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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금계마을 ~ 의중마을 ~ 용유담 ~ 송전마을 ~ 운서마을 ~ 동강마을)약 11km

 

 

지리산 둘레길 제3구간에 이어 제4구간을 걷습니다.

오늘 4구간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구간 이외의 길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리산의 속살을 그것도 아주 진귀한 자료들을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죠.

역시 지리산은 어느 곳 하나 만만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가지고 있는 함의含意는 화수분 같아 계속 공부를 해도 끝이 안 보이는깊이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얘기도 됩니다

 

하는 수 없죠.

오늘은 우선 총론을 읽듯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훗날 둘레길 전 구간을 마친 다음 다시 각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죠.

 

일단 문제를 제기할 곳은 의탄과 벽송사 그리고 추성입니다.

장소를 달리하여 용유담에 이르면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자 역사지리의 보고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요.

그러고는 지리의 동부능선으로 붙어 왕등재니 왕산이니 하는 산들을 탐구합니다.

 

아! 지리산!

지리산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14:28

3구간과 4구간의 경계에는 람천이 있습니다.

아니 마천면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임천으로 불러야죠.

이곳 분들이 예전부터 부르던 이름입니다.

임천을 건너야죠.

지난 구간 얘기했었죠.

주촌천은 둘레길 1구간 행정리에서, 서부능선 상의 세걸산에서 내려오는 람천에 흡수되어 이후 람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계속하여 람천은 인월을 지나면서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풍천을 흡수하고는 성삼재에서 내려오는 만수천을 받고, 이후 백무동의 덕천천, 칠선계곡과 국골의 의탄천을 더 받아 임천이 된다. 덩어리가 커진 임천은 특히 용유담에 이르러 엄천으로 불리며 흐르다 산청군 생초면에 이르러 경호강이 되어 남강으로 흡수된다.

 

다리를 건너기 전 잠시 빠져나온 금계마을 입구를 봅니다.

우측 슈퍼가 조금 전 제가 캔맥주 하나를 산 곳입니다.

벌써 여름인가요?

한 모금을 넘기니 목이 시원해집니다.

그저 여름 갈증에는 시원한 캔맥주 한 통이 제격입니다.

 

수량이 그리 많은 임천을 보면서 다리를 건넙니다.

정면에 보이는 게 창원리 채석장이고....

건너고 있는 다리는 의탄교입니다.


마천면 소재지에서 추성동으로 가다보면 임천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의탄교이다.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 의중동 등이 있는 의탄마을이 나온다.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500년 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을 보고는 바로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 필자 주 : 지리산의 무릉도원하면 불일폭포 부근, 청학동 그리고 세석평전 부근이 꼽히는데 점필재는 특히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했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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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dif]-->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는 이듬해인 음력 4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탐승에 오른다.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의탄마을에 당도해 그의 심경을 이렇게 남겼다.  "연달아 서너 고개를 지나서 한 너른 곳을 만났는데, 주위가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endif]-->  점필재 김종직을 유혹했던 곳이 바로 이 의탄마을이다. 점필재는 여기서 동행했던 유호인(극기는 유호인의 자字)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에서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와 어우러져 으뜸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1611년 4월 3일 어우당 유몽인도 이곳를 이용하여 지리산 산행에 임하면서,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1611년 남원부사로 있던 어우당은 인월쪽에서 백장암 ~ 군자사를 거쳐 지금의 송전리 부근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어름터의 두류암에 들렀다가 천왕봉을 가는 도중에 이 의탄촌을 지나면서 점필재를 그렸던 것이다.

 

 

교통 표지판 뒤로 정자도 보이고 아름드리 나무도 아직 건재합니다.

지리산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지명과 사찰 이름이 보이는군요.

 

우선 벽송사를 볼까요?

경암의 벽송암기에 의하면 벽송사는 벽송암이었습니다.

벽송사의 창건주 벽송대사의 도 닦은 얘기 한 토막을 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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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가면 벽송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부안 송씨 가문의 한 집안에서 송지암宋芝岩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endif]-->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열 살 이전에 벌써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느 따뜻한 봄날에 조정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방이 붙었다.  <!--[endif]--> 

지암은 무과에 응시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무사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장원급제를 하여 장군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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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하여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다.

중국의 명나라에서도 자주 트집을 잡아 괴롭혔고 국경의 침범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북벌 계획을 시도하여 적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endif]--> 

그러던 중, 장군은 혹한 속에서 국경지대를 수비하다가 장검을 집고 서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번뇌와 씨름하다가 문득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짓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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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방장산 어디에선가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法戒正心大師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함양군 마천면에 소재하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십 일 동안 헤매던 중에 드디어 지금의 추성리 광점동에서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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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정심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 다음 지암은 지금까지 번뇌 속에서 방황하던 자신이 걸어 온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자 대사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지암은 너무나 기뻤다.

그날부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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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당시 법계정심대사는 이미 불문을 떠나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싸리 제품인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생활을 근근이 해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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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매일 지암을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채취해 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문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지암은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법계정심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endif]--> 

그리하여 대사에게 뜻을 전하니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하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암은 그곳을 떠나 정처 없이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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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면 의탄리 속칭 살바탕에 이르자 법계정심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지암은 그길로 다시 강점에 계시는 대사 곁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endif]-->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상을 하더니 갑자기 두 손을 높이 하늘로 치켜들더니 지암은 이제 도를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지암은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받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대사는 지암은 이제 도를 받으라.”고 다시 소리치며 손을 내렸다고 한다.  <!--[endif]-->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시각부터 지암은 물욕과 정욕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벽송대사로 칭호를 받게 되었다.  <!--[endif]-->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endif]-->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 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절을 짓고 벽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endif]-->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한 대사의 시신을 화장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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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의 수제자인 환성대사가 다시 절을 짓고 석탑을 세워 벽송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6. 25 동란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520년 벽송대사 지엄이 건립하였다고 하는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다가 결국 소실되었습니다.

벽송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입니다.

벽송대사는 선종 60조로 서산대사 휴정은 그의 법손격인 62조입니다. 

많은 선사를 배출한 절집이라는 얘깁니다.

 

벽송사의 배치는 풍수지리와도 통합니다.

두류전지에 의하면 수효봉과 귀쌍봉이 오도산을 받치고 있어 그 안을 안락하고 밝게 하며 금대산이 화표가 된다고 합니다.

 - 필자 주 : 화표華表란 무덤 앞의 망부석 같은 것을 얘기하는데 여기서는 풍수적으로 명당 입구에 기아한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 것을 의미함.

또한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당하며 재물을 꾀하는 무리 역시 올 수 없는 곳이라 하는군요.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잠깐 벽송사가 등장합니다.

주인공 박태영이 왜놈들을 피해 벽송사로 들어가는 장면이죠.

지리산에 은거하기 위하여 신선이 되려는 지리산 지리에 밝은 노인을 만나려는 목적이었죠.

그럴 때 추성리며, 칠선 계곡, 국골 등의 지명이 나옵니다.

 

참고도 #1

 

 

참고 사진 : 하봉에서 초암능선을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그 칠선계곡은 어떤 곳일까요?

간단하게 봅니다.

울진의 응봉산999m에서 흘러내린 계곡인 덕풍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장의 길이를 가진 곳이 바로 이 지리의 칠선계곡이죠.

지금은 제한 탐방제가 실시되는 곳이라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계곡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곡을 꼽으라면 서슴치 않고 꼽는 곳이 바로 이 칠선계곡일 겁니다.

규모 또한 18km에 달하는 험준한 곳이어서 예전에는 인명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칠선 계곡의 크기는 그를 싸고 있는 줄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측으로는 천왕봉과 중봉에서 내려오는 작은 줄기를 받은 다음에 초암능선이라는 튼실한 능선을 품고 있고, 좌측으로는 창암산924.9m을 지나는 창암능선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석봉1808m에서 창암산으로 이어지는 창암산능선을 넘으면 백무동이 되고 초암능선을 넘으면 국골이 되어 추성에서 다시 이 칠선계곡의 물과 만나게 됩니다.

이 물은 의탄천이 되어 마천에서 임천이 되어 남강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부근에서는 추성楸城이 중요하고 추성은 성안城內과 연결이 되며 이는 다시 국골 너머에 있는 두류능선을 타고 올라와 영랑대 ~ 하봉 ~ 중봉 ~ 천왕봉 루트로 연결이 됩니다.

추성은 곧 신라의 역사이기도 하고 백제와의 전쟁의 결과물일 겁니다.

신라 화랑이 노고단에서 무슬을 연마했다는 얘기도 들리며 화랑 장교였던 원효가 이 루트를 이용해 화엄사에서 화엄사상을 접했다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얘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 추성에 대해서 가설 몇 개가 들립니다.

즉 이 추성동은 가락국 최후의 임금인 구형왕의 피난처여서 이 일대가 국골이 되었다는 얘기가 그 중 하나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또한 그곳에는 옛 성이 있으니 추성이요 또 다른 이름은 박동지朴同址이니 고대에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 지금도 창고의 유적이 완연히 남아 있고 그 부근에 행궁 같은 유적이 남아 있다는 애기들이 그것들입니다.

지금의 추성동은 등산객이나 피서객들의 편의도모를 위한 민박촌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칠선동, 두지터, 광점동, 얼음터 등과 더불어 화전민들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유명한 마천 곶감, 마천 산나물, 마천 한지(문종이) 등의 집산지 역할을 한 곳이었습니다.

 

 

살펴볼까요. <!--[endif]-->  

조선시대 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천왕봉의 고성古城인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90번지에 위치한 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명 추성 또는 박회성이라 하며 의탄에서 5, 6리 떨어졌는데 마소가 갈 수 없는 곳이며 안에는 창고터가 있다. 세상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것이라 전한다."  이는 국골의 산성터를 말하는 것으로 전설처럼 가락국 최후의 왕인 구형왕이 피난해 군마를 훈련시키던 곳인지의 여부는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추성의 삼국 시대 때의 이름은 마천성馬川城이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와 함께 이 일대에는 두지터(쌀을 담는 두지를 지칭)와 얼음터(석빙고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전해짐)가 있는데 이는 고대국가의 식량창고와 여름철 음식물 저장고 역할을 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고지도에 등재된 것을 보면 추성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인 듯하며, 인근에 호두나무가 많이 자생한 것을 연유로 추성楸城으로 불리어지게 된다그래서 성의 외곽에 위치한 마을 이름도 추성리이며, 조선시대 때부터 이 마을의 호두는 나라의 진상품이었고 현재도 지역특산품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위의 기록을 근거해 본다면 지금까지 추성을 두고 가야 구형왕의 피난지라고 전해오는 설은 잘못 전해져 오는 역사의 가설임을 알 수 있다고서의 기록에는 추성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수비성이라고 하나 실제 답사를 해보면 특정한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내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석성의 둘레는 약 2km가 되며, 면적은 7만여평에 이른다. 석성의 통로이었던 동문과 북문의 위치도 뚜렷하다 <!--[endif]-->   <!--[endif]--> 

성의 내부에는 높이 10m 되는 망바위를 비롯하여 군마의 조련길을 비롯하여, 수비군의 초소 내지는 망루의 건물터로 추정되는 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

성 안의 특정한 시설물은 바로 말달린평전

즉 군사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지리산 자락의 운봉지역은 삼국시대 당시에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장이었다지리적으로 지금의 지리서부(북)선을 경계로 하여 남원지역은 백제 땅이었고 함양은 신라 땅이었기에 국경지대이었던 운봉은 두 나라 영역 싸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그 역사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는 현장이 지금의 남원시 아영면의 백두대간상에 위치한 아영고원 즉 아막산성(阿莫城城) 터이다. 아막산성은 백제가 부르는 이름이었고, 신라는 이곳을 모산성(母山城)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모산성에서는 AD 189년에서 624년까지 5세기에 걸쳐 신라 백제 사이에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에 이르러서는 무려 다섯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화랑의 명장들과 함께 수많은 신라의 군사들이 전사를 했다당시 최고의 명장인 김서현 장군(김유신의 아버지)까지 전쟁에 출전하였지만 백제 무왕이 출전시킨 8천여 명의 군사들에 의해 모산성이 무너지면서 함양의 마천, 수, 산청의 생초 등 지리산 동북부지역을 백제에 빼앗기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수번 치러진 모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패한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를 추정해 본다면 지리적인 여건이겠다. 신라에 있어서 당시 모산성이 위치한 운봉은 수도인 경주에서 멀고먼 변방이었다. 부여에서 운봉까지 출동하는 백제의 지리적인 여건에 비해 경주에서 군사를 출동해야 하는 신라의 여건이 불리했다고 보아진다.

 

그렇다면 모선성 전투에서 신속히 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운봉 지근에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훈련소가 필요했을 터이고, 그 가운데 설치된 신라의 군사훈련장이 추성의 말달린평전이었다고 추정을 할 수 있다.

 

 

 

 

 

중요한 얘기 몇 가지 해봤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세한 것은 후에 보기로 합니다.

그럼 4구간 둘레길을 시작하죠.

 

지도 #1

 

14:37

의탄교를 나와 마을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서 바로 좌틀합니다.밥을 좀 사먹으려 했는데 마땅한 곳도 없어서 그냥 빵으로 대체하기로 합니다.

 

100여 m 들어가니 우측 산으로 계단이 나 있고 이정목은 그쪽으로 빨간색이 칠해져 있습니다.계단으로 오르니,

 

바닥에 깔린 판자가 갈 길을 안내해 주는군요.

 

나무 계단을 이용 조금 올라갑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으로,

 

의중마을입니다.

 

원래 지리산 둘레길은 여기서 직진하여 서암정사 ~ 벽송사 ~ 710.8봉 안부 ~ 송대마을로 진행하는 루트였습니다.그런데 사유지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몇몇 주민들의 반대로 벽송사 이후는 진행하지 못하고 다시 이길로 돌아와 의중마을 ~ 용유담 구간을 진행하여야 하니 조금의 불편이 뒤따릅니다.우리에게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둘레길이겠지만 그분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니 뭐라 할 수 없는 일입니다.벽송사 루트는 뒤로 미루고 용유담을 향합니다.좌틀입니다.

 

을 안을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의중마을의 좌측은 금대산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은 법화산 자락입니다.

채석장은 우측 하단에 가린 곳입니다.

 

15:04

우측을 따르고,

 

그저 평범한 산길을 걷습니다.

 

산자락도 지나고,

 

15:25

지도 #1 '나'의 작은 너덜겅 지역도 지나고,

 

이 부근의 길은 조금 희미하긴 합니다.

표지띠도 없어 초보자들은 괜히 당황스러워 할 법도 한 곳입니다.

 

15:39

지도 #1의 '다'의 안부로 올라 한결 명료해진 길을 걸어 마천면을 지나 이제부터는 휴천면 안으로 듭니다.

 

15:53

그러고는 돌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강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임천 아니 이곳이 바로 용유담이니 여기부터는 엄천입니다.

부근에 엄천사가 있었기 때문이죠.

엄천사하면 법우화상이 떠오르고 마적도사가 연상됩니다.

이 용유담 부근에는 용유당이 있었습니다.

잠깐 볼까요?

 

 

제가 쓴 글에서 인용을 하겠습니다.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 용유당(龍遊堂)(박장원 1643)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조구명 1724)

어쨌든 이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당시 유학자들의 우리 토속신앙과 불교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모석상을 통하여 지리산의 성모신앙, 산신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를 잠깐 들여다볼까요?

"승려 천연天然은 관서지역의 시승詩僧이었다. 용기와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시詩의 음률이 맑고도 높았다. 묘향산에서 와서 두류산 수만 골짜기를 낱낱이 유람하다가 성모묘에 이르러 그곳이 음사淫祠인 것에 분개하여 즉시 신상을 끌어내 부수고 바위 밑으로 던져 버렸다. 밤에 신상이 있던 자리에서 잔 후 휘장을 찢어 신발을 만들어 남쪽의 의신사에 내려갔다. 성여신이 이 일을 기록했다. 그 후에 어리석은 백성이 신상을 다시 만들어 이전처럼 음사를 계속했다. - 진양구지晉陽舊誌

 

16세기와 17세기를 살던 성여신(1546~1632)이 기록한 진양구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승려 천연이 성모상을 훼손하였다는 것이죠.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상당히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인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여신의 유두류산시에도 이 대목이 나옵니다.

......... 전략........

昔有浮屠天演者非門突入 옛날 천연이란 중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破神軀投絶璧 성모신의 몸통을 깨부수어 절벽에 던졌다네

吾儒只守敬而遠之之訓 단지 '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가르침을 지키며

不爲諂不爲褻 우리 유생들은 아첨도 함부로 하지 말면 그만.

............하략........

 

그러면 그렇지 혈기왕성하며 분기탱천한 성여신이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죠.

자기가 공부하던 단속사에 불까지 지른 사람인데....

진양지에 보면 성여신과 천연과의 대화가 자세하게 나온다(두류전지)

성여신은 1616년에 지리산을 유람했으니 이 성모석상은 여말麗末 태조 이성계에게 대패한 왜구의 잔당들이 훼손한 그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 토속신앙과 불교를 연관시켜 보면,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면 한 손으로는 금속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는 그림 부채를 가지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불타佛陀를 부르고 또 법우화상法祐和尙을 부릅니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智異山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法祐和尙이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이 대단했습니다.

하루는 한가로이 있는데, 갑자기 산의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물이 흘러온 곳을 찾아 천왕봉天王峯 꼭대기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면서 인간세계에 유배流配되어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의 술법術法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중매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딸 여덟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습니다. 이들에게 무당의 술법巫術을 가르쳤는데, 금속방울을 흔들고 그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다니면서 무당의 일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로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하고 접신接神을 한다고 합니다.

- 조선 무속고巫俗考

 

승려 천연과는 달리 법우화상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불교는 우리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 실상사 앞의 석상이나 장승 등이 다 이렇게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화해 혹은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륙의 유지리산록(1463)을 보면 "산 속에 있는 여러 절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성모에게 제사하지 않는 데가 없다."고 쓴 흥미로운 대목 역시 이러한 점을 반증해 주는데 이는 현대 사찰의 삼성각과 같은 기능을 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어쨌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한편 위 법우화상은 먼저 얘기한 엄천사를 창건한 '국사'라고 칭해지는 승려입니다.

엄천사는 조금 전 본 점필재의 글에 나오는 '엄천리'라는 곳에 있었다고 하고, 국토지리정보원 1/50,000 지도를 보면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엄천교 부근 '절터'라는 지명이 나오는 그곳입니다.

이 엄천사라는 이름은 현재의 물줄기 이름인 임천과 엄천 사이에서 재미있는 논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어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엄천사嚴川寺엄천嚴川의 북안北岸에 있고, 엄천은 함양군의 남쪽 25리에 있으며 용유담의 하류라 했습니다.

진양지에는 함양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군요.

 

 

15:57

시멘트도로가 나오고 도로변에 큼지막한 안내문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또 마적도사 탐방로를 만들어 놓으셨군요.

 

구석구석 지점을 표기하여 놓았고,

 

설명도 자세히 해 놓았습니다.

마적동이니 미적대 그리고 와불산이 보이는 송전마을의 와불사까지 정확하게 찝어넣은 것을 보면 '지리99' 팀에서 확실한 자료를 넘겨주었다는 느낌입니다.

함양군청 고생하셨습니다.

관심있는 이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마적도사 탐방로 탐사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잠깐 반야정사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옵니다.

 

용유교.

다리 건너에는 60번 도로가 있으나 둘레길은 강을 건너지 않고 우틀하여야 합니다.

이 부근은 용유담만 보더라도 최소한 한 나절은 소요될 것이므로 아무런 미련없이 통과합니다.

하루 날을 잡아서 와야겠죠.

 

모전 마을 안내판을 보고 자리를 뜹니다.

 

16:09

석불 작업을 하고 있는 지명선원을 지나고,

 

좌측으로 엄천을 보며 진행합니다.'

수량이 많이 부족하군요.

 

지도 #2

 

우측 경로당 앞을 통과하여,

 

그래도 남아 있는 아쉬움에 뒤를 돌아 용유교를 봅니다.

무궁무진한 역사인문지리의 보고 용유담.

이곳에 지리산 댐을 만들겠다니 무조건 막아야겠죠.

 

조금 더 가까이 엄천을 볼 수 있도록 나무 데크도 만들어 놓으셨고.....

 

저기 어딘가에 점필재가 노닐었고, 유호인이 시를 지었던 곳입니다.

김일손은 먼저와 기다렸던 임정숙과 함께 점심을 먹었던 곳이며 절구 한 수를 짓고는 다리를 건너 용왕당으로 간 곳이기도 합니다.

어딘가 저 바위나 돌 위에 그들이 새겨놓은 刻字가 있을 텐데....

 

이 구간은 부분적으로 마적도사 탐방로와 겹칩니다.

마적도사 얘기는 다음에 보기로 하고.....

 

봄을 준비하는 논.

 

수량이 조금씩 많아지는군요.

둘레길은 엄천 옆으로 바짝 붙어 진행합니다.

길이 희미하기는 하나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고,

그러다가 다시 도로로 나오기도 합니다.

 

 

법화산 줄기...

그래서 이 용유담과 화산12곡을 연결하여야 하는것이죠?

화산12곡은 화남대, 경화대, 와룡대 등 12개의 명승지를 얘기합니다.

물론 화산은 법화산을 얘기하는 것이고.....

엄천 건너 고정동 마을을 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와불산의 제대로 된 부처님 머리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견불동입니다.

 

16:47

송전마을로 들어갑니다.

지도 #2의 '라'의 곳입니다.

 

마을 회관 앞을 지나,

 

16:50

효자각을 지나고,

 

16:53

문수암 입구 삼거리를 지납니다.

 

매화꽃이 만개를 했고,

 

도로를 따르다,

 

마적도사 탐방길 안내문도 보고,

 

좌로는 계속 법화산 산자락을 보며 걷습니다.

 

17:10

와룡대 부근을 지납니다.

이곳 어딘가에 와룡담臥龍潭이라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을 텐데....

곧 다시 와야죠.

 

17:12

아, 근데 이게 뭡니까?

바로 윗집에 사시는 분이 주차장에 무료로 커피를 마시고 갈 수 있도록 온수와 컵 그리고 커피 등을 내놓으셨습니다.

 

고마운 분.

저는 커피를 즐기지 않으므로 그냥 물만 한 모금 마시고 갑니다.

 

17:14

문하마을 앞의 송문교 일대는 대단히 멋진 곳입니다.

이곳이 화산 12곡 중 하나인 와룡대인데 바위와 소나무의 조화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와룡대 거북바위 옆에 비가 세워져 있는데 와룡대라는 시를 지은 강용하(1840~1908) 등 8인이 계契를 조직했다는 내용이 담긴 유적비입니다.

그 앞에도 그 계원들의 이름과 와룡대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육안으로는 잘 구분이 되질 않는군요.

아까부터 화산12곡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화산 12곡은 주자(1130~1200)가 여산 북쪽을 유람하고 쓴 산북기행이라는 12장의 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위 강용하가 주자의 운을 그대로 사용하여 화산12곡을 지은 것입니다.

이 일대의 12개의 명소를 용유담을 시작으로 함허정까지 12장의 시로 읆으면서 화산12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인이죠.

이 와룡대가 그 중 4곡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정여창(1450 ~ 1504)은 김일손(1464~1498)과 이곳을 지나면서 "가히 살만한 곳"이라고 하여 가거동可居洞이라고도 불렀었죠.

"산이 북쪽에서 뻗어내리다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괸 곳이 있었다. 구 아래 겨우 10여 호쯤 되는 민가가 있었다. 탄촌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정맥욱이 "이 마을은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문필봉 앞이 더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앞으로 5 ~ 6리 정도 더 가면 오래된 절이있는데 엄천사라 하였다.

 

뒤의 법화산을 봅니다.

그럼 여기서 강용하가 12곡 중 와룡대를 노래한 시를 들어볼까요?

 

兩賢可居地(양현가거지)  두 현인이 살 만한 땅이라고 하여

 高名此其表(고명차기표)  높이 이름난 곳은 바로 여기를 가리키네.

 門前臥龍石(문전와룡석)  문앞의 와룡석은

 千載知者小(천재지자소)  천년 동안 아는 이 드물었고

 神物擅地靈(신물천지령)  신령한 물건이 땅의 영기를 독차지하여

 林壑自窈窕(임학자요조)  숲과 골짜기는 고요하네.

 三千古道恨(삼천고도한)  삼천 년 옛 道가 한스러워

 夕陽問啼鳥(석양문제조)  저물녘 우는 새에게 물어본다.

* 여기서 양현은 정여창과  김일손을 얘기하는 것임은 명백합니다.

 

송문교 건너 우측으로 보이는 삐져 나온 산자락을 지나면 한남동이 나오겠죠.

 

17:15

다리를 건너지 않고 천변을 따릅니다.

 

멀리 문상마을이 보이고....

 

엄천이 휘돌아가는 곳 좌측 암벽이 양화대楊花臺임을 인식합니다.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으나 육안으로는 보려는 것은 욕심입니다.

 

5곡인 양화대를 노래한 강용하의 글을 봅니다.

東麓復西馳(동록부서치)  동쪽 산기슭에 있던 해가 다시 서쪽으로 달려

蒼壁多夕暉(창벽다석휘)  푸른 절벽 가득 석양이 비치네.

弱柳身全倒(약류신전도)  연약한 버드나무는 물위로 몸통을 뒤집고

奇巖勢欲飛(기암세욕비)  기암은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솟아 있구나.

浮沙占有年(부사점유년)  뜬모래가 한동안 이곳을 차지하고 있으나

去來正無依(거래정무의)  가고 옴에 진실로 의지할 데가 없듯이

幾與薇山子(기여미산자)  미산자와 나는 얼마나 함께 할 수 있을까?

觀魚樂天機(관어낙천기)  고기 노는 모습 구경하며 천명을 즐기리라.

 

강용하는 연약한 버드나무 운운하며  양화대楊花臺라 하였으나 조금 더 후대 사람인 강민영(1859~1925)는 양화대陽和臺라 부르고는 그렇게 각자를 하였습니다.

楊花 버드나무꽃도 좋지만 陽和는 따스한 봄기운을 말하며 때로는 잘 다스려진 시절을 뜻하기도 한고 합니다.

암울한 시기인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좋은 시절을 꿈꾸며 기다리는 작자의 마음이 실린 창조적 변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좌측에 퇴적물이 쌓인 곳이 새우섬인데 한자로는 오서鰲嶼라 쓰는군요.그러면 자라섬일 텐데...생김새가 새우등 같이 휘어져 있어 새우섬鰕島라 불렀을 법도 하건만 오鰲嶼라! 

어떤 심오한 뜻이 있겠죠.

 

물줄기 하나를 보고,

 

17:36

정자가 있는

 

운서쉼터를 지납니다.

 

멀리 왕산줄기가 보이고....

좌측고개를 돌아넘어가면 한남동이 보이려나.....

 

강아지 두 마리가 무던히도 짖어댑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있는 곳 좌측이 한남동일 텐데....

그 한남동은 세종대왕의 12번째 왕자인 한남군이 수양대군의 등극을 반대하다 유배된 마을입니다.

그후 백두대간의 고치령과 관련이 있는  금성대군복위사건에 연류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1459년 사망하였습니다.

위리안치란 전에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을 따라 걸으면서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다시 마을길로 들어가,

 

17:54

구시락재를 지납니다.

 

이 구시락재를 김종직이 지났다고 하는데 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흔적을 찾지 못하겠던데.....

사람을 그리워 하는 강아지가 계속 저를 주시하고 있군요.

 

이제 동강마을로 내려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엄천사가 있었을 겁니다.

 

우측으로 미니 태양광발전소가 보이고 그 뒤로 왕산 줄기가 보입니다.

내일은 일찍 저 앞으로 진행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엄천교 건너 운기마을을 보며,

 

마을 입구에 있는 낯익은 문구인 '유키'를 보고 전화를 겁니다.

 

샤워를 하고는 주인아저씨의 바지를 빌려 입고 호사스러운 반찬과 밥에 소주 한 병을 반주로 만찬을 즐깁니다.

야구를 보고 마감 뉴스까지 확실하게 보고 잠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