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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지리산 달궁 광산골에서 심마니 능선에 붙다.(달궁 ~ 광산좌골~망바위봉~ 심마니샘터~ 광산우골 ~ 달궁)

 

존경하는 산꾼.

유목민 김중호님.

그이를 처음 만난 곳은 속리산 대간꾼들의 쉼터 '피앗재 산장'에서였습니다.

그전에 산에서 그이를 만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실물을 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죠.

그이와의 만남은 사실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표지띠를 통해서였습니다.

산이란 산은 아니 산 구석 구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만한 곳에도 어김없이 그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글이나 표지띠로만 접하던 그이를 '충북알프스' 산행을 위하여 피앗재산장을 들렀을 때 만나게 되었던 것이죠.

2014. 11. 8.의 일이었습니다.

그이는 '신백두대간' 산행을 이끌던 때였으니 생면부지의 그이를 만나서는감격의 포옹을 나눴던 기억이 지금도 삼삼합니다. 

 

그 유대장님으로부터 카톡이 날아옵니다.

2019. 6. 16. 조성봉 감독과 '인문기행'을 떠나는데 이번이 지리 광산골 편이라고 합니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다루는 조성봉 감독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레드 헌트'로 유명한 분이시죠.

지금은 이현상을 다루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고....

 

광주의 나루터 형님도 참석하신다고 하니 필히 가야할 것 같습니다.

2019. 6. 15. 토요일은 집에서 푹 쉽니다.

일요일 아침 첫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니 U-20 결승전은 애써 무시하기로 하고 잠에 듭니다.

눈을 뜨니 6. 16. 00:50.

뇌구조가 참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분명 01:00에는 안 깨기로 하고 짐에 들었는데 바로 그 시간에 기상을 하다니....

축구를 보고는 걸어서 광명역으로 나아갑니다.

05:25에 출발하는 여수행 열차 안에서 자는 둥 마는 둥....

기차는 여지없이 제 시간에 남원역으로 들어섭니다. 

지도 #1

07:08

배낭을 맨 산꾼도 서너 명 눈에 띕니다.

남원역 플랫홈에서 보여야 할 만복대 ~ 종석대 ~ 노고단 라인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그저 이 정도여서인가!

아쉽습니다.

다만 남원역 바로 옆에 있는 교룡산 만큼은 이 정도로 볼 수 있어 위안이 되는군요.

남원의 모든 애환을 가득 담고 있는 교룡산.

그리고 교룡산성.

조만간 올라 보기를 기대합니다.

역사驛舍 앞에는 유목민 님과 나루터 형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군요.

유대장님 덕분에 호강을 합니다.

차에 올라 인월로 향합니다.

07:40

인월 풍천교 옆 청솔식당.

청국장으로 아침을 먹고 현장으로 가기로 합니다.

풍천은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임천지맥이 가지를 치고 나올 때 발원하는 물줄기죠.

이 풍천이 아영벌을 적시고 흐르다 이 청솔식당 앞에서 람천에 흡수되고 다시 조금 이따 만나게 될 만수천을 흡수 임천이 되어 산청으로 들어가 남강에 합류하게 됩니다.

밥을 먹고 풍천을 보고는 차에 올라 오늘의 산행지 달궁으로 갑니다.

 

이곳 일대는 산내면입니다.

60번 도로에서 우툴하여 861번 도로로 갈아탑니다.

이제부터 도로의 좌측은 지리북부능선이 그리고 우측은 서(북)부능선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 사이를 가르고 흐르는 만수천.

길상봉 노고단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입니다.

무넹기에서 작은 물줄기 하나를 화엄벌로 넘겨준 만수천은 반야봉에서 내려주는 물들을 받아 풍부한 수량으로 경상남도 서부의 수원이 될 것입니다.

반선을 지나면서 이제 지리북부능선은 없어지고 그 자리를 '심마니 능선'이 대신합니다.

백두대간의 반야봉에서 가지를 쳐 뱀사골 물과 만수천의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단맥이 되겠죠.

 

달궁 가는 길

산내면 대정리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861번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달궁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이곳이 예전 마한의 왕이 쫓겨 와 만든 도성의 흔적이라는 취지의 글만 쓸쓸하게 적혀 있다.

 

이 달궁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줄기로 람천을 만나 임천 ~ 엄천이 되어 남강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의 불행한 근대사를 다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달궁에서 열리는 '10월 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대치 부대가 피아골을 떠나 달궁으로 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달궁에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물론 소설 속 하대치의 속내는 멀리서나마 그의 마음 속 영웅 이현상을 보기 위함이었겠지만 어쨌든 깊은 골짜기 안에서도 달궁은 남부군 사령부가 들어앉을만한 비교적 커다란 장소로 묘사된다.

 

그런 달궁이 2천 년 전으로 올라가면 처음 지리산이 열린 날이 된다. 2천 년 전 인간이 처음 지리산 달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신비를 간직한 마한의 피란 도성 달궁의 역사는 그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궁전을 달의 궁전이라 불렀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의 깊고 좁은 골짜기에 2천 년 전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한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된 것이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과 진한에 쫓긴 마한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그것이다.

 

<사진 16> 서산대사 존영.

 

황령黃嶺과 정령鄭嶺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는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사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여 있어 지정학적으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정령은 지금의 정령치로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기에 그다지 부담이 없다. 그런데 황령은 어디인가? 일설에 의하면 황령黃嶺이 황치黃峙임에 착안하여 만수천이 람천에 합류되는 지점에 있는 산내면 중황리의 황치마을 부근을 든다. 그러면서 천혜의 요새인 달궁의 서쪽인 운봉은 정장군이 정령치에서 방어하게끔 성을 쌓았다면 달궁의 남쪽과 동쪽은 반야봉과 종석대 같은 험준한 산이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라 할 북쪽은 황장군 몫이어서 람천 너머의 황치마을은 북부지리인 임천지맥의 투구봉~삼봉산~법화산에서 넘어오는 길목임과 동시에 람천의 동서를 커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야 어딘들 성을 쌓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BC78년이라면 지금부터 약2100년 전인데 그 당시 건축이나 토목기술로서 과연 어떤 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그저 단순하게 지형을 보고 황령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달궁의 동쪽은 반야봉이 막아주며 남쪽은 노고단이 막아주고 북쪽은 골짜기인 천혜의 요새여서 지형상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막을 수 있으니 문제는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서쪽이 문제였을 것이다.

 

황령은 지금의 묘봉치妙峰峙?

다행히 신라 진지왕 때인 576년 창건한 황령암이 폐사 지경에 이른 것을 1544년 중창하는 과정을 서산대사가 언급하면서 반야봉 좌우에 두 재를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고 한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이들과 문물을 교류했던 운봉은 정령으로 막았으니 다른 한 쪽인 묘봉치 정도가 구례 산동을 커버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黃嶺庵이라 하였다.”는 황령암기의 기사와도 얼추 맞아 들어간다. 다만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는 “(반야봉) 위쪽에는 만복대가 있었다.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이 있고 북쪽에는 보문암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이라고도 하였다.”라는 내용은 황령암의 위치가 지금의 매막봉 부근의 달궁성 부근의 암자터로 추정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는 오히려 묘봉암보다 북쪽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추강은 대동유묘봉암臺東有妙峰庵 대북유보문암臺北有普文庵대남유보문암臺南有普文庵으로 썼어야 정령과 황령이 엉키지 않고 이는 보문암 즉 황령암이 묘봉치 즉 황령의 남쪽이라는 기사와도 맞아 들어가고 그래야 반야봉 좌우에 황령과 정령이 있다.”는 서산대사의 언급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끝내는 함락, 패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한의 피란도성인 달의 궁전은 지금은 잡초더미에 묻힌 몇 안 되는 돌더미와 주춧돌 등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달궁月宮達宮으로 표기한다.

우리나라 고대사 대부분이 아직 역사로서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듯 이곳 달의 궁전을 중심으로 흥망성쇠 했던 마한의 역사 역시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달궁의 존재로 인해 지리산이 최초로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으로 바뀌게 됐다는 점에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마냥 신비롭고 서정성이 깃들어 있는 달궁은 이제 예전과 같이 달 속에 있는 신비스런 궁전의 모습이 아니다. 1988년 지리산 종단도로인 861번 도로가 연장개통(천은사~달궁 구간)되면서 궁터 주위는 오르내리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민박촌과 카페 그리고 관광객들의 북적거림으로 뒤덮였다. 차량의 기나긴 행렬을 따라 달궁은 이제 바깥세상과 하나가 되고 만 셈이다. 즉 달의 궁전은 이제 관광객들의 쉼터로 변해 있는데 그마저도 옛 마한의 역사를 음미하기 위함이 아니라 빼어난 달궁 계곡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이런 아름답고 그윽하며 서정적이기도 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 달궁을 노고단이나 지리산, 두류산 같이 국어학적으로 그 어원을 파악하면 좀 김이 새는 기분이 더해진다. 즉 우리의 옛말 ᄃᆞᆯ은 지금의 높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중세 국어까지만 해도 달ᄃᆞᆯ이라 했고 매달다의 달다가 여기서 온 말이다. 그래서 =이고 이다. 그러니 달동네라는 말도 달이 보이는 동네라는 뜻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라는 게 쉽게 이해가 가겠다. 그러니까 이 달궁을 위와 같이 서정성이 깃들고 운치가 있는 궁에서 그저 이 지리산이라는 높은 산에 있는 이어서 달궁이었다고 하면 기분이 좀 잡칠까?

 

예전 이 달궁의 주민들은 남원으로 장을 보러가려면 이 정령치를 넘어 고기리의 구룡치로 갔음은 둘레길 제1구간에서 봤는데 그 일정은 23일이 될 수도 있었다. 만복대를 오르면서 조망처에서 주위를 살펴본다. 지나온 고리봉과 세걸산 그리고 멀리 바래봉까지 확실하게 보이고 고리봉 좌측으로는 운봉의 덕산저수지가 보인다. 진행방향으로 만복대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고 좌측으로는 반야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우측 중앙에는 노고단의 케른도 선명하게 보임은 물론 서시지맥이 갈리는 바위봉 또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76쪽 이하

 

 

08:58

달궁마을입니다.

'군토벌대가 지리산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해룡은 피아골의 병력을  전부 화엄사골로 이동시켰다.

지리산을 벗어나 야산으로 옮기자는 새 전술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이해룡은 화엄사골에 도착해서 박영발 도당위원장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번 도당道黨에 대한 공세를 피해 옮겨온 것이다.

지리산을  일시적으로 벗어나 야산으로 붙는다는 계획에는 도당위원장도 찬동했다.
탈출 방향은 북쪽으로 정해졌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섬진강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경험한 바로 북쪽보다는 그  두 방향으로 토벌대들이 훨씬 많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빨치산들이 북풍  매몰차고 눈이 깊은
북쪽 골짜기들을 피해 남쪽 골짜기들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북쪽 골짜기에는 고작해야 남원군당이 달궁골과 뱀사골에 산재해 있는 정도였다.

국방군의 그런 정확한 정보파악에 간부들은 적이 놀랐던 것이다.'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147쪽, 제4부 전쟁과 분단 - 30. 각 도당과 지리산의 전면 공세

 

우리 팀 5명.

기행 팀 14명 등 19명이군요.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합니다.

중앙에 마스크 한 분이 조성봉 감독님.

 

우리 팀 좌로부터 나루터 형님, 시아님, 몽화님.

09;03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광산골 들머리는,

만수천을 건너 하류 방향으로 10여 m 내려가 우틀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광산골로 접어듭니다.

일제강점기에 니켈광산이 있는 곳이라 하여 광산골이랍니다.

그러니 광산골鑛山谷입니다.

이 루트는 주의하여야 할 게 있습니다.

즉 광산골에서 심마니능선으로 붙는 길은 시종일관 계곡을 따르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초입 부분만은 잠시 골짜기를 벗어나 사면으로 오릅니다.

좌측 사면으로 붙는다는 것이죠.

내가 머물렀던 비밀 아지트의 위치는 현재의 산내면 산동리 달궁마을이다.

애당초 달궁을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데에는 여순사건의 주역들이 그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1948년 10월 여수에서 제주도 출병을 거부했던 김지회, 홍순석 등이 토벌군에 쫓겨 숨어든 곳이 바로 뱀사골과 달궁 계곡이었다.

결국 김지회 등은 이듬해 4월에 뱀사골 계곡 입구의 반선마을에서 사살되었는데 우리가 달궁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따라서 군軍이 주민들을 모두 소개해버려 민가는 텅 비어 있었다.

달궁마을에서 오른쪽의 광산골로 진입하는 들머리 쪽에는 꽤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예전에 목기를 깎던 사람들이 기거하던 움막이 남아 있었다.

그 움막의 바닥에는 온돌까지 놓여 잇어서 우리가 임시 거처로 삼기에는 그만이었다.

 

- 최정범  '지리산달궁비트' 129쪽

 

위 저술은 남원 이백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빨치산이되었다가 1953년 체포되어 전향한 최정범의 자서전입니다.

이 책에는 그가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게되는 과정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좁혀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을 피하고자 지리산으로의 입산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 루트는 회문산에서 요천지맥을 넘어 운봉의 고기리를 거쳐 백두대간의 정령치를 지나 지금의 달궁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책에는 우리같은 산줄기꾼에게는 아주 재미 있는 대목이 또하나 나옵니다.

신산경표에서 천황지맥이라고 하는 지맥의 천황봉을 보절, 덕과, 사매 사람들은 천황봉으로 부르지만 산동사람들은 만행산이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산이름은 동네마다 달리 부르는 것으로 특정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지맥의 이름을 물줄기를 따르는 게 옳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요천지맥이라 부릅시다!

이름모를 빨치산의 흔적인가요?

무덤을 지나....

제법 잘 나 있는 길입니다.

이 정도면 예전에 작은 트럭 하나는 드나들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길이 니켈 광석을 싣고 드나들던 곳이라 생각하니 이곳에서 극한 작업에 시달리던 민초들이 고통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멧선생 목욕탕을 지나고....

09:23

'비트'는 비밀아지트를 이르는 말로서 아지트agit란 '혁병운동지령본부'를 뜻하는 러시아어입니다.

빨치산들은 지명 뒤에 '트'를 붙여 고유명사화해 불렀고 그럴 경우 이곳 일대의 아지트는 '달궁트'가 되는 셈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곳에 구들을 만들어 불을 때고 난방을 했다고 하죠.

09:27

광산좌골과 우골이 갈리는 합수점에 있는 곳.

석축이 보이는군요.

그 뒤로 올라가니, 

가재재를 넘어 운봉을 거쳐 고기리에 도착하니 새벽녘이었다.

날이 밝아오자 우리는 또다시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정령치를 넘어 드디어 달궁에 이르렀다.

지름길만 걸었는데도 사흘이 걸렸다.

이때부터 달궁은 남원군당의 비트가 되었다.

 - 최정범  '지리산달궁비트' 128쪽

상당히 너른 터가 나옵니다.

움막을 임시 거처로 정한 나와 선발대는 장차 남원군당이 모두 옮겨올 경우 병력이 주둔할 막사를 어디 마련하는 게 좋을 지 탐색에 들어갔다. 마침 좋은 자리가 보였다. 달궁마을에서 오른편 망바위 방향으로 향하면 하점골 계곡이 시작되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광산골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성업을 하던 니켈광산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 골짜기 아래쪽으로 꽤 넓은 길이 나 있으니 막사를 지을 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새 비트를 성공적으로 물색했다는 소식을 회문산의 남원군당에 보고한 후 모든 유격대원을 달궁에 들어오게 했다.

 

- 전게서 '지리산 달궁 비트' 129쪽

 

그러니 이곳이 그 '남원군당터'입니다.

역사의 한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행은 광산좌골로 올라 망바위봉에 오른 후, 심마니능선을 이용 투구봉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우골로 내려와 다시 이 군당터에서 원점회귀하는 것으로.....

그런데 선두를 잡으신 분이 그 반대로 진행을 합니다.

우골로 들어서자마자 대한광업진흥공사에서 살치한 말뚝을 봅니다.

1989년에 설치한 것인데 말뚝 번호가 '달궁 83-1호'로군요.

옛 집터에는 고로쇠 수액 집수통이 나뒹굴고....

그 흔적들.....

산 길 여기저기에 흉축하게 널려 있는 고로쇠 수액 채취 호스.....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자 다시 되돌아 나옵니다.

신록이 우거진 좌골.

좌골은 달리 등로가 없습니다.

그저 골을 따라 건넜다 다시 오기를 반복하는 그런 길입니다.

수량이 풍부한 이곳은,

큰 암반 구간이 나올 경우 간혹 작은 폭포가 되어 흐릅니다.

이건 좀 큰 폭포.

건널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 팀은 답사팀 때문에 오르기가 더디기만 하군요. 

10:34

산사태 지역이 나옵니다.

산사태는 아예 등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것 같아 우리가 먼저 치고 올라가기로 합니다.

10:43

우리가 먼저 올라가기로 하고 수신호를 보냅니다.

물줄기는 거의 일직선입니다.

여러 갈래로 흐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만나겠죠.

상류로 올라가도 물의 위력은 꺾이지 않고....

나루터 형님.

꾸준하게 걸으십니다.

어서들 올라오소.

사태가 시작한 곳.

물의 원천이 저 끝인가요?

10:58

아!

뒤로..

처음 조망이 트입니다.

정령치입니다.

그 옛날 달궁이 처음 열릴 때 달궁을 지키던 정장군이 근무를 서던 곳.

861번 도로에서 갈라져 그 정령치로 올라가는 737번 도로도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니 그 우측의 큰고리봉1305.4m도 보입니다.

어떤 게 진짜 고리봉인가?

정상석이 있는 고리봉1248m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은 고리봉이다. 멀리서 보면 이 고리봉은 만복대와 노고단 혹은 반야봉에 눌려 좀 왜소하게 보이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까 본 백두대간이 갈리는 2등급 삼각점이 있었던 1305.4m의 고리봉과 구분하여 이 봉우리를 작은고리봉이라고도 부른다. 합당할까?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아예 정리하고 지나가자.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와 두리봉의 두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의 회자에서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보다는 머리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고리봉’, ‘큰 고리봉=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예전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고리봉에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든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 즉 큰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작은고리봉은 달궁과 관련하여 황장군이 지키던 황령치가 지금의 묘봉치로 추정되는 만큼 이참에 이 작은고리봉을 아예 묘봉妙峰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

 

 -'현오와 걷는 지리산' 485쪽

11:02

조금 더 올라가니 좌측으로 조망이 될 것 같군요.

그렇죠!

만복대입니다.

이 방향에서 만복대는 저런 모습으로 보이는군요.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산사태의 흔적.

서부능선.

그 우측 끝으로 세걸산이 보이고.....

11:40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계곡입니다.

11:46

이끼가 많이 끼어 있는 곳을 지납니다. 

단체로 포즈를 잡아보고.....

11:50

그래도 끝을 나오겠죠.

심마니능선이 있는 망바위봉을 향하여....

그 순간 조망이 뒤로 터지면서 이제는 정령치가 눈높이를 맞춥니다.

대단한 규모의 사태입니다.

12:15

이제는 다 왔습니다.

12:20

이곳이 산사태가 난 바로 그 시작의 곳입니다.

조심스럽게 숲으로 들어,

12:30

망바위봉으로 오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이는 곧 심마니능선에 올랐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심마니 능선이라.... 

참고도 #1  심마니 능선

정설은 아니지만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라고 지시를 하여 방장산으로 서불이하 동남동녀 2백명을 보냈었다고 하죠.

일단 불로초라고 하면 산삼을 연상하게 됩니다.

산삼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부터 귀중하게 여겨온 약초죠.
옛부터 한반도에만 자생한다고 알려져왔고 부르는 게 값인 산삼.
산삼은 성장이 늦고 뿌리가 곧게 내려가다가 기듯 자란다고 합니다.

이 산삼을 전문적으로 캐는 약초꾼을 일컫는 말이 곧 심마니입니다.

그러니 심마니 능선이란 약초꾼이 다니던 길에서 유래된 지명일 것입니다.

그런 심마니가 다니는 길은 당연히 험하고 경사도가 50˚가 넘는 위험한 곳일 겁니다.

그리고 그 루트에는 샘이 있어야 하고  그들이 '모둠'이라고 부르는 잠자고 쉬기 위한 움막터가 있어야 합니다.

산삼의 생육 조건상 가장 적합한 곳이어서 한때 산삼 약초가 많아 심마니들이 찾아든 곳.

바로 이 부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심마니능선이라고 하는 것이죠.

 

지리산의 여러 이름들

그 쌍계사로 들어가 보자. 쌍계사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일주一柱가 아닌 쌍주雙柱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의 현판에는 삼신산 쌍계사로 적혀있다.

그런데 지리산은 방장산일까? 아니면 삼신산일까? 아니면 방장산이면서 삼신산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필자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을 엮어 삼신산이라고 하는 견해에 반대한다. 오직 방장산만이 지리산이요 삼신산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쌍계사 일주문의 현판이 그걸 얘기해 준다.

 

지리산은 방장산이요 삼신산이다. 생각해보면 삼신산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연주산 등을 일컫는 말이다.사기史記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와 한 무제가 이것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사마천이 방장산을 언급한 후,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번은 필히 가봐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그런 대상이 아니었겠는가?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보는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조선의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는 방장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는다.

 

 - 졸저 전게서 281쪽

 

이 방장산에서 불로초를 찾지 못한 서불徐市(市는 '불'로 읽음)은 처벌이 무서워 BC230년 구례 산동면 위안리의 물길을 건너 남제주를 경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때 방장산에서 그가 건넌 물줄기가 서불천입니다.

이곳 지명인 산동은 중국 산동성에서 가져온 이름이라는 것은 확실하죠?

그리고 서시천西施川은 원래 徐市川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徐는 지리산의 서쪽이니 西로 바뀌었고 설市은 '저자 시'로 잘못 독은 되어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니 모든 게 설화만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삼신산 그 중에서도 방장산 즉 지리산 불로초의 미련을 끝끝내 버리지 못했던 진시황.

그에게는 심마니능선의 산삼 한뿌리가 중국 대륙만큼 소중했을 듯 싶습니다.

진시황에겐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꿈과 희망이었던 불로초가 자생하였다던 심마니 능선의 발을 떼어봅니다. 

우틀합니다.

생각보다는 길이 좋아 보입니다.

이내 산죽이 나타나지만 그리 두려워 할 정도는 아니군요.

 

멧선생이 쟁기질한 현장도 자주 보이고...

그런데 흙의 상태를 보니 오늘 작업을 한 현장입니다.

12:45

1316봉을 지나고, 

12:47

지도 #1의 '나'의 곳에서 광산우골 갈림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이따 이곳으로 와서 우골을 탈지 아니면 달궁능선을 이용할 지 이따 두고 보기로 합니다.

12:55

그런데 이곳에 이런 표지띠가....

산꾼을 위한 표지띠라기 보다는 반달곰을 위한 표지띠라고 봅니다.

13:05

투구봉 갈림길입니다.

우측으로 진행하면 투구봉이지만 좌틀하여 심마니 샘터로 향합니다.

13:11

119 구조목(지북18-10)을 보고,

13:19

다시 투구봉 갈림길을 봅니다.

아까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투구봉을 올랐다면 이 길에서 다시 만났겠죠.

13:27

그러고는 심마니샘터 삼거리입니다.

여기서 오던 방향으로 직진을 하면 샘터 방향 우틀하면 반야봉 방향입니다.

그 삼거리 뒤에서 조망이 터집니다.

와우!

가운데가 뱀사골.

그 우측 뒤가 바로 지리북부능선이죠.

능선 움푹 파인 곳이 영원령.

 그 좌측이 영원봉1290.5m이니 그 앞의 허연 바위가 벌바위.

그러니 그 우측 뒤가 바로 지리북부능선의 주봉인 삼정산입니다.

그 삼정산 좌측이 임천 건너의 임천지맥의 주봉 삼봉산1187m.

그러니 그 우측이 오도재 지난 법화산993m.

좌측으로는 지리서부(북)능선이 보이건만 잡목에 가려 그저 이 정도만....

샘터로 들어갑니다. 

13:32

풍부한 수량의 심마니샘터.

몽화님이 가져다 놓은 국자로 물 한 모금을 시원하게 마십니다.

지리산 샘터에서 스테인레스 국자로 물을 마신 기억이 있다면 그 국자를 가져다 놓은 분이 몽화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바로 뒤로 올라가 박터로 갑니다.

12:38

박터에 올라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조망이 급합니다.

좌측 만복대부터 정령치를 지나 큰고리봉까지....

그리고 바래봉과  덕두산.

뾰족하게 솟은 심마니능선의 1319봉.

우측이 지리북부능선 그리고 그 우측 뒤가 임천지맥.

그리고 앞 줄 제일 우측이 연하천 대피소가 있는 명선봉1583.4m.

지리주릉이죠.

그 왼쪽이 삼각고지1484.0m.

그리고 그 뒤가 천왕봉인데 불행히도 구름에 가렸습니다.

아!

대단한 곳입니다.

이렇게 감상에 젖어 있는데 일행들이 저를 부르는군요.

빨리 와서 점심을 먹자는 것입니다.

오늘 주방장은 몽화님.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15:09

1시간 40분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점심을 먹는데 사용하는군요.

이럴 수가!

그 간이면 반야봉까지 갔다오는건데.....

15:32

샘터를 지나 다시 투구봉 삼거리입니다..

15:35

큰고리봉. 

15:45

아까 지나쳤던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광산우골로 진입합니다.

상당한 규모의 이끼폭포

16:36

본대의 꼬리를 잡습니다.

셀카 촬영 중인 시아님.

16:34

나루터 형님.

16:54

집터 현장.

진달래 산천은 조감독님의 표지띠 이름.

예전 이름은 빨치산이라고...

지리산에서 많이 봤습니다.

몽화님이 우측 어깨에 맨 것은 산행 중 주운 쓰레기들.

처음에는 저 가방의 용도가 산약초나 나물 등 채취용으로 생각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몽화님은 늘 산행시 이렇게 쓰레기 수거를 하며 다니신다고 하는군요.

존경합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본대本隊를 보호해 주어야 할 입장이라.....

18:10

다시 오전에 들렀던 남원군당터.

그런데 좌, 우골을 모두 살피면서 내려왔건만 정작광산은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군요.

예전 토벌군들이 빨치산이 은거할 것을 우려해 다 폭파시켜버린 건가요?

아쉽습니다.

조촐하게 오늘 의식을 진행합니다.

 

저도 오늘 참석한 대원으로서 참가 소감 한 마디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만수천을 건너 속세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귀가할 차편이 애매하기만 합니다.

하는 수없이 막차인 22:40 기차를 예매하고는 고남님에게 전화를 합니다. 

오늘 오공능선을 진행한 고남님과는 수시로 통화를 하였는데 지금 막 하산을 하였다는군요.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합니다.

18:48

송백식당으로 와서는 씻고 옷을 갈아 입습니다.

인월을 경유하여 여원재를 지나 저는 고남님 댁에서 내리고 다른 대원들은 광주로 화성으로 각 헤어집니다.

오늘 지곡(지리계곡)산행 너무 즐거웠고 보람 있었습니다.

다음 산행은 심마니능선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