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초등림지(荊楚登臨地)[남쪽 하동의 악양루에 올라와 보니]
군산일발흔(君山一髮痕)[군산은 터럭처럼 보일 듯 말 듯하네]
조회침곤축(潮回浸坤軸)[조수는 돌아들어 지축을 푹 적시고]
전체감천근(電掣撼天根)[천둥은 울려서 저성(氐星)을 뒤흔든다]
앙망삼간일(泱漭三竿日)[강 위에는 높이 뜬 해가 아른거리고]
부요만리곤(扶搖萬里鯤)[회오리치며 만 리의 곤어 날아오른다]
이소유패랭(離騷遺佩冷)[근심을 만나 버려진 패옥조차 차가우니]
수위채방손(誰爲採芳蓀)[그 누가 향내 나는 창포를 딸 것인가?]
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1445~1494)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입니다.
오언율시 두 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수만 올렸습니다.
악양루는 원래 중국의 동정호 가에 있던 누대樓臺이고, 이 누대는 두보로 인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국어 교과서 고문편에 나온 '두시언해' 때문이었죠.
그러니 뇌계의 이 시는 우리에게 좀 낯선 것은 사실입니다.
남의 나라 것을 인용하는 것보다 우리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1수 제1구에의 ‘형초(荊楚)’는 본래 중국의 남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형(荊)’은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에 속하는데, 옛날 초나라 지역이다. 여기에서는 하동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제2구의 ‘군산(君山)’은 동정호 가운데에 있는 섬의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하동군 악양면 동정호에 있었던 섬을 말한다. 제2구 전체의 뜻은 악양루에 올라서 보니 저 멀리 군산이 하나의 터럭인양 아주 작아 보인다는 뜻이다.
제4구의 ‘천근(天根)’은 동방 칠수(東方七宿) 가운데 하나인 저성(氐星)의 별칭이다. 작자는 하동 지방을 관장하는 별로 생각하였다. 제5구의 ‘삼간일(三竿日)’은 높이 떠오른 해를 말하는데, 삼간은 죽간 3개의 높이라는 뜻이다. 제7구의 ‘이소(離騷)’는 근심을 만난다는 뜻으로, 주로 임금에게 버림받은 것을 뜻한다.
악양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낙양은 산꾼들에게도 훌륭한 코스로 자리매김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금이야 영신봉에서 가지를 치는 줄기를 낙남정맥이라고 하여 정맥꾼들이 즐기는 줄기가 됐지만 산경표가 우리에게 되돌아 온 1980년 이전이나 그 이후라도 신산경표로 인해 산경표가 세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지 꾼들은 주릉 남쪽을 '지리남부능선'이라는 중거리 코스로 즐겼습니다.
삼신봉 이하를 볼까요?
그러니까 지리남부종주 코스는 지리 주릉인 백두대간의 영신봉에서 갈라져.
영신봉 ~ 삼신봉 ~ 내삼신봉 ~ 시루봉 갈림봉 ~ 형제봉 ~ 신선봉 ~ 의둔마을로 진행하였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꾼들은,
화개면, 청암면, 하동읍과의 면계를 따라 걷는 악양환종주 코스를 개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코스를 살펴보면 보통은 악양면 평사리의 외둔마을을 시작으로 고소산성을 올라 ~ 신선봉 ~ 형제봉 ~ 시루봉에서 우회전하여 회남재 ~ 칠성봉 ~ 구재봉 ~ 분지봉 ~ 하동읍내에서 마무리하는 도상거리 약 34.3km의 중거리 산행이 됩니다.
물론 이 코스는 걷는 이에 따라 분지봉에서 바로 화심리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맥꾼들은 횡천지맥(신산경표 상으로는 삼신지맥)이라는 이름으로 삼신봉 ~ 관음봉 ~ 시루봉 ~ 칠성봉 ~ 횡천강과 섬진강의 합수점까지 걷고 있는 게 실상입니다.
하동군 악양을 얘기하기 위한 사설이 길었습니다.
우선 지세부터 볼까요.
풍수적으로 풀어 본다면 주산인 거사봉1133m(최근 업그레이드된 국토지리정보 발행 1:50,000 지도에 이름을 올렸음)을 중심으로 좌 ・ 우의 동남능선과 서남능선이 각 청룡 ・ 백호가 되고, 섬진강 건너편의 백운산이 안산이 되어 골의 안쪽은 광활하지도 협소하지도 않은 잘 짜인 지세를 이룹니다.
즉 동남의 구재봉에서 중앙의 거사봉을 거쳐 서남의 신선봉까지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능선 안에 포근하게 들어앉은 분지가 악양골인 것입니다.
남쪽 입구의 미점리 개치에서 골 안쪽을 향하여 축지, 신대, 신성, 신흥, 정동, 중대, 동매를 거쳐 악양의 제일 안쪽 등촌에 이르고, 다시 골의 바깥을 향하여 매계, 정서, 입석, 봉대, 평사에 이르면 섬진강 강가를 제외한 악양의 5분의 4바퀴를 돌게 됩니다.
즉 악양의 나머지인 무딤이들을 사이에 두고 평사와 미점이 마주하면서 악양의 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악양은 이웃 청암골이나 화개골처럼 좁고 길게 일자로 뻗어있는 골이 아니라 타원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퍼져있습니다.
'현장정신'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조선 최고의 지리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입시켜 볼까요?
청화선인은 택리지의 ‘산수편’에서 지리산을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난 곳이라 두류산"이라고 소개하면서 “물산이 풍부해 부산富山이라고도 부른다"고 소개합니다. 그러고는
"산의 남쪽에는 화개동花開洞과 악양동岳陽洞이 있는데, 모두 사람이 살고 있으며,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이 이자겸李資謙(고려사, 동국통감 등 타문헌에는 최충헌으로 기재되어 있음)의 횡포가 심해지자 장차 화를 당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동에 숨어 살았다. 그 후 조정에서 그를 찾아서 벼슬을 내리고 불렀지만, 한유한은 도망쳐서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며 어떤 사람은 그가 신선이 되어서 갔다 한다.…(중략)…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지리산 안에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梅(악양의 매계리)이다. 근래에 들어 비로소 조금씩 사람이 다니기 시작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악양이 청학동인지 무릉도원인지 부는 별론 택리지에서 말하는 가거지可居地의 네 가지 요소인 지리地理, 생리生利, 산수山水, 인심人心 모두를 두루 갖춘 곳이라 합니다.
* 무릉도원을 점필재 김종직의 경우는 세석평전, 탁영 김일손이나 남명 조식 등은 불일평전으로 보는 등 견해가 갈린다.
가거지可居地란 말 그대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말하죠.
즉 풍수적 길지에 해당하는 ‘지리’, 생업에 유리한 곳을 중시하는 ‘생리’, 풍류를 즐길 만한 곳을 중시하는 ‘산수’, 주변 사람들의 좋은 인성을 중시하는 ‘인심’의 요건을 충분하게 갖춘 곳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악양은 택리지에서 청학동으로 거론될 정도로 풍수인 ‘지리’의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빼어난 경승지가 곳곳에 산재하여 ‘산수’ 역시 최고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양의 거지는 배고픔을 모른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심’이 후박합니다.
그리고 택리지는 가거지의 입지조건 중 생산성이 높은 토지와 물자교류에 필요한 교통조건을 나타내는 ‘생리’를 제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니 악양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섬진강으로 통한 해운이 발달한 곳으로 생리의 요건 또한 확실하게 갖춘 곳입니다.
제가 이렇게 악양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지리산 둘레길'이 이 악양을 지나는 데 있습니다.
지리 남부에 위치한 이 악양을 지나면서 여러 곳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제 성격상 둘레길 진행을 하면서 하루 혹은 몇 시간을 할애해 악양을 살펴보기 힘들 거라는 판단에서 입니다.
마침 해밀에서 매화꽃 관광을 겸하여 호남정맥의 쫓비산 연봉을 간다고 하여 선뜻 참여 의사를 표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면계를 다 도는 '악양 환종주' 산행은 뒤로 미루고 주요 포인트만 우선 진행하여 주제의 산만함을 피하기로 합니다.
오늘 주제는 악양8경을 위주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거기에 악양하면 반드시 나오는 고려의 한유한과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일두 정여창도 찾아보고자 합니다.
다만 일두의 악양정은 화개면 덕은리에 있어 아무래도 이번에 찾기는 힘들 거 같으므로 이따 상황에 따르기로 합니다.
자, 그럼 악양으로 떠나볼까요?
남부터미널에서 22:00에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타고 하동에 내리니 02시가 조금 안 됐습니다.
터미널 4층에 있는 찜질방에 들어가니 목욕은 하지만 찜질방은 안 한다고 하는군요.
이럴 수가.....
이상한 것은 터미널 부근에는 여관도 없군요.
하는 수없이 PC방으로 갑니다.
차 안에서 좀 잤으니 수면 걱정은 전혀 없습니다.
5시에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고 06:30 부춘행 버스에 올라 오늘의 첫 목적지인 평사리 외둔마을로 갑니다.
06:44
강 건너가 광양시 다압면 고사리의 송정마을입니다.
이른 아침의 섬진강 물은 평온하게 흐르고.....
861번 도로 좌측으로 안내판 하나가 보이는군요.
거기에는 섯바위 즉 삽암揷巖에 대한 소개글이 있습니다.
이곳이 취적대입니다.
1744년 황도익 선생은 ‘두류산유행록’에서 “또한 녹사대錄事臺가 있으니 한유한韓惟漢이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사람은 떠나가고 축대만 덩그렇게 남았는데, 강물은 변함없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한유한의 맑은 풍모를 상상하자 감회가 절로 일어났다. 바위 벼랑에 새겨진 취적대取適臺 세 글자는 자획이 거의 마모되어 있었다.”
그러니 취적대는 곧 녹사사대이고 녹사대는 곧 모한대입니다.
한유한이 낚시를 드리웠던 곳이기에 취적대라 불렀고, 한녹사라고도 불렀으니 녹사대였으며 한유한을 그리는 곳이라 하여 모한대가 된 것입니다.
이하 제가 준비하고 있는 자료에서 가져옵니다.
안내판은 “주민들은 이 삽암(鍤巖‧꽃힌 바위)을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고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그런데 섬진강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좌측에(송남 이세립 松南 李世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악양의 부자 이세립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새겼다 한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가 되었다.
서 있는 두 개의 비 중 좌측에 있는 비는 진주사람 권도용(1877~1963)의 작품이다. 이 비에는 “사대부 노태현 등 30여명이 선인들의 훌륭한 행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매년 춘삼월과 가을 구월에 모여 시를 읊으며 옛 사람의 유풍을 추모하고자 일종의 계契를 조직하였다. 또한 장차 비를 세워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도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번에 남쪽으로 섬진강 따라 유람하다가 이 대臺 앞에 이르러 근처에 이세립李世立 공이 바위 벽면에 모한대 세 글자를 크게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사적을 기록한 비는 없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앙모의 정을 금할 수 없어 애오라지 몇 마디 소감을 적고 돌아간다.”고 적혀 있다.
좌측 비 앞면.
좌측 비 뒷면.
이 비에 적힌 중요한 사실史實로는 남명 조식 선생이 한유한을 정여창(1450 ~1504), 조지서(1454 ~1504)와 더불어 세 군자라 칭송하였다는 말과 다만 정여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번의 사화에 휘말려 부관참시 되는 욕을 보았지만 한유한은 먼저 기미를 알아채고는 물 깊고 산 높고 험한 곳으로 자취를 감춰 하늘이 준 수명을 마쳤으니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계속하여 남명의 유두류록은 일두 정여창이 기거하던 집까지 거론한다.
“도탄에서 1리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정선생 여창이 살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천령 출신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주신 분이다. 처자식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뒤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필자 주 :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향토사학자들은 도탄을 지금의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한다고 한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으니 600여m 정도 떨어진 곳이며 삽암에서 10리 그러니까 5.7km 정도의 거리에 일두一蠹 정여창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취적대는 곧 삽암鍤岩이다. 고려말 ‘한유한(생몰년生沒年 미상)’ 선생이 지리산에 들어와 은둔하면서 낚시하던 곳이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바위에 선생이 직접 취적대라 새겼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한유한은 누구인가? 고려 무신집권기 당시 도교, 신선 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최충헌이 전횡을 휘두르자 난이 날 것을 예감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은거하고는 세속과 연을 끊었다. 조정에서는 서비대원 녹사의 직을 주면서 회우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은거하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선인의 계보를 정리한 ‘청학집’에는 한유한을 고려 때의 ‘선파仙派’ 가운데 한명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지리산의 은자(隱者)였다가 은거지 지리산을 벗어나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던 정여창과 조지서는 갑자사화 때 각각 부관참시와 참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고, 임금의 부름에 불응하였던 한유한은 관직을 피하여 더 깊숙한 지리산으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絲綸入洞踰垣走(사륜입동유원주) 임금 명이 고을에 들어감에 담 넘어 달아나니
方丈千秋獨一仙(방장천추독일선) 방장산에는 천년 동안 유독 이분만 신선 같다
한유한을 노래한 조선 중기의 문인 박민(朴敏, 1566~1630)의 시이다.
- 사륜絲綸 : 임금의 조서
그런 한유한이 역시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순전히 남명 조식 덕분이다. 즉 남명은 1558년 4월 지리산 유람에 나서서는 산행기 형식으로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쓰면서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龍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揷巖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이 바위가 삽암이며 섯바위입니다.
마모되어 해독이 불가능한 취적대取適臺.
이 글은 한유한 본인이 직접 쓴 것이고 모한대는 한유한을 기리는 이세립이 쓴 것이며 비는 권도용의 작품인 것입니다.
이 권도용은 천왕봉 아래 법계사의 중창기를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섬진강은 예나 지금이나 천 년전 한유한 선생이 낚시를 즐긴 그 모습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취적대에서 본 섬진강과 평사平沙.
악양이 소상팔경을 가지게 된 이유가 되었고 이 너른 백사장이 그 중 평사낙안平沙落雁 즉 평평한 백사장에 날아와 흩어지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말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소상팔경은 중국의 소주와 삼강지방의 절경 여덟 곳 가령 소상야우瀟湘夜雨 즉 소상강에 밤에 내리는 비, 동정추월(洞庭秋月) 즉 동정호의 가을 달빛 등에 대한 이름입니다.
.
섬진강 하류 쪽.
섬진강 상류 쪽.
송정마을.
가운데 뒤로 매봉866.9m.
오른쪽 비碑는 이 모한대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이므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07:00
모한대를 나와 동정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동정호 역시 중국에서 가져온 이름입니다.
모한대를나와 좌특틀하여 악양으로 들어가는 차도로 들어섭니다.
드디어 악양이다! 악양은 중국에서 온 이름이다. 중국 호북성의 한 현으로 악양루, 동정호, 군산 등의 명소가 있는 곳이다. 호북성은 동정호의 북쪽에 있는 성省, 호남성은 그 남쪽에 있는 성省이라고 이름지을 만큼 동정호는 그 아름답고 장엄함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악양은 당나라 소정방이 다녀간 후 "중국의 악양과 같다."고 하여 ‘악양’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양지’에 의하면 “고소성과 한산사 그리고 동정호 · 소상 · 평사 · 군산 등의 지명이 있는데 악양이 신라 ‘소다사현’일 때부터 이런 명칭이 있었다. 소상팔경이라 한 것은 대략 중국의 악주와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그러니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모화사상에 젖은 말발이 어느 정도 서는 선인이 당나라를 다녀온 후, 이 동네가 중국의 악양과 같은 모습을 닮았다 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는 말일 것 같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악양현嶽陽縣은 경덕왕16년(757년)에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되어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 바, 지금은 岳陽으로 표기되므로 한자어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진주땅이었던 악양은 숙종때 하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이 길이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길'과도 겹칩니다.
무능하기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선조의 교서로 1597년 음력 2월 26일 이순신은 한산도 통제영에서 긴급체포 됩니다.
당시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굶주림에 떨고 있었는데 나라를 위하여 하루도 쉬지 못하는 이순신에게,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라고 어전 회의에서 말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죄목은 ①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했다고 하는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 죄와 ②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은 명령불복종, 직무유기 등의 죄였다고 합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려고 작심을 하였으나 그 죄를 입증하지 못해 단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결국 같은 해 음력 4월 1일 방면하였던 것입니다.
출옥을 한 이순신은 '백의종군' 즉 아무런 직위나 계급도 없이 홀로 걷거나 말을 타고 남쪽길로 향했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걸은 길이 '백의종군 길'이라는 것이죠.
의義 · 경敬 등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제자 중 이순신과 관련한 인물이 정탁鄭琢(1526~1605)이다. 당시 권율의 장계로 이순신이 체포되었고 이순신의 죄목은 ①군공을 날조애서 임금을 기만했다고 하는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 죄와 ②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은 직무유기 죄 등이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기로 작심하였었다.
당시 판중추부사로 있던 정탁은 이순신을 구명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다. 조정 내부에서 이순신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순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조정에는 없었다는 얘기다. 류성룡만이 이순신의 인물됨과 무죄를 믿고 있었으나 그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변론은 삼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탁의 상소만이 유일한 이순신의 구명을 위한 공론화 된 의견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정탁의 상소로 이순신은 단 한 차례 고문을 당한 다음 결국 같은 해 음력 4월 1일 출옥을 해 '백의종군' 길에 오르게 된다.
의금부가 있던 종로3가를 시작으로 과천 ~ 안양 ~ 의왕 ~ 수원 ~ 평택을 지나 남원 ~ 운봉 ~ 구례 ~ 순천 ~ 합천 ~ 진주에 이르는 640km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 '백의종군 길'이 유일하게 백두대간과 만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운봉읍과 이백면의 경계에 있는 여원재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설화와도 관계가 있는 곳이죠.
이 여원재 옛길에는 유정부과劉綎復過라는 각자가 된 바위가 있습니다.
萬曆 二十二年 甲午歲 季春月 征倭都督 豫章省吾 劉綎復過(만력 이십이년 갑오세 계춘월 정왜도독 예장성오 유정부과)
:1594년 3월에 왜군을 치는 장수 중국 예장 출신이며 자가 성오인 유정이 두 번째 지나가다.
萬曆 後 四周 癸丑 仲秋月 湖南左營將 李民秀 改刻(만력 후 사주 계축 중추월 호남좌영장 이민수 개각)
:1793년 8월에 호남좌영장 이민수가 고쳐 새기다.
萬曆 後 五周 己酉 季秋月 湖南左營將 洪永錫 再刻(만력 후 오주 기유 계추월 호남좌영장 홍영석 재각)
:1849년 9월에 호남좌영장 홍영석이 두 번째 새기다.
- 닥밭골 심충성 님 블로그 캡쳐
이 '백의종군 길'은 전남 운봉을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 지리산 둘레길과도 겹칩니다.
인프라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길은 뻔하였을 겁니다.
그러니 지리산을 에워싸고 도는 옛길 중 상당한 곳이 곧 지금의 지리산 둘레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어쨌든 '백의종군 길'은 악양의 외둔마을 지나게 됩니다.
마을 유래를 보고,
마을 앞을 흐르는 봉대천입니다.
봉대천은 작은 실개천이고 오리지널은 악양천이죠.
드디어 우측으로 동정호가 눈에 들어옵니다.
저 모습!
많이 본 모습입니다.
기억 속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부여의 궁남지입니다.
동정호 뒤로 구재봉과 우측의 분지봉을 동쪽 배경으로 하고 있군요.
저 구재봉과 분지봉 사이에 먹점재가 있고 지리산 둘레길은 그 먹점재를 지나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먹점재를 좌측으로 작은 봉이 하나 있는데 그 봉이 아미산이죠?
그 아미산 아래 저 악양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정호에 이른다. 동정호 저편에는 악양루가 있다. 악양루는 1937년 아미산 아래에 있었으나 누대가 너무 고지에 있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여 1947년 개치마을 입구 도로변으로 옮겼었다. 그러나 이 누각은 관리 소홀로 훼손되어 결국 이를 다시 허물고 2012년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한편 동정호는 제 뒤에 있는 서쪽을 배경으로 해야 되겠죠.
그래야 동정추월(洞庭秋月;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니 한사만종(寒寺晩鐘;한산사의 저녁종소리)이니 하는 소위 악양8경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악양 8경을 볼까요?
동정추월洞庭秋月, 한사만종寒寺晩鐘과 모한대에서 본 평사낙안平沙落雁 외에,
소상야우瀟湘夜雨, 원포귀범遠浦歸帆, 어촌낙조漁村落照, 강촌모설江村暮雪, 그리고 산시청람山市晴嵐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소상팔경이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의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소상강瀟湘江 주변의 풍경을 일컫는 말이죠.
원래 악양의 지명이 중국 호남성 악양현에서 따온 것이듯 소상팔경도 자연스레 이곳 악양으로 옮겨져 팔경으로 자리잡게 된 것일 뿐입니다.
소상팔경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중국 북송대 문인이자 화가였던 송적宋迪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직생활 중 불미한 사건에 연루되어 낙양으로 좌천,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소상강 일대를 유람하면서, 팔경시를 짓고 8폭의 그림으로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우리나라에 전해지자 악양의 환경에 밪게 적당히 각색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 강에서 돌아오는 돛단배
산시청람(山市晴嵐) 산마을에 피어오르는 맑은 아지랑이
강천모설(江天暮雪) 강 하늘에 내리는 저녁 눈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뜬 가을 달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내리는 밤 비
연사만종(煙寺晩鐘) 안개 쌓인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어촌석조(漁村夕照) 어촌에 비친 저녁노을
이 원제의 소상팔경에서 구체적인 지명이 거론되는 것은 동정호와 소상강 뿐이고 나머지의 화제畵題인 평사, 원포, 산시, 강천, 연사, 어촌은 일반적인 풍경을 묘사한 것일 것이나 의미를 좁혀서 이 부근의 지명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즉 ‘평사平沙’는 평평한 섬진강의모래밭을, ‘원포遠浦’는 입석나루나 항동나루 같은 포구, ‘산시山市 산마을, ‘강천江天’은 강과 하늘, ‘연사煙寺’는 안개 속의 절로 곧 한산사, ‘어촌漁村’은 글자 그대로 포구가 있는 어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사실 이 화제의 시어들이 빼어난 경승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쓸쓸함, 외로움 같은 음울한 느낌이 묻어나게 하는 그런 것들이서 참맛이 약간 떨어지는 느낌이 오긴합니다.
어쩌면 송적의 소상팔경은 유배된 자신의 심정을 화폭에 담은 것이지 소상강 주변의 구체적인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화제를 악양의 풍경에 대입하여 본다면 본래의 소상팔경보다 훨씬 더 어울리는 악양팔경이 될 것 같습니다.
음울한 뉘앙스의 소상팔경과는 다른 가경佳景의 악양을 그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소성 산자락에 맑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山市晴嵐)
평사리 들판에 기러기 내려앉는다. (平沙落雁)
저녁노을 물든 어촌 개치에 (漁村夕照)
멀리서 돛단배가 돌아오고, (遠浦歸帆)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은은히 퍼질 때 (寒寺晩鐘)
동정호에 가을 달빛 비친다. (洞庭秋月)
소상의 밤비나 (瀟湘夜雨)
섬진강 하늘에서 내리는 저녁 눈은 (江天暮雪)
한 폭의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된다.
- '지리 99'에서 일부 인용
동정호의 남쪽은 멀리 호남정맥의 매봉이 받치고 있고,
서쪽은 형제봉이 있는 지리남부능선이 막고 있습니다.
동정호를 좌에서 우 즉 시계방향으로 돕니다.
저 가운데 있는 섬이 중국 동정호에서는 군산君山인데 이곳 악양에서는 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동쪽의 즉 저 부부소나무가 있는 해발 9.9m의 저 야트막한 동산을 여기서는 군산이라 부릅니다.
그러니 중국은 호수 안에, 우리는 무딤이 들판 한가운데 있는 형세입니다.
평사리 들판을 이곳 사람들은 ‘무딤이들’이라 부르는데, 밀물 때 섬진강 물이 역류하고 홍수가 나면 무시로 물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무딤이 들판이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거죠?
무림이들이라 부르는 평사리의 너른 들판을 지난다. 이 평사리는 변한시대부터 조성된 마을이다. 이 들판이 한국 문학사상 가장 방대하다고 하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다. 고향이 통영인 박경리는 정작 평사리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자라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에나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너른 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래서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설정했다.”
이 악양에서 저 횡천지맥의 구재봉을 넘을 때, 적량의 경우는 삼화실재를, 하동은 먹점재를 이용했을 겁니다.
한편 남명은 이우옹과 함께 저 삼화실재(당시 이름으로는 삼가식현三訶息峴)를 넘으면서 고개의 유래를 밝혔습니다.
즉 "고개가 높이 솟아 하늘에 가로놓여 있어서 올라가는 사람이 몇 걸음을 못가서 세 번이나 숨을 내쉰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죠.
부부송을 좀 당겨볼까요?
아침 안개가 많이 껴 있습니다.
동정호 바로 옆이 둘레길입니다.
둘레길은 적량면 우계리에서 횡천지맥을 넘어 대축마을 경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남쪽.
중앙이 호남정맥의 매봉.
악양의 서쪽을 책임지고 있는 지리남부능선 줄기.
저 한산사 역시 중국의 동정호 옆 절경에 자리잡은 한산사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암자입니다.
화엄사, 연곡사 그리고 법계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악양의 서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지리남부능선이 끝자락에 있습니다.
좌측 횡천지맥의 분지봉과 우측 호남정맥의 갈미봉518.5m.
이따 오후에는 저 갈미봉에 올라 이곳을 조망하겠죠.
그 뒤에 숨어 있는 쫓비산538.2m(국토지리정보원 상, 현장에는 바로 옆 1등급 대삼각점(하동14)이 있는 535.9m에 정상석이 있음)이 육안으로는 살짝 보이기는 하는데 사진으로는.....
다시 보는 군산의 부부송.
길상이와 서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하던가요.
저 뒤 가운데가 횡천지맥 상의 회남재죠.
남명이 저곳을 넘어 악양으로 오다가 "이곳은 물이 로 섬진강으로 들어가니 길지가 아닌 것 같다."며 다시 되돌아 나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삼성궁과 회남재 그리고 묵계초교를 연결하는 회남재 숲길도 많은 분들이 찾고 있는 듯합니다.
형제봉을 당겨보고.....
악양루와 지리남부능선.
조금 있으면 이 왕버드나무에도 예쁜 순이 돋을 겁니다.
이 물은 조금 더 낮은 곳에 있는 동정호로 흘러들어가고....
악양루로 올라가 봅니다.
악양루 내부에는 중건과 관련한 희사자들의 이름과 금액 등을 쓴 판들이 즐비하군요.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 하나!
바로 아래 현판 내용인데 바로 악양8경을 해설해 놓은 거군요.
좌로부터 소상야우(瀟湘夜雨), 동정추월(洞庭秋月), 산시청람(山市晴嵐), 원포귀범(遠浦歸帆), 연사만종(煙寺晩鐘),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모설(江天暮雪), 어촌석조(漁村夕照)...
구봉龜峰 조헌우 님께서 쓰신 글인데 멋지게 해설해 놓은 글 같습니다.
저걸 해석을 다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한산사로 올라가야죠.
도로를 따라 돌아오르려면 시간도 걸릴 것 같고...
그냥 과수원을 치고 올라가 도로를 만납니다.
그러고는 한산사입니다.
절 앞 축대가 붕괴됐었나 봅니다.
공사가 한창입니다.
전망대에서 동정호와 섬진강을 봅니다.
저 섬진강을 남원에서는 순자강鶉子江, 곡성에서는 압록강鴨綠江, 구례에서는 잔수강潺水江, 광양에서는 섬진강蟾津江으로 불리는 등 그 이름도 다양하죠.
갈미봉과 매봉.
한산사의 대웅전 앞에는 이렇게 쪼개진 바위가 있습니다.
무슨 설화가 하나 있음직도 한데....
아!
그런데 이 한산사의 주련柱聯을 보니 부처님 말씀 대신 악양8경과 관련한 글들이 씌어져 있군요.
대웅전 우측으로 돌아 시멘트 포장 길 옆으로 올라 고소산성으로 오릅니다.
의둔과 갈리는 4거리에서 우틀하고....
조용한 숲길을 지나,
고소산성에 이릅니다.
이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인데, 이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쌓은 것이라고 합니다.
뒤로는 준령을 등지고 섬진강의 큰 강이 앞을 가로막은 천연의 요충지로써 남해에서 호남 지방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사적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하동군에서는 고소성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08:30
형제봉까지 5km 정도이니 2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다음에 오면 될 것이니 전혀 아쉬울 것은 없고....
이 돌은 다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드디어 백운산1216.9m이 보이는군요.
백운산 정상에는 아직도 눈이 덮혀 있군요.
아무리 남쪽이라도 1000고지를 넘기 때문입니다.
한편 원래 산경표의 호남정맥은 저 백운산까지 입니다.
백운산 ~ 쫓비산 ~ 망덕포구 구간은 신산경표에서 박성태 선생님이 산자분수령의 합수점 원리에 따라 연장시킨 것입니다.
일응 그게 맞으니까 꾼들은 알건 모르건 그렇게 따라 걷는 것이고....
그러니 엄밀하게 보면 백운산 ~ 쫓비산 ~ 망덕포구 구간은 신호남정맥이라 부르는게 더 합당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성태 선생님이 크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백운산의 흐름은 우측으로 크게 돌아 이 매봉866.9m을 지나 망덕포구로 향합니다.
매봉 바로 뒤로 보이는 억불봉1007.5m.
백운산에서 갈라지는 줄기 하나가 저 억불봉을 지나 가야산을 거쳐 수어천이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돗재 부근의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수어서지맥(신산경표의 억불지맥)이 됩니다.
소나무 한 그루.
이곳에 서면 눈앞에 펼쳐진 너른 악양 들판과 백사청강의 섬진강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석성의 끝부분에 우뚝 선 저 소나무는 섬진강 조망처의 가늠자가 될 것입니다.
한산사로 되돌아 나와서.....
드라마 토지 세트장을 들르기로 합니다.
원래 2,000원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혼자라서 그런지 그냥 들어가라고 하시는군요.
물레방아를 보고는.....
정말 잘 지어놓았군요.
지리남부능선을 배경으로.....
수로....
개즙改葺 작업이 한창이고.....
여기가 최참판 댁입니까?
음....
좌측 문으로 들어가,
오!
이 녀석들은 정말 울고....
우물.....
..................
..............
...................
부엌.
사당으로.....
장독대에....
사당.
안채.
그런데 여기 주련도 악양8경을 써놓은 것.....
투호.
장터.
마시고 갈 거냐 그냥 갈 거냐!
09:27
해밀버스는 10시 반 정도 도착 예정이라 하고....
택시를 불러서 화개장터로 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버스가 오는군요.
1,200원에 화개장터까지 갑니다.
한 번 더 꼭 오고 싶은 곳입니다.
형제봉에서 철쭉능선, 신선대, 신선봉을 거쳐 고소성에 이르기까지의 능선은 그 자체의 그림도 아름답지만 섬진강의 푸른 물길과 은빛 백사장이 이루어 놓은 비경을 원 없이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가 될 것 같습니다.
화개장터 옆 남도대교로 가서 일행들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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