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일정이 모두 망가졌습니다.
덕분에 가려고 했던 대간길에도 못 들고.....
그 토요일을 보내는 무료함이란....
책을 꺼내들고 독서에 몰입하려 해보지만 이도 와유臥遊에 불과할 뿐 정신적으로는 도저히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이게 천석고황泉石膏肓일까?
아니면 연하고질煙霞痼疾일까?
이런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고사성어를 떠올리면 오히려 연하봉이 그리워지고.....
그 연하봉은 최근 가 본 소백의 자하대로 연결이 되고....
도저히 하루를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토요일 저녁 은밀 그리고 신속하게 일정을 잡습니다.
지리산 자락에 하나 남은 황산을 가기 위해서 입니다.
이미 머릿속에는 남원의 고남님을 염두에 뒀습니다.
산방기간인 지금 지리에 문이 열린 곳이라고는 뻔합니다.
정령치 ~ 바래봉 ~ 덕두산 ~ 피바위 ~ 황산대첩비 비전 ~ 황산으로 코스를 잡고는 고남 님께 메시지를 보내니 바로 답이 옵니다.
기차 편을 예약하고 간단하게 짐을 챙깁니다.
하긴 짐이라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정령치에서 인월 부근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일 것이고, 피바위血巖에서 황산으로 오르는 길은 포장도로였다가 살짝 방향만 트는 곳일 테니 이 역시 민가가 가까워 별문제 없습니다.
05시 25분 KTX를 첫차를 타고 남원에 도착합니다.
고남 님과 함께 차 한 잔 마시고 정령치로 올라갑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7. 11. 19. 일요일
2. 동행한 이 : 고남님
3. 산행 구간 : 정령치 ~ 세걸산 ~ 바래봉 ~ 덕두산 ~ 흥부골휴양림 ~ 피바위~ 황산 ~ 국악의 성지
4. 산행거리 : 21.44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정 령 치 |
|
08:23 |
|
|
세 걸 산 |
4.00 |
09:55 |
92 |
|
바 래 봉 |
5.84 |
12:03 |
128 |
20분 휴식 |
덕 두 산 |
1.36 |
12:42 |
39 |
|
흥부골휴양림 |
2.75 |
13:44 |
62 |
|
피 바 위 |
1.80 |
14:16 |
32 |
|
황 산 |
4.71 |
15:35 |
79 |
|
국악의 성지 |
0.98 |
15:54 |
19 |
|
계 |
21.44 km |
07:31 |
07:11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08:18
텅 빈 주차장이 산방 기간임과 오늘 날씨를 대변해 주고 있는 거 같습니다.
체감온도가 -10˚는 되려나?
사진 몇 장 찍는데 손가락이 얼얼합니다.
언제 보아도 멋진 그리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지리 주릉입니다.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가 천왕봉.
그 우측으로 촛대봉까지....
그 앞줄로는 덕평봉.
반야를 지나칠 수는 없죠.
그 뒤로 묘봉卯峰과 그 좌측의 명선봉.
묘봉 위로 태양과 달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08:23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이정표에서 우틀하여 고리봉으로 향합니다.
만복대 방향으로는 문을 굳게 잠가놨습니다.
이 기간 동안 공단에서는 꾼들의 안전 산행을 위해서 보수 공사도 열심히 잘해 놓으시겠죠.
오늘 산행은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면계를 따르고 그 루트는 지리서부능선이자 백두대간길입니다.
부드러운 만복대 능선과 우측으로 흐르는 서시지맥 라인 그리고 만복대 뒤로 노고단이 보입니다.
종석대는 만복대에 가렸습니다.
중앙에 반야봉 그 좌측으로 묘봉 그리고 우측으로는 노고단.
해밀의 노고단 님이 생각나는군요.
이번 올해 마지막 비박 일정을 어디로 잡으셨다고 했는데.....
해밀에서 저와 처음 말을 트신 분이죠?
중앙에 멀리 무등산이 보이는군요.
조선 중엽의 사료를 보면 저 무등산을 서석산으로 불렀더군요.
08:36
고리봉입니다.
2등급 삼각점을 보고,
이정표에서 바래봉을 따릅니다.
여기부터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독립하여 지리서부능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천면을 벗어나 운봉읍과 산내면의 면계를 따릅니다.
“서부능선은 또 뭐야?”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사람같이 집요하게 물어온다.
“영신봉과 삼각고지에서 일부 얘기했던 거야. 서북능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천왕봉 ~ 밤머리재의 동부능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면 돼. 근데 사실 이 서부능선은 방향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서북능선’이 맞는다고 우기기도 하지. 그런데 서북능선하면 설악산의 ‘대청봉 ~ 끝청 ~ 귀청 ~ 안산’ 구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리동부능선에 대(對)한 개념이니 일반적으로 서부능선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들 해. 그리고 보통 이 성삼재 ~ 천왕봉 구간을 주릉(主稜)이라고 하잖아. 이게 다 예전에 백두대간을 몰랐을 때 능선 산행을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러니까 산을 기준으로 본다면야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중심이고 기준 아니겠어? 하지만 접근성과 등로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성삼재와 천왕봉을 중심으로 봐야 하겠지.”
스틱으로 반야봉 방향과 고리봉 방향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얘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결국 천왕봉에서 중봉 ~ 하봉 ~ 왕등재 ~ 밤머리재 방향으로 가는 줄기를 동부능선. 천왕봉에서 이 성삼재까지를 주릉. 그리고 성삼재에서 고리봉 ~ 바래봉 ~ 인월 방면으로 가는 줄기를 서부능선. 그렇게 동서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남북능선도 하나씩 만들어야겠지. 그래서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가는 루트를 북부능선 그리고 영신봉에서 삼신봉을 거쳐 형(성)제봉으로 가는 줄기를 남부능선이라고 하는 거지. 예전에는 산깨나 다녔다는 꾼들이라면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지리에 들어와서 이들 루트를 헤집고 다녔어.”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76쪽
이 서부능선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요?
바로 좌측으로는 이렇게 백두대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마치 조감도鳥瞰圖 같이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진행하는 바래봉이나 덕두산 너머로 대간에서 가지 치는 임천지맥이 삼봉산 방향으로 흘러오는 모습과 덕유에서 남강지맥이 가지를 쳐 가야산 방향으로 진행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뿐 입니까?
우측으로는 지리의 주릉을 계속 보면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도 지리 서부능선이 갖고 있는 자랑입니다.
1279.3봉을 오릅니다.
뒤로는 고리봉과 만복대가 보이는군요.
저 고리봉은 남원이라는 지역과 요천지맥의 끝에 있는 고리봉 그리고 남원 시내에 있는 교룡산과 연관지어 생각해야죠?
즉 이 고리봉과 저 요천지맥의 끝에 있는 그러니까 사진 중앙에 있는 저 고리봉은 이 남원시의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수지리에 의할 때 이 남원시는 배 모양을 한 지형이고 더욱이 교룡산은 돛대 역할을 한 형상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역이 홍수에 약하여 큰 장마가 지면 떠내려갈 수도 있는 지형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남원의 양 옆 즉 이 지리의 고리봉과 요천지맥(신산경표 상으로는 천황지맥)의 저 고리봉에 밧줄을 단단히 묶어두면 그 위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이 지리의 고리봉1305m과 저 요천지맥의 고리봉710.1m입니다.
멀리 남원시가지의 모습.
남원역 플랫폼platform 벤취에 앉아 이 지리를 바라보면 노고단의 송신소 철탑과 만복대 그리고 이 서부능선이 깨끗하게 보이죠?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 남원에서 볼 때는 이 만복대와 서부능선이 포인트입니다.
바로 앞으로 주촌저수지가 보이니 그 뒷 봉우리가 대간의 수정봉805m이죠.
고남산이 846.7m의 고봉임에도 이 운봉고원의 지대가 워낙 높아 고남산이 그다지 높아 보이질 않습니다.
09:04
1266.5봉에 올라 살짝 우틀합니다.
가운데 멀리 천왕봉은 여전하고....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에게는 저 천왕봉을 상봉이라고 부르며 청학동과 함께 말 그대로 로망roman이었습니다.
성리학 그중에서도 주자학의 영향이었을 겁니다.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성인聖人을 닮아가려는 노력과 그 학문을 위하여 견문을 넒히려는 실천의식이 유람 즉 등산으로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용어를 빌리자면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의 적절한 조화입니다.
앞줄이 삼각고지1484m에서 가지를 친 지리북부능선입니다.
09:21
1252.7봉을 지나,
09:33
1212.1봉을 지납니다.
반야봉에서 흘러내리는 능선이 투구봉을 지나 직진하여 달궁으로 흘러내리는군요.
달궁은 마한의 효왕이 진한의 추격을 피해 이곳에 궁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죠?
최근에는 남부군과 관련하여 이현상이 있던 남부군 사령부 기동부대가 있었던 곳이기 합니다.
이 달궁 마을도 얼마 안 있으면 없어지지 않을까요?
참고도 #1 한국일보에서 발췌
이 달궁 계곡의 맨 위에 있던 심원마을은 이미 없어졌고.....
이 달궁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이곳 지형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선요원을 앞세운 하대치의 부대는 바위투성이인 험한 피아골을 치올라 임걸령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담배 한 대씩을 말아 피운 그들은 곧장 심원계곡을 타고 내렸다. 내리막길 심원골은 피아골에 비하면 너무 심심할 정도로 험한 데라고는 없었다. 피아골이 남성적이라면 심원골은 여성적이었다.
-중략-
심원골 용소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은 그들이 달궁골로 접어들어 돌고개를 지나 달궁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경이었다.
태백산맥 10권 27쪽 피아골
첩첩산중입니다.
09:47
이제 세걸산도 코앞입니다.
좌측부터 종석대, 만복대 그리고 고리봉.
종석대 좌측으로 노고단을 보고는 세걸산으로 오릅니다.
중앙 반야봉과 아래 달궁.
중앙의 지리북부능선 뒤로 천왕봉 라인.
음.......
가운데 임천지맥의 삼봉산1186.7m.
그 우측으로 고도를 떨어뜨려서는 등구재 지나 백운산904.1m.
'고남' 님은 고향인 운봉으로 내려와 신선같은 생활을 하면서 이 줄기 저 줄기 오를 기회만 엿보시는군요.
그만큼 여유가 있으십니다.
09:55
바래봉으로 향합니다.
늦봄의 오늘이었다면 붐비는 인파들로 떠밀림을 당하며 진행해야 할 텐데....
오늘은 아까 고리봉에서 딱 한 팀을 만났으니 산방기간이기도 하고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진 오늘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지리에 들기 아주 최적인 조건입니다.
중앙 바래봉.
그 우측 뒤로 임천지맥 줄기가 줄서있고 그 우측으로 삼봉산 등이 보입니다.
그 뒤로 남덕유가 희미합니다.
지도 #2
10:03
우측으로 부운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납니다.
지도 #2의 '가'의 곳입니다.
표지띠 몇 장이 걸려 있습니다.
10:05
전북학생교육원으로 내려가는 세동치를 지나,
우측으로 하부운 마을을 봅니다.
부운浮雲.
뜬 구름이라....
뜬 구름이라기 보다는 '떠 있는 구름'일 것 같습니다.
호號로 사용하기 아주 적절한 이름입니다.
바래봉 그리고 삼봉산.
10:54
부운치를 지나면서 따뜻한 양지에서 가지고 온 보드카와 곶감을 먹습니다.
먹는 김에 고남 님이 가지고 온 죽과 김밥도 먹고.....
속이 따뜻해집니다.
역시 겨울에는 몽골 보드카 '징기스칸'이 최고입니다.
중앙 끝의 고리봉.
오늘 계속 따라오는 봉우리입니다.
운봉고원의 좌측 공안제, 우측은 주촌저수지.
그리고 그 뒷봉우리가 수정봉.
수정봉 ~ 갓바라재 ~ 여원재 그리고 고남산.
그 뒤의 천황산.
만행산이라고 불렸었죠.
우측 중앙 뒤로 금남호남정맥의 팔공산1149m.
등로는 새로 설치한 나무 데크를 따라 진행하게되어 있군요.
11:05
예전의 조망대에 올라 바래봉을 보고....
11:07
좌측으로 임도길로 빠지는 삼거리를 지납니다.
철쭉 군락지를 지납니다.
내년 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지도 #3
그래서 그런가요?
작년에나 깔았음직한 야자매트가 등로를 안내합니다.
푹신한 감촉.
멀리 바래봉 정상에 산객 두어 명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11:28
팔랑치(재)를 지납니다.
비슷한 이름이 부근에 하나 있습니다.
# 24 국도가 지나는 팔량재라는 곳인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격전장이었던 곳이기도 하죠.
이따 다시 봅니다.
잠깐 돌아보는 여유를 갖습니다.
좌측 반야봉.
우측 라인 끝이 고리봉.
좌측으로 운봉고원.
우측 반야봉.
뒷 줄 좌측이 지리북부능선.
바래봉 삼거리입니다.
등로는 여기서 우틀합니다.
우측 전나무 슾에 풍부한 수량의 샘물이 있지만 물이 필요 없으니 그냥 통과.
아주 멋진 길에서 비박꾼 4명을 만납니다.
잘들 즐기고 가는 모양새입니다.
춥지는 않으셨나요?
좌측으로 고리봉과 만복대(머리만 살짝 나온 봉).
그 우측이 구룡폭포로 떨어지는 줄기.
그 좌측으로 반야봉.
중앙에 묘봉.
그 좌측 명선봉........
지리북부능선과 뒷줄의 천왕봉 주릉.
중앙 천왕봉.
고남산 일대.
바래봉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뒷줄 삼봉산과 백운산.
12:03
정상석을 인증하고,
월평마을을 따릅니다.
이제부터 운봉읍을 버리고 인월면을 만나 인월면과 산내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지도 #4
덕두산을 향합니다.
1146.8봉은 좌측 사면치기로 진행을 하고,
12:42
그러고는 동네 주민들이 인월산이라고도 부르는 덕두봉 혹은 덕두산입니다.
삼봉산 ~ 등구재 ~ 백운산 라인은 여전하고.....
지리 주릉도 마찬가지입니다.
2등급(운봉22) 삼각점도 확인하고 직진하면,
12:50
삼거리가 나옵니다.
우리같이 피바위나 운봉 방향으로 내려가려면 좌틀.
태극 종주 혹은 인월 방향으로 진행하려면 직진을 하여야 합니다.
그냥 직진을 하여 운봉읍을 버리고 온전하게 인월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봉회장님을 얘기합니다.
이번에 이 지리태극 그것도 왕복으로 종주하면서 신기록을 내셨죠?
대단하신 분입니다.
평소에도 관악산을 오르내리면서 몸관리를 하시니까....
좌측의 황산은 잡목에 가려 전혀 볼 수가 없고,
13:06
무명봉 하나 지나고,
13:16
이정표 하나를 또 지나고,
13:24
운봉에서 자꾸 멀어지므로 이 정도에서 내려가기로 합니다.
거의 피바위 근접한 곳으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이 이정표 뒤로 진행을 합니다.
지도 #4의 '다'의 곳입니다.
지도 #5
그런대로 진행할만 하군요.
13:44
흥부골 자연휴양림으로 떨어집니다.
멋진 소개글도 봅니다.
이곳이 지리태극종주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문구도 보입니다.
지리태극종주까지 알고....
대단한 분입니다.
그리고 이 임도가 지리둘레길 운봉 ~ 인월 구간이군요.
운봉을 따릅니다.
아주 멋진 둘레길입니다.
정말 편하겠군요.
정면으로 꿈에도 그리던 황산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호령하는 우렁찬 목소리를 듣습니다.
지도 #5의 '나'의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틀하여,
피바위를 향합니다.
참 찾기 힘들게 만들어놨습니다.
14:16
겨우 표지판과,
이 부실한 안내판이 그저 이곳이 피바위라는 것을 알려줄 뿐......
바로 저 암반입니다.
..............
황산대첩때 왜구들이 흘린 피가 이곳에 스며들었다고 하는 건데,
유몽인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따 보기로 하고.....
어쨌거나 실제 이 바위에 철분이 많아서 생긴 현상이라는 게 지질학자의 분석입니다.
나와서 우틀하여 출입구를 막아놓은 창고 같은 곳을 계속 따라 진행합니다.
두어 군데 전기가 흐르는 선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까 능선에서 보았던,
14:28
옥계저수지 앞을 지나,
다시 들레길에 합류하게 됩니다.
람천.
만수천을 흡수한 이 람천은 임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갈 것입니다.
이제 다음 목표지점은 황산전투 유적비.
느닷없이 이곳에 절집 탑들이 세워져 있군요.
비전마을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이곳이 운봉 ~ 인월 구도로입니다.
멀리 고남산.
바로 이곳을 고토 분지로가 지났습니다.
이 도로가 옛날 우마차가 다니던 구도로라는 얘기입니다.
이 정도에서 잠깐 고토 분지로를 생각합니다.
고토 분지로가 도대체 누구야?
태어날 때부터 고토는 지질과 연관이 있었다. 아버지가 도공(陶工)의 보조인인 번사(燔師)여서 그는 자연스럽게 토양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1880년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따라 국비로 독일 유학을 떠난다. 서양지질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1886년 동경제국대학의 지질학과 교수가 된다. 그는 그때부터 황무지였던 일본 지질학을 이끌게 된다.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오키나와(琉球) 제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대만 같은 곳으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물론 일본 정부가 겉으로 내세우는 것은 학술조사이지만 실제는 자원 침탈을 위한 지질조사였다.
이미 얘기했듯이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하자원, 토지자원, 산림자원, 수력자원 등을 약탈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질, 지형 등의 조사가 필요했다. 이미 일제는 고체 등 몇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제대로 공부를 한 일본인의 조사보고서가 필요했다. 고토는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 교수였다. 외국 탐사경력도 충분했다. 동방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사상은 황국사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이도 한창 때인 40대 중반이다. 이런 고토보다 조선의 지질조사 작업에 안성맞춤인 사람은 절대 없었다.
음흉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민간기구 차원의 학술조사로 모양새를 갖췄다. 동방협회였다. 고토는 그렇게 동방협회의 지원도 받게 된다. 그는 1900년부터 2차에 걸쳐 조선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답사한다. 광산, 지질조사가 주목적이었다. 조선의 전반적인 정세도 정탐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그는 조선 북부지방을 조사할 때에는 간도지역의 개발 가능성까지도 조사하였다.
“그럼 지질조사를 어떻게 한 거야? 당시 조선 땅은 인프라infra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든 게 불편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온 사람인데 웬만한 불편은 감수했겠지. 조랑말타고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으니 오죽했겠어. 탐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 중 하나가 이 ‘조선산맥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야. 거기에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름이 올라간 거고.”
“조선산맥론?”
“그래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
고토의 두 차례 지질조사
군산항으로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은 (주)조선목포영사관 군산분관 영사 주임 아사야마 겐죠(淺山顯藏)였다. 그는 조선인 길 안내원 2명을 소개하고 교통수단이 될 조랑말 4필도 건네준다. 그러고는 그들을 조선인 복장으로 위장시킨다.
이렇게 6명이 약 70일 일정으로 제1차 조선반도 지질탐사대를 구성한다. 탐사책임자는 물론 동경대학 지질학과 제1회 졸업생이며 일본 지질학계의 태두(泰斗)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였다. 그의 손에는 1894년 발행된 미쯔하시(三橋僊史)의 ‘조선지명안내’ 책자와 일본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1:50,000지도가 들려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토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이중환의 택리지를 독파했다는 데 있다. ‘조선팔역지(朝鮮八域地)라고 일역(日譯)된 이 택리지를 읽고 고토는 조선의 인문지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뒤에 자세히 본다.
고토는 지질학자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독일인 고체(Gottsche)는 그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왔다. 물론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고서였다. 고토는 이 고체의 자료를 참고한다. 그는 주로 노두(露頭)를 근거로 지형, 지질일반, 암석학적 분석을 한다. 즉 절벽이나 경사면 등에 노출된 암반이나 돌을 보고 그 일대의 지질을 추정하는 방식이다.
고토의 작업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땅속으로 들어가 보거나 다른 어떤 기계를 가지고 정밀하게 측정을 해본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으로 1900년 8월에 시작한 조사 작업은 1901년 3월 1차 조사를 마치게 된다. 이 결과물을 가지고 고토는 일단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 간 그는 그것들을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라는 논문을 쓰고 이를 동방협회 회보에 올린다. 그러고는 같은 해 8월에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조선북부를 탐사를 한다. 그렇게 해서 1902년 발표한 논문이 ‘조선북부의 지세’이다.
즉 그는 1900년 8월 ~ 1901년 3월 그리고 1901년 8월 ~ 1902년 3월 두 차례 266일 동안 총6,300km를 다니면서 광물조사 를 하였다. 하루에 평균 23km 정도 걸었다는 얘기다. 당시의 도로 사정과 계절적 요인을 따져보면 상당히 어려운 환경조건이다. 아무리 40대 중반의 고토라도 고개나 강의 절개지 그리고 바닷가를 관찰하면서 걷기가 쉬웠을까?
이 논문은 고토가 지질학자이면서 철저하게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침략의 앞잡이 임을 보여준다. 즉 그는 역사학자 못지않은 조선의 고대사와 근대사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물론 그 지식은 황국사관의 입장에서 철저히 조작된 사실(史實)이다. 이런 것들이 그가 조선에 온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졸저 전게서 103쪽 이하
고토 분지로.
지금 우리 교과서에서 쓰고 있는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인 장본인인 고토 분지로.
산맥이라는 우리 고유의 산줄기 용어를 지질구조선에 갖다 붙인 인물.
그는 1901년 겨울 2차 횡단여행을 하면서 이 지점을 지나게 됩니다.
그의 글을 봅니다.
운봉읍내에서 4km 떨어진, 앞에서 언급한 풍극의 입구에 '비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일본으로 보아서는 운이 없었던 전장이었다. 왜냐하면 군기가 빠져 동요마저 일으키던 조선군이 압도적인 적을 두 번이나 물리쳤기 때문이다.
사당이 셋 있는데 팽나무숲에 의해 그늘이 져있다. 한 곳에는 1594년 일본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는 비명이 들어 있고, 이는 화강암에 새겨졌다. 두 번째는 일본 남부의 극악무도한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 장군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는 훌륭한 사당이다. 그 후 이 장군은 힘을 길러 고려의 마지막 왕을 폐하고 현재 왕조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세 번째 사당이 가장 크지만 나는 그 안의 있는 내용물의 특성을 알 수 없었다.
코토 분지로 저 '조선기행록' 손일 옮김 푸른길 간 115쪽
비전마을로 들어갑니다.
깨끗하게 단장된 비전입니다.
당시와 같게 세 개의 비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펼치던 청계도인 양대박(1543~1592)의 글을 볼까요?
1586. 9. 3.
느지막이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황산의 비전에서 잠시 쉬었다. 이 비석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칭송한 비다. 전殿은 비碑를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비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양대박 두류산 기행록
이보다 뒤의 글인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의 유두류산록을 보면,
1611. 3. 29.
요천을 거슬러 올라 반암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1578년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이 전액을 썼다.
지난 고려 말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 땅에 '황산黃山'이라는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황산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켜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대적하여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일 뿐이겠는가.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길목에서 치기에 편한 것이 바로 병가에서 이야기하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
지난 정유1597년 왜란 때, 양원-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로써 부총병- 등이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어찌 땅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것이 아니랴.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다.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가 피를 흘렸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이곳은 태조대왕께서 위대한 공을 세우신 곳이니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할 때 신이 알려주신 것인가보다.
이 유몽인의 글을 보면 우리가 알던 피바위에 대한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아까 피바위 안내글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황산전투 시 아군이 수많은 왜구들을 죽이게 되어 그 피가 람천을 차고 넘쳤으며 이때 이 피가 바위에 물들을 정도였는데 이 바위를 혈암血巖 또는 피바위라고 부르게되었다.'게 그 요지입니다.
그런데 이 유몽인의 글을 보면 피바위는 그 후의 임진왜란과 관련된 현상이라는 거 아닙니까?
괜히 이성계와 황산대첩에 피바위를 연결시킨 모양새입니다.
하긴 어느 글을 보면 이곳이 '황산벌 싸움'이었다는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나올 정도니....
잘못하면 이성계 = 계백장군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유몽인에게 한 표를 던집니다.
정면에서 봅니다.
안으로 들어갑니다.
대첩비각.
1957년에 새로 세운겁니다.
선조때 만든 이 비를 일제강점기 당시 총독부에서 글자를 정으로 쪼아 훼손시킨 뒤 이렇게 박살을 내었습니다.
파비破碑가 된 것이죠.
그래서 이 각을 파비각破碑閣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파비각.
극악무도한 왜놈들입니다.
황산대첩비 비전이 있는 곳에서 황산을 봅니다.
이제 황산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태조가 황산에서 어떻게 싸움을 진두지휘하셨나 봐야죠.
바로 옆에 있는 초가집입니다.
전라북도 특히 남원에는 유달리 명창이 많다고 합니다.
이 남원시 화수리의 비전마을 초입에 있는 가왕歌王 송홍록의 생가입니다.
옆에 박초월의 생가도 있으니 그야말로 명창의 보고가 바로 이곳이로군요.
그래서 이곳에 '국악의 성지'라는 기념관이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황산으로 올라가는 등로는 우회해도 되지만 이 안으로 직접 올라가도 됩니다.
소리꾼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토굴 같습니다
멀리 덕두산을 보고.....
소리길을 지나 좀 거친 길을 오릅니다.
작업을 하느라 파헤쳐놓고는 그냥 손을 놓고 있는 거 같습니다
자금이 집행이 되지 않아서인가?
황산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거칩荒니다.
그래서 荒山인가요?
이 황산전투는 고려 4대 대첩 중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물리친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고토는 여원재를 지나면서 520년 전인 1380년 8월을 떠올렸다. 바로 진포대첩이다. 일본 해군이 군산에서 고려의 최무선에게 참패했던 분함을 그는 곱씹고 있었다. 진포대첩은 세계 최초의 함포대전이었다. 일본해군은 그 전쟁에서 500여척의 정크선에 10,000명이 넘는 병력을 침투시켰다.
그러나 함포를 장착한 최무선의 전함에 무참히 참패를 당하게 된다. 불명예였다. 일본군이 고려 해군에 참패를 당하다니! 당시 배를 잃은 패잔병들이 산줄기를 이용하여 도주를 하였다.
당시 상황을 보자. 군산진에서 패한 패잔병들은 이른바 ‘왜구(倭寇) 루트’를 통하여 도망갔다. 김천을 지나 그들의 2차 집결지는 지금의 바로 이 남원 운봉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토벌군의 구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하여 백두대간 상의 이 여원재 부근에 주둔하게 된다. 그때 홀연히 백발의 여인이 꿈에 나타난다. 그 여인은 이성계에게 일본군을 물리 칠 계략을 일러준다. 반신반의했지만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작전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가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4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택리지에도 ‘우리 태조가 왜구를 크게 섬멸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토는 택리지의 일어 번역본인 조선팔역지를 통하여 익히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는 이 여인에 대한 고마움을 기려 사당을 지었고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하였다. 그러니 여원이 있는 부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여원재(女院岾)라 불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여원치(女院峙)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또 패한 나머지 왜구 잔당들은 반선으로 도망간다. 그들은 거기서 뱀사골을 이용하여 화개재로 오르게 된다. 그러고는 거기서 동진을 하여 백두대간의 지리 주릉을 타고 천왕봉까지 간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잔당들은 백두대간의 지리 주릉을 타는 최초의 일본인이 된다. 천왕봉 정상에 선 그들은 거기서 사당 안에 있는 성모 석상을 본다. 그러고는 쓸데없는 분풀이를 그 성모석상에 가한다. 그 석상의 목을 자른 것이다.
졸저 전게서 91쪽 이하
지난 번 여원재 얘기를 할 때 했던 이야기입니다.
'동국여지승람' '인월역' 조를 보면 이성계의 승리 장면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남원에서동쪽으로 고개(여원재)를넘으면 운봉현이다.
지리산 팔량치위에 있어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를 통행하는 큰길이 된다.
고을 앞에 있는 황산荒山은 고려 말엽에 우리 태조가 왜구를 크게 섬멸한 곳이다.
라고 하여 황산대첩을 정리하였습니다.
이정표도 있군요.
화살표를 따릅니다.
고남산을 오를 때와 같은 철계단을 올라,
아까 보았던 옥계호를 내려다 보고......
15:35
그러고는 황산698.7m 정상입니다.
황산 주위를 둘러볼까요?
남으로는 지리산이 길을 완전하게 막았고,
동으로는 24번 국도 끝의 팔량재만이 유일한 통로로군요.
이 팔량재는 아까 서부능선에서 본 팔랑치와는 다른 이름입니다.
저 팔량재는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되는 곳으로 임란 당시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이 왜군을 격파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피바위가 있고 황산전투가 벌어진 이 부근이 '병목甁項' 정도에 해당하는 곳이고, 이 황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서 싸움을 지휘하였을 겁니다.
동국여지승람에 그 장면이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태조가 이미 험지에 들었는데 적이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튀어나왔다. 태조가 50여 발을 쏘아 적의 면상에 적중시키니 활을 당기기만 하면 죽지 않는 놈이 없었다. 적이 험한 산에 의지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매, 태조는 사졸을 지휘하여 요해지에 나누어 의거하니 적은 죽을 힘을 다해서 대항하였다. 태조는 다시 나팔을 불어 군대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은 태조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태조가 그 자리에서 여덟 명의 적을 죽여 없애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에 이르기를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터이다."하니 장수들이 감동을 하여 용기를 백배로 하였다.
적장 중에 나이가 겨우 15~16세 되고 이름을 '아지발도'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태조는 그가 용맹스럽고 날랜 것을 아껴서 사로잡으려 하니, 이두란이 말하기를 "죽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태조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추니 투구가 떨어졌고 두란이 재빨리 사살하니 적은 기세가 꺾였다. 태조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핏물이 되었다. 처음에 적의 수는 아군의 10배가 되었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 동국여지승람 인월역 조
황산 정상에 있는 4등급삼각점(운봉407)을 확인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아영면을 지나는 88올림픽고속도로를 봅니다.
뒷줄이 남덕유산에서 가지 치는 남강지맥 줄기.....
남덕유에서 남령으로 뚝 떨어졌다가 월봉산 ~ 거망산으로 진행하는 줄기가 뚜렸합니다.
기백산 ~금원산 ~ 거망산 ~ 황석산 루트가 그립습니다.
거창이 자랑하는 환종주 코스입니다.
조금 당겨봅니다.
삼봉산 방향으로.....
팔량재.
드디어 천왕봉은 구름에 가렸군요.
옥계호와 덕두산.
멀리 뾰족한 게 요천지맥의 천황산.
대간에서 갈라져 이 황산으로 올라오는 줄기가 558.6봉 ~ 명석재를 거쳐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대간의 사치재를 보려는 욕심은 성급합니다.
내려갑니다.
이정표에서 우틀하여 아까 올라오던 길과는 다른 루트를 이용합니다.
공사중이라 안 보였는데 이 길이 훨씬 좋군요.
계단도 만들어져 있고.....
국악의 성지로 나와 오늘 산행을 마감합니다.
차를 불러 운봉으로 나가 하산주를 한 다음 예매해 둔 KTX로 귀가를 하기 위해 남원역으로 나옵니다.
낮이었으면 여기서 오늘 진행한 지리의 서부능선 구간을 바라보면서 아쉬움을 달랬을 텐데.....
어둠 속에서도 교룡산은 보이는군요.
남원의 돛대.
오늘 산행도 이렇게 마감을 하고 다음에는 지리의 어느 곳을 들러보러 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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