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을 빨리 마무리해야 산으로 들 수 있는데 .....
요즘 스케쥴이 영 엉망입니다.
산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레길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고.....
새벽에 집을 나섭니다.
화요일인지라 사무실 일은 앞뒤로 다 정리해 놓고....
그러니 특별한 일도 없군요.
주말을 위해서 잽싸게 한 구간하고 올라오면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도 있으니 노모께 크게 부담드리는 일도 아닐 겁니다.
18구간 방광 ~ 산동 구간 13km 중 4km는 이미 했지만 문제는 '남악사 터'입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터를 찾아야 합니다.
그럴 경우 중복 구간을 더 진행한다 해도 약 2km.
그렇다면 18구간은 11km에 마지막 19구간이 15.9km이니 오늘 구간을 27km 잡고 7시간 정도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 9시 반부터 시작한다면 16시 30분.
중간에 산동면에서 점심을 먹어여 하니 속력을 조금 더 내야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게하죠.
전과 같이 17:25 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라면을 먹은 다음 구례구행 무궁화로 환승합니다.
구례구에 8:10 도착하여 08:30 구례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구례구역에는 지리산 남악제 축제를 알리는 브로우셔가 비치되어 있군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오늘 이 남악사 터를 꼭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오늘은 주민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더라도 확실하게 물어서 꼭 찾아봐야죠.
정시에 오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09:00에 출발하는 당동마을 행 버스를 탑니다.
버스에는 구례에서 성삼재로 오르는 버스의 변경된 시간표가 붙어 있군요.
이 버스 노선은 새벽 첫 차 이외에는 시간 변동이 하도 심하니 성삼재로 오르려 한다면 필수적으로 가기 전에 미리 시간을 확인하는 게 상책입니다.
당동행 버스에서 방광마을 ~ 산동면사무소까지 진행한다는 부부둘레꾼을 만납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금방 친숙해지는군요.
또 둘레길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그분들은 방광마을 앞에서 내리십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지도 #1
09:26
당동마을 표지석 앞입니다.
이 당동마을이 바로 남악사라는 사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죠?
지난 번 갔던 루트대로,
남악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마을 회관을 지나,
예술인 마을로 들어섭니다.
그때 마침 승용차 한 대가 내려오는군요.
무조건 붙잡고 '남악사 터'를 문의합니다.
다행히 멀지도 않군요.
바로 저기 교통 안내판 바로 좌측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바로 둘레길 옆인데.....
09:33
둘레길 바로 옆입니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남악사 터가 거의 올라와 있지 않죠?
다 그냥 지나쳤다는 얘깁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죠.
걷는 데만 관심이 있다든가, 공부를 하지 않고 왔다는가 아니면 찾으려 노력을 했건만 자료를 구하지 못해 그냥 지나쳤다든가....
모르긴 몰라도 이 안내판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를 보면,
신라 오악 중 하나인 남악이 바로 이 지리산이다.
신성시한 이 남악에서 지리산신을 모시는 곳이다.
통일신라 시대 때 천왕봉에서 지내던 제사를 고려시대에 들어 노고단으로 옮겼고,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온당리 당동으로 다시 옮겼는데 영조때 폐사가 된 것을 새롭게 세웠는데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폐사시켰다. 그것을 1969년 구례군민들이 뜻을 모아 현재 화엄사 옆에 새옵게 만들어 약수제라는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뭐 이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남악사를 이 정도로 홀대해서는 안 되죠.
이렇게 정리해보죠.
남악사는 지리산신을 모신 곳입니다.
산악숭배사상의 결과죠.
대한민국의 모든 산신이 다 남자이지만 지리산 산신만큼은 여자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바로 '마고 할머니'가 등장하고 '선도 성모'가 등장합니다.
이때의 지리산은 노고단을 얘기합니다.
당시 노고단은 반야봉 소속이었을 테니 이 노고단의 여신이 천왕봉으로 가면 위숙황후가 되고 마야부인이 되기도 합니다.
위숙항후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이고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이 어머니입니다.
이렇듯 지리산의 산신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쌍계사의 삼성각에는 여자 산신이 모셔져 있는 것입니다.
마고 할머니.
노고단에 얽힌 이야기
“형. 단(壇)은 제단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렇다면 노고가 무슨 말이야?”
장감독의 궁금증은 이어진다.
“세 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신라 시대 얘기니 엄격하게 따지면 아마 통일신라시대 이후 얘기일거야. 이 땅이 원래 백제 땅이었으니까.”
①우리나라 풍습에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 양육 그리고 무병장수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삼신(三神)이 마고, 궁희, 소희 등 세 분을 이르는 말이다. 이 노고단이 바로 이 할머니 중 마고 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이다. 이는 신라 내물마립간 때 박제상이 쓴 ‘징심록 십오지’ 중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얘기라고 한다. 얘기는 6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미르 고원에 마고성이 있었고 이 성의 성주가 마고할머니였다. 마고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궁희, 소희였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마고 – 궁희 – 황궁 – 유인 – 한인 – 한웅 – 한검(단군)’으로 계승되었다고 쓰고 있다. 결국 노고단은 우리나라 개국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 같다.
②그리고 또 하나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노고단이 바로 선도성모를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는 거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서 올렸다. 이 남악사가 지금은 노고단에서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단다. 이처럼 나라에서 제사를 올린 것은 민중차원의 성모신앙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 이 삼신을 천신, 지신, 인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어쨌든 이런 것들을 삼신할머니라 인격화해서 부르는 거겠지. 하여간 우리 옛 선조들은 하느님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죽을 때는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거 같아.”
“그래.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도 삼신을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고 있지.”
역시 다큐감독이라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장감독이다.
“그렇군. 단군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고 신라의 탈해왕도 토함산으로 갔다고 했으니.”
“그런데 또 다른 설(說)은 뭐야?”
“③노고단을 어원으로 풀은 거야. 우리말의 ‘한’이란 말은 우선 ‘크다, 많다’를 뜻하잖아? 그러니 ‘큰 산’일 경우 ‘한뫼/한미/한메’ 등으로 불렸다고 하지. ‘한뫼’가 발음이 바뀌어 ‘할미’가 되자 이를 한자어 노고(老姑)로 표기했고. 산에 단(壇)이 있으니 노고단(老姑壇)이 되었다는 얘기지. 그렇잖아? 우리나라 곳곳에 노고산이 많잖아. 그 이유야!”
대간길은 여기서 직진하여 무넹기 ~ 종석대로 진행을 하여야 하나 공단에서는 ‘휴식년제’로 막아 놨다. 부득이하게 여기서는 노고단 대피소로 진행을 하여 대간길을 이어가야 한다.
졸저 전게서 66쪽 이하
흔히 백두산은 아버지 산이고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합니다.
바로 지리산의 신이 여자地母神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곧 성모신앙이 적어도 지리산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 고유신앙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고 할머니'는 동학농민혁명 때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마고 할머니가 산신으로서 군주사회의 대항마 역할을 하여야 하였으며,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시천주侍天主의 지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인 것입니다.
불교의 우수함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토속신앙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고 합니다.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면 한 손으로는 금속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는 그림 부채를 가지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불타佛陀를 부르고 또 법우화상法祐和尙을 부릅니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智異山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法祐和尙이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이 대단했습니다.
하루는 한가로이 있는데, 갑자기 산의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물이 흘러온 곳을 찾아 천왕봉天王峰 꼭대기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면서 인간세계에 유배流配되어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의 술법術法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중매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딸 여덟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습니다. 이들에게 무당의 술법巫術을 가르쳤는데, 금속방울을 흔들고 그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다니면서 무당의 일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로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하고 접신接神을 한다고 합니다.
- 조선 무속고巫俗考
이렇게 법우화상의 일화에서도 보듯 불교는 우리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 실상사 앞의 석상이나 장승 등이 다 이렇게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화해 혹은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륙의 유지리산록(1463)을 보면 "산 속에 있는 여러 절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성모에게 제사하지 않는 데가 없다."고 쓴 흥미로운 대목 역시 이러한 점을 반증해 주는데 이는 현대 사찰의 삼성각과 같은 기능을 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어쨌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신라 때 시작된 제사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고려 우왕 때에는 남해안을 침략한 왜구들을 지리산 신사인 남악사에서 기도를 통해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던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던 남악사를 이 온당리로 옮겼고 매년 봄, 가을에 국행제를 지내기 까지 하였음이 남원읍지인 '용성지龍城志'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고종은 다시 옥악을 정했는데 이때에도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았었으나 1908년 일제는 자신들의 신사神社와 상충된다고 느꼈는지 국행제를 폐지하면서이곳에서의 제사를 혁파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1969년 전라남도와 구례군민이 협력을 하여 화엄사옆에 남악사를 세워 지리산신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4월 곡우 때 제사를 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 남악사는 지리산신사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곳이 아니고 화엄사 옆이냐 하는 점에 의문이 듭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아예 노고단으로 올라가야 했을 것이고.....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때가 1967년이니 아마도 많은 사람이 제사에 참여케 하려면 교통도 좋고 주위에 관광자원도 풍부한 화엄사 부근이 제격이었을 겁니다.
그 터입니다.
'남악사 터'를 빠져나와 길을 따라 진행하면 바로 예술인 마을이 펼쳐집니다.
좌측으로는 난동제가 자리하고 있고 정면의 산줄기가 바로 서시(견두)지맥입니다.
지난 구간 때 실컷 봤습니다.
주거지역만이 아니군요.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고....
첫 골목에서 우측으로 올라갑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좌틀하면,
이렇게 호젓한 오솔길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진행하노라면 좌측으로 시야가 트입니다.
좌측 산성봉362m에서 이어지는 줄기가 서시지맥으로, 지맥은 그 좌측으로 천왕봉695.4m ~ 형제봉621.7m으로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그 우측으로는 깃대봉691.1m이 보이고 ....
진행방향은 도로에서 우틀해야죠.
우측 멀리 지초봉601.6m이 보이는군요.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오르다 잠시 뒤를 돌아봅니다.
조금 전 본 산성봉 좌측으로 봉성산165.6m과 오산541.7m 그리고 그 좌측으로 계족산702.8m 줄기.....
지난 구간 때 자세히 살펴 본 봉우리들입니다.
이제 지초봉과 간미봉728.4m을 잇는 구리재까지는 그냥 이 임도만 따라 올라가면 되겠죠.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차림새를 간편하게 하고...
우측으로 당산나무 수준의 소나무를 보고....
09:49
실제 오늘 구간인 난동 ~ 산동 구간의 시작인 이곳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이곳에서 방광을 지나 오미로 갈 수도 있고 서시천변 길을 이용하여 오미로 진행할 수도 있는 것이죠.
저는 그 루트를 17구간과 17-1구간으로 불렀습니다.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09:50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바로 우틀하여 시멘트 포장길을 따릅니다.
사방댐도 보고,
10:06
환경부에서 관장하고 있는 생태시스템 연구 장소도 지납니다.
여기서는 좌틀합니다.
직진하면 간미봉으로 오르는 루트입니다.
이렇게...
낙석방지 시설도 되어 있고....
10:17
지도 #1의 '나'의 곳에서는 우틀합니다.
좌틀했다가는 아까 올라왔던 길로 도로 내려가게 되죠.
정면으로 지초봉도 보입니다.
뒤돌아 보니 너른 광의 들판이 보이고....
그러고는,
지도 #2
10:46
팔각정과,
이정표 등이 있는 구리재입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지초봉, 우측으로 가면 납재 ~ 간미봉입니다.
둘레길은 그냥 직진입니다.
이제부터 광의면을 떠나 산동면으로 들어섭니다.
산수유의 고장이죠.
그러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바로 견두산775.1m입니다.
정면으로 바로 보이는군요.
암봉 바로 좌측 봉우리죠.
서시지맥 봉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저 견두산에는 눈이 쌓여 있군요.
요 며칠 추웠죠.
그리고 견두산 우측에 있는 밋밋한 775.1봉이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삼각점이 있는 견두산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 정상석은 좌측의 803.6봉에 있고 사실 그 봉이 견두산입니다.
좌측으로 살짝 돌아보니 지초봉의 산불감시탑이 보이는군요.
11:01
팔각정이 있는 쉼터에서 임도를 버리고 ,
좌틀하여 숲으로 들어가 물길을 따릅니다.
지도 #2의 '다'의 곳입니다.
무료한 임도를 벗어나 흙을 밟으니 봄 냄새가 몸에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알현드리고....
그런데 이 구례군에서 조성한 구례수목원입니다.
여기가 사무실이고.....
그런데 지금 수목원을 조성 중인지 조금 허전합니다.
여기서는 바로 밤재가 보이는군요.
19번 도로도 보이고....
이 수목원에는 휴양시설도 있어 여름에는 사람 좀 붐비겠습니다.
견두산을 보면서,
좌틀하여 좁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내려갑니다.
마을 어귀부터 마을 안까지 온통 산수유 천지입니다.
어르신깨 여쭤보니 지금은 다 졌고 며칠 전만 해도 온통 노란 게 정말 예뻤다고 합니다.
11:31
마을회관과 당산나무를 보고....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이 없어질 뻔 했는데 여차여차한 사유로 간신히 이 탑 하나를 건졌군요.
여기에 의자왕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 좌측에 있는 지리산 한옥 게스트 하우스.
11:34
도로로 나갑니다.
우측으로 가는 길은 위안리에서 백두대간과 서시지맥에 막혀 막다른 골목이 됩니다.
길을 건너 식당 일송정을 지나 우측으로 틉니다.
효자가 많이 나온다고 하여 효동마을인 효동교 공사 현장을 지나,
국궁장인 지산정에서,
좌틀하여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릅니다.
좌측으로 조금 전 내려온 구리재와 지초봉을 봅니다.
정면으로는 서시지맥이 이제 너무 높아졌군요.
절 같이 보여 관심 있게 살펴봅니다.
화충법단.
그 아래로는 재단법인 국제도덕협회일관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1947년 김복당에 의하여 서울에서 만들어진 신흥종교랍니다.
안에는 불상도 있고 탑도 있고.....
이번에는 원불교.....
11:57
산동면 사무소입니다.
보통 구간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지만 실제 구간 마무리 지점은 면소재지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죠.
저는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고 계속 진행합니다.
12:30
간단하게 짬뽕 한 그릇 먹고 가려했는데 그거 하나 만드는데 20분이 걸리네요.
3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나옵니다.
원초초등학교를 지나,
19번 도로를 만나는 지도 #2의 '라'의 곳 공식적인 구간 날머리입니다.
일단 18구간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12:34
바로 19구간인 산동 ~ 주촌의 15.1km 구간을 이어가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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