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에 듭니다.
무진장無盡藏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지리산은 아무리 들어가서 살펴본들 그 실체를 다 알 수 없습다.
폐사지廢寺址 하나를 찾으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려 해도 흔적이 사라져 버린 옛길은 들머리조차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식들은 난잡하며 허무맹랑한 설화들로 가득 차 있고 연구하는 이들도 제각각의 견해만 보여줍니다.
지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역시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터라 '창작물로 치부되기 일쑤이니 이 또한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비기너beginner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 곳 한 곳 답사하면서 나름의 생각을 펴칠 수밖에.....
애초에 지리산을 정복하려 했다는 게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산줄기계의 고수 산으로님이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 즉 신산경표에서 분류한 대한민국 남한 지역의 산줄기를 다 섭렵한 후 허탈함(?)에 시달리고 있으시군요.
주말이 되면 들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목표 상실.
목적된 바를 어느 정도 이루었으니 그 이후가 조금 어렵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독서를 하면서 산줄기 지식을 확충하고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명산도 다니는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뭔가가 허전할 것이라는 느낌은 이신전심으로 제게 전해집니다.
저로서는 이런 현상이 반갑기만 합니다.
발도 맞고 입도 맞으며 머리도 맞으니......
지리의 한 자락을 가려하니 시간을 맞추자는 청을 넣습니다.
그동안 산으로 님은 지맥을 마무리 하기 위하여, 저는 지리를 이해하느라 서로 다른 곳에 있었으니 발을 맞춘 날이 기억에도 가물가물합니다.
5. 15. 구례구로 가는 야간열차를 예매하였으나 폭우 예정으로 취소.
다시 5. 18. 영등포 ~ 구례구 예매를 합니다.
영등포에서 10:56 출발하여 구례구에 03:04 도착하는 말 그대로 심야열차입니다.
어머니께서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는 짐을 챙겨 영등포역으로 나갑니다.
마을 버스를 타고 석수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는 영등포역으로 가니 시간이 널널하군요.
대합실에 앉아 잠깐 뉴스를 보다 열차 출발 예정시간이 되어 슬슬 플랫홈으로 내려갑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다 보니 고향으로 내려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청년은 1인 2역의 배역을 맡은 듯 인상이 비슷합니다.
옷과 신발만 바꿔 입고 신은 듯한....
정시에 도착하는 객차 안으로 들어섭니다.
서울역에서 타고 오는 산으로 님과 악수를 나누고 저는 제 예약 자리로 갑니다.
예약 대기 상태에서 예약을 하느라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차량만 해도 30%정도가 지리산으로 가는 분들이군요.
조금은 시끄럽습니다.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심야버스와 달리 기차는 소등이 되지 않고 열차가 '무궁화'이다 보니 '덜커덩' 거리는 소음으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냥 눈만 감고 있습니다.
옆에 앉은 처자는 핸드폰 놀이에 열중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남원을 지납니다.
구례구역에는 10분 연착하여 03:14에 도착합니다.
대합실을 빠져나가 섬진강 다리 앞에서 열차 손님을 기다리는 버스에 오릅니다.
구례터미널에서 잠시 쉬었던 버스는 03:40 성삼재로 향합니다.
오늘이 금요일 밤을 지난 토요일 새벽이다 보니 성삼재의 매점과 식당이 영업을 하는군요.
그냥 가긴 좀 뭐하니 라면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기로 합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5. 19. 토요일
2. 동행한 이 : 산으로님
3. 산행 구간 : 지리산 불무장등능선 {성삼재 ~ 노고단 ~ 날라리봉(삼도봉) ~ 불무장등 ~통꼭지봉 ~ 당재 ~ 황장산 ~ 촛대봉 ~ 화개)}
4. 산행거리 : 24.7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성 삼 재 |
|
04:40 |
|
|
날라리봉 |
7.66 |
07:03 |
143 |
|
불무장등 |
1.65 |
07:50 |
47 |
10분 휴식 |
통꼭지봉 |
3.20 |
10:01 |
131 |
40분 휴식 |
당 재 |
1.42 |
10:27 |
26 |
|
황 장 산 |
3.26 |
12:18 |
111 |
30분 휴식 |
촛 대 봉 |
2.16 |
13:19 |
61 |
10분 휴식 |
화 개 |
5.35 |
14:41 |
82 |
10분 휴식 |
계 |
24.7 km |
10:01 |
08:41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04:40
바람은 시원한데 안개비가 날립니다.
보슬비나 일반적인 비가 아니라 별 걱정은 되질 않는데 날이 새면 개일 것 같지는 않아 그게 걱정이 되는군요.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하죠.
산으로님이나 저나 지리산에서 첫 산행을 할 때의 출발점은 여기가 아니었죠?
1970년대나 1980년대 서울이나 경기도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지리를 배울 때 첫 입문 산행의 들머리는 보통 화엄사였습니다.
화엄사 ~ 코재 코스였죠.
이는 순전히 교통의 편의성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같이 고속도로도 제대로 깔려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심야버스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이니 밤 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게 가장 편했습니다.
그러고는 지금과 같이 구례버스를 이용하여 화엄사에 도착하여 거기부터 산행이 시작된 것이죠.
그러니 지금의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화대종주'는 범인凡人들에게는 로망 중의 로망 아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그런 난해한 코스였습니다.
그러던 화엄사의 들머리 역할이 성삼재로 이동을 한 것은 1988년 군사비상도로였던 861번 도로가 확포장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고속도로가 여러 개 깔리고 토목공사 기술의 발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국립공원 내 취사 금지'에 이어 야영금지 정책이 시행되면서 버너나 텐트 등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니 배낭이 가벼워졌습니다.
영양소 섭취가 개선되고 신발과 배낭 그리고 의류가 기능성화 됨에 따라 산행 속도가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지리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안내산악회가 생기게 되고 무박산행이라는 상품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삼재와 중산리를 잇는 성중종주가 대세로 자리를 꿰찹니다.
여기에 더하여 산장이라 불리던 대피소에서의 숙박산행을 제치고 이제는 무박 산행까지 일시종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시쳇말로 "개나 소나 다 성중종주를 한다."는 말이 떠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리를 찾다보니 토사의 유실도 많아지고 흙이 다져지다 보니 지리가 몸살을 앓게 됩니다.
그래서 지리의 등로는 온통 돌입니다.
무릎에 충격이 많이 오니 등산화에는 적당한 깔창을 깔아야 하는 건 필수입니다.
랜턴을 켜고 출발은 했으나 날이 밝아오니 이내 소등합니다.
익숙한 길을 따라 노고단 대피소를 향합니다.
무넹기를 지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감독이 큰소리를 친다
.“형 지금 이 길이 백두대간 능선이잖아! 그런데 왜 이 물은 능선을 따라 흐르다 왜 우측 만수천 쪽으로 안 가고 화엄사 쪽으로 가는 거야! 거긴 섬진강으로 가는 방향이잖아.”
그렇다. 다리를 건너 성삼재로 향하다보면 코재 바로 전에 왼쪽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이 물은 분명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은 장감독이 지적하듯 만수천으로 가야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의 예외란 말인가?
미리 얘기하자면 이 물은 노고단 물이 맞고 이 수로는 인공수로이다. 예전 화엄사 부근 그러니까 구례의 들에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때 이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사 쪽으로 넘겨주기 위해 인공 수로 하나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이 수로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물을 넘겨주었다.’고 하여 무넹기이다. 그리고 이 물은 낙동강이 아닌 족보에도 없는 섬진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는 인공수로이므로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머쓱해 하는 장감독이지만 난 속으로 생각한다. ‘산경표의 기본 원리는 알아가는구나. 그래. 산자분수령만 알아도 반은 안 것이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제 70 쪽
05:20
마냥 행복하고 들뜬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분들로 북적이는 노고단 대피소입니다.
성삼재에서 밥도 안 먹고 출발했을 '기차 탑승 동기'들이 여기서 배회하는군요.
안산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바로 노고단 고개로 향합니다.
05:28
북쪽 케른입니다.
노고단이야 지금 시간은 입장도 안 됨은 물론 올라봤자 이런 날씨에 뭐 볼 게 있겠습니까?
조망을 중시하는 저와 산으로님은 초소를 통과해 본격적으로 지리 주릉에 들면서 약간의 아쉬움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좁은 등로를 따르게 됩니다.
왕시루봉 갈림길을 지나고 돼지평전을 지납니다.
05:54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화대종주를 한다는 한 팀을 만납니다.
아주 다부지게 보여서 "완주를 기원한다."는 덕담을 보냅니다.
철쭉이 핀 곳도 있고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것들도 봅니다.
바로 위 헬기장에서 그 철쭉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06:04
지리 주릉에서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심원마을로 진행하는 길은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지도 #1의 '나'의 곳인 이 헬기장과 임걸령 샘터 바로 뒤입니다.
이곳은 능선을 이용하는 루트고 임걸령 쪽은 계곡을 따르는 곳이죠.
06:13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
피아골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조금은 섬뜩한 감을 준다. 빨치산이나 한국전쟁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 이 일대에는 피밭 즉 稷田이 많아 ‘피밭골’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적이 안심들을 하게 된다. 그 피아골로 올라가는 길에 고찰 연곡사가 있다.
06:20
임걸령입니다.
필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가야 하는 곳.
지리산 최고의 물맛입니다.
06:29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가족 단위로 진행하는 팀의 여학생은 이제 중학생 같은데....
오늘 부모님과의 이 주릉 산행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꿈을 그려주게 될 지 그리고 앞으로 공부를 해나가면서 얼마나 튼튼한 그루터기가 될 지 기대가 됩니다.
지도 #2
바람도 없고...
눅눅하지 않은 맑은 물알갱이가 공기와 섞여 폐부 깊숙이 들어옵니다.
청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럴 때 어느 분 같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 기분 좋다."
산줄기 고수 산으로님도 이런 기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염화미소가 별다르겠습니까?
그냥 서로 느끼는 것이죠.
이심전심으로.....
철쭉의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고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인가요?
바닥에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소월은 "사뿐이 즈려 밟고 가달라"고 했지만 그 객체는 당연히 저희가 아닐 것이므로 꽃잎을 밟지 않기 위하여 발 디딜 곳을 살펴가며 진행합니다.
밟고 지나기도 아까운 지리의 산물들입니다.
06:48
노루목입니다.
좌틀하면 반야봉으로 오르게 됩니다.
저희도 반야에서 지리의 전부를 조망하려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아쉽지만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사실 지리에 들면서 반야봉을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지리를 갔다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리의 커다란 축은 반야봉과 천왕봉으로 양분됩니다.
두류전지의 김선신(1775 ~ ? )같은 이는 오히려 반야봉을 중심으로 지리를 개관합니다.
지리가 문수신앙의 본체라고 한다면 그 중심은 천왕봉이 아니라 반야봉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이전 우리 토속신앙도 여기서 발원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리산이 다른 산과 다른 독특한 점 하나가 다른 산의 산신이 다 남자임에도 이 지리산 만큼은 여자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지모地母사상이 된 것이고 성모사상이 된 것입니다.
마고 할머니와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등장했으며 이들이 천왕봉으로 가서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되거나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황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신라와 영합을 하면서 쌍계사의 삼신각에 어엿하게 여신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지리산 여신은 동학혁명 때는 여성해방운동을 외치는 농민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또 이 반야는 불교적 의미말고도 귀녀鬼女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 전설대로 하자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일까. 남도 땅에서는 제일 큰 산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무덤의 둥근 모양은 자궁을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은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리산의 여신령은 자궁을 많이 지니고 있어 의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자리를 마련해 준 것인가.....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지리산 동계 대공세' 중에서
그 지리산 아니 반야봉의 문수보살의 가피력은 두 줄기로 사바세계로 내려옵니다.
한 줄기가 나오는 길을 사람들이 길로 만들었으니 바로 이 맥입니다.
이 길로 통하여 맥을 따라 노고단을 지나 종석대에서 종을 한 번 크게 울린 후 급속하게 세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 기가 멈추어 모이는 곳.
거기에 연기조사는 화엄사라는 절을 만들고 그러고는 부처님의 법을 전하게 됩니다.
연기조사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자세히 보기로 하죠.
어쨌든 자연스레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는 물론 지형 또한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전게서 64쪽
이래서 이곳 지명이 노루목입니다.
문수보살의 가피력이 내려오는 다른 한 곳은?
금방 나올 것입니다.
반야봉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 너무 아쉽지만 사실 뭐 그럴 것도 없습니다.
직접 답사할 곳이 그 가피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06:57
아까 노루목에서 반야봉을 올랐을 경우 주릉 종주자라면 보통은 이곳으로 내려와서 주릉을 진행하게 되는 것이죠.
왕복 2km에 소요시간은 40분이 족히 걸립니다.
그러니 시간 다툼을 해야 하는 화대종주자나 지태(지리태극)종주자들이 '반야봉 왕복'를 옵션으로 넣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반야봉의 문수보살의 가피력의 다른 하나가 이 맥으로 내려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오늘 저희가 진행하는 루트를 따라 사바세계로 가게 된다는 것이죠.
즉 불무장등 ~ 황장산으로 내려가면서 쌍계사와 연곡사로 흘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불사에서는 이 氣가 날라리봉을 지나 토끼봉으로 가서는 여기서 남쪽으로 진행하여 칠불사로 모인다고 해석을 하더군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길 바로 옆에 있는 이 길이 그걸 얘기해줍니다.
연곡사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는 법계사를 다시 창건하고는 반야봉으로 와서는 토굴을 하나 짓고 수행에 전념합니다.
연기조사를 알아볼까요?
연곡사는 신라 진평왕 6년인 545년 창건되었다고 한다. 연곡사의 이름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절을 짓기 위하여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가 한 마리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괴아하게 여겨 그 자리를 메우고 법당을 지었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마을 앞에 송림이 있는데 그 또한 제비형이라 골 전체를 연곡골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다른 데서 찾고 싶다. 연기라는 법명을 가진 조사祖師가 세 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鷰起와 緣起 그리고 煙起가 그들이다. 보통 연기조사하면 緣起祖師라는 한자로 표기한다. 이는 鷰起 祖師와 緣起 祖師를 혼용하는 데서 온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따 화엄사에서 볼 설화를 미리 들여다볼까? 우선 이 연곡사에 있는 연기조사탑(東 僧塔)비를 보자. 연기조사는 인도에서 '鷰'을 타고 와서는 비구니가 된 어머니는 연곡사鷰谷寺에 모셔두고 자신은 화엄동천에 화엄사를 창건하였다. 이때 이 '연鷰'은 우리가 읽을 때 보통 '제비 연'으로 읽는다.
그러나 강희자전을 보면 이 ‘제비’란 뜻 외에 다른 뜻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즉 "남방에 사는 동물로 흡사 거북 같고 이마에 외뿔이 달렸으며 날개가 있어 능히 날기도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서식한다."고 되어 있어 이는 우리가 아는 동물과는 사뭇 다른 그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상상 속의 동물'로 보여 진다. 그런 지식을 갖고 이 ‘연鷰“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록 현재 귀부龜趺만 남겨져 있지만 실제 거북과는 다른 즉 위에서 묘사한 생김새의 '鷰'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스님이 천축국에서 '鷰'을 타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하여 '鷰起祖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한편 연기緣起는 의상대사(625~702)를 말하며 연기煙起는 백두대간 얘기를 할 때 나오는 옥룡기의 도선국사(827~898)의 별호를 말한다. 그러니 이 연곡사나 화엄사 그리고 법계사의 건립 연대에 비추어 볼 때 의상대사 즉 緣起祖師가 이들 사찰을 건립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다. 그런데 창건주를 緣起祖師로 고집하는 분들은 이러한 연유로 화엄사의 창건 연대를 7세기로 봐야한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기조사煙起祖師'가 창건했다고 씌어져 있기는 하지만 '當更考 즉 '다시 고찰해야 한다.'고 부기한 것을 보면 좀 더 새로운 사료를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 鷰起 祖師는 천축국天竺國(인도)인이라는 얘기가 되며 그렇다면 이것이 불교남방전래설의 한 근거가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불교남방전래설은 지난 번 본 칠불사에 얽힌 허황후와 일곱 왕자의 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시대 33편의 유람기 중 지금도 남이 있거나 혹은 폐사된 사찰이 50개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중 쌍계사는 19편의 에 걸쳐 나오는데 반해 이 연곡사는 김지백(1623 ~ 1670)의 유두류산기에 단 한 번 나오는데 그친다.
이는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의 선비들의 의식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그들은 한국 유학의 비조鼻祖자인 고운 최치원이 쌍계사에 머물며 남긴 흔적 가령 ‘쌍계 석문’이라는 각자와 진영 그리고 진감선사비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쌍계사에 들름으로서 천 년 이상 유불儒彿이 공존하는 역사를 그 속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고는 해탈을 하셨겠죠.
그 토굴이 바로 이 묘향대.
묘향암입니다.
대가 궁금하시죠?
대臺가 무엇일까요?
대臺하면 속리산의 문장대, 삼각산(북한산)의 백운대가 먼저 떠오르는군요.
큰 산에 가면 바위가 많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크고 의미가 있는 '바위 봉우리'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智異山에도 문창대, 향적사지 앞 금강대, 가섭대, 영랑대와 소년대 등이 해당되겠습니다.
좀 깊이를 더 하면 '지리 10대'가 거론될 것이고....
우측으로 세존봉1368m의 문창대가 ‘지리10대(臺)’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며 오르는 것도 의미 있다. 지리10대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도발이 좀 먹힌다는 수도처다. 대부분 수려한 암벽이 있고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 졸저 전게서 34 쪽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대臺'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智異山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수도처에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르는 점을 십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臺라 칭한다 합니다.
지난 번 노고단 아래에 있는 문수대에서 수행 중인 스님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바위는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효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臺가 많다는 것이죠. 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것은 비단 스님들의 수행 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산신으로부터 영험함을 전수받는 데에도 상당한 효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천년 간 사제지간에 전승 혹은 같은 직업군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험담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히 신비스러운 바위 주변에 '토굴'들이 많다 보니 큰 바위를 일컫는 '대臺'가 '토굴'의 이름에 붙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는 의미로도 들리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라는 어느 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06:59
그 묘향대로 출입하는 문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곰 주의' 현수막이 걸려 있고 들어오지 말랍니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은 길이라는 얘기죠?
이 길이 불무장등 ~ 황장산 ~ 촛대봉으로 진행하는 길이며 곧 저희가 오늘 계획한 루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능선 그것도 마루금을 그어가지고 다니는 저희같은 '산줄기파'는 봉우리 ~ 봉우리를 고집합니다.
07:03
그래서 지근거리에 있는 날라리봉으로 조금 더 갑니다.
날라리봉이라...
“여기서 좀 더 진행을 하자. 그러면 이름도 재미있는 ‘날라리봉’1501m이다. 어감이 좀 좋지 않았나? 공원관리공단에서는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삼 개 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1990년대 초 삼도봉으로 ‘개명’을 했다. 실은 이 봉우리가 낫의 날같이 뾰족하다고 하여 ‘낫날봉’이었다.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음운이 변하여 날라리봉으로 되었던 것인데 애꿎게 이름만 나무란 꼴이다.
여기서 팁 하나 더! 우리나라 백두대간에는 세 개의 삼도봉이 있다. 그 셋 중 하나가 이 삼도봉이며 다른 하나는 경상남도 거창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 등 세 개의 도가 만나는 초점산1249.1m이라는 이명을 가진 봉우리이고, 마지막 하나가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북도 김천시 그리고 충청북도 영동군 등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만나는 민주지산 바로 옆의 삼도봉1177.7m이다.
- 종저 전게서 64쪽
10분 정도 쉬면서 사진 촬영을 합니다.
그런데 아까 봤던 '화대팀'은 여기서 간식을 먹으며 한참이나 쉬어가고 있군요.
결론을 내립니다.
저 팀은 오늘 당일 종주가 아니고 대피소 어느 곳에서 1박을 하고 내일 또 진행할 팀이라고....
그러지 않서야 저렇게 느긋할 수가....
자, 이제 오늘 주 루트인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가 되는 불무장등 능선으로 들어갑니다.
산경학적 이름으로는 이 좌측으로 발원하는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는 것이니 화개단맥으로 명명키로 합니다.
다만 이곳이 '비탐구간'으로 지정되어 있어 출입을 할 수 없지만 저희는 일반 등산이 아닌 민간학술조사와 등로 상태 점검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목적 탐사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조례와 정면으로 배치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산행을 하는 분들은 출입을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달곰이 자주 출입하는 곳이고 희귀식물도 잔행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듭니다.
지도 #2의 '다'의 곳입니다.
줄을 넘으면 스피커에서 바로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위험하니 빨리 나가라는 것입니다.
좌측바위 구간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등로 흔적이 확실하게 안내합니다.
지난 번 무착대 탐사 때 한 번 지난 곳이기 때문에 아주 눈에 익은 길입니다.
07:26
흰듬등을 지납니다.
등嶝이라는 이름답게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입니다.
서서히 산죽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지리남부지역의 특성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하고 진행합니다.
고사목을 지나고....
지난 가을.
바짝 말라서 거무튀튀한 모습의 산죽이 이번 봄 회생을 하였군요.
그런데 꽃을 피웠습니다.
산죽은 꽃을 피우고는 죽는다고 하던데.....
07:47
불무장등 오르는 길.
두 갈레로 갈라집니다.
우측은 우회하여 석문을 통하여 바로 무착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길.
좌측은 불무장등으로 올라 오리지널 마루금을 타는 길입니다.
좌측 직진길을 따릅니다.
07:50
그러면 화사한 철쭉이 답사자들을 반기는 꿈에서나 오를 수 있었던 불무장등입니다.
불무장등이라!
제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에서 '불무장등'을 가지고 옵니다.
날라리봉(삼도봉)을 지나 도계를 따라 내려오면서 처음 만나는 실명을 가진 봉우리가 불무장등인데 이 이름이 어렵다. 어떤 이들은 산의 모양 가지고 이름과 연결시켜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풀무)'와 같은 형상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그래서 불무장등이라는 거다. 또 다른 이들은 보통은 不無長嶝이라고 써서 '우두머리 봉' 혹은 '높은 산' 정도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도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산 이름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명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의지, 염원, 주관 등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생김새보다는 종교, 풍속, 생활상 등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니 그 지명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살펴보자. 사실 지리산 자체가 승도僧都 혹은 불도佛都라고 하였으니 불교 용어와 관련지어 본다. '불무'라는 발음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지리의 서쪽을 책임지는 제1봉이 반야봉이다. 이 반야봉이 지리산에서 갖는 지위를 느껴보기 위해 반야봉으로 올라보면 더 확실해진다. 반야는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이다. 화엄사를 개창하였다는 연기조사鷰起祖師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화엄사가 있는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반야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애기다. 그러니 이 반야봉의 기氣를 받아서 내려가는 줄기 즉 이 긴 능선의 이름은 '반야장' 그리고 그 능선 중의 첫 봉우리이니만큼 '반야장등'이라고 써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야봉'과 '반야장등'의 '반야'가 중복이 되는데 지명에서는 가급적 이런 중복 현상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반야의 다른 이름인 '불모'를 썼고 '불모장등'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모장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불무장등'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불모'란 발음이 '불무'가 된 것이다. 이럴 경우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①날라리봉 즉 삼도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불무장등 ~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뻗치는 길고 큰 줄기(長嶝)가 된다는 것이다.
아까 말씀드렸죠?
반야봉의 문수보살의 가피력이이 줄기를 타고 내려간다고......
그 기가 모이는 곳이 연곡사이기도 하고 쌍계사이기도 하고 혹자는 칠불사라고도 합니다.
이따 확인하기로 하죠.
.
그 이름도 아름다운 불무장등은 부산 산꾼 '산새들의 합창' 삼돌이님이 선점을 하셨습니다.
좀 눌러앉아 산으로님이 갖고 오신 고량주를 나눠 마시기로 합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하는 얘기야 뻔하지 않습니까>
산 예찬!
이 안주 정말 맛있네요.
정성껏 싸주신 음식 잘 먹었습니다.
40분이라는 시간이 훌떡 지나갑니다.
좁은 소로를 따릅니다.
08:40
소로를 따라 나오면 이렇게 부드러운 등로가 이어집니다.
좌측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우측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범왕리는 불교남방전래설과 이어지며 칠불사를 떠올려야 하며 목통골로 흘러내리는 물은 화개천이 되며 목통교가 있는 곳에서 당재로 오를 수 있고......
화개의 끝은 화개장터가 그리고 그 장터는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와 그 소설의 주인공인 작부 옥화....
내동리는 피아골이 그리고 연곡사가 나오며 피아골 부근의 서산대와 무착대는 지리10대와 연결을 시키며...
뿌옇게 안개구름으로 쌓여 있던 화개단맥 능선이 살살 비를 뿌립니다.
이미 신발은 축축하게 젖었고....
바지를 적시던 산죽은 이제 어른 키만큼 자라 어깨와 심지어는 얼굴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는 아예 기어가는 게 낫습니다.
손으로 산죽을 걷으며 걷는 것은 발밑이 궁금해지고 혹시나 이상한 녀석들이 발을 건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길을 3분 정도 걷다보면 어떨 때는 두려움이 공포로 바뀌기도 합니다.
모자 차양 앞으로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물을 털며 걷다보니 바지를 타고 양말을 적시며 곧 맹꽁이 우는 소리를 낼 태세입니다.
다행히 두꺼운 양말을 신어서 푹신거리는 정도이니 물기로 인한 찝찝함은 그나마 덜 합니다.
09:20
지도 #2의 '라'의 곳에서 반가운 표지띠를 만납니다.
산으로님과 한바탕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대한 얘기를 나눕니다.
찬사입니다.
공단직원들이 이곳을 지난 이유는 간단할 겁니다.
무인 감시카메라에 잡힌 반달곰이나 야생동물들의 활동 상황 채증작업.
식생들의 변이나 천이 등 파악.
그리고 등로 상태 확인 등일 것입니다.
공단직원들의 직무가 비탐구간 출입 단속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갖는 것은 그분들이 하는 업무의 속성에 대한 몰이해 내지 편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넓게 봅시다.
표지띠에 적힌 글귀만 봐도 그렇습니다.
"음주 및 흡연 산행 안 하기"
이는 산꾼 자신과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리고 "야간 및 무리한 산행 안 하기"
이런 점만 봐도 공단은 산꾼의 안전 산행을 최우선시 하는 곳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이곳이 비탐구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탐방로'라니요?
하여간 수고 많이 하시고 산꾼들에게 좋은 정책 많이 연구해 주시고 베풀어 주십시오.
09:28
무덤을 지나,
09:33
반달곰이 몇 번 출현한 곳을 지납니다.
공단에서 여기저기 펼침막을 많이 걸어두었습니다.
혹시나 오늘 녀석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기대도 해봅니다.
만나면 칫솔과 치약을 꼭 건네주어야지.....
09:36
또 산죽 터널을 지나고.....
드디어 발에서는 맹꽁이 우는 느낌이 오기 시작하고.....
어려운 서체로 쓴 표지띠를 보고.....
09:51
923.3봉에서 다시 공단직원을 만나 함께 걸어둡니다.
공단 직원들이 오늘처럼 친근하게 느껴보기도 오랜만입니다.
일체유심조!
아!
이 맑은 공기.
그리고 발에 전해오는 감촉.
비록 발은 젖고 축축한 바지에서 느껴오는 느낌 또한 개운할 리 없지만 냄새와 피부에 닿은 공기는 이런 찝찝함을 다 상쇄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09:58
잠깐 커다란 야생동물이 되어 보고.....
10:01
그러고는 통꼭지봉 전위봉의 이동기지국입니다.
멀리서 볼 때 보이던 통꼭지봉의 안테나가 바로 이 안테나였습니다.
그러고는 통꼭지봉908.8m 정상에서 4등급삼각점(운봉434)을 확인합니다.
이게 삼각점인가요?
중앙 좌측에 십자 방위표가 없었으면 믿어지지도 않을 시멘트 조각이었습니다.
지도 #3
10:10
아!
그런데....
그 통꼭지봉에서 아쉬움을 가지고 진행하는데......
'탁'하고 조망이 터집니다.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능선을 봅니다.
사실 날씨 탓만은 아닙니다.
워낙 육산이다보니 조망터가 없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풍경에 머리가 멍해지면서 어디가 어딘지 가늠이 되질 않는군요.
산으로님이 도착하더니 "저게 그 아자방 ....."
"칠불사? 맞네 그러네 칠불사네 그러니까 그 뒤가 의신이겠네"
고수님의 한 마디에 정신이 풀리면서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맞네. 칠불사!"
그 우측 뒤가 삼신봉이고!!!
칠불사는 동국제일선원입니다
동국제일선원이라!
금강산 마하연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참선 도량이라는 얘기이죠?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님의 글씨입니다.
'추사秋史 이래 여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추사체에 능한 분이라는 평가입니다.
칠불사의 전각 편액扁額이나 주련柱聯까지 거의 모두 여초의 작품이라 합니다.
여러가지 얘기가 많이 있는 칠불사.
그중에서도 이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은 선종의 기도처라는 의미 외에 칠불사와 '재난災難'과의 관계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명을 통하여 화禍를 면하려 했다는 이 얘기는 칠불사가 얼마나 화재에 시달렸는가 하는 안타까운 과거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칠불사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이런 얘기가 좀 어색하게 들리는 건 사실입니다.
수차례 화재를 입어 정문 현판을 칠불사에서 東國第一禪院으로 바꾸기 까지 했음에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그러던 조선조 순조때 또 화재로 인하여 절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이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는 절의 정문에 있던 보설루의 東國第一禪院' 현판을 보고는 깜짝 놀라 "저 글들에는 불(火)이 들어 있어 또 화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자 절에서는 東國第一禪院 중 國에서 한 점을 떼고, 第에서 그리고 禪과 院에서도 각 1점씩을 빼어 4획(火)을 없이 썼으나 118년 후에 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 유래가 있는 현판입니다.
이 현판이야 그 후에 쓴 것이기는 하지만.....
대웅전 우측...
일곱 분이 성불하신 7명의 왕자.
그리고 우측 상단의 우측부터 김수로왕, 허황후 그리고 장유선사로군요.
그러니까 장유선사는 원래 국적인 인도였을 것인데 가락국에서 그렇게 오래 사셨으니 완전히 귀화하였을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락국의 신하들이겠군요.
그렇게 보니 이 대웅전의 기물 하나하나가 그 사찰에서 임의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 놓은 거로군요.
이 칠불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관련된 얘기를 들어보면,
우선 김수로왕 얘기가 나오고 아유다국 얘기가 나옵니다.
허황옥 즉 허황후의 오빠는 장유보옥 즉 장유선사.
수로왕과 허황후許皇后는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가야국을 이어받고 2남과 3남은 어머니 허황후의 '許'씨의 성을 받아 김해 허씨의 대를 잇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외삼촌 장유선사와 함께 가야산에서 수도를 하다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용맹정진하다 성불하였다는 얘깁니다.
운상원雲上院이라....
구름 위에 떠 있는 선원이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칠불사의 예전 이름이 운상원이라는 얘기죠.
어쨌든 칠불사의 이런 일련의 설화는 우리나라 불교가 중국 - 고구려 - 백제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북방전래설에 반하는 남방전래설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황해도 관찰사까지 지냈던 범허정 송광연(1638 ∼1695)은 두류록(1680)에서 "칠불사는 워래 상원암이라 불렸으며 신라 마지막 왕 김부의 일곱 아들이 수도하여 성불하였으므로 칠불사로 개명하였다."고 하여 가야와 신라 그리고 김수로와 김부를 혼동하고 있는 듯한 글을 남겼습니다.
유문룡(1753~1821)은 '유쌍계기'에서 "칠불사의 일곱 부처는 신리 왕자 7인"이라고 하여 원래의 칠불사 설화와는 조금 다르게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칠불사에 대한 설화가 변모되고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덕왕 때 옥보고가 이곳에 머물며 왕산악 이후의 금법琴法을 정리하였으니 옥보고는 가야금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현악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는 얘기도 이 칠불사 얘기를 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대목입니다.
동국제일선원이라 하여 우리나라 2대 참선 도량의 으뜸이라고 하니 많은 선승들이 배출되었을 법도 합니다.
그러니 벽송, 서산, 백암 선사 등이 이 칠불암 출신이고.....
이분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특히 '지리산 계맥'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군요.
맥脈!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핏줄 같이 본 것이죠.
그런 칠불사가 임진왜란과 한국 전쟁 때 소실 되어 잡초만 무성하던 것을 제월당 통광선사가 1978년부터 칠불성지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지리산 반야봉의 거대한 혈맥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다 해발 800고지에 자리잡은 이 칠불사의 지세를 보려면 당재 남쪽의 半開 연화봉에서 바라보라고 하는군요.
그러면서 예로부터 지리산은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했다는 얘기와 이 산의 명칭이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이곳이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중심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현장에서 칠불사를 조망하면서 칠불사의 지세는 당재 남쪽의 반개 연화봉이라는 알도 듣도 보도 못한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임을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듯 떠오릅니다.
지세 특히 절터를 보려면 사람이 다닌 흔적을 따라가는 게 아니고 절이 들어설만한 지세를 보고 찾아가라!
그러니 자장이나 연기조사, 의상대사 등이 절을 지을 때 이런 방법을 택했을 것이니 책에서 이야기하는 당재 남쪽은 당재 북쪽의 오기일 것이고 반개 연화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이 있고 그게 맞다면 바로 이 통꼭지봉 남쪽의 끝봉우리가 그 봉우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재 남쪽은 통꼭(지)봉 남쪽의 오기일 것이고 그렇다면 반개半開란 어의語義 그대로 둥글게 열린 봉우리가 아니고 반쪽만 드러난 봉우리를 말할 것이니 그렇다면 이 봉우리를 특히 연화봉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이렇게 지리산 답사 산행은 하나하나 그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 역할을 해 주는군요.
삼신봉 우측으로 거사봉 일 테니 구름에 가린 우측 끝 부분 정도에서 형제봉을 확인하기 어려운 게 너무 안타깝군요.
하긴 이런 아쉬움은 오랜만에 지리에 들은 산으로님이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진 않습니다.
진행방향으로....
아래 푹 꺼진 보이지 않는 곳이 당재이겠고....
구름에 덮힌 곳이 황장산947.7m!
10:21
연화벙을 내려오니 큼지막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제 지리산국립공원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출금이니 비탐이니 하는 용어는 적용이 되지를 않습니다.
지도 #3의 '바'의 곳에 있는 헬기장을 지나,
앗!
근데 이게 뭔가?
당재로 내려오는 길목에 해밀산악회의 표지띠가 걸려 있습니다.
누가 왔다 가셨나?
10:27
그러고는 당재입니다.
좌틀하면 목통골 우틀하면 농평마을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당재가 지리산 둘레길의 15-A 구간인 목아재 ~ 당재 구간이 마무리 되는 곳입니다.
그 당재를 지날 때 썼던 글입니다.
황장산을 지나면 당재가 나온다. 당재라 하면 서낭당이나 당집을 연상하여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는 곳을 연상하기 쉽다. 우리 옛말에는 ‘산’을 뜻하는 고대어 중에 ‘달達’ 혹은 ‘닫’이 있다. 이 ‘닫’은 유사하게 ‘닷, 닥, 닭’ 등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산에 있는 고개를 보고 옛사람들은 단순히 ‘산을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닥+넘이’라 하였을 것이다.
‘닥+넘이 > 닥너미 >당너미 >당재’로 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당재라는 지명이 지리산에도 2개가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 상당히 많은 지명이다. 이 당재가 목아재에서 올라오는 둘레길 지선支線이니 이 길을 따라 농평마을과 당치마을로 내려가 연곡사를 들를 수 있다.
지난 번 걸어놓은 펼침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군요.
책 좀 봅시다!
산에 다니시려면 공부 좀 하셔야죠.
앉아서 간식 좀 먹고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멀리 농평마을에서 도로를 따라 세 분이 내려오시는 게 보이는군요.
한 10여 분이 지났나요?
그 분들이 이쪽으로 올라오시는군요.
산꾼이었습니다.
반갑게 산인사를 나눕니다.
"산행하시는 중이시군요."
"어쩌고 저쩌고...."
"우린 진주에서 왔다...."
그런데 노란옷 입으신 분이 제 가방에 달린 표지띠를 보더니만 "혹시 현오 님이신가요?"하고 묻습니다.
갑자기 저를 알면서 묻자 저는 얼떨결에 당황을 하여, "그...그런데요 어떻게..."
"혹시 박계수씨를 아시나요?"
"박계수요? 다올 형 얘기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우리 다올형을...."
그 분은 제가 무지 잘 아는 선배의 실제實弟였습니다.
바로 전화를 연결하여 이 우연한 해후를 알립니다.
제가 서 있는 위치가 지대가 좀 낮기는 하지만 이분과 서니 다윗과 골리앗 같습니다.
이분들은 먼저 올라가고 우리는 조금 더 앉았다 일어납니다.
가만히 앉았다 일어났는데 30분이 지났습니다.
11:13
811.8봉 전위봉을 지나,
11:15
봉우리같지도 않은 811.8봉을 지납니다.
11:24
안부를 지나는데 진주분들이 앞에서 가고 계시는군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같이 진행을 하다,
836.4봉에서 저희 먼저 가기로 합니다.
11:32
우리는 귀경하는 표를 이미 예약을 해둔 상태라.....
11:46
능선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925.5봉은 볼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크게 우틀합니다.
11:54
그러면 882.7봉에서 이정표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이 평도마을 삼거리라는 곳인데
우틀하는 길은 도장동 마을을 거쳐 평도마을로 진행을 하여 연곡분교가 있떨어지겠군요.
어디인지 알겠습니다.
그곳이 바로 둘레길이기도 한 곳이니.....
단맥길은 좌측 나무계단을 따릅니다.
황장도 쪽으로 팬스가 쳐져 있습니다.
특용작물 재배지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길이 너무 좋습니다.
12:12
황장산 전위봉인 지도 #3의 '사'의 곳에 오릅니다.
여기서 우틀하면 831.6봉을 거쳐 죽리마을로 진행할 수 있겠군요.
우측으로 조망이 터집니다.
왕시루봉 능선입니다.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줄기죠.
다음에 진행할 저 왕시루봉 정상은 구름에 쌓여 있고.....
그리고 좌측으로 칠불사를 다시 볼 수 있군요.
뒤로는 토끼봉(묘봉)으로 연결이 되겠고.....
지리주릉의 정상부는 온통 구름뿐....
12:18
그러고는 황장산입니다.
황장산은 백두대간에도 있는 산이름이죠.
그런데 두 산의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황장봉산(黃腸封山)
“봉산(封山)이라면 벌채를 금지하는 산을 얘기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비슷한 말로 금산(禁山)이 있는데 봉산은 금산과는 조금 다르지. 봉산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 왕이나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고 포의(胞衣 : 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를 묻기 위하여 정해진 태봉봉산(胎封封山), 황장목만을 생산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 밤나무재목을 생산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등이 있는데, 이 황장산은 바로 이 황장봉산에 해당되는 곳이지. 황장목이란 소나무는 나이가 수백 년이 되면 그 심재(心材)가 적갈색으로 변하며 황색의 장기(腸器)처럼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이 나무로는 왕실의 건축재료, 배의 건조 등에 사용됐다고 하지.”
이 소나무는 조선시대의 禁山정책과 封山정책을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금산(禁山)제도의 기원은 조선 초기에서 비롯됐다. 한양의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산(북 백악산, 남 남산, 서 인왕산, 동 낙산)의 지맥을 보전하기 위해 채석이나 벌목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집을 짓거나 무덤을 들이는 것을 금했다. 이 금산정책은 세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는데, 그 형태는 주맥(主脈)에 대한 보토(補土), 소나무 심기, 나무 베기나 돌 캐기 금지 등으로 실행됐다고 한다. 결국 요즘의 그린벨트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금산제도가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봉산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즉 조선시대의 조정에서는 궁실의 건축, 선박의 건조, 관곽(棺槨)과 신주(神主)의 조성을 위해 목재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다. 따라서 산림의 관리 및 정책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큰 혼란으로 말미암아 중앙정부의 지방 산림에 대한 관리 및 통제력이 약화되어 산림제도를 새로이 정비할 필요를 느껴 이를 시행하게 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건축, 조선, 관곽 제작 및 온돌의 보급과 화전의 개간으로 인해 목재의 수요가 증가된 것도 이 제도를 조속히 시행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그 본격적인 시기가 17세기 후반 숙종 때로 이때부터 조선 정부는 산림에 대한 관리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소나무를 이용하는 배를 만드는 정책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봉산의 종류를 지정하기에 이른다. 즉 율목봉산(栗木封山), 진목봉산(眞木封山), 황장봉산(黃腸封山), 삼산(蔘山), 향탄산(香炭山)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니 이 황장산은 황장봉산의 다른 이름이고 이 황장봉산은 고유명사가 아닌 조정에서 나무의 벌채 등을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이 황장봉산은 이 산 이외에 우리나라 다른 산에도 여러 곳 있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반인들이 함부로 나무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금표나 봉산 표시를 하여 마을 어귀나 산 입구에 표시하여 놓았다. 필자가 직접 본 것만 해도 원주 치악산 구룡사에서 사다리병창 오르는 코스 공단 초소 좌측에 있는 황장금표와 주천(백덕)지맥에 있는 사자산과 백덕산 아래에 있는 법흥사 부근의 황장금표는 금산의 예이다.
- 졸저 전게서 292 쪽
반면 이 黃獐山을 한자어 그대로 풀어 누런 노루가 살고 있거나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는 또는 누런 노루와 포수와의 인연 등 얼토당토 않은 말로 그 유래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원래 설이 많다는 것은 제대로 맞는 얘기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황장산 역시 아까 설명한 노루목과 같은 말입니다.
다만 黃이 '늘'의 뜻을 대체할 한자를 찾다보니 '누를'의 黃을 차용하였고, 늘/누루/노루'가 노루'獐'을 借字한 것이나 於가 어조사 어 외에 '늘'이라는 뜻이 있으니 어자령이니 어의도라는 한자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황장산이란 이 산줄기 즉 화개단맥 전체가 그러하듯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늘어진 줄기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황장산 정상에 있는 2등급삼각점(하동21)을 확인합니다.
섬진강 건너 삼능건설 연수원이 하얗게 보이고 그 우측으로 밥봉934.6m이 보이는군요.
그리고 저 우측이 간문천 건너 계족산인데 너무 희미하군요.
구름만이......
여기서 이 단맥 끝까지 8.2km면 아무리 내리막이라 해도 산줄기란 항상 오르내림이 있는 법!
그렇다면 넉넉하게 3시간은 잡아야 하겠군요.
그렇다면 3시 20분이나 되어야 도착.
하산식할 시간이 빠듯하다는 결론!
좀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10분 정도 간식을 먹고 일어납니다.
12:47
새껴미재를 지나 881.6봉을 오르고,
12:51
천왕사로 빠지는 지도 #3의 '아'의 곳인 중기능선 삼거리입니다.
천왕사 가는 길은 지도를 보면 상당히 급경사인 곳 같습니다.
12:54
그러고 잠깐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이 나오는군요.
쌍계사와 그 좌측의 국사암이 명백합니다.
조금 당겨봅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13:00
여긴 완전한 조망처입니다.제대로 산을 볼 줄 아는 분이 조망터 설치를 건의하셨군요.
다시 쌍계사.
개인적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저 쌍계사입니다.
고운 최치원도 만날 수 있고....
정말이지 쌍계사는 불교신도가 아니더라도 관람료를 내고 들어가서 봐도 볼거리가 너무 많아 돈이 아깝지 않은 곳입니다.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예전의 쌍계사 입구입니다.
지금은 차량 통행 문제로 입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 쌍계석문이라는 그을 쓴 이는 고운 최치원입니다.
집필 중에 있는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자료에서 퍼오기로 합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고운은 함양군수로 재직을 하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신라 정부에 서운한 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름 당나라에서 수준 높은 유학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 정부에 자신의 능력을 펴치고자 하는 웅지를 품었을 것인데.....
당시 신라 정부는 불교를 귀족들 사이에 만연하던 무속신앙을 대체하며 호국 신앙으로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불교가 그야말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완성하려는 왕실의 구미에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겠죠.
그런 상황에서 고운이 하는 일이라고는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의 문장이나 다듬고 고사나 풍요롭게 늘어놓는 일이나 하고 있으니 시나 읊고 문장이나 늘어놓는 귀족 사회에 염증을 느끼게 됨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가 당나라를 벗어나 귀국을 결심하였던 것도 병부시랑의 벼슬을 시작으로 나름 웅지를 펴보고자 함이었고 자신이 나라를 다니면서 개혁이 필요성을 느껴 시무책時務策까지 올렸음에도 그는 왕은 물론 귀족들의 냉소만 받았던 거 아닙니까?
자신의 천명 사상과 개혁안에 무관심한 신라 귀족 사회에 염증을 느낀 최치원은 쌍계사에 들어와 유불선의 합치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니 실로 그가 사상적으로 후대에 미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지리산 신선이 되고자 했던 고운에 대한 평은 분분합니다.
고운의 사대주의적 사상 때문에 신채호(1880 ~ 1936)는 그를 '일개 선비'라고 꾸짖었습니다.
유학의 비조일 그에게 조선의 선비들도 사뭇 엇갈리는 평을 하였습니다.
가령 쌍계사 입구에 있으며 고운이 지팡이로 썼다하여 철장서鐵杖書라 불리는 이 '雙磎石門'이라는 각자刻字에 대한 평만 봐도 그렇습니다.
탁영 김일손(1464~1498)은 “광제암문이란 글씨와 비교하건대. 크기는 훨씬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그보다 못하여 아동이 습자習字한 것과 같았다”고 폄하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몽인(1559 ~ 1623)은 위 탁영의 평가에 “탁영은 글은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면서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다.”고 하였으며, 양경우(1568 ~ ? )는 “안진경의 글씨보다 우월한데 당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수재 박여량(1554 ~ 1611)은 “나는 한 번만이라도 ‘쌍계석문’의 큰 네 글자를 손으로 만져보고. 팔영루 아래의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아득한 옛날의 유선儒仙을 불러보고, 천 길 절벽에서 학의 등에 올라타고서 선경을 유람하여 내 평생의 숙원을 풀고 싶었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입니다.
* 유선儒仙은 고운을 가리킴.
실천 유학의 최고봉인 남명 조식은 악양을 지나 이 쌍계사에 도착하여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이 쌍계사의 쌍계석문이었습니다.
“김홍지와 이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쌍계사 동문이다.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짓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는 ‘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놓았다. 지금까지 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서쪽으로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며 저 백 리 밖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신응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줄기고, 동쪽으로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쌍계’라고 부른 것이다.”
1744년, 황도익黃道翼()[1678~1753)은 "경진일에 재촉하여 밥을 먹고 나가 법당의 앞에 이르렀다. 고운이 지은 비문이 있는데, 불노(佛老)의 계승자들에게 많이 이어져 내려왔다. 향로전(香爐殿)에 들어가니 고운의 화상이 있다. 애석하도다. 불세출의 명인으로 불가에 자취를 더럽혔으니 학문을 택하는 것을 삼가지 않겠는가?"라고 평했다.
저는 이 쌍계사에서 필히 관람을 권할 것을 꼽는다면 다섯 개를 꼽숩니다.
우선 이 현판입니다.
이 현판은 그 유명한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서예가입니다.
우리나라 큰 사찰의 많은 현판이 해강 선생님 작품이라고 하죠.
청나라에 유학하면서 익힌 서법으로 모든 서체에 능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현판의 글씨는 사본이고 원본은 성보불교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참고도 #1 죽간竹簡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
삼신산이라!
현판에 지리산 혹은 두류산이 아니고 삼신산이라는 글자가 눈에 띕니다.
우리나라에서 삼신산이라 하면 봉래산, 방장산 그리고 영주산이라고 하여 각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일컫습니다.
중국 제나라, 연나라 시대 만연하던 도교의 영향으로 생긴 신선사상 때문에 생긴 산이름입니다.
거기에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방상인 서복에게 사람을 딸려 보낸 곳이 우리나라에 까지 확장이 된 것이고....
그런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방장산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사마천은 방장산을 신선이 산다는 중국 전설 속의 신성한 공간이라고 적었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번은 필히 가봐야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겠습니까?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습니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에는 삼신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이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습니다.
이쯤 되면 조선의 사대부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이 방장산을 그들의 유식遊息의 길이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향한 배움의 길 그리고 공자나 남명 조식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적을 향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금강산, 한라산 등이 삼신산 중 하나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에 중국에 있는 산 이름을 갖다붙인 것을 다시 해석하면서 생긴 오해입니다.
따라서 봉래산은 금강산, 영주산은 한라산이라는 설명은 좀 비약된 거라는 얘기죠.
이 현판에서 '삼신산'이라고 특별하게 쓴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삼신산은 우리나라에 셋이 있는 게 아니고 오로지 한 군데.
이곳 지리산이 곧 삼신산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지리산 = 두류산 = 방장산 = 삼신산이라는 겁니다. - 玄悟 說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입니다.
이 비는 광계3년인 887년7월에 세워진 것으로 孤雲 최치원(857 ~ ? )이 썼고 僧 환영이 새겼습니다.
진감선사 혜소(774 ~ 850)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나라 유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고운이 쓴 글이니 그 유려함이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글이라도 저 같은 산꾼에게 오면 이 비문의 느낌이 달라집니다.
국보 제47호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문 중 이 글귀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즉 위와 같이 이 비문에는 知異山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가서 주석하였다. 명의의 집에 환자가 많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절간이 넓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좁게 여겼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康州의 지리산知異山에 이르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 강주는 지금의 진주입니다. 이우성 선생이 교열하고 번역한 '신라 사산비명新羅四山碑銘'에는 智異山이라고 나오지만 이는 독자들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지금의 한자어를 사용한 것이고 어디까지나 원문은 知異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산비명의 원문은 1725년 6월에 찍어낸 쌍계사 소장 진감선사대공탑지의 목판본을 보고 옮긴 것입니다.
이 목판본은 이 절의 화엄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번 답사에서 확인을 하였으니 대단한 성과였음을 스스로 자축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서 지리산이 되었다가 지금의 한자어에 따라 지리산智異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억지로 만들은 얘기라 보여집니다.
어쨌든 책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에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는 기사가 최초입니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나 기타 문서의 기사에도 한자어는 地理山으로 되어 있어 발음은 같으나 한자어 표기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이르러서야 智異山으로 오늘날과 같이 표기되게 됩니다.
그러니 지리산이라는 발음만큼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려졌으니 그때부터 지리산이라는 지명이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국어학적으로 볼 때 '둠/ 두름'에서 두류 > 지리로 음운변화를 일으켰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면서 적당한 표기를 하다 고려사 이후 智異山으로 표기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시대 이후에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 개인적인 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많이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영남학파들에 의해서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집중적으로 사용됐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주로 '두류산'이 체제 부정적인 이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즉 멀리는 노장사상을 주창하는 이들부터 가까이는 동학혁명과 농민항쟁 그리고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거론합니다.
일면 타당하다고도 보여지지만 저는 우리나라 산줄기 즉 백두산頭에서 시작한 우리나라의 산맥山脈이 흘러내려와流 지리산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었다는 산줄기 인식이 자리잡게 됨에 따라 그 이름이 정착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인문지리학이 발전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중간에 잠깐 얘기했던 지리산 산신과 관련입니다.
이 쌍계사 삼성각에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여자 산신 즉 마고할머니를 모셨다는 것입니다.
노고단에 얽힌 이야기
“형. 단(壇)은 제단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렇다면 노고가 무슨 말이야?”
장감독의 궁금증은 이어진다.
“세 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신라 시대 얘기니 엄격하게 따지면 아마 통일신라시대 이후 얘기일거야. 이 땅이 원래 백제 땅이었으니까.”
①우리나라 풍습에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 양육 그리고 무병장수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삼신(三神)이 마고, 궁희, 소희 등 세 분을 이르는 말이다. 이 노고단이 바로 이 할머니 중 마고 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이다. 이는 신라 내물마립간 때 박제상이 쓴 ‘징심록 십오지’ 중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얘기라고 한다. 얘기는 6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미르 고원에 마고성이 있었고 이 성의 성주가 마고할머니였다. 마고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궁희, 소희였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마고 – 궁희 – 황궁 – 유인 – 한인 – 한웅 – 한검(단군)’으로 계승되었다고 쓰고 있다. 결국 노고단은 우리나라 개국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 같다.
②그리고 또 하나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노고단이 바로 선도성모를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는 거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서 올렸다. 이 남악사가 지금은 노고단에서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단다. 이처럼 나라에서 제사를 올린 것은 민중차원의 성모신앙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 이 삼신을 천신, 지신, 인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어쨌든 이런 것들을 삼신할머니라 인격화해서 부르는 거겠지. 하여간 우리 옛 선조들은 하느님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죽을 때는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거 같아.”
“그래.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도 삼신을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고 있지.”
역시 다큐감독이라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장감독이다.
“그렇군. 단군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고 신라의 탈해왕도 토함산으로 갔다고 했으니.”
“그런데 또 다른 설(說)은 뭐야?”
“③노고단을 어원으로 풀은 거야. 우리말의 ‘한’이란 말은 우선 ‘크다, 많다’를 뜻하잖아? 그러니 ‘큰 산’일 경우 ‘한뫼/한미/한메’ 등으로 불렸다고 하지. ‘한뫼’가 발음이 바뀌어 ‘할미’가 되자 이를 한자어 노고(老姑)로 표기했고. 산에 단(壇)이 있으니 노고단(老姑壇)이 되었다는 얘기지. 그렇잖아? 우리나라 곳곳에 노고산이 많잖아. 그 이유야!”
대간길은 여기서 직진하여 무넹기 ~ 종석대로 진행을 하여야 하나 공단에서는 ‘휴식년제’로 막아 놨다. 부득이하게 여기서는 노고단 대피소로 진행을 하여 대간길을 이어가야 한다.
졸저 전게서 66쪽 이하
흔히 백두산은 아버지 산이고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합니다.
바로 지리산의 신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고 할머니'는 동학농민혁명 때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마고 할머니가 산신으로서 군주사회의 대항마 역할을 하여야 하였으며,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시천주侍天主의 지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신이 노고단에 있으면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되고 마고 할머니가 되며 천왕봉으로 가면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황후가 되고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됩니다.
그래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인 것입니다.
불교의 우수함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토속신앙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합니다.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면 한 손으로는 금속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는 그림 부채를 가지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불타佛陀를 부르고 또 법우화상法祐和尙을 부릅니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智異山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法祐和尙이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이 대단했습니다.
하루는 한가로이 있는데, 갑자기 산의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물이 흘러온 곳을 찾아 천왕봉天王峰 꼭대기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면서 인간세계에 유배流配되어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의 술법術法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중매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딸 여덟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습니다. 이들에게 무당의 술법巫術을 가르쳤는데, 금속방울을 흔들고 그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다니면서 무당의 일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로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하고 접신接神을 한다고 합니다.
- 조선 무속고巫俗考
이렇게 법우화상의 일화에서도 보듯 불교는 우리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 실상사 앞의 석상이나 장승 등이 다 이렇게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화해 혹은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륙의 유지리산록(1463)을 보면 "산 속에 있는 여러 절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성모에게 제사하지 않는 데가 없다."고 쓴 흥미로운 대목 역시 이러한 점을 반증해 주는데 이는 현대 사찰의 삼성각과 같은 기능을 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어쨌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 이 쌍계사가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던 그 유래와 관련된 법당 즉 금당과 관련한 곳입니다.
이 쌍계사의 원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습니다.
그러던 것을 헌강왕 때 이 절을 중창하면서 진감선사의 대공령탑을 제작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석이 완성되기 전에 헌강왕은 사망하였고 다음 왕인 정강왕( ? ~ 887)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되었는데 당시 부근에 이미 옥천사가 있어서 개명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보고를 듣기를 절의 문이 두 줄기 간수澗水에 임해 있다고 하니 정강왕이 쌍계사雙磎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고운은 적고 있습니다.
옥천사의 건립 과정은 이렇습니다.
즉 신라 성덕왕 21년인 722년 대비, 삼법 등 두 분의 화상이 당나라에서 선종 육대조인 혜능선사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와서 '지리산 곡설리의 갈화처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범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절을 지어 옥천사라 하고 조사를 봉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을 문성왕 2년인 840년 진삼선사眞鑒禪師 혜소慧昭가 개창하고는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절명을 하사下賜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금당은 옥천사라는 절이 처음 세워진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 金堂에는당나라 선종 제6조인 혜능대사의 정상 즉 머리가 모셔져 있는 탑이 있습니다.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편액이 양 옆에 붙어 있는데 이 글은 중국 당나라 시인 왕유가 지은 '육조혜능선사비명'에서 따온 글귀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과 육조정상탑이라는 글 등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쌍계사의 만허 스님이 내온 차 맛을 보고는 예전에 맛을 봤던 중국의 명차 용봉승설을 떠올리며 쓴 글이라고 하는군요.
이 정도로 하죠.
쌍계사 화엄전은 가야산 해인사의 장경각 못지 않은 도서관이 있기도 한데 기회가 있을 때 더 알아보죠.
쌍계사 뒤로 형제봉에서 신선봉으로 흐르는 줄기가 힘찹니다.
저 구름에 거린 형제봉 활공장 바로 앞까지 지리산 둘레길은 올랐다가 우측 도심마을 쪽으로 내려왔었습니다.
그러고는 대비마을로 진행했었죠.
다시 한 번 저쪽으로 가서 이곳을 조망하고 싶군요.
지리남부능선을 타야 할 이유입니다.
촛대봉과 그 뒤로 호남정맥.
우측으로는 피아골 입구인 연곡3거리.
섬진강이 보이죠.
그리고 그 좌측 간전천 우측으로 계족산과 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봅니다.
이 산줄기를 보면서 산으로 님과 하나하나 산을 짚어보는 게 얼마나 재미 있고 가슴 뛰는 일인지....
옛 선비들이 시를 하나 읊어주면 그 답으로 시가 한 수 돌아오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여전히 왕시루봉은 구름에 가렸고....
목아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13:08
이제 촛대봉만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발걸음을 좀 빨리합니다.
지도 #4
13:19
조망도 없는 촛대봉에서 정상석만 확인하고....
다음 목적지는 작은재입니다.
여기서 제가 둘레길을 지났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겠죠.
13:29
바위 지대를 지납니다.
13:32
부엉이 바위를 지나고,
13:40
지도 #4의 '차'의 곳인 삼신마을 삼거리에서 크게 우틀합니다.
13:47
583.4봉에 있는 삼각점은 경상남도에서 설치한 것이고.....
명찰을 달아놓은 소나무들....
14:02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작은재입니다.
좌틀하면 법하마을로 진행하고 우틀하면 기촌마을입니다.
직진합니다.
14:16
그러고는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160봉에 오르고는,
고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화개마을이 보이고,
우측으로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인 화개교가 보입니다.
대나무 밭을 따라,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도로옆 황장산 등로입구로 떨어집니다.
함께 화개장터 표지석을 보고,
화개교 아래에서,
화개천과,
14:41
섬진강이 만나는 것을 보면서 화개지맥을 종료합니다.
터미널에 가보니 15:40 구례로 가는 버스가 있군요.
저는 그 버스로, 산으로님은 15:50 버스를 예매하고 근처 치킨집으로 옮겨 간단하게 씻고는 치킨을 안주로 오늘 피로를 씻습니다.
아주 멋진 산꾼과 멋진 산행 그리고 멋진 뒷풀이 100% 만족스러운 산행이었습니다.
다음 구간은 백무동 ~ 한신계곡 ~ 영신봉 ~ 세석 ~ 삼신봉 ~ 형제봉 ~ 신선봉으로 하시죠.
지리남부능선으로 말입니다.
강 건너 옥화주막을 찾아봤어야 했는데 시간때문에...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火田民)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隣近)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恨)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례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傳例)가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김동리 역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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