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지리 주릉 구간!
미리 예습 한 번 하고 진행합니다.
물론 오르지 못 할 곳도 있지만 언젠가는 들러야 할 곳이겠죠?
다른 곳도 아닌 지리산이니 아무래도 좀 알고 진행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나올 책을 참조하시고 여기서는 간단하게 스케치 하듯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서 → 동으로 진행하는 순서입니다.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무박산행이니 랜턴을 켜고 시작하겠죠?
백두대간 마루금은 성삼재 ~ 작은 종석대 ~ 종석대 ~ 코재 ~ 무넹기 ~ 노고단 ~ 돼지령 ..... 순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삼재 ~ 작은 종석대 ~ 종석대 ~ 코재 ~ 무넹기 ~ 노고단 구간 대부분이 비탐방 구간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종석대와 종석대에서 보는 조망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사실 무박 산행이다 보면 올라가 봤자 구례시내 야경 외에는 볼 것도 없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안 볼 수는 없는 노릇!
눈팅만 하고 북진 때에는 꼭 들러야 할 곳입니다.
보지 않고 백두대간 완주했다고 자신 있게 명함 내놓기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럼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면서 출발을 합니다.
성삼재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바로 우측으로 매점이 보입니다.
이 그림 기억나시죠?
좌측은 화장실이고.....
우측 매점들 끝에는 커피샵이 있었습니다.
그 바로 좌측 숲 사이로 돌계단 같은 게 비스므리하게 보이면서 희미하게나마 길 흔적이 보입니다.
바로 종석대 오르는 길입니다.
사실 길은 아주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저 직진하면 대간길과는 상관없는 일반 관광도로입니다.
모든 대간을 진행하는 분들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이 길을 따라 진행합니다.
위 종석대는 비탐구간이니 그러려니 하고 또 이 길이 대간길이거니 하는 타성 때문입니다.
사실 공단 초소의 창문이 좌측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이 종석대로 오르는 꾼들을 견제하기 위함입니다.
여길 왜 막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지만 이는 '생태계 보존'이라는 명분 앞에 맥을 출 수 없습니다.
대간길 탐방의 중요성보다는 관리의 편의성을 내세운 공단측의 논리 앞에 "왜 대간길을!"이라는 구호는 무색해집니다.
어쨌든 그 종석대를 오르면,
우선 앞에 '작은고리봉'이라고도 불리는 고리봉과 그 뒤의 만복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만복대 좌측으로 흐르는 능선이 바로 지리 3대 지맥 중 하나인 서시(견두)지맥이고.....
그 만복대 우측으로 지리서부능선이, 그리고 만수천과 계곡 너머 임천지맥의 삼봉산1187m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죠.
다시 그 우측으로는 반야봉......
그러고는 그 우측의 노고단. 이하 갈색 글은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이나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는 '현오와 걷는 지리산' 초고 중에서 발췌한 내용들입니다. 나름 깊이 연구한 내용들이니 술 마시면서 지리산 얘기할 때 어느 자리든 내놓고 얘기해도 말발이 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고단은 노구당老嫗堂이었다. 즉 허재 정석구의 두류산기(1810)에 의하면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峯이 되니 산동山洞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조금 동쪽에 종봉鍾峰(종석대)이 있는데, 남악사南嶽祠 . 천은사泉隱寺 . 화엄사華嚴寺의 주봉이다. 산줄기가 낮아졌다가 동쪽으로 뻗어 노구당老嫗堂이 되는데, 문수동文殊洞의 주봉이 된다.”고 흐름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지리산 노고단 부근에는 노구당이라는 ‘할머니당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 사견으로 ① ‘姑’의 훈이 ‘시어머니’인 반면 ‘嫗’는 ‘할머니’ 임에 비추어 ‘노구당 / 노구단 /노고단’이 되지 않았을까? ② 만복대에서 내려온 줄기에서 솟은 것이 '묘봉玅峯' 즉 예쁜 봉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나와 있는 卯峰峙는 주릉상에 있는 토끼봉卯峰을 염두에 둔 것으로 틀린 표기입니다. 아예 쓰려면 玅峯峙로 썼어야 했을 겁니다. ③지난 구간 성삼재 도착하기 바로 전 마지막 이정표에서 '당동마을' 이정표를 보셨을 겁니다. 그 당동마을은 노고단 부근에 있던 남악사가 조선 세조 2년인 1465년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로 옮겨 제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 남악사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동마을'이라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남악사는 나라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올리는 이른바 국제신사國祭神祠였습니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초고 중애서
나무가 어느 정도 낮아질 즈음 작은종석대로 오르게 됩니다. 중앙에 노고단 그리고 우측에 종석대鐘峰臺. 멋진 능선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우측길을 따르면 시암재(휴게소)로 내려가게 되면서 그 루트는 시암재 ~ 간미봉 ~ 지초봉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지리산 둘레길과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종석대로 가는 능선은 잡목이 많이 우거져 있기는 하지만 가끔 억새를 만나면서 기분이 향긋해집니다. 철쭉도 있으니 봄에 꼭 가봐야 할 곳입니다. 다시 (작은)고리봉 ~ 만복대 능선을 봅니다. 사견에 의할 때 작은 고리봉 = 고리봉, 큰 고리봉 = 두리봉으로 보자고 합니다. 즉,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정리하고 지나가자. ‘지리 99 팀에서도 나온 얘기다. 즉 지리산의 고리봉은 백두대간의 서부능선 상에 두 곳이 있다. 성삼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봉1248m이 운봉읍과 주천면 그리고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1305.4m에 비해 낮다고 하여 작은고리봉이라 불린다.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리산의 전설 김경렬 님의 저서에도 그렇게 그려졌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高와 두리봉의 두頭 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 회자에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큰'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高 보다는 머리頭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 = 고리봉’, ‘고리봉 = 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고리봉에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는 더 하게 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어쨌든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북)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된다. 2017. 9. 21. 진행할 때 찍은 사진이니 딱 이맘때입니다.
중앙 하단에 861번 도로가 보이고 만복대에서 서시지맥이 갈라지는 모습도 확연합니다. 만복대 우측 뒤로 지리서부능선의 흐름도 힘차고 그 뒤로 바래봉鉢峰1186.2m도 확실합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종석대에 오르게 됩니다.
바로 발밑의 차일봉1004.7m 능선을 조망하게 됩니다.
가운데가 화엄사골로 화엄사가 희미하게 보이고.....
차일봉遮日峰은 예전에 화엄사 앞에 가게들이 즐비할 때 차일遮日을 치고 장사하는 집들이 많아 그렇게 붙여진이름이지 큰 뜻은 없습니다.
좌측은 월령봉 능선.
그리고 화엄사골을 따라 눈을 쭉 내려보면 섬진강이 보이고 섬진강 좌측 볼록한 봉우리가 오산541.7m.
오산 그 좌측의 조금 더 높은 것이 계족산鷄足山702.8m.
계족산 얘기 할까요?
너무 길어지니 생략.
제 산행기(계족산 ~ 천황봉 ~ 오산)에 나와 있을 겁니다.
우측 아래 파란 지붕의 우번암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861번 도로가 구불거리며 성삼재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 뒷 라인이 조금 전 작은종석대에서 가지를 친 간미단맥입니다.
날씨만 좋다면 멀리 무등산과 월출산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우번암이 궁금한가요?
이 우번암이 종석대와 관련이 있고 지리10대 중 하나인 우번대가 있는 곳입니다.
대간길을 따라 가다보면 차일봉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10여 분 진행한 곳에 있죠.
종석대에서 본 대간길입니다.
가지는 못하더라도 알고나 지나가자는 얘기입니다.
두 선이 만나는 곳이 바로 화엄사에서 올라오는 곳인 코재 옆 무넹기입니다.
종석대 모습.
우번삼거리를 지나면 이제 법정탐방로와 만납니다.
바로 이곳으로 나오게 되죠.
무넹기를 지나고...
대간길은 여기서 탐방로 바로 우측으로 드는 게 사실 키포인트입니다.
아까 본 노란선.
백두대간길이라는 얘기죠.
좌측으로 도로를 따라 가면 노고단 대피소로 가게 되죠.
이게 조금 전 내려온 종석대입니다.
신라시대 우번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조용한 상선암이라는 절에서 10년 동안 좌선 수도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을 하고 있었다.
우번은 9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수행을 쌓았다고 느낌이 왔다.
그해 봄 어느 날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 미인이 나타나 우번을 홀리는 것이었다.
유혹하는 그녀를 따라 오르다보니 어느덧 종석대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내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하자 그녀는 갑자기 사라지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서 있는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뚯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때서야 우번은 자신의 수행이 크게 부족한 것임을 깨닫고 다시 용맹정진하여 득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득도를 하는 순간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石鐘소리가 홀연히 들려왔다.
그런 우번이 상선암으로 내려가는 도중 자리 잡은 곳이 이 우번대이고 관세음보살이 현신한 자리를 관음대 혹은 석종 소리가 난 곳이라 하여 종석대라 불린다.
다른 사진으로 볼까요?
이번에는 노고단 대피소 앞에서 찍은 사진.
조금 더 늦은 날 찍은 사진입니다.
무넹기에서 대간길을 따라 올라 숲에서 빠져나오면 좌측으로는 노고단 고갯길 우측으로는 오리지널 대간길로 KBS송신소로 가는 길입니다.
저것도 빨리 철거를 해야 할 텐데....
형제봉 능선이나 왕시루봉 능선을 가기 위해서는 우측 길을 따라야 합니다.
잠깐 그 루트를 구경이나 하면,
①형제봉 능선을 타기 위해서는 송신소 앞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저 바위 우측으로 돌아 진행하면 되고,
②왕시루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철책을 넘어 진행해야 합니다.,
- 우측 끝 봉우리가 호남정맥의 끝 백운산이고, 그 앞이 왕시루봉이네요.
희미한 길을 따라 문수암을 지나 왕시루봉 능선으로 진행하면 됩니다.
이 문수암은 지리10대 중 하나인 문수대에 있는 암자입니다.
지금까지 지리10대 중 두 개 즉 우번대와 문수대 등을 봤습니다.
어쨌든 지금 이 길을 가고자함이 아니니....
다시 노고단 고개로 일단 오른 다음 저 노고단으로 올라야 하는데 오늘은 아직 이른 새벽이기 때문에 패스해야겠지요.
만약 조금 더 늦은 시간이었다면 반야봉 뒤로 오르는 일출을 보면서 마이산으로 변한 중봉과 천왕봉도 볼 수 있으련만.....
그러면 이 광경도 보고....
좌측으로 눈을 돌려 좌측 하단의 노고단 고개의 케른도 보고....
지나온 백두대간 라인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뒤가 아까는 그렇게 높게 보였던 작은고리봉1248m.
하긴 만복대1433.4m도 저 정도이니....
노고단 케른과 반야봉.
노고단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필요하지만 너무 길므로 여기서는 통과!
노고단 고개로 다시내려와 능선을 걸으면 돼지평전이 나오고 반야봉이 정면으로 보이게 되죠?
반야봉!
반야......
능현能玄은 반야를 파리로 보내면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을 듣습니다.
구례로 내려와서는 대강 요기를 하고는 막소주 한 잔을 마신 후 반야가 그려주고 간 초상화 아래 누웠다가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고는 가위를 꺼내어 화선지를 네 토막으로 오린 후, 볼펜을 잡고 '꿈'이라 쓰고는 '꿈결처럼 만났다가 꿈결처럼 헤어진 여대생과의 꿈결 같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합니다.
그이의 이름은 승려 능현이었고 정아무개라는 여대생은 반야였습니다.
작가 김성동의 '꿈'이라는 소설입니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은 물거품이라는 것입니다.
돼지평전 바로 옆으로 보이는 이 표지판 뒤가 왕시루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왕시루봉을 잠깐 들렀다 올까요?
4시간 정도 걸리는 길입니다.
이 안내판에서 아까 본 문수암에서 오는 길과 만나게 되고,
그리고 그 능선의 끝에는 이런 선교사 유적지가 12채 있는 왕시루봉입니다.
물론 비탐구간입니다.
제가 지리산에서 손꼽는 하룻밤 지내고 싶은 지리산의 박터 중 한 곳.
정말 전망 좋은 곳입니다.
물도 많고....
한 번 시간 내서 가야겠습니다.
관리인과는 인연이 있으니 저는 침낭만 가지고 가겠습니다.
다시 돼지평전으로 돌아와서....
왕시루봉 뒤로 펼쳐지는 호남정맥 라인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앞줄이 왕시루봉 능선. 뒷줄이 형제봉 능선. 이러니 발이 떨어지겠습니까? 임걸령을 지나 피아골 삼거리로 들고..... 피아골 삼거리는 연곡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곳이죠. 문순태의 소설 '피아골'의 무대이기도 하고..... 설월스님이나 아버지 배달수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삼홍소 방향으로 올라간 '만화'는 끝내 무당으로 살은 걸까요?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러다보니 반야봉 입구입니다. 노루목이라...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 황장산의 황장黃獐도 마찬가지 이름입니다.
서西로는 반야요, 동東으로는 천왕봉이니....
그러니 반야봉을 빠뜨린다는 것은 생각하기 좀 곤란합니다.
노루목에서 반야봉으로 올라가다 보면 아마 이 시간 정도 될 겁니다.
이렇게 붉어지는 지리의 동쪽을 보면서 올라가면,
좌측으로 노고단과 그 우측의 운해가 아름답습니다.
지리 10경 중 하나인 노고운해는 이렇게 태어난 말입니다.
즉 서쪽으로는 산동면이 서시지맥에 의해 막혀 있고, 북쪽으로는 산내면이 백두대간과 지리서부능선에 의해 막혀 있으니 이런 운해가 생길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 정도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방언이 터지기 마련입니다.
술술 말이 막 나오게 된다는 것이죠.
반야봉은 이런 곳입니다.
반야는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입니다.
화엄사, 연곡사, 법계사를 개창하였다는 연기조사鷰起 祖師(의상대사의 별호인 緣起祖師와는 다른 인물임)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화엄사가 있는 산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반야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애기입니다.
그러니 지리산이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는 말은 바로 이 반야봉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반야봉이 문수보살이 법을 설하면 그 법문이 왕시루봉에 맞아 그 아래에 있는 문수사로 떨어진다고 하는군요.
그러니 이 기氣의 한 줄기는 연곡사 방향으로 가고 다른 한 줄기는 화엄사 방향으로 간다고 하고.....
노고단 좌측을 봅니다.
붉은 기운이 도는 작은 키의 나무 뒤로 좌측은 불무장등 능선 그리고 그 우측은 노고단에서 왕시루봉까지 능선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왕시루봉 우측으로 형제봉도 보이고....
다시 천왕봉.....
함양 쪽은 얘기할 것도 없고.....
천왕봉도 당겨보면....
그런데 여기서 다시 되돌아 나가야 하는데 그러면 조금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묘향대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비탐 구간을 알리는 금줄을 넘어,
중봉을 지나, 망바위봉1378.8m을 보고서는,
지리 10대 중 하나인 묘향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묘향대는 연곡사와 화엄사 그리고 법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불사를 마무리 한 뒤 이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臺라 칭하면서 수행을 이어 나갔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문수를 한역하면 묘수妙首, 묘향妙香, 묘길상妙吉祥 등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묘향대는 문수대의 다른 이름이라 할 것입니다.
월간 '사람과 산'에서 10월 9일 1박 2일 일정으로 이곳으로 취재를 나온다고 함산을 하자는데 저는 박泊산행은 안 되니....
이곳으로 나와 다시 주릉으로 들면,
바로 날라리봉인 삼도봉1501m입니다.
삼도봉 우측으로 들면 불무장등 ~ 통꼭봉 ~ 당재 ~ 황장산 ~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 능선이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으로는 불무장등, 1350.2봉, 왕시루봉 그리고 섬진강 건너 계족산703m이 거의 일직선으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불무장등不無長嶝이 무슨 뜻입니까? 삼도봉을 지나 도계를 따라 내려오면서 처음 만나는 실명을 가진 봉우리가 불무장등인데 이 이름이 어렵다. 어떤 이들은 산의 모양을 가지고 이름과 연결시켜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풀무)'와 같은 형상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그래서 불무장등이라는 거다. 또 다른 이들은 보통은 不無長嶝이라고 써서 '우두머리 봉' 혹은 '높은 산' 정도로 볼 수 있지만 그 의미도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산 이름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금 전 얘기한 바와 같이 지명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의지, 염원, 주관 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생김새보다는 종교, 풍속, 생활상 등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어서 그 지명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어쨌든 이 반야般若라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애기다. 그러니 이 반야봉의 기氣를 받아서 내려가는 줄기 즉 이 긴 능선의 이름은 '반야장' 그리고 그 능선 중의 첫 봉우리이니만큼 '반야장등'이라고 써야 맞을 것 같다는 ‘지리 99팀’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야봉'과 '반야장등'의 '반야'가 중복이 되는데 지명에서는 가급적 이런 중복 현상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반야의 다른 이름인 '불모'를 썼고 '불모장등'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모장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불무장등'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불모'란 발음이 '불무'가 된 것이다. 이럴 경우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날라리봉 즉 삼도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불무장등 ~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뻗치는 길고 큰 줄기(長嶝)가 된다는 것이다. 황장산을 지나면 당재가 나온다. 여기서 지리산 둘레길 기선인 15-A 구간을 만난다. 당재에 관해서는 15-A 구간에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삼도봉에서 좌측으로 천왕봉과 낙남정맥도 확실하게 보입니다.
낙남정맥 중앙에 삼신봉도 보이고 그 우측으로 지리남부능선으로 진행하는 형제봉도 보이는군요.
불무장등과 황장산.
중간에 파인 데가 당재입니다.
30분 정도면 당재에 도착한다. 당재라 하면 서낭당이나 당집을 연상하여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는 곳을 연상하기 쉽다. 우리 옛말에는 ‘산’을 뜻하는 고대어 중에 ‘달達’ 혹은 ‘닫’이 있다. 이 ‘닫’은 유사하게 ‘닷, 닥, 닭’ 등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산에 있는 고개를 보고 옛사람들은 단순히 ‘산을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닥+넘이’라 하였을 것이다.
‘닥+넘이 > 닥너미 >당너미 >당재’로 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당재라는 지명이 지리산에도 2개가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 상당히 많은 지명이다. 그런데 구례군지에는 “당산나무가 큰 재 밑에 있어 ‘당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참 성의 없는 기술이다.
화개재로 떨어집니다. 좌틀하면 뱀사골.... 뱀사골 산장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좌측으로 토끼봉卯峰이 보입니다. 토끼봉 우측. 칠불사로 하여 신흥리로 내려가 세이암이며 쌍계사로 가서는 고운 최치원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운상원이었던 칠불사는 김수로왕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곳이죠. 그런데 이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이 범왕리梵旺里이고 개천은 법왕천 그리고 그 개천의 끝에 칠불사라는 사찰이 있고 바로 옆에는 범왕마을이 있다. 범왕의 梵은 인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니 梵王은 인도의 왕을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이다. 이 범왕리에서 좌측 계곡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자. 너른 주차장에 초의선사다신탑비가 있는 칠불사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우측에 영지影池가 있고 좌측의 사리탑을 지나면 바로 사찰 건물들과 만난다. 이 칠불사는 ‘김수로왕과 허황후’ 그리고 그 후속편인 ‘일곱 왕자와 허황후’가 유명하다. 또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널리 알려진 운공선사의 아자방亞字房을 살펴봐야 한다. 허황후 관련 설화는 불교의 ‘남방전래설’과도 관련 있으며 이는 화엄사와 연곡사 그리고 법계사의 창건주 연기조사와도 관련된다. 그리고 이 칠불사는 바로 토끼봉과 연결되는 등로로 바로 지리 주릉으로 오를 수 있는 최단거리 코스다. 서부 지리의 중심이었던 반야봉에서 정동쪽 즉 묘방卯方을 바라 볼 때 그곳에 위치한 봉우리가 바로 묘봉卯峰인 토끼봉이다. 칠불사에서 가야국 김수로왕을 만나보자. 가야국 김수로왕은 어찌된 영문인지 왕비 맞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던 신하들은 어느 날 아침 조정 회의를 마친 후 왕에게 좋은 배필을 골라 왕비로 모실 것을 권했다. “경들의 뜻은 고맙소. 그러나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었고 왕후를 삼는 일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치 마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배와 말을 준비하고 바닷가에 나아가 손님이오거든 목련으로 만든 키와 계수나무 노를 저어 맞이하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신하들이 바다에 다다르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해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20여 명의 신하와 노비 그리고 금, 은, 보석을 잔뜩 싣고 온 배안의 공주는 선뜻 따라나서질 않았다. 이 보고를 받은 왕은 친히 바닷가로 거동, 산기슭에 임시 궁전을 만들어 공주를 맞이했다. “저는 아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지난 5월 저의 부왕과 모후께서는 꿈에서 하늘의 상제로부터 가락국왕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저를 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즉시 이곳으로 보내셨기에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공주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아들의 불심을 어지럽혀 성불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어서 돌아가도록 해라.” 왕후는 생각다 못해 산중턱에 임시 궁궐을 짓고 계속 아들을 만나려 했으나 오빠에게 들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일곱 왕자는 누가 찾아와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수행에 전념했다. 궁으로 돌아와 아들들의 도력이 높다는 소문을 들은 허왕후는 아들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마음을 달래던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월 보름달 빛이 휘영청 밝은 산문 밖에서 장유화상은 전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들들이 이제 성불했으니 어서 만나 보거라.” 왕후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들들은 기척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달빛이 교교한 못 속에는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성불을 하여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왕후에게는 이것이 아들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대가람을 이루니 그곳이 바로 오늘의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위치한 칠불사다. 김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하여 칠불사라 불린 이 절은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아자방(亞字房, 경남 지방문화재 제144호)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을 오르려면 동국제일선원이라는 현판 아래를 지나가야 한다. 동국제일선원이라! 금강산 마하연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참선 도량이라는 얘기이다. 현판의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의 작품이다. '추사秋史 이래 여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추사체에 능한 분이라는 평가다. 칠불사의 전각 편액扁額이나 주련柱聯까지 거의 모두 여초의 작품이라고 하니 숨어 있는 얘기도 많은 곳이다. 그러던 조선조 순조때 또 화재로 인하여 절이 불타게 되었다. 그럴 즈음 이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는 절의 정문에 있던 보설루의 東國第一禪院' 현판을 보고는 깜짝 놀라 "저 글들에는 불火이 들어 있어 또 화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자 절에서는 東國第一禪院 중 國에서 한 점을 떼고, 第에서 그리고 禪과 院에서도 각 1점씩을 빼어 4획(火)을 없이 썼으나 118년 후에 또 불이 났다고 한다. 그런 유래가 있는 현판이다.
그러고는 유난히 물이 많은 연하천 대피소를 지나게 되죠.
그러고는 삼각고지입니다.
지리북부능선
형제봉을 지나면서 부드러운 능선을 계속 따르다 보면 고도가 조금씩 높아진다. 삼각고지1484m다. 그 삼각고지에서 조금 내려오면 우측으로 등로가 하나 보인다. 영원령 ~ 삼정산1156.2m ~ 실상사로 이어지는 지리북부능선 루트다. 일부 구간은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되기도 한다. 영신봉에서 잠깐 언급한 지리남부능선에 대응하는 능선이다. 예전에 꾼들은 실상사를 출발하여 삼정산 ~ 삼각고지 ~ 지리주릉 ~ 영신봉 ~ 삼신봉 ~ 상제봉을 잇는 지리남북종주를 즐기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리화대종주(화엄사 ~ 코재 ~ 노고단 ~ 지리주릉 ~ 천왕봉 ~ 중봉 ~ 대원사)와 함께 그야말로 꾼들의 로망이었던 코스였다.
- 졸저 전게서 62쪽
이 삼각고지에서 지리북부능선이 갈라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
참고로 그 삼정리 바로 우측이 백무동이며 좌측이 1년에 단 한 번 문이 열리는 이른바 '지리산 7암자 순례 코스'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팁! 위 구간들은 대부분 비탐방구간이다. 그러다 보니 매년 사월초파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꾼들이 있다. 바로 속칭 ‘지리산 7암자 순례’산행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이날만큼은 신도들을 위해 산행 구간을 일부 개방을 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음정 - 도솔암 - 영원사 - 삼정산 - 상무주암 - 문수암 - 삼불사 - 약수암 - 실상사’ 코스를 변형된 북부능선종주로 즐기고 있다.
- 졸저 전게서 62쪽
그러고는 이내 형제봉입니다.
이 형제봉은 이렇게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 봉우리들을 오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형제봉을 확실하게 보려면 임천강 건너 임천지맥 상의 삼봉산1186.7m이나 투구봉1032.5m으로 가야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예전에 쓴 산행기를 인용해 보면....
한편 일개 산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 산에 의지하여 사는 그 주변 마을의 주민일 것입니다.
산 이름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그 산 주위의 주민들이 불러주던 이름이 그 산이름으로 굳어지는 것.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형제봉에 대해서는 이 주민들이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는 거 같습니다.
즉 형제봉 아래 터 잡고 사는 마천의 삼정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이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이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부자암봉父子巖峰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 '지도'와 우리 산꾼들만 그 곳을 형제봉兄弟峰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형제봉을 부자암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증거와 그 증거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암의 설화 속으로 들어가 보죠.
조선시대에 장市場이 섰다고 정쟁(丁場) 이라고 불렀던 지리산 마천의 삼정마을(양정, 음정, 하정)을 끼고 흐르는 광대골에는 전래설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목욕을 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몰래 엿본 나무꾼이 한 선녀의 옷을 훔침으로써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는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하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여기까지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거의 대동소이 하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후편에 가서는 조금 각색이 되어 父子巖의 전설을 잉태시켰다.
선녀는 지아비와 두 아들을 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三父子는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어미를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버린 바위덩어리들을 부자바위라고 불렀다.
선녀의 이름은 “아미”라 하고 “인걸”이라는 이름의 나무꾼은 옛날 하정부락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인물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다.
산 아래 하정마을 쪽에서 보이는 부자암의 모습은 꼭 삼부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 가는 형상 이라고 하나 속인의 눈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전설은 전설로 막을 내리는 것이 통상적인 예인데 그 전설을 기리고 제사까지 지내는 첨단시대에 보기 드문 전설 같은 실화가 있어 더욱 흥미를 끌면서 그분들이 주장하는 부자암 지명 어원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하정마을 사람들은 전설의 주체가 되는 부자암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석문암계”라 친목계를 조직을 해서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부락의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매년 초복이면 전설속의 나무꾼인 인걸의 삼부자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석문암계의 총무를 맡고 계시는 하정부락 김종남(72세) 어른께서는 근간 30여년 지간에 갑자기 등산꾼들로부터 형제봉으로 잘못 불리어진 부자바위를 지금이라도 바로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신다.
관습화되고 고착화 되어버린 지명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그 개체가 국민생활에 불편을 주는 사항이 아닐 땐 더욱 힘이 든다. 그러나 고쳐 불러야 하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형제봉만큼은 본래의 이름인 부자암내지 부자바위로 불러야 한다고 본다.
- '지리99' 가객님 글에서 인용
이러한 연유로 부자암에서 발원한 광대골 물길의 상부 골을 지역민들은 “부자바위골”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부자암 혹은 부자봉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그러고는 벽소령입니다.
이 벽소령이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예전에는 벽송령이었다고도 하는데 취령이라고도 하는 설이 있습니다.
좀 알아볼까요?
부연하거니와 산경표는 “백두대간은 지리산에서 끝난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지리산 취령鷲嶺에서 남쪽으로 갈라지는 곁가지는 낙남정맥’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적어도 취령은 지리산에 있으며 또한 백두대간 상에 있는 고개라는 점을 얘기해 준다.
그런데 그 취령이 어디일까? 현대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지금의 과학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영신봉이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김선신의 두류전지를 보면 “반야봉이 동남쪽으로 흘러 취령이 된다. 취령에서 동남쪽으로 들어오는 첫머리가 영신대이다. 영신대의 동쪽이 세석평이며 동북으로 향하여 중봉이 된다. 10리를 흘러 천왕상봉이 된다.”고 쓰고 있다.
영신대는 영신사가 있던 지금의 영신봉 바로 좌측에 있는 바위 지대이다. 그러니 그 바로 옆 동쪽이 세석평전이며 동북으로 향하는 길에 중봉이 있다고 했으니 그 중봉은 지금의 제석봉이고 취령에서 천왕봉까지의 10리는 당시 거리로는 10리가 5.7km이니 이 역시 정확하게 맞는 수치이다.
일설에 의하면 벽소령의 원래 이름은 '초료조(鷦鷯鳥)재'였다고 한다. 그 논거로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기행문(1487년)에 나오는 전설을 인용한다. 즉 촉새 혹은 때까치라고도 불리는 초료새를 동원한 것이다. 그러면서 “큰 고개에 이르자 초료새가 수리새로 변했다.”고 하면서 그 고개 이름이 초료재이므로 그것의 다른 이름이 뱁새재 혹은 수리재이기도 하므로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취령鷲嶺이 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보면 반야봉 ~ 천왕봉의 거리가 1백리라는 확실한 숫자가 나오며 김선신의 두류전지의 ‘10리’에 비해 취령 ~ 천왕봉의 거리가 ‘6 ~ 70리’라는 숫자는 예전 사람들이 숫자에 있어 ‘뻥튀기’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해도 이는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이 부근에 벽소령 아니면 특별하게 사람이 오르내리던 큰 고개가 없음에도 취령이 지금의 벽소령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이에 대해 벽소령은 추성리의 벽송사의 벽송대사 제자들이 쌍계사나 의신사, 신흥사 등에서 수행하고 있던 동문들을 만나기 위해 오가는 고개여서 벽송령 → 벽소령이 되었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
한편 이 벽소령은 예전 상권商圈과 관련하여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죠.
원래 지리산 상권은 남강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을 중심으로 일찍이 장시場市가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강 쪽으로는 함양, 산청의 읍내장 그리고 진주의 주내장 등이, 섬진강 쪽으로는 남원의 부내, 곡성, 광양의 읍내장, 하동의 하두치장 등 무려 50여 개의 장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중 지리산 길목에 위치한 화개장은 하동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니 벽소령 우측으로 내려가면 아까 토끼봉에서 내려가면 만나는 신흥리로도 진출이 가능하겠죠.
선비샘을 지나고,
칠선봉에서 조망을 하고나면 이제부터 좀 긴장을 하여야 합니다.
모든 산꾼들이 그냥 지나치는 곳이 있기 때문이죠.
점필재 김종직은 1472. 8. 17. 이곳을 지나면서,
가섭전의 북쪽 봉우리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다. 그 중에 하나는 아래가 반들반들하고 위는 뾰족하며 꼭데기에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넓이는 겨우 한 자 정도였다.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 예불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종자 가운데 옥곤과 염정이 그 위에 거뜬이 올라 절을 하였다. 나는 절에서 바라보다가 급히 사람을 보내 그들을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다
1487. 10. 1. 이곳에 들른 남효온은,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봉우리에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 하였다. 이 좌고대는 상∙중∙하 3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 우뚝 솟은 바위는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내려다보았는데,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승려 의문은 두려워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좌고대 밑에 앉아 있었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을 두루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빈발암으로 되돌아와 저녁밥을 먹었다. 때마침 이 암자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해기 지자 온 세상이 칠흙같이 어두웠다.
이 좌고대가 어떤 곳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
영신봉에서 필자는 우연히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을 만나 멋진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날 도솔산인 님과 동행했던 분이 모델이 되어 이 멋진 사진을 남겨주셨숩니다.
도솔산인님은 지리산 옛길에만 정통한 게 아니라 사진 솜씨도 상당하십니다.
이곳이 좌고대입니다.
..........
백두대간 등로에서 좌고대 옆 이 175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그 전의 출입금지 표지판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영신사 터입니다.
지리 10대 중 하나인 영신대 바로 아래 있는 곳.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덮였는데, 거처하는 승려가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나 거처하는 승려 또한 한둘에 불과하다. - 이륙 지리산기 1463. 8.
점필재도 이곳을 들렀습니다.
영신사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뿐이었다. 절의 북쪽 절벽에 가섭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 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 그 목에 난 흠집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고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聖母像과 가섭상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은 아닐까? - 김종직 유두류록 1472. 8. 17.
아까 잠깐 왜구에 대한 얘기는 했었죠?
우선 유몽인은 이 영신암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揖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은 서쪽에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그나저나 가섭상은 어디 있을까요?
제가 들러서 가섭상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제 눈에는 제대로 보이질 않더군요.
도솔산인님의 사진을 빌려옵니다.
도솔산인님의 사진을 보니 '刃斫亦被島夷兇' 표기까지 해두셨습니다.
왜구들이 내리친 칼자국 흔적이라는 것이죠.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에 나오는 시구를 참고하여 찾으셨다는군요.
이 영신사터 우측으로는 영계靈溪와 우천 허만수님이 수행을 하던 좌선대坐仙帶가 있는데 너무 고급이니 패스!
도로 나나기는 그렇고 그냥 직진하여 계곡을 따라 오르면,
영신봉 이정표에서 낙남정맥으로 진행하는 길인 비탐방구간이 나오며,
등로에서 금줄을 넘어서면 바로 아래에 헬기장이 있는 곳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이 루트가 좌고대가 있는 암봉을 피해 대간길을 이어가던 주릉이 있던 길 즉 구등로舊登路였을 겁니다.
여기서 좌틀하여 잠깐 나가면 백두대간 등로가 나오며 그 위가 영신봉입니다.
영신봉 정상
이제부터 이 낙남정맥 좌측으로 흐르는 물들은 모두 남강으로 합류되어 낙동강에 합류된 다음 남해로 흘러가게 될 것이며 우측으로 흐르는 물들은 섬진강을 만나 남해로 흘러들어 가게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낙남정맥의 역할이죠.
낙남정맥과 신백두대간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해야겠죠?
이 영신봉이 낙남정맥이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시발점이라고 하였죠?
이곳이 산줄기에 관한 한 제일 어려운 곳입니다.
이걸 꼭 얘기해야 하나.
너무 복잡하니....
일단 예전 얘기를 좀 하기로 하죠.
이왕 산줄기 얘기가 나왔으니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를 비교해 볼까요?
신산경표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산경도를 제시하고 있는 '대한산경표'의 그림을 봅니다.
참고도 #1 대한산경표 상 낙남정맥 부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산경표는 우리에게 백두대간과 1정간 13정맥만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 산경표가 조선시대의 인문지리 인식체계를 집대성한 말 그대로 우리나라 산줄기의 족보였습니다.
그것이 구한말 일제통감부 체계로 들어가자 모든 교육 시스템이 일본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특히 조선어와 국사 그리고 지리과목이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하자원 침탈에 눈이 먼 일본은 독일의 지질학자 고체에 이어 1900년 8월 일본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리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를 파견하기에 됩니다.
고토분지로의 저서인 조선기행록을 보면 고토는 1901년 1월 3일 군산을 출발하여 1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후(군산 → 부산), 1월 24일 부산을 출발하여 남해안을 거쳐 2월 16일 목포에 도착(부산→ 목포)하고, 2월 20일 목포를 출발해서 내륙을 거쳐 3월 19일 다시 부산에 도착(목포 → 부산)했다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조선근대사의 권위자인 최혜주의 논문에 의하면, 최혜주는 당시 일본의 동방협회회보 86호(1902. 4. 20. 81~82쪽)를 근거로 “고토는 1900년 8월 하순부터 다음해 3월 하순까지 강원,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을 조사하고, 1901년 8월 상순 다시 8개월간 두만강, 압록강지역을 조사하였다.”고 게재하였다.
- 졸저 전게서 105쪽 각주
이 탐사 여행의 결과물로 1903년 고토는 '조선산맥론'을 발표하게 되고 그 논문 안에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36개의 산맥이 자리 잡게 됩니다.
- 이 산맥이라는 개념은 우리 선조들이 쓰던 우리 산줄기 개념이었지 고토 분지로이 창작물이 아닙니다.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으로서의 산맥을 지질구조선의 다른 이름에 산맥을 갖다 붙임으로서 용어의 혼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 그의 제자 야쓰쇼에이는 그 산맥들을 단순화 시켰고 통감부 체제하의 일제는 그것을 학생들이 배우는 지리교과서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리교과서는 해방이 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리 교과서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산맥 체계가 틀리다는 것은 아닙니다.
- 자세한 것은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이나 조석필의 '태백산맥은 없다' 참조
2) 어쨌든 민간지리학자 박성태 선생은 산경표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하면서 신백두대간 + 12정맥 + 12기맥 + 162지맥을 근간으로 한 '신산경표'라는 책을 발간하게 됩니다.
실로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산꾼들의 행보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능선 종주 산행 중심에서 대간 + 정맥으로 움직이더니 이제는 기맥이나 지맥으로도 발길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외연이 확장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산경표는 선생께서 혼자서 작업을 하다보니 오류가 발견되기시작합니다.
즉 선생께서 표방한 '산경표의 정신 계승' 즉 산자분수령의 취지에 적극적으로 부합되기 보다는 단순하게 긴 줄기 즉 산경山經 위주로만 진행되는 오류가 발견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관성의 결여로 비춰지기 충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이 산자분수령의 취지에 입각하여 물줄기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그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3) '산으로' 박흥섭과 J3의 배병만이 그 주창자들인데 이들도 그냥 발원지와 합수점을 위주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물줄기의 세력도 보아야한다는 점에서는 견해가 갈리고 있습니다.
박흥섭의 주장 즉 대한산경표의 입장에서 이 지리산 부근을 보겠습니다.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천왕봉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지리인식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맥의 끝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낙남정맥은 영신봉에서 가지를 치게 됩니다.
그 낙남정맥은 영신봉 ~ 삼신봉 ~ 옥산 삼거리를 지나 무선산 ~ 무학산으로 진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옥산삼거리에서 남진하는 산줄기는(신백두대간의 일부) 금오산 ~ 용산 ~ 두우산을지나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섬진동지맥이 되게 됩니다.
그러니 대한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이라는 우리 기본 산줄기를 세분하자면 영신봉 ~ 천왕봉 구간만큼은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예외가 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천왕봉에서 연장되는 덕천지맥(신산경표상 웅석지맥)은 신산경표와 같이 그대로 인정이 됩니다.
여기서 끝 부분 즉 합수점으로 가는 부분에 대하여는 지난 편을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다만 덕천강이 인공호수인 진양호와 만나는 합수점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기는 합니다.
인공호수를 만들면서 예전의 합수점 위치가 지금의 그것보다 동쪽으로 더 갔을 것 아니냐는 논의입니다.
이럴 경우 신산경표의 종착점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긴 합니다.
논의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논의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즉 지리산 = 천왕봉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백두대간이라는 것은 산경표를 보고 알았고 또 배웠습니다.
그 백두대간은 정중앙은 아니지만 나라를 동서로 양분하는 우리나라 산이나 산줄기의 조종祖宗입니다.
백두대간의 시작은 백두산이며 그 끝은 지리산입니다.
그럼 산경표에서 이야기하는 백두대간의 끝인 지리산은 온전하게 최고봉인 천왕봉으로 보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의심의 시작은 사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었습니다.
즉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줄기를 넘지 못한다는 얘기죠.
사실 이 원칙은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나오는 말인데 실제 이 말은 어법에 맞지는 않으나 산꾼들은 이를 관용구로 해석해 쓰고 있는 것이죠.
어쨌든 우리 선조들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논의의 시작은 아까 벽소령을지나면서 살펴 본 취령입니다.
초료조재鷦鷯鳥岾라고도 했죠?
그 취령 얘기에서 이어집니다.
여기서 다시 대간大幹 〉 정맥正脈 〉 지맥枝脈이라는 계급 체계를 염두에 둬야한다.
그렇다면 그 낙남정맥은 어디까지가 지리산의 영역인가? 어쨌든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이 취령에서 가지를 치며 이 줄기는 황치(대동여지도에는 황령) ~ 옥산 방향으로 진행됨을 알려준다. 한편 두류전지는 낙남정맥 중 백토현(배토재) 아래가 곤양의 경계라고 하면서 취령 ~ 황치 ~ 옥산614.1m까지를 지리산의 영역이라고 봤다. 문제는 황치에서 옥산을 향하는 낙남정맥을 버리고 남동쪽으로 가는 즉 금오산875.1m으로 향하는 줄기이다.
이 줄기를 ㉮산경표에서는 황치黃峙 ~ 차재車岾 ~ 이맹재理盲岾 ~ 금오산 ~ 노량으로 향하는 가지 줄기의 흐름으로 보고 있는 반면, ㉯두류전지에서는 빈이티賓義峙 ~ 황토현黃峙 ~ 구현 ~ 금오산875.1m ~ 노량의 흐름으로 보면서 ‘두류신기’편에서 ‘지리산 본체’라고 본 것이다.
이를 현대 지도에 대입해 보면, 지리주릉의 영신봉 ~ 삼신봉(7km) ~ 옥산(22km) ~ 금오산(25km) ~ 노량(5km)으로 이어지니 남부지리의 끝이라 여겨질 옥산 갈림길에서 노량까지 무려 약 30km의 거리인데 여기까지 지리산의 영역이라고 보는 두류전지의 입장은 타당할까? 그리고 긍정적으로 볼 때 그 논거는 무엇일까?
김선신이 두류전지를 편찬할 때 산경표에 터 잡아 두류신기‘頭流身記’編 작업을 했으므로 당시 조선의 지리학자라면 관용어로 쓰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줄기는 물줄기를 만나면 맥을 다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지 못한다.’는 정도의 개념은 꿰차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대간이나 정맥 등 산줄기를 논하기 위해서는 물줄기와 산줄기 관계쯤은 이해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일반 가지줄기도 아닌 명색이 우리나라 산줄기의 아버지 격인 백두대간이 일반 강줄기 정도를 만나서 대간의 맥이 잠긴다면 아무래도 체면이 좀 구길 것 같다. 아니 또 만날 강줄기도 없다. 강줄기를 만나 자신의 맥脈을 다하기 위해서는 합수점 즉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는 오히려 정맥의 요건이 되기도 하니 백두대간에게는 타당하지도 않다.
어쨌든 산경표를 위시하여 우리 선조들은 백두대간의 끝은 지리산이라고 했다. 지리산에는 천왕봉도 있건만 특정 지어서 천왕봉 혹은 상봉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리산의 상징적인 봉우리인 천왕봉에서 맥이 다하는 것으로 가령 ‘지리산(상봉 혹은 천왕봉)’이라고 표기하려니 ‘산자분수령’이 마음에 걸린다. 동생뻘인 정맥도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는데 하물며 백두대간이야! 이럴 때 고수들은 ‘두루뭉술 작전’을 쓴다. 대간의 끝을 그냥 ‘지리산’으로 놔두는 것이다. 나머지는 필요한 사람들의 해석에 의존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고토 분지로도 극찬한 우리나라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인 택리지의 이중환이 “백두대간의 끝은 지리산의 남해가智異山在南海上是爲白頭之盡脈故一名頭流山”라고 한 말이 이해를 돕는다. 또한 그 뜻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우리 옛 지리학자들은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이 끝난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의미의 그 지리산은 지리산의 본체가 물을 만나는 곳. 바로 남해이니 금오산을 지난 노량이었다!
즉 백두대간의 끝은 남해 바다를 만나는 지리산 노량이라는 것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김선신도 ‘두류신기頭流身記’에서 제시한 지리의 서남쪽이 곤양 그러니까 지금의 금오산까지 진행하여 노량에서 그친다고 하였으니 이 금오산875.1m ~ 노량 구간을 지리산의 끝이라고 보았다.
즉 우리 선조들은 여원재를 넘어 운봉땅으로 들어서서는 섬진강 동쪽과 남강 서쪽을 모두 지리산으로 본 것이다. 거기에 지리산 본체 중 한 줄기가 자연스럽게 하동땅 남해 바다와 만나는 곳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니 거기까지가 지리산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조상들이 산줄기를 이렇게 보았고 백두대간의 영역을 이렇게 여긴 만큼 우리도 이를 달리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 同旨 박성태, 신산경표. 박성태 선생님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을 노량이라고 보아 백두산 ~ 노량 구간을 세인(世人)들이 일반적으로 규정한 백두산 ~ 천왕봉‘ 구간의 ‘백두대간’에 대응對應하여 ‘신백두대간’이라 명명하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백두대간이 지리산의 천왕봉에서 끝나야 한다는 아무런 근거도 사실은 없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누군가가 천왕봉이 지리산의 최고봉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어서 ‘지리산 = 천왕봉’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고 또 일반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이에 동의한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우리나라 북쪽의 끝에는 나라의 최고봉인 백두산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는 남쪽 최고봉인 지리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남북의 최고봉을 잇는 선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그런데 북쪽의 끝 백두산은 동경 128°04′36.5″에, 반면 남쪽의 끝 지리산의 노량은 동경 127°51′25″에 각 자리하고 있으니 거의 일직선상에 있는 모양새다. 즉 노량에서 북극점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바로 백두산 천지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우연일까? 조석필은 신이 내린 이 신비한 조화를 두고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최근 제가 견해를 수정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영신봉 ~ 천왕봉 구간입니다.
이 영신봉 좌측으로 운장바위와 한신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촛대봉에서 본 영신봉과 세석평전입니다.
지난 토요일 산행기를 인용합니다.
한신계곡이 그 이름을 갖게된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아울러 운장바위에 대해서도 설명해 줍니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영신봉은 지리산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그러니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올라오는 사람들은 이곳 시루봉甑峰1703.1m(지금의 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어요. 그 민초들이나 무속인들 중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다고 하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사람들은 저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니 우리가 올라온 '한신계곡'이란 지명은 바로 저 한신바위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증봉(甑峯, 현 촛대봉)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沮洳源, 세석고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坑]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이하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니 계속 그 산행기를 인용하면,
딱 한 시간을 채우고 13:20 아쉬운 이별의 악수를 나누고 저는 한신계곡으로 그분들은 오늘의 시착지인 연하천 대피소로 갑니다.
저의 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신바위를 정탐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산하면서 지난번 못 본 한신계곡의 정경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13:29
등로에서 좌측으로 벗어나 한신바위로 접근합니다.
평범한 길입니다.
바위는 그저 그런 것.....
기어 올라갑니다.
바위의 상단 부분은 길이 약 30m 정도 되는데,
천왕봉까지 조망이 가능합니다.
우측 촛대봉.
삼신봉의 낙동정맥과 호남정맥의 백운산.
폭은 약 5m 정도 되는 아주 큰 바위입니다.
아!
안타까운 죽음을 봅니다.
1994. 5. 29.
대구분이군요.
벌써 24년 전.....
잘 생겼습니다.
지도 #3
지난 번 날이 밝으면서 보았던 실폭.
이런 연폭은 폭포같지도 않고.
이런 길을 올라왔었나?
새벽에만 다니다 보니 기억에 없습니다.
14:26
이런 폭포는 폭포 같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제가 바로 며칠 전 칠선계곡을 다녀온 데 있습니다.
"이래 봬도 나 칠선계곡 다녀온 사람이야!"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시큰둥......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나들이 폭포 지나 두 물이 합치는 곳이라고 하는데 계곡이 보이지도 않아 부득이 그바로 아래의 곳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탁영지소濯纓之所를 상정합니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이렇게 지리산 산행을 마친 점필재는 이 탁영지소에서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이른바 하산음下山吟입니다.
杖藜纔下山 :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서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 : 여정을 함께한 사람(제자)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우리가)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
.............
15:03
거의 다 왔군요.
세석길을 나서고......
15:31
주차장으로 들어서려는데 버스 한 대가 막 나옵니다.
달려가니 차를 세워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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