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할머니로부터 계시가 옵니다.
"너 할머니 잊었냐?
이번 달 내로 오지 않으면 너 진짜 각오해라!"
마가목에 꽂힌 이후 지리로의 발걸음이 뜸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문제를 제기하더니 급기야 할머님께서 직접 나서셨던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지리가 그리웠었는데 오히려 잘 됐습니다.
주릉을 걸을 때에는 오히려 안내산악회가 편합니다.
오랜만에 반더룽 회장님께 전화를 넣습니다.
반가운 목소리인 것을 보면 아직도 제 전화번호가 회장님 전화목록에 저장이 되어 있는 것 같군요.
일기예보에는 12:00 ~ 16:00까지 0.8mm 정도 온다고 하는군요.
그러면 천왕봉을 알현하기는 틀린 일?
이상하게 이럴 때에는 구라청이 아닌데....
그런데 이 나이에 한방에 성중종주 가능해?
혼자 진행합니다.
사당 전철역에서 22:00 출발한 반더룽은 28인승 버스에 회원들을 가득 채우고 출발합니다.
자동적으로 눈을 감습니다.
내일 지리는 어떤 모습일까?
대간과 관계없이 주릉을 걷는 일인 만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능선만 생각하자!
아!
그런데 왜 그렇게 자주 불을 켜는 거야?
장기 회원들이 너무 많이 타서 그런 거 같습니다.
2021. 09. 25. 02:02
"성삼재에서 진행하실 분들 준비해 주세요."
아! 그렇구나.
모두가 성중종주를 하는 게 아니고 일부 회원들은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이나 참샘코스를 이용하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10여명만 내리는 거 같습니다.
이거 저거 준비하다보니 20여 분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차피 혼자인데 뭘..."
텅 빈 성삼재 주차장.
조금 있으면 또 바글바글해지겠지....
천왕봉까지 28.1km.
천왕봉 ~ 중산리까지 5.4km.
총 33.5km.
최근 두어 번은 장터목에서 하산.
그 이유는 일행과의 노닥거림과 막걸리.....
오늘은 혼자.
02:25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Starry starry night.....
아직은....
오늘 예보를 보니 12:00 경에 비올 확률 30% 라고 했으니까.....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걷는 길은 늘 피곤합니다.
예전에는 돌 길.
지금은 시멘트 길....
다행히 좌측에 야자 매트를 깔아놓긴 했지만 그것도 비온 끝이라 물컹쿨컹....
우측에는 종봉이라 불리던 종석대가 있겠지?
오리지널 백두대간 코스인 그 길......
나무 계단을 올라 그 길에 합류합니다.
무너미.....
대간길이 이 물줄기를 건너더라도 이 물줄기는 늘 수량이 풍부한 길상봉(노고단)의 물을 화엄사 방향의 마산천으로 흘러내려 주기 위한 인공수로이기 때문에 '산자분수령'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간길은 여기서도 도로 우측 능선으로 붙어 KBS 송신소 방향으로 가야 한다.....
중얼중얼.....
이러니 혼자라도 심심할 구석이 없습니다.
돌길을 걸어 노고단 대피소로 오릅니다.
예전 노고단 산장을 그리면 격세지감입니다.
반더룽 회원인가?
왜 안 올라가고......
03:10
노고단 고개까지 2.6km를 50분이 조금 안 걸렸군요.
역시 지리는 설악보다 유순하고 부드럽습니다.
지리는 앙탈부리는 설악과는 달리 자주 가지 않아도 용서해주는 산이라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을 때는 오라고 했다. 잠에서 막 깬 채로 있는 수염 그대로 가지고 와도 된다고 했다. 고달프고 지쳐있을 때, 다른 데서 눈길을 주지 않을 때 은근하게 생각나면 와도 된다고 했다. 수줍은 시골 새색시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오라고 했다. 지리 아무 데나 앉아서, 하염없이 아무 데나 바라보고 싶을 때는 오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수족이 힘들어 할 때에는 꼭 찾으라 했다.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싶을 때 그때는 반드시 오라고 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서문
새벽의 지리산.
산주인인 녀석들과 소통도 하며 걸어야 하는데 산객이 많이 지나다 보니 지리 주릉에서 그들을 만나기란....
03:47
돼지령을 지납니다.
심원마을 방향에 있는 저연猪淵에서 비롯된 이름이죠.
지나온 길상봉(노고단) 방향에서 불빛이 보이는군요.
아까 지나친 분들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군요.
여수 앞바다의 불빛......
자재 도구가 쌓인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고.....
초당 정영기 선생님에 의해 천호샘이라 명명되었던 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임걸령 샘으로 불리고 있고.....
그냥 갈 수 없어 샘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고 갑니다.
04:30
시간 문제로 반야는 그냥 지나치기로 작심했는데 이렇게 막아놨군요.
공사 때문인가?
원래 오리지널 대간길은 여기서 200m를 더 올라가서,
이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죠?
대부분의 대간꾼들은 그런 것조차 인식을 안 하고 그냥 통과하죠?
지도를 안 보니....
묘향암 가는 길......
호림스님은 잘 계시려나?
04:48
날라리봉을 지납니다.
이 봉우리에서 보면 도계능선의 봉우리들이 나라비로 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나라비봉이 날라리봉으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구례 연하반 산악회에서 명명한 이름이죠.
지금은 삼도봉이라 개명이 되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삼도봉은 네 개가 있죠.
이곳과 경상남도 거창군, 경상북도 김천시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이 만나는 초재산(草岾山)1249.1m과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 등이 만나는 오리지널 삼도봉, 강원도 영월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경상북도 영주시가 만나는 어래산1065.3m 좌봉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 유일하게 백두대간이 지나지 않는 봉우리가 바로 어래산 좌봉이죠.
한편 이 날라리봉의 엣이름이 중반야였고 이럴 경우 토끼봉이 바로 이 날라리봉이어야 함은 조금 뒤에 얘기하겠습니다.
천왕봉까지는 20km.
그러니까 중산리까지는 아직 25.4km가 남았군요.
뱀사골과 연동골이 갈리는 화개재로 떨어집니다.
이 새벽에 볼 것도 없으니 마음 속으로만 호남정맥의 백운산을 보고.....
그러고는 묘봉妙峰입니다.
예전에는 반야봉에서 정동쪽(卯方)이 있다고 하여 묘봉卯峰 즉 토끼봉이라고 하였는데 최근 연구한 바에 따르면 토끼봉이라는 이름은 그 어원의 근거가 봄 빈약하죠?
사실 저도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2쪽이나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3쪽에 같은 취지의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토끼봉을 굳이 한자로 씉다면 卯峰로으로 한다고도 했죠.
하지만 한글 순화차원에서 굳이 묘봉이라 부를 필요없이 토끼봉으로 부를 것을 고집하고 제 주위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산이름을 지을 때 그냥 마구잡이로 짓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 신성하고 고귀하기 까지도 한 산이름을 지을 때는 정성들여 작명을 한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죠.
물론 이 서부지리의 맹주는 반야봉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묘봉이 반야봉에서 볼 때 정동쪽이라고 우기면 그럴 수도 있는데 한 개그 프로의 대사같이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식보다는 연구 부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이 ‘지리99팀의 엉겅퀴’ 님이나 법사이신 범여 김복환 선배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역시 이 지리산을 얘기하고 지리산의 지명을 얘기할 때 우리는 확실히 불교지명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렸었죠?
지리산의 까마귀들은 염송도 할 줄 안다고....
그러니 이 토끼봉 아니 이 묘봉妙峰은 반드시 저기 보이는 반야봉과 저 묘향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즉 불가에서는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이는데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라는 것이죠.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
妙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즉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즉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이 말로써 억지로 표현하자니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묘지妙智는 불지佛智라 해도 되며, 다른 단어의 妙도 佛로 교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
-유마경 제10품 『향적불품』
“묘향(妙香)이란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
-아함경
그래서 묘향은 갑옷 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이 妙香은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야봉般若峰 아래 묘향대가 있으니, 이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 될 것이니 그 그림이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기는 서쪽으로는 노고단으로 흘러 화엄사로 내려가게 되고, 동쪽으로는 흐르는 그 기는 이 묘봉으로 흘러 한쪽으로는 칠불사로 가고 다른 하나는 연곡사로 간다니 이제야 이 봉우리가 토끼봉이 아닌 묘봉으로 불러야 한다는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닐 터!
1818년 정석구의 두류산기를 봅니다.
조선후기 1818년 남원에 거주한 유학자 정석구가 쓴 ″두류산기〃는 200년 전의 자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리산의 형세와 지명들을 명확하게 기록을 해서 지리산 지명탐구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정석구의 두류산기에서 삼도봉이 토끼봉이라는 내용의 기록을 옮겨서 이해와 분석을해 봅니다.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峯)이 되니 산동(山洞)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조금 동쪽에 종봉(鍾峰, 현 종석대)이 있는데, 남악사(南嶽祠) . 천은사(泉隱寺) . 화엄사(華嚴寺)의 주봉이다.
산줄기가 낮아졌다가 동쪽으로 뻗어 노구당(老嫗堂, 현 노고단)이 되는데, 문수동(文殊洞)의 주봉이 된다.
산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반야봉(般若峰)으로, 묘봉과 마주 서 있으며, 나머지 산줄기(현 심마니 능성)는 반선동(半仙洞)에서 그친다.
산줄기가 북쪽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어 토현(兎峴)[註 :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사이의 주능선이다.]을 지나면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위의 문단에서, “반야봉에서 북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은 토현(兎峴)을 지나면”에서의 토현은 토끼고개의 한자 표시이며, 토끼봉을 비정해줄 관건으로 보면서 토현의 위치를 짐작해 보면 지금의 운봉무더미 부근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토끼고개가 일구어낸 봉우리인 지금의 삼도봉 즉 날라리봉이 당연히 토끼봉이 될 것입니다.
곧 이어지는 문단,
"토현을 지나면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사이의 주능선이다.”
......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이 문단에서 설명한 부분은 피아골과 화개골을 가르는 불무장등능선 즉 도계능선道界稜線이 삼도봉에서 시작되는 사실을 인식해 보면 지금의 삼도봉이 주봉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중반야(中般若)라는 명칭은 삼도봉이 반야봉 지척의 유일한 명승의 봉우리이기에 반야봉권에 묶어서 작은 반야라는 뜻도 함께 내포된 중반야라는 이름을 부친 듯 합니다.
하나를 더 들어보죠.
우리가 잘 아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글로 1938년 씌어진 지리산탐험기입니다.
『.....이 직전계곡의 동복(洞腹)을 뚫고 나가는 오늘 우리의 코스는 이번으로써 새 노정(路程)을 짓는 길이라,
전인(前人)에게서 들은 바 없는 모험노정(冒險路程)임을 즐거워 하여, 나는 연방 지도를 펴들고 보며 무한한 흥미로 내려가는 것이다.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건마는, 쉬운 길은 탐하고 싶지 아니하고, 조망은 저 최고봉상의 과목(課目)이라, 오늘 우리는 오히려 이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을 바닥으로, 바닥으로만 밟아내려, 지리산 복중별취(腹中別趣)를 맛보자는 것이다....』
위 기록은 1936년 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주관한 지리산등반에 참가한 노산 이은상의 산행기록 중의 한 부분으로, 돼지령에서 피아골골짝으로 하산하는 과정을 기록한 문단입니다.
당시 선생의 일행들은 지리산 산행여정을 지리산속의 사찰 관람과 연계하여서 화엄사에서 출발해서 노고단을거쳐 돼지령에서 피아골로 길을 잡아 연곡사, 쌍계사등을 관람 후 대성골 세석을 지나 천왕봉 코스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 즉 수목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 전인미답의 험난한 피아골골짝을 내려가면서,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건마는."이라고 토끼봉을 언급했습니다.
선생이 언급한 <저 “토끼봉”허리>는 불무장등을 가리킨 것이며, 기록에서의 토끼봉은 현재의 삼도봉이 명확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 묘봉은 토끼 卯의 묘봉이 아니라 묘할 妙의 묘봉입니다.
그 묘봉妙峰이 와전되어 卯峰으로 되었다가 한글 순화하는 이들 즉 예전의 저같이 한글인 토끼봉으로 풀어쓴 것일 겁니다.
묘향대 하니 지금도 용맹정진하고 계실 호림스님을 뵙고 싶군요.
얼마 전 뵀는데 또 들르고 싶군요.
05:48
묘봉을 내려오는데 일출이 시작되는군요.
낙남정맥.....
영신봉과 촛대봉은 구름에 덮여 있고.....
명선봉으로 오르는 길.
정상부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06:48
한적한 연하천대피소에서 갖고온 송편을 먹습니다.
물도 한 통 담고.....
이제 천왕봉까지 15km.
시속 2.5km ~ 2.7km를 유지하고 있으니 13:00 정도면 천왕봉에 오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하산은 15시 30분경이면 될 것이니 무난하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지리북부능선 갈림길.
여기서 남원시와 헤어지고 온전하게 경상남도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함양군과 하동군의 군계를 걷습니다.
멀리 호남정맥의 백운산과 도솔봉 그리고 수어지맥의 억불봉을 봅니다.
우측 뒤로는 왕시루봉이고....
삼각고지를 오르며 잔인했던 빨치산과의 전투를 상상합니다.
우측 영신봉은 모습을 드러내나 천왕봉만큼은 보여주지 않는군요.
떨어져 나온 깨진 바위.
형제봉(부자봉) 조망터.
앞당재 뒤로 황장산947.7m.
07:42
형제봉에 올라 대간길을 내려다 봅니다.
우측이 1399.4봉이고 그 왼쪽으로 벽소령대피소가 보입니다.
덕평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구름으로 덮였고.....
멋지군요.
지리남부능선에서 가지를 치는 지능선들은 화개골로 떨어지고.....
왕시루봉.....
멀리 반야봉.
우측이 명선봉.
부자봉을 지나면,
그 아래 연하굴이죠.
지리능선 개척 산행에 나섰던 구례 연하반산악회 팀이 연하굴에서 찍은 사진.
지나온 부자봉을 봅니다.
조망터에서 벽소령대피소와 그 뒤의 덕평봉을 봅니다.
운무가 멋지게 피어오릅니다.
석문을 지나고.....
08:14
그러고는 벽소령대피소입니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 간의 거리는 겨우 3.6km.
금방 도착합니다.
빵 하나를 먹고....
1023번 도로를 걷습니다.
지금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1023번 도로....
그런데 이런 임도 수준의 길은 누가, 왜, 뭐 하러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고 보니 음정에서 올라오는 임도는 이 벽소령 대피소 코밑까지 아주 넓게 이어져 있음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길의 도로사정도 아주 좋아 작은 트럭이나 사륜 구동 차들이 오고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길은 무엇일까?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핑계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나마 지리 북쪽의 양정, 음정 주민들은 이 도로를 산간지대 경작이나 토봉土蜂 등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면 지리 남쪽의 삼정마을 주민들에게는 신흥~삼정 약 7km의 거리 정도만 생활 편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아가 삼정삼거리에서 벽소령대피소로 오르는 지름길(4.1km)마저 1995. 9. 5.부터 영구 폐쇄되어 ‘벽소령 종단도로’는 이제는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8쪽
1023번 도로는 여기서 음정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 입구에는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군요.
1.1km를 1023번 도로로 걸어온 것입니다.
오리정골.
바른재를 지나고,
09:14
선비샘에 도착합니다.
그 수량도 풍부하던 선비샘이 지금은 졸졸졸....
그나마 음용수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리남부능선은 구름에 가렸고....
09:43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칠선봉이라 표기된 1558.3봉입니다.
건너 봉우리가 사실은 칠선봉이죠.
조망이야 여기가 훨씬 좋지만 칠선봉이기 위해서는 7개의 바위가 늘어서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는 그저 주변만 감상을 하고 지나야 하는데 오늘은 영......
09:52
이 일대가 칠선봉이죠.
이런 게 여러 개 서 있으니....
조금 전 국토지리정보원 칠선봉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의 봉우리.
칠성봉이 시작되는 초입이죠.
앞으로 진행방향의 좌고대가 있는 바위군.
추강암과 좌고대가 유명합니다.
우측으로는 툭 삐져나온 가섭대가 보이고......
자연천이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
삼피사설三必死說.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죠.
산죽밭을 지나다보면 떠오르는 사자성어입니다.
엣 영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걷다가 하루 머물렀던 곳이죠.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 유몽인 유두류산록
175계단을 오르면서,
지리동부능선을 봅니다.
소년대와 영랑대 모두 구름에 가렸습니다.
그러고는 좌고대입니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중들이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 김종직 유두류록
도솔산인 이영규님의 사진입니다.
좌고대를 가장 잘 찍은 작품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추강암에서 찍은 것이라 합니다.
추강암 뒤로 칠선봉을 보고.....
유몽인이 부른 비로봉.
지리 주릉은 여전히 구름에 가렸고.....
가을이 오는가?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영신봉.
조금 어려운 얘기를 할까요?
산경표를 보면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취령鷲嶺에서 분기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지도를 보면 취령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취령이 어디입니까?
산경표에서 얘기한 낙남정맥의 분기점인 취령이 지금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지금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야 취령은 무조건 영신봉이 되어야 합니다.
옛 문헌을 살펴봅니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 보면 이 취령의 한 기슭은 남쪽으로 이산(梨山), 모방산(茅方山)에 이르며, 남쪽에 하동부의 치소가 있다고 적고 있으니 이 취령이 지리산에서 하동으로 가는 길목임을 알 수 있고,
김선신의 두류전지에 따르면,
"반야봉이 동남으로 흘러 취령이 된다. 취령에서 동남쪽으로 들어오는 첫머리가 영신대이다. 영신대의 동쪽이 세석평이며 동북으로 흘러 중봉이 되며 10리를 흘러 천왕상봉이 된다."
여기서 나오는 지명이 반야봉, 영신대, 중봉 정도인데 이때 중봉은 촛대봉이니 취령을 영신봉으로 봐도 무방할 거 같습니다.
산경표에 보면 낙남정맥은 지리산의 취령鷲嶺에서 가지를 친다고 나와 있으니 현대적인 해석으로 본다면 취령 = 영신봉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지나온 촛대봉은 오만가지 이름을 다 가진 봉우리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신봉은 예전에는 자기 이름이 없던 무명봉 신세였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취령은 곧 영신봉이다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이른 거 같습니다.
선인들의 산행기를 봅니다.
즉 점필재 김종직이나 김일손, 남효온, 유몽인 등 옛 선인들의 산행기를 보면 이들은 이름도 없던 이 영신봉을 의식하지 않고 바로 영신사나 빈발암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이곳을 지난 때인 1472년 ~ 1611년까지는 적어도 무명봉이었다 할 것입니다.
즉 이 산경표가 만들어진 시기는 통설에 의할 때 적어도 순조 즉위년인 1800년 이후이니 18세기 말 정도까지는 무명봉이었다는 것이죠.
원래 영신봉은 무명봉이었다!
두 분의 유력한 견해를 살펴봅니다.
최석기 교수님은 빈발봉을, 도솔산인 이영규님은 계족봉을 각 영신봉의 옛 이름이라고 보나 1487. 10. 1. 이곳을 지나던 추강 남효온의 산행기를 보면 추강 남효온은,
10월 1일(정묘).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승려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떠나 소년대에 올랐다. 솜대[?竹]를 뚫고 계족봉(鷄足峰)을 지나 30리 길을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는 영신암(靈神庵)이 있었고 암자 뒤에는 가섭전(伽葉殿)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말하는 곳이다. 나는 그곳을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돌덩이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라고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영신암은 영신사인데 이 영신사는 빈발암 바로 아래 있었던 암자였죠.
그러니 빈발암이 오히려 이 영신봉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영신봉과 빈발암의 거리는 채 몇 백 m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추강이 향적암을 떠난 경로를 살펴봐도 향적암은 장터목 바로 옆에 있었고 소년대는 연하봉이었습니다.
추강은 계족봉에서 30리 길을 걸어 빈발암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거리상으로 봐도 계족봉은 절대로 영신봉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해 집니다.
나아가 옛 선인들의 글은 숫자에 관한한 뻥이 좀 심함을 감암해 볼 때 계족봉은 생김새로 보나 유래로 보나 지금의 촛대봉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영신봉은 취령
그렇다면 당시 영신봉은 무명봉으로 보고 오히려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 이후에 취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즉 이 산경표를 제작하였던 1800년경 지리와 지도에 관한 한 프로들인 이 제작자들은 분명 군현지도와 읍지를 토대로 이 산경표를 작성하였을 것인데 당시 그 군현지도에 이 봉우리 이름이 없었다면 함양이나 산청 사람들에게 물어서라도 표기하였지 그 중요한 분기점을 절대로 허투루 표기하였을 리는 만무하였을 것이니 적어도 18세기 말에는 이 영신봉이 취령으로 불렸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촛대봉의 수많은 이름 중에 취봉은 보이지만 취령은 보이지 않고 둘째, 나아가 점필재 김종직의 산행기를 보면 이 저여원 즉 세석평전에는 매鷲를 잡는 이들이 거주하는 초막들이 여러 채 있던 곳이기도 하였으니 산경표를 집필하는 제작자들이 이에 착안하여 이 지금의 영신봉을 취령鷲嶺으로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셋째, 그런데 령은 고개를 말하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嶺이란 한자의 훈에는 고개뿐만 아니라 산봉우리라는 뜻도 있으니 산경표 제작자나 주민들이 이렇게 부르는데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대동여지도
더군다나 정교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대동여지도를 보면 물론 천왕봉의 위치가 좀 잘못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주변에 신응사니 쌍계사가 제대로 그려져 있고 그 산줄기가 낙남정맥에서 벗어나 하동으로 향하고 있음을 볼 때 갈림봉인 취령이 이 영신봉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낙남정맥은 이 취령 그러니까 백두대간의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김해의 용지봉을 지나 녹산교에서 끝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물론 낙남정맥의 종점이 분산이냐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는데 이는 여기서 논 할 자리가 아닌 거 같습니다.
한편 바로 이 영신봉에서 분기한 낙남정맥은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분성산 혹은 고암나루터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232.7km의 산줄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 1대간 1정간 13정맥 중 하나의 정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경표가 본에 따라 이 낙남정맥이 정맥이 아닌 정간 즉 낙남정간으로 나와 있기도 하죠.
그러니 본에 따라 1대간 2정간 12정맥으로 분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정간과 정맥 뭐가 다른가?
간은 줄기고 맥은 가지줄기이니 정간이 정맥보다 더 끗발이 세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뭐 특별한 게 아니고 우리 국토를 크게 놓고 보면 백두대간의 총연장 길이보다 이 정간을 잇는 게 더 길어 보인다는 즉 대간의 주릉 그러니까 주줄기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일 겁니다.
그러니 정맥 = 정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혹자는 동해로 가는 유일한 정맥이기 때문에 정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니냐 하기도 하지만 그럼 낙남정맥은 왜 남해로 가느냐에 대해서는 답을 못하니...
촛대봉을 보면서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산이 붉어지고 있습니다.
낙남정맥.
삼신봉에서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계속 진행을 하고....
멀리 섬진강 건너 호남정맥.
촛대봉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라인.
중간에 청학연못이 숨어있죠.
청학연못
연못 바로 뒤 암벽에는 ‘학동임(鶴洞壬)’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몇 보 아래에는 ‘연수정(延壽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그 옆에는 낙운거사(樂雲居士) 이청련(李靑蓮)이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고적(古迹)이며, 대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 송병선 두류산기(1905년)
아!
천왕봉이 잠깐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그 앞쪽으로 연하봉 우측의 삼신봉이 우뚝합니다.
군부대 터.
헬기장으로 이용하고 있죠.
저기 귀여운 아가씨는 혼자서 살방살방 잘도 걷더군요.
물은 아직 300ml 가량이 남아 있으므로 보충하지 않고 그냥 통과합니다.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한신계곡을 따라야 하겠고.....
한신계곡이라는 이름은 좌측에 있는 한신바위에서 비롯됐고 그 바위 이름은 초한지의 한신장군에서 비롯된 이름이죠.
부드러운 영신봉 라인에 바위가 몇 개 북쪽과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게 눈에 들어온다. 기도꾼들에 의하면 이 영신봉의 바위들은 유달리 기가 세어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이 있거나 인심이 흉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중무속인들은 영험한 기운을 영웅으로부터 찾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영신봉 동쪽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그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석평전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계곡이 자연스럽게 ‘한신계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45쪽
지난 번에는 옛취사장 실내 공사를 하더니만 이제는 통째로 ......
wirh 코로나가 시행되면 이제 대피소 이용은 끝난 거 아닌가?
세석평전.
한때는 저여원沮如原이라 불리던 것을 일제가 세석평전으로 창지개명한 것이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한자의 생김새로 보아 그런 의견에 동조를 한 적이 있었죠.
그런데 도솔산인 이영규님의 연구 결과를 보니 이 세석평전의 명칭 변천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여원 → 세석평지 → 세적평전 → 세석평전
즉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날 때인 15세기에는 저여원이라 불리던 것이 세석평지, 세적평전이라는 이름을 거쳐 1903년 안익제 선생 대에 이르러 드디어 지금의 세석평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세석평이라는 용어가 세석평전과 혼용이 되고 있고....
그러니 이제 우리는 안심하고 세석평전이라는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다.
세석의 고산습지.
살아있는 지리산입니다.
이 멋진 촛대봉도 오늘은 그냥 통과.
뒤를 돌아보니 영신봉 우측으로 운장바위가 우뚝합니다.
바로 앞이 삼신봉.
좌측 화장봉에서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뚜렷하건만 천왕봉은 아직도 구름 속.
삼신봉 뒷 봉우리.....
좌측으로 틀어서 우측으로 오르면....
이정목을 지나,
시루봉과 촛대봉의 뒷모습을 봅니다.
고운동재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드디어 중산리도 보이는군요.
맨 좌측이 황금능선 그리고 구곡산.
앞줄이 북부능선.
그 뒤가 서부능선이고 우측이 바래봉.
삼정마을과 마천.
멀리 인월과 우측의 임천지맥.
앞이 창암산과 백운봉과 삼봉산......
저 삼봉산으로 가면 좀 걷히려나?
삼봉산으로 가니 구름이 더 올라오는군요.
틀렸습니다.
뒤따라오던 젊은 친구가 한숨을 내쉬는군요.
연하선경을 못본다는 아쉬움이 탄식으로....
그냥 이 정도로 만족?
연하선경의 아름다움
연하봉이다. 점필재가 지날 때도 부를 이름이 없던 봉. 그저 조망이 좋았음에도 이름이 없어 불러주지 못한 봉이다.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점필재를 보고 오죽했으면 동행했던 유극기가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을까? 그날 점필재가 “고요한 이 산수 속에 그윽하게 운무가 피어오르고 연기가 노는 듯하며 저 바위에 걸린 노을이 함께 어우러지니 연하선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네.”라는 말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점필재는 이런 말없이 그저 “증거가 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찌 이름을 붙이겠는가!”라며 이곳을 지났다.
연하煙霞의 사전적 의미는 안개와 노을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좀 싱겁다. 그 말보다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더 다가온다. 선경仙境 역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보다는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역시 더 다가온다. 그렇다면 연하선경이라는 말 역시 그저 ‘고요한 산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이라는 뜻으로 읽으면 되겠다. 이곳이 과연 그럴까? 점필재는 그 아름다움을 차마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이해하자. 한자의 단조로움 때문이었으리라.
이곳을 안개가 살짝 피어오르는 날 혹은 촛대봉 너머로 노을이 지는 저녁에 지난다면 연하라는 말을 실감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때라도 일출봉과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을 한 셋트로 볼 수 있을 때가 그래도 으뜸이 아닐까? 남효온은 이 연하봉을 ‘소년대’라 부르기도 했다.
은근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지리산. 세련미 보다는 후덕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지리산 그리고 한없이 바라보게끔 만들어주는 지리산의 참맛이 이 연하봉 부근에 다 녹아 있는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453쪽
틀렸습니다.
연하봉의 뒷모습.
제대로 박혀 있는 이정목.
소년대라고 불리기도 했죠.
보고 싶어하던 모습은...
연하봉의 바로 이 모습이었죠?
일출봉 팻말을 지나,
12:24
장터목 대피소입니다.
많은 분들이 식사들을 하고 계시군요.
저도 가지고 있던 송편을 마지막으로 먹고 물을 한 통 구입합니다.
산희샘도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니....
천왕봉까지 거리는 1.7km.
굳이 장터목으로 빠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구름이 자욱하여 정상을 제대로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완주를 해야죠.
15분 정도 쉬었다가 올라갑니다.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조망대를 지나,
통천문을 지납니다.
하늘에 오르려면 반드시 통천문을 통과해야
통천문이라는 각자刻字 안으로 들어설라치면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말 때문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도 있으리라. 시인 고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 만큼은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음산한 기운 속에 성모사에서 잠을 자던 점필재는 밤에 달이 환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고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로다.”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 졸저 전게서 460쪽
칠선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13:25
드디어 천왕봉입니다.
조망은 없지만......
만족스러우시죠?
매일 보던 곳.
줄을 서있는 많은 분들을 피해 하산을 서두릅니다.
저는 편하지만 올라오는 분들은 힘겨워 하시는군요.
개천문을 지나고.....
개선문이 아니라 통천문과 상응하는 의미에서 개천문으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볼거리 많은 법계사도 그냥 통과.
14:10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비옷을 꺼내 입고....
버스를 타고 갈까?
순두류까지의 거리는 약2.8km.
14:50 버스.
35분 정도에 갈 수 있을까?
화장실을 들렀다가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정신없이 앞서가는 분들을 추월하여 간신히 버스에 오릅니다.
10분 정도 걸려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거북식당에서 샤워를 하고 소맥으로 목을 추이고는 제 시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귀경을 합니다.
오랜만에 지리종주를 12시간 40분 정도 걸려 진행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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