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남해가에 있는데 이곳에서 백두산의 큰 산줄기가 끝난다. 그런 까닭에 이 산의 다른 명칭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蓬來山이라 하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청화산인 이중환이 지리산을 이른 말입니다.
삼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 연주산입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일컬었던 것이죠.
불쾌한 얘기를 하나 곁들이자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중국의 오악의 하나인 형산衡山에 비교하여 남악南嶽이라 칭하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질례秩禮를 행한 까닭에 모화주의에 찌들은 선비들은 조선을 소중화라 하듯이 지리산을 소형산小衡山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리산’이라는 소설을 쓴 하동 사람 이병주는 이 지리산을 어떻게 봤을까요?
“두류산은 백두산맥이 순하게 풀려와서 천왕봉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요, 방장산은 불명佛名으로 불리는 이름이며, 지리산이라는 이름은 이 태조가 등극할 뜻을 품고 각 산신들께 기도를 올렸는데 백두산 · 금강산의 양 산신은 승낙을 했지만 두류산신만은 반대했다고 하여 산신의 위位를 낮추고 그 후 반역자들을 이곳에 귀양보냈은즉 훗날 이를 몰아낼 지식인이 이곳에서 배출되리라는 뜻으로 불린 이름이며, 삼신산은 진시황이 구하려고 한 불로장생의 약이 이옷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니, 지리산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하며 방장산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순조 시대의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의 판소리 ‘흥부가’를 들어보면 ‘망당산’이라는 다른 이름도 들립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02쪽
“방장산이란 명칭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에 보이고, 지리산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두류산이라 부른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백두산에서 산줄기가 흘러 이 산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 虛齋 정석구(1772~1833) 두류산기
그런데 최근 연구(지리 99, 가객 님)에 따르면 지리산을 '덕산'으로도 불렀다는 내용이 눈길을 끕니다.
즉 내옹乃翁이라는 호를 가진 안치권安致權(1745~1813)이 5박6일의 일정으로 지리산을 유람하고 난 뒤의 기록을 담은 내옹유고乃翁遺稿 2집에 수록된 내용 때문입니다.
이 글을 보면 두류록頭流錄에 [而其號有四. 曰智異. 曰頭流. 曰方丈. 曰德山.]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영남과 호남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산이 구불구불 수백 리, 우뚝 선 높이가 수천 길이다. 새, 짐승, 구리, 철이 저장되어 있고, 사찰에는 스님들이 살고 있다. 명칭은 넷인데, 지리산智異山,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덕산德山이다. 덕산이라는 명칭이 가장 유명한 것은 대개 남명 조식선생이 공부를 하신 장소이기 때문이다.
- 1807, 안치권 두류록
그러고 보니 이제 지리산이 '덕산'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얻게 되었군요.
그런데 지리산 박사라 일컬어지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즉 지리는 산스크리스어와 힌디어의 'Giri기리 - '산'이라는 뜻)'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지리는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온 말
불교가 가야에 들어오면서 Giri를 한자의 음을 빌려 시대와 기록한사람에 따라 知異, 地理, 地異, 智理, 地利, 智異등으로 표기했는데, 조선조에 들어 비로소 '智異'라는 명칭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도솔산인 님의 설을 들어보면,
"인도 아율타국에서 김해 가야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왕후의 오빠 허보옥(장유화상)이 인도에서 불교를 가지고 들어와, 가야산과 지리산의 칠불사 보옥대에서 수도를 하였고, 이 칠불사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일곱왕자가 성불을 하였다. 따라서 조심스럽지만 불교식 지명인 '가야'라는 이름과 함께 '지리(Giri)'라는 지명이 이때부터 불리워진 것이다.
지금도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와 '힌디어'에서 Giri(기리)라는 어휘가 山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리라는 지명이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허보옥)이 지리산에 들어오면서 산중의 산(불도를 깨우치는 산)이라는 의미로 Giri(기리)라고한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Giri(기리)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智異가 '불성을 깨우쳐 지혜가 달라지는 산'이라는 의미로, 그 어원을 '불교신앙설'로 추정한다."
결국 불교남방설이로군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상관없이 국어학자들은 '지리'의 어원을 순수한 순수한 우리말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곧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둠’의 형태였던 것이다. 이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는 ‘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2쪽
이렇듯 지명은 땅과 지역의 특성을 제일 먼저 드러내 보여주는 얼굴입니다.
거기에는 땅의 생김새와 장소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그 지명을 붙인 당시의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자연적 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속성도 가미되어 있을 것이고 역사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역사지리적인 성격도 담겨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명은 사용하는 그 당시 사회의 주체에 따라 이름이 변화하기도 하며 그 의미와 범위가 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를 꼽는다면 공식적인 문서로는 지도와 지지地誌일 것이며, 비공식적인 그것으로서는 유산기 즉 산행기일 것입니다.
제가 최근 유산기遊山記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즉 선인들의 유산기에 나오는 지명을 현재의 그것과 비교해 가며 그것을 찾아가는 재미!
그것은 느껴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제가 지리산에 빠져 사는 이유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위에서 인용한 이병주님은 '지리산'에서 벽송사에 거주하고 있던 최노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당시의 지리산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5천 척 이상의 봉우리가 18봉이요, 3천 척 이상이 22봉이요, 2천 척 이상이 20여 봉이니, 고만高蠻이 도합 60이요, 중만中蠻, 저만底蠻으로 말하면 1천여 개이니, 소위 산지대왕 아닐손가. 강으로 말하면 칠 개 강천이 흐르고 계곡은 수십 개로 기관명승이 절가하니 풍우순조하면 비옥한 땅일레라, 가히 신선이 노니는 선경을 짐작할 수 있느니라.”
그렇죠.
지리산은 천왕봉을 위시하여 반야봉, 제석봉, 노고단 등 1,500m 급 고봉이 18개나 된다는 얘기며 여기서 7개 강천이 흐르게 되며 계곡은 수십 개나 된다는 얘기입니다.
고만이 600m 급의 산을 이야기 하는 것도 흥미롭기도 합니다.
조선 최고의 지지地誌라 할 김선신(1775 ~ ? )의 두류전지頭流全志를 보면, 그는 이 지리산을 금강산에 비해 "몸체는 풍성하면서 정상의 꼭대기는 우뚝하고 확고한 자태를 지키면서 골짜기의 굴곡은 곡진하며 밝은 지혜를 가졌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내보인다. 그러므로 차라리 두류산처럼 어둑할지언정 금강산의 화려함을 본받지 말며, 차라리 두류산의 엄숙함에 처할지언정 금강산의 찬란함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금강산은 재주 있는 선비이다. 재주 있는 사람을 사람들이 사랑하지만 사랑이 극심하면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그 모습이 오히려 시름겹다. 두류산은 덕이 있는 노인이다. 덕이 있는 사람을 사람들이 사랑하지만 공경함이 오래되면 반드시 멀리하게 되며 멀어지면 잊어버리게 된다. 아! 내가 어찌하면 공경함이 오래되어도 잊지 않는 사람과 살면서 두류산의 온전한 덕을 논할 수 있을까?"라고 지리를 표현하였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지리산을 소개하고 있는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1967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지리산은 단순히 크다, 깊다, 넓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지리산!
그 지리산을 저는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① 지리산은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산 혹은 티벳 고원으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대륙을 지나 백두산을 통하여 나라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인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동서를 가르고 진행하다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는 곳.
즉 산줄기의 측면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②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지리산은 남덕유에서 시작된 물줄기 남강이 함양, 산청, 진주를 적시며 진행할 때 그 물줄기의 우측에 자리해 있으며, 대간의 영취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 섬진강이 남원, 구례, 하동을 흐를 때 그 좌측에 서 있는 산.
이는 지리산을 물줄기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③
이 지리산에 기대어 논과 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신앙, 그 신앙의 변천 과정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 그들이 겪었던 역사적인 사실 등 그들이 겪었던 고단하고 지난한 생활 등이 스며들어 있는 곳.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지리산에서 탄생한 성리학의 한 파인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와는 달리 '실천'을 중시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구한말에 와서는 의병활동 등 당시 그들이 참여했던 사회활동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파생된 농민항쟁과 의병활동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이념 투쟁의 무대가 되어야만 했던 빨치산의 활동을 지리산을 통하여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첫째와 둘째 얘기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그윽이 생각해 보니 세 번째 얘기는 제가 별로 시도해 보지 않은 영역 같습니다.
이런 인문지리적, 역사지리적인 지리산의 한 면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지리산 외곽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생활상을 보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최근 개발된 ‘지리산 둘레길’이 떠오릅니다.
혹시나 이 둘레길을 걸어보면 뭔가를 건지게 되지나 않을까요?
그 둘레길을 따라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혹시나 도포 자락을 날리며 힘겹게 산을 오르는 그들의 거친 숨소리나 너른 반석에 둘러앉아 술잔을 건네며 시를 읊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가져보게 되는군요.
지리산 둘레길이라......
지리산 둘레길은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85km의 장거리 도보길.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環形으로 연결하였습니다.
그것을 접속 구간을 고려하여 걷기 편하게 22구간으로 나누었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사단법인 숲길’에서 상당한 자료들을 모아놓으셨군요.
아주 자세한 구간 설명과 함께 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일반적인 이런 자료와 제가 걸으며 보고 얻는 둘레길의 맛이 같을 리 없습니다.
물론 이는 단지 다른 분들이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는 시각과 저의 그것과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저의 경우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들을 도외시한 체 둘레길을 걷는다면 선뜻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제 시각으로 걸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이 둘레길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걷겠습니다.
답사의 필요성이 있다면 어디든 들어가겠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개척된 길이 '지리산 현오길'이 된다면 더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전북․전남․경남 등 3개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5개시․군의 21개읍․면 117개 마을을 잇는 22개구간 285km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 둘레길은 전북 남원 46㎞, 경남 함양 23㎞, 산청 60㎞, 하동 68㎞, 전남 구례 77㎞ 등 285km를 숲길(43.8%), 농로(20.8%), 마을길(19.9%) 등으로 이어져 있다.
2007년1월24일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하여 조사, 설계, 정비사업을 추진, 2008년3월 지리산둘레길안내센터 사무동을 완공하였다.
2008년4월27일 ‘지리산둘레길’ 시범구간인 남원 산내~함양 휴천의 개통식을 시작으로 2008년10월16일 인월~산내 구간 개통,
2009년5월22일 남원과 산청구간 총연장 70km를 개통하였다.
2011년5월, 총 209.3km(남원, 함양, 산청, 구례, 하동) 개통하였고, 2012년 5월 총 285km 환형의 전체구간을 완전 개통하였다.
남원 가는 첫 열차를 타고 남원역에 내려 바로 택시로 주천면으로 이동합니다.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인 제1구간은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 운봉읍 동천리입니다.
간단하게 주천 ~ 운봉 구간입니다.
구 간 개 요
1. 산행일시 : 2017. 12. 21. 목요일
2. 동행한 이 : 홀로
3. 산행 구간 :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 (주천 시발점 ~ 내송 마을 ~ 구룡치 ~ 노치 마을 ~ 양묘장 ~ 운봉 초교)
4. 산행거리 : 14.7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주천 시발점 | 08:31 | |||
내송 마을 | 1.1 | 07:45 | 74 | |
구 룡 치 | 2.5 | 08:52 | 67 | 10분 휴식 |
회덕 마을 | 2.4 | 09:31 | 39 | |
노치 마을 | 1.2 | 09;50 | 19 | |
가장 마을 | 2.20 | 10;27 | 37 | |
행정 마을 | 2.20 | 10:59 | 32 | |
양 묘 장 | 1.7 | 11:23 | 24 | |
운 봉 읍 | 1.4 | 11:41 | 18 | |
계 | 14.7 km | 03:10 | 03:00 | 실 소요시간 |
구 간 기 록
구간 정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7km의 지리산둘레길. 본 구간은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이 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을 보러 다녔던 길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6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둘레길 그 시작점을 알려주는 안내판입니다.
배낭을 매고, 스틱을 쥐고 발을 떼는 트레커trekker의 모습이 상당히 동적으로 멋지게 보이는군요.
둘레길이 아닌 산행을 하는 모습 같습니다.
마치 이 지리산 둘레길은 호젓한 숲길보다는 오르내림이 심한 산길도 여러 곳 있다는 암시를 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우측으로 구간 거리와 진행 방향을 안내해 주는 이정목.
다시 그 우측으로는,
이곳 그러니까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원터마을의 유래가 적혀져 있는 소개글이 안내판 형식으로 세워져 있군요.
외평마을
약 600여 년 전 10여 호의 마을을 이루었으나 농업용수가 마땅치 않았으나, 용궁마을에 장안저수지를 만들면서 식수 및 농업용수가 해결되어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숙성치를 넘어 구례군 산동면(당시는 남원부) 원달리로 통하는 길이 있었는데, 응양에서 말을 갈아타고 농협 창고 뒤편에서 쉬어가는 곳이어서 <원터거리>라 하였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감탄을 자아낸 곳이라 전한다.
이 안내판 대각선 방향으로는,
지리산둘레길 지역센터 (Jirisan Trail Local Center)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리산둘레길 지역센터는 지리산둘레길을 찾는 이들에게 구간지도 제공, 지역정보 제공, 체험 프로그램 소개와 더불어 다양한 주제를 담은 전시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또한 지역교류의 장이자 지리산둘레길을 찾는 이들의 쉼터입니다.
지역센터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리산길 여정에 안전하고 든든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 사단법인 숲길 안내글
둘레길 구간 지도도 잘 나와 있고,
정규 코스는 물론 파생 코스로 구룡폭포 순환코스가 나와있으니 주의 깊게 봐야할 것 같습니다.
사실 1구간의 하이라이트는 오히려 구룡폭포인데 정규 탐방로로는 그곳이 빠져 있는 게 아쉽군요.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에서 한 가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이 루트 중 상당 부분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루트'와 겹쳐진다는 것입니다.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명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4월 1일에야 다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그에게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존쟁터에 임하라는 백의 종군'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제수 받기 전까지 백의종군하며 움직인 동선動線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고 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데 4월 24일부터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도원수 권율이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된다.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다.
즉 오수교차로 ~ 월평 주유소 ~ 사매교차로 ~ 오리정 휴게소 ~ 여원재 ~ 운봉초등학교 ~ 주천 외평마을(현 위치) ~ 밤재 ~ 구례로 이어지는 루트가 남원 구간 53.1km에 해당하게 되는군요.
그러니까 서울 의금부 ~경상남도 구간 161.5km, 전라남도 구간 123.2km을 포함하여 총 640.4km의 구간 중 남원 구간이 53.1km이고 남원 구간 중 운봉초교 ~ 외평마을 ~ 밤재 구간인 약 20km 구간은 둘레길과 겹치게 됩니다.
백두대간을 할 때 여원재에서 보았던 이 안내판이 여원재 ~ 운봉 초교 구간을 안내했던 기억이 슬며시 나는 게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군요.
지도 #1
자, 그럼 오늘 구간을 시작해 볼까요?
오늘 구간의 들머리는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입니다.
들머리인 장안교 앞에서 좌틀하여,
07:30
주천 ~ 운봉 구간 14.7km를 시작합니다.
바로 개울을 건너,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지리산 둘레길 홍보관을 지나,
원천천을 건넙니다.
산줄기 산행을 하는 꾼들에게 이 원천천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줄기입니다.
즉 백두대간 상에 있는 만복대1433.4m 부근에서 서시지맥(신산경표에서는 견두지맥)이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산자분수령의 제1법칙)가 바로 이 원천천입니다.
이 물줄기는 고기리를 지나 구룡폭포를 거쳐 이곳으로 오면서 몇 개의 지천들을 흡수하게 되죠.
이 백두대간이나 서시지맥의 지맥 등의 산줄기 개념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지리 교과서에서 배운 산맥 개념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 같이 저와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시면 22구간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나라 산줄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을 겁니다.
태백산맥에 태백산은 없다?
“그러니까 태백산 부쇠봉에서 온전하게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얘기지?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잠시 백두대간을 몰랐었을 때 그때는 태백산맥이라고 불렀잖아. 그 태백산맥은 이 태백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아니겠어? 그런데 태백산맥은 여기서 어떻게 낙동정맥 방향으로 이어지는 거야? 분명 낙동강을 건너야 할 텐데.”
“중요한 지적이야. 사실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개념은 전혀 다른 거야. 백두대간은 분수계의 개념인 반면 태백산맥은 지질학적 개념이라 볼 수 있지. 땅속에 있던 지질구조선을 얘기하는 거니까. 그게 지리학에 편입이 된 건 순전히 지형의 형성 과정 파악에 필요했기 때문이었어. 즉 거의 평평했던 지구에 화산 활동을 동반한 단층이나 습곡작용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구조선이 발달하게 됐다는 것. 그러니까 지각변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단층, 습곡, 산맥 등을 구조선이라고 하잖아. 산맥 얘기할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어쨌든 그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을 지나면서 침식 ∙ 풍화작용을 거쳐 현재의 형상을 갖춘 게 분수계인 산줄기잖아. 그러니까 백두대간을 이렇게 정의하면 될 거야. ‘지각변동에 의하여 형성된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침식, 풍화작용을 통하여 현재의 산줄기가 만들어졌다. 그 산줄기는 분수계 역할을 하는데, 그 중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가장 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한다. 이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로 나라의 모든 산과 모든 물이 여기서 흘러나가니 백두산은 그들의 조종(祖宗)이라 불린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예전엔 학교에서 구조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줄기 개념도 아닌 엉성한 산맥 개념만 가르치고 배웠던 게 우리 기성세대에게는 큰 약점이었어. 당시 지리학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니까.”
“지리 교육이 잘못 됐다는 거 아니야?”
“고토 분지로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근대 지리교육이 지금껏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지리학계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거지. 지금은 사실 학자들이 여기서 벗어나려는 흔적이 많이 보여.”
“그럼 예전에는 태백산맥 종주를 어떻게 한 거야?”
“말은 태백산맥 종주였는데 산맥을 종주한 게 아니고 실제는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 일부를 이어서 걸은 것이지. 백번 양보하여 그 당시 개념으로 얘기하더라도 태백산맥을 걸은 게 아니고 태백산맥의 분수계만 걸었다는 것이지. 산맥 = 분수계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면 산맥은 사람이 걷거나 종주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
“그래도 명색이 태백산맥인데 태백산은 지나야 했을 거 아니야!”
“결론을 우선 보자면 그들이 걸었던 태백산맥에는 태백산이 없었어. 즉 태백산맥 안에는 태백산이 없었던 거야!”
그랬다. 태백산맥은 태백산을 품어야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당연히 구조선은 분수계와 달라 태백산맥이라 하면 산줄기의 분수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지괴(地塊)나 산괴(山塊)를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백산맥은 당연히 태백산을 품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28쪽 이하
그 원천천을 지나 갈림길마다 친절하게 세워져 있는 이정표의 빨간색 화살표를 따르면,
07:38
비부정을 지납니다.
비부정이란 곧 쉼터를 얘기하는 것으로 이곳이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는군요.
07:40
비부정을 지나 17번 도로를 만나서는 도로 옆 인도를 따릅니다.
그러면서 도로 우측으로 잠시 후 진행할 안솔치 마을을 봅니다.
내송마을(안솔치)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필자 주 ; 많은 전공 중 가장 중요한 공은 팔량치 전토에서의 승리인데 뒤에 또 보겠습니다.
도로변의 인도는 아마 둘레길 때문에 새로 만들어 진 그것 같습니다.
이 멋진 소나무도 새로 식재한 거 같고......
그 인도에는 이런 안내글도 새겨져 있고....
화장실도 있는 안솔치 마을 입구에 구룡폭포 순환 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구룡폭포는 둘레길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명승지로서 갖는 무게 때문에 이렇게 순환코스를 따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갈림길이 있는 정자나무 쉼터를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우틀합니다.
이곳부터 구룡치까지는 지속적으로 오름 구간이 계속된다는 얘기죠?
마을 입구의 길 건너에 있는 정류장 이름은 '내송'입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를 지나,
포장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섭니다.
안솔치 마을은 전원주택과 전통 마을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군요.
와야재臥野齋를 지나,
전통 가옥을 지나면,
은송저수지라 불리는 내송제를 지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지 구간으로 접어듭니다.
산지 구간이라는 얘기는 곧 이 지역이 '지리산 국립공원'이라는 얘기와 같습니다.
07:57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개미정지에 도착합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개미정지
내송리 서어나무 숲. 정지는 쉼터를 말한다. 시원한 그늘과 의자가 있어 쉬어가거나 도시락을 먹기에 좋다. 옛날 남원장을 보러가던 이들도 무거운 보따리를 풀고, 마을 사람들도 나뭇짐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갔을 것이다.
개미정지에 얽힌 얘기를 하나 들어보면,
임진왜란 당시 남원지역의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솔정지에서 잠시 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개미가 발굼치를 깨물어 잠에서 깨어나보니 왜군이 내송마을 서어숲까지 밀고 올라와 있어 개미들 덕택에 큰 화를 면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설화입니다.
좀 그럴 듯하게 얘기를 지어내야지......
어쨌든 예전에는 남원부와 운봉현을 이어주는 큰길로 남원장에 왔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쉼터였다고 합니다.
울창한 서어나무숲이 하늘을 가리고 여러 개의 의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도가 높아지지만 이런 산길이 전문인 저는 오히려 속력이 더 빨라지는 구간이 되겠군요.
이렇게 좋은 길의 연속이니.....
지리산 둘레길.
누구나 별 부담없이 도전할 수 있는 그런 코스인 것 같습니다.
08:15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이 쉼터를 지나면 약간 고도가 낮춰지면서 길은 고속도로 같이 넓어집니다.
08:16
그렇다고 만연히 그 너른 길을 따랐다가는 바로 '알바'입니다.
알바라....
아마 이 알바라는 말이 생소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산꾼들이 쓰는 은어(隱語) 몇 가지
여느 대간길이 그러하듯이 대야산 ~ 버리미기재 구간도 길은 워낙 좋아 헷갈릴만한 곳은 없다. ‘알바’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대간길이나 정맥길 등 산줄기 산행을 하면서 정해진 등로에서 이탈하여 다른 방향으로 잘못 들었다가 다시 제 자리로 찾아오는 것을 산꾼들은 ‘알바를 했다.’라는 말을 쓴다. 산꾼들만의 은어(隱語)다. 즉 쓸데없는 발품을 팔았다는 말일 것이다. 최근에는 ‘헛돌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런 용어를 몇 개 정리해 볼까?
장소와 관련 된 용어.
‘들머리’와 ‘날머리’는 평소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이다. 정해진 구간의 시작 지점과 종착 지점을 말한다.
‘우틀’, ‘좌틀’.
우(右)와 좌(左)가 이야기하듯 방향 전환할 때 쓰는 말이다. 흔히 갈림길에서 쓰는 단어다. 즉 우회전하면 ‘우틀’, 좌로 방향을 틀면 ‘좌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탈출’. 구간 진행을 하던 중, 부상 혹은 기상 악화 등으로 계속 진행하기가 어려운 경우 중간에서 민가나 도로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구간을 이탈하는 상황을 얘기한다.
‘중포’. 위의 ‘탈출’하는 경우는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타율적인 행위이다. 반면 체력의 고갈, 심경의 변화 등 주로 내재적인 요인에 의하여 탈출을 하거나 나머지 구간 진행을 그만 둘 경우를 중간에 포기한다고 하여 ‘중포(中抛)’라는 말을 쓴다.
‘땜빵’. 이렇게 중간에 ‘탈출’을 했거나 ‘중포’했을 경우, 백두대간이나 정맥, 기맥, 지맥 등 계획한 소정의 전 구간을 완주(完走)하기 위해서는 그 구간을 보충 산행하여야 하는데 그 보충산행을 ‘땜빵’ 혹은 ‘땜빵산행’이라 부른다.
그럴 경우 땜빵하는 이는 혼자 그 구간을 진행하거나 아니면 교통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산악회가 그 구간을 진행할 때 참석의사를 표명한 뒤, 여분의 좌석이 있을 경우 그 산악회와 함께 산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 그 산악회 입장에서는 그 땜빵하는 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전 구간을 함께 하지 않고, 그 구간만을 함께 할 사람이기에 ‘구간자(區間者)’라는 표현을 쓴다.
반면 자기 산악회에서 전 구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대원들을 이들 구간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종주자(縱走者)’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전구간을 빠짐없이 완주하였을 때 그 마지막 구간을 마치고 나면 ‘졸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사회와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247쪽
올바른 루트는 이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좌틀하여 좁은 길을 따라야 합니다.
만연히 임도인 이 길을 따랐다가는 대형 알바!
08:37
이정표를 확실하게 파악한 다음 좌틀하여 돌계단을 오르면 좁은 협곡 미니어쳐 같은 곳이 나옵니다.
08:42
그러면 이정표가 있는 솔정자라고도 부르는 솔정지를 만나게 됩니다.
지도 #1의 '다'의 곳입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볼 수가 없군요.
솔정지
솔정지는 20여년 전만 해도 나무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고개를 오르기 전에 땀을 식히고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08:43
솔정지를 지나자마자 바로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무조건 우틀합니다.
지도 #2
08:48
다시 돌계단이 나와 둘레길의 정비의 흔적을 보여주고....
08:52
좀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면 이내 586.2봉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이 부근을 구룡치라고 부르는 거 같습니다.
구룡치
구룡치는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 (음력 7월 15일) 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달궁이 어디입니까?
달궁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지리서부능선을 넘어와야 하는데....
2017. 11. 19. 진행한 서부능선 산행기 중 관련부분을 발췌해 보면,
반야봉에서 흘러내리는 능선이 투구봉을 지나 직진하여 달궁으로 흘러내리는군요.
달궁은 마한의 효왕이 진한의 추격을 피해 이곳에 궁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죠?
최근에는 남부군과 관련하여 이현상이 있던 남부군 사령부 기동부대가 있었던 곳이기 합니다.
이 달궁 마을도 얼마 안 있으면 없어지지 않을까요?
참고도 #1 한국일보에서 발췌
이 달궁 계곡의 맨 위에 있던 심원마을은 이미 없어졌고.....
이 달궁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이곳 지형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선요원을 앞세운 하대치의 부대는 바위투성이인 험한 피아골을 치올라 임걸령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담배 한 대씩을 말아 피운 그들은 곧장 심원계곡을 타고 내렸다. 내리막길 심원골은 피아골에 비하면 너무 심심할 정도로 험한 데라고는 없었다. 피아골이 남성적이라면 심원골은 여성적이었다. -중략- 심원골 용소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은 그들이 달궁골로 접어들어 돌고개를 지나 달궁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경이었다. - 태백산맥 10권 27쪽 피아골
08:59
이정표를 지나고,
09:03
이내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틀하면 구룡폭포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구룡폭포로 행선지를 잡지 않는 이상 여기서는 그냥 직진을 해야 합니다.
우측에도 표지띠들이 몇 장 붙어 있으므로 주의를 요하는 곳입니다.
삼거리에서 직진하자마자 바로 안내판이 하나 보입니다.
이 연리지에 대한 내용이었군요.
09:09
구룡농주九龍弄珠.
장흥고씨 묘동 長興高氏墓洞.
농주란 나무로 만든 여러 개의 공을 두 손으로 하나씩 높이 던지고 받고 하며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돌게 하는 놀이를 말하는데.....
고씨 집안과 구룡 농주와 무슨 관련이라도.....
09:12
음식점 안내 간판을 지나,
작은 돌무덤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사무락 다무락이라는 곳을 지납니다.
사무락다무락
길을 걷다보면 돌들로 탑을 쌓아놓은 ‘사무락다무락’을 만난다. 사무락다무락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 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물론 돌탑이 그 길을 지나는 이들의 안전을 기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인들의 유산록을 보면 그런 의미보다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더 자주 눈에 띕니다.
09:17
편하게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정표가 나오고,
09:22
이내 나무 의자 뒤로 회덕마을이 보이는 쉼터에 도착합니다.
우측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 매점을 지나면서 뒤로 서시지맥에서 가지를 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봅니다.
멀리 중앙 좌측으로 만복대1433.4m가 보이고 그 만복대 좌측 높은 봉우리가 고리봉1305.4m입니다.
백두대간에 속하는 봉우리들이죠.
그러니 그 좌측 연봉들이 지리서부능선이고....
“서부능선은 또 뭐야?”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사람같이 집요하게 물어온다.
“영신봉과 삼각고지에서 일부 얘기했던 거야. 서북능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천왕봉 ~ 밤머리재의 동부능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면 돼. 근데 사실 이 서부능선은 방향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서북능선’이 맞는다고 우기기도 하지. 그런데 서북능선하면 설악산의 ‘대청봉 ~ 끝청 ~ 귀청 ~ 안산’ 구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리동부능선에 대(對)한 개념이니 일반적으로 서부능선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들 해. 그리고 보통 이 성삼재 ~ 천왕봉 구간을 주릉(主稜)이라고 하잖아. 이게 다 예전에 백두대간을 몰랐을 때 능선 산행을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러니까 산을 기준으로 본다면야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중심이고 기준 아니겠어? 하지만 접근성과 등로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성삼재와 천왕봉을 중심으로 봐야 하겠지.”
스틱으로 반야봉 방향과 고리봉 방향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얘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결국 천왕봉에서 중봉 ~ 하봉 ~ 왕등재 ~ 밤머리재 방향으로 가는 줄기를 동부능선. 천왕봉에서 이 성삼재까지를 주릉. 그리고 성삼재에서 고리봉 ~ 바래봉 ~ 인월 방면으로 가는 줄기를 서부능선. 그렇게 동서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남북능선도 하나씩 만들어야겠지. 그래서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가는 루트를 북부능선 그리고 영신봉에서 삼신봉을 거쳐 형(성)제봉으로 가는 줄기를 남부능선이라고 하는 거지. 예전에는 산깨나 다녔다는 꾼들이라면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지리에 들어와서 이들 루트를 헤집고 다녔어.”
발목 스패츠를 잊지 않고 착용하면서 묻는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많나?”
“글쎄. 예전보다야... 어쨌든 이우형 선생이 산경표를 찾은 해가 1980년이잖아. 그러고 나서도 그 산경표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게 대개 약 1988년경이라고 봐. 그러니까 1988년경 이전까지만 해도 이 지리산에서는 이들 루트가 능선 종주하는 꾼들의 로망이었다고 봐야지. 그러다가 이 루트들이 대간이니 지리태극종주, 덕천지맥이나 서시지맥, 횡천지맥 등 지맥 산행이 활성화되면서 요즘은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야. 더군다나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관리의 어려움 그리고 야생동물의 서식지 보존, 희귀 동식물 보존 차원에서 많은 구간을 비탐방구간으로 지정해서 놔서 다니기도 쉽지 않아졌고.”
“그런데 지리태극종주 루트를 보니까 서부능선 + 주릉 + 동부능선의 변형인 거 같던데?”
“응. 그렇게 봐도 무방하긴 하지. 태극종주는 다음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야.”
- 졸저 전게서 76쪽
물을 건넙니다.
이 물의 흐름이 산줄기를 하는 대간꾼들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물줄기입니다.
이 물은 바로 뒤에 있는 728.8봉과 덕운봉759.2m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입니다.
참고도 #1
이 물줄기는 고기저수지 부근에서 내려오는 물 즉 원천천과 합해져서 구룡폭포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고는 요천에 합쳐져 섬진강으로 들어가게 되겠죠?
즉 백두대간의 좌측으로 흐르는 물들은 모두 섬진강으로 합수되고, 우측으로 흐르는 물들은 모두 낙동강으로 합수되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게 백두대간의 원리입니다
대간은 나라를 동서로 양분하는 산줄기라는........
그 물을 건너 도로로 나갑니다.
09:25
지도 #2의 '라'의 곳입니다.
이 루트도 '이충무공 백의종군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좌틀합니다.
09:29
도로를 따르다 좌측 회덕마을을 보니 초가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민박도 할 수 있는 곳이군요.
09:31
회덕마을 입구를 지나면서 마을 유래를 봅니다.
회덕마을
임진왜란 때 밀양 박(朴)씨가 피난하여 살게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 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다. 그 뜻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으며 현재도 두 가구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 참고로 덕두산1151.5m은 바래봉 바로 옆 그러니까 지리서부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산이고, 덕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 그리고 덕음산은 마을 뒷산의 759.2봉의 다른 이름입니다. 필자 註
우측으로 서부능선을 봅니다.
우측 끝 백두대간의 만복대는 여전하고 고리봉이 한결 가까워졌습니다.
좌측으로는 아까 구룡치 부근에서 올라오는 능선과 이어지는 줄기를 봅니다.
이 여맥은 우측 봉우리에서 대간길과 이어질 것입니다.
지도 #3
소나무 예닐곱 그루가 있는 곳으로 좌틀하여 들어갑니다.
소로 멀리 바래봉1186.2m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이군요.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고리봉, 우측 끝이 만복대.
그리고 앞 우측 제방이 고기저수지.
그러니 이 운봉고원은 동쪽으로는 지리 서부능선이 가로 막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09:40
그리고 서쪽을 보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등로가 살짝 보이고 그 너머로는 백두대간 마을로 유명한 노치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운봉 고원은 서쪽 분지벽과 남원의 요천 사이에 많은 단층선이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옛날부터 정령치에서 여원치를 거쳐 봉화산에 이르는 천연의 국경 방어선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이 천혜의 요새지 운봉과 남원을 경계로 백제와 신라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섬진강 수계인 남원분지와 낙동강 수계인 운봉고원 사이의 분지벽을 따라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산성 10여 개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경계선을 따라 산성 사이를 연결하던 2중 순라로가 잘 닦여 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운봉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 세 지역의 접경지역으로 고령가야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562년 6가야는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으니 이 운봉 지역 역시 신라 땅이었다는 얘기입니다.
08:41
지도 #1의 '마'의 곳입니다.
마을 뒤편으로 오르면 소나무 다섯그루가 병풍처럼 서 있으며 바로 나무 밑에는 당산제전이 있습니다.
수령 500년의 소나무들로 마을 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란히 서있는데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리적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 드려서 가꾸었다고 합니다.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는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입니다.
한편 이곳이 백두대간과 관련하여 논의가 있는 곳입니다.
즉 백두대간 길이 이곳으로 올라가야 하느냐 아니면 저 노치 마을을 통과하여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고도 #1
즉 참고도 #1의 기존 대간길보다는 오히려 붉은선의 길로 올라야 대간길에 충실한 거 아니냐는 논의입니다.
면계도 기존 대간길로 나 있고 여러가지 대간 조형물들이 그 위치에 세워져 있으니 모두들 별 생각 없이 그 방향으로 진행을 하는데,
산친구 도요새님은 기존 주장을 고수하고 계십니다.
반가운 마음에 제 것을 곁에 하나 걸어둡니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09:50
좌틀하여 노치 마을로 들어갑니다.
볼일도 보고,
대간 조형물도 확인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노치마을
조선초에 경주 정(鄭)씨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李)씨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구룡치를 끼고 있다.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 덮인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는 백두대간이 관통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치마을은 고리봉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이 소개글을 보면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눈에 띕니다.
일반적으로 갈대라고 한다면 바다나 강가의 물이 있는 곳에 자라는 식물 아닙니까?
갈대는 환경적응력이 좋은 식물이나, 습한 지역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소금기가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갯벌의 만조선 부근, 만조선과 가까운 조간대의 상부 지역에도 나타나나, 짠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의 강 언저리에서는 대규모 군락을 이룬다. 토양염농도가 높고 습한 간척지에도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개체의 크기는 서식지에 따라 차이가 있어 조간대의 것은 키가 작고 기수지역의 것은 키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대 (한국의 염생식물, 2013. 5. 27., 자연과생태)
사실이 이러한데 산 꼭데기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를 써서 蘆峙마을이라뇨!
이는 이 마을의 생김새를 보고 가져온 이름이 변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즉 예로부터 이 마을은 주촌면과 운봉읍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백제와 신라의 국경마을이기도 하였고요.
그래서 일찍이 이 마을은 '갈라지다'라는 의미를 갖는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갈라산이나 갈미봉 같은 이름의 '갈'도 칡이나 갈대와는 관계없이 '산꼭데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이라는 특유의 의미를 지닌 봉우리들입니다.
이 '갈라지다'라는 말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한자를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칡'葛'을 쓰다보니 난데없이 칡이 많이 나는 봉우리가 되었고, 음차를 하다보니 갈→갈대 →蘆를 쓰다보니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갈대가 많은 산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점잖게 주촌면과 운봉읍을 가르는 마을 혹은 峙를 감안하여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던 고개가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령蘆嶺의 옛이름이 갈재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추령秋嶺이 가을 단풍이 예뻐서 추령이 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가르다 → 갈 → 가을 → 秋가 된 것에 불과합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이 노치마을을 지나면서 주촌면을 떠나 이제부터는 운봉읍으로 들어섭니다.
멀리 바래봉이 눈에 들어옵니다.
좌측 노치마을 뒤로는 덕운봉부터 우측 끝 수정봉까지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조금 더 진행하니 좌측으로 고남산846.8m이 보이고....
저 고남산을 보면 백두대간을 할 경우 지나쳐야 하는 바로 앞의 방아재(치)를 생각해야 하고 그 전의 연재 혹은 여원치를 떠올려야 합니다.
방아재는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과 연재와 고남산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태조 이성계는 조금 이따 만날 비전마을의 황산대첩비 그리고 황산과 연관지어야 하기도 합니다.
기회 있을 때 자세히 보기로 합니다.
우측으로 길게 늘어선 지리 서부능선.
둘레길은 농로 옆으로 나 있습니다.
우측 고리봉에서 좌측 세걸산까지....
세걸산에서 바래봉까지.....
10:13
지도 #3 '마'의 곳에서 우틀하여 산으로 들어갑니다.
546.1봉을 지나면서,
운봉읍을 봅니다.
중앙에 운봉의 진산 성산533.5m이 보이고 그 뒤로 장안산1237.4m이 우뚝합니다.
동복 오씨 가족묘를 지나,
10:27
가장 마을로 들어서서,
운동시설이 있는 마을 시설물을 지나,
지도 #4
10:30
60번 도로로 나옵니다.
가장마을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가장리(佳粧里)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터를 뜻하는 농막장(庄) 자를 써 가장리(佳庄里)로 쓰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 있다고 믿고 있다.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다.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다.
10:33
우측으로 덕산마을을 보면서,
우측 깃대봉735.9m 뒤로 세걸산1220.0m을 봅니다.
60번 도로 옆 주촌천 제방 옆 소로로 접어들고,
고남산을 보며 편안하게 걸으면서,
한남금북정맥의 장안산과 그 우측의 백두대간 백운산1278.9m도 봅니다.
장안산이 많이 뭉툭해졌습니다.
우측 서부능선을 좀 당겨 볼까요.
좌측 아래 전북학생교육원이 보이고 그 우측의 세걸산이 보이는군요.
지나온 둘레길.
가야할 둘레길.
지도 #3의 '바'의 곳에 있는 가장교를 건너,
대각선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진행 방향 우측으로 보이는 누룽지 가공 공장을 지나,
10:56
행정리 마을 안으로 들어섭니다.
예전 구도로를 따라 들어서서,
공덕비가 있는,
농협 창고 앞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는 운봉 향교로 진행하는 길이나 둘레길은 좌틀합니다.
운봉 향교의 석전대제(釋奠大祭)
성균관과 지방 향교에서 매년 봄과 가을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해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四聖)과 송조 6현(宋朝 六賢) 중 4현, 우리나라 18현(신라 2현, 고려 2현, 조선조 14현)에게 제향을 올린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 행정교는 건너지 말고 그냥 강아지들이 있는 곳으로 좌틀하여 들어가는 게 나을 뻔 했습니다.
& 여기서 람천을 건너고......
저는 그저 이 이정표를 따라 다리를 건너,
실내 게이트볼장 옆을 지났던 것인데,
이 서어나무 숲을 보려면 행정교를 건너지 말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서어나무숲
행정마을에 있는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은 곳으로, 수백 년된 서어나무들이 아름드리 줄지어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서어나무 숲을 보려면 다시 되돌아 나가 행정교를 건너 진행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다리가 새로 놓아져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군요.
람천입니다.
이 람천은 운봉벌을 적시다 인월에서 풍천을 만나 광천이 되어 산내에서 만수천을 만나 임천이 됩니다.
두류전지를 보면 "동천은 정령 아래에서 흘러나와 운봉읍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광천에 합류한다. 광천은 운봉의 적산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황산을 지나 풍천에 합류한다. 풍천은 비조치에서 흘러나와 운봉현을 지나 인월역에 이르러 광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산내동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람천의 옛 이름은 동천이었군요.
두류전지는 지리산의 물줄기를 세 개로 봅니다.
위 동천을 첫 번째 물로 보고, 두 번째 물줄기는 수분재에서 발원하는 섬진강 그리고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청천이 되었다가 남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를 세 번째 물줄기로 보는 게 그것들입니다.
11;18
이제 운봉읍도 지척입니다.
봄이면 벚꽃이 둘레꾼들을 유혹할 것 같습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 걷다가,
꽁꽁 얼어 있는 람천을 보며 지금이 겨울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운봉읍으로 들어서려면,
남원양묘사업소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촌놈이 이런 걸 다 구경하게 되는군요.
사업소에서 좌틀하여,
연립주택을 겨냥하여 60번 도로로 빠져 나가면,
이제 바로 운봉읍 시내로 들어갑니다.운봉은 구름雲에 산봉우리峰을 씁니다.
두류전지에 의하면 "운봉은 원래 신라 모산현이었다. 운봉 고을은 두류산의 뒤편 허리등성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고도를 헤아려 보면 3분의 1 정도에 위치하여 항상 운기가 조망을 가린다. 그래서 운봉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고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면,
『삼국사기』지리지 고령군조에 기록되어 있는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鼓王)의 어원을 근거로 운봉이란 지명에 대해 그 유래를 추정하여 보았다.
이(伊)는 다스린다는 위(上) 즉 최고의 뜻이다. 진(珍)은 우리말 고어의 ‘들’또는‘지역’의 한자 표기이고, 아시(阿鼓)는 작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진아시(伊珍阿鼓)는 여러 작은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伊)의 수장(首長)으로 대가야 왕을 뜻하고, 진아시(珍阿鼓)는 이하 대수장 또는 상위 수장이 다스리는 가야의 작은 분국을 의미한다.
소국가를 뜻하는 진아시(珍阿鼓)는 진아지(珍阿只) → 진아기(珍阿己) → 진애기→지내기로 음전(音轉) 되었다.
이러한 고어는 아영면 월산리에 마을 지명으로 남아 있다. 구지(舊至), 신지(新至), 외지(外至) 마을이 그것이다. 구지는 구지내기, 신지는 신지내기, 외지는 바깥지내기로, 각각 옛날(舊) 지내기, 새(新) 지내기, 바깥(外) 지내기 마을이란 뜻이다.
가야 연맹체는 소국가들이 강한 혈맹 관계를 유지하던 형제국가 들이었다는 점과, 마을 부근에 위치한 두락리 고분은 규모나 출토 유물로 추측컨대 가야의 상위 수장급 고분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임을 상기할 때, 가야연맹체의 상위 수장급 소국이 존재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아영면 월산리에 존재했던 집단도 맹주국인 고령의 대가야에서 혈연적으로 분파한 소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운봉의 지명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문헌에 기록된 운봉의 고호(古號)는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아영성(阿英城)․아막성(阿莫城)․운성(雲城)․운막(雲莫)․운봉(雲峰)․경덕(景德) 등이다. 이 중에 무산․아영․운막․경덕 등은 오기이며, 운성은 조선 초기 태종의 사위인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작호이다.
또는 아시는 여신(女神) 또는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후에 여성 또는 모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다. 즉 진아시는 지역을 다스리는 어머니(여신)를 뜻한다.
고대에는 산신을 엄산이라고 했는데 엄은 암컷 자(雌), 즉 어머니의 뜻으로 아막의 지명 유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이진아시→ 높은 평원을 다스리는 여신 → 고원의 성모→ 산신→ 엄산 → 어미산 → 암악(雌岳) → 아막(阿莫)
운봉의 고호인 아막(암악)은 모산(母山)으로 차자(借字)되고, 운봉(고원)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진아시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운봉의 지명 변천 과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된다.
① 아막(阿莫) → 아막산성(阿莫山城)→(莫→오기→暮)→아모산성(阿暮山城)→(阿 탈락)→모산성(暮山城)→(훈차)→모산성(母山城)
② 아막(阿莫)→(莫→오기→英)→아영(阿英)
③ 아막(阿莫) → 모산(母山) → 운봉(雲峯)
11:32
운봉사거리를 지납니다.
저 사거리에서 좌틀하면 연재(여원재)를 지나 남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게인적으로 이 둘레길을 저 여원재를 지나게 그렸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참고도 #3
위 그림같이 그릴 경우 둘레길은 역사지리의 한 부분으로 여원재를 볼 수 있고 거기에서 마애불까지 볼 수 있으니 한층 심도 있는 걸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도 #5
11:38
하지만 오늘은 워밍 업을 하는 날이므로 직진하여 운봉초교 사거리로 갑니다.
좌틀하여 직진하면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봅니다.
11:41
그러고는 서림공원 100m 전에서 1구간을 마칩니다.
주천에서 여기까지 4시간 11분 걸렸군요.
이제 14.7km를 걸었으니 바로 2구간을 이어가도록 합니다.
2구간은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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