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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사찰 답사 (칠불사 ~ 쌍계사 ~동정호)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그 루트에서 벗어나 들러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백두대간을 세 번이나 완주하고 9정맥을 마쳤으며 지맥을 50여 개 섭렵한 저이지만 지리산은 들면 들수록 찾아가보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여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만큼 저를 매료시키기에 너무도 충분한 곳입니다.

너무나 많은 얘기들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며 인문지리, 종교, 언어, 음악, 미술........


나름 열심히 준비를 하고 둘레길에 임하기는 하지만  매 구간을 마치고 나면 항상 아쉬움이 남곤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지요.

사단법인 '숲길'에서 개척해 놓은 그 길은 정해진 루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실 '(사)숲길'에서 안내하고 있는 지리산이 어디 그 길만이겠습니까?

그 많은 것을 담고 있는 큰 지리산의 얼개 정도만 제시해 주고 나머지는 둘레꾼의 몫으로 남겨주자는 취지였을 겁니다.

이는 루트의 아쉬운 점을 지선支線 혹은 회귀선回歸線 등을 둔 것만 봐도 명백합니다.

소개하고 싶은 명소도 많고 특히 둘레꾼들 개개인이 관심을 갖고 있을 곳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사) 숲길'의 배려라 보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멋모르고 길을 따라 나선 이들이라 하더라도 구간을 진행해 나가면서 자꾸 뒤를 쳐다보게 되는 이유가 이런 점에 대한 아쉬움 때문 아닐까요?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내에 계획된 구간을 진행해야 하지만 자꾸 곁눈질을 하게 되는 것은 꾼들이 느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입니다.

물론 그런 아쉬움 때문에 둘레길 혹은 지리산을 자꾸 찾게되는 또 다른 동기를 부여해 주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런 고통은 둘레길을 걷기 이전에 어느 정도 지리산을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그 고통의 깊이는 더 할 것 같습니다.

둘레길을 걷다가 당장이라도 능선으로 오르고 싶은 심정이 어디 저만의 충동이겠습니까?

그나마 지리산이 주는 중후함 혹은 넉넉함이 저같은 사람의 경망스러움을 자제시켜 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것들을 저에게 국한시켜 얘기하자면 가령 오미 ~ 산동 구간을 걷다가 화엄사와 천은사를 들러야 하나?

아니면 다음에 몰아서 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생략?


또 부춘 ~ 가탄 구간을 지나면서 쌍계사니 칠불암이니 불일암 등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대비마을大妃村이나 세이암洗耳巖 그리고 쌍계석문雙磎石門의 각자刻字 확인작업은?

중간에 구간을 탈출하여 거기까지 갔다와?

그러면 구간은 언제 마무리하고 그럴 경우 귀가 시간은?

충분히 딜레마dilemma에 빠져 갈등을 느끼게 할 만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저는 일단 22구간을 마무리한 후, 부족한 부분은 다시 방문하여 몰아서 답사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몇 구간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최근 메일 하나가 날아옵니다.

마침 서불산에서 칠불사와 쌍계사를 이번 순례 예정지로 잡았으니 참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불일암 코스도 함께 넣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쌍계사의 경우 직접 스님으로부터 안내도 받는다고 하니 혹시나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 참석을 하기로 합니다.


참배 코스 먼저 칠불암에 들러 새벽 예불에 참가했다가 조찬을 한 다음 쌍계사로 내려가 참배를 마치고는 동정호가 있는 악양으로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오찬을 마친 다음 동정호를 둘러보고 시간이 있으면 화개장터를 들르고 그런 다음 귀경을 한다는 겁니다.


죽전에서 차를 타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차는 화개장터에서 좌틀하여 벚꽃 10리길을 지나 고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창 밖으로 눈발이 날리는군요.

4월 하고도 8일인데...

그것도 벚꽃 구경을 하려고 하동군에서는 벚꽃 축제를 하겠다고 난리를치고 있는데 눈이라니!

차에서 내리는 도반들의 어깨는 이미 오므라들었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건물의 처마 밑으로 피한 다음 회장님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그 시각 칠불암 마당 전경.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이 진행 중이니 조용히 참석하자는 회장님 말씀에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동국제일선원이라!

금강산 마하연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참선 도량이라는 얘기이죠?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님의 글씨입니다.

'추사秋史 이래 여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추사체에 능한 분이라는 평가입니다.

칠불사의 전각 편액扁額이나 주련柱聯까지 거의 모두 여초의 작품이라 합니다.

여러가지 얘기가 많이 있는 칠불사.

그중에서도 이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은 선종의 기도처라는 의미 외에 칠불사와 '재난災難'과의 관계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명을 통하여 화禍를 면하려 했다는 이 얘기는 칠불사가 얼마나 화재에 시달렸는가 하는 안타까운 과거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칠불사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이런 얘기가 좀 어색하게 들리는 건 사실입니다.

수차례 화재를 입어 정문 현판을 칠불사에서 東國第一禪院으로 바꾸기 까지 했음에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그러던 조선조 순조때 또 화재로 인하여 절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이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는 절의 정문에 있던 보설루의 東國第一禪院' 현판을 보고는 깜짝 놀라 "저 글들에는 불(火)이 들어 있어 또 화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자 절에서는 東國第一禪院 중 國에서 한 점을 떼고, 第에서 그리고 禪과 院에서도 각 1점씩을 빼어 4획(火)을 없이 썼으나 118년 후에 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 유래가 있는 현판입니다.

이 현판이야 그 후에 쓴 것이기는 하지만.....

대웅전 안으로  들어간 도반들은 예를 갖추고는 절도하고 예불도 드리고들 합니다.

그런데 대웅전이 좁아 사실 들어갈 자리도 별로 보이지 않아 밖을 서성거립니다.

어느 분도 문수전과 대웅전만 오가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대웅전에 계시던 분들이 문수전으로 자리들을 옮기시는군요.

저는 대웅전으로 들어갑니다.

절을 올리고 불교 간련 서적을 빼와 책도 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얘기가 있나요?

우선 김수로왕 얘기가 나오고 아유다국 얘기가 나옵니다.

허황옥 즉 허황후의 오빠는 장유보옥 즉 장유선사.

수로왕과 허황후許皇后는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가야국을 이어받고 2남과 3남은 어머니 허황후의 '許'씨의 성을 받아 김해 허씨의 대를 잇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외삼촌 장유선사와 함께 가야산에서 수도를 하다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용맹정진하다 성불하였다는 얘깁니다.

운상원雲上院이라....

구름 위에 떠 있는 선원이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칠불사의 예전 이름이 운상원이라는 얘기죠.

어쨌든 칠불사의 이런 일련의 설화는 우리나라 불교가 중국 - 고구려 - 백제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북방전래설에 반하는 남방전래설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황해도 관찰사까지 지냈던 범허정 송광연(1638 ∼1695)은 두류록(1680)에서 "칠불사는 워래 상원암이라 불렸으며 신라 마지막 왕 김부의 일곱 아들이 수도하여 성불하였으므로 칠불사로 개명하였다."고 하여 가야와 신라 그리고 김수로와 김부를 혼동하고 있는 듯한 글을 남겼습니다.

 

유문룡(1753~1821)은 '유쌍계기'에서 "칠불사의 일곱 부처는 신리 왕자 7인"이라고 하여  원래의 칠불사 설화와는 조금 다르게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칠불사에 대한 설화가 변모되고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덕왕 때 옥보고가 이곳에 머물며 왕산악 이후의 금법琴法을 정리하였으니 옥보고는 가야금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현악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는 얘기도 이 칠불사 얘기를 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대목입니다.

동국제일선원이라 하여 우리나라 2대 참선 도량의 으뜸이라고 하니 많은 선승들이 배출되었을 법도 합니다.

그러니 벽송, 서산, 백암 선사 등이 이 칠불암 출신이고.....

이분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특히 '지리산 계맥'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군요.

맥脈!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핏줄 같이 본 것이죠.

그런 칠불사가 임진왜란과 한국 전쟁 때 소실 되어 잡초만 무성하던 것을 제월당 통광선사가 1978년부터 칠불성지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지리산 반야봉의 거대한 혈맥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다 해발 800고지에 자리잡은 이 칠불사의 지세를 보려면 당재 남쪽의 半開 연화봉에서 바라보라고 하는군요.

그러면서 예로부터 지리산은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했다는 얘기와 이 산의 명칭이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이곳이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중심지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의 남방전래설은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 일가의 창작이라는 설에 의하여 '설화'로서의 기능밖에 수행하지를 못하니 좀 안타까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는 연곡사와 화엄사에 이르러 연기조사 설화에 의하면 더 명백해지는 바, 기회가 있을 때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는 일단 지리라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 외래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서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으로부터 계족산 얘기를 들어봅니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 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니 계족산의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 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와 같은 뜻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범어梵語로 우리말의 '산'이 giri 즉 '지리'란 발음이라는 것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가야국 시절 칠불사의 허황후의 설화나 범왕리라는 지명이 불교남방전래설과 맞물려 남의 얘기로 들려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졸고 '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중에서 발췌


그러면 지리산의 '지리'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되었을까요?

그렇다면 智利山이라고 불렀어야 마땅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 사견임을 전제로 이는 후세 사람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말이라 이해합니다.


백두대간의 시작은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1915m이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은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 등이라고도 했다. 이들 중 두류산(頭流山)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해석해 보면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라는 뜻이다. 즉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이 지리산까지의 이음이라는 인식이 고스란히 이 두류산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들 이해했다. 사실 지리산을 이 산을 타다보면 지루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억지 얘기도 가끔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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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의 형태였던 것이다.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 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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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1 쪽 


한편 반개 연화봉은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명인데, 어쨌든 당재 남쪽이라 했으니 811.8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멋모르고 지났던 그곳을 꼭 올라가봐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이 정도로 하죠.

대웅전 담당 보살님께서 들어오셔서 칠불사의 법력 혹은 기운에 대해서 몇 마디 하여 주십니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여느 대웅전의 부처님보다 더 품위 있게 보입니다.

대웅전 우측...

일곱 분이 성불하신 7명의 왕자.

그리고 우측 상단의 우측부터 김수로왕, 허황후 그리고 장유선사로군요.

그러니까 장유선사는 원래 국적인 인도였을 것인데 가락국에서 그렇게 오래 사셨으니 완전히 귀화하였을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락국의 신하들이겠군요.

그렇게 보니 이 대웅전의 기물 하나하나가 그 사찰에서 임의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 놓은 거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의 범종각입니다.

범종각도 이곳은 특히 원음각이라고 하였군요.

원음각의 편액이나 주련도 여초 선생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보설루.

아까 동국제일선문의 계단을 통하여 올라왔죠.

대웅전을 올라오기 위해서는 이렇게 계단을 통해서 올라오게끔 되어 있다고 합니다.

공사 중인 아자방亞字房.

방 내부 구조가 '亞'字 형태로 되어 있어서 아자방입니다.

한 번 불을 때면 100일은 그 온기가 남아 있어서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는 칠불사만의 독특한 난방형태라고 합니다.

특이한 구들 양식이라는 얘기죠.

대웅전.

그리고 문수전.

지리산이 곧 문수보살이 계신 곳이라 하니....

아침 공양을 하고,

아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둘러봅니다.

...........

1978년부터 폐사가 됐던 칠불사를 중건한 제월당 통광선사 치적비와 복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바로 옆에 그 유명한 영지影池입니다.

수로왕과 허황후 그리고 장유 선사와 7왕자의 얘기와 관련된 연못이죠.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부처님 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입산한 아들들을 수 년간 보지 못했던 수로왕과 허황후가 처남이자 오빠 그리고 아들들의 외삼촌인 장유선사에게 자식들을 잠깐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청請을 넣습니다.

하지만 장유선사는 용맹정진하고 있는 조카들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 거절을 하였는데 마침내 그들이 성불을 하게 되자 면회를 허가하게 됩니다.

다만 조카들이 성불을 하였으니 보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을 맞춰오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칠불사 인근에서 날짜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고는 시간에 맞춰 찾아간 칠불사에서 수로왕과 허황후는 그들의 실체는 볼 수 없었고 다만 달밤에 영지影池에 비친 그들의 법신法身만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죠.

그 달빛에 비친 그림자만을 볼 수 있었습닏.

이미 성불을 하여 부처님이 되었으니 직접 볼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림자 밖에는 볼 수 없었기에 그 연못이 영지影池라는 겁니다.

이 칠불사 옆의 개천이 그래서 梵王川이며, 梵王마을이어서 梵王里가 된 것이며 아들들을 보기 위해서 허황후가 머물던 동네가 大妃村이 된 것이죠.

물론 여느 절집과 같이 이 칠불사도 두 개의 연못이 있습니다.

공양간 바로 옆의 연지蓮池과 이곳 영지....

새로 정자 하나를 만들었군요.

불사가 한창입니다.

좌측으로 대나무 숲.

어느 정도 봤으니 이제 쌍계사로 내려가야죠.

쌍계사로 가는 도중 신흥리를 지납니다.

그 부근 삼거리에 있는 고운 최치원의 세이암洗耳巖을 봤어야 하는 아쉬움이 좀 남아 있습니다.

쌍계사로 올라가는 입구의 매표소를 통과하고.....

일주문을 가기 위해 좌측 계곡 옆을 따릅니다.

예전에는 그냥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쌍계사 일주문의 현판.

쌍계사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一柱가 아닌 겹주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현판은 그 유명한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서예가입니다.

우리나라 큰 사찰의 많은 현판이 해강 선생님 작품이라고 하죠.

청나라에 유학하면서 익힌 서법으로 모든 서체에 능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현판의 글씨는 사본이고 원본은 성보불교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참고도 #1 죽간竹簡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


삼신산이라!

현판에 지리산 혹은 두류산이 아니고 삼신산이라는 글자가 눈에 띕니다.

우리나라에서 삼신산이라 하면 봉래산, 방장산 그리고 영주산이라고 하여 각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일컫습니다.

중국 제나라, 연나라 시대 만연하던 도교의 영향으로 생긴 신선사상 때문에 생긴 산이름입니다.

거기에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방상인 서복에게 사람을 딸려 보낸 곳이 우리나라에 까지 확장이 된 것이고....

그런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방장산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사마천은 방장산을 신선이 산다는 중국 전설 속의 신성한 공간이라고 적었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번은 필히 가봐야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겠습니까?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습니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에는 삼신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이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습니다.

이쯤 되면 조선의 사대부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이 방장산을 그들의 유식遊息의 길이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향한 배움의 길 그리고 공자나 남명 조식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적을 향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금강산, 한라산 등이 삼신산 중 하나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에 중국에 있는 산 이름을 갖다붙인 것을 다시 해석하면서 생긴 오해입니다.

따라서 봉래산은 금강산, 영주산은 한라산이라는 설명은 좀 비약된 거라는 얘기죠.

이 현판에서 '삼신산'이라고 특별하게 쓴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삼신산은 우리나라에 셋이 있는 게 아니고 오로지 한 군데.

이곳 지리산이 곧 삼신산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지리산 = 두류산 = 방장산 = 삼신산이라는 겁니다.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일주문 안으로 들어섭니다.

안내해 주시는 스님의 친절한 말씀을 들으면서....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 있다고 하셨는데.......

내청교를 건너,

천왕문을 둘러봅니다.

다 의미가 있는 분들.....

그러고는 8각 9층석탑인데 이 탑은 오대산 월정사 9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8각은 불교의 실천 수행에 기본이 되는 8정도를 상징하고....

이 탑 안에는 고산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3과와 이웃한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2과등 5과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팔영루八詠樓로 오릅니다.

진감선사(774~850)와 관련한 누각입니다.

선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운 최치원의 글이 유명합니다.

잠시 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 팔영루는 진감선사, 섬진강, 불교음악을 함께 연결하여야 합니다.

즉 선사께서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어산魚山이라는 불교 음악(梵唄)을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지은 것을 몇 차례 중수를 한 후 지금에 이르게 된 것라고 하는군요.

이 얘기도 아래에서 보는 진감선사대공탑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웅전을 가기 위해서는 이 팔영루 밑의 계단을 지나야 하는데 지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회를 하여야 합니다.

그 계단이 금강계단입니다.

팔영루의 뒷면은 이렇게 금강계단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스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습니다만 그때는 다 이해했는데 지금은.....

어쨌든 스님 말씀대로 절에 오면 대웅전은 꼭 참배하겠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아!

그리고 대웅전 앞에 오매불망 그리던 진감선사 대공탑비입니다.

이 비는 광계3년인 887년7월에 세워진 것으로 孤雲 최치원(857 ~ ? )이 썼고 僧 환영이 새겼습니다.

진감선사 혜소(774 ~ 850)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나라 유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고운이 쓴 글이니 그 유려함이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글이라도 저 같은 산꾼에게 오면 이 비문의 느낌이 달라집니다.

국보 제47호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문 중 이 글귀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즉 위와 같이 이 비문에는 知異山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가서 주석하였다. 명의의 집에 환자가 많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절간이 넓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좁게 여겼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康州의 지리산知異山에 이르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 강주는 지금의 진주입니다. 이우성 선생이 교열하고 번역한 '신라 사산비명新羅四山碑銘'에는 智異山이라고 나오지만 이는 독자들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지금의 한자어를 사용한 것이고 어디까지나 원문은 知異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산비명의 원문은 1725년 6월에 찍어낸 쌍계사 소장 진감선사대공탑지의 목판본을 보고 옮긴 것입니다.

이 목판본은 이 절의 화엄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번 답사에서 확인을 하였으니 대단한 성과였음을 스스로 자축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서 지리산이 되었다가 지금의 한자어에 따라 지리산智異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억지로 만들은 얘기라 보여집니다.


어쨌든 책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에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는 기사가 최초입니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나 기타 문서의 기사에도 한자어는 地理山으로 되어 있어 발음은 같으나 한자어 표기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이르러서야 智異山으로 오늘날과 같이 표기되게 됩니다.

그러니 지리산이라는 발음만큼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려졌으니 그때부터 지리산이라는 지명이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국어학적으로 볼 때 '둠/ 두름'에서 두류 > 지리로 음운변화를 일으켰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면서 적당한 표기를 하다 고려사 이후 智異山으로 표기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시대 이후에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 개인적인 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많이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영남학파들에 의해서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집중적으로 사용됐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주로 '두류산'이 체제 부정적인 이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즉 멀리는 노장사상을 주창하는 이들부터 가까이는 동학혁명과 농민항쟁 그리고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거론합니다.

일면 타당하다고도 보여지지만 저는 우리나라 산줄기 즉 백두산頭에서 시작한 우리나라의 산맥山脈이 흘러내려와流 지리산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었다는 산줄기 인식이 자리잡게 됨에 따라 그 이름이 정착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인문지리학이 발전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죠.


한편 주지하다시피 고운 최치원과 이 쌍계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참고 사진 #2  쌍계석문雙磎石門


당나라에서 돌아온 고운은 함양군수로 재직을 하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신라 정부에 서운한 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름 당나라에서 수준 높은 유학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 정부에 자신의 능력을 펴치고자 하는 웅지를 품었을 것인데.....

당시 신라 정부는 불교를 귀족들 사이에 만연하던 무속신앙을 대체하며 호국 신앙으로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불교가 그야말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완성하려는 왕실의 구미에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겠죠.


그런 상황에서 고운이 하는 일이라고는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의 문장이나 다듬고 고사나 풍요롭게 늘어놓는 일이나 하고 있으니 시나 읊고 문장이나 늘어놓는 귀족 사회에 염증을 느끼게 됨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가 당나라를 벗어나 귀국을 결심하였던 것도 병부시랑의 벼슬을 시작으로 나름 웅지를 펴보고자 함이었고 자신이 나라를 다니면서 개혁이 필요성을 느껴 시무책時務策까지 올렸음에도 그는 왕은 물론 귀족들의 냉소만 받았던 거 아닙니까?

최치원의 천명 사상과 개혁안에 무관심한 신라 귀족 사회에 염증을 느낀 최치원은 쌍계사에 들어와 유불선의 합치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니 실로 그가 사상적으로 후대에 미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지리산 신선이 되고자 했던 고운에 대한 평은 분분합니다.

고운의 사대주의적 사상 때문에 신채호(1880 ~ 1936)는 그를 '일개 선비'라고 꾸짖었습니다.

유학의 비조일 그에게 조선의 선비들도 사뭇 엇갈리는 평을 하였습니다.

가령 쌍계사 입구에 있으며 고운이 지팡이로 썼다하여 철장서鐵杖書라 불리는 이 '雙磎石門'이라는 각자刻字에 대한 평만 봐도 그렇습니다.

탁영 김일손(1464~1498)은 광제암문이란 글씨와 비교하건대. 크기는 훨씬 더 커서 말만 하지만 글씨체는 그보다 못하여 아동이 습자習字한 것과 같았다고 폄하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몽인(1559 ~ 1623)은 위 탁영의 평가에 탁영은 글은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면서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다.”고 하였으며, 양경우(1568 ~ ? )안진경의 글씨보다 우월한데 당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수재 박여량(1554 ~ 1611)나는 한 번만이라도 쌍계석문의 큰 네 글자를 손으로 만져보고. 팔영루 아래의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아득한 옛날의 유선儒仙을 불러보고, 천 길 절벽에서 학의 등에 올라타고서 선경을 유람하여 내 평생의 숙원을 풀고 싶었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 유선儒仙은 고운을 가리킴. 

실천 유학의 최고봉인 남명 조식은 악양을 지나 이 쌍계사에 도착하여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이 쌍계사의 쌍계석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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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지와 이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쌍계사 동문이다.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짓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왼쪽에는 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놓았다. 지금까지 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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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며 저 백 리 밖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신응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줄기고, 동쪽으로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쌍계라고 부른 것이다.”


1744, 황도익黃道翼()[1678~1753)은 "경진일에 재촉하여 밥을 먹고 나가 법당의 앞에 이르렀다. 고운이 지은 비문이 있는데, 불노(佛老)의 계승자들에게 많이 이어져 내려왔다. 향로전(香爐殿)에 들어가니 고운의 화상이 있다. 애석하도다. 불세출의 명인으로 불가에 자취를 더럽혔으니 학문을 택하는 것을 삼가지 않겠는가?"라고 평했다.

그 진감선사 비의 아래를 받치고 있는 이 동물을 거북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아마 연鷰일 겁니다.

'제비'라는 훈을 썼지만 강희자전을 보면 "남방에 사는 동물로 흡사 거북같고 이마에 외뿔이 달렸으며 날개가 있어 능히 날기도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서식한다."고 되어 있어 일반적인 제비와는 사뭇 다른 동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상상 속의 동물'로 보여집니다.

참고 사진 연곡사 연기조사탑(동승탑)비


그러니 연곡사의 귀부만 남은 연기조사탑비의 연鷰과 거의 같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1131년 전의 이 귀한 국보를 이렇게 풍화 속에 방치해 놓는냐는 것입니다.

지진에 시달려 금이 가고 왜놈들에 의해 흠이 나고 한국전쟁과 이념 투쟁을 거치면서 탄흔도 있게끔 놔두냐는 것이죠.

아까 편액에서 봤듯 이 역시 모조품을 만들어 세워놓고 이것은 고이 보관을 해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저 나랏돈 빼먹는 데만 혈안이 되었지 이 귀한 보물을 .......

스님도 개탄을 하십니다.

대웅전 바로 옆의 마애불.

독특한 형식입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신 명부전.

바로 옆에 당간과 구시.

구시는 밥통으로 썼는 설이 유력한 거 같습니다.

사리탑을 지나......

여기서 탑돌이를 해야죠.

그러고는 화엄전입니다.

화엄전의 양 측면에는 불경 목판본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해인사의 장경각이라고 보면 됩니다.

진감선사 대공탑비를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 그 내용을 각자한 판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번 답사에서 얻은 소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이런 곳에 보관을 하다니 도난과 화재에는 속수무책일 듯 싶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없이 들른 삼성각.

그런데 우측 범 옆에 앉은 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신들 중 오직 지리산 산신만큼은 여자입니다.

마고 할머니.

노고단에 얽힌 이야기

. ()은 제단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렇다면 노고가 무슨 말이야?”

장감독의 궁금증은 이어진다.

세 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신라 시대 얘기니 엄격하게 따지면 아마 통일신라시대 이후 얘기일거야. 이 땅이 원래 백제 땅이었으니까.”

우리나라 풍습에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 양육 그리고 무병장수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삼신(三神)이 마고, 궁희, 소희 등 세 분을 이르는 말이다. 이 노고단이 바로 이 할머니 중 마고 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이다. 이는 신라 내물마립간 때 박제상이 쓴 징심록 십오지중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얘기라고 한다. 얘기는 6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미르 고원에 마고성이 있었고 이 성의 성주가 마고할머니였다. 마고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궁희, 소희였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마고 궁희 황궁 유인 한인 한웅 한검(단군)’으로 계승되었다고 쓰고 있다. 결국 노고단은 우리나라 개국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노고단이 바로 선도성모를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는 거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서 올렸다. 이 남악사가 지금은 노고단에서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단다. 이처럼 나라에서 제사를 올린 것은 민중차원의 성모신앙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삼신을 천신, 지신, 인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어쨌든 이런 것들을 삼신할머니라 인격화해서 부르는 거겠지. 하여간 우리 옛 선조들은 하느님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죽을 때는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거 같아.”

그래.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도 삼신을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고 있지.”

역시 다큐감독이라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장감독이다.

그렇군. 단군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고 신라의 탈해왕도 토함산으로 갔다고 했으니.”

그런데 또 다른 설()은 뭐야?”

노고단을 어원으로 풀은 거야. 우리말의 이란 말은 우선 크다, 많다를 뜻하잖아? 그러니 큰 산일 경우 한뫼/한미/한메등으로 불렸다고 하지. ‘한뫼가 발음이 바뀌어 할미가 되자 이를 한자어 노고(老姑)로 표기했고. 산에 단()이 있으니 노고단(老姑壇)이 되었다는 얘기지. 그렇잖아? 우리나라 곳곳에 노고산이 많잖아. 그 이유야!”

대간길은 여기서 직진하여 무넹기 ~ 종석대로 진행을 하여야 하나 공단에서는 휴식년제로 막아 놨다. 부득이하게 여기서는 노고단 대피소로 진행을 하여 대간길을 이어가야 한다.

졸저 전게서 66쪽 이하


흔히 백두산은 아버지 산이고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합니다.

바로 지리산의 신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고 할머니'는 동학농민혁명 때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마고 할머니가 산신으로서 군주사회의 대항마 역할을 하여야 하였으며,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시천주侍天主의 지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신이 노고단에 있으면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되고 마고 할머니가 되며 천왕봉으로 가면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황후가 되고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됩니다.

그래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인 것입니다.

불교의 우수함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토속신앙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합니다.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면 한 손으로는 금속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는 그림 부채를 가지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불타佛陀를 부르고 또 법우화상法祐和尙을 부릅니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智異山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法祐和尙이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이 대단했습니다.

하루는 한가로이 있는데, 갑자기 산의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물이 흘러온 곳을 찾아 천왕봉天王峰 꼭대기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면서 인간세계에 유배流配되어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의 술법術法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중매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딸 여덟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습니다. 이들에게 무당의 술법巫術을 가르쳤는데, 금속방울을 흔들고 그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다니면서 무당의 일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로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하고 접신接神을 한다고 합니다.

- 조선 무속고巫俗考


이렇게 법우화상의 일화에서도 보듯 불교는 우리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 실상사 앞의 석상이나 장승 등이 다 이렇게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화해 혹은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륙의 유지리산록(1463)을 보면 "산 속에 있는 여러 절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성모에게 제사하지 않는 데가 없다."고 쓴 흥미로운 대목 역시 이러한 점을 반증해 주는데 이는 현대 사찰의 삼성각과 같은 기능을 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어쨌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홍매화를 보면서,

범종간을 지나 우틀합니다.

옥천교를 건너 금당으로 향합니다.

옥천교라....

이 쌍계사의 원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습니다.

그런던 것을 헌강왕 때 이 절을 중창하면서 진감선사의 대공령탑을 제작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석이 완성되기 전에 헌강왕은 사망하였고 다음 왕인 정강왕( ? ~ 887)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되었는데 당시 부근에 이미 옥천사가 있어서 개명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보고를 듣기를 절의 문이 두 줄기 간수澗水에 임해 있다고 하니 정강왕이 쌍계사雙磎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고운은 적고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불일폭포 ~ 불일암 ~ 삼신봉 ~ 영신봉으로 오르는 루트입니다.

그러니 관음봉으로 올라 지리동부능선과 횡천지맥을 만날 수 있고 삼신봉으로 올라서는 낙남정맥을 만나게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낙남정맥을 타고 올라 영신봉에서는 드디어 백두대간을 만나게 되겠지요.

청학루를 보고....

청학하면 고운이 타고 다녔다던 학입니다.

팔상전을 보고 좌측으로 올라,

드디어 금당으로 오릅니다.

이곳이 원래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가 건립된 곳입니다.

옥천사의 건립 과정은 이렇습니다.

즉 신라 성덕왕 21년인 722년 대비, 삼법 등 두 분의 화상이 당나라에서 선종 육대조인 혜능선사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와서 '지리산 곡설리의 갈화처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범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절을 지어 옥천사라 하고 조사를 봉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을 문성왕 2년인 840년 진삼선사 혜소가 개창하고는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절명을 하사賜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금당은 옥천사라는 절이 처음 세워진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金堂에는,

당나라 선종 제6조인 혜능대사의 정상 즉 머리가 모셔져 있는 탑이 있고,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편액이 양 옆에 붙어 있는데 이 글은  중국 당나라 시인 왕유가 지은 '육조혜능선사비명'에서 따온 글귀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과 육조정상탑이라는 글 등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쌍계사의 만허 스님이 내온 차 맛을 보고는 예전에 맛을 봤던 중국의 명차 용봉승설을 떠올리며 쓴 글이라고 하는군요.

육조정상탑.

참 보람있는 답사였습니다.

정말이지 이렇게 열심히 사찰 답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려가야죠.

화개천 건너 881.6봉이 높게 보이는군요.

저기서 보면 쌍계사가 훤히 보일 것 같군요.

점심은 악양의 봉대마을에서 합니다.

이 악양은 산음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가졌던 산청과 같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그 악양은 소상팔경瀟湘八景으로 유명합니다.

소상팔경은 중국의 소주와 삼강지방의 절경 여덟 곳 가령 소상야우瀟湘夜雨 즉 소상강에 밤에 내리는 비, 동정추월(洞庭秋月) 즉 동정호의 가을 달빛 등에 대한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의 악양팔경은 악양의 풍경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악양 바로 옆의 섬진강의 너른 백사장이 그 중 평사낙안平沙落雁 즉 평평한 백사장에 날아와 흩어지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말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기 위하여 점심을 먹고 동정호 주변을 산책하기로 합니다.

하동군 악양을 얘기하기 위한 사설이 길었습니다.

우선 지세부터 볼까요.

풍수적으로 풀어 본다면 주산인 거사봉1133m(최근 업그레이드된 국토지리정보 발행 1:50,000 지도에 이름을 올렸음)을 중심으로 좌 ・ 우의 동남능선과 서남능선이 각 청룡 ・ 백호가 되고, 섬진강 건너편의 백운산이 안산이 되어 골의 안쪽은 광활하지도 협소하지도 않은 잘 짜인 지세를 이룹니다. 

즉 동남의 구재봉에서 중앙의 거사봉을 거쳐 서남의 신선봉까지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능선 안에 포근하게 들어앉은 분지가 악양골인 것입니다.

남쪽 입구의 미점리 개치에서 골 안쪽을 향하여 축지, 신대, 신성, 신흥, 정동, 중대, 동매를 거쳐 악양의 제일 안쪽 등촌에 이르고, 다시 골의 바깥을 향하여 매계, 정서, 입석, 봉대, 평사에 이르면 섬진강 강가를 제외한 악양의 5분의 4바퀴를 돌게 됩니다.

즉 악양의 나머지인 무딤이들을 사이에 두고 평사와 미점이 마주하면서 악양의 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악양은 이웃 청암골이나 화개골처럼 좁고 길게 일자로 뻗어있는 골이 아니라 타원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퍼져있습니다.

'현장정신'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조선 최고의 지리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입시켜 볼까요?

청화선인은 택리지의 ‘산수편’에서 지리산을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난 곳이라 두류산"이라고 소개하면서 “물산이 풍부해 부산富山이라고도 부른다"고 소개합니다. 그러고는 

"산의 남쪽에는 화개동花開洞과 악양동岳陽洞이 있는데, 모두 사람이 살고 있으며,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이 이자겸李資謙(고려사, 동국통감 등 타문헌에는 최충헌으로 기재되어 있음) 횡포가 심해지자 장차 화를 당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동에 숨어 살았다. 그 후 조정에서 그를 찾아서 벼슬을 내리고 불렀지만, 한유한은 도망쳐서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며 어떤 사람은 그가 신선이 되어서 갔다 한다.…(중략)…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지리산 안에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梅(악양의 매계리)이다. 근래에 들어 비로소 조금씩 사람이 다니기 시작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악양이 청학동인지 무릉도원인지 부는 별론 택리지에서 말하는 가거지可居地의 네 가지 요소인 지리地理, 생리生利, 산수山水, 인심人心 모두를 두루 갖춘 곳이라 합니다.

* 무릉도원을 점필재 김종직의 경우는 세석평전, 탁영 김일손이나 남명 조식 등은 불일평전으로 보는 등 견해가 갈린다. 

가거지可居地란 말 그대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말하죠.

즉 풍수적 길지에 해당하는 ‘지리’, 생업에 유리한 곳을 중시하는 ‘생리’, 풍류를 즐길 만한 곳을 중시하는 ‘산수’, 주변 사람들의 좋은 인성을 중시하는 ‘인심’의 요건을 충분하게 갖춘 곳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악양은 택리지에서 청학동으로 거론될 정도로 풍수인 ‘지리’의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빼어난 경승지가 곳곳에 산재하여 ‘산수’ 역시 최고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양의 거지는 배고픔을 모른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심’이 후박합니다.
그리고 택리지는 가거지의 입지조건 중 생산성이 높은 토지와 물자교류에 필요한 교통조건을 나타내는 ‘생리’를 제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니 악양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섬진강으로 통한 해운이 발달한 곳으로 생리의 요건 또한 확실하게 갖춘 곳입니다. 

바람이 몹시 드셉니다.

동정호 뒤로 구재봉과 우측의 분지봉을 동쪽 배경으로 하고 있군요.

저 구재봉과 분지봉 사이에 먹점재가 있고 지리산 둘레길은 그 먹점재를 지나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먹점재를 좌측으로 작은 봉이 하나 있는데 그 봉이 아미산이죠?

그 아미산 아래 저 악양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정호에 이른다. 동정호 저편에는 악양루가 있다. 악양루는 1937년 아미산 아래에 있었으나 누대가 너무 고지에 있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여 1947년 개치마을 입구 도로변으로 옮겼었다. 그러나 이 누각은 관리 소홀로 훼손되어 결국 이를 다시 허물고 2012년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저 뒤 가운데 좌측이 횡천지맥에서 내려오는 줄기로 남명 조식이 "이곳은 청학동이 아니다."라면서 되돌아 갔다던 회남재이고 그 우측 낮은 곳이 배티재입니다.


우측으로 칠성봉905.8m을 지나,


삼화실재 ~ 구재봉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횡천지맥 라인이죠.


동쪽의 즉 저 부부소나무가 있는 해발 9.9m의 저 야트막한 동산을 여기서는 군산이라 부릅니다.

그러니 중국은 호수 안에, 우리는 무딤이 들판 한가운데 있는 형세입니다.

 평사리 들판을 이곳 사람들은 ‘무딤이들’이라 부르는데, 밀물 때 섬진강 물이 역류하고 홍수가 나면 무시로 물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무딤이 들판이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거죠?

 

무림이들이라 부르는 평사리의 너른 들판을 지난다. 이 평사리는 변한시대부터 조성된 마을이다. 이 들판이 한국 문학사상 가장 방대하다고 하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다. 고향이 통영인 박경리는 정작 평사리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자라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에나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너른 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래서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설정했다.”

 

이 악양에서 저 횡천지맥의 구재봉을 넘을 때, 적량의 경우는 삼화실재를, 하동은 먹점재를 이용했을 겁니다.

한편 남명은 이우옹과 함께 저 삼화실재(당시 이름으로는 삼가식현三訶息峴)를 넘으면서 고개의 유래를 밝혔습니다.

즉 "고개가 높이 솟아 하늘에 가로놓여 있어서 올라가는 사람이 몇 걸음을 못가서 세 번이나 숨을 내쉰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죠.


지난 번 흐린 날 찾았을 때의 부부송.

토지의 길상과 서희나무라고 하죠.

좌측으로 거사봉에서 내려온 형제봉1116.2m이 보입니다.

지리남부능선 라인이죠.

지리남부능선은 이후 신선봉615.3m을 거쳐

한산사가 있는  고소산성으로 떨어집니다.

동정호는 제 뒤에 있는 서쪽을 배경으로 해야 되겠죠.

그래야 동정추월(洞庭秋月;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니 한사만종(寒寺晩鐘;한산사의 저녁종소리)이니 하는 소위 악양8경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악양을 나와 구례로 가는  길이 좀 막히는군요.

화개장터에서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옥화주막도 찾아봐야 했었는데 인산인해라 그냥 지나칩니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火田民)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隣近)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례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傳例)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김동리 역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