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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지리동부능선(중산리 ~ 천왕봉 ~ 중봉 ~ 하봉 ~ 두류봉 ~ 청이당 터 ~ 새봉 ~ 왕등재 ~ 도토리봉~밤머리재)약 25km

 

 

지난 주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장맛비가 한 차례 지나갔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말이었으니 산꾼들은 아마도 '하필이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법도 합니다.

사실 봄가물이 들었으니 그런 푸념은 사치에 가까운 말이겠죠.

그래서 지난 주 들렀던 충주시 살미면의 악어봉.

살아 있는 악어의 생동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처음에 우리나라가 아닌 아마존에 있는 큰 호수로 착각을 했었습니다.

미처 이런 곳을 몰랐다니....

등로 초입에서 약 30분 정도 올라가서 만나는 이 장면은 실로 환상이었습니다.

다만 시간 문제로 예정했던 그 줄기를 전부 걷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더군요.

 

그 다음 주인 이번 주.

후배들로부터 청을 받아 날을 잡은 계획이니 벌써 한 달 전부터 예정되었던 산행입니다.

지리산.

중에서도 동부능선.

남쪽 백두대간의 끝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동쪽으로 가는 능선입니다.

요즘은 덕천(웅석)지맥 혹은 태극종주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루트죠.

그러니 예전에는 독자적으로 동부능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산줄기의 한 부분으로 불리우니 조금은 자존심 상한 모양새입니다.

이제 지리능선종주 코스 중 마지막인 지리동부능선이다. 지리서부능선이나 남북부능선은 단조로운데 비해 지리동부 쪽의 능선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그런지 능선의 이음을 웅석봉에서 동쪽으로 진행시켜 바로 마무리 지어버렸다. 지리동부능선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충실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니 지곡사로 가자거나 아니면 조금 더 늘려 석대산으로 가자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산경표가 알려진 이후에는 웅석지맥 혹은 덕천지맥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긴 산행을 즐기는 게 요즘의 추세이지만 고전적인 코스로 정통파 산꾼들로부터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천왕봉~웅석봉까지는 지맥과 능선 코스가 겹치므로 이 능선만을 고집해 찾는 숫자는 다른 능선 코스에 비해 줄어든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 지리동부능선을 걷기로 합니다.

원래 지리동부능선은 천왕봉 ~ 중봉 ~ 하봉 ~ 밤머리재 ~ 웅석봉 ~ 성심원까지 걷는 구간입니다.

마음잡고 걸으면 17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들머리가 있죠?

그러니 천왕봉으로 오르는 최단 구간인 중산리를 이용한다면 3시간 정도를 더 보태야 할 것이니....

하는 수없이 시간과 거리상 오늘은 밤머리재까지만 진행하기로 합니다.

차편은 남부터미널에서 금·토요일 23:30에 출발하는 중산리행 버스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수도권 사람들에겐 참 편리한 교통수단.

한숨 자고나면 딱 중산리이니......

2019. 7. 5. 23:00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니 멤버들은 다 와 있군요.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차에 오릅니다.

버스는 만차로 출발합니다. 

지도 #1

02:50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버스는 심야시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여 예정 도착시간보다 30분 일찍 중산리 터미널로 들어섭니다.

부스 안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간단하게 김밥도 먹습니다.

그러고는 산행준비를 마치고 차도를 따라 오릅니다.

공원관리사무소까지는 이렇게 지루한 길을 조금 감내해야 합니다.

03:05

그럼 슬슬 올라가죠.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stary night.

오늘 날씨 무지 더울 것이라는 예감입니다.

예보도 그렇게 되어 있고....

오르고 있는 도로 우측으로 흐르는 물이 시천천.

화살 시矢를 썼으니 화살만큼 빠른 물살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좌측 산줄기는 지리 주릉 일출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고 그 능선은 곡점능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능선은 신천초등학교 앞까지 흘러 백두대간의 영신봉, 촛대봉, 일출봉에서 발원하는 내대천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림에서 시작하여 세석으로 오르는 코스로 많이 이용을 하는 곳입니다.

우측 능선은 황금능선일 것이니 그 너머의 내원천은 삼장천과 만나 중봉에서 흘러내려오는 덕천강과 만나게 될 것이고....

황금능선.

이름만 되뇌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능선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리의 일부분만 봐도 이렇게 크군요.

정말이지 지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산입니다. 

03:29

중산리 윗 마을로 올라섭니다.

용궁식당이니 뭐니 하는 식당가이고 안내 관광버스 주차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여기서 지리산의 성인 남명 조식 선생님을 알현합니다.

지리산 하면 남명 선생님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두류산가頭流山歌이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둘레꾼 혹은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될 것이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좁게는 시천천과 덕천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중심에 놓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參考書的 풀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00쪽

 

兩堂水兩端水? 남명의 이 시가 남명문집에 실려 있지 않아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전口傳되어 온 시조들이 그대로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편찬한 문집 즉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 1728)과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1755)에만 실려 있어 남명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양단수에도 설이 갈린다. 兩端水라고 하는 설은 중산리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과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각기 덕산에서 만난다.”하여 이르는 말이다. 즉 시천천과 덕천강이 이 덕산에서 만난다는 이른바 합수점설이다. 兩堂水라고 하는 설은 시조집에서 양당수를 양단수로 오기誤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현재 덕천서원앞 산천재 근처에 있는 양당兩塘마을 앞을 흘러가는 여울물을 말하는 고유명사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각건대 양당수兩塘水라고 한다면 양당마을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석당과 성모사의 양당兩堂을 떠올리는 게 맞다. 그런데 이 두 당집을 혹세무민하는 무당들의 소굴이라 여기던 남명이 이를 기릴 리는 절대 없다. 또한 남명을 그리워하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이곳에 들러 많은 시를 지었음에도 양당수라는 시어가 들어간 흔적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양당마을) “앞의 시내는 아마도 무릉도원으로 통하리라前溪疑是武陵通(이상규, 1846~1922)”이라 하여 덕천 혹은 시냇물 정도로 인식하고 불렀다. 兩端水에 한 표를 던진다.

 

- 졸저 전게서   200쪽  각주 24)

 

오늘은 해밀의 타이슨, 이한검 두 대장님과 함께 합니다.

두 분의 명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지난 번 지리산 주릉 종주에 동행한 두 동생도 참여 했습니다.

요즘 갑자기 물이 오른 '푸우' 동생은 그야말로 산줄기에 심취해 있어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고 '내대로' 동생은 그 나름대로 지리산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제 신간인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을 읽고 현장 답사를 하면서 저자 직강을 듣고 싶다나 뭐라나.....

그러죠..... 뭐.....

한번 시작해 봅시다.

그 시작은 우선 관리사무소 지나 법계교이죠. 

03:33

법계교法界橋를 건넙니다.

 

이 중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으로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루트이다. 관리동에서 법계교를 건너면 속세에서 법의 세계 즉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굳이 부처님 세계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세는 떠난다는 얘기다. 그러면 영원히 지리산의 신선이고자 했던 우천 허만수 선생의 추모비에 묵념을 한 번 올리고 갈 일이다. 우리가 산 그것도 지리산에 드니 그렇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 졸저 전게서 206쪽

 

그런데 있어야 할 자리에 우천 허만수 선생님이 보이질 않는군요.

바로 이렇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긴 얼마 전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좋은 자리에 있던 것을 굳이 왜 옮겼는지 모르겠군요.

일단 좌틀하여 통천길로 들어서고.... 

03:59

그러고는 칼바위를 지납니다.

현수교를 건너면,

바로 장터목과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갈립니다.

천왕봉까지 4.1km라....

그길을 택합니다.

시작은 돌계단부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오르막입니다.

무릎이 고통을 느낄만한 길입니다.

오늘은 유달리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르고 있군요.

04:38

망바위를 지나고,

05:05

문창대 갈림길을 지납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문창文昌은 고운 최치원의 시호이죠.

한편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문창대이다. 고운 최치원이 법계사에 머물 때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명상에 잠겼던 고대高臺로 장터목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하며 기도발이 받는다는 지리 10대 중 하나이다. 문창이란 고려 헌종이 고운 최치원을 문창후라 시호한데서 유래하며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고는 신라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松岳 즉 개성을 얘기함)은 푸른 소나무다.’라고 하여 왕씨의 고려 창업을 예언했다는 데서 이런 예우를 받은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08쪽

 

만복대의 의 의미는?

는 보통 외형 상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을 얘기한다. 그런데 바위는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효험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가 많다는 것이다. 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것은 비단 스님들의 수행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산신으로부터 영험함을 전수받는 데에도 상당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는 누천년 간 사제지간에 전승 혹은 같은 직업군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험담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히 신비스러운 바위 주변에 '토굴'들이 많다 보니 큰 바위를 일컫는 '''토굴'의 이름에 붙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에는 지리10가령 문수대, 우번대, 서산대, 문창대 등 이런 10곳 이상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이와 같은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암벽과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유명 수도처에 옛날부터 ''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짓는 형태로 변했는데 어쨌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라 칭한다 한다. 그러니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도처로서의 ''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83쪽

거기서 천왕봉을 올려다 봅니다.

"음...우리의 천왕봉!"

일부러 옆에서 김밥을 먹고 있는 분들 들으라고 한 마디 합니다.

"저게 천왕봉입니까?"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래서 천왕봉은 본 적도 없는 분들 같았습니다.

오로지 정상에 올라 정상석을 보고서야 자신이 천왕봉에 온 것을 깨닫게 되니....

"예. 저게 천왕봉입니다. 저기 정상석도 보이지 않습니까?"

한참이나 썰레발을 풀다가 자리를 뜹니다.

입에 음식물을 넣고 얘기하는 분들과 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 옆은 바로 로터리 대피소입니다.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의 13대손 조재영 선생이 처음 건립한 곳이죠.

우리는 천왕봉 방향으로....

식수장에서 물도 보충하고....

05:18

타이슨 대장님과 이한검 대장님.

법계사 일주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셨습니다.

이 중산리의 직등코스로 오르다보면 우선 만나는 곳이 법계사이다. 연곡사, 화엄사, 대원사 등과 함께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집이다. 법계사가 1380년 고려 우왕 때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왜구 잔당에 의해 불태워졌을 때 일시 무속인들이 들어와 법계당이라는 이름으로 가건물을 운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제석당과 같은 당집의 형태였다.

 

- 졸저 전게서 207쪽

 

법계사는 병란과 화재로 수난을 많이 당한 절이었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을 보면 7권에 토벌군을 피해 이동하던 춥고 배고픈 남부군이 법계사에 들른 장면이 나온다. “도중에 천왕봉 중턱에 있는 법계사 마당을 지났다. 가람은 불 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천왕봉을 등지고 남해를 굽어보는 기막힌 조망이다. 어느 대원의 말이다. “이 절은 부유한 절이었다. 가을이면 시량柴糧이 그득하게 광에 쌓였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모든 길이 막힌다. 이듬해 해동될 때까지 외계와의 왕래가 일체 단절된다. 중들은 뜨뜻한 절방에 앉아 떡이요, 엿이요, 단술 등을 해먹으며 겨울을 보냈다. 얼마나 팔자 좋은 중들이었던가.”

 

- 졸저 전게서 207쪽 각주7)

 

그 법계사를 빠져나와 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좌측으로 너른 공터가 보입니다.

 

05:25

거기서 남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 하나.

세존봉입니다.

거기에 우측으로 귀 모양을 한 바위 하나!

아까 얘기한 문창대입니다.

곧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文昌臺라는 얘기죠

목책을 넘어서 너른 바위 위로 갑니다.

우측의 커다란 바위!

여러 개의 각자들이 눈에 띕니다.

이 바위가 문창대와 관련하여 중요한 얘깃거리가 회자됩니다.

 

문창대 논란

그런데 이 문창대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1373.9봉이 아닌 망바위 바로 위로 표기되어 관심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19781026일 로타리 산장(지금의 로타리 대피소) 기공식에 앞서 이 산장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남명의 13대손 조재영은 진주산악회와 함께 기존 문창대에 대해 다른 곳을 문창대(기존 문창대에 대하여 신문창대라 함)라고 제시한다. 진양지 2의 내용 즉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해석해 보면 (법계사)절 서쪽 수십 보 거리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이다.’를 첫째 근거로 든다. 이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방향으로 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나오는 좌측의 너럭바위를 얘기한다. 그러고는 두 번째의 근거로 그 바위 아래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문창대를 처음 알린 이는 바로 진양지를 발간한 부사 성여신이다. 그의 칠언고시 형태로 쓴 유두류산시를 보면,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고 문창대를 그렸다.

 

유석이 축융봉 아래에는 옛부터 상봉사(上封寺)가 있었으니, 천왕봉 앞에 어찌 벽계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일찍이 서로 왕래하던 승려 선응(禪應)과 함께 도모하여 세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붕을 나무기와로 얹고, 판자로 벽을 막아 창을 내놓으니, 방이 한 몸 누이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만 가진 것 없는 승려들이라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오는 사람이 반드시 식량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만 하였다. 

 

암자의 맞은편에는 이른바 문창대(文昌臺)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석굴 속으로 기어서 몇십 길을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진 4신 문창대에서 본 원 문창대.

 

이렇듯 문창대는 법계사 동쪽에 있는 봉우리 즉 세존봉에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였으니 법계사에서 바라본 문창대의 모습과 같다. 반면 신문창대는 사실 위와 같이 성여신의 표현대로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의 외형을 갖추지 못한 점 가령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도 아니며. 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 주변에는 日出峰. 혹은 陸象山 등 조잡한 각자들이 많이 새겨 있어 이 각자 역시 이들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 각자의 제작 연대 또한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문창대는 그저 각자가 되어 있는 바위 정도로만 인식되어도 무난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인들의 산행기에 원 문창대가 지금의 장소와 너무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구 문창대원 문창대로 보게 하는 이유이다.

 

- 졸저 전게서 208쪽

 

이제부터는 무료함에서 벗어납니다.

물론 날이 밝아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고도를 높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냥 땅만 보고 올라가시렵니까?

아니면 그저 두리번 거리고만 지나치시렵니까?

"도통 뭐가 뭔지 모르니까......"

즐거움을 배가 시켜야죠.  

지도 #2

흰바위 뒤로 솟은 봉우리.

일출봉입니다.

그러니 그 좌측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일출봉 능선이겠고....

그리고 그 뒤 좌측의 봉우리 하나가 문제이긴 합니다.

요즘 어떤 개념도를 보면 그 봉우리를 '삼신봉'이라고 표기한 게 눈에 띕니다.

낙남정맥의 삼신봉이 아님은 당연하고.....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깊이 들어가 보기로 하죠.

그 좌측이 사자봉, 촉봉이라고도 불리는 촛대봉.

그 좌측이 시루봉.

촛대남릉에 속한 봉우리입니다.

그러니 그 앞줄 일출봉능선의 솟은 봉우리는 1413.2봉입니다.

그 뒷줄.

그렇죠?

중앙 우측의 삼신봉1288.7m을 중심으로 좌측은 낙남정맥.

그 우측은 지리남부능선입니다.

좌측의 밋밋한 봉우리를 외삼신봉1286.7m이라고 하고 우측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내삼신봉1355.1m이라고 하죠.

외삼신봉 좌측으로 예전 선인들이 하동에서 덕산이나 천왕봉을 오를 때 이용하던 루트입니다.

중앙.

중산리를중심으로 고산준령들이 펼쳐집니다.

아까 보았던 세존봉과 문창대.

그 세존봉능선이 이리로 달려옵니다.

06:03

좀 더 고도를 높이니 삼신봉의 낙남정맥과 남부능선이 더 명확해지고....

그 뒤로 호남정맥과 수어지맥도 제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그렇죠?

그림으로는 좀 그렇지만 ...

호남정맥의 저 한재도 역사적으로는 짚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존경하는 산꾼 유목민 김중호님은 저 한재를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하더군요.

"전남 빨치산의 연병장이었고 집회장소였으며 학교였고 출전기지였다."라고...

단호한 어조입니다.

그만큼 이 지리산 뿐만 아니라 백운산도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곳이라는 얘기입니다.

06:18

그럴즈음 커다란 바위가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예전에는 분명 개천문이라고 적혀 있었죠.

서문이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이니 이 동문은 하늘을 여는 개천문開天門이었습니다.

 

향적사도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김종직이나 김일손의 기록에 의하면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되어있다. 석문石門으로 불리던 통천문을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가파른 골이 하나 보인다. 통신골이다. 천왕봉의 신에게 오르는 길이니 통신골通神谷이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승려들의 경우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유학자들의 경우는 배움과 유식遊息 그리고 공자부터 남명에 이르기까지의 선인들을 닮기 위하여 그리고 토속 신앙의 무속인들의 경우는 천왕봉의 영험한 기를 얻기 위한 여정이었을 것이니 通神谷이 맞을 것이다. 최근 공단에서는 이름이 분분한 통신골을 천주골로 통일하자는 의견을 피력한다. 천왕봉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니 천주골天柱谷로 하자는 얘기다.

 

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문은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서쪽에 있으니 서문이라고도 불리는 통천문通天門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에 있으니 동문이라고도 불리는 개천문開天門이다.

 

- 졸저 전게서 409쪽

 

공단에서 설치한 이정목에는 개선문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이런 취지로 개천문이 맞다.

 

- 졸저 전게서 410쪽 각주 50)

 

지난 번 어떤 분이 제 산행기에 댓글을 달면서 '개선문'이 맞다고 조언을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제대로 알고 쓰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여러 개를 지적해 주셨는데 사실 어디서 들은 얘기들에 불과했습니다.

그중 이 개선문에 관해서 쓴 글을 옮겨봅니다.

4.개천문은 개선문으로 통천문은 전에는 허우천님이 만든 나무다리가 있었습니다.

 

먼저 지리산은 우리나라 지모신앙의 근원지이고 그러다 보니 토속신앙 그리고 불교로 와서는 화엄사상과 선종의 본거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삼국시대 이전에는 그 중심이 반야봉과 노고단에 있었을 것이며 국제신사國祭神祠로서의 그것은 남악사일 것이며 그것이 고려로 와서는 천왕봉으로 옮겨져 사설신사私設神祠로서의 그것이 바로 성모사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리산은 곧 하느님과 통하는 곳이니 우리 민족의 하느님이신 국사 천왕 곧 단군을 기리는 봉우리라는 이름의 천왕봉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입니다. 그 하늘로 통하는 문이니 통천문通天門이요 하늘을 여는 문이니 개천문開天門입니다.

 

4. 천왕봉은 신神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개천문은 예전부터 개천문이라는 이정목이 있었는데 짓궂은 혹은 개선문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천의 'ㅊ'의 ㅗ' 부분을 지워서 개선문으로 회자되게 된것으로 보입니다. 어원을 살펴봐도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뚜껑 없는 이 문이 왜 개선문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문인 통천문에 대응을 하기 위해서라도 동쪽에 있는 이 문은 개천문이 되는 게 맞을 것입니다. 또 이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상당합니다.

지리산은 이렇듯 신을 빼고는 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영산靈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06:34

천왕샘으로 오르기 전.

좌측으로 제석봉과 연히봉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그 가운데로 보이는 반야봉 그리고 노고단.

그 좌측으로 보여야 할 광주의 무등산은 아직 보이지 않는군요.

우측의 미어캣 같은 바위도 볼만하고....

그 위치에서 본 동쪽.

써리봉 능선과 그 우측의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그리고 그 뒷 줄 좌측의 황매산.

웅석산 우측 멀리 보이는 한우산과 자굴산 즉 남강지맥 라인도 볼만하고요.

웅석산 우측으로 늘어진 능선.

지리태극능선이죠.

우측 끝으로 떨어지는 수양산과 시방산의 끝은 덕천강이겠고.....

그 덕천강이 흐르는 덕산은 구름에 덮혀 있군요.

남명의 고장 덕산.

덕산 사람은 이데올로기 투쟁의 희생자

이런 곳이 덕산이니 아무래도 덕산 주민들에게 지리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심은 대단할 것이다. 면면이 지리산 정신이 흐른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찍 두류산악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지리산을 바라보며 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매년 이어지는 천왕제가 그걸 반증한다. 반면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빨치산이 지리산으로 쫓기듯이 몰려들어왔을 때 지리산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덕산도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들도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지리산이 베풀어주는 것에 비하면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애써 자위한다. 그래서 지리산을 떠나지 못한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 졸저 전게서 210쪽

 

가운데 높게 솟은 봉우리가 구곡산961m.

황금능선의 끝 지점이죠.

그 앞으로는 아까 보았던 세존봉능선이 이리로 달려오고....

그 구곡산 우측 뒤 뾰족한 것이 오대주산.

그러니 그 너머에 수정사가 있겠죠.

지금은 없어진 수정사.

많은 것을 얘기해 주는 곳입니다.

구곡산 뒤 구름에 떠 있는 봉우리가 박성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신백두대간, 제가 부르기로는 섬진동지맥의 끝 금오산875m.

역시 천왕봉이 가까워 오니 안 보이는 게 없이 다 보이는군요.

한 바퀴 돌아 다시 낙남정맥의 삼신산과 그 우측의 촛대봉 등....

사진으로 작게 보는데도 이 정도이니 직접 현장에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06:46

그러고는 천왕샘입니다.

이 역시 아까 얘기한 조재영 선생이 개척한 샘입니다.

'천왕샘'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고 '덕산두류산악회'에서 1977. 7. 31. 시공하였다는 글귀가 명백합니다.

예전에 설치되어 있던 '남강의 발원지'라는 팻말은 저 때문에 사라졌고......

나무와 철계단을 번갈아 올라 천왕봉으로 오릅니다.

이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필수!

잠시 쉼과 조망을 하는 양수겸장兼將입니다.

공단의 보존 조치로 풀들도 많이 자랐군요.

07:00

오늘 함께 지리를 즐긴 두 동생들.

그나저나 세상에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 4시간이나 걸리다니...

너무 즐기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여기서 함양군 마천면을 만납니다.

일단 떼거지로....

오랜만에 독사진도 남겨봅니다.

왔으니 우선 주위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그러고는 천왕봉으로 오른다. 천주라는 각자와 천왕봉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어서 지리10경 중 하나인 천왕일출을 보기 가장 좋다는 일월대日月臺각자가 눈길을 끈다.

 

<사진 12> 일월대. 천왕봉에서 일출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곳.

 

지금 천주天柱라는 각자가 되어 있는 바위 아래가 성모사라는 사당이 있던 자리이다. 성모사에 대해서는 노고단에서 이미 간단하게나마 살펴봤다. 당시 유학자들은 이 성모묘 혹은 성모사를 음사淫祠라 하여 질시疾視하였다. 영남학파의 종조이자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인 점필재의 사고가 그랬으니 다른 유학자들은 좀 다른 생각을 가졌을까?

 

1489. 4. 22. 김일손은 정여창과 같이 천왕봉에 올라서 이 성모사를 보고는 저희들은 도를 지키고 악을 미워합니다. 음사를 지나가게 되면 반드시 모멸하고 헐어버렸습니다. -중략- 신을 마야부인이라고 하는 말은 거짓입니다. 점필재 김공은 널리 통달한 큰 유학자인데 신을 위숙황후라고 했으니 진실입니다."고 제문을 지어 노모의 장수를 위해 기도를 했다.”고 기록했다.

 

- 졸저 전게서 451쪽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의 출입을 볼 수 있어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 대의 전후좌우에 이름을 새긴 것이 무려 수백 수천이지만 오래된 것은 깎이고 갈라져 판별하기 힘들다. 그 바라는 바는 모두 이름을 남겨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그 이름자가 뚜렷한 것을 손꼽아 헤아려보면 가장 오래된 것도 2백년 내외에 불과하니 처음 2백 년 전에 석면에 새길 때에는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앞의 것이 닳아 없어지고 뒷사람이 그 자리에 다시 새긴 것일까? - 강계형 두류산록(1924)

 

- 졸저 전게서 461쪽 각주53)

 

백두대간의 끝 지리산 천왕봉입니다.

멀리 호남정맥의 백운산 등과 수어지맥의 억불봉.

그리고 그 앞이 삼신산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낙남정맥, 우로는 지리남부능선.

일출봉능선과 곡점능선은 아까 일부 본 구간.

그리고 그 뒤로 촛대남릉의 시루봉.

앞 제석봉부터 연하봉 ~ 촛대봉 ~ 영신봉 ~ 칠선봉 ~ 토끼봉 ~ 반야봉 ~ 노고단 라인이 뚜렷합니다.

곧 백두대간 라인이라는 것이죠.

반야봉 우측으로 만복대와 정령치 그리고 고리봉도 뚜렷하고....

그 우측으로바래봉과 덕두산도 확실하죠?

그 앞 라인이 지리북부능선.

그 파인 부분이 영원령이고 그 우측이 삼정산1156.2.m.

그 앞이 연하북능이니 이 앞이 창암능선.

아!

칠선계곡.

통천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칠선계곡과 연결되는 문이 나온다. 칠선계곡 루트는 길기도 하지만 험악하기도 하여 등로로 개척된 때는 1964. 11. 28. 부산의 김경렬, 성산 등으로 이루어진 지리산 동부 개척단에 의해서였다. 당시 칠선계곡에서 곰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하니 험준한 곳인 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이 칠선계곡의 초입은 추성동이다. 추성동은 지리의 지붕 같은 곳이라 했다. 그런 만큼 계곡도 깊고 많아 그 수만큼 능선을 거느리고 있으니 얼마나 복잡한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잠깐 이 부근을 정리해 볼까? 추성동으로 들어가면 물줄기는 크게 칠선계곡과 국골 그리고 허공달골 등 세 개로 나누어지고 이들을 크게 에워싸고 있는 능선은 창암능선과 벽송()능선 등이다. 그리고 국골과 칠선계곡 사이에 초암능선이 있으며 국골과 허공달골 사이에는 두류능선 등 두 개의 능선이 있으니 추성동과 관련된 등로는 모두 7개로 정리가 된다.

 

 - 졸저 전게서 460쪽

그 창암능선의 끝 창암산924.9m이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가는 이내 임천으로 잠깁니다.

그 앞이 임천강을 마주보고 있는 벽송사의 선방禪房 금대암이 있는 금대봉.

그 금대봉은 뒤로 백운산903.8m을 거쳐 등구재를 지나 바로 임천지맥의 주봉 삼봉산1186.7m으로 올라섭니다.

이 임천지맥은 투구봉에서 뒤로 떨어져 팔랑재를 넘어 오봉산으로 흐르게 되죠?

그러니 그 좌측이 인월이고....

이 그림이 중요합니다.

좌측이 창암능선이니 그 우측이 칠선계곡.

아까보다 확실하게 삼봉산이 보이고 그 뒷라인도 보이는데.....

우측의 중봉능선.

그리고 그 우측의 초암능선이 눈길을 끕니다.

영랑대에서 흘러내리는 저 능선을 보고 싶다고 해서 오늘 이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이라....

그 우측의 두류능선.

이따 보기로 하고...

일단은 ...

어디....

우선 중봉과 그 너머로 하봉의 소년대와 영랑대가 보입니다.

앞의 임천지맥 삼봉산 뒤로 높고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

그렇죠.

백두대간의 백운산1278.9m.

그러니 그 우측의 작은 게 서래산1172.9m이겠고 그 우측이 대봉산1251.7m이로군요

한편 백운산 좌측이 무룡고개 넘어 내일 푸우님이 진행할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1257.4m입니다.

그러면 꼭 지적하여야 할 게 있죠?

바로 대봉산 뒤의 덕유의 서봉1492m과 그 우측의 남덕유산1507.4m입니다.

서봉과 남덕유의 모습을 현지 주민들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이라 하여 봉황산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 남덕유에 해밀의 백두대간팀이 있습니다.

분명 이쪽을 조망하고 있을 홀가분대장님께 전화를 넣습니다.

뭐 또 이 얘기 저 얘기 하느라 전화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내 접습니다.

그러고는 중봉1874.6m 쪽을 봅니다.

중봉 뒤에는 하봉이....

그 뒤 두류능선 뒤로 법화산992.9m이 보이고....

중봉 우측  뒤로 보이는 능선이 이따 진행할 동부능선의 산청독바위와 새봉1322.3m.

그리고 그 뒤가 왕등재 습지에서 가지를 쳐 나간 왕산925.6m과 필봉산858.2m.

그 뒤는 희미하긴 하지만 황강지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필봉산 뒤로 남강지맥의 황매산1113m이 우뚝하고.....

산청 시가지는 운무에 덮혔습니다.

멀리 중앙에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아! 

천왕봉에서의 조망은 거칠 게 없다. 노고운해가 제일이라지만 천왕봉에서의 운해를 따라올 수는 없다. 다만 천왕봉 일출 때문에 천왕봉 운해가 밀린 셈이다. 마을과 길이 모두 구름에 잠기고 봉우리들이 들쑥날쑥 운해를 비집고 올라온 것은 보기만 해도 즐겁고 탄성이 나온다.

노산 이은상 같은 이는 이 비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두 다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 졸저 전게서 471쪽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황금능선.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자리를 뜰 수 있겠습니까?

고남님은 남원 이백에 자리를 잡았고.

누구는 산청으로....

이한검 대장님은 쌍계사 앞으로 간다고 하니....

저는 말로만 터잡은 함양의 중황마을.

어쨌든 동서남북으로 모두 터를 잡은 셈이군요.

중봉. 하봉을 보며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서 떠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일?

아니.

한 오 일 정도는 버틸 수 있으려나?

07:27

천왕봉에서 27분을 즐겼지만 아직도 찝찝하기만 합니다.

대원사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곧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군계를 걷는다는 얘기입니다.

예전 철계단은 나무 데크로 바뀌고....

칠선계곡.

마야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천왕봉을 지키던 성모사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 석상을 모셨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붙인 이름이다.

- 졸저 전게서 529쪽 각주

된비알을 치고 올라가 치밭목대피소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바로 왼쪽 아래가 써리봉이라는 얘기다. 중봉에 오른다. 여기서 보는 천왕봉은 정말 아름답다. 좌측으로 암봉을 가지고 있어 암벽이 적당히 깎아지른 듯하고 서쪽으로는 부드러운 선이 제석봉을 향하고 있어 자못 너그러운 성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으로는 마야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중봉골의 깊은 골 옆으로 갈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는 황금능선을, 그 뒤로 삼장천이 치밭목능선을, 덕천강이 흐르는 대원사 계곡이 달뜨기능선을 각 구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들의 끝은 남명의 고장 덕산으로 모인다.

 

- 졸저 전게서 529쪽

07:49

우측으로 써리봉 능선이 눈에 들어오니 이제 중봉에 다 올랐습니다.

좌측 중간에 치밭목 대피소가 보이고 그 좌측이 비둘기봉1481.8m.

써리봉1586.7m 바로 뒤로 보이는 작은 줄기가 대원사(치밭목)능선.

그 좌측 뒤가 조금 이따 진행할 동부능선.

그리고 그 뒤가 기산616.1m에서 웅석봉으로 오르는 웅석봉 북릉.

그 좌측 뒷의 줄기가 양천(정수)지맥이고 뾰족봉이 정수산829.8m.

그 웅석봉 우측으로 달뜨기 능선을 따라 수양산으로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음....

황금능선과 우측의 마야계곡.

천왕봉.

그리고 동부능선이자 덕천지맥이자 지리태극능선.

이 정도면 한 장 건진 것 같습니다.

중앙 멀리 황매산.

중앙 우측 아래로 치밭목 대피소와 비둘기봉.

좌측의 새봉과 왕산 그리고 필봉산.

바로 앞 조개골.

08:09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일어납니다.

목책을 넘어 하봉으로 향합니다.

삼장면 유평리로 들어섭니다.

이제부터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삼장면의 군계를 따릅니다.

길은 아주 불량합니다.

하봉 ~ 중봉 구간은 잡목으로 인하여 진행이 아주 더딥니다.

잡목에 시달리고....

뭐 이 정도이니.....

08:35

무조건 막 걷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앞에 가던 일행들을 불러 세웁니다.

"볼 건 보고 가야죠!"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를 매어두었는데, 방게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물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하봉 헬기장 좌측으로 내려가 하봉 샘터를 지나 조개골이나 치밭목대피소로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창녕의 화왕산 정상 56,000평 분지모양의 정상부는 그 자체가 배 모양인데 이는 화산 폭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라 한다. 그리고 그곳의 배바위는 화산 폭발 이전부터 강물에 깎인 흔적이라고 한다. 반면 지리산은 위 화왕산과 같은 화산대에 있었으면서도 분화구 흔적은 물론 빙하기에 파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지질학자가 아니면 백악기시대 화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얘기이다.

 

<사진 33> 배바위. 이 바위에 배()를 매어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즉 한반도는 약 30억 년 전 바다였던 것이 지각변동을 거쳐 융기되어 형성된 육지라는 것이다. 강원도 시멘트 석회석이 바로 예전에 바다 속이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이곳의 선암船巖 즉 배바위라는 것은 법종이 과연 그런 근거로 이야기한 것인가? 그렇다면 법종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 졸저 전게서 527쪽

 

이와 구별할 것이 하나 있죠.

선암船巖은 한자어이니 순수한 한글 이름 선에 바위巖을 붙인 이름입니다.

 

원효, 도선, 의상, 진각 등 4인의 대사가 수행을 했다하여 사성암이라 한다. 하지만 어디 그 분들뿐이겠는가. 원감도 여기서 안선安禪하였으니 오성이 아니라 육성도 될 법하다. 봉성지에 따르면 암자 위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백장의 빈틈이 있다. 속칭 용암湧巖이다. 바위에는 12대가 있고 대에는 자기 이름이 있다.’고 적고 있다. 이에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에서 용암의 은 아마 솟은과 비슷한 무슨 음의 대자對字일 것이요, ‘솟은은 대개 ᄉᆞᆫᄉᆞᆯᄋᆞᆫ의 연이와延而訛(오랜 시간이 흘러 변형됨)한 이름일 터, 이것이 곧 다른 곳의 입암立巖, 선암 등과 마찬가지로 신체석이라는 (중략) 그런데 사성이라 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솟은의 종교어적 대자일 따름이다. ‘솟은 바위에 지었다 하여 솟은’ = 사성암이라 할 것이다.”라고 썼다.

 

- 졸저 전게서 340쪽 각주 5)

 

멋진 분들.

그 선암 앞에서 포즈를 취하십니다.

그런데 타이슨 대장님이 질문 하나를 날립니다.

"이 배와 관련하여 백두대간의 고리봉도 그런 거 어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오히려 그 고리봉이라고 하면 남원의 지형과 관련한 얘기입니다.

남원은 풍수지리학상으로 보면 배모양입니다.

교룡산이 돗대 모양을 하고 있는 ....

그리고 요천과 섬진강이 곡성 부근에서 합수되면서 유선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니 영락없는 배船입니다.

그러니 홍수가 질 경우 남원은 바로 물난리가 나서 휩쓸려 갈 그런 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고자 이 배의 선수船首 매어둘 산을 찾습니다.

그게 바로 대강면의 고리봉710.1m입니다.

그렇게 하여 악재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남원의 고리봉이라고 하면 백두대간 상의 고리봉을 들기보다는 요천지맥의 고리봉을 드는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08:37

하봉 하부의 헬기장.

아주 중요한 곳이죠.

물이 없는 능선을 걷다보면 필경 물이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진행 방향 바로 우측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30여 m 걸어 내려가면 꿀맛 같은 샘물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른바 '하봉 샘물'입니다.

하봉은 두 개의 석봉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그 하나가 헬기장에서 올라와 바로 좌측 벼랑으로 가면 나오는 이 소년대와 바로 건너편의 영랑대입니다.

그 소년대에서 영랑대를 봅니다.

09:15

소년대에서 멋잔 경치를 즐기고 로프를 이용하여 능선으로 올라섭니다.

다시 하봉의 한 봉우리인 영랑대.

영랑대에서 조금 전 지나온 소년대를 봅니다.

그 뒤로 겹쳐보이는 중봉과 천왕봉.

그리고 우측의 사태가 난 제석봉.

 

그러고는 두류봉에 오른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웅석봉 오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바로 아래로는 국골이 홈이 파이듯이 긴 골을 만들고 있고 그 옆으로 초암능선이 흐르고 있으니 그 뒤가 칠선계곡이고 그 다음 줄기가 창암능선이며 그 우측으로는 백운산과 법화산이며 등구재, 삼봉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거기에 주릉의 반야봉은 물론 만복대, 정령치 등 서부능선이 일렬로 정렬해 있으니 숨쉬기조차 어려워진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남명의 글을 하나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능선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소의 갈비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소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영랑대와 소년대는 그야말로 지리 제일의 조망터이다

영랑대와 소년대는 하봉에 있는 바위봉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영랑대에서 소년대를 가자면 로프를 잡고 주의를 기울여 진행해야 한다. 하봉에서 초암능선을 내려서기도 한다는데 오금이 저려서 내려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중봉과 천왕봉이 지척이다. 주변을 조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곳이 사실 이곳이다.

 

- 졸저 전게서 526쪽

 

제석봉 뒤 우측으로 영신봉을 주시합니다.

영신봉 바로 옆으로 바위가 하나 툭 튀어 나와 있는 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우측으로 바위 두 개 더.

금방 눈치 채는군요.

영신봉 바위는 바로 운장바위.

그리고 그 우측의 두 개의 바위봉 중 우측이 바로 좌고대와 추강암.

두 개의 구별이 쉽진 않지만 좌측은 추강암 그리고 우측은 좌고대.

보고 싶은 사진?

푸우님!

바로 이 사진이죠?

도솔산인님이 좌고대를 배경으로 찍은 명작 중의 명작입니다.

사진 속의 모델.

저와도 한 번 만난 아주 멋진 여성 산꾼입니다.

중앙이 반야봉.

지리의 크고 작은 산줄기들이 우측 임천으로 향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필시 남명은 가을에 이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황소를 거론했을 겁니다.

자세히는 그 누렁 소의 옆 갈비뼈였겠죠.

국골.

예전에는 무당들에 의해 굿판이 자주 벌어져 굿골로 불리기도 했으나 구형왕의 피난처와 관련한 국골로 보는 게 유력하다.

 

- 졸저 전게서 461쪽 각주 51)

욕심 많은 우리 팀원들.

즉석에서 제안을 합니다.

조만간 국골에서 올라와 두류능선이나 초암능선을 이용하여 하산을 하게될 것 같습니다.

두류능선.

좌측 아래 금대봉 줄기는 임천강에서 올라가 임천지맥의 삼봉산과 법화산으로 나뉘고.....

그리고 그 뒤의 백두대간의 백운산과 남덕유산.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나의 산줄기가 다시 고개를 내밉니다.

바로 예전에는 함양독바위라고도 불렸던 독녀암인데 여기서는 너무 희미하기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좌측의 와불산인데 여기서는 각도 상으로 완전치 않습니다.

"이따 새봉에 가서 자세히 봅시다."

국골.

굳이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를 인용하지 않아도 그저 가슴은 마구 뛰기만 합니다.

그만 길을 떠나야죠.

여기서의 진행은 두 갈래입니다.

09:39

즉 지도 #2의 '나'의 곳인 두류봉 삼거리에서 직진을 하여 국골사거리에서 우틀을 하든가 아니면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을 하여 ''하봉 옛길' 루트를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마암을 보기로 하였으니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을 합니다.

된비알을 내려가다 정규 등로를 벗어나 우측으로 들면,

지도 #3

09:48

집채만한 바위가 나오고 그 방위 중상부를 자세히 보면 '馬巖'이라는 각자가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죠.

그 아래는 수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석간수도 있고....

다만 누군가 물을 막아놔서 물이 흐르지 않아 그냥 먹기에는 부적합해 보입니다.

이한검 대장님이 둑을 트고는 정성껏 다듬습니다.

10:12

되돌아 나와 다시 청이당으로 향합니다.

10:26

청이당을 바로 앞두고  더러워진 몸을 간단하게 씻고 취수를 합니다.

각자 빈통에 물을 가득 채웁니다.

청이당 계석.

10:43

청이당 사거리입니다.

여기서 아까 국골사거리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고 좌틀하면 허공다리골 직진하는 길이 바로 동부능선입니다.

 

지리동부능선에는 이 밤머리재를 포함해 다섯 개의 고개가 있다. 쑥밭재(청이당고개), 새재, 외고개, 왕등재 등이 그것들이다. 비교적 능선까지 거리가 짧고 오르내리기 쉬워 이 고개들을 통해 남쪽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장德山場과 북쪽의 금서今西, 산청장山淸場의 문물이 활발하게 오갔을 것이다. 그뿐인가 덕산에 살던 남명도 덕계 오건을 만나러 오고가던 고개가 바로 이 밤머리재이다. 그렇게 한때는 지리산 동부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들이었는데, 무상한 세월 속에 이제는 길도 희미하고 잡초만 무성할 이 길들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덕천지맥을 싸고 있는 북쪽의 임천과 남강 그리고 남쪽의 덕천강 주위의 산군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졸저 전게서 520쪽

 

그러고 나면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졸저 전게서 524쪽

자잘한 봉우리 몇 개를 지납니다.

가끔 산죽 밭이 나와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지만 그렇게 불편할 정도는 아닙니다. 

11:10

아까부터 주시하고 있던 암봉이죠?

어찌보면 나라님의 익선관翼善冠 같이 생겼습니다.

산청독바위입니다.

지리에는 두 개의 독바위가 더 있습니다.

아까 독녀암이라고 하는 함평독바위와 지리남부능선 쇠통바위 옆의 하동바위 등이 그것들입니다.

11:17

로프를 잡고 그 독바위로 오릅니다.

좌측으로 천왕봉 ~ 중봉에서 써리봉으로 내려오는 라인,

그리고 하봉을 지나 두류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오는 능선이 명백합니다.

그러니 두류봉 아래의 마암도 보이고....

좌측 조개골.....

조개골의 윗새재 마을.

바로 치밭목 대피소로 올라가는 길이죠.

그 뒤로 도토리봉과 웅석봉이 위, 아래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두류능선 동쪽 사면의 사태가 난 곳 바로 위에 바위가 하나 보입니다.

바로 향운대이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지난 번 들러보니 최근까지도 누가 살았던 흔적이 장판이나 몇 가지 취사도구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속인이 기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겠죠.

저 향운대는 지리10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만날 새봉.

암봉 우측으로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금대봉과 임천지맥의 삼봉산을 촬영해 봅니다.

마천 창원리 일대입니다.

1023번 도로는 우측으로 오도재로 오릅니다.

이대장님과 타대장님은 먼저 떠났고....

너무 시간을 지체하여 서두릅니다.

산죽 밭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11:48

새봉입니다.

잠시 그늘 아래에서 간식을 먹고.....

12:09

" 안으로 들어 가자."

일행을 덕천지맥 가지능선인 와불능선으로 안내합니다.

"이곳이 와불단맥이면서 점필재 김종직 루트이기도 해."

이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저 능선으로 떨어지는데 저 가운데 1213.9봉 너머가 아까 얘기한 독녀암 즉 함양독바위로 가는 길이야.

우측길이 공개바위로 해서 꽃봉산으로 가는 길이지만 우리가 주시하여야 할 곳은 바로 좌측으로 흐르는 능선이야.

여기서 보면 바위가 보이지 않고 그저 푸르게만 보이지만 이것을 반대방향에서 보면 바위가 부처님 머리모양이라는 거야.

가만히 우측으로 누워 있는 모습.

곧 누워서 입적을 할 때의 모습이라는 거야.

그 너머 보이는 봉우리가 법화산인데 물론 법화경에서 가져온 이름이겠고 그 봉우리 아래 견불동見佛洞이라고 있는데 이 부처님 형상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겠고 이 봉우리 바로 아래로 내려가면 견불사見佛寺가 있는데 다 이와 무관치 않은 것이지.

여름에는 대강 이 정도의 모습으로 보이지."

 

와불산臥佛山은 미타봉彌陀峰이다

 

<사진 8인터넷에서 퍼온 겨울의 와불산 정경.

 

한편 독녀암 뒷 라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지도를 보면 와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와불산은 말 그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한 산이라는 것인데 그 참모습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송전리의 견불사이다. 마을로는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동네가 바로 휴천면 문정리의 견불동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보기에는 견불사見佛寺를 따라오기는 어렵다. 어쨌든 견불사니 견불동이니 하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고 저 와불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표기된 와불산에 대해서 논의가 있다. 와불산의 위치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와불산을 상내봉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또 국제신문이나 부산일보 산행 안내 개념도에는 1164.9봉에 상내봉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며 2003년도 제작한 사람과 산지도에는 삼거리 부근을 상내봉으로 표기하고 있는 등 제각각이다. 어찌된 일일까?

 

먼저 옛 선인들은 이 부근의 지형을 어떻게 봤을까? 선조들이 부른 이름 그대로 불러주면 될 것이니 꼼꼼하게 산행 기록을 챙긴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산록을 보는 게 아무래도 믿음이 간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문제의 대목이다. 의론대 삼반석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향로봉과 미타봉이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 봉우리가 다리 밑에 있었다.”는 말은 점필재가 산행기를 작성할 때 착각 내지는 착오로 인한 표현 같다. 실제 현장에 임해보면 의론대 앞의 능선은 벽송사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그 능선에는 문제의 석봉 이외에는 이렇다 할 봉우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9산청군에서 촬영한 와불산.

 

좌측 사진의 A1164.9봉이며, B는 덕천(웅석)지맥의 새봉에서 가지를 치는 벽송단맥에서 독녀암 능선을 가지 치는 삼거리 좌측의 1213.9봉으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와불산으로 표기된 봉우리, C1193.3봉 그리고 D는 독녀암1117.5m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처님이 입적할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는 명백하게 ‘A'의 곳이다. 굳이 와불산이라고 한다면 A'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함양군에서도 이 1164.9봉에 臥佛山1161m’라는 정상석을 세워놓기도 하였었고 그 들머리에는 누군가가 와불이라고 바위에 표기까지 해 놓았으며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부처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니 ‘1164.9=와불산=와불이라는 데 별 의심이 들지 않는다.

 

한편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편에 보면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는 까닭에 무릇 이 열두 곳의 명산을 사찰이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고 적었을 만큼 우리나라의 산 이름은 불교식 이름이 많다(불교지명설). 산에 사찰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모습같이 생긴 봉우리도 승려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으리라.

일반적으로 부처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통상 부처님이라고 하면 과거불인 비로자나불과 현생불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미래불인 아미타불로 구분되는데 이 아미타불을 그냥 미타불 즉 미륵불로도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승려들 특히 점필재 김종직의 산행에 지로승 역할을 하고 있는 해공과 법종은 당연히 미타봉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1164.9=와불산=와불=부처바위=미타봉으로 보면 될 것이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미타봉은 해결되었다. 문제는 의론대에서 본 두 개의 봉우리 중 이제 남은 향로봉이다. 그리고 이 향로봉은 점필재가 한꺼번에 거론한 만큼 두 봉우리는 인접한 봉우리에 있어야 한다. 실제 산행에 임하면 위 참고도의 1213.9봉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오뚝이같이 생긴 바위가 뚜렷하게 조망처 역할을 하고 있다. 혹시나 그 위로 안개구름이 피어오르거나 사람이 올라서서 두 손을 뻗는 모습을 한다면 영락없이 향로와 같은 모양새이다. 그러면 산 이름으로서의 향로봉과 상내봉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문제는 이곳이 경상남도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힌트는 지리남부능선 상에 있는 악양의 진산 형제봉이 주었다. 즉 형제봉을 성제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경상도 사투리가 '>' 같이 으로 음운변화를 일으킨단다. 그러니 향로봉도 향로봉>상로봉>상내봉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쉽게 수긍을 할 수 있다.

 

<사진 10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와불산 주변.

 

정리를 하자면 ‘A’는 와불산=와봉=미타봉=1164.9m, ‘B'는 지금 부르는 대로 향로봉=상내봉=1213.9m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C'1193.3봉 그리고 'D'는 그대로 독녀암으로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111쪽

 

자. 또 갑시다.

여기서 함양군 마천면과 헤어져 산청군 금서면으로 들어서게 되니 이제부터 금서면과 삼장면의 면계를 따릅니다.

지나온 능선.

하봉 ~ 두류봉 ~ 마암 ~ 청이당으로 내려오던 길.

그리고 새봉.

우측이 두류능선.

가야할 능선.

맨 좌측이 왕등재 습지가 있는 곳.

중앙 뒤가 웅석봉.

12:52

키 큰 산죽이 시작됩니다.

완전 찜통이로군요.

12:57

그러고는 새재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우틀하면 윗새재로 탈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지리 동부능선 5개 고개 중 하나입니다.

13:19

923.9봉을 지나...

13:22

외고개도 통과합니다.

너무 덥다보니 자꾸 믈을 마시게 되는군요.

쉬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고....

 

지도 #4

 

13:51

그러고는 왕둥재 습지입니다.

아주 멋지게 자랐습니다.

수질도 괜찮고....

팀원들도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습니다.

14:08

지도 상의 왕등재.

그런데 사실 이곳은 고개가 아닙니다.

양쪽으로 오갈 수 있는 길도 없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큰 오류입니다.

지겹게 반복되는 산죽밭.

그런데 갑자기 내대로 아우님이 패이스를 잃는 것 같습니다.

졸음이 쏟아지면서 약간은 탈진 증세까지 오는 것 같습니다.

큰일이군요.

일단은 진행합니다.

983.8봉을 올라,

14:55

993.6봉에 올라 뒤를 봅니다.

천왕봉,중봉과 비둘기봉.

그 우측으로  하봉 옛길 능선과 중앙의 새봉과 우측의 와불능선.

우측의 꽃봉산으로 떨어집니다.

새봉에서 달려오는 동부능선.

법화봉 라인과 그 우측의 임천지맥.

산죽밭을 지나,

15:22

지도 #4의 '다'의 곳인 왕등재를 지납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 왕등재를 깃대봉 위치에 표시하여 놓았지만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대목입니다.

삼장면의 평촌 밤밭골에서 이을 통하여 금서면으로 넘어가면 바로 지막리의 절골로 연결이 되고 그 길은 곧 수철리와도 연결되 되니 이런 곳이 고개입니다.

 

지도 #5

15:49

깃대봉입니다.

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이곳은 봉우리이기 때문에 분명히 고개가 아닌 것입니다.

왕등재에 관한 것들을 정리해 볼까요?

 

지리동부능선에는 두 곳의 왕등재가 있다?

그러고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왕등재라고 표기되어 있고 멸실된 3각점(산청311)이 방치되어 있는 깃대봉936.5m으로 오른다. 예전에 가락국과 관련하여 "피신한 가락국의 구형왕이 서왕등재로 피신하여 신라에 항거를 할 때 이 동왕등재에 깃발을 꼽아 신호를 주고받음으로서 이 동왕등재의 지형지물을 이용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특히 '깃대봉'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깃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의 대부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측량 사업을 실시할 때 삼각점 대용으로 꼽았던 깃대에 유래한 것이므로 이 전설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편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동부능선 구간에 왕등재가 두 곳에 표기되어 있다. 즉 깃대봉인 936.5봉과 1048.6봉을 지나 만나는 왕등습지 등이 그곳이다. 생각건대 왕등재王登岾는 한자 표기 그대로 왕,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지났던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936.5봉은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얘기해주듯 고개가 아니고 봉우리이며 왕등습지 역시 주위가 운동장의 스타디움 같이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이는 이 둘러싼 산줄기에서 왕산으로 향하는 줄기 하나가 가지를 치고 있음이 이곳은 고개가 아니라 봉우리인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이들 두 왕등재는 라는 이름을 갖기에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현장에 임해보면 지막리 절골과 유평리 밤밭골을 잇는 즉 903.4봉과 993.5봉 사이에 있는 고개가 왕등재라는 이름을 갖기에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럴 경우 동왕등재라고 부르는 936.5봉은 그대로 깃대봉, 서왕등재는 왕등습지로 정리하고 절골과 밤밭골을 잇는 고개를 왕등재로 이름하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다.

 

왕등재를 지나면서 더없이 편안한 길을 걷다보면 가끔씩 산죽이 나와 발을 더디게 한다. 조망이 트이는 곳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맛보며 진행하면 이내 왕등습지이다. 해발 900고지가 넘는 곳에 습지라니! 소양지맥의 대암산 용늪보다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습지 내에 뻐꾹나리·창포 등 58종의 습지식물과 붉은배새매·까막딱따구리 등 천연기념물과 삵·담비 등의 멸종위기야생동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잘 보존해야 할 것들이다.

 

- 졸저 전게서 521쪽

16:11

20분 정도 머뭅니다.

깃대봉에서 도토리봉으로 가는 능선.

자잘한 거 8개 정도는 오르내려야 할 텐데 '내대로'님이 영 움직이질 못합니다.

저 59번 도로는 이제 밤머리재까지 올라오지 않고 터널을 통해서 금서면과 삼장면을 오가게 된다고 하는군요.

법계리 상촌마을 정경입니다.

웅석봉 우측으로 딸뜨기능선이 쭉 뻗어 있고....

돌아본 새봉과 우측의 상내봉과 꽃봉산 라인.....

그 우측으로는 고동재를 넘어 왕산과 필봉산.

바로 아래가 지막리이고....

남명 조식의 제자인 덕게 오건의 마을이 바로 저 아래 수철리입니다.

도저히 속력이 나질 않는군요.

그렇다고 독려할 수도 없고 그런다고 되는 것도 아닌 일.

그저 천천히 내대로님의 뒤를 따릅니다.

16:48

그러다 보니 729.1봉을 지나고....

이제 국립공원 지역을 빠져 나옵니다.

17:41

848.5봉을 지나,

17:55

드디어 오늘 동부능선의 꼭지점을 찍습니다.

지도 #5의 '마'의 곳이죠.

오늘 귀가 시간에 조금 차질이 생깁니다.

덕산의 김기사님께 미리 전화를 하고 원지의 식당과 버스 정류장에도 미리 버스를 예약합니다.

18:16

도토리봉입니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다리가 풀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내리막길이 더 고역입니다. 

예상보다 1시간 반 가량 늦었지만 산행을 하다보면 다 그런 변수가 있는 법이니 미안해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천왕봉 정상에 구름이 드리웠고....

그 우측의 새봉과 와붕능선도 이제는 저만큼 멀어졌습니다.

18:46

무사히 내려왔습니다.

우선 시원하게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캔맥주 한 통을 땁니다.

오늘 고생한 내대로님도 한 잔.

시간이야 좀 늦었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움직여 결국 해냈습니다.

단체 사진 한 장 촬영을 하고....

덕산 목욕탕으로 가서 잽싸게 땀을 씻고.....

그러고는 원지 동해왕갈비 식당으로 가서 갈비탕에 소맥으로 피로를 풉니다.

20:50 버스를 타고 남부 터미널로 오니 23:55.

24시간 25분만에 다시 돌아왔군요.

서울남부터미널.

지리산 산꾼에게는 정말 고마운 곳입니다.

오늘 수고들 많았습니다.

공부들 제대로 하셨나요?

국골이고 도장골이고 또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