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귀가하여 샤워를 하고는 책상 앞에 앉습니다.
그러고는 비누칠을 할 때 흥얼거렸던 음악이 커팅된 LP 한 장을 고릅니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낡은 LP 재킷jacket에서 디스크를 꺼냅니다.
제 손때가 묻은 그 디스크를 턴 테이블에 올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댑니다.
약간의 잡읍이 들리고 그 소리들 사이에서 머릿속으로 맞춘 반주에 따라 익숙한 음들이 들려옵니다.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하는 새로 생긴 행동이 이젠 버릇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도 합니다.
1990년 정도로 되돌아가는 느낌입니다.
저의 음악은 그 시절에 딱 그대로 멈추어 있습니다.
주중 산행의 파트너는 역시 '산으로'님 입니다.
산행 일정에 맞춰 하루 연차 휴가를 쓸 수 있도록 많은 날들을 비축해 놓으셨다 합니다.
그러거니와 트레킹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신 분이니 '산으로'님 만큼 제격인 파트너도 없을 듯합니다.
산경표가 산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 전 지리에 빠진 산꾼들은 지리 주릉에서 가치치는 줄기들을 동서남북 4방향으로 나눠 지도에 선을 그은 다음 그 마루금을 따라 걷는 산행을 즐겼습니다.
그 중 주릉의 중간 정도 되는 영신봉에서 남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능선을 남부능선이라 불렀습니다.
그 능선의 끝은 산줄기가 섬진강에서 만나는 곳인 외둔까지 라고 하였습니다.
지리남부능선이라!
오늘은 그 구간을 걷기로 합니다.
산경표를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춰 기맥, 지맥으로 발전시킨 '신산경표'나 산자분수령 혹은 합수점의 원리에 충실하게 그은 '대한산경표' 얘기는 잠시 잊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의 산꾼에게 지맥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은 산줄기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얘기일 것이므로 가지치는 능선에서 산줄기를 보기는 하겠습니다.
그 남부능선에 달라붙기 위해서는 보통 두 가지 트랙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백무동이겠고 다른 하나는 거림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기에는 아무래도 백무동이 수월합니다.
백무동 ~ 한신계곡 ~ 남부능선.
거리로는 30km 정도인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까요?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한 방에 진행한 팀이나 개인은 안 보입니다.
다행히 오래된 자료 하나가 튀어나옵니다.
역시나 존경하는 선배 '킬문'님이시군요.
어디를 가도 끝을 봐야 하는 분!
중간에 영신대를 들르고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17시간이 걸리셨군요.
일단은 15시간을 계획합니다.
우선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으로 산경표를 풀어보죠.
오늘 답사할 곳은 낙남정맥의 한 부분과 거기서 분기하는 횡천지맥의 한 부분.
그리고 그 횡천지맥에서 분기하는 악양단맥입니다.
악양단맥이야 좀 생소한 이름이지만 지맥에서 분기하는 여타 산줄기는 통들어 '단맥短脈'이라 부른다면 그렇게 이름짓지 못할 바도 없습니다.
개념이란 긴 부차적 설명을 축약시키는 기능도 있을 거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산줄기의 개념들이 다 동원되니 다소 복잡해진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지도에 그리고 나면 한결 간단해집니다.
글보다는 그림이 주는 편리함 입니다.
참고도 #1
한번 풀어볼까요?
우선 머릿속으로 그려보죠.
심야버스를 타고 백무동에 이른 새벽에 도착합니다.
분명 평일이라 백무동시외버스 터미널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관리공단 초소를 지나 호젓하게 산행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한신계곡의 좀 시끄러운 물소리를 들으면서 계곡을 따릅니다.
그러면 동이 틀무렵 지리의 주릉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는 1990년대나 2000년 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다리가 몇 개 더 설치된 점 만큼은 다르지만....
세석산장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은 후 물을 보충하고 삼신봉을 향합니다.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치는 낙남정맥 줄기를 따른다는 얘기죠.
낙남정맥의 산줄기는 삼신봉에서 좌틀하여 외삼신봉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죠?
능선 개념으로는 고운능선 방향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씨만 허락된다면 여기서 지리의 주릉과 섬진강 건너 호남정맥의 백운산 부근을 물리도록 감상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까지가 낙남정맥입니다.
물줄기의 관할이 낙동강에서 섬진강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직접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자잘한 물줄기들 외에는 횡천강이라는 걸쭉한 물줄기의 관할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횡천강이라는 물줄기를 구분하는 산줄기의 시작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나오지 않으나 현지 하동군에서는 '높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시루봉'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지명위원회를 통과하여 국토부나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고시한 이름은 아니니 그냥 횡천지맥 갈림봉이라고만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삼신봉 ~ 시루봉(편의상 비공식 이름을 인용) 구간을 횡천지맥이라는 이름으로 걷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루봉'에서 직진을 하여 '형제봉'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문제는 삼신봉 ~ 수리봉 구간을 걷다가 상불재라는 심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국립공원의 이정표는 불일암 ~ 쌍계사 코스로 안내를 합니다.
곧 세석대피소(영신봉) ~ 쌍계사 구간을 남부능선의 한 코스로 만든겁니다.
여기에 반기反旗를 들고 더 가고 싶어하는 그러니까 질긴 사람들을 위해서는 조금 더 양보하여 상불재 ~ 삼성궁까지는 허용해 줍니다.
그러니 능선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상불재 이하는 궁금하기만 한 구간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늦은 봄이면 철쭉축제가 화려하게 열려 암봉이 주는 멋진 조망으로 전국의 명산 산꾼을 불러모으는 형제봉의 능선을 맛보며 옛 가야의 전설이 숨쉬고 있는 고소산성을 지나 지리의 변방이어서 그렇게 이름지었는지 어쨌든 '외둔外屯'에서 작은 산줄기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비록 악양 평사리의 너른 들판때문에 온전한 합수점을 기대하기가 힘들어 외둔에서 마무리를 짓더라도 이를 순수한 산줄기로 보면 그뿐일 것이므로 '악양 단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구간을 마무리하면서 만난 산줄기계의 숨은 일인자 '죽천竹川' 선생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디스크 한 면이 다 돌아갔고 side B로 넘겨 평소에는 듣지도 않던 곡까지 듣게 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산행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5. 30. 수요일
2. 동행한 이 : 산으로님
3. 산행 구간 : 지리산 남부능선 (백무동 ~ 한신계곡 ~ 삼신봉 ~ 상불재 ~ 시루봉 ~ 형제봉 ~ 고소산성 ~ 외둔)
4. 산행거리 : 31.62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백 무 동 |
|
03:10 |
|
|
세석대피소 |
5.92 |
06:04 |
174 |
|
삼 신 봉 |
7.77 |
10:01 |
237 |
54분 휴식 |
상 불 재 |
4.35 |
12:32 |
141 |
30분 휴식 |
시 루 봉 |
2.52 |
13:38 |
66 |
10분 휴식 |
형 제 봉 |
4.11 |
15:10 |
92 |
10분 휴식 |
고소산성 |
4.7 |
17:21 |
131 |
10분 휴식 |
외 둔 |
2.25 |
17:58 |
37 |
|
계 |
31.62 km |
14:48 |
12:54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03:10
23:50 서초 남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함양에 두 사람을 내려주고는 중간에 인월이나 마천은 정차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백무동으로 듭니다.
예상했던 대로 백무동은 조용합니다.
백무동은 무속인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죠?
반야봉이 문수보살이 자리한 불교의 성지라고 한다면 천왕봉은 그보다 먼저 자리잡은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의 보고라 할만 합니다.
지리의 산신령은 용유당부터 시작하였을 겁니다.
거기서 기돗발이 안 받을 경우 그들은 이 하당下堂인 이 백무동까지 올라옵니다.
조금 더 영험함을 받으려면 다시 중당中堂인 제석봉 까지 올라가고....
거기서도 여의치 않을 경우 상당上堂인 천왕봉까지 올랐다고 하죠?
그러니 이 백무동은 그들의 Base Camp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유교에 쩌들은 선비들에게는 음사淫祠였고 질시疾視의 대상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낯설기만 한 곳이 청계도인 양대박(1541~1592)에게는 삼가하고 멀리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슈퍼는 불은 켜져 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초소문은 열려 있고....
03:20
장터목과 세석갈림길입니다.
여기서 세석대피소까지는 6.5km랍니다.
어두운 길에 볼 게 뭐 있나요?
마침 랜턴도 빠뜨리고 챙기지 못해 산으로님 랜턴에 발을 의지하며 오릅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산고양이 한 마리도 만나고.....
한신폭포 옆을 지납니다.
예전에 이 한신계곡은 장마철에는 지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두어 군데는 신발을 벗고 넙적다리까지 오는 물 위를 걸어서 건너야 했으니....
이 계단는 새로 도색을 했군요.
녹색 페인트가 바로 손에 묻을 것 같습니다.
0.7km 남았다고 하니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문제는 1km나 2km가 아니고 꼭 0.5km가 문제죠?
마지막 남은 거리가 주는 체감 거리는 두세 배 이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주릉으로 올라섭니다.
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촛대봉 방향으로 조금 더 올가면 이 그림을 볼 수 있죠?
지난 겨울 촬영한 사진입니다.
지금 저희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저 한신바위 바로 아래입니다.
백무동이나 거림에서 올라온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렸을 바위입니다.
영신봉 우측으로 툭 튀어나온 바위는 운장바위.
그리고 한신계곡 내려가는 초입의 바위가 한신바위.
그러니까 저 바위때문에 한신계곡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죠?
1925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기사를 봅니다.
“청학동을 찾아 다니는 제군들아!
사람은 정신을 먼저 미신으로부터 타파하여야 될 것이다.
청학동은 진실로 미신의 한 주요물이 되었다.
거금 삼백 여 년전 한 도인의 秘書를 보건대 청학동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데, 장차 삼제갈 팔한신(三諸葛 八韓信)이 날 것이요, 그 동리를 복거(卜去)한지 십 리 이내에 車馬가 영문(盈門)이라 하였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한 도승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세무청학동(世無靑鶴洞)이라 하였다.
도인은 있다 하고 도승은 없다 하니 청학동은 진실로 전무후무한 혹세무민의 산물이다. 선영구토(先塋舊土)를 다 버리고 세탁가업(世倬家業)을 빙자하여 그야말로 당대 발복지인 청학동을 찾아 천 리를 멀다 않고 내왕하는 인사들아. 참으로 가석가애(可惜可哀)한 제군이다.
내일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사를 전람하면 알 것이다.
수 십 년 전으로부터 청학동을 찾으려고 지리산 남록에 거류하는 수 천 명의 경과를 보건데 십년 이내의 車馬 영영문(盈迎門)은 고사하고 반년 이내에 남에게 압박만 많이 받는다 한다.
현금(現今) 세소간(世所間)에 청학동이라는 곳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 세석평지 혹은 잔돌평지이라 하는 데는 평원광록이 주위 사십리나 되고, 자좌 우향(子坐 于向. 정북에서 정남방향)으로 되어 미신에 혹한 자의 눈으로는 한번 혹할 만도 하다.
-------------------- 중략 ------
諸君아!
청학동을 찾아 제갈, 한신(諸葛, 韓信) 같은 자손을 바라는 것보다 청학동을 찾는 그 경비로 현대에 상당한 교육을 가르쳐 제갈, 한신 같은 사람을 배워서 성공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청학동인가 하노라.”
(대정 14년 5월 24일, 시대일보, 진주 一記者)
대정 14년은 1925년입니다.
기사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청학동은 세석평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비결쟁이들은 오직 비결서에 기록된 ‘삼제갈 팔한신’의 예언을 따라 지리산의 이 세석고원으로 찾아 들어 둥지를 틀었숩니다.
그러고는 세석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영신봉을 한漢나라 관우關羽의 자字를 따서 운장雲長바위, 그 맞은 편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역시 한의 무장이자 초楚나라의 제왕이었던 한신韓信의 이름을 따서 한신바위라 이름 짓고는 그 두 바위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현실을 도피하려는 의식이 더 만연해지자 신문에 까지 이런 기사가 뜨게 된 것입니다.
옛 선비들이 읽었으면 깜짝 놀라고도 남았겠습니다.
지도 #2
06:04
대피소 뒤로 영신봉에서 흘러내리는 낙남정맥 줄기를 봅니다.
낙남정맥에 대해서는 이따 보기로 하죠.
세석대피소로 내려갑니다.
물을 끓여 라면과 만두를 삶습니다.
대피소에서 1박을 한 분들은 요기를 하고 다음 행선지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게들 움직이시는군요.
요즘은 간단하게 반주도 못하게 한다고 하니 어젯밤 어떻게 주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06:58
50여 분 아침을 먹고 일어납니다.
뿌옇던 하늘이 조금 개었군요.
호남정맥의 능선이 부족하나마 윤곽은 알 수 있을 정도로 펼쳐지는군요.
우리나라 전 지맥을 섭렵하느라 오랜만에 지리에 들은 산으로님.
너무 가까이 있는 호남정맥 줄기에 자못 놀라는 표정이군요.
그러면서 산을 헤아려 봅니다.
억불봉1007.5m ~ 백운산1228.0m ~ 도솔봉1153.2m.....
좌측으로는 촛대봉 능선이 흐르고.....
이 길은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화개면의 군계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능선이 경계가 되는 곳이나 그 길은 비탐구간이니 이 길을 군계로 얘기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석평전은 물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도 있을 정도여서 이곳을 불일폭포 옆의 불일평전, 청학동 등과 함께 무릉도원인 청학동이라 보기도 했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은 이 세석평전을 저여원沮洳原이라 불렀습니다.
이 매를 잡는 이들이 머물렀던 초막 부근에 현대에 들어와서 한국전쟁 다음에는 우천 허만수 선생이 기거하게 됩니다.
참고 사진 : 중산리 법계교 부근에 있는 허만수 추모비
그러면서 등로 개척과 조난 산객 구조 그리고 간단한 지도 제작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고는 지리 어딘가로 숨어버리셨고....
영원한 지리산인이라 할 것입니다.
07:10
거림갈림 삼거리를 지납니다.
진행방향의 이정표는 청학동 혹은 쌍계사를 따르면 됩니다.
항상 질퍽하던 등로를 돌로 덮었군요.
여기서 낙남정맥에 합류합니다.
낙남정맥 길을 지나자마자 시야가 탁 트이는 곳이 나옵니다.
07:23
커다란 바위가 서 있는 곳.
이 바위 아래는 물이 두 줄기에서 흘러나오죠.
음양수陰陽水가 나오는 바위입니다.
그 바위 위에서 조망을 합니다.
우측으로 왕시루봉과 그 앞줄의 황장봉 능선 그리고 좌측으로 호남정맥의 도솔봉이 보입니다.
왕시루봉 뒤로 무등산까지 보이는데 사진으로는.....
좌측 아래가 조금 이따 밟게될 삼신봉 능선.
그 뒤가 호남정맥의 백운산 등....
우측 황장산 능선.
앞의 두 번째 줄기가 쌍계사로 내려가는 줄기.
날이 좀 흐리긴 하지만 이 정도로도 대만족!
태백산 천제단을 본뜬 제단에 인사 좀 드리고....
바위 아래로 내려갑니다.
양쪽에서 스며 나오는 석간수의 물맛은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이 음양수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세석의 연진이와 호야의 얘기인데 별로 신기할 게 없어서....
우선은 쌍계사가 가장 머니 그 이정표를 따르기로 합니다.
절구 구덩이 같은 곳을 지나,
07:45
1402.7봉에 오릅니다.
조망이 트이는 멋진 곳입니다.
우측의 촛대봉과 중앙의 영신봉을 봅니다.
촛대봉.
가까이 보면 이 모습이었죠?
멀리서 보면 영신봉보다는 오히려 촛대봉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선인들은 이곳을 지나면서 필히 촛대봉을 언급했습니다.
아까도 잠깐 봤었죠?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의 '증봉甑峯을 거쳐 저여원에 다다랐다.'라는 구절 말입니다.
저여원이 세석평전을 말하는 게 분명하므로 증봉은 저 촛대봉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이 촛대봉을 점필재 김종직은 시루봉, 증봉甑峰이라 하였고,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이라 하였으며 유몽인은 사자봉獅子峰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하달홍은 중봉, 송병선은 촉봉燭峰이라고 불렀죠. 시루봉이라..... 시루봉의 유래를 봅니다. 수리봉 소고(小考) “형.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이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ㅅ'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98쪽 이하
이와같이 이 산은 떡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증봉 혹은 시루봉이 아니라, 이 '수리'가 '시루'로 변한 것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효온(1454~1492)이 이곳을 계족봉이라고 부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계족산이라고 하면 우리가 갑천(식장)지맥을 하면서 지나는 대전의 계족산424m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가까운 곳인 지리남부의 섬진강 건너 구례군 문척면과 간전면의 면계에 있는 계족산702.8m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전에 있는 계족산이 더 유명합니다.
어쨌든 그 유래를 보면,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는 말도 있고,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고자 닭을 풀어놨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뭔가 꺼림칙합니다.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리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으로부터 계족산 얘기를 들어봅니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 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니 계족산의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와 같은 뚯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범어梵語로 우리말의 '산'이 giri 즉 '지리'란 발음이라는 것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가야국 시절 칠불사의 허황후의 설화나 범왕리라는 지명이 불교남방전래설과 맞물려 남의 얘기로 들려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무장등 우측 뒤로 반야봉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노고단이 뾰족한데 이 사진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 좌측의 왕시루봉은 아까보다 더 멀어졌습니다.
왕시루봉과 황장산 사이에는 피아골에서 내려오는 연곡천이 흐르겠고, 통꼭지봉 앞이 목통골일 것이니 이 바로 앞의 대성골 물과 우측의 빗점골 물이 합쳐져 신흥동 삼거리로모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삼거리에는 고운 최치원이 각자刻者한 세이암洗耳巖이 있을 것이니 거기서 모인 물들은 화개천이라는 이름으로 섬진강에 합류할 것입니다.
좌측으로 드디어 삼신봉1288.7m이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멀리 호남정맥과 우측의 서시지맥.
뒤를 볼까요?
중앙의 영신봉을 남효온은 계족산으로 촛대봉은 빈발봉貧鉢峰으로 불러 구별하고 있지만 사실 예전에는 저 영신봉이 지리산에서 한 역할은 그리 커 보이지 않습니다.
* 참고로 최석기 교수는 영신봉을 빈발봉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저 영신봉이 낙남정맥이 가지를 치는 봉우리라고 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촛대봉(시루봉) ~ 저여원(세석평전) ~ 영신사(빈발암)~ 의신암 정도로 걷는 루트였으니 영신봉은 그저 스쳐지나는 봉우리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기도처로서의 영신대가 있고 그 영신대가 영신암이고 영신사였으니 후에 그 이름을 따서 영신봉이 된 것으로 정리하면 될 것입니다.
산경표에는 그 낙남정맥이 갈리는 것을 어떻게 봤을까요?
참고도 산경표 최성우 본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지리산에서 끝나고止於智異 취령 이하는自鷲嶺以下 곁줄기를 이루므로 則爲傍支 낙남정맥이라 한다故今洛南正脈."고 하였으니 낙남정맥의 시작은 영신봉이 아닌 취령鷲嶺이라고 본 것입니다.
조선 최고의 서지학 교과서라 할 김선신(1775 ~ ?)의 두류전지에는 뭐라고 썼을까요?
그리고 여기서 흘러 고운동, 묵계, 빈의치 등이 되고 양이치, 안양산, 백토현 .....
그러면 취령이 어디일까요?
鷲는 '수리 취'이니 아까 살펴본 촛대봉의 어원 풀이를 거꾸로 보면 의외로 간단하게 풀릴 문제입니다.
수리재 〉취재 〉취령이라는 겁니다.
예전에 영신봉은 영신대라는 바위가 있는 암자가 제 역할을 하였으니 어느 모로 보나 이 부근의 대장산大將山은 엄연히 촛대봉입니다.
그러니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갈리는 봉우리는 분명 촛대봉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그렇다고 하여 영신대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
촛대봉에서 영신대로 내려오는 고개 이름 즉 수리재인 취령에서 낙남정맥이 갈리는 것으로 정리하여 산경표를 썼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산줄기와 물줄기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읽었던 것입니다.
다만 산경표를 모르고 그저 능선으로 산줄기를 본 이 가령 허재虛齋 정석구(丁錫龜, 772 ~ 1833) 같은 이는 "북쪽으로 낮아지며 뻗어 내린 산줄기는 영원암(靈源庵) . 마천(馬川) . 실상사의 주능선이 되는데, 동쪽으로 취령(鷲嶺)까지 이른다. 남쪽으로 낮아지며 뻗어 내린 산줄기는 신흥사(新興寺) . 쌍계사(雙溪寺) . 불일암(佛日庵)의 주능선이 되고, 동쪽으로 영신사(靈神寺)까지 이른다. 남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악양 . 청암(靑巖) . 덕산의 주능선이 된다."고 하였던 바, 취령과 영신사가 겹치는 느낌이 있군요.
참고로 산경표의 지리산은 여원재 ~ 남해를 만나는 곳까지이지 지금 우리가 보는 시각과 같이 천왕봉이라고 보면 좀 곤란합니다.
그래서 극구 우기자면 지리산의 끝은 금오산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
그러고 보니 저 촛대봉이 다시 보입니다.
신령스럽게 보인다는 것이죠.
여기서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 선생의 해석을 봅니다.
선생은 남효온의 빈발봉, 계족봉을 풀기 위하여 비해당匪懈堂 이용 즉 안편대군의 찬贊까지 동원하여 해설을 하였는데 그 정성과 해박함에 혀를 차게 됩니다.
너무 난해하니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언제나 정겨운 반야봉.
07:59
의신으로 떨어자는 삼거리를 지납니다.
지도 #2의 '가'의 곳입니다.
08:08
1348.4봉을 우측으로 지나,
08:10
석문을 지납니다.
08:16
눈길을 거림골을 따라 내려가면 멀리 거림이 보입니다.
진행방향 정면으로 삼신봉과 좌측의 외삼신봉이 보이는군요.
그리고 두 삼신봉 사이로 보이는 봉우리가 지리의 끝 금오산875.1m입니다.
내삼신봉 우측으로는 쌍계사로 떨어지는 상불재 삼거리가 보입니다.
거림골 뒤가 구곡산이겠군요.
그러면 그 너머가 덕산이고.....
남명 조식.....
08:56
숲속으로 들어 잡목과 산죽밭은 번갈아 가며 진행합니다.
1249.1봉을 지나 지도 #2의 '나'를 지납니다.
09:02
그러고는 1228.7봉의 이동통신 중계소를 지납니다.
능선 자체가 밋밋하다 보니 봉우리라는 느낌도 없습니다.
지도 #3
09:08
목책으로 막아놓은 곳.
지도 #3의 '다'의 곳입니다.
이 목책을 넘어가면 '한벗샘'이 있고 더 진행하면 거림이 나온다는 '산으로'님의 귀띔입니다.
샛길을 막으려는 공단측의 노력도 가상하지만 좌측을 보니 길이 선명하여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이 한벗샘을 통하여 거림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야영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단에서 애를 쓰는 거 같습니다.
이 뒤로도 대성교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고.....
좌측으로 멀리....
천왕봉이군요.
10:01
추모비를 봅니다.
저도 제 자리를 미리 찍어놔야 하는데....
우측으로 내삼신봉1355.1m이 인상적입니다.
10:01
삼신봉입니다.
이곳이 행정구역 상으로는 하동군 화개면과 청암면 그리고 산청군 시천면이 만나는 이른바 삼면봉입니다.
낙남정맥 방향으로는 외삼신봉1286.7m.
이렇게 남부지리에는 삼신봉이 세 개입니다.
외설악과 내설악을 구분하는 것은 백두대간이지만 여기서 삼신봉을 구분하는것은 내륙쪽에 있느냐 아니면 지리 바깥쪽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영신봉과 촛대봉이 많이 멀어졌습니다.
육안으로는 그런대로 천왕봉도 잘 보이던데.....
그 좌측으로 노고단까지 봅니다.
..................
10:39
30여 분 놀면서 간식을 먹고는 다시 길을 나섭니다.
쌍계사 방향을 택하면서 이제부터는 낙남정맥을 벗어나 횡천지맥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능선개념으로는 여전히 지리남부능선입니다.
우틀합니다.
그러면서 산청군과 헤어져 하동군 청암면과 화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10:58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구조목 하나가 나옵니다.
매 500m마다 설치되어 있는 이것도 산꾼들에게는 고마운 도우미들 입니다.
11:00
내삼신봉 정상입니다.
내삼신봉에는 정상석과 2등급삼각점(하동 27)이 있지만 이 삼각점은 페지된 것이기 때문에 효력이 없는 그것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삼각점 표시가 안 되어 있는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진행방향으로 중앙 좌측으로 쇠통바위봉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상불재 갈림봉이 그리고 우측 끝으로는 형제봉이 보이는군요.
갈 길이 아득합니다.
좌측으로 묵계제가 보이는군요.
윗 마을이 청학동으로 유불선 합일교 등 도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죠?
저 동네가 고운 최치원이나 선인들이 찾던 오리지널 청학동이어서 청학동이 아니라 그런 분들이 살면서 청학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청학동이 된 것으로 봐야겠죠.
이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물들이 일차로 저 저수지에 모였다가 횡천강이되어 섬진강을 향해 갈 것입니다.
지도 #4
11:16
1306.2봉을 지나,
11:32
쇠통바위 전위봉을 지납니다.
11:34
쇠통바위는 진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 그래도 한 번은 올라야 할 곳이기에 올라가서 청학동 일대를 봅니다.
저곳은 언제 왔다갔는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곳이 되어 버렸군요.
..............
.......................
예전에는 한자로 綿竹이라 써서 솜대라고 표기한 것 같습니다.
점필재의 글을 보면 솜대綿竹를 뚫고 지났다는 귀절이 나옵니다.
오늘 이 조릿대를 원없이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죠.
고통의 서막에 불과할 뿐......
11:57
1299봉을 지납니다.
좌틀하여 능선을 따르면 삼성궁 방향으로 떨어지겠군요.
지긋지긋한 산죽밭을 지나,
12:23
조망터에서 잠시 쉬다가 가기로 합니다.
이 부근이 좀 신경을 써야 할 곳입니다.
물론 쌍계사나 삼성궁 같이 공단 이정표에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는 꾼들이야 그냥 좋은 길따라 가면 되지만 저희같이 지맥 혹은 지리남부능선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도 #4의 '마'의 곳에서 능선을 따라 좌틀해야 하느냐 아니면 직진을 하여 상불재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 입니다.
횡천지맥을 하는 지맥꾼들은 당연히 좌틀하여 지맥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은 산죽밭입니다.
12:32
다음에 쌍계사 ~ 불일폭포 ~ 불일암 ~ 상불재 ~ 삼성궁을 와봐야 할 곳이기에 상불재로 내려갑니다.
쌍계사는 직진하는 곳이기에 크게 좌틀하여 계곡 방향으로 갑니다.
12:40
그러면 아까 잠깐 헤어졌던 지맥길을 다시 만납니다.
지도 #4의 '바'의 곳입니다.
여기서 직진하면 삼성궁 방향이지만 남부능선 길 혹은 횡천지맥 길은 안내판 뒤로 뚫고 들어갑니다.
반달곰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부터 딴 생각은 할 필요 없습니다.
키가 어른 키만한 산죽을 헤치고 지납니다.
발 아래로는 길이 잘 나 있기 때문에 사실 별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힘이 좀 드는 건 사실입니다.
12:52
좀 치고 올라갑니다.
13:01
그러면 관음봉1153.2m입니다.
여전히 산죽밭은 계속되고.....
13:12
내원치를 지나지만 이게 무슨 고개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지도 #5
13:16
1099봉을 오르고,
13:27
1131.1봉을 지나 크게 좌틀하여,
이런 산죽 밭을 지나,
13:38
지도 #4의 '사'의 삼거리에 다다릅니다.
여기서 좌틀하면 거사봉 ~ 시루봉 ~ 칠성봉 ~ 구재봉으로 진행하여 섬진강과 횡천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진행하는 횡천지맥입니다.
아주 중요한 봉우리입니다.
하동군에서는 이 무명봉을 특정하기 위해 '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부능선 특히 형제봉을 지나다 만나게 되는 하동군이 설치한 이정표 중 '시루봉'은 이곳을 말하는 것이지 횡천지맥 상의 시루봉992.9m은 아닙니다.
13:50
직진하는 길도 계속 산죽과 잡목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길을 비탐구간으로 지정해 놨는지 모르겠습니다.
관리의 어려움 때문인가요?
13:58
1025.9봉은 바위 때문에 우회하고.....
14:04
이제 다 왔군요.
14:08
임도가 나왔습니다.
14:16
여기서 형제봉까지 2.6km이니 외둔마을까지는 거의 9km 가량 될 것 같군요.
다시 숲으로 들어,
14:50
형제봉 활공장으로 들어섭니다.
아!
오늘 이 길을 걷는 목적 중의 하나가 여기서 횡천지맥의 흐름을 보는 것이었는데!!!
완전히 망쳤습니다.
활공장을 가로 지릅니다.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지리산 둘레길과도 만나게 됩니다.
15:06
제일 좋아하는 분위기.....
이곳에는 형제봉이 두 개 있습니다.
15:10
2등급삼각점(하동 22)이 있는 이 형제봉1116.2봉과,
15:13
정상석이 있는 이 형제봉1103.7m입니다.
높이로 보나 삼각점의 존재로 보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표기된 전자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수리봉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려가는 길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15:20
외둔마을을 따릅니다.
15:33
지도 #5 '아'의 헬기장을 지나고....
사진으로 많이 본 제단도 봅니다.
..............
지도 #6의 '자;의 곳에 있는 샘터는 웬만하면 그냥 통과하는 게 낫습니다.
15:49
이정표가 잘 되어 있으니 길을 찾는 염려는 없을 것 같고.....
지도 #6
드디어 형제봉의 명물 현수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을 신선대라고도 하죠?
암봉이 아주 좋은데 오늘은 영......
다시 와야 할 곳입니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정말 끝내줄 것 같은데.....
16:29
낯익은 곳입니다.
얼마전 지났던 지리산 둘레길의 윗재입니다.
지도 #6의 '자'의 곳입니다.
잠시 물 한 모금 마시고 쉬었다 가기로 하죠.
가지고 온 물도 다 떨어져 가고.....
16:45
신선봉입니다.
그저 밋밋한 게 이게 무슨 봉우리인가 싶습니다.
16:57
봉화대라고 하는 이 584.5봉이 오히려 더 봉우리 같습니다.
이 큰 돌들의 용도는 ?
17:09
이걸 통천문으로 부르기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악양면......
평사리와 구재봉.
북한에서는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고 부르는데 그 마지막 구간인 지리산권의 끝을 저 구재봉으로 했죠?
구재봉을 금오산 정도의 마지막 산으로 본 거 같습니다.
드디어 섬진강이 보이는군요.
정면 섬진강 건너로는 으로는 매봉이 보이고 그 뒤가 백운산입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즉 평평한 백사장에 날아와 흩어지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말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악양이 소상팔경을 가지게 된 이유가 되었고 .........
17:21
무명봉을 지나,
17:21
고소산성으로 들어갑니다.
..........
17:36
한산사 3거리를 지납니다.
17:43
새로 만든 도로를 지나고,
다시 숲으로 들어 산죽을 만납니다.
지겨운 산죽.
오늘은 산죽으로 시작해서 산죽으로 끝난 느낌입니다.
17:38
드디어 19번 도로를 만나고,
삽압이라 불리는,
모한대에서 한녹사를 그리며 오늘 산행을 마칩니다.
전에 악양을 돌며 쓴 글에서 관련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861번 도로 좌측으로 안내판 하나가 보이는군요.
거기에는 섯바위 즉 삽암揷巖에 대한 소개글이 있습니다.
이곳이 취적대입니다.
1744년 황도익 선생은 ‘두류산유행록’에서 “또한 녹사대錄事臺가 있으니 한유한韓惟漢이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사람은 떠나가고 축대만 덩그렇게 남았는데, 강물은 변함없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한유한의 맑은 풍모를 상상하자 감회가 절로 일어났다. 바위 벼랑에 새겨진 취적대取適臺 세 글자는 자획이 거의 마모되어 있었다.”
그러니 취적대는 곧 녹사사대이고 녹사대는 곧 모한대입니다.
한유한이 낚시를 드리웠던 곳이기에 취적대라 불렀고, 한녹사라고도 불렀으니 녹사대였으며 한유한을 그리는 곳이라 하여 모한대가 된 것입니다.
이하 제가 준비하고 있는 자료에서 가져옵니다.
안내판은 “주민들은 이 삽암(鍤巖‧꽃힌 바위)을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고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그런데 섬진강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좌측에(송남 이세립 松南 李世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악양의 부자 이세립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새겼다 한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가 되었다.
서 있는 두 개의 비 중 좌측에 있는 비는 진주사람 권도용(1877~1963)의 작품이다. 이 비에는 “사대부 노태현 등 30여명이 선인들의 훌륭한 행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매년 춘삼월과 가을 구월에 모여 시를 읊으며 옛 사람의 유풍을 추모하고자 일종의 계契를 조직하였다. 또한 장차 비를 세워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도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번에 남쪽으로 섬진강 따라 유람하다가 이 대臺 앞에 이르러 근처에 이세립李世立 공이 바위 벽면에 모한대 세 글자를 크게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사적을 기록한 비는 없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앙모의 정을 금할 수 없어 애오라지 몇 마디 소감을 적고 돌아간다.”고 적혀 있다.
좌측 비 앞면.
좌측 비 뒷면.
이 비에 적힌 중요한 사실史實로는 남명 조식 선생이 한유한을 정여창(1450 ~1504), 조지서(1454 ~1504)와 더불어 세 군자라 칭송하였다는 말과 다만 정여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번의 사화에 휘말려 부관참시 되는 욕을 보았지만 한유한은 먼저 기미를 알아채고는 물 깊고 산 높고 험한 곳으로 자취를 감춰 하늘이 준 수명을 마쳤으니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계속하여 남명의 유두류록은 일두 정여창이 기거하던 집까지 거론한다.
“도탄에서 1리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정선생 여창이 살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천령 출신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주신 분이다. 처자식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뒤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필자 주 :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향토사학자들은 도탄을 지금의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한다고 한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으니 600여m 정도 떨어진 곳이며 삽암에서 10리 그러니까 5.7km 정도의 거리에 일두一蠹 정여창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취적대는 곧 삽암鍤岩이다. 고려말 ‘한유한(생몰년生沒年 미상)’ 선생이 지리산에 들어와 은둔하면서 낚시하던 곳이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바위에 선생이 직접 취적대라 새겼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한유한은 누구인가? 고려 무신집권기 당시 도교, 신선 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최충헌이 전횡을 휘두르자 난이 날 것을 예감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은거하고는 세속과 연을 끊었다. 조정에서는 서비대원 녹사의 직을 주면서 회우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은거하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선인의 계보를 정리한 ‘청학집’에는 한유한을 고려 때의 ‘선파仙派’ 가운데 한명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지리산의 은자(隱者)였다가 은거지 지리산을 벗어나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던 정여창과 조지서는 갑자사화 때 각각 부관참시와 참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고, 임금의 부름에 불응하였던 한유한은 관직을 피하여 더 깊숙한 지리산으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絲綸入洞踰垣走(사륜입동유원주) 임금 명이 고을에 들어감에 담 넘어 달아나니
方丈千秋獨一仙(방장천추독일선) 방장산에는 천년 동안 유독 이분만 신선 같다
한유한을 노래한 조선 중기의 문인 박민(朴敏, 1566~1630)의 시이다.
- 사륜絲綸 : 임금의 조서
그런 한유한이 역시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순전히 남명 조식 덕분이다. 즉 남명은 1558년 4월 지리산 유람에 나서서는 산행기 형식으로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쓰면서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龍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揷巖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이 바위가 삽암이며 섯바위입니다.
마모되어 해독이 불가능한 취적대取適臺.
이 글은 한유한 본인이 직접 쓴 것이고 모한대는 한유한을 기리는 이세립이 쓴 것이며 비는 권도용의 작품인 것입니다.
이 권도용은 천왕봉 아래 법계사의 중창기를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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