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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한마음 백두대간

백두대간 제4구간 (여원재 ~ 복성이재) 20.8km

오늘의 주제主題인 고남산

 

'시작은 반이다.'라고 했던가요?

그런데 아직 반은커녕 이제 겨우 세 번째라니.....

'꼭 진부령을 밟고야 말겠다!'라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대원들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격려와 FM 식 리딩 정도입니다.

그런 대원들과 함께 오늘도 만차로 대림동을 출발합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03시가 아직 안 됐군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10. 14.

보름을 하루 앞둔 날의 새벽달이건만 온누리를 너무도 환하게 비추니 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03:15

오늘 진행은 성삼재에서 시작하여 이 여원재까지 진행을 하여야 하나 지리산 성삼재 ~ 정령치 구간이 산방기간에 걸려 있어 부득이 그 구간을 점프하니 오늘은 자연스럽게 여원재에서 시작하여 복성이재 구간까지입니다. 

정령치를 지나면서 지리산 국립공원 관할 구간을 지나게 되고 그러고는 이내 고기 3거리나 이 여원재를 지나게 되니 이 정도면 지리산 구간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리산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 남강에 합류되기 이전인 주촌천, 람천, 임천 등의 흐름을 볼 수 있는 한 아직도 여전히 이들 구간은 지리산의 그늘 아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예로부터 이 여원재는 운봉과 남원의 경계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 경계는 바로 우리가 걷는 이 백두대간에서 비롯 됩니다.

즉 두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에 이 백두대간이 우뚝 서 있기에 두 지역 사이에는 문화적인 이질적 요소가 존재함은 물론 인문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그중 한 예로 모내기하는 시기가 운봉지역이 남원보다 한 달 정도나 앞선다고 하는데 운봉이 남원에 비해 해발 400m가 다 높은 곳에 위치하니 이는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운봉 고원이라 부릅니다.

박봉양 토벌비

 

이런  고도의 차이가 역사적으로는 몇 개의 사건을 만들게 됩니다.

그 주요한 예로 우선 1894년 탐관오리들의 부패에 항거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들 수 있습니다.

동학은 지금의 천도교의 전신인데 이 고도의 차이 때문에 당시 농민군이 방아산성 전투에서 패배의 쓰라림을 맛볼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 이는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서로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는 텐진조약을 어겼다고 하여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으니 모든 게 다 연쇄적으로 연결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 여원재 말고도 남원과 운봉을 잇게 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고개로 갓바라재(笠望峙)와 구룡령이 있는데 이는 다음에 그 구간을 지나면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어쨌든 여원재女院岾라는 이름이 보여주는 이곳에는 예전에 주막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얘기에 앞서 잠시 무대를 진포 그러니까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으로 잠시 옮겨 보겠습니다.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백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으며,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를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한편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백 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했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백 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했다.

진포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또 왜구를 상대한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이기도 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90쪽 주석

 

그런데 위 전투에서 대패를 한 왜구 잔당들은 내륙으로 쫓겨 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거나 곡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그 피해가 적지 않게 됩니다.

관군의 추격을 받는 이들은 아지발도를 대장으로 하여 함양 팔량재를 넘어 인월을 거쳐 운봉까지 들어와 호시탐탐 남원을 엿보고 있을 때 고려 우왕 정권은 이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급파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구들이 이 부근에 주둔할 때 왜군 장수 한 명이 여원재의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시다가 주모의 가슴을 만지는 성추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그 주모는 그 왜군 장수가 만진 자기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죽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계를 비롯한 고려군이 들어와 이 부근에 Chief Post를 구축하고는 뱀사골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들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밤 홀연히 백발을 한 여인이 꿈에 나타나 이성계에게 일본군을 물리칠 계략을 일러주게 됩니다.

이를 반신반의했지만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작전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여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으로 이성계는 이 여인 즉 주모에 대한 고마움을 기려 사당을 지었고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연유해 이 고개를 여원재女院岾라 부르는 것입니다.

 

대첩大捷의 사전적인 의미는 '크게 이김'입니다.

학자들은 우리 역사상 3대 대첩이라 하면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 그리고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을 꼽습니다.

그리고 좀 더 세분하여 고려시대에 와서는 4대 대첩이라고 한다면 강감찬의 귀주대첩, 최무선의 진포대첩, 최영의 홍산대첩 그리고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꼽는데 1381년의 운봉의 황산에서 있었던 황산대첩과 이 여원재가 또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이성계가 전투에 나서기 전 고남산에 올라 천지신명께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황산대첩을 이끌게 되는데 이 전투의 승리로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 즉 조선을 개국하는 초석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는 이따 고남산에 올라가서 다시 보기로 하죠.

 

지도 #1

 

자,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여원재를 출발하여 계단을 올라서는데 우측의 견사에서 개들이 짖어댑니다.

 

편하게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대간길로 접속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오리지널 대간길을 고집합니다.

등로는  비교적 완만합니다.

다음 구간에 진행 할 주지봉

 

낮이었다면 가끔씩 조망이 터지는 곳에서 주변을 살펴볼 기회도 있건만 지금과 같은 환경이라면 무조건 묵묵히 걷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벌써 방아산성 갈림길입니다.

아까 얘기했죠?

고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혁명군이 민보군에게 대패한 전투!

즉 동학농민혁명 당시 혁명군이 민보군에 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전투가 바로 이 방아산성 전투였습니다.

 

농민군이 대패를 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박봉양은 영남지방에서 막강한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를 운봉고원이라는 지형에서 찾고 싶다. 즉 방아산성은 마한이나 백제 때 운봉지역이 고원지대라는 걸 염두에 두고 조성한 석성이다. 그런데 이 석성은 운봉 쪽에서 보자면 그저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이백이나 산동에서 보자면 640m나 되는 상당한 고봉이다. 그러니 그 우측의 고남산이 846.8m이고 보면 운봉을 치고 인월을 지나 산청으로 진격을 하자면 어차피 여원재477m가 아닌 방아치가 유격전술에 용이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유복만, 남응삼이 이끄는 농민군은 해발 640m의 거친 서쪽 사면을 치고 올라가야 하지만 민보군은 100m 정도만 오르면 되며 더욱이 부근에 산재해 있는 직경 30cm 정도의 돌을 굴려 공격을 하니 농민군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투가 되고 말았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72쪽 주석

 

예전에는 남원군의 무심함으로 방아산성 가는 길은 잡목 때문에 그 진행이 어려웠었습니다.

저의 원성 때문이었나요?

지금은 이렇게 이정목은 물론 오르는 길도 예전보다는 한층 수월하게 오를 수 있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동학혁명 관련 안내판이 있는 방아치를 지납니다.

 

05:05

계단을 오르니 이내 고남산입니다.

너무 이릅니다.

 

이 고남산에서 볼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고남산은 어쩌면 조선 개국의 서막을 연 곳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공원에서 우회전하여 람천 제방 길을 따라 걷는다. 그 람천 뒤로 고남산846.4m이 한결 가까워졌다. 1380. 9. 진포대첩으로 퇴로를 잃은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 우왕의 명을 받은 태조 이성계가 저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재계를 하고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고남산은 태조봉으로도 불린다. 문헌에는 적산赤山, 고조봉高租奉, 제왕봉帝王峰, 일광산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정상에는 KT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는 석축으로 쌓은 3층 천제단이 있는데 황산대첩 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올라 전승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74쪽

 

우선 적산赤山이라는 근거를 찾아볼까요?

운봉의 옛 지도나,

1872년 고지도,

그리고 김정호의 동여도를 보면 지금의 고남산이 적산 赤山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극우 성향의 어떤 이들은 赤과 관련하여 지리산 빨치산과 연관 지으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지도 제작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허무맹랑한 얘기죠.

 

즉 이는 국어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적산의 赤은 '박, 밭, 불' 등의 뜻을 가진 지명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바뀐 이름입니다.

그러니 원래는 '아래 아'를 써서 'ㅂ.ㄺ산' 즉 산악숭배사상의 소산인 '신성한 산'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황산전투를 앞두고 이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을 하고 제를 올렸던 것이죠.

그러니 적산赤山인 이 고남산을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기리며 태조봉, 고조봉高租奉, 제왕봉帝王峰, 일광산日光山 등으로 불렀다는 것이죠.

 

예전 사진을 가져와 주변을 살펴봅니다.

 

우선 서쪽을 보면 요천이 흐르고 그 뒤 산줄기를 따라 뾰족한 천황산910m이 보입니다.

금남호남정맥의 저 팔공산1149m에서 분기한 저 산줄기는 개동산, 천황산을 거쳐 매봉, 고리봉을 지나 요천이 섬진강에 합수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59.5km의 요천지맥이 됩니다.

바로 앞 소류지 좌측이 부동마을로 동학농민군이 배수진을 쳤던 곳입니다.

 

좌측으로 눈을 돌려 남원 시가지를 봅니다.

중앙에 기선 모양의 남원의 진산 교룡산이 보이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산줄기가 위에서 얘기한 요천지맥蓼川枝脈입니다.

 

운봉읍 뒤로 지리의 서북능선입니다.

능선 중앙 뒤로 지리의 반야봉이 둥그스름하게 솟아 있고 그 좌측에 뾰족하게 솟은 것이 묘봉妙峰.

서북능선 우측이 다음 구간 때 올라서 일출을 조망할 만복대입니다.

 

다음에 진행할 백두대간을 봅니다.

맨 뒷라인을 보면 우측의 두 봉우리가 함양의 대봉산의 괘관산1261.7m과 천왕봉1229.6m이고, 그 좌측이 백두대간이 지나는 백운산1278.9m과 서래봉1075.7m입니다.

 

지리산을 봅니다.

좌측 1이 백두대간의 봉화산에서 분기한 임천지맥의 맹주 삼봉산1186.7m, 그 앞 2가 투구봉 1032.5m, 그 앞 낮은 봉우리인 3이 바로 이성계가 왜적 아지발도를 격파한 황산전투의 바로 그 황산698.7m입니다.

그리고 그 우측의 4가 지리북부능선의 삼정산 그리고 그 우측의 앞줄이 지리서북능선 라인인데 5가 덕두산 우측의 6이 바래봉입니다.

이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 그 뒷라인의 8 천왕봉, 9 중봉, 10 제석봉, 11 촛대봉, 12 영신봉, 13 칠선봉, 14 형제(부자)봉, 15 묘봉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남산 KT 기지국을 보면 그 뒤로 확연하게 삼봉산과 투구봉 그리고 황산을 찾으실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보기에는 황산 뒤의 낮은 곳이 바로 팔량재로 여기도 할 얘기가 상당히 많은 곳입니다.

어쨌든 그 좌측 라인이 임천지맥으로 오봉산이 그 좌측의 연비산으로 이어집니다.

 

좌측 아래로 혁명군이 주둔했던 부동마을이 보이고....

 

요천지맥을 파노라마로 그림을 남겨봅니다.

 

이번에는 지리산......

 

올라온 곳을 봅니다.

라인을 따라 멀리 1이 만복대, 2가 수정봉, 3이 주지봉으로 다음 구간에 걸을 곳이고, 4가 우리가 들르지는 않았지만 이정목으로 본 방아산, 5가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여원재입니다.

 

고남산 정상석을 보고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야경이더라도 삼봉산과 투구봉 그리고 황산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측의 연비산이나 우측의 삼정산도 볼 수 있죠?

공부를 한 덕입니다.

임도와 등로를 번갈아 오고 가며 매요마을로 향합니다.

저와 같이 선두에서 진행하신 분들은 백두대간 공부를 아주 착실히 하면서 걸으십니다. 

아직 초보인 우리 한마음 대원들에게 백두대간의 의의에 대해서 설명해 주긴 아직 이릅니다.

백두대간을 몇 번씩 한 사람들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별로 못 만났으니까....

여하튼 예습하는 의미에서 잠깐 잔소리 한마디 하기로 합니다.

 

지도 #2

그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매요마을 입구에 있는 이 나주임씨 묘소입니다.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가져왔습니다.

 

1. 올바른 대간길을 꼭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첫 번째가 매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소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요 교회

 

매요 교회는 행정구역상 남원시 운봉읍 매요리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며 이 매요리의 매요마을 뒷동네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도계, 시계, 군계, 역할을 하는 이 백두대간이 이곳에서는 남원시와 장수군의 경계가 되는 시계市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지도 #1에서 보듯 우리는 편하게 도로를 따라 걸어 남원시와 장수군과의 경계가 되는 대간길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죠.

곧 지도에서 구분하는 보라색깔의 시계를 따라 걷지 않아 508.1봉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죠.

지도 #1

 

 

그런데 사실 이 매요 교회 뒤로 가면,

 

포도밭이 있고 민가가 대간 길에 가로놓여 있어 그 집 좌우로 이동을 하려 하면 잡목과 포도밭이 길을 막습니다. 

즉 매요교회 뒤로 넘어가 지도 #1의 '가'에 접속하면 이렇게 민가가 가로막고 있어 대간꾼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어쨌든 4륜구동의 엔진을 가진 대간꾼들은 그걸 헤치고 진행하여,

 

508.1봉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는 알만한 사람들이나 산악회의 표지띠도 보이고 그다음부터는 ,

 

수월하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나주 임씨 묘 앞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매요마을을 지나자마자 우틀하여 만나는 지도 #1의 '나'인 것이죠.

올바른 대간길을 따라가느냐 하는 것은 그러면 백두대간 길로 갈래? 아니면 신백두대간 길? 원백두대간 길? 등 여러 가지 논의를 낳습니다.

어느 길로 가느냐는 각자의 몫이라는 얘기죠.

하지만 백두대간을 걷는 의의를 놓고 보자면 최소한 이런 길이 있다는 것쯤은 인식하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매요마을 회관 앞의 마을 어른들 쉼터에 들어가 조금은 추위를 막으며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냥 간단하게 빵쪼가리 하나 먹고 가면 될 것을 진수성찬이 차려지니.....

사당동 동해수산 노사장님은 그 무거운 걸 지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 잘 먹었습니다.

김치도 잘 얻어 먹고.....

곁들인 막걸리 잘 마셨습니다.

 

한 시간 정도 아침을 먹고 일어납니다.

어느덧 날을 다 밝았고....

매요 교회를 지납니다.

원래 백두대간길을 걸었다면 이 뒤에서 걸어 나왔어야 했다는 것이죠.

 

일출 조망?

지도 #3

 

유치 3거리를 지납니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안내석.

 

여기서 좌틀하여 사치재로 향합니다..

 

부드러운 대간길.

 

대단한 기량들.....

 

이 부근은 비산비야非山非野입니다.

 

황산.

 

08:40

그러고는 사치재입니다.

 

고도를 낮춰 모래재, 사치재(砂峙岾)라고도 불리는 사현(砂峴)을 지난다. 예전에는 토끼굴로 지나야 했던 88고속도로를 이제는 터널 위로 지날 수 있게 되었다. 생태계 복원작업 덕분이다.

“산길에 웬 모래? 모래가 많이 나서 모래재인가? 옛날에도 이 섬진강에서 모래 채취 작업을 했나?”

“모래 사(砂)자를 쓰긴 했지만 이것도 역시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사(砂)를 동원한 것에 불과해. 이것도 ‘몰’이 ‘뫼’의 전 단계 형태였고 ‘모래재’는 ‘몰+애+재’의 형태로 보는 게 맞아. 여기서 ‘애’는 조사 ‘의’ 일 것이니 결국 모래재는 ‘산에 있는 고개’라는 단순한 뜻을 가진 단어에 불과한 거야.”

 

- 전게서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00쪽

 

 

88고속도로.

 

대단하신 고문님.

 

주금자님.

 

다들 힘듦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행복해하시니 다행입니다.

 

왕언니들....

 

오늘 날씨가 그나마 따뜻하니 핫팩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좌측이 연비산 그 우측 오봉산......

 

자, 어서어서 모이세요.

 

한 컷 찰칵.

 

이제 반은 왔으니 오늘 구간은 너무 빨리 끝날 거 같습니다.

복성이재를 향하여

 

오늘의 주제主題인 고남산.

조망이 터지기만 하면 계속 주시합니다.

산줄기는 자꾸 뒤를 돌아봐 온 길을 확인하면서 자기의 현 위치를 특정해 주어야 합니다.

 

요천지맥의 천황산.

 

멀리 팔공산.

 

남는 건 사진뿐.

 

그런데 지리의 천왕봉 라인만 이렇게.....

 

자작나무.

 

또 고남산.

 

삼봉산과 투구봉.

 

억새가 좀 많았으면...

 

지리 서북능선과 중앙 뒤로 반야봉.

 

또 고남산.

 

중앙 우측 낮은 곳이 여원재.

그 뒷라인이 서시지맥.

그리고 뾰족한 게 견두산犬頭山.

대간 라인 중 맨 좌측이 수정봉.

 

좌측의 덕두산과 바래봉을 당겨봅니다.

 

새맥이재를 지납니다.

 

오래된 이정표.

 

오늘 계속 함께 걸으셨죠?

지도 #4

 

여유로운 봄날 같은 느낌.

 

야막산성을 오릅니다.

 

야막산성에서 본 임천지맥의 연비산 ~ 오봉산 그리고 삼봉산.

 

멀리 대봉산의 계관산과 천왕봉을 보고...

앞줄은 임천지맥.

 

야막산성 안을 걷습니다.

 

다다음 구간에 오를 백운산.

 

야막산성 안내문.

이곳이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었다는 얘기겠죠.

 

귀중한 유적이 계단이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나마 이 정도면 보존이 잘 된 거는 같은데.....

 

마지막 이정목.

 

하지만 하나 더 올라야죠.

 

안내판도 보고....

 

좌측은 장수군 번암면.

 

동쪽은 남원시.

 

고로 복성이재는 아니 백두대간은 장수군과 남원시의 시계였던 것이죠.

 

오늘 산행은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처음부터 저와 같이 걸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다음 구간은 성삼재 매점에서 미리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할 겁니다.

매점에는 뜨거운 물도 있으니 컵라면이나 간단한 도시락 같은 것을 사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4시 정도 출발하면 만복대에서 충분히 일출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큰고리봉을 거쳐 고기 3거리로 내려와 '곡중분수계'라는 곳을 걸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눌 건데 혹시 시간이 너무 이르니 구룡폭포를 갔다오자는 의견이 있으면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다른 대간 팀들은 꿈도 꾸지 못할 계획이지만.....

여러분들은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한마음이니까요!!!!

 

어때요?

오케이?

주지봉은 당연히 들를 것이고....

 

배회장님께서는 무조건 가자고 하실 거 같은데.....

어쨌든 오늘 괜찮으셨습니까?

매사에 적극적이신 배회장님 감사합니다.

 

예. 수고 많으셨습니다.

 

유 회장님.

앞으로는 회장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후미에서 대원들 챙기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원님들!

대간길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명품 산악회가 되어야지요.

앞사람 궁둥이만 보고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다음 구간 만복대에서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것이고 많은 것 해설이 있을 것이니 12. 20. 경 폭설이 한 차례 쏟아지기를 기원하자고요!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