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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백두대간 3회차

대간의 마지막 길.......(거림 ~ 세석(청학)연못 ~ 연하봉 ~ 장터목 ~ 천왕봉 ~ 문창대 ~ 중산리

 

 

늘 그렇듯이 잠에서 깨자마자 책상 앞에 앉습니다.

마우스를 서너 번 흔들면 잠자고 있던 화면이 다시 나타나면서 어제 하던 마지막 작업이 기억을 깨웁니다.

그러고는 자판을 두드리고....

그러던 일과가 오늘은 그 순서를 달리합니다.

앰프의 파워를 누르고는 턴 테이블 뚜껑을 엽니다.

임지훈의 앨범이 올려져 있군요.

트랙 1번에 트랙 앵글을 올려놓습니다.

예의 지직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통기타 소리가 두둑나면서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그의 투박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제되지 않은 듯한 그의 목소리는 무딘 부엌칼 같이만 느껴집니다.

음악을 듣는 중에 문을 열고 밖을 봅니다.

파란 하늘은 너무 높게만 보입니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건만 산에 있지 않고 음악을 듣는 제가 너무 여유롭게만 느껴집니다.

디스크를 바꿉니다.

LP를 만진다는 건 좀 번거롭습니다.

몇 장의 디스크를 뽑아 방바닥에 널브려 놓습니다.

이정석의 목소리는 너무 갸날프기만 합니다.

임지훈이 무거운 가방을 매고 묵묵히 천왕봉을 오르는 '노고단'님이라면 이정석은 작은 쌕을 등에 얹고 사뿐사뿐 사면을 오르는 여인네입니다.

이런 날은 비가 와야 하는데......

오지는 않더라도 잔뜩 검게 찌푸린 하늘이어야 하는데......

좀 긴 걸 들어야지....

Neil Young 정도면 20분 정도는 버텨줄 겁니다.

이젠 내 일을 해야지......

 

긴 하루였습니다.

청학연못이라고도 불리는 세석연못의 여운도 아직 남아 있고 천왕봉, 반야 다음으로 사랑하는 촛대봉도 더듬어 봤고 그리고 얼마 전에 들렀던 연하봉霞峰에서는 아름다음 속에 파묻혀서 연하선경보다는 연하고질을 느꼈습니다.

앞에서 보고 옆을 둘러보고 또 바위 위에 올라서는 뒤를 돌아보고.....

뛰는 가슴을, 터지는 방언을 혹시나 남에게 들킬까봐, 흥분된 얼굴을 잠시 두 손으로 감싸기도 했습니다.

 

Runnig dry의 빽 악기는 첼로인지 바이올린인지...

 

천왕봉....

제집 드나들 듯이 지리산을 드나드는 고남님의 발걸음은 문창대에서 고운 최치원을 만나는 것보다 더 쉬워졌습니다.

혹시나 어느 분에게는 부담이었을 지리산이 제게는 약속의 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무척이나 긴 듯했지만 너무 짧은 느낌이었습니다.

지리는 그랬습니다.

 

대간 대원들과는 2주 만의 만남입니다.

여느 날과 달리 오늘은 좀 흥분할 만도 합니다.

대간 졸업식이라 종주 대원 외에도 축하 회원들도 많이 참여해 주셨으니 분위기는 말 그대로 축제 그 자체입니다.

예전 시간보다 좀 늦게 거림에 도착합니다.

다행입니다.

어두울 때 세석연못에 도착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훤할 때 장관을 봐야하니.....

03:40

거림을 출발합니다.

거림이 巨林이라는 말인가요?

정확한 뜻을 모르겠습니다.

워낙 오지였던 이곳은 사실 예전에는 등로조차 없었던 곳으로 보입니다.

주변에 그럴싸한 사찰이 없었기 때문이죠.

예전 산길은 나무나 약초를 캐기 위하여 주변 주민들이나 암자와 암자를 잇는 스님들에 의하여 개척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화개 대성리의 의신사, 영신사, 신흥사 등의 삼신사와 칠불사 그리고 쌍계사가 있고 지금은 없어진 청암의 수정사 등이 큰 절집이고 그 절집들을 잇는 등로는 횡천지맥의 상불재와 낙남정맥의 묵계치가 있었으니 거림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들조차 백무동 ~ 한신계곡이나 백무동 ~ 장터목 구간을 이용하였으니 그야말로 오지 중에 오지입니다.

덕산을 지나는 59번 도로 역시 20번 도로를 중산리로 보내니 진입 도로 역시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巨林같습니다.

03:51

물론 지금은 길상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사찰은 언제 새운 것인지 사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03:55

지금은 관리초소로 이용되고 있는 옛 매표소를 지납니다.

대원들이 벌써부터 겉옷을 벗습니다.

날씨가 상당히 따뜻합니다.

존경하는 노고단님이 촛대봉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보니 더워서 침낭 밖에서 잤다는 얘기가 실감납니다.

노고단님은 하루 먼저와서 촛대봉 부근에서 야영을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유성流星을 보았답니다.

도시에 살면 밤하늘을 보기도 어려운 판인데 별을 그것도 유성을 보았다니!

그것도 광교산이 아닌 지리에서!

그것도 바위로 가득판 촛대봉에서!!!!

노고단님은 왕별이었습니다.

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

아마 제가 있었으면 음악을 조용하게 깔고 술잔을 나누며 쓰잘데기 없는 얘기 나누느라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그 장관을 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04:55

천팔교를 지납니다.

이곳이 해발 1008m라는 얘기죠?

실제는 1006m라는 이설異 있습니다.

05:02

북해도교를 건너고...

이곳의 겨울 추위가 일본의 훗가이도 만큼 춥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미친 놈 같으니.....

붙일 이름이 없어서 일본땅을 갖다 붙이다니!

차라리 시베리아교가 더 어을립니다.

05:38

그러고는 무명교입니다.

이 무명교 우측으로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청학연못 아니 세석연못 루트는 우측이라는 얘기입니다.

4명은 여기서 좀 빠집니다.

또 비탐구간입니다.

아주 위법행위를 밥먹듯이 하는 현오!

구차한 변명은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세석연못으로 가는 길은 너무 좋습니다.

평소였으면 건곡乾谷이었을 길이 최근에 내린 비로 가는 물줄기細流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06:13

정확하게 일출 시간에 맞춰 세석연못에 도착합니다.

축대까지 있는 인공연못입니다.

해발 1539고지에 인공연못이라니!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은 이 연못의 축조 시기를 1862년 진주 단성민란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에는 기록이 없고,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에 처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청학연못이라는 이름은 우천 허만수 선생이 성락건님에게 알려줌으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성낙건 선생은 15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명재상 유성룡의 형 유운룡의 문집 '겸허일기'에 나오는 돌샘石泉을 이 연못과 연결합니다.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면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 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石門)에 이르고 그 돌문(石門)을 지나 40리가량 가면 1천 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 호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石泉)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유운룡이 보았다는 각자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는 촛대봉 주변에 있다.

그것을 '지리99팀'이 청학연못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인터넷에 유포시킵니다.

그러고 난 후 너도나도 그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석천石泉은 낙남정맥 상의 음양수로 보는 게 맞습니다.

석문을 통하여 석천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즉 쌍계사 ~ 불일폭포 ~ 상불재 ~ 횡천지맥 ~ 삼신봉 ~ 낙남정맥 ~ 석문 ~ 음양수 ~ 적석동磧石洞(세석평전) ~ 촛대봉으로 왔으니 유운룡 선생이 이 연못을 봤을 리 만무하다는 게 도솔산인님의 견해이고 또 이게 타당합니다.

그러나 사실 청학연靑鶴淵이라는 이름은 이륙의 '유지리산록'을 필두로 남효온이나 김일손의 글에도 나오는 그것으로 불일암 옆 불일폭포에 있는 소입니다.

이 암자는 혜소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암자 앞에는 청학연(靑鶴淵)이 있는데, 고운이 일찍이 그 위를 유람하였다.

庵乃慧昭鍊道之所. 庵前有靑鶴淵. 孤雲嘗遊其上.

1487<남효온>선생의 [지리산 일과]

 

 

 

그러니 굳이 이 연못의 이름을 붙이자면 적석동지磧石洞池 혹은 세석지細石池, 세석연못으로 부르는 게 맞을 것입니다.

도솔산인님도 그렇게 봅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세석 고원의 신비한 이 인공연못은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떻게 여자들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표정이 급변하는지.....

오늘 처음 뵙는 분입니다.

지리태극종주까지 하셨다니 대단한 체력입니다.

연못과 연결된 바위.

만경대라 불립니다.

1851년 이곳을 지난 하달홍의 우류기를 봅니다.

왼쪽에 도장동(道藏洞), 오른쪽에 적석평(積石坪)[*세석]을 두고 동북 쪽 사이로 우뚝 선 것이 천왕봉이다. 남쪽으로 뭇 산들을 바라보니 언덕 같고 말()을 엎어놓은 것 같다. 여러 산 밖에는 하나의 큰 바다가 있는데 하늘과 물이 서로 맞닿아 다만 하나로 파랗게 보일 뿐이다. 남쪽으로 내려와 몇 리를 가서 만경대(萬景臺)[*세석연못의 바위]]에 이르렀는데,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적석동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노송나무(편백나무)가 많고, 잣나무가 많고, 푸른 명아주가 많으며, 반은 상수리나무이다. 이곳의 풀은 청옥, 당귀, 작약, 사삼 같은 부류로 다 적을 수가 없다.

 

돌에 학동[鶴洞]’ 두 글자를 새겼고, 그 아래 또 []자를 새겼는데, 같이 간 사람 가운데 권씨 성을 가진 이는 바로 산 아래 사는 사람이지만 오늘에야 처음 보았다면서, ‘옛부터 전해오기를 청학동은 동해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이인로 이후 숨어사는 이들을 몰래 찾던 사람들을 헤아려보자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끝내 찾지 못하였으니 이곳이 도원경이라는 설은 황당한 이야기에 가까운 듯하다고 말하였다. 작은 개울을 건너 외적평(外積坪)[*음양수 부근]에 이르자 해는 지고 비가 내렸는데, 겨우 낡은 초가집을 하나 얻어 머무르며 아궁이에서 옷을 말리고 솥을 괴어 밥을 지어 먹었다. 서로 돌아가며 자지 않고 지키면서 소나무를 태우며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맑게 개었는데, 모든 골짜기가 마치 씻어낸 듯하였다. 골짜기를 나와 10리 남짓 가니 石門이 길을 막고 있는데, 아래로는 수레나 말이 지나갈 만하고 위로는 바람이나 비를 막을 만하였다. 길이가 수십 걸음으로 극히 웅장하고 우뚝하였다. 그 남쪽으로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늘어섰는데 맨 밑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돌이며, 칼을 뽑고 창을 세워 놓은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그러니 이 바위가 있는 곳이 만경대라는 겁니다.

그리고 '학동임鶴洞壬'은 거림의 학동이 임좌병향이라 壬좌 라고 보고 있습니다

올라가서 위 각자刻字를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군요.

 

바위에 간 금이 동물의 코와 눈 같습니다.

 

 

연못 건너편의 세 분.

고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연상되는 연못.

만경대에서 본 세석연못.

여전히 스마일.

세석평전 위의 창불대唱佛臺.

반야.

멀리 무등산.

아주 확실하게 보입니다.

어제 얼마나 몸서리치게 맑은 밤하늘과 같이 했을까?

노고단님이 부럽습니다.

왕시루봉 너머 섬진강과 간문천에는 운해가 펼쳐져 있고......

동부능선 덕천지맥에는 웅석봉이 자리하고 있고.......

삼신봉의 흐름은 낙남정맥보다 횡천지맥이 더 힘있게 보입니다.

낙남정맥은 외삼신봉을 지나면서 고도를 떨어뜨리는데 반해 횡천지맥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한검 대장님의 역동적인 걸음.

뒤로 보이는 반야.

 

세 분이 촛대봉을 배경으로......

해가 떠오릅니다.

Uriah Heep의 Sunrise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잡음이 심하기는 하지만 코러스가 들을 만합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지만 산꾼들에게는 한낮 같기만 합니다.

우측 시루봉과 상부저수지.

시루봉 너머 금오산.

 

지리산의 지세를 이용한 양수발전소입니다.

그 뒤로 운해가 깔여 있는 듯한 진양호.

그 좌측이 지리망산의 사량도.

금오산은 조금 이따 다시 봅니다.

얘기할 게 좀 많죠. 

시루봉과 금오산.

천왕봉.

영원한 산사람.

무얼 그렇게 관조하시나이까?

이걸 보십니까?

우측 구곡산.

황금능선의 끝이죠.

이때 이한검 대장님 폰에 신호음이 울립니다.

공단 직원이 우릴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시간에 여길 뭐하러......

백운산과 억불봉도 손에 잡힐 것 같고......

우측 아래 계족산까지.....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지의 문선생은 심심하지 않으시려나.....

촛대봉 돌밭.....

세 사람이 이리로 오고 있군요.

이대장님 10여m 후방까지 접근.

"해밀산악회 사람들로부터 제보를 받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우리가 해밀산악회 대원인데...."

"그러니까 등잔밑이 어둡다는 얘기죠. "

"여러 말씀듣거나 드리기도 그렇고 하여간 깨끗하고 조심스럽게 지나왔으니 죄송스럽지만 그냥 지나가고 앞으로는 비탐구간 출입하지 않습니다.."

"예. 그렇게 하세요."

아마 촛대봉에서 대원들이 하는 얘기를 엿들은 모양입니다.

07:24

선인나주정씨지묘.

여기 무덤이 있었다는 얘기?

아!

나는 이곳에 묻힐 수나 있을까?

뼈 한 줌이라도 묻혀달라고 유언해야겠습니다.

그 각자 바위 뒤로 영신봉과 반야봉.

누대를 오르니 왼편에는 누운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정면에는 학동임(鶴洞壬)’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근래에 기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짓인 듯하였다. 아래에는 작은 못을 만들었고, 또 그 몇 보 아래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연수정(延壽井)’이라 하였다. 누대의 뒤에는 촛불 같은 촉봉(촛대봉)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촉봉]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율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上臺左有臥巖作崖. 面刻鶴洞壬三字. 此似近世好詭者之事矣. 底築小池. 又下幾步有井曰延壽. 臺後燭峯聳出. 巖面刻一律詩曰.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두류산 저 멀리 저녁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으니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만개의 골짝과 천개의 바위가 회계산(會稽山) 같구나.

杖策浴尋靑鶴洞(장책욕심청학동)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는데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숲 너머로 부질없이 흰 원숭이의 울음소리만 들리네.

樓臺縹緲三山近(누대표묘삼산근) 누대에선 아득히 삼신산이 가깝고

苔蘚依俙四字題(태선의희사자제) 이끼 낀 바위에는 어렴풋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네.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시험 삼아 선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노니

落花流水使人迷(낙화유수사인미) 떨어진 꽃 흐르는 물이 사람을 미혹케 하네. 

 

그 옆에는 낙운거사(樂雲居士) 이청련(李靑蓮)이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고적(古迹)이며, 대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이청련의 각자를 찾아보는데 어디 있는지 도저히 보이지가 않는군요.

촛대봉에서 바라본 대간 주릉.

촛대봉의 바위들.

기기묘묘합니다.

- 지리산의 남쪽 끝은 노량이다!

 

그렇다면 그 낙남정맥의 어디까지가 지리산의 영역인가? 어쨌든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이 취령에서 가지를 치며 이 줄기는 황치 ~ 옥산 방향으로 진행됨을 알려준다. 한편 두류전지는 낙남정맥 중 백토현(배토재) 아래가 곤양의 경계라고 하면서 취령 ~ 황치 ~ 옥산614.1m까지를 지리산의 영역이라고 봤다. 문제는 황치에서 옥산을 향하는 낙남정맥을 버리고 남동쪽으로 가는 즉 위에서 살펴본 금오산875.1m으로 향하는 줄기이다.

 

이 줄기를 산경표에서는 황치黃峙 ~ 차재車岾 ~ 이맹재理盲岾 ~ 금오산 ~ 노량으로 향하는 가지 줄기의 흐름으로 보고 있는 반면, 두류전지에서는 빈이티賓義峙 ~ 황토현黃峙 ~ 구현 ~ 금오산875.1m ~ 노량의 흐름으로 보면서 두류신기편에서 지리산 본체라고 본 것이다.

 

이를 현대 지도에 대입해 보면, 지리주릉의 영신봉 ~ 삼신봉(7km) ~ 옥산(22km) ~ 금오산(25km) ~ 노량(5km)으로 이어지니 남부지리의 끝이라 여겨질 옥산 갈림길에서 노량까지 무려 약 30km의 거리인데 여기까지 지리산의 영역이라고 보는 두류전지의 입장은 타당할까? 그리고 긍정적으로 볼 때 그 논거는 무엇일까?

 

김선신이 두류전지를 편찬할 때 산경표에 터 잡아 두류신기頭流身記작업을 했으므로 당시 조선의 지리학자라면 관용어로 쓰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산줄기는 물줄기를 만나면 맥을 다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지 못한다.’는 정도의 개념은 꿰차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대간이나 정맥 등 산줄기를 논하기 위해서는 물줄기와 산줄기 관계쯤은 이해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일반 가지줄기도 아닌 명색이 우리나라 산줄기의 아버지 격인 백두대간이 일반 강줄기 정도를 만나서 대간의 맥이 잠긴다면 아무래도 체면이 좀 구길 것 같다. 아니 또 만날 강줄기도 없다. 강줄기를 만나 자신의 맥을 다하기 위해서는 합수점 즉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는 오히려 정맥의 요건이 되기도 하니 백두대간에게는 타당하지도 않다.

 

어쨌든 산경표를 위시하여 우리 선조들은 백두대간의 끝은 지리산이라고 했다. 지리산에는 천왕봉도 있건만 특정 지어서 천왕봉 혹은 상봉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리산의 상징적인 봉우리인 천왕봉에서 맥이 다하는 것으로 가령 지리산(상봉 혹은 천왕봉)’이라고 표기하려니 산자분수령이 마음에 걸린다. 동생뻘인 정맥도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는데 하물며 백두대간이야! 이럴 때 고수들은 두루뭉술 작전을 쓴다. 대간의 끝을 그냥 지리산으로 놔두는 것이다. 나머지는 필요한 사람들의 해석에 의존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고토 분지로도 극찬한 우리나라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인 택리지의 이중환이 백두대간의 끝은 지리산의 남해가라고 한 말이 이해를 돕는다. 또한 그 뜻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우리 옛 지리학자들은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이 끝난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의미의 그 지리산은 지리산의 본체가 물을 만나는 곳. 바로 남해이니 금오산을 지난 노량이었다!

 

즉 백두대간의 끝은 남해 바다를 만나는 지리산 노량이라는 것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김선신도 두류신기頭流身記에서 제시한 지리의 서남쪽이 곤양 그러니까 지금의 금오산까지 진행하여 노량에서 그친다고 하였으니 이 금오산875.1m ~ 노량 구간을 지리산의 끝이라고 보았다.

 

즉 우리 선조들은 여원재를 넘어 운봉땅으로 들어서서는 섬진강 동쪽과 남강 서쪽을 모두 지리산으로 본 것이다. 거기에 지리산 본체 중 한 줄기가 자연스럽게 하동땅 남해 바다와 만나는 곳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니 거기까지가 지리산의 남쪽 영역이라는 것이다.

 

조상들이 산줄기를 이렇게 보았고 백두대간의 영역을 이렇게 여긴 만큼 우리도 이를 달리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우리나라 북쪽의 끝에는 나라의 최고봉인 백두산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는 남쪽 최고봉인 지리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남북의 최고봉을 잇는 선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그런데 북쪽의 끝 백두산은 동경 128°0436.5, 반면 남쪽의 끝 지리산의 노량은 동경 127°5125에 각 자리하고 있으니 거의 일직선상에 있는 모양새다. 즉 노량에서 북극점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바로 백두산 천지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우연일까?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 조석필은 신이 내린 이 신비한 조화를 두고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저에게는 사부님 격인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님께서 한문학자도 아닌 만큼 이 두류전지를 읽으셨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박선생님은 2004. 8. 25. 발간한 당신의 명저 '신산경표'에서 산경표의 백두대간을 신백두대간 목에서 영신봉 ~ 옥산 ~ 노량으로 연장하여 신낙남정맥의 시작을 영신봉이 아닌 옥산 부근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1대간 9정맥을 이미 마친 저는 위 신백두대간의 영신봉 ~ 옥산 ~ 노량 30.9km 구간을 빠뜨린 모양새가 돼 버렸습니다.

존경하는 이한검 대장님께 날 잡아서 이 구간을 해치우자고 얘기합니다.

영신봉과 좌측의 반야.

반야봉의 우측 묘향대까지 보입니다.

건너편 바위로 올라....

우측 창암산에서 삼도봉에 덕유산까지...

좌측으로는 앞줄이 한신능선, 그 뒷줄 지리북부능선 그리고 그 뒷줄이 서부(북)능선의 바래봉과 그 뒤로 백두대간의 고남산까지....

우측 아래가 창암능선돠 창암산.

그 뒤의 금대봉의 금대암이 선명하고 그리고 삼봉산과 임천지맥.....

임천지맥 우측의 법화산.....

그리고 그 뒤로 황석산, 거망산....

경외스럽기만 한 촛대봉을 떠납니다. 

통설에 따라 백두대간을 진행합니다.

그 촛대봉이 멀어졌습니다.

잉카제국이 망한 것을 슬퍼하던 하늘에는 condor이, 촛대봉은 산까마귀가  선회하는군요.

지리산의 산까바귀는 염송誦도 할 줄 안다고 하던데 녀석들의 목소리가 천수경을 외는 듯한 소리로 들립니다.

이 부드러운 능선.

낙남정맥.

중앙에 금오산.

영신봉과 반야봉 그리고 그 우측의 바래봉과 정령치.

바래봉 좌측으로 가까스로 작은고리봉이 보이는데 옛 이름인 묘봉으로 불러주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2,000여 년 전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에 쫓긴 마한馬韓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都城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지리산의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있다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위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는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지리산, 즉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인 달궁은 그야말로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정령은 지금의 정령치로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기에 그다지 부담이 없다. 그런데 황령은 어디인가? 일설에 의하면 황령黃嶺이 황치黃峙임에 착안하여 만수천이 람천에 합류되는 지점에 있는 산내면 중황리의 황치마을 부근을 든다. 그러면서 천혜의 요새인 달궁의 서쪽인 운봉은 정장군이 정령치에서 방어하게끔 성을 쌓았다면 달궁의 남쪽과 동쪽은 반야봉과 종석대 같은 험준한 산이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라 할 북쪽은 황장군 몫이어서 람천 너머 이 황치마을은 북부지리인 임천지맥의 투구봉 ~ 삼봉산 ~ 법화산에서 넘어오는 길목임과 동시에 람천의 동서를 커버할 수 있는 곳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야 어딘들 성을 쌓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BC78년이라면 지금부터 약2100년 전인데 그 당시 건축이나 토목기술로서 성이나 쌓을 수 있었겠는가? 그저 단순하게 지형을 보고 황령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달궁의 동쪽은 반야봉이 막아주며 남쪽은 노고단이 막아주고 북쪽은 골짜기인 천혜의 요새여서 어떻게 해서라도 막을 수 있으니 문제는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서쪽이 문제였을 것이다.

 

다행히 신라 진지왕 때인 576년 창건한 황령암이 폐사 지경에 이른 것을 1544년 중창하는 과정을 서산대사가 언급하면서 반야봉 좌우에 두 재를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고 한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이들과 문물을 교류했던 운봉은 정령으로 막았으니 다른 한 쪽인 묘봉치는 구례 산동을 커버하는 곳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黃嶺庵이라 하였다.”는 황령암기의 기사와도 얼추 맞아 들어간다. 즉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는 “(반야봉) 위쪽에는 만복대가 있었다.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이 있고 북쪽에는 보문암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이라고도 하였다.”라는 내용은 황령암의 위치가 지금의 심원마을 부근으로 보이는데 이는 묘봉치 즉 황령의 남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내는 함락, 패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한의 피란도성인 달의 궁전은 지금은 잡초더미에 묻힌 몇 안 되는 돌더미와 주춧돌 등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곳을 달궁月宮으로 불렀다.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달궁月宮이란 한자 지명도 마한의 그 한 맺힌 역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져가듯 바뀌어 지금은 "達宮"으로 표기된다.

우리나라 고대사 대부분이 아직 역사로서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듯 이곳 달의 궁전을 중심으로 흥망성쇠 했던 마한의 역사 역시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달궁의 존재로 인해 지리산이 최초로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으로 바뀌게 됐다는 점에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앞으로는 묘봉으로 부르겠습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산!

지리산!

능선이 연하봉에서 일출봉으로 그러고는 제석봉과 천왕봉으로 오름짓하는 모습이 확연하니.....

일출봉 능선......

백무동과 마천.

그 골짜리 사이로 지날 60번 도로.

실상사가 눈에 보이는 것 같고....

우측 맨 뒷줄 남덕유와 덕유산.....

고도를 뚝 떨어뜨렸다 다시 일으켜 세우는 대간길.

도대체 숨을 쉬고 걸을 수 없는데 저분들은 잘도 걷습니다.

오늘 1일 제자를 자청한 유화님.

행복하셨습니까?

지금부터 지리 주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하는 연하봉 구간에 진입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외하는 곳입니다.

누구든 저와 함께 지리 주릉에 오는 분들은 저의 모델이 되어 주셔야.....

중산리 그리고 덕산.

주산 바로 뒤에는 지금은 '백궁선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수정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곳으로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고 있으니 그 부근에 양이터재로 낙남정맥은 지나고 그 우측이 하동호일 것이니 아무래도 구름이 낀 곳이 그곳 같습니다.

그냥 눌러고 싶은 생각뿐! 

이 연하봉은 사실 기암괴석이 층암절벽과 조화를 이루고, 고사목과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안개와 더불어 철따라 조화를 부려 언제나 신선세계와 같다고 하여 '연하선경煙霞仙境'이라 불립니다.

'연하煙霞'란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일컬음인데 사실 구례중학교 교사였던 우종수님이 지리산 루트를 개척하면서 1955. 5. 5. 산악회를 조직할 때 산악회 이름을 연하반이라고 한 데서 유래합니다.

주릉을 개척하면서 이곳에 이르러 바람에 날리는 초목들을 보면서 아니 안개 구름이 살짝 넘나드는 이곳에서 보였다가는사라지고 그러고는 다시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새악시의 볼처럼 아름답기만 한 이곳에 자신들의 산악회 이름을 안 붙였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라고해서 '해밀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주저했겠습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참고로 이 연하반 산악회에서 명선봉 아래에서 수량이 풍부한 샘물을 발견하고는 지도에 자신들의 이름을 따 연하천이라고 붙입니다.

그러고는 지금의 연하천 대피소의 유래가 됩니다.

오늘 난리났습니다.

점묘點描.

중앙 삼각고지부터 그 좌측의 반야봉까지 봉우리들이 한눈에 읽혀집니다.

토끼봉, 날라리봉 그리고 노고단.

어제 노고단님이 들려준 환상적인 얘기가 눈에 삼삼합니다.

유성流星.

별이 빛나던 밤에......

연하봉의 상징.

제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 화면인 이곳.

이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하이킹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자신의 손으로는 셧터 한 번 안 누르면서 많은 사진을 간직하고 계신 신술神術의 소유자.

모델이 되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08:49

야영장이 있던 자리는 공터로 그냥 남아 있고 ...

늘 천왕봉으로 오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그래서 장터목 같습니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산희샘이 있죠?

아까 얘기한 연하반 산악회에서 장터목 우측 아래에서 샘을발견하고는 마침 그날 출산한 대원의 딸 이름을 여기서 즉석으로 짓습니다.

지리산의 山가 딸이니 姬를 붙여 산희샘으로 명명하고는 그들의 지도에 표기합니다.

그래서 산희샘입니다.

사실 원래 이 샘이 장터목샘이었으니 만큼 원래의 이름으로 돌려야 한다는주장에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나 관습법이 성문법의 보완 역할을 한다는 민법의 규정에 의하여 개선이 되지는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

여기서 노고단님을 만납니다.

대단하신 분.

장터목골...

이 골짜기로 내려가면 출렁다리에서 법계사 루트와 합류하게 됩니다.

바로 제석봉으로 오릅니다.

노고단님.

영화 'Knockin' on heaven's door'를 한 번더 보시겠다구요?

저도 그래야겠습니다.

세상 어느 영화가 이 영화의 클로우징 씬closing scene을 따라 올 수 있겠습니까? 

덕분에 Bob Dylan을 만납니다.

Before The Flood이라는 라이브 더블앨범입니다.

언젠가 같이 야영을 즐길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중앙 바위봉이 일출봉.

그 좌측이 연하봉.

우측이 영신봉.

그 좌측이 왕시루봉......

나이를 잊으신 영영님.

한 손으로는 천왕봉을 다른 한 손으로는 통신골을 가리키십니다.

드디어 황금능선과 웅석봉의 달뜨기능선이 시야를 확보해 줍니다. 

통신골.

通信谷이라고도 하지만 저는 通神谷을 고집합니다.

천왕봉 산신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 노고단님과  'Knockin' on heaven's door'를 얘기했던 것이기에 이 길의 이름도 '천국로Road to Heaven'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천문의 각자 붉은 색을 누군가가 덧 씌웠습니다.

red complex 걸린사람의 송행인가요? 

사실 예전 함양군에서 설치한 정상석을 보면 항상 붉은 페인트 투성이었습니다.

제석봉.

반야봉 우측으로 대간길이 훤합니다.

고도를 올린 입니다.

시루봉과 촛대봉.

10:00

천왕봉으로 오릅니다.

종산식을 거행합니다.

백두대간 졸업을 고하고 산신님 덕분에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는 감사하는 마음의 표출입니다.

 

산너울 감님의 헌사.....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내용도 나오고.....

이 자리는 바로 예전 성모사가 있던 자리로 점필재 김종직, 김일손, 남효온, 성여신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올라 하룻밤을 묵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 제를 올리던 제단에서 정확하게 제를 올리니 아주 의미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밥을 먹고 기념 촬영을 하러 천왕봉에서도 가장 높은 곳인 일월대로 향합니다.

이 천왕봉은 하늘을 받쳐주는 기둥 즉 天柱입니다.

그리고 일월대죠.

참. 고생 많으십니다.

저희 어머니 같으면 딱 이런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남 좋은 사진 찍으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돈 때문에 하겠습니까?

밥 때문에 하겠습니까?

봉사이고 그게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죠.

구곡능선이라 불렸던 황금능선.

이 코스는 구곡능선이라 불리던 코스인데 세석산장(당시는 민간인이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경영할 때) 산장지기였던 정원강 산죽으로 산행이 어려운 구곡능선으로 낫 한 자루를 들고 등로 정비에 나선다. 늦은 가을 작업을 끝내고 허리를 펼 때 남서쪽 하늘의 석양이 붉은 몇 가락의 빛을 이 구곡능선으로 보내고 그 붉은 빛이 산죽 잎에 반사될 때 눈부신 황금색이 되었다고 한다. 황금색으로 물결치는 산죽밭의 지루함이 오히려 멋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빛의 조화로 그 이름도 구곡능선에서 황금능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중에서

그 능선의 끝 구곡산 아래에는 남명 선생의 덕천서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덕산 자체가 남명이니....

남명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 산천재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리산의 山과 천왕봉의 天을 따서 그렇게 지은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 정도의 곳이 덕산마을이니 지리의 다른 모든 산들이 '봉峰'이라는 계급장을 달았음에도 이 구곡산만큼은 당당하게 '산山'이라는 계급장을 달아 자식이 아닌 동생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창대.

봉우리 자체는 세존봉이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바로 앞에 헬기장이 있고 그 앞에 로타리 대피소와 법계사가 있습니다.

조금 이따 들러야겠습니다.

아!

이제 내려가야 하는데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 수는 없을까?

Bob Dylan은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그 답은 친구여 바람에 실려 불어온다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그 답은 바람에 실려 불어오고 있어"라고 했건만.... 

정닉.

유일한 고등학교 후배.

물론 재단만 같은....

졸업을 축하합니다.

이제 정맥에 들으셔야죠.

중봉과 하봉.

그리고 우측으로 덕천지맥의 지리동부능선.

그,리고 그 뒤로 왕산과 필봉산.

그 우측의 황매산.

독바위 바로 앞이 청이당이 있던 쑥밭재.

이한검 대장님이 단독무지원지리태극종주를 할 때 귀신을 보았다던 곳.

우측 끝 법화산.

지리서부능선과 지리북부능선.

...............

와불산은 영랑대 등에 가렸고.....

하산을 합니다.

다시 와야죠.

이번 목표는 문창대와 그 전에 조재영님이 발견한 신문창대 둥 두 곳입니다.

신문창대에서 문창대를 봅니다.

문창대는 부사 성여신이 발견한 곳이죠.

고운 최치원이 장터목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곳이라고 합니다.

몇 분이 너럭바위에 앉아 있어 고운선생장구지소라는 각자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다만 알지 못 할 이런 각자와,

일출봉이라는 각자만 확인합니다.

이곳을 보면서 이곳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거기서 시루봉과 촛대봉 그리고 우측의 제석봉을 확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지에 위치한 법계사를 지나는데 산가인님을 만납니다.

지리산님도 만나고....

문창대에 같이 가자고 꾀입니다.

공범을 만드는 것이죠.

바위를 우회하여.....

문창대의 여러 바위 중 한 바위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바라본 법계사와 천왕봉.

장터목이 바로 바라보이고 향적사 터도 보이니 능히  이름의 유래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계사 좌측으로 신문창대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 아쉬운 것은 법계사에 들러 삼층석탑에서 조망을 하여야 하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이 법계사도 연곡사, 화엄사와 같이 44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입니다.

한때는 법계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샤먀니즘이 팽배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좌측으로 촛대봉 - 연하봉 그리고 일출봉도 봅니다.

천왕봉 우측으로 써리봉 연봉도 봅니다.

이 써리봉을 멀리서 보면 농기구인 써레와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럴 듯하다.

.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98

석문을 지나 다른 봉으로......

산가인님과 지리산님.

문창대 확인 인증입니다.

돌아 나와서....

13:38

장터목골과 합류하는 출렁다리를 건넙니다. 

그러고는 공단 사무실 옆에서 우천 허만수님을 뵙니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칠선계곡에서 홀연히 사라진 우천 선생님.

지금도 지리산 어디선가 산꾼들의 안전산행을 위하여 지며보고 계실 것만 같군요.

법계교를 건넙니다.

하이파이브님이 손을 흔드시고....

대간을 끝나는 날이 되니 제 글속에 많은 여성대원들이 들어오시는군요.

이 법계교를 건너면서 부처님나라 혹은 신선나라에서 속세로 들어오게 됩니다.

곧 말디맑은 영혼 속에서 지내다 다시 북잡다기한 인간 세상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만 나누다 갑자기 상스러운 표현도 나오고..... 

 

하이파이브, 산가인.

'복이언니'님도 갑자기 나오시네요.

남명 선생님의 두류산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십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