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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지리서부(북)능선 + 간미봉능선(인월 마을 ~ 덕두산 ~ 바래봉 ~ 세걸산 ~ 만복대 ~ 성삼재 ~ 간미봉 ~ 구례 휴양림)30.27km

 

 

태극종주코스

 

이곳에서 좌측으로 작은 샛길 하나가 보인다. 이른바 덕유태극종주코스 중 장수 방향 루트다. 간단하게 덕태라고도 부른다. J3클럽이라는 중장거리 산행을 하는 모임을 만든 배병만이 개척한 코스다. 수승대 ~ 갈미봉 ~ 백암봉 ~ 덕유서봉 ~ 영구산 ~ 학선교를 잇는 약50.3km에 달하는 거리다. 참고로 태극종주코스는 이곳 덕유태극 코스와 지리태극, 설악태극, 속리태극, 소백태극, 영남알프스태극 등 6개의 코스가 꾼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태극이란 단어가 들어가니까 대강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태극종주에 대해서 얘기 좀 해 줘.”

그러자. 앞으로도 계속 나올 테니까. 태극종주는 말 그대로 태극 문양 중 음과 양의 경계선인 ‘~’ 모양의 능선을 이어가는 것을 말하는 거야. 이게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 경 전후였지. 지리산부터 시작됐어. 지난 번 얘기한 지리의 서부능선 + 주릉 + 동부능선의 이음이라고 보면 돼. 그런데 처음 그려진 이 지리태극종주의 그림을 보면 모양이 좀 일그러진 것을 발견하게 되지. 그래서 동부능선 방향으로 조금 더 수정을 하여 수양산 ~ 사리마을로 가는 지금의 지리태극코스를 확정하게 됐지. 배병만이 그 코스를 새롭게 개척한 게 아마 2001년경일거야. 그 다음에 나온 게 설악태극 종주 즉 설태, 덕유, 속리, 소백이 계속 이어졌지. 영남알프스 태극종주 만큼은 배병만이 아닌 울산의 모 산악회 작품이고.”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28쪽 이하

 

위 책에서 언급했다시피 지리태극종주는 지리의 서부(북)능선 + 주릉 + 동부능선의 이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부능선 방향은 그렇다치고 동부능선 방향이 좀 복잡하죠.

처음에는 청계마을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산청군 단성면 사리마을 쪽으로 옮겨졌으니 말입니다.

이름처럼 '태극' 모양에 최대한 가깝게 하려는 노력 그리고 교통의 편의를 고려한 개정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아무래도 지리산의 대명사인 남명 조식 선생의 '덕산德山'과 산천재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J3 배방장'님이 보통 사람입니까?

 

어쨌든 'J3 클럽'의 배병만 방장의 노력으로 지금은 거의 완전한 모양으로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확립되었으며 지리태극 완주를 꿈꾸는 '꾼'들은 덕산의 사리마을을 들머리 혹은 날머리로 아용하고 있고 이렇게 힘으로써 '지태'는 어엿하게 '꾼들의 로망'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혹자들은 동부능선의 926봉에서 그 끝을 감투봉 ~ 이방산을 꺾어 덕천강과 시천천의 합수점으로 돌리고는 '이방산태극종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자주색 : 지리태극종주 라인

녹   색 : 소위 이방태극 라인

 

어찌보면 참 개탄스런 행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좋아보일 수도 있겠지만 산이름이나 능선 그리고 산줄기 이름들은 고유명사이므로 한 번 굳어지면 이걸 고치기도 상당히 힘이 듭니다.

'다양성이란 사상이나 생각의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이런 사실적인 것에 대한 다양성은 아니지 않습니까?

배병만 님이 지리태극종주 코스를 제안한 뒤, 산꾼 대부분이 이를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하여 지금은 '지태'하면 '구인월 ~ 사리마을'로 굳어졌지 않습니까?

여기에 다른 태극도 아닌 지리태극이라는 이름으로 코스를 돌린다면 그 아종亞種이 또 여러 개 생길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그 혼란스러움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산꾼에게로 돌아옵니다.

즉 산꾼들에게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인한 폐해가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트럼프 딸이 연상되는 '이방 운운'은 그냥 알바코스로 보면 될 것입니다.

 

지리태극종주를 머릿속 그림으로 그려보는 일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지리서부능선을 대강 22km로 잡고 주릉을 28km 거기에 동부능선을 40km잡으면 끝날 일이니 말입니다.

꿈을 꾸고 말을 하는 것은 이렇게 쉽습니다.

지리 주릉이야 서너 번씩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구인월을 들머리로 잡을 경우 서부능선만 극복하면 의외로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유혹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지리는 아니 지리태극은 그런 '희망 사항' 외에 몇 가지를 더 요구합니다.

절제된 생활, 꾸준한 운동, 철저한 자료 분석.....

물론 절제된 생활이란 당연히 금주禁酒 내지는 절주節酒를 의미합니다.

꾸준한 운동이란 평소 충분한 수면을 의미할 것이고....

그리고 철저한 자료 분석이란 남의 산행기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력 혹은 산행 데이터data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내공에 대한 검증입니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리태극종주'는 그야말로 자만이고 오만이며 지리산 산신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기에 행여 오기傲氣'가 추가된다면 필경 예측 못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2018. 5. 8. 23:50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합니다.

 

어버이날인 고로 노모와 외식을 하며 어쩔 수 없이(!) 반주를 곁들입니다.

산신령님에 대한 예의상 평소 반만 털어 넣습니다.

몸보신도 했으니 체력에 대한 부담은 한결 덜해집니다.

심야 버스에서의 수면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4명이 탄 평일 심야버스는 함양에 이르러 동서울에서 24:00에 출발한 같은 코스의 버스로 갈아타게 됩니다.

그러고는 인월입니다.

03:32

남부터미널에서 동승했던 '남부파' 4인이 모두 인월에서 내리는군요.

'동서울파'는 모두 백무동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어디로 가는 지 모두 뻔한 건데.....

 

'완전무장'한 분이 행선지가 어디냐고 물으시는군요.

"서부능선을 타려한다."고 하자 모두들 같은 방향이라고들 입을 모읍니다.

그때 '노숙'하게 보이는 분은 메모지를 꺼내며 "인월 파출소에서 좌측으로 꺾어 월평마을...."

'침착'하게 생긴 한 사람-부엉이님'은 "저는 이 코스가 처음이라...."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제가 대장에 임명되어 헤어질 때까지 대장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노숙맨'은 날이 밝으면 가겠노라고 빠집니다.

버스 안에서 잠은 다 잤으면서 .....

 

세 명이 인월 정확하게는 신인월을 떠나 구인월로 향합니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태조 이성계가 황산전투에서 아지발도를 물리칠 때 달月을 끌어들여引 승전하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유래가 억지로 꿰워 맞춘 느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즉 이미 고려 태조때 이곳에 역驛을 설치하면서 인월역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엄연히 있으니 말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들의 반 이상은 믿기 어려운 얘기들입니다.

 

예전에 이 인월이 중요한 것은 인월장 때문이었습니다.

인월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이는 4일과 9일에 열리는 남원장, 1일과 6일에 열리는 운봉장과 함께 지리산 서부의 3대 장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지리산 산채류의 집산지이며 흑돼지와 한지, 토종꿀, 죽세품으로 유명한 이 인월장은 남강과 섬진강을 통하여 지리 동부, 남부와 활발하게 교류를 한 장터였습니다.

 

그런 신인월을 떠나 예전의 인월 그러니까 구인월로 들어갑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5. 9. 수요일

2. 동행한 이 : 홀로 + 부엉이님

3. 산행 구간 : 지리산 서부능선 + 간미능선(인월 마을 ~ 덕두산 ~ 바래봉 ~ 세걸산 ~ 만복대 ~ 성삼재 ~ 간미봉 ~ 구례 휴양림)

4. 산행거리 : 30.27km

구 간

거 리

출발 시간

소요 시간

비 고

인월 월평마을

 

03:36

 

 

덕 두 산

3.70

05:33

117

바 래 봉

1.44

06:03

30

세 걸 산

5.69

08:26

143

만 복 대

5.58

11:21

175

20분 휴식

성 삼 재

4.65

13:23

122

20분 휴식

간 미 봉

6.31

16:42

199

47분 휴식

구례 휴양림

2.9

17:40

58

 

30.27 km

14:04

12:37

실 소요시간

 

산행기록

지도 #1

구인월교로 람천濫川을 건넙니다.

람천은 남강에 흡수된 다음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가게 되는데 산청읍에서 남강을 만날 때까지 여러 이름으로 불리죠?

이 람천은 지리서부능선 상의 고리봉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릴 때 그 줄기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입니다.

산경학에서 본다면 지리서부능선 중 고리봉 이하는 람천단맥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람천이 운봉읍내를 적시며 흐르다 이 인월을 지나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만수천에 합류되면서 임천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전 이름이 '황계黃谿'였던 만수천의 유래를 볼까요.

지금의 산내면 원천리와 삼화리, 입석리 일대의 옛 지명이 만수동 또는 내원동으로 불려졌으니 그 만수동에서 왔다고 봐야겠죠.

물론 지리산 일만 골짝의 물길이 모였다고 하여 만수천이라 부른다는 이설도 있기도 합니다 

좌측으로는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의 들머리이자 2구간의 날머리이고......

직진하여 월평마을로 들어갑니다.

월평마을은 '지리산 둘레길'의 개통으로 민박마을로 변한 느낌입니다.

그만큼 이 인월이 지리산에 관해서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우틀하여 구인월로 들어섭니다. 

지리 태극종주하는 이들이 마지막 인증샷을 날리는 곳!

40시간 이상을 걷고나서도 그 '힘듦과 고통'을 '보람과 희열'으로 승화시켜 주는 이상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인 구인월마을회관.

오늘 산행의 끝이 어디가 될 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꾸역꾸역 가보겠다는 생각으로 발을 뗍니다.

가슴 속의 산을 오르는 '봉회장님'과 기독교와 대종교를 한 이름에 품고 있는 이한검대장님의 전송을 받으며......

사당을 지나고......

이정표는 덕두산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덕두산을 오르는 방법은 몇 가지 됩니다.

지리태극종주를 진행할 때에도 보통 두 가지 루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모양에 충실하여 임도에서 바로 좌틀하여 능선에 달라붙는 방법과 일반 등로를 이용하여 편하게 오르는 방법이 그들입니다.

오리지널 루트를 이용하기로 하고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좌틀합니다.

04:20

그러면 지도 #1의 '나'의 곳에서 일반등로와 만나게 됩니다.

직진합니다.

그런데 '완전무장'한 분은 힘에 부치시는지 뒤에 처지시는 바람에 몇 번이고 기다렸다가 합류하곤 합니다.

이곳부터는 길이 명백하다고 하니 '완전무장'한 분은 자신은 우리들의 진행에 방해된다고 하면서 혼자갈 테니 먼저 가라고 하시는군요.

이제 두 명이 남았습니다. 

수원 광교에 사신다는 부엉이님과 함께 진행합니다.

'완무'님은 앞으로는 이정표도 명백하니 별 이상은 없으실 겁니다.

계단은 물론 안전시설도 훌륭하게 잘 준비된 곳이기도 하니....

지난 주 비때문에 삼각고지에서 음정으로 하산했으니 그 아쉬움이 컸을 겁니다.

그래서인가요?

제가 오늘 지리에 든다고 하니 당장 짐을 싸서 사리마을로 달려가겠다고 하시는군요.

아마 조금 있으면 사리마을에서 대장정에 돌입하실 겁니다. 

그러고는 오늘의 첫째 봉우리인 덕두산입니다.

2등급 삼각점(운봉22)도 확인하고....

반갑네요.

작년 11. 19. 그 추웠던 날.

 '지리산 신선'을 꿈꾸고 있는 고남님과 이성계의 황산을 답사하기 위하여 걷던 날 달아놓은 표지띠입니다.

작은 봉우리 세 개 정도를 넘으니,

06:03

바래봉인데,

보시다시피 조망이 이렇습니다.

좀 안타깝군요.

바래봉에서 볼 수 있는 주변 조망은 그야말로 지리에서도 압권인데.....

올라온 방향의 이정표는 구인월이 아니라 모두 월평마을 위주입니다.

지도 #2

바래봉에서의 하산은 이렇게 사면치기로 진행합니다.

지난 주말 절정이었을 텐데 비가 오는 바람에 많은 명산꾼들이 멋진 구경거리를 놓치셨겠군요.

하긴 적게 오시는 게 산을 위해서는 좋긴하겠지만....

너무 좋군요. 

언제나 꿈꾸는 오솔길 같은 곳.....

좌측 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용산주차장 갈림길을 지나 세걸산을 향합니다.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없지만 조금 있으면 관광버스 편으로 밀려들겠죠?

좌측으로 지리북부능선의 삼정산 뒤로 희미하게 천왕봉이 보이는군요.

팔랑치를 향합니다.

우측으로는 운봉읍내가 보이는군요.

운봉 시내 뒤로 중앙에 고남산846.9m이 보이고 그리고 그 뒤로 요천지맥의 맹주 천황산909.6m이 뾰족합니다.

구름이 너무 짙습니다.

팔랑치를 지나고,

돌아보니 지나온 바래봉은 구름에 숨었습니다.

바로 앞이 백두대간의 수정봉.

그 앞으로 흐르는 물이 람천이겠죠.

앞 좌측이 고리봉1305.4m에서 흘러내리는 능선이니 그 뒤가 서시지맥이겠고, 그 우측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향하는 곳이 구룡폭포가 있는 원천천이 흐르는 곳인데....

여기서 보기에는 그 줄기와 백두대간이 이어진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지도도 안 보고 그림만 본다면 백두대간은 고리봉 ~ 노치마을 ~ 수정봉이 아니고 만복대 ~ 1109.3봉 ~ 고기리 ~ 603.3봉 ~ 구룡폭포 상단 ~ 728.8봉으로 이어져 수정봉으로 가게 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참고도 #1

 

참고도 #1의 보라색 선이 그 라인입니다. 

현장 답사를 안 하고 지도 보기를 게을리하면 빚어지는 현상입니다.

실제 모대학 지리학과 교수님께서 산맥이 아닌 산줄기를 비판한 논문에 실렸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즉 "백두대간이 온전하게 '산자분수령'에 충실하지 못하다."면서 그 예를 바로 저곳으로 든 것이죠.

대간길이 구룡폭포 방향으로 간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서시지맥에서 1109.3봉 라인을 따라 내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구룡폭포 부근에서 원천천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대간은 그쪽으로 그는 게 아니고 노치마을 로가는 것이죠.

그 논문은 엉터리였습니다.

 

산맥은 산맥이고 산줄기는 산줄기입니다.

물론 '산맥 ⊃ 산줄기'이긴 하지만 백두대간이 산자분수령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논리는 그 분의 식견을 의심케 하는 대목입니다.

 

산경표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골머리 아프네. 결국 산경표의 저자는 모른다는 얘기구만. 앞으로 할 얘기는 산경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 그런 거잖아?” 머리에 쥐가 오른다.

그렇지 아까 얘기했지? 산경표는 그 당시 조선 지리정보의 총아라고! 뭐 다 아는 내용이니까 그냥 지나가도 되지만 중요한 건 이것과 뒤에 나올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와 비교해 보는 일이야. 이런 건 지금 당장 산행을 하면서 써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니 골머리 아플 필요도 없어.”

, 그건 그렇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자분수령하는데 그 산자분수령이란 말이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 혹은 스스로 분수령이다.’ 그 말 맞아? 다른 얘기도 있던데.”

장감독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고 언젠가 해줘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래. 맞아. 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문구는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오는 말이야. 그리고 처음에는 나도 그걸 그렇게 이해했었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산경표는 당연히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산경표의 대원칙은 산자분수령이라고 알고 있다. 그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짐작컨대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보면 바로 그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이 산자분수령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산자분수령의 스스로 자로 읽어 산은 곧 분수령이다.’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그런데 그게 올바른 한자 독해법일까? 여기서 스스로가 아닌 “~으로 부터라고 해석을 하여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로 읽은 게 올바른 독해법이다. 즉 부사가 아닌 조사로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 번 읽어 보자.

 

東史曰 朝鮮音潮仙 因仙水爲名 又云鮮明也 地在東表日先明 故曰朝鮮

 

동사에 이르기를 조선(潮仙)이라 소리나는 朝鮮은 선수(仙水)로 말미암아 이름을 삼음이요 또한 이르기를 선명(鮮明)한 것이라,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뜰 때 먼저 밝아오므로 조선이라 한다 하였다.

 

山經云 崑崙一枝 行大漠之南東 爲醫巫閭山 自此大斷 爲遼東之野

산해경에 이르기를 곤륜의 한 갈래가 대막(넓은 사막)의 남동으로 가 의무려산이 되고 이로부터 크게 끊어져 요동 벌판이 되었다.

 

漉野起爲白頭山 爲朝鮮山脈之祖 山有三層 高二百里 橫亘千里 其巓有潭 名謂達門 周八百里 南流爲鴨綠 東分爲豆滿

 

마른 벌이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조선산맥의 시조다. 산은 셋으로 층졌는데 높이는 200, 가로는 1000리에 걸쳐 있으며, 그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어 이름은 달문이라 하고 둘레는 800리이며, 남으로 흘러 압록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이 된다.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爲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鐵嶺一枝 東南走起 爲道峰三角 而漢水經其中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연지봉 소백산 설한 등의 재가 되고, 철령의 한 갈래가 동과 남으로 달려 일어나 도봉과 삼각이 되니 한수가 그 가운데를 지난다.

 

위에서 보다시피 山自分水嶺산은 분수령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산자분수령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어떻게 해야 될까?

 

사실 지리학자들은 산자분수령은 진리가 아니고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라고 했다. 즉 그들은 그 예로 선행하천(先行河川)을 든다. 이것은 융기축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하천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간단한데 생각하는 관점만 다르다. 조금 더 있으면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일단 맛만 보고 넘어가자면 지형학적으로 산맥이란 습곡, 요곡 혹은 경동지괴 운동 등 융기 축이 형성되어 계속 융기함으로서 산맥이 형성된다. 이걸 뭐 1차 산맥이라고도 하나본데 이것도 융기산맥과 단층산맥 두 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그 다음이 2차 산맥으로 이는 암석의 경연(硬軟) 즉 단단하거나 무른 것들이 대상배열(帶狀配列) 즉 좁고 길게 띠 같이 되어 있을 때 무른 지대는 침식되어 낮아졌으나 단단한 부분은 침식에 강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로 남아 있어 산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때 융기 축 혹은 대상배열을 가로 질러 흐르는 선행하천이 있으면 이 하천은 산맥을 절단하고 흐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자분수령을 이야기할 때 입에 침이 튀면서까지 떠들던 얘기가 뭔가? 바로 차령산맥이 한강을 건너고 광주산맥이 한강을 어떻게 지날 수 있냐고 떠들었잖은가? 그런데 산맥파는 즉 지리학계에서는 팔짱을 낀 채 니들이 뭘 알아!”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게 바로 이 2차산맥이다. 2차산맥으로 형성된 게 바로 우리나라의 산줄기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1차산맥이 그 삭박과정을 거쳐 2차산맥이 형성이 되었고 지금도 삭박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게 바로 지금의 우리나라 산줄기 아니냐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따지자는 얘기다. 그게 현재의 백두대간이고 정맥이며 기맥이며, 지맥이니까....

 

일반적으로 습곡이나 경동지괴 운동의 융기량은 1년에 mm 단위로 융기한다고 한다. 태백산맥 축도 년 0.1mm도 채 안 되는 융기량이라 한다. 글쎄 이 얘기도 웃기는 얘기다. 학자들이 얘기하는 태백산맥의 경우 신생대 3기에 동해 해저지각이 확장되면서 융기가 일어나 태백산맥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그 당시 태백산맥의 높이가 자못 궁금하다.

 

신생대 초기 한반도는 준평원 상태였는데 신생대 중신세부터 일어난 그 융기가 지금도 매해 0.1mm씩 융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5,000만 년 전 정도가 되니 50,000,000 × 0.1mm = 5,000,000mm 그러니까 5,000m 정도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여기는 처음 융기된 높이는 제외하고 그렇다. 물론 그 긴 세월동안 삭박에 의한 것도 넣어야 하지만.

 

- 졸저 전게서 455쪽 이하

좌측으로 고개를 돌려 서부능선이 서시지맥과 이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화사하군요.

이제 곧 만날 세걸산1222m은 구름에 머리를 숨겼고....

우측으로 임도로 빠지는 삼거리를 지나,

1121.9봉에서 3등급삼각점(운봉307)을 확인합니다.

그러고는 '부운치'라는 이정목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이 이정목의 지명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과 상위합니다.

물론 이곳으로도 부운리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니 '부운치'일 수도 있겠으나 지명이 같으면 곤란한 거 아닙니까?

차라리 상부운치, 하부운치로 나누든가.....

08:09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에는 이곳이 부운치죠?

실제 이곳이 부운치 맞기도 하고요. 

그러고는 세동치입니다.

우틀하면 전북학생교육원으로 내려가는 길이죠.

직진을 하여 조금 치고 올라가면,

지도 #3

서부능선의 중심에 있는 세걸산1220m입니다.

원래 조망이 무척 좋은 곳인데 오늘은 영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간에 진행을 합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등로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고 출발합니다. 

그렇게 가다보니 고리봉입니다.

여기서 백두대간을 만나게 됩니다.

아!

그런데 여기서도 아무 것도 볼 수 없군요.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나 봅니다.

이제부터는 백두대간을 따라 걷습니다.

보령에서 왔다는 여자 산객 두 분의 정성이 대단하군요.

차는 용산주차장에 두고 택시로 정령치까지 오셨군요.

23,000원이나 주고 오셨다고....

정령치 우측의 고기저수지와 고기리.

이 골짜기에서 원천천이 발원한다는 게 이해가 가시죠?

이 물은 절대로 백두대간을 넘지 못합니다.

진리입니다.

우측의 주촌리가 평야 같아서 물줄기가 주촌리로 넘어갈 것 같지만 벌써 5,000만년이 넘게 이 원천천은 주촌리로 흐르지 못하고 백두대간에 막혀 남원시 주천면으로 흘러 남원시내에서 요천에 합류되게 되는 것이죠.

지리교수라는 분이 감히 우리의 백두대간을 평가절하하면서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

정령치로 내려갑니다.

반대방향에서 많은 산악회 사람들이 올라오십니다.

당진팀.

순천팀.

정령치입니다.

마한과 관계 있는 고개죠?

곧 달궁과 연결이 되고...

달궁은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하대치 부대가 달궁에서 열리는 '10월 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피아골을 떠나 달궁으로 향하던 여정이 나오죠.

물론 그 하대치의 속내는 멀리서나마 이현상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달궁의 주민들은 남원으로 장을 보러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 고기리의 숙성치로 갔겠죠.

 

2천년 신비神秘 간직한 마한馬韓 피란도성인 달궁.

그 달궁은 인간이 최초로 발길을 들인 지리산 '개산"開山 역사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지리산에 "달의 궁전"이 있었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 깊고 광활한 골짜기에 2,000년 전 달의 궁전이라는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하는 부분이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으로서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2,000여 년 전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에 쫓긴 마한馬韓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都城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지리산의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있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때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는 기록이다.

 

그리고 현재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2,000년 전 마한의 효왕이 피란도성을 쌓았던 곳으로 달에 있는 궁전으로 불렸다는 안내판이 초라하게 내걸려 있다. 바로 이곳이 마한의 피란 도성인 달의 궁전이 세워졌던 곳이다.

 

서산대사의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지리산, 즉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인 달궁은 그야말로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끝내는 함락, 패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한의 피란도성, 즉 달의 궁전은 지금은 잡초더미에 묻힌 몇 안 되는 돌더미와 주춧돌 등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달궁月宮으로 불렀다.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달궁月宮이란 한자지명도 마한의 그 한 맺힌 역사가 변천을 거듭, 잊혀져가듯 바뀌어 지금은 "達宮"으로 불린다.

 

마한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명확한 역사가 정립되지 못하고 있듯 이곳 달의 궁전을 중심으로 빚어졌던 마한의 역사도 여전히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못하고 있으나 지리산이 최초로 사람의 산으로 바뀌게 된 시점이란 데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매우 신비롭고 서정성이 깃들어 있는 "달궁"은 이제 예전과 같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 이상 달 속에 있는 신비스런 궁전의 모습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궁터에는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차량들과 민박촌, 그리고 관광객들의 북적거림으로 뒤덮인 지 오래다. 지리산 종단도로가 개통되면서 달궁은 그 한복판에서 신음하게 된 것이다. 차량의 기나긴 행렬을 따라 달궁의 자취는 이제 바깥세상과 하나가 되고 만 셈이다. 달의 궁전은 이제 관광객들의 쉼터로 변해있는데 그나마 옛 마한의 역사를 음미하기 위함이 아니라 빼어난 달궁계곡의 절경 탓이란 사실에 안타까움이 앞선다.

 

정령치 주차장에는 표지석에서 인증샷 단체 촬영을 마친 분들이 개인적으로 촬영에 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군요.

그럼요.

산에 왔다가 남는 게 사진밖에 더 있나요?

이제 다음 목표는 만복대입니다.

지리 서부능선의 중심은 단연 이 만복대입니다.

2km라....

어서 가죠.

매 500m마다 설치되어 있는 119 구조목.

지나온 봉우리를 돌아 봅니다.

함께 진행하는 부엉이님 덕에 심심하지는 않은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봉우리가 고리봉이고 그 너머 두 번째 봉우리가 세걸산.

고리봉과 좌측 운봉의 덕산저수지.

만복대가 이제 바로 앞으로 다가옵니다.

만복대 능선 좌측으로 반야봉이 손에 잡힐 듯 하건만 부엉이님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반야봉은 정상을 왜 안 열어주는지.....

우측 중앙에 노고단의 케른은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지도 #4

조망터입니다.

우측으로 서시지맥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곳이죠?

조금 전 살펴보았던 서시지맥 갈림봉이....

바위 좌측으로 돌아가면 소로가 명백하게 보입니다.

드디어 만복대입니다.

대臺가 무엇일까요?

속리산의 문장대, 삼각산의 백운대가 먼저 떠오르는군요.

큰 산에 가면 바위가 많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크고 의미가 있는 '바위 봉우리'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智異山에도 문창대, 향적사지 앞 금강대, 가섭대, 영랑대와 소년대 등이 해당되겠습니다.

좀 깊이를 더 하면 '지리 10대'가 거론될 것이고....

우측으로 세존봉1368m의 문창대가 지리10()’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며 오르는 것도 의미 있다. 지리10대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도발이 좀 먹힌다는 수도처. 대부분 수려한 암벽이 있고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  졸저 전게서   34 쪽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臺'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智異山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수도처에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르는 점을 십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라 칭한다 합니다.

 

지난 번 노고단 아래에 있는 문수대에서 수행 중인 스님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바위는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효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많다는 것이죠.

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것은 비단 스님들의 수행 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산신으로부터 영험함을 전수받는 데에도 상당한 효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천년 간 사제지간에 전승 혹은 같은 직업군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험담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히 신비스러운 바위 주변에 '토굴'들이 많다 보니 큰 바위를 일컫는 '대臺'가 '토굴'의 이름에 붙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는 의미로도 들리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라는 어느 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새롭게 단장한 만복대에서 우선 할 일은 주위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가운데 멀리 삼봉산이 보입니다만 사진으로는 영.....

좌측으로는 정령치로 올라가는 도로가 보이고 중앙으로는 성삼재로 올라오는 861번 도로가 보입니다.

고리봉도 이제는 좀 멀어졌군요.

그 우측으로 고개를 골리면 임천지맥의 맹주 삼봉산1186.7m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그러니 삼봉산 잎으로는 아까 살펴보았던 람천이 임천이 되어 흐르고 그 임천은 저 삼봉산 줄기 앞으로 와서는 엄천으로 바뀔 것입니다.

물론 임천 이하의 물들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는 이 우측의 만수천을 흡수하게 되겠고요.

좌측으로 멀리 남원시내가 보이는군요.

뾰족한 것이 보이는데 그게 남원의 진산 교룡산이죠.

남원역에서 자주 이곳을 보았습니다.

기차를 타기 전 플랫홈에서 이 지리산을 보면 큰 봉우리 대여섯 개가 보입니다.

좌측으로부터 고리봉- 만복대 - 종석대 - 노고단 - 견두산 등이 그것들이죠.

다른 봉우리들은 헷갈리지만 이들 봉우리들 만큼은 확실하게 보입니다.

노고단과 만복대만 보면 그 옆의 것들은 저절로 보이기 때문이죠.

이제 방향을 바꿔 성삼재 방향을 봅니다.

이 맛에 산에 오는 거죠.

바로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봉이 고리봉1248m.

멀리서 보면 이 고리봉은 만복대와 노고단 혹은 반야봉에 눌려 좀 왜소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까 본 백두대간이 갈리는 2등급 삼각점이 있었던 1305.4m의 고리봉과 구분하여 이 봉우리를 작은고리봉이라고도 부릅니다.

금방 구름이 작은고리봉을 품어버리는군요.

그러니 노고단이나 종석대의 모습은 잠시 후로 미뤄야겠습니다.

우측 산동면의 온천지대도.....

별 생각없이 촬영했던 저 지리산 온천지구가 제 하산 코스가 될 줄은 이때까지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내려가야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11:47

북부 지리를 봅니다.

세걸산을 볼 수 있고 멀리 바래봉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드디어!

오늘 종일 구름에 가렸던 반야봉1731.6m이 드디어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류전지의 저자 김선신(1775 ~ ?)같은 이는 천왕봉보다는 이 반야봉을 더 쳐주는 것 같습니다.

전권을 통해서 반야봉 얘기가 더 많이 나오니까 말입니다.

사실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이 반야봉 때문에 생겼다는 말도 있으니 그저 무시하기만 할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는 지리산의 중심이 천왕봉보다는 반야봉이었다. 지리산에서도 문수신앙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 바로 반야봉이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했다는 얘기와 그래서 이 산의 명칭이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되어 지리산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기도 하다.

 

저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문수보살의 기氣가 불무장등 ~ 왕시루봉을 따라 흐르고 서쪽으로는 화엄사로 흐른다고 하죠.

그래서 반야봉에서 법문을 하는 문수보살의 말씀 하나하나를 받기 위한 문수사가 왕시루봉 바로 아래 있는 것이고, 우측 줄기로 가는 기운이 머무는 곳이 화엄사이며 좌측 줄기로 가서 머무는 곳이 연곡사라는 것입니다.

들은 풍월입니다.

또 저 반야는 불교적 의미말고도 귀녀鬼女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반야봉은 흡사 여자의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젖무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전설대로 하자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일까. 남도 땅에서는 제일 큰 산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무덤의 둥근 모양은 자궁을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은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리산의 여신령은 자궁을 많이 지니고 있어 의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자리를 마련해 준 것인가.....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지리산 동계 대공세' 중에서

12:04

묘봉치를 지납니다.

여기서 우틀하면 상위마을로 내려 가는 길일 테고.....

아까 보았던 산동면 지리산 온천지구 바로 위에 있는 마을입니다.

반야봉.

심원골.

노고단.

12:31

이제 성삼재까지는 다 왔습니다.

12:50

그 전에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봉우리.

고리봉1248m입니다.

'고리'라 함은 사전적 의미로 '긴 쇠붙이나 줄, 끈 따위를 구부리고 양 끝을 맞붙여 둥글거나 모나게 만든 물건'을 말합니다.

어떤 물건에다 거는 것이겠죠.

지리산에 왜 고리봉이라고 불리는 봉우리가 있을까요?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산에 이런 이름이 붙다니!

필경 어떤 내력이 숨어 있을 법도 합니다.

 

살펴보면 남원시 금지면과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요천(천황)지맥 끝자락에 있는 고리봉710.1m으로 가봅니다.

참고도 #2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남원은 그 생김새가 배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홍수가 날 경우 남원 전체가 빗물에 휩쓸려 떠 내려갈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 고리봉이 배모양을 한 남원을 선수船首를 이 봉에 매어두는 역할을 하는 산이라고 하니 가히 남원의 진산이라고 할 만도 합니다.

 

물론 이 고리봉이 섬진강과 요천이 만나는 합수점 부근에 위치해 있고 생김새도 고리 모양이어서 풍수가들이 볼 때에는 이 고리봉을 남원을 매어두는 역할을 하는 봉우리로 봤을 것이긴 합니다.

 

다 왔으니 아까 본 대간길이 갈리는 고리봉과 이 작은 고리봉을 생각해 봅니다.

 

예전 국리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지리산의 전설 김경렬 님의 저서에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

 

일설에 의하면 고리봉의 고와 두리봉의 두頭는 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음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 회자에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큰'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보다는 머리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고리봉, 고리봉=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하다 할 것입니다. 

혹은 백두대간이 알려지고 그 백두대간이 우리나라 산줄기의 중심에 자리하게 됨에 따라 지리산에서 대간의 들머리 혹은 날머리의 중심에 있는 이 고리봉의 위치와 중요도는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이럴 때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능선 혹은 서북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즉 예전에는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를 더 하게 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 고리봉 = 두리봉이 되어야 했을 것임은 자연스런 작업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봉우리의 이름이 고리봉이라!

 

그렇다면 이 역시 풍수지리설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남원이라는 배의 선수는 금지면의 고리봉에 그 뒤는 든든하게 지리산의 이 고리봉에 묶어두려는 풍수가의 점지대로.....

작은 고리봉.

그러니까 예전의 두리봉에서 반야봉을 또 보고,

구름에 가려 있는 노고단도 봅니다. 

그리고 그 우측으로,

성삼재 휴게소 일대를 보고 그 위로 작은종석대와 종석대를 봅니다.

백두대간 길이죠.

성삼재 ~ 작은종석대 ~ 종석대 ~ 코재 ~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이 루트가 백두대간 길인 걸 알고 진행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 성삼재에서 곧장 공단 초소를 통과하여 포장길을 따라 노고단 대피소를 지나 노고단 초소 방향으로 오르겠죠.

알고 진행합시다!

대간 라인이 선명하잖습니까?

그 작은 종석대 에서 우측으로 가지치는 단맥은 바로 시암재 휴게소로 떨어진 다음 간미봉728.4 ~ 지초봉601.6m으로 진행하게 되죠.

지초봉은 지난 번 '지리산 둘레길'을 하면서 지났던 곳이죠.

둘레길!

지리산을 알기 위해서는 꼭 진행해봐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시암재 휴게소와 그 우측으로 갈리는 지맥支脈.

그 우측으로 간미봉과 지초봉을 봅니다.

그 뒤가 구례를 싸고 도는 그러니까 아까 만복대 오르기 바로 전에 가자를 쳤던 그 서시지맥의 흐름입니다.

부엉이님.

사진 촬영에 열심이십니다.

뒤를 돌아 만복대도 보고.....

삼봉산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아까 보다 오히려 선명하게 보이는군요.

13:16

당동고개를 지납니다.

우틀하면 남악사 그러니까 신라시대부터 제를 올리던 사당이 있던 당동마을로 진행을 하게 됩니다.

남악이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죠.

신라 5악 중 하나인....

 

신라때 시작된 제사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고려 우왕 때에는 남해안을 침략한 왜구들을 지리산 신사인 남악사에서 기도를 통해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던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던 남악사를 이 온당리로 옮겼고 매년 봄, 가을에 국행제를 지내기 까지 하였음이 남원읍지인 '용성지龍城志'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고종은 다시 옥악을 정했는데 이때에도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았었으나 1908년 일제는 자신들의 신사神社와 상충된다고 느꼈는지 국행제를 폐지하면서이곳에서의 제사를 혁파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1969년 전라남도와 구례군민이 협력을 하여 화엄사옆에 남악사를 세워 지리산신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4월 곡우 때 제사를 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참고 사진 # 2 온당리 소재 남악사터

그러니 이 남악사는 지리산신사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곳이 아니고 화엄사 옆이냐 하는 점에 의문이 듭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아예 노고단으로 올라가야 했을 것이고.....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때가 1967년이니 아마도 많은 사람이 제사에 참여케 하려면 교통도 좋고 주위에 관광자원도 풍부한 화엄사 부근이 제격이었을 겁니다.

지도 #5

13:23

이제 다 왔습니다.

원래 오늘 제 목표는 '가는 데까지'니까 어디까지 갈까요?

우선 성삼재 식당에 들어가 육개장에 막걸리 한 통을 시켜서 부엉이님과 한 잔을 길게 들이 마십니다.

밥을 먹고 나니 힘이 남아돌아가는데 이 시간에는 노고단에서 통행을 막고 있겠죠.

저는 종주를 포기하고 귀가하기로 결정을 하고 같은 취지로 이 방향으로 오고 있는 이한검 대장님께 메시지를 날립니다.

그러고는 그냥 가기가 아까우니 미답지인 간미봉을 들르기로 합니다.

14:10

만난 후의 헤어지는 아쉬움을 사진으로 달래고.....

부엉이님은 천왕봉으로 해서 백무동으로 내려가 함양의 친구 만나고 올라갈 거라고 하니 예전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보는 내용과 같습니다.

저는 산동을 보며,

시암재를 거쳐 갈미봉으로 가기 위하여 861번 도로를 따릅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우측으로 작은고리봉과 만복대를 봅니다.

14:35

시암재 휴게소를 지나자마자 굽은 길에서 우측으로 팬스를 넘습니다.

바로 희미하게나마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보입니다.

14:42

본격적으로 능선에 달라붙으니 야생동물 모니터링 용 사진기가 설치되어 있고....

여기서 좌틀합니다.

좌측으로 조망이 터지는 곳에서 작은고리봉과 반야봉 그리고 성삼재를 봅니다.

시암재 휴게소와 작은종석대.

종석대에서 흘러내리는 차일봉 능선.

그리고 그 능선의 차일봉1004.7m과 원사봉556.2m.

14:59

고도편차가 크지는 않지만 오르내림이 좀 심합니다.

15:04

지도 #5의 '바'의 안부를 지나고.....

그런데 계속 '국립공원' 말뚝이 나오는 걸 보면 이곳이 지리산 국립공원 경계인 거 같습니다.

인적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데....

도대체 이분들은 여길 뭐하러 오신건가요?

모르긴 몰라도 대장을 잘못 만나신 거 같습니다.

길이라고는 흔적만 보이고...

잡목과 가시나무가 발목을 잡습니다.

이런 나무를 피하고 멧선생의 접근을 방지하려고 보니 신경이 곤두섭니다.

그런데 송홧가루를 털면서 진행하다 보니  배낭과  옷이 누렇게 변색이 됩니다.

15:41

837.3봉을 지납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단맥길을 걷는다는 만족감으로 감내합니다.

그냥 작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사진을 찍어보지만 뭐 조망이 있어야죠?

전에 이곳 자료를 준비하다가 선답자 중 토요일님의 산행기를 보고서는 킬문님이나 히든 피크님, 감악산님 등이 이곳을 지난 ㄳ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야 그러려니 하였지만 몇 팀이 지난 것을 보니 정말 정신나간 분들이 여러 분 계시더군요.

16:03

지도 #5의 '사'의 곳은 주의를 요하는 곳이고...

우틀합니다.

하긴 뭐 오는 사람도 없으니 주의하라 뭐 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기는 합니다.

16:09

716.4봉입니다.

그나저나 구례구역에서 16:36 열차를 예약했는데 시간이 어정쩡해집니다.

간미봉 ~ 납재 ~ 자초봉으로 해서 임도를 타고 난동마을로 가려고 했는데.....

16:19

상복골재를 지나,

16:37

간미봉 안부입니다.

이제 이 비알만 치고 올라가면 간미봉입니다.

송홧가루를 뒤집어 쓰고 나니 뭘 만지는 것도 겁납니다.

16:42'

간미봉 정상은 너른 평원 같은 곳입니다.

데크 시설도 되어 있고.....

16:42

그런데 찾는 이들이 없어서인지 을씨년스럽습니다.

지나온 능선을 중앙으로 놓고 봅니다.

우측으로 종석대와 노고단이 선명하고 좌측으로는 만복대와 고리봉도 뚜렷하니 간미봉 자체를 놓고 볼 때 참 좋은 산입니다.

차일능선......

그런데 여기서 하산길이 문제입니다.

좌측은 이렇게 좋은 길로 되어 있습니다.

지도를 보니 길이 끊기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

너무 좋은 길이라 임도로 생각하고 빨리 하산하기 위하여 좌측 길을 따릅니다.

이렇게 좋은 길.

16:50

400여 m 진행하니 이렇게 막아놨고 그 아래로도 길은 선명한데 이무래도 구례군에서 등로를 만들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그만 둔 것 같습니다.

산에서는?

그렇죠.

100% 지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실감을 하고 다시 돌아나옵니다.

간미봉을 지나....

역시 이 길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안 다니다 보니 시설물들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 같습니다.

시설은 잘 해놨는데....

17:07

구리재까지 1km인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거기서 내려가는 길이 한참이니 부득이하게 산동에 있는 그러니까 지리산 둘레길을 하다 들른 적이 있는 휴양림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길도 좋을 것이고....

그런데 왜 출입금지 표시를 해놨을까?

이렇게 좋은 길인데....

가방이고 뭐고 온통 송홧가루 투성이라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휴양림까지 내려와 적당한 계곡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습니다.

17:40

휴양림으로 내려옵니다.

배낭의 송홧가루는 털어지는데 유독 어깨 걸이 만큼은 안 털어지는군요.

땀 때문입니다.

택시를 불러 구례구역에 도착하니 18:16.

배가 고파 늘 들르던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정시에 도착하는 기차에 오릅니다.

이 글을 쓸 때 열심히 지리태극종주 중인 이한검 대장님이 드디어 구인월로 골인하셨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