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시작하기
이하 졸저拙著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에서 가져온 글로 우리가 백두대간을 진행함에 있어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니 미리 열심히 공부하여 두십시오.
백두산은 대륙의 산줄기들을 하나로 모은 다음에 이를 다시 우리나라 전체로 골고루 퍼트렸다. 대륙의 모든 기운과 생명의 원천은 이 산줄기를 타고 물줄기를 만들고는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를 조선산맥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이름 지었다.
조선산맥, 아니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 개념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하긴 그 백두대간과 정맥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교육에서 해방되지 못했던 기간 동안 잠시 우리 곁을 떠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70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기간을 제외하고 백두대간과 정맥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이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모든 산과 산줄기 그리고 물과 물줄기의 근간이 되는 아버지 산줄기 백두대간. 우리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여서 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백두대간. 일본의 지질학자가 도용(盜用)한 ‘산맥’ 개념과의 충돌로 지금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백두대간.
그렇게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고 난 후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허리가 잘린 채 신음하고 있는 백두대간. 그래서 오늘도 반쪽만 그 답사를 허락하여 결국 미완으로 마무리해야만 하는 백두대간.
백두대간에 기대어 살았던 예전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 백두대간으로 인해 그 부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그 일들은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느 순간은 삼국시대 백성으로, 어느 고개를 넘을 때에는 고려시대 사람으로, 또 어느 산을 오르내릴 때에는 조선 사람이 되어 백두대간을 걸어보면 어떨까.
백두대간을 이어서 걷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쪽 백두대간이 시작하는 진부령에서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방법 즉 남진(南進)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하여 진부령으로 진행하는 방법 즉 북진(北進)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되는 날 북쪽의 나머지 백두대간을 이어가기 위해 필자는 이 책에서 북진을 선택했다. 그렇게 두 발로 걸은 대간길의 기록은 결과적으로 누구도 다루지 못한 백두대간에 얽힌 많은 얘기들을 담게 되었다.
이 책은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모든 산줄기를 망라하고 대간길에서 만나는 산이나 고개도 제대로 알려준다. 산맥과 산줄기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옛날 산줄기가 산맥이 되었다가 다시 지금의 산줄기로 돌아오는 과정도 소상하게 밝혀준다. 또한 백두대간과 관련된 사람들을 소개하고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눈다.
무엇보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우리의 관심사와 함께 풀어낸다. 이 책을 펴내면서 가장 큰 수확과 보람이 있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허무맹랑한 얘기들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게 된 점이다.
필자는 백두대간 길을 혼자 걷기도 하고, 산악회 대원들, 우연히 만난 산꾼들과 함께 걷기도 했다. 책 속에서는 사랑하는 후배 장감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함께한 이들은 이 나라의 대간꾼 모두이다.
이 책은 산행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백두대간 이론서도 아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머리로 산의 이어짐을 그리면서 걸은 기록이다. 이 책은 산이 좋아서 산에 오르지만 백두대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대간꾼들에게 종합적인 지식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다.
1. 천왕봉 오르는 길
“형, 근데 조선산맥이라니? 형은 산맥이라면 질색하잖아? 그리고 산맥이라는 개념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만든 이름 아냐?”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장감독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많다. 직업 탓이라고 한다. 항상 야외로 촬영을 많이 나가야 하는 까닭에 건강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다. 평소 마라톤을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장감독이 백두대간에 드는 이유
그런 장감독이 이번 백두대간 종주에 따라나서는 이유를 몇 가지 든다.
첫째, 체력이 더 약해지기 전에 말로만 듣던 백두대간을 직접 밟아보자는 거였다. 그러면서 백두대간을 생물(生物)로서 느끼고 싶다고 했다.
둘째, 백두대간에 대한 자료를 직접 모으기로 작정했단다. 사실 그는 백두대간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할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관련 서적이나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결국 준비 단계에서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산줄기가 어떤 것인지 직접 부딪쳐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셋째,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자 했단다. 나이 쉰 살을 넘기면서 누구도 대신 걸어주지 않는 험난한 그 길을 자신의 힘으로 걷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기회 말고도 그에게는 몇 번 대간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산악회를 따라서 가는 게 별로 내키지 않더란다. 아무래도 얻는 게 별로 없을 것 같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냥 들머리로 들어서 걷기만 하다가 날머리로 나오는 수준일 게 빤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이참에 그래도 대간에 대해 어느 정도 남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는 필자와 함께 걸으면서 대간이나 정맥 등에 관한 정보도 얻고 산을 보는 안목도 키우자는 생각이 들었단다. 나아가 왜 산맥이 아니고 산줄기여야 하느냐 하는 의문도 스스로 풀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형은 왜 백두대간을 걷는 거야? 뭐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처음에는 뭐 별생각이 있었겠냐? 그저 남들이 걸으니까 걸은 거지. 체력도 어느 정도 따라주고, 산길도 잘 찾아다닐 정도로 산을 보는 눈도 있고. 그리고 사실 남들한테 잘난 척 좀 하고 싶었던 것도 있지. 뭐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백두대간을 걷기 시작한 거였어. 그런데 걸으면서 산경표를 만나게 되었고 그것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나서는 뭔가에 홀리게 되었던 거 같아. 생각해 봐.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태백산맥이라는 게 실생활에 무슨 도움이 됐겠어? 아니 그런 복잡한 얘기보다 우리가 왜 산맥을 배워야 했느냐고? 걷다 보니까 그런 명제가 생기더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서 같이 한번 고생해 보자.”
장감독은 고개를 끄덕인다.
“산경표에서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라고 했어. 그 백두대간을 걸을 때 우리는 북진(北進)을 하기로 했으니 그 시작인 천왕봉으로 올라야겠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걷는 이 산길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 선조가 만들어 주신 산경표를 따라 걷는 거라는 점을 인식해야 돼. 그 천왕봉 아니 백두대간에 이르는 구간. 대간꾼들은 그 구간을 접속구간이라고 하지. 천왕봉으로 오를 수 있는 코스는 몇 군데 돼. 어느 방향으로 오르든지 상관없어. 우리는 북진하는 대간꾼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구간인 중산리~천왕봉 구간으로 오를 거야. 그러니 오늘은 그 구간을 오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담아보는 것으로 정리하자. 그리고 산맥은 고토 분지로가 만든 개념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 선조가 예전부터 쓰던 말이었어. 그것을 고토가 도용(盜用)한 거지. 맥(脈)이 뭐야? 맥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 것을 얘기하잖아. 그러니 산이 하나로 이어지는 거니까 산줄기이고 그걸 한자로 표기하면 산경(山經)이 되잖아. 그걸 우리 인체 구조에 빗대어 산맥(山脈)이라고 한 것이지.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그렇게 인식을 했던 거야. 산과 강 그리고 사람을 달리 생각한 게 아니고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던 거지. 그러니 우리 선조들은 산을 보면서 그것들이 이어지는 산줄기를 보았고, 그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보았던 거야. 그러고는 자신이 그 산줄기와 물줄기에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을 본 거지. 선조들은 산줄기나 물줄기를 인간과 달리 본 게 아니고 하나의 공동체로 본 거야. 어찌 보면 산맥이라는 개념은 우리 민족에게는 자연스럽고 친숙한 개념이었던 거지. 그걸 고토가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고. 우리의 산줄기는 곧 분수계(分水界)야. 분수령(分水嶺)이라고도 하지. 그러니 앞으로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의미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할 거야.”
산에 오르기 전부터 쏟아내는 잔소리지만 그래도 새로운 얘기니 장감독은 흥미 있게 경청해 준다.
“그리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두자. 앞으로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산맥≠산줄기’야. 그리고 ‘산줄기=분수계’이고. 하지만 1903년 이전 얘기를 할 때는 ‘산맥=산줄기=분수계’이고. 어쩌면 1988년경 이전에는 지리학자들 일부도 ‘산맥=산줄기’ 혹은 ‘산맥=분수계’로 봤었을지도 몰라.”
도선국사
“형, 그러면 그 산줄기 얘기가 어디에 처음 나와?”
“우리나라 산줄기 역사를 얘기할 때 반드시 나오는 인물이 신라시대 도선국사(827-898) 야. 도선은 아마 신라 왕족 출신이라는 것 같지? 그런데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전국을 떠돌며 만행(卍行)을 했다더군. 전남 광양 백계산에서 옥룡사를 열고 수행에 들어갔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잖아. 수행 끝에 만들어진 ‘도선비기’는 고려 창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 그런데 여기 중요한 얘기가 하나 있어. 나중 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도선의 에 우리나라 백두대간과 관련한 얘기가 나온다는 거야. 바로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 하는 대목이 바로 그거야. 옥룡기의 이 대목은 고려시대에는 우필흥(생몰 미상)이, 조선시대에는 이유원(1814-1888)이 각 인용하기도 했지. 그걸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산줄기 즉 백두대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첫 기록’으로 보는 거야. 고려사에 나오는 대목이지. 즉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는 정립되지 않았지만 그 산줄기에 대한 인식은 있었다는 얘기야. 나는 이를 태백산 즉 백두산과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결합에서 찾기도 해.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백두대간을 알기 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그걸 조선산맥이라고 불렀지.”
“아! 1903년 이전의 산맥 체계!”
산맥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줄기 인식 체계
그렇다. 산맥은 이미 우리 선조들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산줄기 인식 체계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고 있던 ‘산줄기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정립된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이름은 산맥 개념보다 훨씬 후에 생긴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산맥이라는 큰 틀 안에 백두대간이니 한북정맥이니 하는 산줄기 개념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산맥과 대간, 정간, 정맥 등은 서로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산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의 산줄기를 ‘조선산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리교과서에서 배웠던 산맥(山脈), 이른바 ‘교과서 산맥’은 우리 조상들이 쓰던 ‘산맥’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우리나라 전통적 산줄기 개념으로서의 산맥. 그리고 ‘지질구조선’의 다른 이름인 이른바 ‘교과서 산맥’. 이 둘이 ‘산맥(山脈)’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사용되면서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1903년부터 1980년까지의 기간이다. 이는 1903년 고토 분지로가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 일제강점기 식민 교육을 거쳐 1980년 이우형 선생이 서울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산경표》라는 책을 발견하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교과서 산맥’이 진짜 우리나라의 산줄기인 줄로 알았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그들은 허울 좋은 서양지리학을 들여오면서 우리의 백두대간을 참절(斬截)한다.
말이 나왔으니 산맥에 관한 우리 선조들의 기록을 조금 더 살펴보자.
퇴계 이황(1501-1570)은 퇴계집에서 “방장산은 지리산인데… (중략) …백두산맥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수광(1563-1628)은 1614년 탈고한 지봉유설에 비슷한 글을 썼다. 즉 “남사고(1509- 1571)는 항상 말하기를 백두산맥은 이곳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1736-1806)도 같은 말을 하였다. 곧 “남사고가 말하기를 백두산맥이 동쪽의 대해로 들어가 일본이 되고 남쪽으로 들어가 탐라가 되었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것들에 비추어 봐도 ‘산맥’이란 개념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던 용어였다.
한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재종조부가 되는 성호 이익(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 ‘천지문’편에서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라고 못을 박는다. 그러고는 전편에 걸쳐 ‘산맥’이란 용어를 무수히 사용한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풍수, 천문과 지리에 관한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이중환의 택리지, 신경준의 산수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산맥과 대간의 주종관계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과학자이자 실학자인 홍대용(1731-1783)은 담헌서(湛軒書)에서 ‘산맥지대간(山脈之大幹)’이라고 하여 대간은 산맥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지리산 천왕봉
백두대간의 시작은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 1915m)이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은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 등이라고도 했다. 이들 중 두류산(頭流山)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해석해 보면 ‘백두산(頭)에서 흘러(流)내린 산’이라는 뜻이다. 즉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이음이라는 인식이 고스란히 이 두류산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지리산에 대해서는 “이 산을 타다보면 지루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억지 얘기도 가끔은 등장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는 의미다. 곧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둠’의 형태였던 것이다. 이 ‘두르〉두류’로 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는 ‘두르 〉드르 〉드리 〉디리 〉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가져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이 되었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 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지리산의 최고봉이자 백두대간의 끝인 천왕봉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는 아무래도 산청군 시천면의 중산리에서 오르는 길이다.
백무동에서 시작하는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루트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장터목~천왕봉 구간이 중복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또한 멋지게 도토리봉에서 시작하여 지리동부능선을 거쳐 하봉~중봉으로 오르는 루트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구간의 대부분이 비탐방구간이다. 어쩔 수 없이 중산리~천왕봉 루트다. 그 중산리로 가려면 거리상으로는 하동이 가깝다. 하지만 교통편으로 따진다면야 진주가 으뜸이다. 진주에서 하루 12회 정도 운행하는 직행 버스를 타고 시천면으로 들어서면 이내 중산리 터미널에 도착한다. 최근에는 금요일과 토요일 심야 시간에 서울 남부터미널~중산리를 운행하는 버스가 생겼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입산통제소를 지나 중산리 사하촌 식당가에 들어서면 좌측 관광버스 주차장으로 오르는 길옆에 남명 조식 선생의 시조 ‘두류산가(頭流山歌)’가 새겨진 지리산국립공원 표석이 산객들을 맞이한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세속과 부처님 나라의 경계인 법계교(法界橋)를 건너면서부터 이제는 속세를 벗어나 선계로 들어선다. 직진하는 순두류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흘러가는 풍부한 수량의 시천천을 보면서 좌측의 통천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계곡을 따른다. 칼바위를 지나면 이색적인 현수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직진하면 장터목으로도 진행할 수 있는 삼거리다(지도상 ‘가’의 곳).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바위 계단들이 나오면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땀을 좀 내면 바로 망바위다.
우측으로 세존봉(1368m)의 문창대가 ‘지리10대(臺)’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며 오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지리10대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도발이 좀 먹힌다는 수도처다. 대부분 수려한 암벽이 있고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소리만 들리던 선계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다음날 일찍 천왕봉의 일출을 보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산객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고 있는 로타리대피소(지도상 ‘나’의 곳)다.
1978년 10월 26일 남명 조식 선생의 13대손인 조재영은 부산로타리클럽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대피소 문을 열고는 ‘로타리산장’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민간인이 운영하던 것이 2000년 7월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 기부채납 되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지금의 ‘로타리대피소’가 되었다.
로타리대피소를 지나 석간수로 목을 축이면 법계사 일주문이 근엄하게 정면으로 보인다. 544년에 창건한 법계사는 우리나라 사찰로서는 최고지(最高地)인 해발 1400m에 위치한 절집이다. 새벽에 오를 경우 어두운 고요함 속에서 은은하게 새벽 예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등로는 법계사 왼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오후 2시 이후에 올라가는 등산객들은 입장이 통제된다. ‘국립공원 내 야간통행금지 규칙’ 때문이다. 그래서 2시 이후에 이곳을 지나려면 장터목대피소 예약 접수증을 제시해야 한다. 동절기에는 오후 6시, 하절기에는 오후 7시까지 장터목 대피소에 입실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대피소는 ‘비상시에 대피하도록 설치해놓은 곳’이다. 그런 사전적 의미를 따져볼 때 과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 대피소가 비상시에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어쨌든 공단에서는 산행에 제한 시간을 두었다. 기본적으로 일몰 후부터 일출 2시간 전까지 공원 입장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문창대 논란
그런데 이 문창대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1373.9봉이 아닌 망바위 바로 위로 표기되어 관심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1978년 10월 26일 로타리 산장(지금의 로타리 대피소) 기공식에 앞서 이 산장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남명의 13대손 조재영은 진주산악회와 함께 기존 문창대에 대해 다른 곳을 문창대(기존 문창대에 대하여 ‘신문창대’라 함)라고 제시한다. 즉 ‘진양지 2권’의 내용 즉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해석해 보면 (법계사)절 서쪽 수십 보 거리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이다.’를 첫째 근거로 든다. 이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방향으로 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나오는 좌측의 너럭바위를 얘기한다. 그러고는 두 번째의 근거로 그 바위 아래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를이 신문창대는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문창대를 처음 알린 이는 바로 진양지를 발간한 부사 성여신이다. 그의 칠언고시 형태로 쓴 ‘유두류산시’를 보면,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고 문창대를 그렸다.
유석이 축융봉 아래에는 옛부터 상봉사(上封寺)가 있었으니, 천왕봉 앞에 어찌 벽계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일찍이 서로 왕래하던 승려 선응(禪應)과 함께 도모하여 세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붕을 나무기와로 얹고, 판자로 벽을 막아 창을 내놓으니, 방이 한 몸 누이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만 가진 것 없는 승려들이라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오는 사람이 반드시 식량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만 하였다.
암자의 맞은편에는 이른바 문창대(文昌臺)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석굴 속으로 기어서 몇 십 길을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이렇듯 문창대는 법계사 동쪽에 있는 봉우리 즉 세존봉에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였으니 법계사에서 바라본 문창대의 모습과 같다. 반면 신문창대는 사실 ①위와 같이 성여신의 표현대로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②대臺의 외형을 갖추지 못한 점 가령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도 아니며. ③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 주변에는 日出峰. 혹은 陸象山 등 조잡한 각자들이 많이 새겨 있어 이 각자 역시 이들 중 하나로 여겨지며, ④이 각자의 제작 연대 또한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문창대는 그저 각자가 되어 있는 바위 정도로만 인식되어도 무난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인들의 산행기에 원 문창대가 지금의 장소와 너무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구 문창대’를 ‘원 문창대’로 보게 하는 이유이다.
또 올라가자. 개천문(開天門) 바위를 통과할 때쯤이면 계절과 상관없이 온몸은 땀투성이가 된다. 좌측 천왕봉 바로 아래 직벽에는 천왕샘(지도상 ‘다’의 곳)이 있다. 석간수인 이 샘의 물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이 옆의 안내문에는 이 샘이 남강의 발원지란다. 거짓말이다!
“거짓말? 여기가 남강의 발원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남강의 발원지가 어디야?”
국립공원 안의 안내판을 잘못 써놓았다니 장감독은 자못 놀란 표정이다.
“남강 들어봤지? 진주 남강.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 로구스케를 안고 떨어져 죽었다는… 그 남강의 발원지가 여기가 아니라는 말이지.”
“무슨 말이야? 여기에는 이렇게 써놨는데!”
하긴 어디든 안내판에 씌어져 있는 글을 보면 그 내용을 신뢰하게 마련이다. 산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의외로 엉터리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남강의 발원지
그렇다. 그럼 남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산경도(山經圖)를 보자. 백두산을 떠난 백두대간은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속리산을 지나 약 1528.7km 지점에 이르러 남덕유산(1507.3m)을 만난다. 대간은 거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육십령으로 향하면서 좌측으로 산줄기 하나를 내어놓는다. 그러면 대간과 그 줄기 사이에 물줄기 하나가 생기게 되는데 이게 바로 남강이다.
여기에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이 적용된다. 하나의 산줄기(A)에서 다른 하나의 산줄기(a)가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반드시 물줄기(b)가 하나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산줄기(a)는 이 물줄기(b)와 백두대간에서 나온 강, 이른바 10대 강 혹은 이 물줄기보다 더 큰 물줄기(B)와의 합수점에서 반드시 그 맥을 다하게 된다.
즉, 남덕유산이 남강의 시원(始原) 곧 발원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지 줄기는 대한산경표에 의하면 남강지맥이라는 도상 거리 약 139.3km의 산줄기가 된다.
“형,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대한산경표는 뭐고 남강지맥은 또 뭐야? 그리고 산경도는 또 뭐고? 산자분수령? 합수점? 가지 줄기? 갑자기 형 무슨 얘기를 그렇게 어렵게 하는 거야?”
장감독은 용어의 혼란이 오는가 보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산에 가면 그냥 산이면 되는데 갑자기 생소한 단어를 한꺼번에 쏟아내니 혼란스러운 것 같다. 하긴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지리 시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용어들이니까.
“그래 하나씩 보자. 우선 산경도는 말 그대로 산줄기 지도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어. 지금은 그냥 슬쩍 넘어가듯이 보기만 하면 돼. 앞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얘기니까. 우선 이 지도를 잠깐 봐.”
필자는 장감독이 알아듣게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우리나라 산경도는 백두산에서 나온 백두대간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큰 줄기(굵은 선)로 뻗어있고 그 옆으로 정맥이라는 조금 더 가는 줄기들이 나와 있지? 이번에는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 그러고 백두산을 나무의 밑동이라고 보자. 그러면 백두대간이 나무의 큰 줄기처럼 보이지? 거기서 옆으로 무수히 가지를 치는 작은 줄기들. 이 산경도에서는 그 작은 가지를 정맥이라고 부른 거야. 그러니까 가지 줄기니 뭐니 하는 얘기들은 우리나라의 산줄기들을 나무에 빗대어 본 거야. 그래서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를 나무 수(樹)를 써서 수체계이론(樹體系理論)이라고도 하는 거지.”
말이 길어지고 자신에게는 처음 듣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장감독은 조금 헷갈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장감독이 벌써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을 터이니 별 부담은 없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Ridgeline is genuine in that it never crosses water
“그리고 ‘산줄기’와 ‘물줄기’를 보자. 아까 한 얘기를 반복해서 얘기할게.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봐. 하나의 산줄기(A)에서 다른 산줄기(a)가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분명 물줄기(b)가 나오고 그건 분명 계곡을 형성하게 돼. 크든지 작든지 말이야. 그렇지 않아? 산줄기가 분수령이 되는 건 확실하고 그 산줄기에서 내려온 물들은 다 계곡으로 모이잖아? 그 개울이 모여서 천(川)이 되고 그 천이 모여 조금 더 큰 천이 되고, 그러고는 그게 모여서 다시 강(江)이 되고, 그 강이 모여 바다로 흘러가고…. 이게 자연의 이치 아니겠어?”
“그건 알지. 그런데 합수점이라는 건 또 뭐야? 그건 산줄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고?”
“합수점(合水點)은 말 그대로 물이 모이는 지점이지. 양수리에 가면 ‘두물머리’가 있지? 합수점의 우리말이 두물머리야. 그러니까 한 개의 물줄기, 가령 남한강과 다른 하나의 물줄기인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 두물머리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두물머리가 무수히 많은 셈이지. 그 두물머리를 한자로 쓰면 합수점 혹은 합수머리이고.”
필자가 두물머리 얘기를 꺼내니 자전거를 타는 장감독은 귀가 번쩍 열리는 것 같다.
“양수리. 나도 잘 알지. 자전거 타고 가봤던 곳이니까. 그런데 그 합수점이 산줄기와 무슨 상관이야?”
“그럴 줄 알았다.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야. 조금 전 얘기했지. 이 합수점은 산줄기를 얘기할 때 아주 중요한 개념이야.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산경표라는 책은 이 ‘합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론이야. 그 핵심은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고.”
“정말 머리 아프게 만드네. 산자분수령은 또 뭐야!”
장감독이 짜증을 낼 만도 하다. 사실 천왕봉에 아직 오르지도 못했다. 즉 대간길에 한 발도 내딛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슨 복잡한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가 하는 불평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간단하게 산자분수령을 보자. 앞으로 계속 나올 얘기니까 미리 간 좀 보자는 거야. 지도 좌측을 보면 가장 굵은 선이 백두대간이야. 그리고 좌측 위로 남덕유산이 보이지? 감색글씨로 남강기맥도 보이고. 이게 백두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가지를 쳤다는 걸 보여주는 산경도야. 앞으로 자주 얘기할 거지만 우리나라 산줄기에는 반드시 계급이 존재해. 위계질서가 명백하다는 것이지. 같은 급이라도 서열이 있게 마련이고. 즉 군대에서 병장이라고 다 같은 병장이 아니잖아? 이게 아주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보여주게 돼. 그러니까 그 계급 개념의 한 가지인 기맥(岐脈)이니 지맥(枝脈)이니 하는 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자. 우선 백두대간(A)에서 남강기맥(a)이 가지를 쳤다는 것만 기억해. 자, 보라고. 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갈리는 그 사이로 남강(b)이 흘러나오지? 아까 얘기했잖아. 한 가지에서 다른 한 가지를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물줄기가 하나 흐르게 된다고. 바로 그 원리야.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이를 영어로 쓰면 ‘Ridgeline is genuine in that it never crosses water’ 정도가 되겠지. 이따 자세히 볼 거니까 우선 개념만 알아둬.”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법적인 해석은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고 해석하자. 이를 ‘산자분수령의 제1법칙’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自’를 스스로란 부사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못하니까 물을 만나면 그 산줄기는 맥을 다하게 된다. 그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합수점도 그냥 합수점이 아닌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일단 여기까지만 보자. 그리고 이 공식에 남강기맥을 대입해보자. 백두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갈리는 곳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강이다(산자분수령의 제1법칙).
그러면 이 남강지맥은 어디서 맥을 다해야 하는가? 그렇다. 남강보다 한 등급 위인 강과의 합수점에서다. 그 강이 어느 강인가? 바로 낙동강이다.
그러니까 이 남강지맥은 어디서 그 맥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이미 나왔다.
당연히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에서 끝나야 한다(산자분수령의 제2법칙). 그곳이 바로 합수점이다.
위 산경도의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의 쌍절각 부근이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이고 이곳에서 남강기맥은 그 맥을 다한다.
고로 우리가 남강지맥을 산행코스로 잡아 걷는다면 남덕유산에서 시작하여 금원산~기백산~황매산~한우산을 거쳐 쌍절각이 있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까지의 도상 거리 약 139.3km의 능선을 걷게 되는데 이를 한 번에 걷기가 힘드니까 각자 혹은 각 팀의 산행능력에 따라 6~10구간으로 나눠 종주하게 되는 것이다.
천왕봉 정상석, 성모상
다시 지리산이다. 천왕샘을 지나면 바로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힘겹게 올라가면 남한 최고봉이자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끝나는 천왕봉이다. 이 천왕봉 정상석에서 낯익은 글귀가 보인다. “韓國人의 기상 여기서 發源되다.” 천왕봉 정상석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 모델 넘버원일 것이다. 이 정상석은 이 지역에 지역구를 가지고 있었던 한 국회의원의 작품이다. 원래는 ‘영남인’이었던 것을 ‘경남인’으로 고쳤다가 다시 ‘한국인’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천왕봉에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왜구와 광신도 때문에 사라진 성모상이 그것이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성모상은 천왕봉을 지키다 14세기 말에 왜구에 의해 훼손당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복원해 놓았는데 1970년대 몰지각한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또 훼손했다. 그것을 천왕사 주지 혜범이 어렵사리 찾아서 현재는 이 성모상을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역사에 해박한 장감독이 거든다.
“응, 나도 들어봤어. 14세기 말에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연관된 얘기지. 그 전쟁이 화포를 이용한 해전으로서는 세계 최초였다고 하잖아. 서양의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이나 앞섰고.”
“인물로는 천왕봉의 이 성모상과 고토 분지로, 최무선, 이성계 등과 연관 짓고,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진포대첩, 황산대첩을 연결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형, 근데 진포대첩이나 황산대첩 때 왜구 잔당들이 여기까지 와서 성모석상의 목을 쳤다는 건 무슨 얘기야?”
“그게 참 재미있어. 나중에 해당되는 대목에서 또 얘기하자. 성모상 얘기는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보면 자세히 나와. 나아가 후세 사람들이 목을 다시 붙여놓았다는 얘기도 있고.”
장감독은 조금 의아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그 성모는 누구야?”
“기록에 의하면 15세기경에 이 천왕봉에는 성모묘(聖母廟)라고 하여 세 칸짜리 작은 사당이 있었어. 거기에 이 성모석상이 모셔져 있었고. 여기서 맑은 날을 보지 못할 경우 이 석상에 기도를 하면 날이 갠다고 했대. 속설에 이 성모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고 하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고 나와 있고.”
삼대가 덕을 쌓았어야 맑은 날을 볼 수 있다는 천왕봉. 방장산인(方丈山人) 남명 조식은 이 천왕봉에서 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萬古天王峰 만고불변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자신은 울지 않는다네
도상 거리 700km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단 한 번에 진행하는 방법은 없다. 체력에 따라서, 산행하는 이들의 형편과 능력에 따라서 누구는 열 번에, 어느 팀은 36회에, 또 누구는 62회에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개인이건 팀이건 들머리와 날머리는 최대한 접속구간을 짧게 하기 위해 고개를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도 그렇게 진행한다.
한편 백두대간 종주를 하려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이곳 천왕봉에서 종주산행을 마치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래서 편법을 사용했다. 지금은 남쪽 대간줄기만 진행하지만 통일된 후에 계속 이어가야 하는 줄기이기에 우선은 북진을 하자! 대간꾼들은 이렇게 서원(誓願)을 세운다.
여기서 주위를 조망한다. 동쪽으로는 중봉, 하봉을 거쳐 왕등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른바 덕천지맥이다. 산경표가 알려지기 전에는 ‘지리동부능선’이라고 불렸고, 신산경표에서는 웅석지맥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하봉을 지나 쑥밭재 옆 독(甕) 모양을 한 바위봉 옆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빨치산 루트다. 마천면 추성리에 본부를 둔 빨치산들이 작전을 펼치던 곳 중의 하나다. 이 구간을 ‘J3 클럽’ 방장 배병만 같은 이는 ‘지리서부능선’과 이 구간을 이어 태극문양에 맞게 어느 정도 변형하여 ‘지리태극종주’코스로 확정하기도 했다.
북쪽으로 남덕유산이 활처럼 보인다. 그 남덕유산을 시작으로 대간의 이어짐을 볼 수 있다. 그 우측으로는 남강기맥이 북동쪽으로 흘러가는 모습도 보인다. 서쪽을 향한다. 날씨가 좋으면 좌측으로 왕시루봉과 가운데 노고단 그리고 그 우측으로 둥그스름한 반야봉을 볼 수 있다.
이따가 영신봉을 지나면서 자세히 보겠지만 백두대간이 ‘반드시’ 산자분수령에 충실한 산줄기는 아니다. 산경표는 이름 자체가 그러하듯 선조들은 백두대간을 백두산과 두류산, 즉 지리산을 잇는 큰 산줄기로 봤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운 좋게도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그 축의 북쪽 끝에는 백두산이라는 나라의 최고봉이 있었고, 남쪽에는 지리산이라는 남쪽의 최고봉이 교묘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 작명을 하는 방법도 멋지다. 백두대간을 백두산에서 따온 말인지 백두산과 두류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인지 그것도 애매하다. 두류산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도, 그 이름이 ‘두르’에서 ‘두류’를 거쳐 ‘지리’가 된 것도 교묘하긴 마찬가지다.
어쨌든 백두대간은 그것을 연결하는 선에 불과하지만 신비롭기만 하다. 신이 내린 이 조화를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 조석필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공부하기 1-1 (0) | 2023.09.17 |
---|---|
한마음 산악회 백두대간 출정식을 앞두고...... (0) | 2023.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