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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지리산 국골의 끊이지 않는 폭포의 대향연

 

구형왕이 지나던 길

어쨌든 이 고동재는 왕등재봉과 왕산을 이어주는 고개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 고개가 있음으로써 왕산과 필봉산은 간신히 지리산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라는 접두사가 눈에 들어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왕등재의 이나 왕산의 모두 가락국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나라를 고스란히 신라에 넘겨 양왕讓王이라고 까지 불리는 구형왕은 이 왕등재 아래에 토성을 쌓고 끝까지 저항했다는 얘기1)가 이곳 주민들에게는 구전으로 전해온다고 한다. 실제 왕등재 너머 외곡 방향으로 그 성의 흔적도 볼 수 있고 나아가 이 성에는 성문도 볼 수 있으며 부근에 도장골(식량 창고)2)이라든가 망생이골(말을 키우던 곳), 국골國谷2) 등의 이름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 구형왕이 더 쫓겨 가 왕산에 이르러 결국 최후를 마친 것이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 같다.

 

고동재는 대동여지도에는 본통치라고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직진하여 사면을 치고 올라가면 지리산 왕등재봉으로 바로 이어지는 길이다. 둘레길은 임도를 따라 좌회전하여 수철리로 향한다. 내려가는 임도 우측으로는 사면斜面이고 좌측으로는 간간이 조망이 트인다. 가끔 이 임도를 오르내리는 차량을 만날 수 있다.

 

왕산과 필봉산을 조망하면서 15분 정도 내려오면 지리 덕천지맥에서 내려오는 상당한 수량의 물을 만날 수 있다. 좌측으로 쉼터 한 곳을 지나면 전원주택지와 이국적인 모습의 카페를 지나게 된다. 밭이 간간이 나오며 수철리 마을로 들어간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51쪽 이하

 

각주 1) 왕산 아래 수정궁(홍수로 관련 유적들이 다 떠내려가서 현 덕양전에 옮겨서 새로 지은 것)은 사리탑 4기만 남아있지만 이곳이 구형왕이 마지막까지 살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지난 구간 지나온 칠선계곡이 있는 추성동의 국골이 이 구형왕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즉 이 구형왕릉과 추성동의 추성산성 등이 이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되지나 않을까?

 

  2) 도장골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갈리나 필자는 최근 견해를 바꿔 이 도장골을 식량창고라는 의미보다는 국어학적 어원에서 접근을 하여 '숨은 곳' 혹은 '감춰진 곳'의 의미로 본다

 

   3) 예전에는 무당들에 의해 굿판이 자주 벌어져 굿골로 불리기도 했으나 구형왕의 피난처와 관련한 국골로 보는 게 유력하다.

 

지리산 99골.

딱 99개의 골짜기로 형성이 되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렇게 많은 골이 숨어 있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중 하나.

국골國谷이라는 이름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99라는 숫자가 암시하듯 이 국골도 여러 개의 골로 나뉘어 불리기도 하고 올곧게 한 이름 즉 국골로 불리기도 합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의 그곳은 사태나 폭우 등 기후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지금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이름들은 모두 생물生物로 들립니다. 

 

이끼폭포와 산수국. 노명희님 촬영

 

그런 그곳이 누구에게는 미답지이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제집 안방 같은 곳이기도 할 겁니다.

후배로부터 그곳을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진 국골.

오히려 광주 산꾼 유목민 대장님이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나서는군요.

절대 제가 다른 핑계나 선약을 이유로 불참하지 못하도록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죠.

진한 우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산꾼들만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정서겠죠.

 

대저大抵 지리는 보는 이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나 사무침은 다르리라고 봅니다.

그 골이나 능선들은 각기 나름대로 자신들 만의 것을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신계곡은 폭포로, 뱀사골은 소와 징담澄潭으로 그리고 칠선계곡은 적요한 원시자연경관으로 자신의 이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들을 모아둔 곳이 내대천을 이루는 도장골이라고 본다면 국골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지리의 속살.

그중에서도 국골로 불리는 지리의 한 골짝으로 들어갑니다.

교통편은 서울남부터미널에서 23:50에 출발하는 '함양지리산 고속'입니다.

버스에서 전철로 그리고 다시 전철로 갈아타야 하는 복잡한 교통편이지만 집에서 지리산 가기는 남부터미널 만큼 편리한 곳은 없습니다.

다만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사실 이 구간이 천왕봉 오르기 보다 더 힘듭니다.

그렇게 지리산 일정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후배 '내대로'님이 먼저 와 있군요.

내대로님은 금계 ~ 산청 구간 둘레길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고.....

이한검 대장님과 맹이님을 만나 차에 오릅니다.

03:05

인월터미널입니다.

광주팀이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군요.

잠시 후, 광주팀과 지리산 신선 고남님이 합류합니다.

그 시간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곳.

청솔식당이죠.

백두대간 봉화산에서 발원한 풍천이 람천에 합류되는 곳에 있는 식당.

별로 먹히지 않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집어넣고 식당을 나섭니다.

금계에 후배 내대로님을 내려주고 우리는 추성동으로 들어갑니다.

추성동 주차장에는 지리의 새내기이자 우림팀의막내 '배완식'님이 이미 도착해 있고....

배완식.

이립而立의 나이에 들은 그는 지금 지리에 미쳐 있습니다.

유목민 김중호님을 사부로 모시고 지리의 속살을 하나하나 배우고 있죠.

그러던 중 어쩌다 저를 만나 이제는 산줄기도 공부하겠다나요?

지금부터 산을 공부하시겠다!

부럽습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벽송사가 잠깐 등장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왜놈들을 피해 벽송사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다. 벽송사에 은거하며 지리산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곳 지리에 밝은 최노인을 만나려는 목적이었다. 그때 추성리, 칠선 계곡 그리고 국골 등의 지명이 나오기도 했다.

 

추성리의 추성楸城이나 박회성은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얘기도 되며 이는 곧 신라의 역사이기도 하고 백제와의 전쟁의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함양군편에 이들 내용이 나온다. 신라 화랑이 노고단에서 무술을 연마했다는 얘기나 화랑 장교永郞였던 원효가 이 추성~영랑대~천왕봉~화엄사 루트를 이용해 적진인 화엄사에 가서 화엄사상을 접했다는 얘기도 교종과 선종의 만남만큼이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지금의 추성동은 등산객이나 피서객들의 편의도모를 위한 민박촌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칠선동, 두지터, 광점동, 어름터 등과 더불어 화전민들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유명한 마천 곶감, 마천 산나물, 마천 한지(문종이) 등의 집산지 역할을 한 곳이었다.

 

 - 졸저 전게서 125쪽

 

주차장에서 준비를 마치고 이제 두근거리는 설레임만 가지고 국골로 듭니다.

지도 #1

 

04:40

상가 지대를 지나면,

좌측 벽에 예쁘게 벽화를 그려놓은 집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그 그림은 상업미술에서도 좀 격이 떨어지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그 내용만은 훌륭합니다.

칠선계곡과 국골 초입을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주저할 필요없죠?

좌틀하여 국골로 진입합니다.

오늘도 함께 걸음으로써 제 산행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산친구 이한검 대장님이 인증을 합니다.

좌측 산기슭.

서암정사에서 불빛이 새어 나옵니다.

 

See the curtains hangin' in the window

in the evening on a friday night

A little light is shinein' through the window

 

1시간 내로 내대로님은 저 서암정사를 둘러보면서 둘레길 오늘 구간을 맞을 텐데....

그냥 같이 국골을 하자고 할 걸 그랬나?

그래도 자기 계획이 있는 거니까.....

그래 잘 둘러 보고 벽송사에서 몇 군데 들른 다음 부용암까지 보고 가게나.....

혹 시간이 맞으면 인월이나 추성동으로 오고!

04:53

길이 갈립니다.

직진하는 길이 경운기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너른 길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우측 계곡길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칠선계곡의 물과 이 국골의 물이 합수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칠선계곡이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곳입니다.

이 칠선계곡의 초입은 추성동이다. 추성동은 지리의 지붕 같은 곳이라 했다. 그런 만큼 계곡도 깊고 많아 그 수만큼 능선을 거느리고 있으니 얼마나 복잡한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잠깐 이 부근을 정리해 볼까? 추성동으로 들어가면 물줄기는 크게 칠선계곡과 국골 그리고 허공달골 등 세 개로 나누어지고 이들을 크게 에워싸고 있는 능선은 창암능선과 벽송()능선 등이다. 그리고 국골과 칠선계곡 사이에 초암능선이 있으며 국골과 허공달골 사이에는 두류능선 등 두 개의 능선이 있으니 추성동과 관련된 등로는 모두 7개로 정리가 된다.

 

이중 칠선계곡 코스를 제외한 전 구간은 비탐방구간이다. 다만 이 칠선계곡도 인터넷 방문 예약을 통해서만 천왕봉 혹은 실질적으로 계곡이 끝나는 곳인 삼층폭포까지만 진행할 수 있다. 항상 산꾼들의 안전산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리산국립공원 홈페이지의 안내글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60쪽

초암폭포가 근처라니 볼만도 하겠는데 이 시간에는.....

그저 걸으면서 묵묵히 자연의 소리를 들을 따름입니다.

아까 인월에 내리면서 느꼈던 기분,

 

let's me now everything's alright

Summer breeze, makes me feel fine

blowing through the jasmine in my mind.

Summer breeze, makes me feel fine

blowing through the jasmine in my mind. 

그 기분 만을 느끼면 걷습니다.

Seals & Croft는 이런 기분을 알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까?

서울에서 느끼지 못했던 그 기분을 지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줄 것 같습니다.

가벼운 바람이 붑니다.

 

추성동 주민들의 생활을 위한 여러 물건들을 볼 수 있고.....

05:13

지도 #1의 '나'의 곳에서 아까 헤어졌던 일반등로와 합류하고....

무슨 소沼일까?

05:21

날이 밝아옵니다.

생김새가 야리꾸리한데....

이 아침에 그것도 신성한 지리산에서....

얼른 도리도리하며 생각을 지웁니다.

이런 그림은 계속 펼쳐지는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고.....

좌측의 너덜을 이용하기도 하고,

그냥 골치기로 오르기도 합니다.

큰바위에는 여지없이 이끼가 묻어(?)있고 그 옆에는 크든 작든 자기 얼굴을 가진 폭포가 자기 소리를 내며 떨어집니다.

막내....

물굽이.....

폭포.....

노호怒號.

그리고 침잠沈潛.

너무 많은 폭포를 가지고 있는 국골은 그 폭포 하나하나 이름을 주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부르는 이들마다 제각각일 것이니...

06:02

그래도 이 정도의 그림을 갖춘 폭포라면 별다른 이유 없이 하나로 통일된 듯 합니다.

그렇죠?

쌍폭.

두 개의 폭포로 이루어졌으니 雙瀑으로 낙점됩니다.

지리산 신선.

고남님.

그 지리산과 살고 싶어 지리산으로 들어오신 분.

서울 생활 정리하고 내려오라굽쇼?

예.

여건만 정리되면야.....

제가 찍어놓은 중황마을.

그리로 내려가겠나이다.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아기자기한 우리의 폭포.

쌍폭에 대응하여 삼중폭포라 이름해야 하나요?

결국 우리의 폭포는 큰 바위 틈을 헤집고 나와 떨어지는 물.....

그 바위에 뾰족한 부분이 있으면 지금은 거기에 부딫쳐 포말을 만들고 퍼지지만 언젠가는 저 부분도 마모되어 부드럽게 흐르게 되겠죠.

절차탁마..... 

자네는 어디서 흘러내려와 여기에 머물고 있는고!

06:22

이분은?

다갈래폭포?

다지多枝幅?

아니면 레게머리폭포?

옆에서 보니 또 다른 모습.

06:28

5분 정도 더 올라가니.....

메인은 3단 폭포....

보조는 오줌발 정도.....

가까이 당겨보니 휘어져 흐르는 것 같은 물살.

06:31

물은 굴을 지나?

굴에서 물이 흐르는  분위기....

칠선이나 한신 같은 웅장함은 없어도 끊이지 않고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는 국골.

지리산 어느 곳이 역사의 비밀 아니 자신만의 이야기 하나 정도 가지지 않은 곳이 있겠냐마는 이 국골같이 신비함만 가지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

고대사의 비밀을 간직한 국골.

어느 한 때 피난의 국가가 세워진 골임은 분명한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답이 없으니 마음에 짐만 얹어주는 골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쁜 걔집아이가 머리를 두 갈래로 땄습니까?

아까 것도 쌍폭Double Fall 이라 했으니 이건 '작은쌍폭'?

그렇다면 그 쌍폭을 큰쌍폭으로 개명을 해야겠군요.

하지만 지명은 함부로 짓는 게 아닙니다.

그 지역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지요.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의 이동은 잦아졌으며 그러다 보니 장소에 대한 특정이 필요해졌다. 그 장소가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곳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이름이 지어졌을 것 같다. 이런 인식은 우리 선조들이 언어를 사용할 때부터 시작됐고 문자를 가지면서 표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어휘 중 그 활용도가 가장 높은 것이 지명이다. 지명은 사람이 활동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지명은 사용되는 어휘 중에서도 가장 보수성이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번 그 이름이 정해지면 어지간해서 바꾸기 힘들다.

 

지명은 보수적이다

이런 지명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 생기고 없어지며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고대사회에서 근대사회를 거쳐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에 이르면서 그 지명이 세분화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리라. 이러다보니 반야봉, 천왕봉으로 대표되는 지리산은 마을에 따라 혹은 그 주변인의 역정歷程과 문화, 전설이나 민속 그리고 자연 환경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지리산이 그 크기만큼이나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이유이다.

 

 - 졸저 전게서 22쪽

이분은?

융단폭격을 하는 느낌.

이분들은 산에 오지 않았으면 무엇을 하고 사셨을까?

인생의 족적이 의심스런 분들.....

07:06

이단의 이중..... 

지도 #2

07:13

레게머리 Ⅱ 폭포.

포즈 한 번 잡아보시고....

색다른 버전.

07:22

이제 잠시 좌측의 등로를 따라 오르고....

부스러지는 깨진 돌과 너덜의 반복입니다.

07:33

지도 #2의 '라'의 곳입니다.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좌측 골을 따라 오르면 영룡봉1478.6m로 오르게 됩니다.

능선 개념이 자리잡을 무렵.

그때 이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오르는 골이 이 국골의 주골主谷의 자리를 점하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가 산경표를 알기 전인 1990년 이전에는 능선 즉 날등 개념이 산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때 지리동부능선의 흐름은 천왕봉 ~ 중봉 ~ 하봉 ~ 두류봉 ~ 국골사거리 ~ 새봉이었습니다.

(지도 #2의 녹색선)

그럴 경우 두류봉에서 가지를 치는 소위 두류능선의 주곡은 이 골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인식은 많이 변했습니다.

조금 이따 더 자세히 보기로 합니다.

우리는 영룡봉 루트를 버리고 우틀하여 진행합니다.

골치기 선수들은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늦습니다. 

07:41

끊이지 않는 폭포의 향연.

07:50

적당한 곳에서 참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막내가 전어회를 준비해 왔습니다.

전어.

9월 정도에 먹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삼천포에서는 지금이 한창이라고 하는군요.

지금 잡히는 것이 뼈도 가늘고 회로 먹기에는 딱이라 하고....

그래서 그런가?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또 올라가야죠. 

08:32

정면으로 초암능선이 보이는군요.

하봉에서 갈라지는 능선이죠.

골을 따라 오릅니다.

08:48

우측으로 갈림골이 나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왼쪽 골짜기의 물과 우측 골짜기의 물이 합쳐지는 합수부입니다.

혹자는 그 방향에 착안하여 국골좌골과 국골 우골로 구분합니다.

전형적인 일제식민지 교육의 잔재입니다.

여기서 이 국골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모두冒頭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국골은 가야 구형왕  혹은 다른 어느 왕조의 패망과 맞물려 지어진 이름이라는 게 통설입니다.

지리동부능선 아니 덕평지맥 상의 하봉에서 초암능선이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가진 골짜기.

그 골짜기가 국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국골이 여기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 물론 아까 영룡봉 골도 보았으나 이는 능선의 개념으로 볼 때인 예전 얘기니 지금 이 논의와는 별개입니다. 

모시대. 노명희님 촬영

 

예전 이 부근의 주민들이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할 때 이곳을 들렀습니다.

풍부한 수량의 물과 높은 날등 즉 능선이 그만큼 볕을 가려주니 음지식물들이 식생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이곳에 이르러 좌측으로 가면 그 날끝 즉 능선에 산막이 있었으니 그에 착안하여 이 가지골을 날끝산막골이라 불렀습니다.

즉 이 골을 따라 끝까지 가면 두류능선 언저리에 산막이 있어 그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반면 우측 즉 초암능선에 붙은 이 골은 워낙 된비알이어서 마치 계곡이 벌떡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니 여기에 착한 하여 '선골'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전부터 부르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좌골이니 우골이니 부르는 것은 이름을 지을 때 동서남북 등 방위를 중시하던 일제 교육의 잔재를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해 집니다.

수리취. 노명희님 촬영

잎이 엉겅퀴와는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리산 덕평지맥의 하봉에서 초암능선이 가지를 칠 때 발원하는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골이 국골이다.

그 국골이 시작되는 능선 언저리에 산막이 있는 바, 능선 즉 날끝에 있는 산막 부근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라 하여 특히 이 물줄기의 골을 날끝산막골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 골은 해발 약1052.9m 지점에서 좌측의 초암능선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의 물과 합수되는데 그 골은 경사가 하도 급한 골이어서'선골'이라 불린다.

이 골은 추성동 초입에서 칠선계곡에 합류할 때까지 국골이라는 이름을 갖는 골이다.

좌측 즉 날끝산막골로 오릅니다.

또 오르고.....

09:07

도대체 몇 단 폭포?

그저 즐길 뿐.....

09:13

그것도 발걸음이 묶인 채 그저 즐길 뿐.....

09:26

이건 또 뭐꼬?

09:31

첨음에는 탄성에 골이 시끄러웠으니 이제는 점차 잦아드는군요.

이끼가 살아 있음을 대변해 주는 느낌.

또 오르고.....

09:37

이것도 자세히 보면 쌍폭.

그냥 양폭이라고 부를까?

09:38

양폭 바로 위에는 아까보다 작은 규모의 이끼폭포가 있으니 '작은이끼폭포'.

이끼폭포이면서 쌍폭.

이름하여 이끼쌍폭포. 

10;05

큰이끼폭포.

10:07

그 상단부.

10:10

이제 골의 물도 잦아들고....

폭포는 이제 끝인가요?

10:15

멀리 산내면을 봅니다.

대전산꾼 늑대 형님.

그리고 나루터 형님.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골이 갈리는데 여기서 우틀하면 석굴로 붙어 초암능선을 진행을 하고,

좌측으로 붙으면 두류능선으로 붙게 됩니다.

우리는 국골 아니 엄밀하게는 날끝산막골 최후의 절경을 보기 위하여 좌측을 택합니다.

석굴石窟로 붙는 골을 버리고.....

좀 숨을 고릅니다.

간식을 먹고 다시 치고 올라갑니다.

오늘 마지막 폭포의 향연에 대미를 장식하기 위하여!

 

10:47

깜짝이야.

앞서 오른 여성대원들의 환호가 터집니다.

매마른 건곡을 계속오르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환호!

그렇다면!!!!

우선 그폭포를 일견합니다. 

이름하여 천상天上폭포.

도저히 있을 만한 곳이 아닌 곳에 이렇게 풍부한 수량의 폭포가 이끼와 함께 숨어 있었습니다. 

대단한 지리산입니다.

아!

지리산이여!

당신은 왜 이리 한시도 그대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십니까?

사람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이 지리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리산에 몸과 마음을 묻어야 하는지....

 

범. 노명희님 촬영.

 

오리들이 꽥깩거리는 거 같다나 어쨌다나....

 

물통에 물을 채우고 20여 분 쉬다가 두류능선을 오르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뗍니다.

11:12

천상폭포 좌측을 따라 오릅니다.

길은 명확하고....

11:24

드디어 날끝.

능선에 붙습니다.

오늘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는 17:25 예약을 해놨는데.....

다시 18:50 버스로 예약을 변경합니다.

그러고는 우틀.

영랑대로 향합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거론하기에 앞서 원효 등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이렇듯 백제의 화엄사상은 신라의 그것보다 근 100년이나 앞섰으니 그 화엄사상을 흠모하여 백제의 화엄사상을 배우러 온 승려 가령 원효나 의상 등 신라의 승려들이 많았고 그들의 행적이 화엄사와 함께 자주 거론됨은 승전국勝戰國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당시 원효(617~686)는 화랑의 장교 출신으로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의 '추성楸城'이나 '성안城內의 말달린 평전'과 관련 있는 인물임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덕천지맥의 지리동부능선에 영랑대소년대하는 지명이 신라 화랑과도 무관치 않으니 지리산은 신라와 백제의 승려들 간에는 교류의 장이어서 원효가 화랑시절 덕천지맥을 이용해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길상봉(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왔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원효와는 여덟 살 연하이기는 하나 결의형제였던 의상(625~702)은 당나라에서 화엄을 배워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한 뒤 자신이 배운 화엄사상을 원효에게 은근히 과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유학파도 아닌 원효가 이미 화엄에 대해서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이유인즉슨 원효가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이에 원효의 강력한 추천强推으로 의상도 화엄사를 방문하게 됐고 그러고는 그 실상도 파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동의 연화장 세계가 바로 이 화엄사라는 것을 확인한 의상은 677(신라 문무왕 17)에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주위를 석각의 화엄경石經을 둘렀다고 봉성지는 기록하고 있다.

 

  - 졸저 전게서 374쪽

 

두류능선에서 덕천지맥으로 갈아탑니다.

영랑대가 가까워 옵니다.

점필재는 이 루트가 아니라 청이당에서 마암을 지나 된비알을 치고 이곳으로 올랐습니다.

그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진행은 직진을 하여 국골사거리로 진행하여 두류능선을 이용해도 되지만 지름길인 하봉 옛길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마암馬巖 우측으로 진행하여야 하는데 점필재가 영랑재에 이르는 길을 묘사한 것과 같은 지독한 된비알이다.

그러고는 두류봉에 오른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웅석봉 오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바로 아래로는 국골이 홈이 파이듯이 긴 골을 만들고 있고 그 옆으로 초암능선이 흐르고 있으니 그 뒤가 칠선계곡이고 그 다음 줄기가 창암능선이며 그 우측으로는 백운산과 법화산이며 등구재, 삼봉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거기에 주릉의 반야봉은 물론 만복대, 정령치 등 서부능선이 일렬로 정렬해 있으니 숨쉬기조차 어려워진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남명의 글을 하나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능선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소의 갈비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소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 졸저 전게서 526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 점필재 김종직 유두류산록

 

11:47

영랑대로 올라섭니다.

지도 #2의 '사'의 곳입니다.

앞줄이 두류능선.

그 우측 뒤가 함양독바위라고도 불리는 독녀암.

그리고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 앞이 와불산臥佛山.

그 뒤로 임천 너머 법화산 줄기.

한창 향학열에 불타고 있는 막내 배완식에게 몇 가지 얘기를 해줍니다.

희게 보이는 견불동見佛洞 마을과 이 와불산과의 관계.....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저 와불산 아래에 견불사見佛寺라는 암자가 있는데 모두 이 와불산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좌측 아래 마천면 창원리.

그 좌측으로 금대산851.5m과 백운산903.8m.

그 뒤로 등구재를 넘어 능선은 삼봉산1186.7m으로 흐릅니다.

임천지맥의 삼봉산1186.7m.

바로 앞.

창암산924.9m.

1,000고지에 가까운 그 큰 봉우리가 이 영랑대에게는 비교 금물.

아!

푸른 하늘!

백운산이니 덕유산이니 여러 산들도 찾고 싶지만 푸른 하늘 속에 다 잠겨버렸습니다.

바로 발끝 아래.

국골.

좌측 초암능선과 우측 두류능선 사이의 저 국골을 그렇게 진한 환희와 감격 속에서 올라왔건만 국골을 그저 이렇게 무덤덤해 합니다.

아!

그나저나 우리 내대로님은 둘레길을 잘 진행하고 계신가?

음...

그렇군요.

둘레길 무료 커피집을 지나고 있는 걸 보니 동강마을로 이미 지난 거 같군요.

창암능선 뒤로 오공능선.

그 뒤로 지리북부능선이 길게 뻗어 있으니 그 뒤가 서부(북)능선.

좌측으로 영신봉 ~ 명선봉 ~ 반야와 노고단....중앙에 만복대 ~ 정령치 ~ 세걸산.... 

조금 전 인용한 남명 조식 선생의 시가 실감납니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소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중앙 제석봉과 그 우측의 영신봉.

구름에 슬쩍 가려진 천왕봉.

중봉.

그리고 하봉과 소년대.

계유일 44,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두컴컴하였다. 머리가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마다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쌓인 눈이 한 자나 되어 한 움큼 집어먹었더니 갈증 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난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이 풀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서 한 움큼 뜯어 가지고 왔다. 내가 말하기를,“그대가 청옥, 자옥이라고 한 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일세.” 라고 하고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손수 한 아름이나 뜯었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少年臺)에 올라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서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열 그루 중에 두세 그루는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아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소년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혹 영랑의 무리를 일컬은 듯도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한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 유몽인 유두류산록(1611년) 

 

좌측 치밭목 대피소와 우측의 써리봉.

12:37

50분이나 머물다 자리를 텁니다.

12:57

국골사거리입니다.

우틀하면 청이당으로 진행하여 덕천지맥을 이어가게 되고 좌틀하면 국골로 떨어집니다.

우리는 그냥 직진하여 두류능선을 진행할 것입니다.

여기서 가방털이를 하고 갑니다.

20분 가까이 놀다 일어납니다.

13:20

그러고는 바로 옆 봉우리로 올라 진행방향을 관찰하고....

 

지도 #2의 '자'의 곳으로 소위 마봉馬峰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 봉우리가 말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가요?

마산(馬山)의 유래

 

마산봉을 정면으로 보며 내려간다. 삼거리를 지나 우측으로 샘물 표시가 되어 있다. 마시기에 별로 적합해 보이지 않는 물이다. 안전시설이 되어 있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마산 삼거리를 지나 2004년 이설된 2등급삼각점(간성24)이 있고 정상석 두 기가 서 있는 마산1052.0m이다.

 

마산은 ᄆᆞᆯ산에서 왔다. ()은 중세 국어에서는 ᄆᆞᆯ이었다. 그런데 고대국어 체계에서는 뒤에 모음이 있는 경우 두 음절로 말하는 개음절어체계여서 고려시대 이전에는 의 경우 ᄆᆞᄅᆞ로 발음 되었을 거라고 한다. 따라서 이 ᄆᆞᄅᆞ는 말() 말고도 마루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지금의 산마루와 같이 꼭대기혹은 높은 곳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의미의 잔재가 馬峴, 馬山, 馬嶺 등이다. 그러니 보통 지명의 유래나 전설 등이 얘기하는 것과 같이 말의 형태를 닮았다.’는 등의 동물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이 마산도 생김새와는 관계없는 단지 높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산에 불과하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564쪽

좌측으로도 조망도 좀 하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으니....

천석고황이나 연하고질이 아니고 지리고질智異痼疾 같습니다.

앞 초암능선과 그 뒤의 창암능선.

좌측 영랑대.

13:22

말봉을 떠나 능선을 진행하는데 우측으로 조망이 터집니다.

그렇죠?

늘 풍부한 수량의 청이당 계곡.

덕천지이나 지리동부능선을 하는 꿑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

그 뒤의 허옇게 벗은 곳이 산청독바위.

그 뒷봉우리가 새봉1322.3m.

그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들 중 좌측이 왕산925.6m, 우측이 필봉산858.2m.

새봉 좌측이 향로봉과 와불산으로 이어지죠?

중앙 멀리 웅석봉이 보이니 그 우측이 이른바 '달뜨기능선'.

13:37

영룡봉1478.6m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로프를 한 번 잡고 올라야죠.

이 봉우리 우측으로 난 희미한 길을 따라내려 가면 향운대로 갈는 길이기도 합니다.

13:41

영룡봉은 별 조망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도 상에 이름이 있으면서도 소홀하게 대접을 받습니다.

지도 #3

바위를 크게 우로 돌아,

13:55

지도 #3의 '차'의 곳에서 영룡봉과 말봉을 봅니다.

진행방향.

좌측의 최마이굴은 시간 상 들르지 않기로 했고..... 

산과 여인.....

14:18

독녀암과 향로봉 그리고 와불산.

그 뒤로 왕산.

국골.

공부를 한 우리는 국골 중에서도 선골.

14:40

지도 #3의 '카'의 곳입니다.

여기서 좌틀하면 '최마이굴'과 전망대로 가게 되는 삼거리입니다.

갑자기 전화가 작동이 이상해집니다.

껐더 켜고....

14:49

1072.8봉.

아직도 1000고지를 안 내려왔으니....

길이 워낙 좋습니다.

편안하게 진행을 합니다.

15:12

이런 산림청 말뚝만 몇 개 보일뿐....

15:16

817.5봉을 지나고....

15:28

민간인 영역 표시인 철책도 지나고,

15:31

이제 비탐방구간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추성동 주차장과는 상당한 거리.

좌틀하여 숲으로 다시 듭니다.

창암산.

지리에 있을 때에는 그렇게 시원했는데 다시 숨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15:53

상가지역으로 내려와 캔맥주 하나를 털어 넣으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막내 집이 사천인 고로 먼저 보내주어야 하기도 하고....

15:57

네.

여기까지 입니다.

늘 수고가 많은 국립공원관리공단.

고생하십시오.

계곡으로 들어가 물놀이를 하는 척 땀을 씻고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인월로 나갑니다.

단골집에서 삼겹살로 뒤풀이를 갖고 나오는데 해밀의 운봉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따라오셔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그런데 터미널에서는 대전산꾼 '늑대'님을 알현하고.....

사랑하는  후배를 다독거리시는 늑대님의 표정이 어미 늑대 같습니다.

늑대님은 도솔산인님의 안부까지 전해 주시고....

조만간 늑대님과 지리산 어느 한 곳을 헤집는 현오를 만나게 될 듯 싶습니다.

정시에 남부터미널에 내려 전철로 귀가를 합니다.

휴가도 끝물이어서 그런가?

사람도 별로 없군요.

정확하게 자정에 집에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