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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5구간(동강마을 ~ 방곡 ~ 쌍재(왕산 갈림길) ~ 곡두재 ~ 수철리) 약 12.1km




지리산 둘레길 제5구간은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동강마을에서 시작하여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에서 마치는 약 12.1km 되는 구간입니다.

지리동부능선 왕등재에서 가지를 쳐 왕산825.6m ~ 필봉산858.2m이 눈에 들어오는 구간이며 시종일관 동부능선과 함께하는 구간이 됩니다.

장場이 북부지리에서 동부지리로 넘어가는 느낌입니다.

동부능선을 걷는 것과 동부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맛은 어떻게 다를까요?

지리의 품속으로 다시 들어가 봅니다.

지도 #1

06:05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유키 민박집을 나섭니다.

사실 어젯밤 늦게라도 귀가를 했어야 했는데 이왕 내려온 거 하루 더 하고 올라가는 게 여러 모로 득이 될 것 같아 과감하게 외박을 하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세벽에는 귀가하지 않은 것을 알으셨을 텐데...

조금 이따 전화를 드려봐야겠습니다.

민박집을 나와 엄천강으로 가면서 어제 내려온 733.9봉 주변을 봅니다.

이 동강 마을을 에코 빌리지라 포장을 해놓았군요.

그냥 동강마을 하면 누가 뭐라나?

엄천교 건너는 원기동 마을입니다.

저 끝에서 좌로 틀면 세종대왕의 아들 한남군과 관련 있는 한남동이겠고...

그 뒤로 법화산이 보입니다.

엄천의 하류 방향.

중앙 흰 것이 어제 보았던 미니 태양광 발전소며 그 뒤가 왕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입니다.

그 줄기의 끝부분에 전설 속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무덤이 있습니다.

저 봉우리는 휴천면과 유림면의 면계에 있는 373.6봉이며 그 앞이 엄천사가 있던 절터가 있을 것이고......

동강 횟집을 보고 다시 되돌아 둘레길로 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려온 길이 바로 지리산 가는 길입니다.

그냥 가는 길이 아니고 꽃봉산이라고도 불리는 733.9봉을 거쳐 와불산을 지나 쑥밭재가 있는 지리동부능선으로 달라붙는 등로가 되는 것이죠. 

신산경표 162지맥을 다 졸업하신 '산으로' 님을 꾀어서 같이 진행해야겠습니다.

그럼 오늘 둘레길을 시작합니다.

가운데 길이 유림면 손곡리로 올라가는 길이고 길 우측에는 엄천사 절터가 있을 겁니다.

그 절 때문에 이 강이 엄천이 된 것입니다.

우측 봉우리가 아까 보았던 373.6봉.

멀리 남서쪽으로는 법화산과 삼봉산.

우측 원기동과 그 뒤가 450.5봉.

이 정도에서 엄천과도 작별입니다.


엄천강이 안타깝게도 근세에 와서 이름을 잃어 버렸다.

근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 고찰 엄천사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듯이 지금도 유유히 지리산 자락을 안고 흐르는 엄천강의 명칭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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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이 나라 최대의 지리연구기관인 국토지리원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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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용되고 있는 국토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엄천강 이라는 지명은 표기조차 없이 임천강으로만 표시 하고 있다.

지형도의 오기는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함양 쪽에 와서는 엄연히 있어야 할 엄천강을 등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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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있는 엄천 쪽의 주민들은 지도에서 사라진 엄천강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노력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엄천강은 휴천면 모정리에 위치한 수많은 전설과 절경을 지닌 용유담에서 산청군 생초면 강정리까지 실측거리 약17키로가 되는 지리산 동북 자락의 관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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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지명을 되찾는 것은 오로지 지역민과 함양관청 그들의 몫이다분명 1530년에 탈고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으니말이다.


임천(臨川) :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  <!--[endif]-->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endif]--> 

엄천(嚴川) :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06:28

지나는 차도 별로 없는 조용한 아침입니다.

저 멀리 자혜교를 건너 당산나무 같은 게 보이는군요.

상촌마을 입구일 겁니다.

자혜교를 건너지 않고 그 앞에서 우틀합니다.

방곡마을을 따릅니다.

그러면 함양군 휴천면을 떠나 산청군 금서면으로 들어섭니다.


산청은 본래 지품천현이었다. 신라 초기까지 그렇게 불렀다가 경덕왕( ? ~ 765) 때 산음으로 고쳤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렀는데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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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불교 중흥을 위해서도 힘썼던 인물로 이 시기에 석굴암과 성덕대왕 신종이 만들어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야겠군요.

제주 4 · 3 사건이 국가에 의한 과도한 진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면 이 산청 · 함양 사건 역시 이에 못지 않은  민간인에 대한 극악무도한 국군의 학살 현장입니다.

군인이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총칼로 그들을 살해하였다니.....

하긴 얼마전에도 광주에서 비숫한 일이 자행되었으니 그 당시에는 별로 죄책감 같은 것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좌측으로 어제부터 보았던 미니 태양광 발전소를 봅니다.

토목공사의 현장.

급커브 길 때문인지 새로운 연결 도로를 내느라 산을 또 깨부수고 있군요.

통행량도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뭐하러 도로를 곧게 펴려는 것인지....

좌측으로 공사현장을 보면서 도로를 따라 오르다,

기념관 앞에서 양민 학살의 현장을 봅니다.

산청함양사건은 거창양민사건과 더불어 한국 전쟁 기간 중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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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개입 뒤 1·4후퇴 시기인 195127일은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었다. 이날 지리산 동쪽 큰 산들 사이, 해 뜨고 지는 것으로 시간을 아는 두메산골인 가현·병곡·점촌(산청군 금서면)과 서주리(함양군 휴천면) 등 네 마을 양민 705 (어린이, 여성, 노인 85%)이 느닷없이 떼죽음을 당하고 세 마을 133 가구가 잿더미가 된다.

이 사건은 남원 ·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11사 작명5호 견벽청야명령을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 중심으로 7일 아침부터 11일 사이에 수행한 양민 학살 작전이다. 7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가현(123), 점촌(62), 서주리(310) 주민 학살이 두 나절 만에 끝났고, 9일부터 11일 사이에 거창 신원면 작전(719)으로 이어져 모두 닷새 만에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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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거창 사건에 비해 이 함양·산청 사건은 묻혀 있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즉 당시 지역구 거창의 신중목 의원이 국회 차원의 조사를 발의한데 비해 산청 쪽 이병헌 의원은 와병 중이어서 발의 단계에서 빠지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생존자나 사망자들의 유족들이 극소수였고 진상을 거론할 분위기도 아니었던 탓이다. 그래서 거창사건으로 축소·은폐되는데, 그조차 숨기려고 국회 조사단의 조사를 방해 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었다. 같은 해 7월 대구고등군법 회의 심문에서 산청 함양 학살도 잠깐 거론되나 정치적 재판으로 끝난다.  4 · 19 뒤 국회 차원의 진상 조사가 있었지만 5·16으로 주저앉았고, 90년대 들어서서야 본격적인 신원운동이 벌어졌다. 1953년 방곡지구 유족 몇몇이 동심계를 부어 곡우 때 숨어 제사를 지내던 것이 1989년에야 유족회가 섰을 정도였다니 더 이상 말해야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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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작전을 벌인 이유도 기가 막힐 따름이다. 최덕신 11사단장의 지킬 것은 견고히 지키고 나머진 쓸어버린다.’견벽청야전술, 4 · 3 사태 진압군이었던 9연대의 어긋남 자부심 그리고 여기에 지휘관과 전쟁 자체의 부도덕성이 얽힌 탓이었다. 거기에 양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여야 할 만큼 전세가 다급하고 전과가 부실했던 탓도 있었다<!--[endif]--> 


그 기념관에서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드리고 지납니다.

06:57

기념관을  나오자마자 표지판을 따라 바로 좌틀해야 합니다.

올라오던 습관대로 만연히 직진하기 십상인 곳입니다.

공사 현장이기도 하고 뚜렷한 이정표가 없어 조심스럽게 간이 이정표를 보고 진행합니다.

07:03

오봉천을 건너고는.

뒤를 돌아봅니다.

이제부터 둘레길은 왕산 등로와 겹칩니다.

새로 만들고 있는 도로로 올라와서는 바로 좌틀합니다.

이 부근은 진행하기가 상당히 난해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미리 독도를 하여 전체적인 진행방향을 머릿속에 그린 다음 진행을 하여야 알바를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그러고는 오봉천 건너 추모기념관을 다시 봅니다.

07:10

시멘트 포장도로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산길로 들어섭니다.

둘레길이 아니라 왕산 등산로였을 길을 걷습니다.

부드러운 길입니다.

좌측으로 물 흐르는 소리도 들으면서 유유자적하게 걷습니다.

작은 소도 보이고.....

두어 군데 이런 곳이 나오지만 센터에서는 안전에 만전을 기한 듯합니다.

07:27

어디 한 번 구경을 해볼까요.

둘레길을 버리고 1분 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시끄러운 물소리와 함께 제법 규모가 있는 폭포를 볼 수 있습니다.

상사폭포라고 합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빠져나와 폭포 상단부로 올라갑니다.

예전에 설악 토왕성폭포 상단부를 지날 때 생각이 나는군요.

폭포 아래를 쳐다보니 오금이 저리던.....

07:38

이렇게 깊은 곳에 나무 다리도 있으니....

요즘 산꾼들 호강을 합니다.

왕산으로 오르던 산꾼들.

이런 곳을 산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셨군요.

우측에 민가가 한 채 보입니다.

이 깊은 산꼴짜기에 민가도 있고....

개 한 마리가 열심히 짖어대는군요.

하긴 저 녀석도 얼마나 심심할까요.

억새밭을 지나,

흐드러지게 핀 산목련도 보고.....

지도 #2

07:56

그러고는 임도로 올라옵니다.

아주 호강을 하는군요.

지리산에서 이렇게 좋은 길을 그것도 산에서 걸을 수 있다니!

08:08

지도 #2의 '나'의 곳인데 쌍재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이정표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이 재 그러니까 고개라는 이정표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岾 즉 고개가 무엇입니까?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곳 중 가장 낮은 곳이면서 그 봉우리를 오르기 위한 곳 중 가장 높은 곳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 쌍재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은 아직 제일 높은 곳도 아니면서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조금 더 올라가야 합니다.

08:14

지도 #2의 '다'의 곳으로 확실히 이곳이 아까 그 이정표가 있던 곳보다 더 높습니다.

그러면서 왕산과 641.4봉에서 내려오는 곳을 잇는 제일 낮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쌍재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좌틀하여 왕산으로 오를 수도 있을 것이고.....

우틀하여 낙엽송 숲을 걸어,

좌틀하며,

둘레길은 돌계단을 따릅니다.

08:33

그러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41.4봉입니다.

뒤로는 왕등재가 보이는군요.

이 봉우리나 왕산은 산경으로 볼 때 덕천(웅석)지맥의 왕등재에서 가지를 쳐 온 줄기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예전에는 지리동부능선이라 불리던 줄기였습니다.

왕등재라!

그런데 왕등재는 고개라는 뜻인데 저 덕천지맥에 있는 왕등재는 고개가 아니라 그 일대는 실제 습지입니다.

고산습지인 이곳은 1996년 여름에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내륙에서 발견된 산지습지 중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암산 용늪은 유전자보호구역,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은 출입금지만 시켜놓았지 다른 어떤 보호를 위한 조치를 하는 지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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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도를 보면 왕등재를 두 곳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덕천지맥에서 이 왕산방향으로 줄기를 내놓는 곳을 왕등재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동왕등재라고 하여 936.5봉을 그렇게도 부르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이름 즉 왕등습지로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왕등습지 뒤로 천왕봉과 중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진주 독바위와 함양독바위도 보이니 그 중간에 있는 봉우리가 와불산이로군요.

바로 아래는 오봉리 우측은 방곡리.

..................

왕산과,

뾰족한 필봉산.

일명 도토리봉908.8m과 맨 뒤의 웅석산.

그리고 중간의 기산 줄기.

멀리 웅석봉에서 늘어진 줄기들.....

한참이나 주위를 조망하고 내려가는 길은 이렇습니다.

이게 도대체 지리산 길인가 하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600.7봉을 지나,

09:00

느닷없이 삼각점이 나옵니다.

지도 #2의 '라'의 곳에 있는 점인데 기준점 조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이미 폐쇄된 것인데 현물만 이렇게 남아 있군요.

지도 #3

완연한 봄날을 느끼면서 진행하면,

09:12

지도 #3의 '다'의 곳에 있는 고동재입니다.

이 고개는 고동같이 생긴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비교할 게 없어서 고동까지 동원했다니....

어쨌든 이 고개는 금서면 수철리와 오봉리 그리고 동부지리의 왕등습지를 왕산과 연결시켜 주는 아주 의미 있는 그것입니다.

이런 게 고개죠.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주는 그리고 양쪽의 낮은 저지에서 봤을 때 그나마 가장 낮은 곳.

그러고 보니 이 부근에는 유별나게 '왕王'자가 붙으 지명들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 王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라 전해지는 구형왕과 연결됩니다.

국망봉을 악착같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그리고 그의 아들 마의태자와 연결시키는 것처럼 이 부근의 王을 굳이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차피 가락국이라는 나라는 삼국사기 같은 정사正史에도 좀 야리꾸리하게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선 김부식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42년에 나라를 열고 158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단군 다음으로 장수를 한 인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현대인이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락국이 가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수로왕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은 왕'으로 주변 국가에 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서라벌에서도 이런 내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김부식은 쓰고 있습니다.

가야에서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예는 수로왕이 금빛 알에서 나온 것이나 성을 金으로 삼은 것만 해도거의 확실하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니 야사보다는 정사에 가깝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편 수로왕은 허황후와 연결이 되고 이는 곧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이어지며 우리는 지리산 칠불사를 보고 불일폭포를 얘기하며 무릉도원을 얘기할 때 이를 기억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황후가 온 곳이 서역의 이유타국이고 이는 인도이므로 수로왕의 무덤이 있는 양산(영축)지맥의 만어사와 연결하여 태양무늬와 물고기 양식이 인도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도 유념하면 될 것입니다.

허황후가 서역에서 왔다니 승려들도 불교의 포교활동을 위해서 왔을터 이를 연기조사-참고로 3인의 연기조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염두에 두어야 재미있어 집니다- 와 연결하여 화엄사와 쌍계사 그리고 법계사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관련되는 데서 또 얘기하죠.

어쨌든 532년 구형왕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써 법흥왕에게 투항을 하여 520년 만에 멸망을 하였는데 그의 무덤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때는 신라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만큼 힘있고 찬란한 문화가 있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왕권을 넘기게 되는 비운의 왕이 된 것이며 그 의미를 아는 지 하늘도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주변을 더욱 숙연하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런 내용은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에 나오는 얘기와 거의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국망봉이다. 바위 뒤로 올라가면 1등급대삼각점(영주11)이 있다. 국망봉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이다.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정확하게는 개골산)으로 가는 도중 이 국망봉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하여 국망봉이라는 것이다. 국망봉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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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료(삼국사기)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은거했다는 사실만 나오지 다른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의태자라는 이름 역시 이광수의 신문소설 마의태자를 통해서 일반화된 것이다. 그러니 태자는 종묘(宗廟)에 곡()을 하고 처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입고 있던 비단옷이 부끄러워 찢어버리고 대신 삼베옷을 입고, "고려가 주는 양식을 소·돼지처럼 먹고 사느니, 차라리 신라 사람으로 칡뿌리를 캐먹고 살겠다."며 끝까지 신라 사람으로 여생을 마쳤다고 하는 얘기도 사뭇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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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가게 된 루트를 한번 따라가 볼까? 우리가 지나온 하늘재 옆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의 미륵대원과 덕주사를 마의태자와 그 동생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고 양평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가는 도중 들러서 지팡이를 땅에 꽂아서 생겼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니 그렇다면 홍천 경유, 인제를 통해 금강산으로 갔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여전히 동해안 루트를 타고 금강산으로 갈 수 있는 빠른 길이 있었을 것이라는 부정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충주가 직할시 성격의 도시였으며 여기서 한강이라는 수로를 이용하여 양평으로 이동한 다음 홍천 ~ 인제 ~ 금강산 루트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설은 아직도 마의태자 전설이 남아 있는 인제의 지왕동이나 왕터라는 지명이 신라부흥 운동설과 관련하여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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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어떤 설에 의하더라도 이 국망봉은 마의태자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그런 봉우리가 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18쪽


그리고 무덤도 토분이 아닌 석분 양식이어서 조금 더 신비감을 주기도 합니다.

나아가 구형왕은 김해를 기반으로 한 금관가야였는데 사실 이곳은 대가야 혹은 고령가야가 집권하고 있던 곳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여 영 믿음이 안 갑니다.

그래서 전설입니다.

어쨌든 왕산을 넘어 구형왕릉으로 가는 루트도 잘 닦여져 있습니다.

이 고동재부터는 임도를 따라 걷습니다.

좌틀합니다.

대부분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으나 일부는 이렇게 비포장으로 남아 있지만 차량 소통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비목나무.

갑자기 가곡 碑木이 생각 나는군요.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초연硝煙이 무슨 뜻이냐는 퀴즈프로그램의 문제도 있었죠?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왕산과 필봉산을 깨끗하게 바라 볼 수 있군요.

우측으로 왕등습지와 이어진 993.8봉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에서 풍부한 수량의 물이 흘러내립니다.

09:38

수철리로 내려가는 길목에 막걸리집이 한 군데 있군요.

외로운 강아지가 물끄러미 저를 응시합니다.

이국적인 모습의 카페 한 군데를 지나고.....

천왕봉에서 내려온 덕천지맥 줄기가 밤머리재를 향해 내려가고 있습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848.5봉과 이웃한 무명봉이고 그 좌측으로 도토리봉908.8m이 보일 텐데 여기서는 확인이 안 되는군요.

09:59

밤머리재에서 올라간 기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내려옵니다.

10:11

수철2교를 건너,

제5구간의 날머리인 수철마을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마을 버스 종점이기도 하고 택시 한 대가 상주하는 제법 큰 동네인 것 같습니다.

수철水鐵하니까 지난 1구간에서 본 수철리가 떠오릅니다.

행정리에서 세걸산 옆의 세동치로 올라가던 길목에 있는 마을입니다. <!--[endif]--> 

지리산 자락에 수철리가 두 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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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동치에서 운봉으로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이 수철리이고 동부능선 왕등재와 깃대봉에서 산청 쪽으로 내려가면 수철리가 있다.

모두 산자락의 물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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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endif]-->마시는 '물'의 고대어는 '믇' 혹은 '묻'이었으며 한글로 씌어진 고전에 보여지는 물은 '믌' 혹은 '뭇' 등으로 변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이 되었다. <!--[endif]--> 

따라서 물 옆의 골짜기나 마을의 경우 '뭀울' 혹은 '뭇막' 이라 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 > 무싀울 > 무시울, + > 무수막 > 무쇠막 등으로 변하여 오늘날에도 무시울, 무시울, 무쇠막 등의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endif]--> 

그러니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 = 수철리水鐵里가 된 것에 불과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리산 자락의 두 군데 이외에도 '수철리'라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데 모두 하천가에 있는 마을이다비슷한 예로 오늘날 서울의 한강가에 있는 금호동金湖洞도 원래 이름이 '무수막'이었다.

물의 마을이란 뜻으로 물막 > 무수막 > 무쇠막 이라 불리다가 훗날 사람들이 무쇠솥 운운하며 말을 지어내어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쇠 금을 따와서 금호동이라 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endif]-->초기철기시대 혹은 삼국시대도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도 야철은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해야 가능한 일이며 현재의 제철산업이 항구 도시에서 발달하듯이 그 당시에도 대부분 큰 강가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외국에 반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철저하게 금지시킬 정도였다.

국가 권력과 지원이 미치지 않는 지리산 골짝 마을에서 야철을 할 수도 없었으며 할 이유도 없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따라서 '수철리'는 무쇠솥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쇠막이라는 옛 지명대로 '물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섬강 주변마을 이름의 '문막'도 동일한 어원에 속한다.  <!--[if !supportEmptyPar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