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맥枝脈에 들기로 합니다.
지맥에 대한 그리움이 컸었습니다.
지맥이라.....
지맥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죠.
보통명사로 쓸 때에는 지맥支脈이라 하여 산맥 그러니까 산줄기에서 가지를 친 '가지 줄기'.
적어도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보았습니다.
산맥이나 지맥이라는 개념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자주 보이던 용어입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이중환의 제증조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무수히 많이 나오는 개념입니다.
산맥山脈과 거기서 가지를 쳐 나간 지맥.
산맥은 누구나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그 어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시는 분들은 그다지 많은 거 같지 않습니다.
보청지맥을 시작하기 전에 워밍 업warming up 한 번 할까요?
산맥山脈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줄기 인식체계
그렇다. 산맥은 이미 우리 선조들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산줄기 인식체계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고 있던 ‘산줄기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한자가 들어온 삼국시대 어느 때부터 우리 조상들이 산줄기를 한자어 ‘산맥’으로 바꿔 부르던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정립된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이름들은 산맥 개념보다 훨씬 후에 생긴 그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산맥이라는 큰 틀 안에 백두대간이니 한북정맥이니 하는 산줄기 개념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산맥과 대간, 정간, 정맥 등은 서로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산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의 산줄기를 ‘조선산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리교과서에서 배웠던 산맥(山脈) 이른바 ‘교과서 산맥’은 우리 조상들이 쓰던 ‘산맥’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적 산줄기 개념으로서의 산맥. 그리고 ‘지질구조선’의 다른 이름인 이른바 ‘교과서 산맥’. 이 둘이 ‘산맥(山脈)’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사용됨으로써 용어의 혼란이 시작된다. 문제는 1903년 ~ 1980년까지의 기간이다. 1903년 고토 분지로가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 일제강점기 식민지교육을 거쳐 1980년 이우형 선생이 서울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산경표라는 책을 발견하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교과서 산맥’이 진짜 우리나라의 산줄기로 알아왔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그들은 허울 좋은 서양지리학을 들여오면서 우리의 백두대간을 참절(斬截)한다.
말이 나왔으니 산맥에 관한 우리 선조들의 기록을 조금 더 살펴보자. 퇴계 이황(1501∼1570)은 퇴계집에서 “방장산은 지리산인데 ~ (중략) ~ 백두산맥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이수광(1563~1628)은 1614년 탈고한 지봉유설에서 비슷한 글을 썼다. 즉 “남사고(1509 ~ 1571)는 항상 말하기를 백두산맥은 이곳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하였다. 그리고 연리실기술의 이긍익(1736~1806)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곧 “남사고가 말하기를 백두산맥이 동쪽의 대해로 들어가 일본이 되고 남쪽으로 들어가 탐라가 되었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것들에 비추어 봐도 ‘산맥’이란 개념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던 용어였다.
한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재종조부가 되는 성호 이익(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 ‘천지문’편에서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라고 못을 박는다. 그러고는 전편에 걸쳐 ‘산맥’이란 용어를 무수히 사용한다.
이 이익의 성호사설은 풍수, 천문과 지리에 관한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이중환의 택리지, 신경준의 산수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산맥과 대간의 주종관계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과학자이자 실학자인 홍대용(1731~1783)은 담헌서(湛軒書)에서 “산맥지대간(山脈之大幹)”이라고 하여 대간은 산맥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9쪽 이하
잘 아시는 내용들이죠?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산맥이 고토의 작품이라고?
“형. 근데 지질구조선이 산맥이라며? 우리가 배운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거야? 원래 산맥이라는 말이 우리가 쓰던 말이었다면서!”
장감독은 제법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다.
“장감독, 아베 노부유키라고 알지?”
“응 . 요새 인터넷을 달구고 있잖아. 지금 수상인 아베신조의 할아버지.”
하긴 그 똑똑한 장감독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있나.
“그가 한 소위 ‘마지막 총독 아베의 소름끼치는 예언’이라는 것도 알지?”
“알지.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는...”
“바로 그거야.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서는 역사와 지리교육에 각별하게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하잖아.”
고토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전 예습을 한 것은 조선의 역사뿐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책은 ‘조선팔역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를 일본어로 번역한 인쇄물이었다. ‘택리지’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지리소지(朝鮮地理小志)’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도 간행된 인문지리서이다. 1881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조선지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풍수지리라는 동양 고유의 철학이자 자연관을 신봉했다. 그것은 길흉화복을 담은 어쩌면 과학이라기보다는 미신적인 요소도 있었다. 즉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세계와의 조화를 공생으로 보는 이 풍수사상은 서양의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의 지리학 역시 자연과 조화된 균형 있는 개발을 모토로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 지리학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그렇다! 택리지에 서양지리학을 가미하자.” 그는 1884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접한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 중 산수(山水)편을 본 첫 감상은 신세계를 본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작고 미개한 나라에서 이렇듯 과학적인 산줄기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과학이 그렇게 발달한 서양에서도 접하지 못한 산줄기 체계. 그것을 이미 100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걸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 받고 있었다니! 고조선 시대에는 만주벌판을 호령했고 고구려 시대에 와서는 한반도 대부분 지역과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이 다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어떠한가! 금속활자나 측우기 같은 것은 세계 최초로 만들었고 그들의 도자기 굽는 기술이나 화약을 최초로 실용화하고 나침반도 신라시대부터....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글자까지 가지고 있으니...
좋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단군과 백두산이렸다! 조선산맥? 백두산부터 흘러내린 조선의 기둥이 조선산맥이라고?
‘곤륜산의 한 가지가 큰 사막의 남쪽으로 오다가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지어 요동 평야가 된다. 평야를 건너 다시 일어나서 백두산이 되는데, 곧 산해경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치고 두 강을 끼고 남쪽으로 향한 것이 영고탑이 되었다. 등 뒤로 뻗어 나간 한 가지는 조선산맥의 머리가 된다.’
그래!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의 팔도총론 도입부에 나온 이 조선산맥! 산맥으로 가자!”
택리지를 본 고토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짐을 느꼈다. 대일본제국을 위한 일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위한 일이었다.
산경표(山經表) 1.
고토는 이미 해동도리보 중의 산경표도 필사본(筆寫本)으로 익히 보았다. 과연 백두대간이니 정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산맥과 지맥(支脈)은 일본에서는 구경도 못하던 산지체계였다. 아니 일본은 물론 자신이 신줏단지로 떠받들고 있던 독일을 비롯한 서양지리학에서도 구경조차 못하던 개념이었다. 고토는 조선의 화려한 과거 문화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실제로 인문지리학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신기했다. 신비감까지 느껴졌다.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에서 산줄기뿐만 아니라 강줄기들도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선의 모든 산줄기와 산의 원천은 백두산이었고 그 백두산의 혼은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을 따라 조선의 온누리를 다 적시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산과 강을 둘로 보지 않고 그것들을 하나로 보고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하나의 산줄기가 다른 산줄기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물이 흐르고 그 산줄기들은 그 물들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반드시 잠기게 됨도 그 산줄기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자분수령’이 무엇인가? 실제 이 뜻은 ‘自’를 “스스로”가 아닌 “~으로 부터”라고 해석을 하여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해법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산자분수령이 산경표 안으로 들어오면 해석을 달리한다. 이른바 관용구로 쓴다는 말이다. 즉 하나는 문법에 맞춰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고 하여 분수령을 고유명사로 파악하는 것 이외에 ‘自’를 “스스로”라는 부사로 해석하여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보통 명사로 분수령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산줄기와 관련하여 후자를 산자분수령의 참뜻으로 새기고 있었다.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자연의 진리. 그 말은 곧 두 산줄기 사이에는 반드시 물줄기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산줄기는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한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역으로 산줄기는 물줄기를 감싸는 울타리가 된다는 말과도 같다.
고토는 산경표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산줄기 산행을 하다보면 삼면봉(三面峰)을 무던히도 많이 만난다. 세 개의 읍 · 면이 만나는 봉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우리가 편의상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분수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어디나 분수령은 널려 있다. 보통명사라는 얘기다.
우리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쓸데없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산자분수령은 산자분수령이다.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되므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구획한다는 말이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이 나온다. 산경표는 산줄기에 계급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다. 맥이라는 게 무엇인가? 혈관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맥이란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산줄기들이 가지를 친다. 그 가지 줄기들은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그러니까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主脈)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支脈)으로 보았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고토는 이해했다. 조선인들은 물줄기를 따라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고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방의 풍습과 언어도 달라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곧 조선인들은 이미 산과 강을 다 꿰차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 아니던가!
두 가지만 없애면 가능할 것이었다. 단군과 백두산이었다. 단군은 역사를 조작하여 신화로 몰아버리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건 역사학자들 몫이니 자신과는 우선 무관하다. 그리고 백두산은 철저히 무시하면 될 것이다. 백두산의 의미 있는 봉우리에 일본 이름을 갖다 붙여놓으면 될 것인데 문제는 백두대간이었다.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 ‘산은 한 줄기로 이어져 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이걸 지워야 했다. 즉 산맥을 지워야 했다. 아니 지우는 것보다 그걸 토막 내어 잘라 없애고 그 토막에 조선인들이 쓰는 산맥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자. 그냥 갖다 붙이면 다시 이으면 그뿐이니 그걸 구조선의 다른 이름으로 만들어 발표하자. 그래야 조선인들은 당파 싸움 하듯 산맥이 옳으냐 산줄기가 옳으냐 서로 헐뜯고 싸우겠지. 나머지는 일본 정부에서 알아서 하겠고....
졸저 전게서 157쪽 이하
그렇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산맥 = 산줄기였습니다.
그 산줄기 안에 대간, 정간, 정맥을 상정하였고....
그것을 족보 식으로 편찬한 책이 바로 산경표 아닙니까?
나라의 산줄기를 집대성한 세계 유일의 산 족보책인 산경표.
그 산경표의 기본 정신은 산자분수령이었습니다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 책이 언제 펴냈는가를 파악하는 기준은 지질, 활자, 편집, 제본 방식 등 여러 가지를 보고 추정을 한다.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책의 내용에서 시대상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조선광문회본에서 여지고는 신경준이 편찬한 것이라고 했다. 반대해석을 하자면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저자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찬자(撰者) 미고(未考)”라고 하여 “편찬자를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이제 ‘산경표’의 내용 중 중요한 사항 몇 가지와 관련 문헌들을 조석필의 분석을 참고하여 좀 더 세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⓵산경표를 처음 발견한 이우형은 문헌비고를 원전으로 본다. 즉 신경준이 문헌비고의 산경표를 집필한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가 집필한 것이며 편찬 시기는 순조가 즉위한 1800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동국문헌비고가 1770년 편찬된 거라고 했으니 30년 정도 더 있다가 나온 책이 산경표라는 것이다.
⓶이에 박용수는 여지편람(輿地便覽)의 산경표를 원전으로 본다. 여지편람? 또 골머리 아프게 책 이름이 하나 더 나온다. 그래 여지편람은 또 뭔가? 지난 번 잠깐 봤었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5개로 본 것은 해동도리보의 산경표나 여지편람의 산경표 모두 같다. 다만 해동도리보의 그것이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본 반면 여지편람의 그것은 1대간 2정간 12정맥으로 봤다. 즉 여지편람의 신경표는 낙남정맥을 정간으로 본 것이다. 한편 여지편람은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들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두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책들의 제목이 재미있는 게 건곤(乾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라는 제법 주역(周易)의 냄새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어쨌든 이 여지편람의 1부는 ‘건책(乾冊)’, 2부는 ‘곤책(坤冊)’ 이렇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 해당하는 건책은 ‘산경표’ 그리고 2부에 해당하는 곤책은 ‘거리정리표’라는 속제목이 각 붙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2부인 곤책은 볼 것도 없다. 다만 1책인 산경표만 보면 되는데 박용수는 이 건책이 산경표의 원전이며 당연히 그 편찬 시기는 1769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⓷현진상은 여러 가지를 감안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낸다. 첫째 산경표는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원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증정문헌비고도 보지 못하고 동국문헌비고만 보고 편찬된 것이다. 또한 “ **문헌비고 본문을 보면...”이라는 글에서 신경준이 산경표의 편찬자가 절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근거를 더 제시하는데, 영조의 묘호(廟號) 즉 임금이 죽은 뒤에 붙이는 이름인 ‘영종’을 제시한다. 즉 이 영종이라는 묘호를 근거로 지명을 살펴보면, 한북정맥 상에 있는 추모현은 원래 사현이었던 것을 영종45년에 개명을 한 것이라는 기록이 산경표에 나온다. 영조45년이면 1769년으로 영조는 1776년 사망하였으므로 최소한 산경표는 1776년 이후에 편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1769년 신경준이 편찬하였다고 하는 박용수의 이야기는 우선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⓸학자들 중 산경표 혹은 우리 산줄기에 가장 관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는 역시 재조(在朝) 세력의 학자답게 눈을 일본으로 돌린다.
"일본 정가당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①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②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 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산경표에는 19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또한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양보경 교수의 얘기는 결국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 게 아니지만 여지고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얘기다.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과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시기 및 원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보면 이우형, 현진상, 양보경의 견해가 비교적 서로 비슷한데 비해 박용수는 시기를 좀 이르게 본다.
정리하자면 필사본 산경표는 여러 권 있을 수 있다. 그러한 필사본 산경표 중 기술한 바와 같이 주목 받고 있는 두 가지 본이 규장각 소장의 ‘해동도리보’ 중의 산경표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한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다.
그리고 그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확실하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에 덧붙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서 즉 여지고나 산경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공인한 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토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 졸저 전게서 416쪽 이하
어쨌든 산경표에는 대간, 정간, 정맥까지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조들께서는 그 하위 개념은 20세기를 살아갈 우리 후손들이 선용하도록 우리에게 위임하여 주셨습니다.
슬기로운 우리 선조들의 지혜의 산물인 것이죠.
정간에 대해서는 애기가 길어지므로 시간이 될 때 다시 보기로 하고...
기맥(岐脈) 보충
여기서 팁 하나. 기맥이라는 개념은 산경표에는 없는 개념이다.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인 조석필 선생이 산경표를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일정한 세력은 있으나 산경표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몇몇 산줄기’를 기맥으로 부르자고 했다. 남한의 산줄기 중에서는 가령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르는 한강기맥. 영산강의 서쪽 벽인 영산서기맥 등이 그것이다. 대한산경표에서는 이외에 몇 개의 줄기를 더 제시했는데 이것도 다음 기회로 미루자.
- 졸저 전게서 132쪽
기맥岐脈이라....
저도 이 기맥이라는 말을 정맥과 지맥의 중간자적인 위치 혹은 계급으로 보아 이를 인정하였고 나아가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에도 마찬가지 취지로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저는 이 기맥이라는 개념을 과감히 포기하였습니다.
산경표 이하의 개념은 모두 지맥枝脈으로 일원화 하자는 것입니다.
산경표에도 없는 개념인 하위 개념들을 쓸데없이 세분화 할 필요가 있느냐는 취지에서 입니다.
용어의 단순화 그리고 개념의 통일을 위한 선결작업입니다.
사실 지금도 기맥을 보는 시각들은 민간 학자들 사이에도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조석필 선생은 그저 10대강에 속하지 않지만 일정한 세력을 가진 산줄기 가령 영산북기맥과 땅끝기맥 그리고 지류를 구획하는 지맥 산줄기이면서 세력이 큰 산줄기 가령 한강기맥과 압록기맥을 제시하였고,
조석필 선생의 이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게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인데 사실 박선생님은 위 조석필 선생의 이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건 사실이고....
나아가 자하 신경수 선생 같은 분은 한강기맥 같은 것을 그 지위에 걸맞게 '한강정맥'으로 급을 격상시켜야 한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시니....
사실 제가 산줄기를 배운 것은 위 선각자들로부터이고 따라서 그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분들의 우리 산줄기에 대한 사랑 백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산경표에 나오지도 않는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충실하지도 않은 이 기맥을 고집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특히 박성태 선생과 신경수 선생은 우리 선조들이 위 '산경표'에서 당신들께서 암시하여 주신 '산자분수령'으로 정맥의 하위 개념을 도출해냅니다.
바로 지맥支脈입니다.
문제는 산의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대간이나 정맥에서 가지를 친 이 지맥들을 보니 그 수가 너무도 많다는 데 있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두고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이 알려준 산자분수령에 입각하여 도상거리 30km 이상의 산줄기를 지맥-여기서의 지맥은 枝脈임-으로 하자고 약속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냥 30km이상의 산줄기가 아니고 산자분수령에 충실한 30km이상의 산줄기 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지맥을 보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
지맥支脈이 위 조건에 합당하면 枝脈이 됩니다.
전제 조건인 산자분수령을 봅니다.
산자분수령이라!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이 무엇입니까?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 Ridgeline is genuine in that it never crosses water
“그리고 ‘산줄기’와 ‘물줄기’를 보자. 아까 한 얘기 반복해서 얘기할 게.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봐. 하나의 산줄기(A)에서 다른 산줄기(a)가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분명 물줄기(b)가 나오고 그건 분명 계곡을 형성하게 돼. 크든지 작든지 말이야. 그렇지 않아? 산줄기가 분수령이 되는 건 확실하고 그 산줄기에서 내려 온 물들은 다 계곡으로 모이잖아? 그 개울이 모여서 천(川)이 되고 그 천(川)이 모여 조금 더 큰 천(川)이 되고 그러고는 그게 모여서 다시 강(江)이 되고, 그 강(江)들이 모여 바다로 흘러가고... 이게 자연의 이치 아니겠어?”
“그건 알지. 그런데 또 합수점이라는 건 또 뭐야? 산줄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고?”
“합수점(合水點). 말 그대로 물이 모이는 지점이지. 양수리에 가면 ‘두물머리’ 있지? 합수점의 우리말이 두물머리 아니겠어? 양수리의 양수(兩水)가 곧 두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한 개의 물줄기 가령 남한강과 다른 하나의 물줄기 가령 북한강이 만나는 곳. 그곳이 두물머리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두물머리가 무수히 많은 셈이지. 그 두물머리를 한자로 쓰면 합수점이고.”
자전거를 타는 장감독이니 두물머리 얘기를 꺼내니 귀가 번쩍 열리는 것 같다.
“양수리. 나도 잘 알지. 자전거 타고 가봤던 곳이니. 그런데 그 합수점이 산줄기와 무슨 상관이야?”
“그럴 줄 알았다.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야. 조금 전 얘기했어. 이 합수점은 산줄기를 얘기할 때 아주 중요한 개념이야.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산경표라는 책은 이 ‘합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론이야. 그 핵심은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고.”
“정말 머리 아프게 만드네. 산자분수령은 또 뭐야!”
장감독이 짜증을 낼만도 하다. 사실 천왕봉에 아직 오르지도 못했다. 즉 대간길에 아직 한 발도 내딛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슨 복잡한 얘기를 많이 하는가 하는 불평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그래. 간단하게 산자분수령을 보자. 앞으로 계속 나올 얘기니까 미리 간 좀 보자는 거야. 지도 좌측을 보면 가장 굵은 선이 백두대간이야. 그리고 좌측 위로 남덕유산이 보이지? 남강기맥도 보이고. 이게 백두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가지를 쳤다는 걸 보여주는 개념도야. 앞으로 자꾸 애기할 거지만 우리나라 산줄기에는 반드시 계급이 존재해. 위계질서가 명백하다는 것이지. 같은 급이라도 서열이 있게 마련이고. 즉 군대에서 병장이라고 다 같은 병장이 아니잖아? 이게 아주 재미있는 많은 것을 보여주게 돼. 그러니까 그 계급 개념들의 한 가지인 기맥(岐脈)이니 지맥(枝脈)이니 하는 것들은 나중에 보기로 하자. 우선 백두대간(A)에서 남강기맥(a)이 가지를 쳤다는 것만 생각하자고. 자, 봐. 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갈리는 그 사이로 남강(b)이 흘러나오지? 아까 얘기했잖아. 한 가지에서 다른 한 가지를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물줄기가 하나 흐르게 된다는.... 바로 그 원리야.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이를 영어로 표현해보면 'Ridgeline is genuine in that it never crosses water,' 정도가 되겠지. 이따 자세히 볼 거니까 우선 개념만 알아둬.”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법적인 해석은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산 곧 산줄기는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고 해석하자. 이를 ‘산자분수령의 제1법칙’이라고 한다. 여기서 ‘自’를 스스로란 ‘부사(副詞)’로 본 거다. 고로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못하니까 물을 만나면 그 산줄기는 맥을 다하게 된다. 그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합수점도 그냥 합수점이 아닌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졸저 전게서 39쪽 이하
그런데 이 산자분수령을 우리 산줄기의 대원칙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어법상 문제가 좀 있습니다.
산경표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골머리 아프네. 결국 산경표의 저자는 모른다는 얘기구만. 앞으로 할 얘기는 산경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 그런 거잖아?” 머리에 쥐가 오른다.
“그렇지 아까 얘기했지? 산경표는 그 당시 조선 지리정보의 총아라고! 뭐 다 아는 내용이니까 그냥 지나가도 되지만 중요한 건 이것과 뒤에 나올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와 비교해 보는 일이야. 이런 건 지금 당장 산행을 하면서 써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니 골머리 아플 필요도 없어.”
“형, 그건 그렇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자분수령하는데 그 산자분수령이란 말이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 혹은 스스로 분수령이다.’ 그 말 맞아? 다른 얘기도 있던데.”
장감독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고 언젠가 해줘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래. 맞아. 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문구는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오는 말이야. 그리고 처음에는 나도 그걸 그렇게 이해했었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산경표는 당연히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산경표의 대원칙은 ‘산자분수령’이라고 알고 있다. 그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짐작컨대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보면 바로 그 구절이 나온다.
한 번 읽어 보자.
東史曰 朝鮮音潮仙 因仙水爲名 又云鮮明也 地在東表日先明 故曰朝鮮
‘동사’에 이르기를 조선(潮仙)이라 소리나는 ‘朝鮮’은 선수(仙水)로 말미암아 이름을 삼음이요 또한 이르기를 선명(鮮明)한 것이라,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뜰 때 먼저 밝아오므로 조선이라 한다 하였다.
山經云 崑崙一枝 行大漠之南東 爲醫巫閭山 自此大斷 爲遼東之野
‘산해경’에 이르기를 곤륜의 한 갈래가 대막(넓은 사막)의 남동으로 가 의무려산이 되고 이로부터 크게 끊어져 요동 벌판이 되었다.
漉野起爲白頭山 爲朝鮮山脈之祖 山有三層 高二百里 橫亘千里 其巓有潭 名謂達門 周八百里 南流爲鴨綠 東分爲豆滿
마른 벌이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조선산맥의 시조다. 산은 셋으로 층졌는데 높이는 200리, 가로는 1000리에 걸쳐 있으며, 그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어 이름은 달문이라 하고 둘레는 800리이며, 남으로 흘러 압록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이 된다.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爲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鐵嶺一枝 東南走起 爲道峰三角 而漢水經其中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연지봉 소백산 설한 등의 재가 되고, 철령의 한 갈래가 동과 남으로 달려 일어나 도봉과 삼각이 되니 한수가 그 가운데를 지난다.
위에서 보다시피 山自分水嶺은 ‘산은 분수령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산자분수령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졸저 전게서 455쪽
계속하여,
어쨌든 학자들은 산자분수령에 대해서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분노하고 싶은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우선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자분수령.
절대적인 개념이라고. 지금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산줄기에서 다른 하나의 산줄기를 가지 칠 때 분명 그 사이에서는 골이 형성되고 그 골에는 물이 생겨 그 물은 내려오면서 천이 되고 그 천들이 모여 강이 되어 바다로 가지 않는가?
그리고 그 천이 합칠 때 반드시 하나의 크던 작던 산줄기 하나가 그 합수점으로 잠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가? 즉 그 산줄기는 천이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을 만나면서 그 맥을 다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두 물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적어도 5,000만 년 정도는 진리였다. 움직이지 않는 진리.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라는 문장도 진리다. 하지만 앞으로 1억 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山自分水嶺은 “분수령으로부터 오는 산은....”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며?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문장 속에 들어 있는 걸 해석할 때 그렇고 우리가 얘기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관용구(慣用句)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자분수령을 두 가지로 읽었다고 보면 된다.
관용구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관용적으로 둘 이상의 단어가 결합하여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언어 형태. 흔히 비문법적이거나 문법적이더라도 구성 요소의 결합만으로 전체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것을 고유명사로 인식하지 않고 보통명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만 그런가? 다들 그렇게 이해했던 거 아닌가?
또 다른 견해를 보자. 대동여지도 숭실대 본을 보면 ‘東分爲豆滿江 自分水嶺’이 되어 강자분수령이 된다. 위의 다른 대동여지도를 보면 분수령에서 물이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분수령이라는 지명이 물을 나누는 산줄기(고개)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므로 이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山自分水嶺은 이따 산맥을 이야기할 때 또 이야기해야 하니 여기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졸저 전게서 462쪽
지루하시죠?
글을 읽는다는 것은 피곤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역일 테니까요.
산행기라면 그저 사진이나 몇 장 올리고 정상석 앞에서 환호지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는데.....
어쨌든 이 산자분수령을 가지고 오늘 진행하는 지맥에 대입을 해보겠습니다.
이는 사실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와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일 수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보기 위해서는 기존 개념인 신산경표를 보는 편이 빠른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아직까지도 지맥은 한자로 쓰면 支脈입니다.
가지 줄기라는 얘깁니다.
개념도는 신산경표에서 얻어왔습니다.
참고도 #1
위 개념도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한남금북정맥이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백두대간에서 팔음지맥과 각호지맥도 가지를 쳐 흘러나가고....
한편 한남금북정맥에서는 금적지맥과 팔봉지맥이.....
중요한 물줄기는 미호천, 보청천 그리고 초강이 금강과 합수되는 모습을 각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경표를 얘기할 때 그 근본은 산자분수령이라고 했습니다.
한 줄기에서 다른 줄기가 가지쳐 나갈 때 그 줄기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물줄기 하나가 발원되는데, 그 가지 줄기는 반드시 그 발원된 물줄기와 그 보다 상위 등급의 물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된다.
바로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입니다.
여기에 대입을 해보면 백두대간의 봉황산에서 한 줄기 가지를 쳐 나갈 때 그 사이에서 나오는 물줄기.
바로 보청천이죠.
그러면 당연히 이 봉황산에서 가지를 친 줄기는 보청천과 그보다 상위등급의 강 즉 금강과의 합수점으로 가면 됩니다.
줄기의 마지막 합수점 부근을 봅니다.
참고도 #2
보시다시피 위 참고도 #2를 보면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와의 차이점은 명백해 집니다.
즉 신산경표는 산경山經에 충실하여 산줄기가 긴 쪽으로 가는 반면 대한산경표는 산줄기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산자분수형의 제2법칙에 충실하여 합수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맥을 그으려면 모母줄기에서 가지를 쳐 나오는 지맥을 그리는것보다 합수점에서 잠기는 지맥의 끝에서 모母줄기 분기점을 쫓아 올라가는 편이 더 쉽습니다.
바로 수체계樹體系 이론입니다.
그러니 작명법도 이런 논리에 맞춰야 할 것입니다.
신산경표가 산경을 중시하여 그 줄기의 이름을 가장 높은 봉우리 즉 팔음산771.3m의 이름을 차용하여 팔음지맥이라고 지은 반면 대한산경표는 물줄기를 중시하여 그 물줄기의 이름인 보청천을 따서 보청지맥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한자어 표기도 報靑枝脈이라고 하는 하여 비로소 이때 이 용어는 고유명사가 됩니다.
그리고 1물줄기 1지맥의 원칙에 의하여 보청천의 역할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여기까지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이웃집 친구들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신산경표의 금적지맥과 팔봉지맥의 문제입니다.
참고도 #3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부근의 큰 물줄기는 10대강에 해당되는 금강과 그러고는 그 지류인 보청천과 미호천입니다.
보청천은 조금 점 자세히 살펴봤으므로 더 볼 것이 없고 다음 물줄기는 미호천입니다.
미호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는?
그렇죠.
신산경표에서 팔봉지맥이라고 얘기하는 지맥枝脈이죠.
물줄기를 중시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그렇습니다.
미호지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는 다행히 신산경표의 팔봉지맥과 대한산경표의 미호지맥이 이름만 다르지 주행방향은 일치합니다.
이유는 팔봉지맥이 합수점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대한산경표에서는 산자분수령의 기본원리인 이 합수점으로 가는 형태를 제1유형 '합수점'형으로 이름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미호천과 미호지맥의 역할은 이걸로 끝납니다.
문제는 한남금북정맥의 461.1봉에서 분기하여 구룡산548.7m, 금적산651.6m를 거쳐 금강과 보청천이 만나는 합수점 북단으로 잠기는 이른바 신산경표의 금적지맥 처리 문제입니다.
신산경표는 굳이 산자분수령과는 무관하게 산경만 따라가니 이 줄기를 처리하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줄기에 산경표의 대원칙인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이 금적지맥은 조각조각 분해되어 즉 무수히 많은 여맥 정도만 생길 뿐 그 산줄기의 실체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대한산경표에서는 이를 '울타리'문제로 처리하기로 합니다.
참고도 #4
이때 우리 선조들의 유지를 떠올립니다.
즉 우리가 이 지맥을 만든 이유는 선조들이 이 산줄기를 우리 생활에 선용善用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라는 당부 말씀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이 줄기도 합수점으로 가는 줄기가 맞기는 맞습니다.
비록 물줄기가 이 줄기를 에워싸는 형태가 아니어서 '1물줄기 1지맥'의 원칙에 위배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선조들의 당부 말씀을 받들어 이 줄기의 유형도 지맥에 편입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② '하천(지류 포함)의 수계 산줄기'로 1유형이 아닌 산줄기'를 한 유형으로 넣습니다.
이를 물줄기의 한 쪽을 에워싸고 있는 줄기이므로 이를 '울타리' 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청천의 북쪽으로 잠기는 물줄기이므로 '보청북지맥'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상정해 봅니다.
아까 보청지맥이 보청천으로 가는 줄기가 아닌 그 아래 물줄기인 초강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여야 할까요?
즉 '초강 북줄기' 문제입니다.
참고도 #5
하지만 대한산경표, 신산경표 어느 이론에 의하더라도 이는 도상 거리 30km가 되지 않는 자투리 줄기에 불과해 고려할 가치가 없어집니다.
즉 이미 지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이므로 이 줄기가 30km가 넘는다면 이 줄기를 독립된 지맥으로 보아 초강북지맥으로 이름을 붙여줄 수 있건만 육안으로 보더라도 2km가 넘지 않으므로 일반 여맥에 불과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거리가 있습니다.
바다로 향하는 산줄기나 내륙에서도 호수 등으로 돌출된 산줄기의 처리 문제입니다.
이들도 위 조건에 엄격하게 적용시키면 이런 유형의 줄기들은 토막토막 동강이 나 결국 산줄기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이걸 구제하고자 대한산경표에서는 지맥의 조건에 이 제3유형의 산줄기를 하나 더 구분합니다.
이른바 '산줄기형'입니다.
참고도 #6
이런 유형의 지맥이 바로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신선지맥입니다.
물론 대표적인 산줄기로는 백두대간이겠죠.
그저 산경山經 즉 산줄기의 길이 때문에 지맥에 편입된 경우이므로 즉 물줄기와는 무관하므로 이는 신산경표의 산이름을 그대로 붙이기로 합니다.
그러니 그 예로 신선지맥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타당합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대저 지맥이라고 하려면 산자분수령의 취지에 맞는 합수점으로 가는 산줄기 중 대간, 정맥, 지맥에서 가지를 친 도상거리 30km 이상의 산줄기를 말합니다.
이것이 제1유형으로 '합수점'형이라고 합니다.
이게 원칙이고 기본입니다.
위에서 살펴 본 보청지맥과 미호지맥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제2유형이 바로 보청북지맥으로 이를 '울타리'형이라고 합니다.
주 산줄기도 아니면서 주물줄기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산줄기라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3유형이 '산줄기'형으로 바다나 호수로 가는 산줄기 중 산줄기의 길이 때문에 지맥에 편입된 경우 등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산경표는 175지맥으로 정리를 합니다.
'산으로 박흥섭'님이 수고 해주셨습니다.
산으로님은 자기 역할 다 하셨는데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작업을 마무리 못했습니다.
아마 올해 8월을 넘기지 않고 대한산경표가 세상에 선 보일 수 있도록 작업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너무 장황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7. 12. 31. 일요일
2. 동행한 이 : 송백산악회
3. 산행 구간 : 보청지맥 1구간 (화서 무동마을 ~ 봉황산 ~ 태봉산 입구 ~ 도림사 ~ 천탁산 ~ 개터재)
4. 산행거리 : 13.55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무동 마을 |
|
09:17 |
|
|
봉 황 산 |
1.87 |
10:07 |
50 |
|
태봉산 입구 |
2.63 |
11:09 |
62 |
5분 휴식 |
도 림 사 |
5.22 |
12:25 |
76 |
10분 휴식 |
천 탁 산 |
1.23 |
13:10 |
45 |
|
개 터 재 |
2.60 |
13:59 |
49 |
|
계 |
13.55 km |
04:42 |
04:27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09:17
오늘 진행할 보청지맥 들머리는 백두대간 상 상주시 화남면과 화서면의 면계에 있는 봉황산입니다.
그 봉황산에 들기 위하여 접속 구간 들머리로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무동마을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즉 백운사로 올라 지맥의 591.4봉을 중간경유지로 이용할 요량입니다.
이 무동마을부터 보청지맥 시작점인 봉황산740.8m까지는 약 1.7km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 걸어보니 1.87km 정도 되더군요.
자,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노면은 어제 온 눈으로 살짝 덮혀 있어 미끄럽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백운사로 오르는 비알이 상당합니다.
09:27
키가 큰 소나무가 백운사 절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백운사 뒤로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가 591.4봉인데 상당한 난이도입니다.
하긴 지맥이니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등로요?
물론 대간길을 이용한다면 그런대로 눈에 익은 길을 이용할 수 있지만 지맥꾼들에게 그런 고속도로는 사치奢侈입니다.
그저 제일 빠른 길로 무조건 치고 올라가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
말 그대로 사륜구동입니다.
더욱이 이런 시즌이면 낙엽이 푹 쌓여 있어 그나마 선답자들이 밟고 간 흔적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저 그동안 지맥산행을 하면서 터득한 '감感'으로 올라가는 것이죠.
상당히 거친 된비알입니다.
이렇게 봉황산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맨바닥으로 떨어져야 하니 오늘 난이도는 접속구간 들머리 만큼은 '상上'입니다.
우측으로 봉황산이 보이는군요.
일단 보이기만 하면 레이더 망에 포착된 것이니 적어도 30분 이내는 도착입니다.
591.4봉을 지나 잠시 내리막이지만 이내 오르막입니다.
10:07
그러고는 정상석과,
2등급 삼각점(관기24)이 있는 봉황산입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상주시 화서면과 화남면의 경계로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이죠.
오랜만에 백두대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화서 ~ 화북 간 도로인 49번 도로 건너 이안지맥으로 올라가는 능선으로 극락정사가 자리해 있고 그 끝에는 두루봉874m이 있습니다.
이 백두대간의 갈령삼거리에서 가지를 쳐 두루봉으로 진행한 줄기 바로 이안지맥입니다.
지맥은 그 우측의 803.4봉을 지나 우측으로 힘차게 흐르고 있군요.
그 우측으로 멀리 남산819.9m이 조망되나,
그 이외의 곳은 미세먼지로 인해 식별 불가합니다.
속리산 쪽의 형제봉이나 천왕봉 역시 마찬가지로군요.
아이젠을 착용하고 5분 정도 머물다 오던 길로 되돌아 내려갑니다.
10:12
이제부터 보청지맥 1구간을 시작합니다.
지맥길은 온전하게 상주시 화서면 안입니다.
상당한 된비알입니다.
올라 올 때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죠.
10:18
헬기장을 지나면서 멀리 이따 진행할 천탁산683.7m을 봅니다.
그런데 저 천탁산이 최근 지도에는 川濁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예전 지도에는 川澤山으로 표기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보통 천택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신법우선의 원칙'에 따라 저는 천탁산으로 부르기로 합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니....
10:22
두 번째 헬기장을 지난 다음,
내려온 봉황산을 한 번 돌아보고는,
10:29
백운사 갈림봉인 591.4봉입니다.
직진하여 내려가는 지맥길에는 '통덕랑 이규보'의 묘를 지납니다.
통덕랑은 정5품 상上의 벼슬이라고 합니다.
10:32
고도를 많이 떨어 뜨렸습니다.
뒤룰 돌아보고는 바위봉은 좌측으로 돕니다.
산우 '도요새'님의 흔적을 보고....
희미한 지맥길을 앞 사람의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갑니다.
10:47
좌측의 435.4봉을 보면서 내려갑니다.
우측으로 천탁산은 가야할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군요.
10:53
부드러운 능선으로 내려와,
10:57
우측 놋점 마을 뒤로 당진 ~ 울진 고속도로를 봅니다.
우측 중앙에 구병산876.3m 연봉이 보이기 시작하고....
고속도로 바로 우측에 붙어 있는 시루봉416.9m이 이색적으로 보입니다.
조금 우측으로 보니 871.8봉이 높게 보이고......
조금 전 내려온 591.4봉인 백운사 갈림봉을 우측으로 봅니다.
10:59
펑퍼짐한 435.4봉을 지나,
11:09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태봉산343.1m을 봅니다.
왕실 혹은 계급이 어느 정도 되는 집안의 아기의 태胎를 묻은 곳을 태봉胎封.
묻은 산을 태봉胎峰이라고 하는데 이 태봉산도 그런 곳인가?
지도 #2
11:13
화령공동묘지를 지나,
25번 도로 삼거리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말썽 많은 타워 크레인 좌측으로 세한PC굴뚝 좌측 삼거리를 봅니다.
지맥 길은 저 공장들 위로 진행을 하여야 하나 진행이 불가하니,
저 삼거리를 보고,
벼육묘 공장 우측 화살표를 따릅니다.
11:18
봉산서원, 옥연 입구, 도림사 등의 표석이 세워져 있군요.
우틀하여 고속도로 육교 하단을 지나면서,
봉황산을 봅니다.
11:32
지도 #2의 '나'의 곳에서 우측 논길로 들어가 저수조를 지나면서 가로막고 있던 공장을 거쳐온 지맥길과 다시 만납니다.
지맥길을 보면서 아쉬움에 봉황산 일대를 봅니다.
봉황산에서 좌측 717.7봉을 지난 대간길이 고도를 낮춘 다음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봉황산 앞 우측에 있는 봉이 백운사 갈림봉인 591.4봉.
좌측 중앙의 뾰족봉이 691.8봉.
11:38
저수조를 넘어 달성마을을 지나,
11:50
임정 마을을 지나 지도 #2의 '나'의 곳인 묘지로 오르는데,
난데없이 삼각점 같은 게 나오는군요.
국토지리정보원 삼각점은 분명 아닌데....
좌측으로 백두대간 화령재에서 가지쳐 올라온 원통산을 봅니다.
11:55
임도를 빠져나가면,
12:00
지도 #2의 '다'의 곳에서 다시 도로를 만납니다.
양지 바른 묘지에서 가지고 온 빵을 먹습니다.
지도 #3
지맥길은 도로로 이어지고....
황산마을에 들어서 도로 좌측의 칠현영각을 지나,
12:25
도림사 우측으로 접어듭니다.
도림사는 절집이라는 느낌보다는 깨끗한 전원주택이라는 인상입니다.
조금 전 지나온 종묘장 뒤로 원통산594.5m이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동면과의 면계인 저 원통산 라인이 화서면을 크게 에워싸고 있군요.
잠시 잡목이 진행을 방해합니다.
도림사를 지나 천탁산까지는 그저 묵묵히 올라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조망도 없고 상당한 된비알을 치고 올라가야 천탁산에 이를 수 있습니다.
13:10
천탁산에는 백두사랑에서 부착해 놓은 산패와,
2등급 삼각점(관기22)이 박혀 있습니다.
그러고는 이 천탁산에서 화남면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이 보청지맥은 지금껏 화서면 안에서 진행을 했으니 결국 이 지맥은 면계 역할도 못하고 있다는 결론입니다.
하기야 이 상주시는 백두대간길에서 가장 낮은 곳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대간길조차 면계 역할도 못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하물며 지맥길이야....
산패의 주인공 백두사랑과는 2년이 넘게 함께 지맥 산행을 했습니다.
노모 문제로 무박산행이 어려워 근자에는 함께 하지는 못해지만 마음만은 늘 함께 합니다.
산패옆에 제 표지띠 한 장을 걸어둡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화서면과 화남면의 면계믈 따라 걷습니다.
내려가야죠.
좌측으로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보고.....
13:29
587봉을 지나,
13:37
뒤로 천탁산을 보고,
13:45
484.8봉을 지납니다.
그리고 여기부터 화서면을 버리고 온전하게 화남면 안으로 들어가 지맥길을 진행합니다.
안부를 지나,
바로 오늘의 날머리인 개터재로 떨어집니다.
유냔히 상주에는 '개'자 들어가는 고개가 많군요.
왕실재라고도 불리는 개터재 그리고 개머리재.....
이 '개'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같은데....
13:59
이 개터재에서 오늘 구간을 마무리하고 막걸리 몇 잔을 먹고는 백두대간 휴게실로 이동을 하여 늦은 점심에 반주를 먹고 귀가를 합니다.
송백과는 처음 산행이지만 아는 분들도 만나고...
지맥꾼들 정도 되면 그저 편한 분들이기 때문에 낯설어 할 필요도 없고 좋군요.
다만 2구간 한 번을 쉬고 또 이어가야 한다는 게 저로서는 좀 부담이군요.
3구간 때 뵙겠습니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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