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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따라 . 죽계구곡 ~ 초암사 ~ 국망봉 ~ 달밭마을 ~ 비로사

 

 

'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오늘은 소백산으로 갑니다.

퇴계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 나오는 그의 행적을 뒤좇기 위해서 입니다.

얼마 전 해밀 대간팀과 남진으로 고치령 ~ 죽령 구간을 진행하느라 지나쳤던 곳이죠.


그날 백두대간의 상월봉과 국망봉을 지나면서 풍기와 순흥을 바라보니 많은 것들이 보이더군요.

배순이 풀무질하는 소리도 들리고, 소수서원에서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버린 석륜사와 백운암에서는 고승의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들립디다.

그리고 그 순흥면 어디선가에서는 사랑의 아픔만 남기고 떠나간 유생을 그리는 동네 처녀의 눈물 흘리는 모습도 보이고, 배점리에서는 배나무에서 배를 수확하는 모습도 보이더이다.


그런데 그때 홀연히 견여라는 작은 가마를 타고 힘들게 올라오는 퇴계와 종수 스님을 만났습니다.

종수 스님과 승려 몇 명 그리고 진사 민서경의 아들 민응기과 종 몇 명 등이 이룬 팀이었습니다. 

저를 만난 퇴계의 우렁찬 한 마디!

"40년 동안 꿈에 그리고 그리던 소백산에 드디어 올랐네! 이렇게 감격스러울수가!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네. 건강을 더 챙겨 선정을 베풀고 학문에 더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본래 땅 위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굳이 루쉰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산의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늘 느끼는 글입니다.

반대로 해석을 해봅니다.

길을 지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 길은 곧 없어진다! 

 

오늘날 등산이라는 용어가 예전에는 유산遊山이었을 겁니다.

중국에서는 유기遊記의 형태로 관련 글이 보이다가 8세기 ~ 11세기에 왕안석, 서홍조 등의 시대에 이르러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 풍조가 우리나라에 인입된 것은 순전한 불교문화 덕이었습니다.

최고最古의 유산기를 꼽는다면 1243년 고려 고종 때 진정국사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꼽습니다.

그 뒤를 있는 것이 15세기 청파 이륙과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이었다고 보는 게 정설입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이 1471년에 쓰여진 작품이니 퇴계의 '유소백산록'은 거의 80년 후의 글이 되겠군요.

물론 주세붕도 이 소백산을 오르고는 유산록을 썼고 그 글은 당연히 퇴계의 것보다 앞섰지만 전하여지지 않으니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오늘 주제는 퇴계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입니다.

이 글 말미에 나오는 글이지만 미리 당겨 읽어봅니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고 흥이 식으면 돌아오는데, 저 주경유같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기껏 올라가본 곳은 겨우 중간 골 일대뿐이었다. 그의 '유산록(遊山錄)'에 기술한 것이 매우 자세하기는 하였으나 그것들은 모두 이 산의 스님들에게 물어서 쓴 것이고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산봉우리 이름들 중에 광풍(光風), 제월(霽月)이나 백설. 백운 등은 모두 중간 골에 있는 것들이고, 그밖에 동서쪽 골에 있는 것들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력이 쇠약하고 병든 몸이었기 때문에 단 한번에 이 산의 전체 경치를 다 보려고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동쪽은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고 서동으로 향하여 갔던 것이다. 내가 서쪽 골에서 얻은 명승지로는 백학. 백련. 자하. 연좌. 죽암 등의 경치로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 이름을 붙여준 것은 마치 주경유가 중간 골에서 만나본 바의 경우와 같은 의도에서였다.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遊山錄)'을 백운동 서원의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어 보았는데 이번에 석륜사에 가보니, '유산록'이 판자에 쓰여져서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시문(詩文)이 웅혼, 기발함을 감상하고 도처에서 그의 시를 읊었다. 그렇게 하니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시로써 수작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으로써 얻은 감흥 또한 매우 컸다. 등산하는 자는 참으로 이러한 기록을 남겨야만 되겠다는 뜻을 느꼈다. 그런데 주경유가 이 산에 오기 전에도 호음(湖陰) ()선생이나 태수 임제광(林霽光)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 태수가 남겨놓은 글은 한 자도 찾아 볼 수가 없고 호암의 시만이 초암(草庵)에서 겨우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스님들의 말을 빌리면 석륜사에는 황금계(黃錦溪)의 시가 있고 명경암의 벽에는 황우수(黃愚洙)의 시가 있을 뿐 그 밖에는 더 이상 다른 이의 시문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경유는 주세붕의 자이니 주경유는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을 얘기합니다.

퇴계보다 선임 풍기군수였죠.

어쨌든 신언의 소백산유록이나 한산두의 소백산록이 모두 16세기 말에 집중되었고 17세기에 쓰인 글은 발견되는 게 없다고 하니 소백산에서 만큼은 이 시기가 거의 유산운동의 전성기였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성리학의 영향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부나 수양을 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구호가 만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성리학의 전개가 늘 주자학 중심이었다는 게 이런 분위기를 촉발시킨 거 같습니다.

그 주자학의 주 공부 방법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니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 다양한 경험적 지식의 축적은 당시 주자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요청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가 공부와 수양과정을 통해서 성인이 되는 과정을 제시하면서 스스로 태산에 올랐던 사실과 형산을 유람한 한유 그리고 여산을 오른 주자를 보면서 이들을 닮고 싶어했던 사대부들이 산을 오르고자 했던 이유는 자명해집니다.

이럴 때 성여신(1546~1632)의 글이 다가옵니다.


"나는 알지 못하겠다.

공자께서 태산과 동산에 오르셨을 때와  

정자가 남여로 3일 동안 유람했을 때와   

주자가 눈 내리는 남악을 유람했을 때도

오늘 나만큼 활달했을까?'


이 말은 곧 충청북도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 그리고 경상북도 영주시와 예천군에 걸쳐 있는 소백산이 예전부터 시인묵객이 즐겨 찾는 명소였을 거라는 얘기와도 같습니다.

그 중 기행문이나 시를 남긴 이들이 위와 같이 여럿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들 귀에 낯익은 이들은 우선 퇴계 이황과 신재 주세붕입니다.

하지만 주세붕의 '유소백산록'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하니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다만 퇴계의 글은 다행히 그의 문집에 남아 있어 우리는 그 글을 통해 그 당시 소백산 부근의 정황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퇴계가 항상 주창한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산을 즐기는 자는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되고, 기록이 있음으로서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는 경구警句 덕분입니다.


선인들의 뒤를 따라가는 작업.

이는 상상 이상으로 흥분되고 즐거운 작업입니다.

물론 그들 뒤를 온전하게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지명도 다를 뿐 아니라 그 글에 나오는 길도 없어지고 이런저런 이유로 절집도 사라져서 그 흔적은 숲에 파묻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당시 선비들은 "뻥"이 좀 심했다는 것입니다.

과장을 많이했다는 것이죠.

어쩌면 한자漢字라는 글이나 한문漢文이라는 문장이 우리 글같이 그렇게 섬세하지는 못하고 두루뭉술한 면이 있어서 그런지는 혹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좀 과過한 면이 있더라도 그것을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을 갖고 읽어야지 문구 그대로 해석하였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정리하여야 할 지명들이 있습니다.

낯설지 않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1. 봉우리 : 원적봉과 월명봉, 태봉, 석름봉, 자개봉, 국망봉, 상월봉, 환희봉, 백학봉, 백련봉

2. 암자 : 철암, 명경암, 석륜암, 상가타암, 중백운암, 동가타암, 중가타암, 하가타암, 금당암, 진공암

3. 바위 : 봉두암, 산대암

4, 대臺 : 광풍대, 제월대, 자하대, 금강대, 화엄대,

5. 고개 :  박달재. 작은박달재

문제는 퇴계의 거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어찌 보면 좀 개념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풀어보면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하죠.

지도 #1


자, 그럼 1549년 음력 4월 22일로 돌아가 봅니다.

양력으로는 5월 17일입니다.

그날 걸은 퇴계의 소백산 산행기를 따라가 봅니다.

그의 4박 5일 간의 산행기인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영주(榮州)와 풍기(豊基) 사이를 자주 왕래하였으니, 저 소백산(小白山)이야 머리만 들면 보이고 발만 옮겨 놓으면 올라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하고 직접 가보지 못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겨울에 요행히도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오게 되니, 나는 저절로 백운동(白雲洞)의 주인이 되어 마음속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동안의 소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겨울과 봄에 걸쳐 공무(公務로 말미암아 세 번씩이나 백운동을 들렀지만 한 번도 산문(山門)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었다.

 

퇴계는 1501년 경상도 예안현 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은혜리입니다.

동으로는 청량산 도립공원이 자리잡아 있고 북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보이는 곳이죠.

이런 자연환경 속에서 성장을 하였으니 퇴계 정도의 호연지기 있는 소년이었다면 "기필코 저 산을 오르고야 말겠다."는 서원을 세워 봄직도 하였을 겁니다.

그 온혜리에서 고개만 들면 소백산도 보였다!

지금 도로 사정으로 약 54km 그러니까 140리 가까이 되는 거리를 퇴계는 그렇게 가깝게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과연 퇴계는 학문의 세계는 별론 자연을 그리고 산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지금의 산꾼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게 1549년이니 9살의 소년 퇴계는 그때부터 소백산을 그렸던 것이로군요.

대단합니다.

한편 주지하다시피 백운동서원은 신재 주세붕(1495~1554, 자는 경유)이 고려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제사 지내기 위해 백운동에 세운 서원입니다.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을 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려받은 후, 토지, 노비와 전결을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서원 즉 지그의 사립학교가 되면서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관립 학교인 향교에 대응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장소는 숙수사宿水寺 즉 물도 잠드는 절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절집을 폐廢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소수서원 자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한 숙수사라는 절집의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다고 하고.....

 

여하튼 퇴계는 바쁜 공무 중에도 세 차례 백운동은 들렀지만 단 한 번도 소백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422(신유) 이윽고 여러 날 이어지던 비가 개고 먼 산의 풍경이 목욕을 한 듯이 청명하였다. 나는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에 가서 유생(儒生)들과 함께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산을 향하여 올라갔다. 민서경(閔筮卿)과 그 아들 응기(應祺)가 길을 따라 나섰다.

 

1549. 5. 17.(음력 4. 22.) 퇴계는 소백산 등정을 작정하고 집을 나섭니다.

그러고는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수서원에 들러 유생들과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음력 4. 23. 소백산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진사 민서경과 그의 아들 응기가 동행하게 됩니다.

 

자, 그럼 저도 오늘 퇴계의 뒤를 따라가 봅니다.

468년 전 퇴계가 소백산 등정을 시작한 날은 철쭉이 만개를 기다리고 있는 5월 중순이지만 저는 첫 눈을 앞둔 11월의 초순입니다.

2017. 11. 9. 03:30

집을 나섭니다.

광명 ~ 성남 ~ 광주 ~ 단양을 거쳐 풍기로 접어듭니다.

새벽이라 쉬엄쉬엄 가도 06:30이 되어 소수서원 앞에 도착합니다.

이른 시간이라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숙수사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합니다.

하는 수 없이 인터넷에서 남의 사진 한 장 퍼옵니다. 

우리 일행은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갔다. 골짜기는 깊숙하고 숲속은 고요한데, 여기저기 개울물이 돌에 부딪쳐 흐르는 소리가 절벽 사이에서 요란하였다.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렀다.

 

소수서원에서 죽계에 이르는 옛길은 사실 끊어졌다고 얘기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개울을 따라 올라갔을 것이나 지금은 과수원, 상가, 논, 밭 등 여러 시설물이 있기 때문이죠.

소수서원을 나서면 바로 우측에 금성대군 신단이 보입니다.

금성대군 잘 아시죠?

백두대간을 하신 분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분입니다.

고치령에는 장승 여섯 기와 표지석이 있고 산령각이 있다. 마락리로 넘어가는 좌측 길에 샘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고치령 산령각에는 금성대군과 단종을 모셔 놓았다.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세조의 잘못을 간하다 순흥으로 유배 되었는데, 이때 그는 순흥에 있으면서 영월로 유배된 단종에게 밀사를 보내 소위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게 되었다. 그 밀사가 다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그러니 이 고치령은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양백지간(兩白之間)인 이곳에 산신각을 세워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으로, 단종은 태백산 신령으로 모시게 되었다. 태백산 천제단 바로 아래에 있는 단종의 비각이 거기에 있는 이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23쪽

 

이정표를 따라 들어갑니다.

그 신단을 모신 곳을 좌측으로 틀어 진행하면,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압각수라고....

1,300년 된 나무랍니다.

멀리 비로봉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나저나 중간에 볼 것도 없는데 차를 소수서원 앞에 두고갈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다시 돌아가서 차를 가지고 진행하기로 합니다.

퇴계도 말을 타고 간 구간이기도 하니....

좁은 농로를 조심스럽게 진행하여 순흥향교로 갑니다.

죽계천을 건너,

150m 정도 들어가면 관립학교인 향교입니다.

소수서원에 대응하는 학교였을 겁니다.

상당히 운치 있고 오래된 목조건물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런 교육기관이 있었으니 풍기나 순흥지역에서 인재가 많이 배츨되었을 법도 합니다.

소나무도 멋지게 자랐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가면서,

옥녀봉665.1m을 봅니다.

저 옥녀봉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국망봉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이 죽계천은 서천으로 합류되어 내성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이 될 테고.....

퇴계는 국망봉에서 이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이 죽계천의 하류를 구대천龜臺川이라 했는데 아마 구대천은 내성천을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연찮게 '금성대군 위리 안치지'를 보게됩니다.

위리圍籬란 유배된 자나 죄인의 집 울타리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는 것이라 하니 이곳이 그곳인가 봅니다. 

죽계계곡을 따르다 보면 순흥저수지를 경유하게 됩니다.

향교에서 죽계를 온전하게 따를 수 없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수지 옆에 세워놓은 안축(1287~1348)의 죽계별곡 가사를 읊다보면,

배점리 주차장입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주차장이지만 텅 비어 있고 주차요금은 받지 않습니다.

이 동네가 배점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유래는 아시지요?

차라리 죽계구곡 입구의 배점마을 입구에 있는 배순의 정려비(旌閭碑)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즉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배순이라는 대장장이가 그 자리에서 점방을 차려놓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점방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서원에 자신이 생산하는 물건들을 납품하게 된 배순은 서원을 드나들면서 너무나 공부가 하고 싶어서 귀동냥으로나마 글을 익히고는 어느덧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어느 날 강학당 댓돌 아래서 귀동냥을 하고 있던 배순을 발견한 퇴계 이황은 연유를 물어보고는 간단하게 쪽지시험을 본 결과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확인하고 그에게 유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단다. 그 후 퇴계는 임기를 마치고 서원을 떠났고 그러고는 얼마 뒤 세상을 뜨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배순은 삼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선조가 죽었을 때에는 매월 삭망에 상복을 입고 산에 올라가 제물을 차려놓고 삼년 동안 곡제사를 지냈는데 이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때 배순이 제사를 지냈던 봉우리를 나라를 바라보는 산봉우리라고 하여 국망봉(國望峰’)이라고 불렀고 배순이 점방을 열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배점(裵店)이라고 했다.

 

- 졸저 전게서 319쪽

초암사까지도 소형차의 출입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죽계구곡을 확인하려면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실 퇴계를 따라 걷는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그런데 저는 걷지만 퇴계는 말을 탄 점이 차이가 있겠군요.

퇴계의 아랫것들(?)도 걸었을 테니 저도 '아랫것'이 되어 걷습니다.

주차장을 나와서 우틀합니다. 

지도 #2

커다란 표지석이 주계구곡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통 공사중!

'토목 한국'의 역량을 여지없이 과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죽계구곡 코스를 안내해 주는 글은 건성으로 읽고....

안내판이 훼손된 것은 별론 여기가 9곡입니다.

 

사실 죽계9곡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우선 구곡은 중국 주희의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즉 주희(1130~1200)가 무이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구곡으로 표현하면서 읊었으니 그의 성리학을 따르던 우리나라 사대부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을 겁니다.

주희가 누굽니까?

성리학을 집대성한 그를 가리켜 송시열은 "집대성한 사람이 없었는데 (주희로 인해)1000년만에 흐린 황하가 맑아졌다一千年後濁河淸."라고 까지 극찬한 사람 아닙니까?

우선 그 무이구곡도가는 이이의 고산구곡도나 정철의 관동별곡 같은 가사문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고는 우리나라의 명승지 천암만학千巖萬壑의 경치를 가진 곳에는 우후죽순 구곡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죽계구곡 외에 속리산의 쌍곡구곡, 화양구곡, 변산의 봉래구곡 등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는 곳은 대부분 구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약 60개 정도가 있다고 하죠?

 

죽계구곡의 경우 1곡부터 9곡까지 경승을 정하고 그 자리에 그럴듯한 이름을 갖다붙이게 되는데 그 위치와 순서 매김 방식이  문제가 됩니다.

즉 퇴계나 주세붕 같은 경우는 죽계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9개의 경승을 정하고 그 곡을 선정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하류부터 올림차순으로 정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수서원 취한대를  1곡으로 정하고 "중국의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라는 설명을 붙입니다.

그리고  2곡은 금성반석(金城盤石)으로 "후세에 단종 복위를 꾀한 금성대군의 한이 서린 곳이다. 지금 순흥향교 자리다. 3곡은 백자담(柏子潭). 송림 순흥저수지 안에 잠겨 있다. 4곡은 이화동(梨花洞). 퇴계의 평민 제자 배순이 살던 마을과 가깝고, 배나무가 많았다."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 이론이 다수설입니다.

그것이 정통이 되어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지면 별 문제 없었을 겁니다.

 

이에 반해 1728년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는 역으로 상류에서부터 1곡, 2곡으로 붙이고는 아예 빼도박도 못하도록 바위에 글자를 새겨 버렸습니다.

과감했습니다.

소수설(이가순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거 같음)입니다.

어쩌면 몇 백년 후 물에 잠기고 파괴되는 것을 예견하고 그걸 상류 쪽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미리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상류부터 1 ~ 9를 정하는 게 일반적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상上은 빠른 숫자일 테니...

은근히 소수설에 동의하는 격입니다.


사실 다수설의 논거는 간단합니다.

구곡의 원조 중국에서도 하류부터  올림차순으로 했으니까 우리도 마땅히 중국의 것을 본받아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사대주의에 물들은 유학자다운 발상입니다.

 

하지만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가순 같은 경우에는 '엿 먹어라'는 식으로 상류부터 시작하여 9곡을 다시 선정해 버리고는 거기에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글자까지 새겨 버렸으니 퇴계나 주세붕 등에게는 난처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이곳을 9곡으로 하였으니 신필하설說을 따른 것이군요.

아마 석각石刻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혼란을 방지하자는 취지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공단의 안내판도 이가순의 이론에 따라 각 곡曲이 그 이름을 갖게된 이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공단 설명은 죽계구곡은 여기서 끝난다고 하였으니 위와 같은 논쟁을 불식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9곡 어느 곳도 이곳과 같이 내림차순으로 한 곳은 없다고 합니다.

 

이러니 퇴계가 좀 난감해 할 것 같습니다.

退溪는 退居溪上의 준말 아닙니까?

'모든 직에서 물러나 시내에 머물겠다.'는 호의 취지가 무색해 집니다.

 

각설하고 어디 한 번 볼까요.

 

9곡은 이화동梨花洞이랍니다.

이화동 아래 용소龍沼는 깊은 물이었다고 하는데 .... 

실망입니다.

수량은 그렇다치고 생활쓰레기에 공사하느라 자재도 널브러져 있고...

그리고 저 위에 시멘트 구조물은 또 뭔지.....

잡목은 시야를 방해하고....

어쨌든 지금은 예전과 달리  배나무는 없어졌고 온통 사과나무만 심어졌습니다.

조석으로 심한 기온 차이가 사과의 당도를 더 높인다고 하는군요.

예전 공단 초소를 지나,

6 ~ 8곡을 확인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틀하여 다리를 건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너무 좋습니다.

발로 밟을 때 사과를 씹는 소리가 납니다.

"사각사각...."

맑은 물 위로 나무의 갈색 나뭇잎이 보이고....

그리고 그 물은 떨어진 나뭇잎을 이동시키고도 있습니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만추晩秋의 한 장면인 그 호수가 생각 납니다.

등청운대登靑雲臺라!

청운대는 퇴계를 따를 때 2곡이 되는데....

조금 더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입니다.

8곡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는군요.

8곡을 관란대라고 합니다.

觀瀾臺는 맹자에서 가져온 말이군요.

觀水之瀾.

"물의 여울목을 보면 그 근본이 있음을 알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하단 물.

상단 물.

그러고는 7곡입니다.

탁영담이라고 하는군요.

濯纓潭은 굴원의 漁父辭에서 가져온 말로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니 내 갓끈을 씻으면 된다."하는 말입니다.

곧 내 갓끈은 물론 내 마음의 때를 씻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 흔적도 보고.....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니 낙엽이 떠 있는 소沼가 나옵니다.

광각렌즈로 찍으면....

그 물줄기의 상단 모습.

이곳이 제6곡 목욕담이군요.

목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만한 곳이라는 얘기겠고....

조진양의 죽계구곡 시 한 수 읊고,

다시 밖으로 나갑니다. 

다리 옆으로 가니,

이곳이 5곡이군요.

이 5곡 글자가 새겨진 바위 위에 사람이 홈을 판 흔적이 보이는군요.

안간교 다릿발을 올려놨던 흔적으로 보인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사료에는 이곳이 청련암 동쪽 벼랑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 청련암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군요. 

이 정도 되는 것은 아예 곡의 축에 끼질 못하는군요.

초암사 주차장입니다.

깨끗하게 정비된 주차장 화장실에서 손도 씻고....

공단 직원도 지금 출근하는군요.

한창 공사 중인 주차장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4곡이 나옵니다.

용추입니다.

이걸 퇴계는 7, 이가순은 4곡으로 불렀죠?

이가순은 이렇게 못을 박아 버렸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뭔가가 부족합니다.

아래에서 4곡 글자까지 나오게 찍어봅니다.

콘크리트 다리가 나오는 게 좀 마음에 안 듭니다.

글자가 안 나오게.... 

용추의 상단을 보면서 올라갑니다.

물줄기가 어지럽게 내려오는군요.

낙엽은 이렇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고.....

4곡은 정말 어지럽지만 아름다운 폭포이자 소沼군요.

4곡을 떠나자마자 바로 우측의 계곡으로,

3곡이 나옵니다.

척수대랍니다.

滌愁臺라고 쓰는군요.

곧 세속의 온갖 근심을 씻어내는 곳이라는데 이백의 시에서 가져온 말이군요.

척탕천고수 滌蕩千古愁 천고의 근심 말끔히 씻어버리려고.....

오늘 정말 공부를 많이 하는군요.

죽계구곡 덕입니다.

전에는 그냥 보고 지나쳤었는데....

이제야 그걸 다시 되새기다니 약간 아쉽군요.

................

죽계 초암사 시가 나오는 걸 보니 초암사도 지척입니다.

초암은 원적봉(圓寂峯)의 동쪽과 월명봉(月明峯)의 서쪽에 있었다. 여러 갈래의 작은 봉우리들이 위의 두 봉우리에서 갈라져 내려오다가 이 초암을 끌어안듯이 안아돌아 암자 앞에 와서 산문을 이루고 멈추어 섰다. 암자의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내려오다가 고여서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는 제법 평평한 자리로 이루어져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만하였다. 그곳에 앉아서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며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비할 데 없는 운치가 느껴졌다. 옛날 주경유(周景遊, 경유는 주세붕의 )는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근처에는 기왕에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백()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 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일주문을 봅니다.

퇴계는 원적봉과 월명봉 사이에 이 초암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려오는 양 줄기들 또한 여기서 보인다고 하였지만 깎아지른 절벽 등으로 보이는 건 없습니다. 

그저 이 정도만....

물론 예전 초암사는 草庵이란 말 그대로 작은 초가집 형태의 토굴 정도였을 겁니다.

나무도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참고도  #1  원적봉과 월명봉

 

어쨌든 초암사는 지금도 원적봉962.5m의 동쪽에 있으나 초암사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 이름 월명봉이 마땅치 않습니다.

초암사의 양쪽이 있는 봉우리를 대칭으로 놓고 본다면 962.7봉의 삼각점봉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원적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나 이 962.7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나 두 능선 다 정확하게 초암사 앞에 와서 산문山門을 이루고 멈추었다는 퇴계의 표현이 잘 어울리는군요

월명봉을  962.7봉으로 간주합니다.

초암사 다리를 건너니 좌측으로,

멋진 나무가 보이고 그 아래가 범상치 않습니다. 

08:43

이곳이 2곡 청운대로군요.

초암사 바로 앞에 있는 이 계곡에 너른 소가 있고,

바위에는 청운대라는 석각이 계곡에 그대로 보이는군요.

퇴계는 바위 밑에 너른 못이 있고 그 바위 위가 제법 평평하다 하였으니.....

주세붕은 이 걸 백운대라 불렀지만 퇴계는 백운동의 백운대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곳을 청운대라 부르면 좋겠다고 하였죠.

퇴계가 쓴 청운대 옆에 후에 신필하가 2곡이라 쓴 것이 재미있군요.

승려 종수(宗粹)는 내가 이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묘봉암(妙峯庵)에서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청운대 위에서 술을 두어 잔씩 마셨다.

퇴계는 이 청운대 위에서 승려 종수와 한 잔을 합니다.

이른바 입산주入山酒입니다.

퇴계는 이 대臺 위가 여럿이 둘러앉을 만한 바위라고 하였으나 두어 명이 간신히 비비고 앉아야 할 듯 싶습니다.

아까 얘기한 "뻥"이 좀 심하다는 얘깁니다.

봄이 익어가는 시절에 이 계곡의,

.

이 바위 위에 앉아 한 잔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계절이 정 반대인 만추.

그래서 붉은 색의 2곡........

그 때 민서경은 학질이 걸려 돌아가겠다고 하였고, 당시 나는 잔병치레를 하여 비록 쇠약한 몸이지만 이 산을 꼭 한 번 올라가 보고 싶다고 하니 스님들이 서로 의논한 뒤에 간편하게 만든 가마인 견여(肩輿)를 만들어 왔다. 옛날 주태수(周太守,주세붕)께서 이미 사용하였던 방법이라고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허락하고 민서경과 작별한 뒤에 우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민응기와 종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이 혹은 앞서고 혹은 뒤서면서 태봉(胎峯)의 서쪽에 이르렀다. 개울물을 하나 건너서 비로소 말에 내려 걸어 올라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견여를 타고앉아 아픈 다리를 쉬었다.이날은 철암(哲庵). 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다.

 

지도 #3

 

가이드 역할을 한 사람이 종수 스님이었군요.

유두류록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이나 유몽인, 남효온 모두 승려를 앞세워 유람을 하였습니다.

승려들은 산에서 살았으니 그들보다 산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터, 그들이 안내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아가 산의 암자는 지금의 대피소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니 승려를 앞세운는 게 여러 모로 좋았을 겁니다.

점필재의 유두류산록을 봐도 마찬가지지만 퇴계도 암자에서 유숙을 하며 소백산을 다녔습니다.

이는 민가도 없는 산에서 암자만큼 이용하기 좋은 시설물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암자가 없었다면 예전에는 산행이 그다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 와서는 승려와 사대부의 신분이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갖는 부담감도 거의 없었을 것이고......

 

묘봉암 소속의 승려 종수.

그런데 묘봉암이 어딥니까?

이 유소백산록에만 해도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암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명경암, 석륜사, 진공암, 백운암, 가타암 등이 나오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것들입니다.

멀리는 한두 명이 지키던 암자가 그 승려가 떠나고 나면 빈 토굴이되어 쇠락하다가 결국 길이 막히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겁니다.

가까이는 항일운동이나 한국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여파 때문에 빈 절이나 암자는 강제로 폐쇄시킨데 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운대 위에서 두어 잔씩 돌렸다고요?

그러고는 산행을 할 차비를 합니다.

그런데 민서경은 학질 때문에 중포中抛하고 아들 응기, 승려 종수 그리고 몇 명의 승려와 종들이 함께 팀을 꾸리게 됩니다.

필시必是 다리가 약한 퇴계가 된비알을 오르기는 힘들어 분명 안전 산행에 문제가 생길 것은 자명할 터!

노련한 산꾼인 승려 종수는 수하 승려들로 하여금 지난 번 주세붕이 유산을 할 때 사용하였던 견여肩輿를 만들어 가져오게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두 명이 질 수 있게끔 만든 가마였을 것인데 그 모습은 상상만해도 아찔합니다.

그리고 그걸 지고 가는 승려들은 좋지도 않은 산길과 된비알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여기서 고려시대와는 신분상으로 상대가 되지 않던 조선시대의 승려의 역할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유학을 공부한 퇴계와 같은 유학자들의 눈에 비치는 승려들은 물론 사람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불교경전을 읽고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비인륜적인 가르침이라고 멸시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볼 때 임진왜란을 전후로 배불排佛 혹은 억불抑佛을 주장하는 상소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산을 하는 선비들과 승려들 간의 마찰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고 오히려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즉 유산을 하는 선비들에게 잠지리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반면 불사가 있을 때 도움을 받거나 정책적인 배려를 받는 상호부조의 면면을 유산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승려들은 지로승指路僧과 남여승藍輿僧 그리고 수행승修行僧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종수 스님은 지로승의 역하을 그리고 견여를 만들어 가지고 온 승려들은 남여승에 해당하겠군요.

초암사에서 행장을 갖춘 퇴계 일행들은 초암사를 벗어납니다.

저도 이정표를 따라 퇴계의 뒤를 좇습니다.

국망봉 길을 들어서저마자,

좌측으로 구곡 중 마지막인 1곡을 봅니다.

금당반석이라....

금당金堂은 절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 두는 큰 절을 이야기 하는데 이 1곡이 9곡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하는군요.

이 너른 반석이나,

이 맑은 물을 으뜸으로 친다는 것입니다.

1곡을 벗어나 이런 길을 걸으면,

지도 #3의 '가'의 달밭재 루트와 국망봉 루트가 갈리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직진을 하면 국망봉으로 바로 오르는 길이고,

좌틀하면 달밭 마을을 거쳐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이 삼거리는 예전에도 있던 갈림길이었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달밭길 삼거리에서 헤어질 때 종수 스님 등은 이 좌측 길을 통하여 내려오고 퇴계 일행은 박달령을 넘어 풍기로 갔으니....

달밭골은 달 크기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그렇게 불렸다는 설과 국망봉과 초암사의 바깥 골짜기라는 뜻이라는 설이 갈립니다.

하지만 달達이라는 말은 高 혹은 山이라는 뜻과 같으니 고어 달밧 정도에서 왔을 것이니 높은 곳에 있는 밭 즉 높은 곳에 있는 마을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박달령과 함께 이따 다시 보기로 합니다.

어쨌든 우측에 태봉胎峰이 보이는 곳까지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태봉은 바로 우측이라기 보다는 전방 우측일 것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올라가는 방향으로  지금의 지도를 놓고 단순하게 파악한다면 태봉은 957.6봉 정도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개울물 하나를 건너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물을 건너 한참이나 걸어 갔다고 하니 석륜암 계곡을 건너 상당한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석륜암에 도착하기 전 명경암과 철암을 경유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자장 율사가 되어 절터 찾기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 정도도 충분한 절터일 것 같고....

이 정도도 무난하고.....

뒤에 암벽도 있고 아주 훌륭합니다.

어쨌든 중간에 철암, 명경암을 지나 석륜암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암자는 계곡 옆 큰 절에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렇다고 물과 많이 떨어진 곳은 아닐 것입니다.

위에서 보면서 올라간 터 중 하나 정도는 맞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철암이 가장 깨끗하였으며 맑은 샘물이 암자의 아래와 뒤에서 흘러나와 암자의 동서로 갈라져 내려갔는데 맛이 매우 달고 차가웠다그리고 주위의 경치가 끝없이 탁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석륜사의 북쪽에 있는 바위는 생김새가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이런 까닭으로 이곳을 예로부터 봉두암(鳳頭巖)이라고 불려왔단다그 서쪽에 바위가 또하나 우뚝 서 있는데 사다리를 놓고서야 그곳을 올라갈 수가 있었다주경유가 광풍대(光風臺))라고 이름지은 곳이다절 안에는 바위에 부처상을 조각하였는데스님들은 그것의 영험이 대단하다고 하였으나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암자터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고 하니... 

확실히 당시의 산길은 현재의 등로와는 차이가 납니다.

지금의 등로는 산행의 편의를 위하여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예전이야 어디 그렇겠습니까?

산길은 대부분 암자를 가기 위해서 승려들이 만들어 놓은 길일 테니 거의 암자와 암자를 잇는 길이 곧 산길이요 등로였을 겁니다. 

지도 #4

고도를 올립니다.

이 표지 안으로 들어가니,

부도가 한 기 나오는군요.

절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지도 #4의 '나'입니다.

뒤로 조금 더 올라가니,

큰 바위에 너른 터가 나오는군요.

드디어 보람을 느낍니다.

조금 전 바로 아래에서 부도를 봤고....

석륜사 터입니다.

그런데 이 바위를 봉두암이라고 하나요?

분명 퇴계는 이 석륜사의 북쪽에 있는 바위라고 하였는데....

이 바위는 바로 뒤에 있는 것이지 북쪽에 있는 바위가 아니지 않나요?

석륜사의 북쪽에 있는 바위는 생김새가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크기만 했지별로 기이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극토지리정보원 지도에 있는 봉바우가 퇴계가 이야기한 봉두암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듭니다.

어쨌든 여기서 그 봉두암혹은 봉바우가 보일 정도면 확실히 예전에는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절터.....

옆에 풍부한 수량의 물도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런 글이 있다고 합니다.

낙동강의 발원지는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태백산이요 다른 하나는 소백산이다.

그 내용에 근거하여,

이곳이 낙동강의 발원지라고 한 거군요.

그나저나 여기서 1박을 한 퇴계 일행은 늘어지게 피곤한 몸을 누이고 다음날 천천히 기상을 합니다.

그러고는 지금과 같은 등로인 돼지바위 방향으로 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돼지바위 방향의 루트는 이 석륜사가 없어진 다음에 생긴 것 같습니다.

온통 바위 구간이고 절벽이 있으니 아예 길을 내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그 위로는 암자도 없어서 스님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었을 겁니다.


4월 23(계해걸어서 백운암(白雲庵)에 도착하였다. 이 암자를 지은 스님은 이곳에서 좌선(坐禪)을 하다가 선()의 이치를 깨달은 뒤에 홀연히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 암자에 승려가 없었다. 다만 암자의 창 앞에는 우물이 있고, 뜰아래에는 잡초들이 을씨년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그 암자를 지나니 길이 더욱 험준하였다. 산길을 곧바로 올라가자니 마치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당기고 밀면서 산마루에 올라갔다.

마침 이 석륜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운암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 찾아보죠.

석륜사 터에서 좌틀하면,

너른 반석도 있고 상당한 양의 물줄기도 흐르고 있습니다.

뒤로는 절벽과 잡목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면을 치고 서쪽으로 진행을 합니다.

낮은 안부로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11:04

지도 #4의 '다'의 곳에서 기왓장 파편 조각 하나를 발견합니다.

혹시나 이 파편이 이 부근에 있던 백운암의 기와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훌륭한 절터 아닙니까?

석륜사 북쪽에 있는 바위는 저 봉두암을 얘기하는 거 같은데...

여기서는 봉두암도 확실하게 보이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봉바우라고 불렀음은 아까 얘기했죠?

그렇다면 그 좌측 즉 서쪽 사진상으로는 우측 앞에 보이는 바위가 주세붕이 이야기한 광풍대(光風臺))가 되겠군요.

가설假說입니다.

일단 백두대간길로 올라섭니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견여를 탔다.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 쯤 가니 석름봉(石凜峯)이 있었다. 봉우리 꼭대기에 풀로 엮은 초막(草幕)이 있다. 초막 앞에는 나무토막들을 이리저리 걸쳐 놓은 것이 있는데 매를 잡는 사람들이 만든 매잡는 틀이란다.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알 만하였다그 봉우리 동쪽 몇 리쯤에 자개봉(紫蓋峯)이 있고 거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수 리를 더 가면 또 한 개의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다. 이것이 국망봉(國望峯)이었다.

어쨌든 암자를 지나 된비알을 올라 산마루로 올랐다 하니 그 산마루는 대간길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몇 리를 가니 석름봉이 있었다고 했는데 ...

석름봉이라...

지금부터 잘 정리를 하여야 합니다.

퇴계가 오른 곳부터 국망봉까지의 봉우리 순서는 석름 - 자개 - 국망 순입니다.

그리고 각 봉의 거리는 약 8 ~ 9 리 입니다.

"석름, 자개, 국망 세 봉우리의 거리가 서로 8~9리쯤 되는 사이에"

~ 라는 구정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몇 리를 더 가면 자개봉이 있고 거기서 수 리를 더 가야 국망봉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지명으로 계산하면 전혀 계산이 안 나옵니다.

실제 봉두암에서 국망봉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데 퇴계는 암자 루트를 이용하기 위하여 석륜사 - 백운암 - 능선 루트를 이용하였는데 석륜사 - 백운암은 서진西進하는 루트였고 사실 이 거리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퇴계는 이들 봉우리의 간격이 '수 리'에서 조금 뒤 '각 8~9리'로 특정을 해버렸습니다.

3 개의 봉우리가 각 8~9 리쯤 서로 떨어져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럴까요?

국망봉에서 비로봉까지의 거리가 2.8km 정도 밖에 되지 않음에 미루어 볼 때 더욱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즉 국망봉 ~ 비로봉(자개봉) ~ 연화봉(석름봉)이라 본다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퇴계는 비로봉도 가기 전에 하산하였기 때문에 이 거리와 봉우리의 위치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당시 도량형과 지금의 그것이 다르다는 얘기?

즉 지금의 里단위가 당시의 里와 거리가 다른 건가요?

그런데 조선시대 때에는 10리가 약5.7km라고 하니 오히려 세 봉우리의 간격은 적어도 서로 4km 정도 이상 떨어져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결국 숫자에 관한 한 상당히 허수가 가미된 것이라 봐야 합니다.

즉 뻥이 심했다는 것이죠.

숫자는 무시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국망봉은 확실한 봉우리라고 할 때 석름봉과 자개봉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것일까요?

참고 사진 #1


비로봉에서 국망봉으로 오면서 어의곡 삼거리를 지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현재 지명으로 볼 때 오직 'A'와 'C'만이 현재 지명과 일치합니다.

'국망봉'과 '봉바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올라온 곳이 D와 C 사이이기 때문에 다른 봉우리들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따 보겠지만 퇴계는 가타암이 있는 월전계곡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동쪽의 끝은 현재의 1328.5봉 너머 1315.인 지도 #5의 '마'입니다.

결국 지도 #4의 '라'의 곳.

즉 참고 사진 #1의 'D'봉입니다.

여러 개의 바위 군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개봉은 자연스럽게 'B'의 곳입니다.

현재 등로로 보자면 석륜암골에서 국망봉으로 가기 위해 막 올라서는 삼거리.

그 봉이 자개봉입니다.

이른 아침에 해가 뜰 무렵이나 비가 개일 때 보이는 보라색 빛을 보고 스님들이 붙였을 겁니다.

석름봉은 이름 그대로 바위가 늠름하게 서 있는 '봉우리 D' 로 나름 확정합니다.

퇴계는 이 석름봉을 지나 동쪽으로 진행을 하면서 바위 위의 초막을 봅니다.

이 초막은 매를 잡는 이들이 이용하는 임시 거처입니다.

이는 점필재가 지리산을 진행할 때에도 지금의 세석평전 부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겁니다.

옛날 양반들이 매를 이용하여 사냥 놀이를 즐겼고 그런 용도로 사용할 매를 잡기 위하여 민초들을 시킨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늦가을이나 겨울에 그 추운 소백의 칼바람을 맞으며 이 초막에 숨어서 미끼를 놓고 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민초의 고단한 생활을 퇴계는 읽었던 것입니다.

석름봉을 지나 자개봉을 가는 길에 봉바우를 지납니다.

조금 당겨서 봅니다.

'봉바우' 올라가기 전 우측으로 '백호암 약수' 골짜기인데 아까는 위치상으로 보지 못했으니 내려가 볼까요?

골짜기에 쌓여 있는 낙엽의 깊이가 장난이 아닙니다.

미끄러지면 거의 넙적다리까지 파묻힐 정도니.....

이건 왠 피켈!

박물관에 보관해야 할 정도로 오래된 피켈이 케이스와 함께 바위에 박혀 있군요.

녹이 슨 채....

내려가면서도 "괜한 짓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도상으로는 저 아래인데 평평하고 너른 곳은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 낭떠러지 바로 아래에 샘물이 있을 만한 곳으로 보여지지만 지금은 보이질 않는군요.

한 20분 정도 쓸데없는 짓하고 올라갑니다.

바로 이 119 구조목 있는 곳입니다. 

초암사 방향을 내려다 봅니다. 

봉바우를 지나고,

철쭉 사이로 지나온 석름봉 등을 봅니다.

좌측으로는 멀리 연화봉과 그 앞의 비로봉이 명백하군요.

중앙으로는 제천지맥의 호명산과 갑산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음......

늘씬하군요.  

덕유를 보는 것 같습니다.

계단을 올라 숲을 빠져 나옵니다.

지나온 암릉들...

국망봉과 자개봉紫蓋峰.

물론 자개봉은 퇴계가 부른 이름입니다.

아마 종수 스님이 알려준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돼지바위와 석륜암터가 있고 초암사로 내려가게 되겠죠?

국망봉으로 향합니다.

자개봉과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줄기를 보고.....

큰 바위를 지나 국망봉으로 향합니다.


우측으로 상월봉을 보며,

바람에 시달려 키가 작은 나무를 봅니다.


맑게 갠날 햇볕이 밝게 비치면 여기서 용문산(龍門山)과 나라의 수도인 서울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산에 운무(雲霧)가 끼어서 먼 곳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흐릿한 중에서도 서남쪽으로는 월악산이 은은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과 청량산(淸凉山) , 문수산(), 봉황산(鳳凰山)이 보일듯 말듯 늘어서 있다. 그리고 저 남쪽으로는 팔공산(八公山)과 학가산(鶴駕山) 등 여러 산이 있을 것이고 그 북쪽으로는 오대산과 치악(雉嶽) 등 여러 산이 구름 사이에서 출몰하였다. 또 여기서 볼 수 있는 물로는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이 있고,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이 보인다. 곁에 있던 종수가 말하기를,

"이런 높은 곳에서 먼곳을 바라보려면 서리가 내린 뒤인 가을 낮이나 비가 막 갠 뒤의 화창한 날씨라야 합니다. 옛날 주태수께서도 비때문에 5일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올라갔기 때문에 비로소 먼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그렇겠다고 여기면서도, 산에 오르는 맛이란 꼭 눈으로 먼 곳을 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낮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자라는 나무들은 모두들 동쪽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고 나뭇가지들도 몹씨 외틀어지고 왜소하였다. 그리하여 계절로 보아 4월 하고도 그믐께인데도 이제서야 나뭇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니 1년 내내 자라는 기간이 얼마되지 않을 듯하였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주위환경의 온갖 고난을 버텨나가느라고 마치 전쟁을 대비하는 듯한 태세를 하고 있으니 깊은 숲속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형태가 달랐다. 곧 환경에 따라서 체질이나 성품이 바뀌는 것은 식물이나 사람이나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8,9 리쯤 서로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 철쭉이 숲을 이루었으며 지금 마침 그 꽃들은 한창 피어나서 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다. 어쩌면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듯한 기분이다. 산봉우리 위에 앉아서 술을 서너 잔씩 나눈 뒤에 시 7 수씩을 지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철쭉꽃 숲속을 지나 중백운암으로 내려왔다.


국망봉입니다.

퇴계의 평민 제자 배순의 이야기도 서려 있는 곳입니다.

미끈하게 뻗은 백두대간입니다.

중앙 제일 뒷 라인에 도솔봉도 보이는군요.

상월봉과 형제봉. 

일단 우측의 상월봉을 보지만 퇴계는 여기서 발걸음을 돌렸으니 북쪽을 볼 필요가 없고....

다시 돌아 내려옵니다.


백두대간 능선 우측으로는 도담이 보인다 했고,

좌측으로 죽계의 하류인 구대천도 볼 수 있다니 과연 퇴계는 '매의 눈'을 가진 분 같습니다.

돌아오면서 본 국망봉과 우측의 상월봉.

"산 위에는 기온이 낮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자라는 나무들은 모두들 동쪽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고 나뭇가지들도 몹씨 외틀어지고 왜소하였다.

퇴계의 말을 실감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한 잔을 하셨나요?

자개봉 정도에서 하셨겠지요?

운전을 해야 하기에 막걸리 한 통을 가지고 오지 않음이 안타깝습니다.

 다시 숲으로 듭니다.

나는 종수에게 말하였다.

"내가 처음 제월대(霽月臺)를 바라보았을 때에 두려움으로 다리 힘이 다 빠져버리더니 지금 이렇게 올라 왔는데도 다리에 힘이 아직 남아 있음을 느끼겠으니 거기를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종수를 앞세우고 벼랑을 따라 발을 모로 디디며 올라갔다상백운암이라고 불리던 곳은 이미 불탄 지 오래되어 빈터에 풀만 우거지고 파란 이끼만 가득 돋아났다제월대는 바로 그 앞에 있었다그 제월대 앞은 낭떠러지를 이루어 내려다 보기만 하여도 정신이 아찔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우리는 거기에서 내려 와 그날 밤은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올라오던 방향으로 다시 내려갔군요.

그런데 갑자기 제월대가 나옵니다.

상백운암 바로 앞에 있다고 하였으니 능선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석륜사로 내려가 하룻밤을 묵습니다.

지도 #5


25(갑자나는 상가타(上伽陀)에 가기로 작정하고지팡이를 짚고 산길을 나섰다환희봉(歡喜峯)에 오르니서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더욱 아름다웠다모두 어제는 보이지 않던 산봉우리들이었다수백 걸음을 지나가니 석성(石城)이었던 옛터가 있고 성안에는 주춧돌과 허물어진 우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그 서쪽에 조금 높이 솟은 바위봉우리가 있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앉을 만한 장소가 있었다그곳에는 소나무()나무철쭉 들이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지우고 있었는데 등산하는 사람들도 일찍이 이르지 못한 곳이란다이곳 사람들은 그 봉우리의 생김새를 본떠서 산대암(山臺巖)이라고 불렀다.

그냥 하산해도 되련만 산 욕심이 많은 퇴계는 월전계곡에 있는 상가타 등을 답사하기로 합니다.

다시 백두대간 길로 올라와 아주 잘 생긴 봉우리를 향합니다.

퇴계가 환희봉이라 부른 곳입니다.

환희봉에서 수백 걸음을 더하면,

나는 사람을 시켜 가려진 곳을 헤치고 먼곳을 바라보니멀고 가까운 곳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이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주경유가 이곳에 오지 않아서 이 이름이 이처럼 고루한 것인가나는 불가불 그 이름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그리고서 나는 이곳을 자하대(紫霞臺)라고 명명하고석성의 이름을 적성(赤城)이라고 하였다이는 옛날 천태산(天台山)이 붉은 노을이 낀 것처럼 붉어 보인다고 하여 '적성산'이라고 한 뜻을 따온 것이다자하대의 북쪽에는 이름없는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그 빛이 희게 보였다그리하여 나는 그 동쪽 것을 백학봉(白鶴峯), 서쪽 것을 백련봉(白蓮峯)이라고 감히 명명하여 기왕에 있는 백설봉과 함께 일컫게 하였는데이는 소백산의 이름과도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석성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퇴계는 이 석성을 적성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천태산(天台山)이 붉은 노을이 낀 것처럼 붉어 보인다고 하여 '적성산'이라고 한 뜻을 따온 것이라고 하였지만 언어학자들은 赤이나 丹 모두 붉은이라는 색깔을 나타내는 의미보다는 우리 고유의 '밝사상'에서 봅니다.

이 '밝'의 변형이 '박, 밖, 불, 발' 등인데 이 변형어들이 한자로 바뀌면서 '明, 赤, 光, 朱, 足' 등으로 변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이 옆의 고을인 단양이 단산현丹山縣이 고려 충숙왕 때 새롭게 바뀐 이름이었는데, 이 丹山을 바꿔 쓴 게 赤山이었으며 '陽'이 산이나 언덕을 뜻하는 말이니  단산이 단양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겁니다.

이런 작업들은 결국 단양군 지역이 백두대간 줄기 중 이 험준한 소백산 자락에 있는 광명, 신, 하늘, 태양 등의 의미를 가진 고을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입니다.

결국 퇴계가 이 소백산성을 적산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 이런 내용을 알고 적은 것입니다.

그나저나 퇴계는 어떤 걸 보고 백학봉이나 백련봉이니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상상력 하나만큼은 풍부한 퇴계입니다.


 

석성 바로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저 석름봉은 동쪽에 있는 바위봉이고,

쪽은 제천지맥 쪽인데 그 쪽에 무슨 바위가 있나요?

저 너머는 신선봉이고.....

어쨌든 여기에 이만한 바위를 보기도 힘들다 본다면 이 바위가 자하대紫霞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바위인가요? 

석성 ~ 자하대인 듯한 곳을 지나자마자 바로 1328.5봉입니다.

사실 이 봉우리도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인데 혹시나 이봉우리가 자하대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잡목이라 실체를 

확인하긴 어렵습니다.

봉 정상은 그저 이 정도...

이 우측이 월천계곡의 마지막이 시작되는 곳이니 이 정도에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서부터 숲을 뚫고 험준한 산을 넘어가서 산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바위골짜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상가타이고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은 동가타였다.

종수가 이르기를,

"옛날 희선 장로(希善長老)가 처음 이 동가타에서 머물었고뒤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를 9년 동안 하였습니다그는 자신의 호를 목우자(牧牛子)라고 하였으며 그의 시집(詩集)도 남겼는데 소승이 일찍이 그것을 가져 있다가 남에게 빌려주었습니다."

하고시 두어 구절을 읊었다모두 마음을 깨우칠 만한 것들이었다.



적당한 곳을 치고 내려갑니다.

지도 #5의 '마'의 곳으로 내려갑니다.

초입에는 길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 서북쪽으로는 금강대와 화엄대가 있다나는 그 이름을 그대로 남겨 두기로 하였는데그곳에는 고승의 자취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동쪽에 있는 석봉(石峯)이 가장 기이하게 빼어났다그곳이 연좌(宴坐)라는 명칭을 가진 것은 역시 고승의 고사가 있기 때문이었다상가타로부터 시내물을 따라 내려오는데 고목과 푸른 등나무 덩굴들이 서로 얽혀서 하늘이나 해도 볼 수가 없었다중가타의 어귀에 이르렀으나 절안에 스님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그 곁에 폭포가 바위에 부딪쳐떨어지는데 폭포 곁의 바위 절벽에는 잔대[箭竹]들이 무더기로 자라다가 지금은 잎이 모두 말라죽었다그러나 그 뿌리들은 줄기를 드러낸 채로 얽히어 있었다그리고 이 폭포의 이름을 죽암폭포라고 하였다산승(山僧)이 이르기를,

"이 절벽뿐만 아니라 이 골짜기 전체에 이 잔대들이 무리지어 살았는데 지난 신축년(1541,중종36?)에 그것들이 모두 열매를 맺고는 저렇게 말라 죽었습니다."

하였다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이치를 터득할 수가 없다우리는 조그마한 시내를 건너서 금당(金堂)과 하가타암(下伽陀庵)에 이르렀다.그동안 중가타의 동쪽에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의 곁에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거기에 있는 스님들이 전염병을 앓고 있어서 들어가 보지 않고 지나쳤다우리는 하가타에서 시내를 하나 건너 관음굴에 들러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러나 이내 능선을 따라 길이 잘 나 있고 의도적으로 계곡으로 붙으려 하지만 너무 골이 깊습니다.

그렇게 계곡을 따라 내려오지 않아 상가타 흔적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도 #5의 '바'의 곳에서 절터를 발견합니다.

돌로 낮은 담장을 친 모습도 보이고,

무엇보다 기왓장 조각과,

샘,

그리고 등나무 덩굴이 얽혀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곳.

퇴계의 묘사와 딱 들어맞는군요.

이렇게 기쁠 수가!

더군다나 바로 아래 폭포가 보이고.....

이 폭포를 죽암폭포竹巖瀑布라고 했던 건가요?

그 아래 또 하나의 폭포가 나타납니다. 

지도 #5의 제1폭포와 제3폭포입니다.

키 작은 산죽밭을 지나고.....

사면을 치고가다가, 

계류를 하나 건너지만,

하가타암과 지공암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아마 이곳이 그 중 하나일런가?

26(을축)하산하는데 산밑으로 반석이 널찍하게 펼쳐지고 그 위로 맑은 시내물이 흘러가니, 졸졸 흐르는 그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시원스러웠다. 그 시내 의 양쪽에는 목련(木蓮)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물가에다가 지팡이를 세워놓고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 이를 씻으니 기분이 상쾌하였다. 그 때 종수가 시 한 구를 읊었다.

시냇물은 옥을 찬 벼슬아치 비웃는데, [溪流應笑玉腰客]

세속 먼지 씻을래도 씻을 수 없네. [欲洗未洗紅塵踪]

종수가 읊고나서,

"이것이 누구를 가리킨 것이겠습니까?"

하여, 서로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은 뒤에 각각 시를 또 한 수씩 지어 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종수 스님도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하신 승려 같습니다.

퇴계 정도의 인물과 같이 시를 나눌 수 있을 정도니.....

시내를 끼고 수 리(數里)를 내려 가는 동안 주변은 숲이 구름처럼 덮여있는 절벽들로써 볼수록 장관이었다. 갈림길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민응기와 종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은 초암동(草庵洞)쪽으로 떠나고 나는 박달현(博達峴) 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소박달현에 이르러 나는 견여에서 내려 걸었다. 조금 가니 나를 마중나온 사람과 말이 고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서 대박달현을 넘었는데 거기는 바로 상원봉(上元峯) 한 줄기가 남쪽으로 달려가다가, 허리가 조금 아래로 처져서 낮아진 곳이었다. 여기서 상원사가 수리 밖에 안 되지만 힘이 딸려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비로전(毗盧殿)의 옛터 밑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조금 있자니 허간(許簡)과 내 아들 준(俊)이 군()에서부터 찾아왔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여기서 오랫동안 이야기하며 쉬었는데, 우리가 앉아 쉬었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명명하였다.


당연히 퇴계 일행이 마지막 밤을 보낸 토굴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지도 #5의 '아'의 곳입니다.

하산하는 길은 계류를 오락가락하면서 진행하게 되지만 집중하여 내려오면 길 찾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좌측으로 민가 하나가 보입니다.

솥이 하나 놓여  있는 걸로 봐서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도 보이지만 그러기에는 집이 너무 낡았습니다.

이런 곳이 여기에 세 채가 있습니다.

바로 우측으로 민가 두 채가 더 보입니다.

저 위의 건물은 토굴이고....

혹시나 하가타암의 후신이 이 암자? 

이 달밭동의 달밭을 한자화 한 이름이 월전月田일 것입니다.

깊은 골을 사면치기로 10분 정도 걸어나오니 길 입구에 이런 안내판이 드라워져 있습니다.

수행에 방해된다는 얘기겠죠.

이곳을 빠져나오면,

지도 #5의 '카'에 있는 바로 소박달현입니다.

이곳에 이르는 길은 저와 같이 사면을 치고 진행을 하거나, 아까 그 달밭동에서 계곡을 따라내려와,


지도 #5의 '차'의 이 앞으로 나오는 방법 등 두 가지 루트가있습니다.

이리로 내려왔을 경우 우틀하여,

수도중修道中이라는 글이 적인 안내판이 있는 작은 암자를 지나 소박달현에 이르게 됩니다.

조금 전 승려 종수 일행과 헤어진 소박달현 바로 아래에 있는 삼거리를 지납니다.당

퇴계는 여기서 일행들을 초암으로 내려보내고 우틀하여 박달현으로 향했었죠.

소박달현을 지나서는 이내 퇴계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과 만납니다.

개울을 지나,

옛길을 따라 오르면,

된비알을 오르게 되고,

그러고는 바로 박달현입니다.

지금 지도로는 밀목재입니다.

좌틀하면 원적봉으로 진행을 하게 되고,

우틀하면 비로봉으로 오르게 됩니다.

박달령을 굳이 한자로 쓰자면 朴達嶺이라고 쓰기는 하겠지만 이는 소리만 빌려 쓴 차자(借字) 표기에 불과하다. 즉 ᄇᆞᆰ() + ᄃᆞᆯ(, ) + ()과 같은 구조의 말이니 곧 높은 곳에 있는 신령스런 고개라는 뜻도 되고 박달이 단()이기도 하니 단군과 같은 의미도 된다고 한다. 이제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령으로 불렸다는 해괴망측한 얘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퇴계는 이 줄기가 상원봉에서 내려오는 줄기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렇다면 퇴계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소백산의 최고봉이자 주봉인 비로봉의 옛이름이 상원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분명 비로사를 지칭하는 절집을 역시 상원사로 부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퇴계가 간 방향은 알 수 없지만 일단 비로사 방향을 따릅니다.

일반인들도 다니는 길이라 넓직합니다.

멋진 낙엽송 숲을 지나,

오랜만에 억새 구경을 하면,

달밭골입니다.

마을 입구.

저는 오늘 새벽에 들어오느라 주차요금을 안 냈음은 물론 맨 위에 있는 이 마을까지 차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차를 회수하여,

비로사 일주문을 보고,

비로사까지 참배합니다.

퇴계가 이걸 못 올라온 것을 보면 분명 퇴계는 다른 길을 이용했을 것 같습니다.

계곡 옆으로 진행하였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분명 올라왔었을 텐데.....

소백산 국립공원을 빠져나옵니다.

내일부터는 산방기간이죠.

그래도 비로봉 코스는 열려 있으니 상관없을 겁니다.

우리는 드디어 욱금동(郁錦洞)을 지나서 군으로 돌아왔다.

예전에는 금계호가 없었겠지만 저 건너에 있는 욱금동을 거쳐 퇴계는 군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퇴계와 작별을 해야겠군요.

참고도 #2


마지막으로 퇴계의 후기를 봅니다.

그런데 이 소백산은 천암만학(千巖萬壑)의 경치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은 주로 사찰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왕래하게 된다대개 사람들이 통행하는 곳은 세 군데의 골인데저 초암이나 석륜사는 중간 골[中洞]에 있고성혈(聖穴)이나 두타(頭陀등의 절은 동쪽 골에[東洞]에 있으며상중하의 가타암은 서쪽 골[西洞]에 있다산행하는 사람들은 초암과 석륜사를 경유하여 국망봉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그러다가 힘이 빠지고 흥이 식으면 돌아오는데저 주경유같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기껏 올라가본 곳은 겨우 중간 골 일대뿐이었다그의 '유산록(遊山錄)'에 기술한 것이 매우 자세하기는 하였으나 그것들은 모두 이 산의 스님들에게 물어서 쓴 것이고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산봉우리 이름들 중에 광풍(光風), 제월(霽月)이나 백설백운 등은 모두 중간 골에 있는 것들이고그밖에 동서쪽 골에 있는 것들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력이 쇠약하고 병든 몸이었기 때문에 단 한번에 이산의 전체 경치를 다보려고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그리하여 동쪽은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고 서동으로 향하여 갔던 것이다내가 서쪽 골에서 얻은 명승지로는 백학백련자하연좌죽암 등의 경치로서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마치 주경유가 중간 골에서 만나본 바의 경우와 같은 의도에서였다.


아까도 잠깐 얘기했지만 옛날에는 비로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골짜기도 월전, 석륜사, 북간터 정도만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즉 풍기를 풍기읍과 지금의 순흥만을 주요한 고을로 본 것 같습니다.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遊山錄)'을 백운동 서원의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어 보았는데 이번에 석륜사에 가보니, '유산록'이 판자에 쓰여져서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시문(詩文)이 웅혼, 기발함을 감상하고 도처에서 그의 시를 읊었다. 그렇게 하니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시로써 수작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으로써 얻은 감흥 또한 매우 컸다. 등산하는 자는 참으로 이러한 기록을 남겨야만 되겠다는 뜻을 느꼈다. 그런데 주경유가 이 산에 오기 전에도 호음(湖陰) ()선생이나 태수 임제광(林霽光)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 태수가 남겨놓은 글은 한 자도 찾아 볼 수가 없고 호암의 시만이 초암(草庵)에서 겨우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스님들의 말을 빌리면 석륜사에는 황금계(黃錦溪)의 시가 있고 명경암의 벽에는 황우수(黃愚수늙은이수)의 시가 있을 뿐 그 밖에는 더 이상 다른 이의 시문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영남은 사대부가 많은 고장으로, 특히 영주 풍기 사이에는 예로부터 큰 선비들이 끊임없이 이어왔는데, 이곳을 찾은 사람이 어찌 그리 없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곳에 대한 글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나의 생각으로는 죽계(竹溪)에 사는 안()씨들은 이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서 그 이름이 중원(中原)에까지 떨쳤으니 반드시 이산에 올라보았을 것이고 이산을 노래하였을 것이고 이산을 즐겼을 것인데, 그 자취가 이산에 남아 있지 않고 그 시가 구전되어 오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풍속이 산야(山野) 유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산에 대한 글을 남기기를 꺼리기 때문에, 후세에까지 이름을 드날린 저 안씨들[안유,안축 등]도 끝내 이 훌륭한 산에 대하여서 말 한 마디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다른 것을 논하여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나같이 벼슬에 매여있는 몸으로 잠시 여가를 내어 유람한 것쯤이야 이 산에 대하여 무슨 보탬이 될까마는, 그동안 지나면서 본 것들을 이렇게 기록할 뿐이다. 훗날 이글을 보는 사람도 내가 주경유의 기록을 보며 감동하였던 것만큼 감동할지 모르겠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명종4]에 풍기[基山郡]관사에서 서간병수(栖澗病叟) 쓰다.

 * 서간병수 : 시냇가에 깃들여 사는 병든 늙은이

 

그런데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산을 두고도 순흥 안씨들이 관심이없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아쉬운 느낌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원래 그런 거 아닙니까?

산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집 바로 옆에 있는 산에는 무관심 하잖습니까?

물론 예외는 있죠.

468년 만에 만나본 퇴계 이황.

이렇게 훌륭한 글을 써주셔서 후대의 저같이 미천한 사람이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는 좋은 추억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고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