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남해가에 있는데 이곳에서 백두산의 큰 산줄기가 끝난다. 그런 까닭에 이 산의 다른 명칭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蓬來山이라 하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청화산인 이중환이 지리산을 이른 말입니다.
삼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 연주산입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일컬었던 것이죠.
‘지리산’이라는 소설을 쓴 하동 사람 이병주는 이 지리산을 어떻게 봤을까요?
“두류산은 백두산맥이 순하게 풀려와서 천왕봉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요, 방장산은 불명佛名으로 불리는 이름이며, 지리산이라는 이름은 이 태조가 등극할 뜻을 품고 각 산신들께 기도를 올렸는데 백두산 · 금강산의 양 산신은 승낙을 했지만 두류산신만은 반대했다고 하여 산신의 위位를 낮추고 그 후 반역자들을 이곳에 귀양보냈은즉 훗날 이를 몰아낼 지식인이 이곳에서 배출되리라는 뜻으로 불린 이름이며, 삼신산은 진시황이 구하려고 한 불로장생의 약이 이옷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니, 지리산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하며 방장산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순조 시대의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의 판소리 ‘흥부가’를 들어보면 ‘망당산’이라는 다른 이름도 들립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02쪽
“방장산이란 명칭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에 보이고, 지리산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두류산이라 부른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백두산에서 산줄기가 흘러 이 산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 虛齋 정석구(1772~1833) 두류산기
그런데 최근 연구(지리 99, 가객 님)에 따르면 지리산을 '덕산'으로도 불렀다는 내용이 눈길을 끕니다.
즉 내옹乃翁이라는 호를 가진 안치권安致權(1745~1813)이 5박6일의 일정으로 지리산을 유람하고 난 뒤의 기록을 담은 내옹유고乃翁遺稿 2집에 수록된 내용 때문입니다.
이 글을 보면 두류록頭流錄에 [而其號有四. 曰智異. 曰頭流. 曰方丈. 曰德山.]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영남과 호남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산이 구불구불 수백 리, 우뚝 선 높이가 수천 길이다. 새, 짐승, 구리, 철이 저장되어 있고, 사찰과 스님들이 살고 있다. 명칭은 넷인데, 지리산(智異山),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덕산(德山)이다. 덕산이라는 명칭이 가장 유명한 것은 대개 남명 조식선생이 공부를 하신 장소이기 때문이다. - 1807, 안치권 두류록
그러고 보니 이제 지리산은 '덕산'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얻게 되었군요.
이렇듯 지명은 땅과 지역의 특성을 제일 먼저 드러내 보여주는 얼굴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땅의 생김새와 장소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그 지명을 붙인 당시의 사람들의 지리적인 사고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자연적 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속성도 가미되어 있을 것이고 역사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역사지리적인 성격도 담겨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명은 사용하는 그 당시 사회의 주체에 따라 이름이 변화하기도 하며 그 의미와 범위가 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를 꼽는다면 공식적인 문서로는 지도와 지지地誌일 것이며, 비공식적인 그것으로서는 유산기 즉 산행기일 것입니다.
제가 최근 유산기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즉 선인들의 유산기에 나오는 지명을 현재의 그것과 비교해 가며 그것을 찾아가는 재미!
그것은 느껴본 사람이 아나면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제가 지리산에 빠져 사는 이유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위에서 인용한 이병주님은 '지리산'에서 벽송사에 거주하고 있던 최노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당시의 지리산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5천 척 이상의 봉우리가 18봉이요, 3천 척 이상이 22봉이요, 2천 척 이상이 20여 봉이니, 고만高蠻이 도합 60이요, 중만中蠻, 저만底蠻으로 말하면 1천여 개이니, 소위 산지대왕 아닐손가. 강으로 말하면 칠 개 강천이 흐르고 계곡은 수십 개로 기관명승이 절가하니 풍우순조하면 비옥한 땅일레라, 가히 신선이 노니는 선경을 짐작할 수 있느니라.”
그렇죠.
지리산은 천왕봉을 위시하여 반야봉, 제석봉, 노고단 등 1,500m 급 고봉이 18개나 된다는 얘기며 여기서 7개 강천이 흐르게 되며 계곡은 수십 개나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지리산을 소개하고 있는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1967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지리산은 단순히 크다, 깊다, 넓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지리산!
그런데 그 지리산을 저는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① 지리산은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산 혹은 티벳 고원으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대륙을 지나 백두산을 통하여 나라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인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동서를 가르고 진행하다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는 곳.
즉 산줄기의 측면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②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지리산은 남덕유에서 시작된 물줄기 남강이 함양, 산청, 진주를 적시며 진행할 때 그 물줄기의 우측에 자리해 있으며, 대간의 영취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 섬진강이 남원, 구례, 하동을 흐를 때 그 좌측에 서 있는 산.
이는 지리산을 물줄기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③이 지리산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신앙, 그 신앙의 변천 과정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 그들이 겪었던 역사적인 사실 등 그들이 겪었던 고단하고 지난한 생활 등이 스며들어 있는 곳.
다시 말해서 가령 노고단이나 천왕봉 같이 산신신앙과 성모신앙에 불교 특히 교종이 유입되면서 그 시대의 상황이 변화하는 과정.
그런 다음 선종이 들어와 교종과 선종이 합해지면서 여기에 다시 유교가 혼합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지리산에서 탄생한 성리학의 한 파인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와는 달리 '실천'을 중시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그들이 참여했던 사회활동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파생된 농민항쟁과 의병활동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이념 투쟁의 무대가 되어야만 했던 빨치산의 활동을 지리산을 통하여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거라는 생각입니다.
첫째와 둘째 얘기는 그동안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그윽이 생각해 보니 세 번째 얘기는 제가 별로 시도해 보지 않은 영역 같습니다.
이런 인문지리적인 지리산의 한 면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지리산 외곽을 쑤시고 다니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던 중 마침 최근 개발된 ‘지리산 둘레길’이 떠오릅니다.
혹시나 이 둘레길을 걸어보면 뭔가를 건지게 되지나 않을까요?
그 둘레길을 따라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혹시나 도포 자락을 날리며 힘겹게 산을 오르는 그들의 거친 숨소리나 너른 반석에 들러앉아 술잔을 건네며 시를 읊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가져보게 되는군요.
지리산 둘레길이라......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85km의 장거리 도보길.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環形)으로 연결하였습니다.
그것을 걷기 편하게 22구간으로 나누었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사단법인 '길’에서 상당한 자료들을 모아놓으셨군요.
아주 자세한 구간 설명과 함께 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일반적인 이런 자료와 제가 걸으며 보고 얻는 둘레길의 맛은 같을 리 없습니다.
물론 이는 단지 다른 분들이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는 시각과 저의 그것과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저의 경우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들을 도외시한 체 둘레길을 걷는다면 선뜻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제 시각으로 걸어보겠습니다.
사전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작업이란 다름 아닌 걷고 있던 지리산 구석구석을 이어 걷는 것입니다.
물론 내용을 가지고 이어 걸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지리 99’.
저에게는 신천지였습니다.
재야 역사지리학자, 인문지리학자, 실전답사가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의 집단입니다.
자료들을 살펴보던 중, 마침 제가 세웠던 계획에 딱 들어맞는 산행 코스가 있군요.
바로 북부 지리산의 법화산 구간을 걷는 루트입니다.
이 '지리 99'에서 그 구간과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 아니 놀랄만한 그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오늘 일정이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라는 예감입니다.
거기에 맞춰 오늘 진행할 구간을 정리하기로 합니다.
오늘의 메인 코스인 법화산은 그냥 법화산이 아니군요.
이 법화산은 중국의 법화산에서 따 온 것이고 법화산은 화산입니다.
강용하의 화산12곡華山十二曲을 보면 화산이 지금의 법화산 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강용하姜龍夏(1840년~1908) 선생은 "화산은 법화산이다. 법화산은 용유담에서 시작되어 함허대에서 끝나는데, 아래위로 엄천의 진산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 사이에 열두 굽이가 있고, 그것은 주부자(朱子)의 산북기행록과 일치하기에 그 운을 사용하여 흥치를 읊어 산중의 故事로 갖추어 둔다.華山法華山也始於龍游潭而終於涵虛臺爲嚴川下上之鎭而有十二曲與朱夫子山北記行錄暗合故因用其韻賦其事以備山中故事"고 하였던 것입니다.
강용하(姜龍夏 1840년~1908) 선생은 조선 말기 유학자로서 자는 덕일(德一) 호는 무산(武山) 초명은 강신영(姜愼永)입니다.
본관은 진양(晉陽). 엄천강변(嚴川江邊) 문정동에 살았다고 하니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오늘 하산 코스와도 일치합니다.
선생이 남긴 문집으로 '무산유집武山遺集'이 있습니다.
자,
그럼 오늘 얘기를 시작할까요.
광명역에서 5시 25분에 출발하는 첫 열차를 타고 내려갑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7. 12. 13. 수요일
2. 동행한 이 : 고남 님
3. 산행 구간 : 지리산 주변 (금대암 ~ 금대산 ~ 백운산 ~ 등구재 ~ 삼봉산 ~ 오도봉 ~ 오도재 ~ 법화산 ~ 도정마을)
4. 산행거리 : 17.92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금대암 입구 |
|
08:07 |
|
|
금 대 산 |
3.25 |
09:29 |
82 |
|
백 운 산 |
0.99 |
09:56 |
27 |
|
삼 봉 산 |
4.15 |
12:17 |
141 |
|
오 도 봉 |
1.41 |
13:24 |
67 |
15분 점심 |
오 도 재 |
2.21 |
14:19 |
55 |
23분 간식 |
법 화 산 |
1.77 |
15:31 |
72 |
|
고 정 동 |
4.14 |
17:30 |
119 |
|
계 |
17.92 km |
09:23 |
08:45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07:07
남원역으로 마중을 나온 고남 님의 차로 금대암을 향합니다.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전적비 하나가 보입니다.
눈여겨 봤던 곳입니다.
잠깐 차를 세우고 위 전적비를 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전적비에는 '의병장 석상룡 선생 전적비'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석상룡 선생은 1907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성삼재, 벽소령, 쑥밭재 전투 등을 통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린 선생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될 때까지 5년 간 지리산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생의 13대 조부가 석성石星이라는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이여송의 군대가 조선을 지원토록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결국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으로 처형되고 그의 자손들 또한 귀양을 가거나 처형을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맏아들 담潭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 하여 '수양군'에 봉하고 조선에서 살게 하였는데 이 석상룡 대장이 바로 그 자손이라는 겁니다.
한 번 충신 집안은 영원한 충신 집안인가 봅니다.
이 석상룡 장군의 묘는 덕천지맥 즉 지리 동부능선 상의 쑥밭재에 모셔져 있습니다.
다음 산행때에는 꼭 확인 작업을 해야겠습니다.
석상룡 대장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가 씌어져 있고.....
08:07
금대암 입구 60번 도로 옆에 차를 세워두고 오늘 구간을 시작합니다.
오늘 구간은 온전하게 경상남도 한양군 마천면입니다.
금대암으로 오르는 길은 시멘트 포장이 잘 되어 있습니다.
필경 금대암으로 진행하는 이 길은 옛길이 아니었을 겁니다.
60번 도로가 신작로로서 생기고 난 다음 생겼을 거라는 얘기죠.
모르긴 몰라도 예전에는 산내면이나 실상사에서 황리마을의 등구사를 거쳐 등구재 그리고 구양리 정도를 지나 오도재를 통해 함양으로 다녔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루트도 그와 같습니다.
"해공은 군자사로,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조태허와 유극기, 한백원은 용유담으로 유람을 떠났다. 나는 등구재를 넘어 곧장 (함양)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탁영의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등구사에서) 다음 날 새벽 일찍 나와 ~ 산허리를 타고 오른쪽으로 돌어 서북쪽으로 가니 바위 밑에 샘이 있었다. 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 세수도 하였다. 그곳을 벗어나 한 걸음에 금대암에 닿았다.
금대암으로 오르면서 잠깐 좌측을 조망합니다.
그렇군요.
오른쪽 끝 지리서부능선이 인월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끝에 덕두산과 바래봉이 보입니다.
바래봉 정상의 흰눈의 두께가 덕두산의 그것보다 더 한 거 같습니다.
그러니 덕두산보다는 바래봉이 운봉 사람들이 더 선호하는 심설산행 산책 코스라는 고남 님의 귀띔입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
임천 건너 마천면 군자리 마을에 '다랑이 논'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골짜기 끝에 삼정산1156.2m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 우측이 정성재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삼정산 능선 좌측으로 지리7암자' 중 하나인 문수암이 높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좌측으로 지리의 주릉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릉 우측으로 형제봉이 보이니 그 좌측의 좀 낮은 부분이 벽소령이군요.
우측으로 남원시 산내면.
그리고 그 뒤가 지리서부능선.
서부능선 우측으로 내려가면 인월.
서부 능선을 우측부터 보자면,
덕두산.
바로 좌측이 바래봉.
그 줄기는 좌측으로 부운치를 지나 세걸산으로 이어지는군요.
그 좌측으로 조금 더 움직이니 고리봉 그리고 만복대입니다.
지리 서부능선을 다 보게 되는군요.
백두대간의 일부도.....
음...
점점 더 만족스러워 집니다.
바로 앞은 삼각고지에서 흘러내려온 소위 지리북부능선의 마지막 자락.....
이 마지막 자락에 군자사가 있었죠?
그 앞쪽으로는 실상사 있고....
말을 타고 떠나, 도탄 하류를 건너 실상사(實相寺) 옛터를 찾았다. 절은 폐허가 된 지 1백 년이 지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었다. 오직 깨진 비석이 길 옆에 쓰러져 있고 철불이 석상(石床) 위에 우뚝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절은 고려조에 창건한 대가람으로, 그 뒤 병화에 소실되었습니다. 지난날 화려하게 단청했던 불전이 지금은 시골 사람들의 농경지가 되고 말았으니, 또한 산가의 불행입니다. 흥망성쇠는 석가여래라 하더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지요”라고 하였다. 나와 오춘간은 말을 세우고 서성이다가 길을 떠났다.
시내를 따라 5리쯤 가서 두모담(頭毛潭)에 닿았다. 일행은 모두 말안장을 풀고 쉬었다. 웅장한 두모담은 맑고 푸르러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바위 형세가 들쭉날쭉하여 그 기괴함을 형용할 수 없었다. 바위 가운데는 절구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것도 있고 가마솥처럼 움푹 팬 것도 있었다. 두모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절구 같은 바위도 있고, 수레바퀴가 들어갈 만큼 큰 가마솥같은 바위도 있었으니, 어쩌면 신령스런 용이 구슬을 감춘 굴이거나 옥녀가 머리를 감은 대야가 아닐까? 우리 세 사람은 두모담 가에 둘러앉아 실컷 구경하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몇 순배 돌리고서 일어났다.
날이 저물어 군자사로 들어갔다. 이 절은 두류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길이 넓고 평탄하여 힘들게 부여잡고 오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나는 지난날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할 때 몸소 소인곶(小人串)에 올랐었는데, 깊고 험한 데다 굽이굽이 돌면서 올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땀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군자는 친히 할 수 있고 소인은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두 노승이 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음산한 행랑채는 반쯤 무너졌고 불전은 적막하여 예전의 군자사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승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유람객들이 연이어 찾아오고 관청의 부역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중들이 어찌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절이 어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관청에서 시키는 부역을 헤아리며 그 까닭을 낱낱이 말하였다. 오춘간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 일이 괴로운가? 내가 수령에게 고하여 그대들의 부역을 줄여주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산 속에서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듯한 고통은 금수(禽獸)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참을 탄식한 후 법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원통전(圓通殿)에서 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 양대박(1543~1592) 두류산 기행록
08;32
안국사 갈림길을 지날즈음 산책 나온 주민과 인사를 나눕니다.
김해 사시는 분이 이곳에 전원주택을 마련하셨군요.
08:49
그러고는 바로 금대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납니다.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오늘 산행의 목적 중 하나는 가능하면 선인들이 지났던 흔적을 따라 걷는 것이므로 금대암을 답사하기 위해 우틀합니다.
08:51
안내판이 있는 주차장을 지나,
아담한 절집인 금대암으로 들어갑니다.
금대암에는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웅전과 칠성각 그리고,
예전에는 법당이었을 요사채 등 세 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금대암의 현판에 금대선원金臺禪院이라고 표기되어 있군요.
그런데 지도에는 금대산金台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金台庵으로 표기하는 줄 알았었는데 金臺庵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지도를 정정하여야 하겠군요.
법당 중창할 때의 시주하신 분의 각자刻字를 보고,
금대산으로 오릅니다.
이정표를 따라 계단을 올라,
3층 석탑 뒤로 난 좁은 길을 따릅니다.
우측으로 지리북부능선과 중앙의 지리 주릉을 보고....
덕전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벽소령으로 오를 수 있는 음정마을로 들어가게 되고,
좌틀을 하면 강청리로 들어가 백무동으로 가게 되겠죠.
북부지리에서 천왕봉으로 제일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곳.
바로 저 백무동이죠.
된비알에 바위가 자주 눈에 띕니다.
09:16
고도를 상당히 높였습니다.
우측 아래로 흐르는 물이 임천이고 그 옆의 길이 60번 도로입니다.
중앙 맨 뒤로 웅석봉이 고개를 듭니다.
그 앞으로 왕산925.6m이 자리하고 있고....
왕산은 가야국의 마지막 앙 구형왕과 관련된 산이고.....
덕천지맥 상의 왕등재에서 이어갈 수 있는 곳이죠.
그 우측으로 와불산臥佛山1213.9m.
저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을 관측하는 것도 오늘의 답사 포인트입니다.
가운데 의탄교를 지나 추성리로 들어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 유명한 우리나라 최고의 계곡인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루트죠.
그 뒤 우측으로 차례대로 두류봉, 하봉, 중봉, 천왕봉 그리고 제석봉이 보이고......
광주 산꾼.
김중오 님이십니다.
여전하시죠?
하여간 이분도 안 다니시는 데가 없습니다.
좌측 창암산은 나무에 가렸고.....
우측 북부능선을 한 번 더 보고.....
09:21
지도 #1의 '다' 삼거리를 지납니다.
석문石門을 지나,
09:29
바로 금대산으로 오릅니다.
진행방향으로 드디어 삼봉산1186.7m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뒤 우측으로 오도봉1038.5m을 지나 919.4봉을 지나 오도재로 떨어지는 능선의 흐름이 명확합니다.
오도하니까 고등학교때 국사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떠오르는군요.
견성오도, 불립문자.....
불교에서 득도(得道),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문자 그대로 일체만물의 근본이 무엇임을 보고 알았다는 뜻이다. 견성에는 반드시 법열(法悅), 곧 깨달음으로 인한 황홀한 기쁨이 수반 된다고 한다. 주머니가 비어도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는 기쁨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때를 가장 위험한 때로 간주한다. 겨우 입문의 단계에 진입했을 뿐임에도 마치 도를 완성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도 이때요, 부처님의 자비를 말하면서 가장 독선적일 때도 바로 이때다. 따라서 견성은 반드시 그 다음 단계인 오도(悟道)의 경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오도는 이 세상 어디에 있건 그곳에 충만한 불성과 불법에 힘입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가는 단계다. 이 경지에 이르면 구태여 심산유곡 법당을 찾아 세상을 도피할 이유가 없다. 이 경지에서는 남정네가 뒷산에서 장작을 패고 아낙네가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이 모두 구도의 행위가 된다. 이전까지는 자신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길었지만, 오도의 경지에서는 똑같은 일을 해도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나누어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부터 참된 불자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
그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중앙의 오도재를 지나 법화산 삼거리봉이 나옵니다.
법화산은 저 삼거리봉에서 약 1kn를 더 진행하여야 하죠.
그러니 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는 능선 즉 휴천면과 마천면의 면계를 따라 내려가면 바로 용유담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삼거리봉 우측 아래가 마천면 구양리, 창원리인데 여기도 다랑이논이 즐비하군요.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보는 거 같습니다.
우측아래로 임천이 흐르고 ...
중앙의 와불산은 왜 와불산인지 여기서도 도저히 위치가 잡히질 않는군요.
덕분에 와불산의 함양독바위 그리고 그 우측 능선의 진주독바위만 실컷 감상합니다.
추성리 칠선계곡 들어가는 길.
벽송사가 어딘가요?
우측 창암산924.9m.
창암산 뒤로 지리 주릉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고남 님과 함께 하나하나 짚어 봅니다.
이번에는 덕평봉 부근에서 북부능선으로....
북부능선을 넘어,
이번에는 지리 서부능선으로...
보십시오!
한 눈에 지리를 다 볼 수 있는 곳.
바로 이곳이죠.
삼봉산에 가 보면 어떨까요?
그럼 삼봉산으로 떠납니다.
금대산에서 백운산으로 가는 길은 음지라 눈이 많이 쌓여 있군요.
여기까지는 그냥 내려가지만 아무래도 아이젠과 스패츠를 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09:56
일단 백운산으로 오릅니다.
능선은 여기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을 만나게 됩니다.
백운산에는 정상석과,
이정표,
그리고 정상석 뒤에 숨어 있는 4등급 삼각점(운봉 427)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능선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도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눈때문에 속도가 느려집니다.
지도 #2
10:22
지도 #2의 '라'의 곳을 지납니다.
이어 지나는 668.4봉은 봉우리 같지도 않군요.
그저 밋밋합니다.
10:28
그러고는 등구재登龜岾입니다.
점필재는 물론 탁영 등 많은 선인들이 기록을 남기고 넘었던 고개입니다.
여기서 둘레길을 걷는 두 분과 만납니다.
뭐가 바쁜지 그냥 인사만 남기고 황급하게 자리를 뜨시는군요.
등구재에 대한 안내글을 보고,
고개를 가로 질러 삼봉산으로 향합니다.
금대암에서 온 거리만큼 가야 하는군요.
우측 구양리 마을도 다랑이논.....
우측으로 길이 반반한 것이 예전에 다녔던 길이라는 인상을 갖습니다.
10:40
790.2봉을 지나는데 좌측으로 조망이 트입니다.
거기서 만복대를 당겨봅니다.
11:10
926.5봉을 지나고,
11:35
932.2봉을 지나 지도 #2의 '마'봉을 지납니다.
11:48
1043.4봉은 사면치기로 진행하고,
지도 #3
크게 좌틀하면서 고도를 높입니다.
12:17
삼봉산입니다.
여기서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을 만나게 되는군요.
중요한 점은 이곳에서 백두대간의 봉화산 옆에서 가지를 친 임천지맥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잠시 임천지맥을 따라 걷게 되겠군요.
그러면서 여기서 전라북도 남원시를 버리고 함양군 함양읍을 만나 함양읍과 마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임천지맥을 볼까요?
임천지맥은 신산경표의 연비지맥에 대응한 대한산경표의 산줄기 이름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신산경표는 산경 위주로 대한산경표는 수계 위주로 산줄기를그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도 #2 임천지맥
신산경표에서 가져온 연비지맥 개념도입니다.
연비지맥이 백두대간 봉화산 옆에서 가지를 쳐 옥잠봉 ~ 비조재 ~ 연비산 ~ 팔량재 ~ 투구봉 ~ 삼봉산 ~ 오도봉 ~ 화장산을 지나 임천과 남강이 만나는 유림면 장항리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8.2km의 지맥이 된다는 점은 신산경표나 대한 산경표 공히 같습니다.
다만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수계를 중시하는 대한산경표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줄기의 이름을 따서 이 경우 임천지맥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대한산경표의 취지에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삼봉산의 이 3등급삼각점은 폐쇄된 것인데 이렇게 어엿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군요.
국토지리정보원 기준점 조서에도 안 나오는 삼각점입니다.
분명 지도에는 삼각점 표시가 안 되어 있는데 실물은 있어 조금 당황했습니다.
산림청에서 자세하고 친절하게 안내판을 세워 주셨습니다.
오랜만에 인물 사진 한 번 찍어봤습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기로 합니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합니다.
사계 청소가 안 되어있어 시계가 좀 불량합니다.
그래도 좀 볼까요.
좌측에 백두대간 줄기가 보이고 우선 보이는 게 봉화산919.7m이군요.
그리고 그 옆으로 백운산1278.9m.
그 뒤로 덕유산이 명백한데 사진으로는 영.......
우측으로 대봉산이나 황석산 등이 나무에 가려 확인하지 못했군요.
아쉽습니다.
중앙 뒤로는 황강지맥의 수도산과 두리봉 그리고 가야산이 명백합니다.
그 앞으로 흐르는 산줄기가 남강지맥.
우선 우측으로는 황매산1113m이 육중한 모습으로 보이는군요.
점필재가 천왕봉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황산'이라고 부른 산이 아마 저 황매산일 것입니다.
대동여지도에도 황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다만 점필재는 皇이라고 표기한 반면 대동여지도에는 黃으로 표기되어있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그리고 법화산.
그 뒤로 왕산.
그 우측으로 웅석봉.
와불산과 좌측부터 하, 중, 천왕봉 등 지리의 주봉들.
그런데 황강지맥이니 남강지맥이니 하는 산줄기 이름이 낯설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진양기맥, 수도지맥하면 귀에 확 들어오시나요?
조금 전 이야기한 것과 관련입니다.
즉 진양기맥이니 수도지맥이니 하는 이름들은 박성태 선생님의 신산경표에 나오는 산줄기 이름들입니다.
반면 황강지맥이니 남강지맥이니 하는 산줄기 이름들은 '산으로' 박흥섭 님이나 제가 주창하고 있는 산줄기 체계 즉 대한산경표에 나오는 이름들이고....
하나하나 살펴보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워밍업으로 한강지맥의 여러 줄기들을 보기로 합니다.
좀 내용이 길어서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신산경표에서는 한강기맥, 자하 신경수 선생님은 한강정맥으로 부르고 있는 줄기입니다.
신산경표에서 영월(기)지맥(이하 '영월지맥'이라고 표기함)이라고 부르고 있는 섬강지맥을 땜빵하는 날입니다.
섬강지맥 졸업 구간이기도 하죠.
섬강지맥이라고 하니까 낯설게 들리기도 할 겁니다.
사실 제가 신산경표에서 규정하고 있는 산줄기 체계 가령 지맥의 분류 기준, 방식, 이름, 근거 등에 관하여 의심을 품게된 단초를 제공해 준 산줄기가 바로 이 영월지맥입니다.
영월지맥이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에는 영춘지맥이라고 불렸다고 하죠?
저는 그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언제는 영춘지맥이었다가 새롭게 영월지맥이 되었다?
영춘이라는 이름은 영월과 춘천이라는 지역의 이니셜을 딴 이름이라는 걸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이게 전혀 별개의 이름인 가령 '갑을지맥'이었다가 영월지맥으로 바뀌었으면 좀 내용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즉 "음, 이게 새로운 체제 혹은 분류기준에 의해 변경된 것이로구만."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면 더 이상의 다른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춘지맥이 영월지맥 + 춘천지맥이라는 내용을 보고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더군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얘깁니다.
참고도 #1 영춘지맥의 중복구간
영춘지맥이라고 명명한다면 소위 삼계봉1104.6m ~ 청량봉920.3m까지의 한강기맥의 일부 구간이 이 지맥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상당한 모순입니다.
물론 이들 두 지맥이 한강기맥에서 분기되는 지점 그러니까 삼계봉1104.6m ~ 청량봉1054m까지의 거리는 약 11.2km정도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이 두 지맥을 이어갈 때에는 하뱃재 ~ 청량봉 ~ 삼계봉 ~ 태기산 주차장 정도로 진행을 하면 그 이후 구간부터는 접속 구간 없이 연속하여 진행할 수 있는 편리성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진행하는 이들이 판단할 문제이지 세워놓은 원칙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아무런 까닭도 없어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신산경표에 이르러 영춘지맥이라는 이름이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으로 변경된 것은 아주 타당하고 당연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삼계봉이나 청량봉 등 이 두 봉우리의 이름도 국가에서 공인한 이름이 아닌 이 두 지맥을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편의에 따라 작명된 산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맥岐脈이니 지맥枝脈이니 하는 용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 개념은 우리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이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10년 육당 최남선은 일제로부터 우리나라 고전을 지키고자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산경표'를 영인본으로 발간합니다.
이 영인본 '산경표'를 1980년 이우형 선생이 인사동 고서적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앞서 1903년 일본인 고토 분지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산줄기 개념인 '산맥山脈'을 마치 자신이 새롭게 명명한 이름인양 '조선 산맥론'이라는 자신의 논문에 버젓이 도용盜用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일제 통감부, 총독부에 의해 그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들이 분해되어 지리교과서에 실리게 되었고 그것은 정당한 산줄기 체계가 되어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것을 이우형 선생이 산경표를 발견하면서 일제가 우리 산줄기 체계를 곡해曲解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산맥 즉 태백산맥이 맞느냐 산줄기 즉 백두대간이 맞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논쟁을 '제 1차 산맥논쟁'으로 부릅니다.
- 2005년 국토연구원 김영표 박사에 의해 주도된 제2차 산맥논쟁은 이 내용과 무관하므로 거론하지 않기로 함
이 '제1차 산맥논쟁'에 힘입어 백두대간을 답사하는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허상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걸을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실상인 백두대간을 걷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뒤로 미루겠지만 이우형, 박용수 같은 이들에 의해 산경표가 해제가 되고 그리고 조석필 같은 이에 의해 산경표의 1대간 9정맥이 정착되기에 이르릅니다.
물론 여기에는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의 학술지 엑셀시오와 1990년 월간지 '사람과 산'에 특집으로 실린 관련 내용들이 한 몫을 거들게 됩니다.
이어 조석필 선생의 '산경표를 위하여'와 그 책의 개정증보판 '태백산맥은 없다'가 산맥을 차별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게 됩니다.
즉 조석필 선생은 이 '태백산맥은 없다'에 기맥이니 지맥이니 하는 개념을 제안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생은 1대간 9정맥에 한정되어 있는 산줄기의 개념을 기맥, 지맥까지 확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은 간幹 즉 기본 산줄기이니 더 건드릴 게 없고 맥脈은 가지 줄기이니 얼마든지 개념 확장이 가능하다는 취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줄기들 중에는 정맥급에 해당하는 즉 10대강 혹은 10대강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지고는 있는 줄기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산경표에 이미 13정맥을 한정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맥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줄기에 정맥 대신 기맥岐脈이라는 계급을 하나 도입하여 부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한강기맥, 영산북기맥 그리고 땅끝기맥을 제시합니다.
여기까지가 조석필 선생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톤을 이어 받은 이가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선생입니다.
선생은 2004년 발간한 신산경표에서 당연히 기맥 개념을 도입합니다.
나아가 기맥에 이어 지맥으로 산줄기의 영역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2010년 개정판에서는 북한의 산줄기까지 포함시키면서 남한의 경우 1대간 7정맥 6기맥 157지맥-최근 5지맥을 추가하여 162개 지맥이 됨-으로 산줄기를 정리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거론이 되고 있는 지맥枝脈은 산맥이나 일반 지리학 혹은 지형학에서 얘기하는 산맥의 가지줄기인 지맥支脈과는 다릅니다.
즉 지맥枝脈은 그 이름과 붙여져 고유명사로 활용되고 있으며 반면 지맥支脈은 그저 보통명사의 역할에 그친다는 것이죠.
어쨌든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의 발간을 저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산줄기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칭합니다.
한편 선생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즉 남한의 한북정맥, 낙동정맥 등 9개의 정맥을 7개의 정맥으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 7개의 정맥 해설에 관하여는 월간 산 2014. 5월호 ~ 같은 해 12월호에 게재된 졸고拙稿 '남한의 7정맥 가이드' 참조-
산경표의 대원칙인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즉 정맥은 10대강을 가르는 산줄기이므로 당연히 그 10대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야하고 거기서 맥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산경표의 호서정맥과 금강정맥이 그 결과물입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신산경표의 호서정맥과 한남정맥 그리고 산경표 상의 한남금북정맥, 금북정맥, 한남정맥을 그 예로 보기로 합니다.
참고도 #2 신산경표의 호서정맥, 한남정맥 산경도
위 참고도 #2의 빨간선이 한남금북정맥이고 파란선이 한남정맥 그리고 검은선 + 녹색선이 금북정맥입니다.
산경표를 근거로 그은 그림입니다.
살펴보면 겸침줄기인 빨간색의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에서 분기하여 금강과 한강의 지류를 발원시킵니다.
그러니 이 조건은 정맥의 조건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이 정맥이 맥을 다하는 곳은 이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이 아니라 경기도 안성에 소재한 칠장산 부근입니다.
모순입니다.
신산경표는 이 점에 주목합니다.
그러고는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댑니다.
그 끝을 바다와 강의 만나는 합수점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남정맥의 경우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으로 진행을 하니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북정맥의 경우에는 그 끝이 합수점이 아닌 태안의 안흥진으로 가잖습니까.
금북.
말 그대로 금강 북쪽의 울타리가 되어야 하는 산줄기가 금강과 바다의 합수점이 아닌 안흥진으로 가다니!
선생은 백월산에서 그 줄기를 안흥진이 아닌 장항쪽으로 남진南進시킵니다.
그렇게해서 만든 산줄기가 검은선 + 노란선입니다.
그 줄기가 올바로 진행하는 금강과 관련된 정맥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겹침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의 처리가 문제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를 한남이나 금북에 소속시켜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 잣대로 '길이' 즉 '도상 거리'를 내세웁니다.
승자독식제勝者獨食制가 여기에 도입됩니다.
금북에 해당하는 그 줄기의 도상 거리는 219.4km이고 한남정맥은 177.4km.
금북의 줄기가 한남정맥보다 세력이 더 큽니다.
따라서 겹침줄기인 옛 한남금북정맥의 158.8km는 금북줄기의 몫이 됩니다.
선생은 이 점에 관하여 "겹침줄기가 있는 경우에는 그 줄기의 끝이 반도를 향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위등급의 강을 따르는 줄기를 본줄기로 하였고, 동일등급에서는 긴산줄기를 본줄기로 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신산경표 32쪽).
그래서 생성된 줄기가 378.2km의 빨간선 + 검은선 + 노란선입니다.
새로 줄기를 만들었으니 이름을 붙여야죠.
당연히 금강이북을 지키고 있는 울타리이니 금북정맥이라고 명명해야 하나, 이 이름은 원산경표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박성태선생은 호남정맥이 호남이라는 지방 이름을 붙인 것에 착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충청남도 지방 부근이 '호서'라는 지방이름이 있으니 여기서 '호서'를 따 호서정맥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렇게 한남금북정맥은 없어지고 호서정맥과 한남정맥 등 두 개의 정맥으로 정리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겹침줄기인 호남금남정맥도 같은 방법으로 정리되어 호남정맥과 금강정맥으로 정리되고....
이렇게 남한의 1대간 9정맥이 1대간 7정맥으로 바뀌게 됩니다.
적어도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에서는 말입니다.
이럴 경우 한 가지 명제를 바로 인식하여야 합니다.
"정맥은 대간과 또 다른 정맥에서 분기한 산줄기"라는 개념입니다.
원산경표에서도 "정맥은 대간에서 분기한 산줄기"여야 한다는 개념은 겹침 줄기 문제때문에 극복이 될 수 없었는데 이 점은 신산경표에 들어서도 마찬가지 결과입니다.
여기에 정리하고 남은 녹색의 옛 금북정맥 자투리가 문제됩니다.
박성태 선생은 "이 줄기(129.4km)가 그래도 예전에는 정맥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격을 존중하여 기맥"이라는 계급을 부여하여 금북기맥이라 이름합니다.
기맥을 성골聖骨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골眞骨 정도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맥岐脈은 ① 정맥급에 속할 정도의 세력을 가졌으나 10대강을 구획하지 못한 줄기 가령 영산기맥, ②과거에 정맥이었으나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의해 구획을 하다보니 그 계급을 잃어버린 줄기 가령 금북기맥 등으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신산경표가 산줄기의 영역을 확장하여 이를 지도로 만들고 책으로 정리하였다는 데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이 7정맥이 산꾼들이나 민간지리학자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더 큰 이유는 중요하고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충실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즉 선생은 산경표의 산자분수령의 정신에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용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9정맥을 7정맥으로 바꾸고 나아가 그 정맥의 끝을 10대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으로 돌리는 어쩌면 혁명에 가까운 결단이었습니다.
산자분수령이 무엇입니까?
물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원래의 의미는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라는 뜻일 것이고 이게 어법에도 맞습니다.
즉 自는' ~로 부터'라는 조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분수령은 낮은 산이나 고개를 뜻하는 고유명사일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대동여지도 발문跋文에 등장하는 말이니 산경표와도 그리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 산경표에 들어오게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즉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는 관용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곧 산줄기는 분수계가 된다는 것이죠.
저는 이를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제1원칙'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다시 신산경표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선생이 위와 같이 9정맥을 7정맥으로 만든 주된 이유는?
예. 그렇습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에 충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의 산줄기는 그 기본 줄기(가령 백두대간)에서 다른 가지 줄기가 갈라져 나올 때(가령 호서정맥) 그 두 줄기 사이에서는 반드시 물줄기 하나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지 줄기(가령 호서정맥)는 그 사이에서 발원한 물(가령 금강)이 더 큰 물(가령 서해바다)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제2원칙'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제2원칙'은 정맥뿐만 아니라 그 계급 이하의 줄기에도 공히 적용된다고 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원칙이 중요하고, 이 원칙은 기맥이나 지맥을 논할 때 그 중요도가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내륙에서 소멸하는 산줄기에 적용을 해보면 위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하나의 산줄기 가령 한강기맥에서 분기하는 다른 산줄기 가령 영월지맥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 자세히 보기로 하겠습니다.
한편 박성태 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즉 정맥과 기맥 이하의 산줄기에 눈을 돌립니다.
그러고는 전국의 산줄기를 지도에 그린 다음 백두대간. 정맥, 기맥에서 가지를 쳐 나간 산줄기들을 추려 낸 다음 그 중에서 30km급 이상의 줄기를 다시 추려냅니다.
'30km'라는기준을 세운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정적이어서 가장 선호하는 '3'이라는 숫자에 착안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어쨌든 30km 이상의 산줄기들을 추려 지맥의 범주에 집어 넣고 거기에 이름을 붙입니다.
작명법은 ①일단은 그 지맥에서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을 사용하여 이름을 붙입니다.
대부분의 지맥이 이에 해당합니다.
②그리고 산 높이에 불구하고 유명한 산이 있을 경우 그 산 이름을 붙이는데 여기에는 병풍지맥이 해당됩니다.
③또한 특정한 곳으로 가는 경우 그 지방의 이름 등을 고려해 이름을 붙이기로 한 것입니다.
가령 영월지맥이나 춘천지맥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하여 157지맥(최근에 5지맥을 추가하여 162지맥으로 보고 있음)을 만들어 신산경표에 일일이 그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대단한 작업이었습니다.
지리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보는 지는 몰라도 산꾼들의 산행 방법에 대단한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기존에 능선 종주산행의 대표적인 것이 태백산맥 대종주, 화대종주, 서북능선 종주 등이 대단한 꾼들 사이에서만 진행되던 것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독점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백두대간이 알려지고 이어서 정맥, 기맥, 지맥 등이 알려지면서 종주 산행은 일반화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즉 이제는 백두대간, 1대간 9정맥 종주 등에 이어 5기맥, 157(162)지맥 종주에 도전하는 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아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터넷의 보급은 이를 더 거들고 오히려 촉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산악회도 우후죽순 늘어나고 대간, 정맥 나아가 지맥만을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산악회와 모임들이 늘어나는 것도 어찌보면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산경표의 효과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산자분수령의 토대하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산꾼들은 마치 "절대로 물을 건너지 않기로 맹세를 한 사람들의 집단" 같았습니다.
한편에서는 신산경표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 의해 신산경표의 모순점을 하나둘 씩 검증을 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작업의 일환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한결같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제2원칙'을 준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루하시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진행하는 영월지맥은 한강기맥에서 분기하는 산줄기입니다.
영춘지맥이라는 이름은 절대적으로 안 됨은 이미 말씀드렸고...
간단하게 영월지맥을 봅니다.
참고도 #3 신산경표 상 영월지맥
인터넷을 찾아보면 대체로 영월지맥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강기맥 상의 삼계봉(1,065m)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태기산(1,261m)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풍취산(699m), 매화산(1,084m), 치악산 비로봉(1,288m), 향로봉(1,043m), 남대봉(1,182m)까지 달리다가 다시 남대봉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 감악산(954m), 용두산(871m), 삼태산(876m), 영월의 태화산(1,027m)을 지나 남한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146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문제는 한 사람이 이렇게 쓰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걸 무슨 신줏단지나 되는양 무조건 퍼 나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그 맥을 다하는..."이라고 만 말할 뿐 합수점이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다시 그 영월지맥의 진행상황을 살펴볼까요?
영월지맥은 삼계봉을 출발하여 태기산을 넘어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처음에는 백덕지맥을 낳고 남대봉에서는 백운지맥을 낳습니다.
그 백운지맥은 천등지맥과 봉화지맥을 낳는군요.
계속 진행하는 영월지맥은 다시 갑산지맥과 금수지맥을 낳고는 태화산이 있는 영월에서 남한강으로 잠깁니다.
구약의 창세기편을 보는 듯하군요.
어쨌든 이 지맥은 지맥의 끝인 영월이라는 지방 이름을 따서 영월지맥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합수점이 아닌 그저 남한강으로 들어간 것만 나옵니다.
지도를 보면 오히려 평창강과 남한강의 합수점으로 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참고도 #4 주왕지맥, 백덕지맥 그리고 영월지맥 지도
하지만 영월지맥이 만나는 평창강의 역할은 이 영월지맥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물줄기입니다.
위 참고도 #4에서 보듯 평창강은 오히려 주왕지맥과 관련이 있는 물줄기입니다.
보시다시피 주왕지맥은 한강기맥에서 분기하는 줄기이고 평창강은 이때 한강기맥과 주왕지맥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잖습니까?
즉 평창강은 이 주왕지맥만 책임지면 되고 또 그게 맞습니다.
이른바 '산자분수령의 제2원칙'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왕지맥은 계방산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분기하여 평창강과 자신보다 상위 개념의 물줄기인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줄기라는 얘기입니다.
위 참고도 #4의 주왕지맥지도를 보면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줄기가 영월지맥입니다.
이 영월지맥도 위 주왕지맥과 같은 경로로 같은 방식이 공히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줄기는 가장 유명한 산인 치악산의 이름을 제치고 영월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산경표에서는 '특정한 곳으로 가는 줄기'라고 해설을 달았습니다.
특정한 곳이라...
추측해보면 그저 산경을 위주로 파악했다는 게 제1감第1感입니다.
오히려 치악지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고도 #5 섬강
영월지맥을 분기 부분을 좀 더 확대하여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산경표의 정신에 입각하여 백지도 위에 그림을 그려봅니다.
이 줄기가 삼계봉에서 가지를 칠 때 이 갈라진 줄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있습니다.
바로 섬강입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나오는 바로 그 섬강입니다.
平丘驛(평구역) 말을 가라 黑水(흑슈)로 도라드니,
蟾江(셤강)은 어듸메오, 雉岳(티악)이 여긔로다.
그렇다면 이 영월지맥이 가야 할 곳은?
이 영월지맥이 맥을 다하는 곳이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이미 눈치채셨을 겁니다.
바로 섬강과 이 섬강보다 상위 계급의 강인 남한강이 만나는 곳.
그 합수점에서 이 영월지맥의 맥이 끝나야 합니다.
아까 주왕지맥도 그랬죠?
평창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맥을 다했으니까....
산자분수령의 제2원칙에 따라 이 줄기는 이 섬강과 섬강보다 한 끗발 높은 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일 터!
그 합수점만 찾으면 됩니다.
참고도 #6 섬강과 남한강의 합수점
자주색 - 겹침 줄기, 하늘색 - 백운지맥, 연고동색 - 신산경표 상 영월지맥
위 지도의 연두색으로 싸인 부분.
거기가 섬강과 남한강의 합수점입니다.
따라서 이 줄기가 맥을 다하는 곳은 바로 그 줄기여야 한다는 것이죠.
이게 산경표의 기본 원리에 충실한 이론입니다.
후에 이야기할 대한산경표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고요.
줄기를 찾아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합수점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이른바 수체계이론樹體系理論이죠.
신경수 선생이 주창한 이론이기도 하죠.
우리나라 산줄기의 체계를 나무와 같다고 보는 겁니다.
즉 뿌리는 백두산이고 줄기는 백두대간 그리고 큰 가지들은 정맥 작은 가지들은 지맥이라고 보는.....
그러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산경표의 백운지맥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면 치악산의 남대봉에서는 본 궤도로 접어들게 됩니다.
즉 남대봉 ~ 1104.6봉(이른바 삼계봉)에서는 신산경표의 영월지맥이 그대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지맥은 남대봉(79.8km)에서 좌틀하여 감악산 ~ 가창산 ~ 태화산으로 진행을 하여 그냥 남한강(54.5km)으로 들어가는 그 맥은 '산자분수령의 제2원칙'에 충실하지 못한 진행입니다.
주왕지맥에서는 분명 합수점으로 갔는데 영월지맥에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일관성의 결여입니다.
생각건대 신산경표는 산경 즉 산줄기가 긴 쪽으로 무조건 진행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히려 치악산 남대봉에서 우틀하여 신산경표 상의 백운지맥(46.9km)을 따라 진행을 하여 섬강과 남한강의 함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게 산경표의 기본 정신에 맞다고 할 것입니다.
신산경표에서 그렇게 산자분수령을 외쳐 9정맥을 7정맥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정작 지맥에 와서는 산자분수령이 아니라 긴 산줄기 위주로 편제를 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산경표파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자분수령에 충실하다고 할 '대한산경표'에서는 이 올바른 줄기를 이름하여 섬강지맥이라고 부릅니다.
어차피 수계水系를 따라야 올바른 산줄기가 나오는 만큼 그 강江 혹은 천川의 이름을 그대로 붙이자는 것입니다.
그게 오히려 그 강이나 천에게도 책임감을 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니 일견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대한산경표의 취지를 지지합니다.
이럴 경우 주행거리는 영월지맥이 134.3km, 섬강지맥이 126.7km로 섬강지맥이 조금 짧습니다.
역시 신산경표는 산경위주로, 대한산경표는 수계 위주로 지맥이 그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월지맥의 나머지 줄기의 처리도 문제가 됩니다.
참고도 #7 제천지맥
지도를 보면 이 '섬강지맥'과 기존의 영월지맥 사이에서 발원하는 제천천이 남한강과 만나는 곳으로 진행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남대봉 ~감악산 ~석기암 ~ 가창산(38.4km + 0.9km) ~ 갑산~대덕산 ~부산(64.2km)에서 남한강과의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85.5km의 줄기로 확정되게 됩니다.
곧 영월지맥의 자투리 구간과 기존의 갑산지맥이 여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섬강지맥이 섬강과 남한강의 합수점을 향하여 진행하다 태기산을 조금 더 내려간 지점에서 좌측으로 줄기를 하나 내고 그 줄기와의 사이에서 주천강을 발원시킵니다.
주천강도 책임을 느끼는 만큼 임무를 부여하여 주기로 합니다.
그 주천강은 이 섬강지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를 싸고 진행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강 즉 평창강을 만나는 합수점에서 이 산줄기를 소멸시킵니다.
참고도 #8 주천지맥
즉 이 산줄기는 태기산에서 1.3km 진행한 분기점에서 좌측으로 분기하여 청태산1194.2m, 백덕산1350.1m등을 거쳐 주천강과 평창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고 도상거리 약 56.1km의 산줄기가 됩니다.
신산경표는 이 산줄기를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덕산의 이름을 따서 백덕지맥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 백덕지맥은 '산자분수령의 제2원칙'에 충실합니다.
영월지맥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입니다.
영월지맥은 백덕지맥이나 주왕지맥과 다른 '특별산줄기'입니까?
그렇지 않잖습니까.
그럼 다른 줄기를 더 보겠습니다.
그 윗줄기인 주왕지맥은 이미 살펴봤고 섬강 다음의 흑천을 봅니다.
참고도 #9 흑천지맥
같은 원리로 한강기맥 상의 금물산을 떠난 줄기인 신산경표 상의 성지지맥은 한강기맥에서 가지를 칠 때 흑천을 발원시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흑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면 간단해집니다.
즉 성지봉 ~ 덕갈고개 ~ 삼각산을 지나 우틀하여 수리봉 ~ 한치고개 ~ 매봉산 ~ 주읍산 ~개군산을 지나 흑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이 잠기게 되고 이게 올바른 주행입니다.
그럴 경우 이 지맥의 거리는 성지지맥(녹색선)의 55.9km보다 다소 짧은 49.3km의 줄기(참고도 #7의 진분홍색)가 됩니다.
역시 산산경표는 긴 산줄기 즉 산경을 따랐습니다.
산자분수령을 왜곡했다기 보다는 충실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대한산경표에서는 수계水系를 근본으로 산줄기를 그었기 때문에 그 산줄기의 이름을 강 혹은 천의 이름을 따 작명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섬강지맥이니 흑천지맥 그리고 평창지맥이니 주천지맥 등입니다.
다소 낯설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혼란스러우시지요.
뭐 그렇다고 해서 산줄기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박성태 선생의 큰 업적이 반감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들은 다 박성태선생의 신산경표를 근간으로 해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대한산경표의 견해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은 선생께서 하신 작업의 모조품 혹은 이른바 짝퉁입니다.
따라서 이런 박성태 선생의 업적이나 명예에 조금이라도 누累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위와 같은 내용들을 박성태 선생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선생의 폄훼貶毁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누구라도 제 글로서 충분히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 2017. 1. 8. 일요일 진행 -
자, 이 지식을 바탕으로 남강지맥을 볼까요?
신산경표에서는 이 줄기를 진양기맥이라 명명했습니다.
마침 제가 새마포 산악회 홈페이지에 이 진양기맥에 대한 개요를 적어놓은 게 있군요.
2017. 1. 19. 산행기입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진양기맥은 서부 경남지역인 함양, 산청과 거창, 합천, 의령, 진주 등 6개 시,군을 지나며 서쪽과 남쪽의 남강과 동쪽의 거창 위천, 황강, 낙동강을 차례로 가르며 지나는 분수령이다.
진양기맥은 원래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맥길로만 따져 보자면 함양, 산청과 거창, 합천을 가르며 동남향 또는 남향으로 이어져 내려 와 의령 한우산(寒雨山: 766m)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매봉산(597m), 우봉산(372m), 옥녀봉(341m)을 거쳐 남강과 낙동강이 합수하는 곳에서 맥을 다하는 것이 정석이라 하겠지만, 한우산에서 남향 또는 남서향으로 이어져 진양호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가 길이도 약 20km 더 길 뿐만 아니라 산세도 수려하여 대부분의 기맥 탐방객들이 이 길을 따름으로써 진양기맥으로 굳어졌고, 대신 한우산에서 동향하는 맥길 31km는 우봉산에서 그 이름을 따와 우봉지맥으로 구분짓고 있다.
이 글을 '새마포 산악회'의 운영자가 직접 쓰신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에서 제법 그럴싸하게 씌어진 글을 퍼 오신 걸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다른 곳도 아닌 새마포에서 게재한 글이니 상당히 신뢰감이 가고 내용도 괜찮을 것이라 보입니다.
살펴보죠.
그런데 1행을 보면 "남강과 위천...등을 가르며 지나가는 분수령"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듭니다.
하긴 뭐 그런 얘기는 지엽적인 문제이니 통과하고....
한편 3행을 보면 "한우산(寒雨山: 766m)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매봉산(597m), 우봉산(372m), 옥녀봉(341m)을 거쳐 남강과 낙동강이 합수하는 곳에서 맥을 다하는 것이 정석"을 봅니다.
이 내용은 글쓴이가 올바른 맥의 진행은 남강과 낙동강의 합수점이고 이게 올바른 산자분수령식 해석이라는 걸 인지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산줄기가 길이도 약 20km 더 길 뿐만 아니라 산세도 수려하여 대부분의 기맥 탐방객들이 이 길을 따름으로써 진양기맥으로 굳어졌고'라는 부분에서 아쉬움과 약한 필체를 느끼게끔 됩니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라는 말을 상기시키고 싶어서였을까요.
그런 정도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분명히 신산경표 아니 박성태 선생님 같은 거인巨人이 진양기맥의 진행을 그렇게 그으셨다면 필경 자신으로서는 잘 알 수 가 없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을 겁니다.
두려움이죠.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이론에 대한 불신일 수도 일수도 있을 것이겠고.....
저는 그렇습니다.
위 영월지맥 등 한강지(기)맥에서 분기한 줄기들에서 보았듯이 이 진양기맥에 이르러서도 신산경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강한 의심'으로 변화하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위에서 극찬했듯이 신산경표는 산꾼들에게는 로망이나 혁명 정도의 수준을 넘어선 책입니다.
저는 아예 신화神話로 얘기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제가 '월간 산'에 신산경표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남한 7정맥'에 대한 안내글을 7개월간 연재했던 것이고.....
정리하겠습니다.
산줄기는 긴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즉 산경山經의 세력을 따라 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기자면 백두대간이라는 기본적인 실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차라리 장백정간의 끝 서수라에서 낙남정맥의 끝 분산까지 긋는게 더 깁니다.
오히려 이렇게 얘기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즉 산경표에서도 그걸 의식하여 편제를 백두대간부터 시작한 거 아니냐고 우기겠다는 겁니다.
산경표의 편제가 '장백정간 → 백두대간 → 낙남정맥' 순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그걸 대변해 주고 있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산경표의 편찬자도 다분히 이러한 취지를 의식한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으로까지 불렀던 것입니다.
산경표의 원전이라고 추측되는 여지편람에도 이런 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여지편람』' 산경표 16쪽 뒷면에는 "白頭大幹止於智異自鷲嶺以下卽爲傍支故今作洛南正幹"(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에서부터 시작되는 취령(鷲嶺)이하 산줄기는 예로부터 낙남정간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물론 신산경표가 이런 걸 의식하고 수경보다는 산경 위주로 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지금의 산경표의 정맥에 대한 다수설도 정간이 아닌 정맥으로 가고 있고.....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신산경표의 주된 정신은 '산자분수령'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제2원칙 '합수점에서 산줄기가 끝나는 것으로 정리한 것을 기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창主唱하신 것이 '남한 9정맥의 남한 7정맥화化'였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 믿음이 기맥이나 지맥에 와서는 무너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왜 7정맥에서 주창하신 산자분수령이 정맥의 하위 등급 산줄기인 기맥, 지맥에 와서는 달라져야 하는지....
참고도 #1 진양기맥
주지하다시피 진양기맥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산줄기입니다.
이 진양기맥은 백두대간에서 분기하면서 그 골짜기로 물을 하나 내놓습니다.
바로 남강입니다.
이때 제가 늘 우려먹는 한 가지 얘기.
짐작하셨다시피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입니다.
이 산줄기의 끝은 무조건 합수점으로 갑니다.
이는 그냥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산줄기가 아니고 '산경표'라는 족보에 있는 산줄기이기 때문입니다.
족보에도 없는 놈이라면 애시당초 눈길도 안 주었을 겁니다.
남강이 나왔으면 그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만 찾고 그 물줄기에 이 산줄기가 흡수되는 합수점만 찾으면 됩니다.
그럴 경우 '가'의 곳이 아닌 '나'의 곳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당연히 인공호수인 진양호와는 상관이 없는 산줄기이므로 개명은 필수적인 절차!
'산으로' 박흥섭과 같이 이는 산경이 아니라 수경 위주로 산경표가 편제되었으므로 정맥 이름에 착안하여 '남강지맥'으로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에 기맥이라는 이름도 번거롭고 체계를 복잡하게만하는 요소일 뿐이니 과감하게 포기하자고 제안합니다.
즉 남강기맥이 아니고 남강지맥입니다.
모든 지맥도 예외는 아닐 것이므로 차라리 강江이나 천川 이름으로 가자는 것이죠.
생소하고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만 처음엔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나아가 고유번호를 붙여주면 더욱 더 식별이 쉬울 것이라는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
12:37
간단하게 요기를 끝냈으니 이제 그만 일어서야죠.
12:45
된비알을 미끄러지며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헬기장이 나옵니다.
헬기장에는 공사용 자재들이 널부러져 있고...
13:13
지도 #3의 '바'의 곳에서 안부를 지나,
좁은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13:24
오도봉입니다.
여기서 능선은 휴천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부터 능선은 휴천면과 마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화산을 가는 저희는 오도재 방향을 따르지만 임천지맥을 진행하는 지맥꾼들은 여기서 이정표 뒤로 진행을 하여 지안재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삼봉산부터 같이 진행했던 임천지맥과 작별합니다.
뒤를 돌아보니 삼봉산이 좌측에 오뚝하게 서 있고 울퉁불퉁한 능선이 굴곡을 말해 줍니다.
아직도 지리 주릉과 반야봉은 여전하군요.
13:31
조금 더 진행하니 함양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멀리 황강지맥의 수도산과 가야산 부근은 여전하고....
우측의 남강지맥의 매화산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하단 가운데 월평저수지를 중심으로 그 좌측에 임천지맥이 흐르고 있는 모습이 명백하군요.
저수지 바로 앞 높은 봉우리가 611.4봉이고....
그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법화산 줄기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원래 계획은 법화산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법화산을 지나 806.1봉을 거쳐 문장리로 하산하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진행 중에 아무리 장소를 바꿔 살펴보아도 60번 도로 건너편의 와불산이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심이 부족해서인가?
하는 수없이 속설대로 견불동으로 하산하여 그 동네에서 만큼은 와불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그 욕심에 현장에서 계획을 변경한 것입니다.
하긴 견불동이 괜히 見佛洞이겠습니까?
그 이름을 믿어 보기로 합니다.
이따 법화산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견불동 방향으로 진행할 능선을 눈으로 따라가 봅니다.
그 뒤로 왕산과 웅석봉은 여전하고.....
중앙의 천왕봉도 여전합니다.
13:47
헬기장을 지나,
13:56
919.4봉을 지납니다.
중앙 뒤로 계관봉과 대봉산이 보이는군요.
819.3봉을 지나 우틀합니다.
14:19
산신각이 보이고,
좌측으로 매점도 있군요.
막걸리나 한 잔 먹고 갈까요?
내려가는 길에 시비詩碑를 봅니다.
일두 정여창의 시입니다.
탁영 김일손.
금재 강한.
뇌계 유호인.
익히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을 읽어봐서 아는 분들입니다.
오도재에서 보는 산줄기 맛도 제법입니다.
좌측으로 아까 보았던 대간 상의 봉화산과 백운산도 볼 수 있고....
청매선사의 이 시는 뭔가가 가슴에 와 닿는 거 같습니다.
꼭 이상의 시 같은 느낌.....
지리산을 가려면 이 문을 통과하여야 하는거군요.
멋집니다.
원래는 금대암에 있었는데 목조로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곳으로 옮겨 새로 지으면서 이런 형태가 된 거이군요.
멋집니다.
14:40
막걸리 한 통을 마시고 시간도 끌었으니 어서 일어나야죠.
관문 위로 올라 길을 건넙니다.
지도 #4
14:42
법화산 정상까지 1.6km.
우선은 계단을 올라,
14:58
지도 #4의 '사'의 곳의 이정표를 지나,
15:12
법화산 삼거리에 다다릅니다.
좌틀합니다.
15:13
그러면 헬기장봉을 지나고,
15:18
안부를 지나,
15:22
헬기장봉992.9m을 지나게 됩니다.
여기서 바위 구간 하나를 지나면,
15:31
2등급 삼각점(운봉24)과,
정상석이있는 법화산입니다.
이 산으로 인해 화산12곡이 탄생하게 된 것인데 명성에 비해 볼품없습니다.
조망도 전혀 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 나갑니다.
15:46
직진하여 견불동을 따릅니다.
우측으로 삼봉산을 봅니다.
여전히 중앙의 와불산臥佛山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기만 하고....
견불동까지 확실하게 내려가야 하는건가요?
좌측의왕산은 문필봉까지 보여주고.....
중앙 우측 웅석봉.
16:12
거의 굴곡이 없는 능선에서,
좌측 사면을 치고 올라가면,
16:16
이정표가 있는 934.7봉입니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면계를 따라 진행하여 용유담으로 바로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용유담은 하루 시간을 내어 와야만 하는 곳이니 우리는 견불동으로 내려가 와불산의 실체를 밝혀야 할 것이라는 집녑에 충실하기로 합니다.
좌틀하듯이 전나무 숲으로 들어갑니다.
16:29
이제 급강하입니다.
고도가 뚝뚝 떨어지듯이 된비알의 연속입니다.
길은 희미해지고 거의 본능적으로 희미한 길을 따릅니다.
지도 #5
가끔 표지띠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 수효가 극히 적습니다.
임천 너머 세동 마을에 비교적 민가가 많군요.
천왕봉은 여전하고.....
와불산의 부처님 형상보다는 함양독바위와 진주독바위만 실컷 구경하면서 내려온 격입니다.
17:30
내려와서 주민도 와불산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모릅니다.
남원에서 18:58 기차를 타려면 하산식도 못하고 헤어져야 하는군요.
일단 마천 택시를 불러 주차해 놓은 금대암 입구까지 갑니다.
가는 도중 택시 기사 님께 와불산의 실체에 대해서 문의합니다.
"와불산 부처님이요? 그건 견불동이 아니고 용유교 건너 송대동으로 들어가면 견불사가 있어요. 그 견불사 미륵부처님 앞에서 보면 진짜 같이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제가 보고 온 이 기사記事는 그냥 책상에서 상상해서 쓴 기사인 거 같네요."
이 용유담에서 빠트리지 말고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용유담 주변 경관이 아니라 바로 강 건너 지리산 자락의 상내봉 정상부에 가로로 뻗은 능선이다. 이 능선에는 부처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능선과 그 바위들이 합쳐져 마치 누워 있는 부처, 즉 '와불(臥佛)'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와불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와불의 모습에 신비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부처님의 눈과 코 입 턱선 등 옆에서 본 얼굴 모습이 뚜렷한 이 자연 와불은 용유담 인근의 견불동(見佛洞)이라는 마을의 이름 유래와도 연결된다. 견불동은 건너편 능선에 누워 있는 부처님을 항상 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와불산의 중심 봉우리가 상내봉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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