의 '사'의 곳입니다.
도솔산인님 아지트.
일행들과 별을 보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신선이 되어 신선주를 나누었을 님을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한편으로 혼자 누워 그별들을 감상하는 노고단님.
"형님! 별똥이 떨어집니다."
도솔산님은 무슨 글자인지 해독을 하실 텐데.....
이제 남은 곳은 두 곳.
청학굴과 청학연못만 찾으면 됩니다.
청학연못을 이 루트로 올라 들른 적이 없으니....
그것도 이런 조건 하에서는....
철쭉과 산죽을 헤치며 진행하다 나오는 삼거리의 절벽에서 아래로 내려갑니다.
12:29
청학굴입니다.
가까이 들여다 보니 석간수가 나오고 맑은물을 떠 먹을 수 있는 곳.
청학靑鶴은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얼굴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길조吉鳥입니다.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일찍이 지리산 신선 고운이 타고 다녔다는 새이기도 합니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물론 이상향의 청학동의 위치는 지금의 삼신봉 아래 청학동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일본놈들이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고 친일파도 모자라 신친일파가 날뛰는 요새 왜 이 청학은 날아와 울지 않는 것인지...
삼거리로 되돌아 나갑니다.
길을 따라 나가니 바로 촛대봉이 코앞입니다.
청학연못 가는 길 찾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다시 음악을 틉니다.
음....
노찾사 노래.
오케이
그중 '지리산'을 듣습니다.
제격이죠?
길을 잘못 들어 멧선생 아지트를 무단으로 침입하고....
황당합니다.
여기서 방향을 잡을 수 없어 잠시 헤맵니다.
조금 더 남서진합니다.
갑자기 바위가 나오고.....
12:53
지도 #1의 '자'의 곳입니다.
간신히 찾았군요.
청학연못 소고
예전의 화려했던 세석평전의 알록달록한 텐트 대신 이제는 새로 자리 잡은 초목들이 대신하고 있다. 국립공원의 면모를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등로 양옆으로 로프를 쳐놓고 데크를 설치하여 식생을 보살피고 있다. 촛대봉이 지척이다.
마천이나 거림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영신봉보다는 시루봉甑峰1703.1m(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다.
이 촛대봉은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김종직과 하달홍은 이 촛대봉을 중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특히 김종직은 증봉甑峰이라고 불렀으며,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 송병선은 촉봉燭峰 그 외 시루봉, 수리봉, 취봉鷲峰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인데 유몽인의 경우 사자봉으로 불렀다.
4월 5일 갑술일. -중략-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사자 한 마리 안 사는 우리나라에 웬 사자봉?"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도솔산인 이영규는 이에 대해 “이 역시 불교식 이름으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탔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인다. 그런데 촛대봉은 뭐고 증봉, 시루봉은 뭔가? 생긴 게 그렇게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12구간을 지나면서 살펴봤다.
- 졸저 전게서 447쪽
사실 이 촛대봉1703.1m은 지리산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는 봉우리이다. 영신봉16516m보다 조금 더 높아서 그런가 아니면 생긴 모양 때문에 그런가? 어쨌든 이 촛대봉에는 몇 가지 더 살펴 볼 게 있다. 우선 다음 글을 읽어보자. 1879년 송병선이 쓴 두류산기인데 이 촛대봉과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진 9> 청학연못을 세석연못이나 적석연못으로 부르자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누대를 오르니 왼편에는 누운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정면에는 ‘학동임(鶴洞壬)’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근래에 기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짓인 듯하였다. 아래에는 작은 못을 만들었고, 또 그 몇 보 아래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연수정(延壽井)’이라 하였다. 누대의 뒤에는 촛불 같은 촉봉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율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두류산 저 멀리 저녁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으니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만개의 골짝과 천개의 바위가 회계산(會稽山) 같구나.
杖策浴尋靑鶴洞(장책욕심청학동)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는데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숲 너머로 부질없이 흰 원숭이의 울음소리만 들리네.
樓臺縹緲三山近(누대표묘삼산근) 누대에선 아득히 삼신산이 가깝고
苔蘚依俙四字題(태선의희사자제) 이끼 낀 바위에는 어렴풋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네.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시험 삼아 선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노니
落花流水使人迷(낙화유수사인미) 떨어진 꽃 흐르는 물이 사람을 미혹케 하네.
그 옆에는 낙운거사(樂雲居士) 이청련(李靑蓮)이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고적(古迹)이며, 대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탁영 김일손의 유기에서는, “쌍계의 동쪽으로 몇 리를 가서 한 동네를 발견했는데, 넓고 평평하여 농사를 지을만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청학동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도 또한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송병선의 글은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즉 ‘鶴洞壬’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 아래 연못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연수정이라는 샘물이 있다는 것과 이 바위 뒤로는 촉봉이 있는데 그 봉우리에는 바위에 율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는 것과 그 옆에 이청련이 쓴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 등이다.
‘촛대 같은 촉봉’은 김종직과 하달홍도 이 봉우리를 촉봉이라 하였으니 이 ‘燭峰’은 지금의 촛대봉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촛대봉의 여러 개의 바위 중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라고 쓴 각자는 너무 희미하여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에서 ‘宣人羅州鄭氏之墓’라는 각자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봉 아래로 촛대봉능선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가면 과연 커다란 너럭바위를 찾을 수 있는데 그 바위에는 ‘鶴洞壬’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인공연못이 있으며 그 아래 조금 내려가면 샘물이 있는 ‘박지泊址’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지형과 1879년 송병선이 볼 때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 졸저 전게서 448쪽
그렇다면 이 ‘작은 못小池’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냐 하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 못의 발견자는 우천 허만수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우천은 ‘지리산 달인’ 성락건에게 은밀히 얘기해줬고 성락건은 평소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석=청학동’이라는 신념대로 못의 이름을 ‘청학연못’이라고 사람들에게 귀띔을 해준다. 그렇게 전해준 이름이 지리산에 관한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리99팀’에게 알려지면서 그 이름은 지리산꾼들 사이에 퍼진다.
문제는 축조 시기와 선인들이 답사한 이 청학연못의 정확한 이름을 밝히는 데 있다. ‘지리 99팀’의 ‘가객’은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겸암일기의 돌문과 돌샘 즉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 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石門)에 이르고 그 돌문(石門)을 지나 40리가량 가면 1천 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 호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石泉)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가 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는 내용을 들어 1570년경이라고 본다.
반면 도솔산인 이영규는 위 류운룡은 화개동천에서 출발하여 횡천지맥을 거쳐 삼신봉에서 낙남정맥에 들은 다음 세석으로 올랐다고 진행 코스를 설정한다. 그러고는 위 루트 상의 ‘돌문’은 낙남정맥 상의 삼신봉 바로 아래에 있는 지금의 ‘석문’을 이르는 것이고 ‘돌샘’ 역시 지금의 ‘음양수샘’을 말하는 것이니, ‘돌샘’은 이 ‘작은 못’과 전혀 관계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위 송병선에 앞서 이곳을 지났던 하달홍의 1851년 산행기에는 이 ‘작은 못’에 대한 기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못의 축조 시기는 1862년 진주 단성민란 때 피신을 온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인공 못을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못의 이름은 불일폭포에 있는 청학연과 구분하여 이곳 세석평전이 예전에는 적석평積石坪이라는 지명을 가졌음에 착안하여 세석연못 혹은 적석연못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생각건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산길을 가장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능선이며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닌 다음에야 계곡을 건너 마주 보이는 능선을 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유운용의 돌문과 돌샘은 지금의 낙남정맥 상의 석문과 음양수샘으로 보는 이영규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성낙건 선생은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다면 세석 이외에는 불가능하다.”는 평소의 소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 연못을 청학연못이라 부른 것은 불일폭포의 청학연과 혼동을 하여서 붙인 게 아니라는 점, 지금은 어느 정도 청학연못이라는 이름으로 세인들에게도 정착된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그 이름만큼은 지금의 청학연못으로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
- 졸저 전게서 451쪽
이제 오늘 과업은 다 마쳤습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역사 현장 답사는 이걸로 마칩니다.
그러고는 희미한 길을 따라 하산을 서두릅니다.
빨리 내려가면 15:00경에 거림에서 원지로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입니다.
13:16
무명교로 떨어집니다.
지도 #1의 '차' 곳입니다.
이제 정규 등로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다리라 무명교입니다.
13:26
거림까지 3.9km.
그런데 거림에서 출발하는 차의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
물론 이곳은 서비스 불능지역.
13:38
북해도교.
전화를 해보니 14:26에 있던 버스가 없어졌다고.....
13:44
허탈감에 그냥 슬슬 내려갑니다.
13:54
이 이정표를 보면 거의 다 온 것인데....
14:27
이제 다 왔습니다.
그런데 공단 초소 앞에 펼침막이 바람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주워서 혹시나 하고 초소문을 두드리니 직원이 근무를 하고 계시는군요.
그 펼침막을 다시 거는 직원분.
그분은 그분대로 근무에 열심히 하시고 저는 저대로 답사에 충실하고....
오능 아쉬운 점은 이영회 부대 아지트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
그에 대해서 준비한 자료를 봅니다..
남부군 57사단장 이영회는 1953년 11월 27일 산청군 신등면 사정리에서 경찰5연대와의 전투 중 전사합니다. 돌이켜 보면 1948년 10월, 여수14연대에서 봉기 당시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출동 명령을 받고 승선 대기 중이던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며 발발한 사건입니다. 두 명의 장교와 부사관들 포함 40여명이 일으킨 이 사건은 300여 명이 사살되고 2,000여명이 투항하여 일단 진압이 되었는데 이 사건을 주도한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는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영회로 그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그러나 이현상 사망 후 의령경찰서 습격 사건을 마지막으로 경찰의 매복에 걸려 사망하게 된 것이죠.
전북 순창 출신의 이영회는 일본 징용까지 갔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귀국을 해서는 순천역 부근에서 건달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입대를 하여 1년 만에 상사로 진급을 하다가 여순 사건을 맞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지리산 동북부 벽송사능선의 와불산 아래 있는 선녀굴의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이 부대를 뒷바라지 하는 부대였습니다.
덕산 김기사님께 전화를 하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 깨끗하게 씻고 땀에 전 옷을 갈아 입습니다.
아침에 지났던 들머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 속에서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워 살랐던 핏빛 정열에는 한가락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무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 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해간다.”
이태의 남부군 서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덕산에서 버스를 타고 원지의 왕갈비탕에서 혼자 하산식을 합니다.
귀경 중 내일 설악산 산행에 대해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 보니 벌싸 남부터미널입니다.
정신없이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와중에 날아온 메일 한 통.
10월 8일 번개로 지리주릉 종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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