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리학이란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학문의 영역이긴 합니다.
우리나라에 역사지리학회가 생긴 게 1988년경이니 학문적으로도 일천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역시지리학의 연구 분야는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다양한 스케일에서 지리적으로 설명하는 등 시 · 공간적으로 다양할 겁니다.
가령 지명에 있어 음운을 좇아 고어를 추급해 가는 과정이 국어학의 영역이라 한다면 그 지명을 지역적 상황에 맞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의 과정을 찾는 것은 역사지리학의 몫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그림이나 책, 지도 등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는 남부와 서부 지리智異를 살펴보기 위하여 섬진강 건너까지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계족산 ~ 천황봉 ~ 둥지리봉 ~ 오산을 도는 코스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궁금증은 궁금증을 낳기에 결국 하천산 ~ 밥봉 ~ 도솔봉 ~ 형제봉 ~ 월출봉 ~ 갈미봉을 돌게 되었고......
이번에는 북부지리입니다.
두류능선을 중심으로 우측의 초암능선이나 창암능선 그리고 좌측의 벽송능선이 흐름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창암능선은 지리 주릉의 제석봉에서 갈려 소지봉1499.1m과 창암산924.9m을 지나 임천으로 잠기는 줄기이고,
초암능선은 덕천지맥의 하봉에서 분지分枝하여 그 이름도 아름답고 유명한 칠선계곡의 물인 의탄천에서 잠기는 능선입니다.
그리고 그 우측의 벽송능선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선종 사찰 벽송사가 중심이 되는 능선으로 덕천지맥의 새봉이 그 시작이고 벽송사 부근이 그 끝입니다.
지난 번 덕천지맥에 속한 지리동부능선의 일부 구간을 걸었습니다.
2018. 6. 13.이었죠?
바위에 '새봉'이라 붉은 색 페인트로 표기된 그 봉우리에 이르러 잠시 등로를 이탈 바위 옆 능선에 섰었습니다.
그 벽송능선의 흐름을 보면서 북부지리의 울타리인 임천(연비)지맥의 흐름도 조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날씨가 뒷받침해 주지 않아 그 멋진 모습을 살펴보지 못하는, 그 소박한 계획이 무산霧散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누워 있는 형상의 봉우리라고 하여 최근에 와불산이라고 개명한 상내봉이 새봉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궁금했었는데 말이죠.
쓰고 보니까 무산霧散이라는 단어가 재미 있군요.
계획은 무산됐는데 그 이유가 북부지리의 안개는 걷히듯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결국 한 단어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연출하였습니다.
어쨌든 못 보았으면 직접 밟아보면 될 터!
그러면 오늘은 벽송능선입니다.
이 능선을 택하게 된 간접적인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분당 · 수지의 맹주 해밀산악회의 7월 정기산행지로 칠선계곡이 공지 되었기 때문입니다.
칠선계곡!
들어만 봐도 가슴이 콩당콩당 거리는 곳 아닙니까?
창암능선과 초암능선에 싸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초입은 어연히 추성리입니다.
추성리 좌측에 벽송사가 자리하고 있고 거기서 이어지는 벽송능선의 들머리가 벽송사이니 만큼 칠선계곡과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추성리가 공통분모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암정사瑞岩精舍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색적인 가람의 배치나 조각들은 수행사찰을 넘어 관광사찰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곳도 궁금합니다.
다행히 코스에는 벽송사를 들러야 하는데 그 초입이 지리산 둘레길의 4구간 지선支線이기도 합니다.
그 지선은 미답구간이기도 하고 지리에서는 선종 사찰의 선두가 벽송사였으니 여로 모로 혜택이 있는 구간의 이음입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산행은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지선支線 (의중마을 ~ 벽송사 ~ 모전마을) + 벽송능선 + 덕천지맥(동부능선) + 허공다리골이 되겠습니다.
오늘 산행은 제 산행 최고의 파트너인 인간 네비게이션 산으로님 입니다.
23:30
남부터미널에서 만나 23:50 출발하는 백무동행 버스에 오릅니다.
오늘은 잠시 후 러시아에서 멕시코와의 일전이 있어 차내가 조금 소란스럽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눈부터 감습니다.
귀로 다 들릴 테니.....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6. 24. 일요일
2. 동행한 이 : 산으로님
3. 산행 구간 : 마천 ~ 서암정사 ~ 벽송사 ~ 와불산 ~ 새봉 ~ 청이당 사거리 ~ 석상용 대장 묘 ~ 어름터 ~ 광점동
4. 산행거리 : 19.69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마 천 | 03:13 | |||
의 탄 교 | 2.42 | 03:41 | 28 | |
서암정사 | 1.54 | 05:08 | 67 | 46분 아침 |
벽 송 사 | 1.21 | 05:52 | 44 | 34분 관광 |
와 불 산 | 5.32 | 09:19 | 147 | 60분 조망 |
새 봉 | 1.87 | 10:08 | 49 | |
청이당사거리 | 2.17 | 11:12 | 64 | |
광 점 동 | 5.16 | 14:11 | 179 | 30분 휴식 |
계 | 19.69 km | 10:58 | 08:08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03:13
축구는 1:2로 졌군요.
세트 피스고 뭐고 무조건 중거리 슛으로 뻥뻥 때리라니까....
그리고 90분 내내 뛰라니까....
히딩크와 박종환 축구를 선호하는 저로서는 결과에 흥분하지 않습니다.
벌써 마천이 4번째 입니다.
오늘따라 개인택시 당번 기사님이 차를 대놓고 손님을 기다리시는군요.
오늘 마나님과 싸우셨나?
오늘은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약 2km 떨어진 들머리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일출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03:39
60번 도로를 따라 걸어 의탄교 앞에 이릅니다.
그러고는 여기서 지리산 둘레길을 만납니다.
오늘 벽송능선을 따르기로 했으니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지선을 어느 지점까지는 이용하기로 합니다.
올 봄.
둘레길을 하면서 이 다리 앞에 이르러 슈퍼에서 캔맥주 한 통을 사서 목을 적시면서 다리를 건넜죠?
03:41
다리 위에서 흐르는 임천을 보기도 하면서....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주차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통행하는 차량도 없고 더욱이 지나는 주민들도 없으니 여기서 이른 아침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라면을 끓입니다.
만두와 떡을 넣고.....
여기에 공부가주 한 잔씩을 곁들이고....
04:27
자리를 텁니다.
바로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틀하고,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돌계단으로 오릅니다.
나무 계단과 돌계단을 번갈아 타면서 의중마을로 들어섭니다.
우측의 당상나무를 지나 좁은 소로로 들어서면 밥값을 하려는 개쉬키들이 간간이 제 목소리를 냅니다.
지금의 의탄교와 추성리나 벽송사를 잇는 신작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마을 주민이나 스님들은 이 길로 벽송사를 오갔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누군가가 '지장보살'이라 각자를 해 놓으셨습니다.
1472. 8. 중순.
함양군수였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고열암을 지나 아홉고개 중 한 고개를 지나던 중, 이 부근 즉 의탄촌을 보면서 읊조립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만일 닭, 개, 소, 송아지 등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 극기는 유호인(1445~1494)의 자이죠. 호는 뇌계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내글에도 이 길이 예전 주민들이나 승려가 다니던 길이라 적혀 있습니다.
05:08
서암정사로 들어섭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갑자기 무대가 중국으로 바뀐 느낌!
우측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일반 절집의 일주문 다음에 나오는 천왕문과는 다르군요.
그러고는 대방광문이라는 석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고.....
그 문을 통과하니,
대웅전이 나오는데 단청 등 칼라가 일반 사찰과는 전혀 다르군요.
톤도 다르고.....
음...
금대산.
좌측아래로 금대암이 보입니다.
김일손(1464~1498)은 1489. 4. 15. 등구사를 지나 금대암에 도착을 하였죠.
그 금대암에서 수행을 하는 승려들을 보고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는가."라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지리 북부에서 지리의 전모를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저 금대암에서 김일손은 이 부근을 어떻게 봤을까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이따 보는 벽송사가 강원의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고 저 금대암은 그 승려들의 선방禪房이었다고 하죠?
아!
그리고 서쪽으로는 우측에 창암산이 있으니 중앙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두지터로군요.
몇 채의 건물이 보입니다.
굴을 파고 거기에 수행공간을 만들었군요.
나무와 돌과 풀.....
감로수 한 잔 마십니다.
여기는 극락전.
대웅전
여기는 용왕님 모셔놓은 곳.
묵언수행 중!
..................
문수동자.
이런 절이 생기게 된 유래를 봅니다.
"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민족의 비극이 유난히도 치열하고 깊었던 이곳 지리산(智異山), 1960년경 전화(戰禍)가 지나간 지 한참 뒤이지만 산간오지(山間奧地)
두메산골인 벽송사(碧松寺)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자연(大自然)의 섭리가 인연(因緣)에 사로잡인 인간들의 희비에 개의치 않나니, 한 때 천지를 진동하던 총성과 온 산을 뒤덮었을 포연(砲煙)의 폭풍이 휩쓸었을 이곳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는 듯 산새가 지저귀고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오늘날 서암정사(瑞庵精寺)가 있게 된 것도 역시 억겁(億劫)의 인연과 대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한 그림자가 아닌가 한다. 문득 지난 일을 회상하니,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 어느 날 복잡한 도시인 부산을 뒤로하고 청산(靑山)에 파묻힐 양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정처 없이 흰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여기 벽송사다.
인적도 드믈어 한적한 산사(山寺)벽송사, 때로는 감자를 심어 끼니를 때우고 몸소 흙더미를 치워가며 이어지는 수행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너무 힘이 들고 갈등도 많이 생겨 여기를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가 새는 법당에 탈금(脫金)이 다 되어 새까만 모습으로 초라하게 앉아 계신 부처님을 들여다보며 망설이기를 거듭하면서 그럭저럭 눌러앉아 "여기가 또한 인연지(因緣地)려니.."여기고 폐허를 수습하다 보니 어언 10여 성상(星霜)이 훌쩍 흘렀다. 구석구석 묵은 쑥대가 나부끼는 1970년대 초의 어느 포근한 봄날 오후,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내를 거닐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잊혀져 가는 묵은 옛길을 따라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에 이끌리듯 와서 멈춘 곳이 바로 오늘의 서암정사 터다.
우측 나무에 가려진 범종각.
안양문.
진공묘유眞空妙有.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니 모든 것이 실체가 없으면서 존재하는 모양을 일컫는 말 같은데...
색즉시공 공즉시색 입니까?
연지.
금대봉.
오래된 창고 같은 곳....
범종각은 나래를 편듯.....
....................
요사채,
나가려는데 이곳에 계시는 보살님과 만납니다.
잘 둘러봤냐고 물으시는군요.
좀 색 다르고 신비스럽다고 하자.
더 색다른 두 곳을 못봤다고 하는군요.
7. 14. 여러 분들과 이곳을 또 올 것이라고 하자 그럼 그때 자신을 찾으리고 하시는군요.
자신이 직접 안내해 주시겠답니다.
이 서암정사의 신비로움을 확실하게 알려 주시겠다는 거죠.
기대가 되는군요.
05:38
저희도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빠져 나옵니다.
30분이 넘게 머물렀습니다.
벽송사 가는 길에 둘레길 안내도를 봅니다.
05:42
벽송사로 오르는 입구의 안내판.
선인들의 유산록 중 벽송사에 관한 기록은 이동항(1736~1804)의 방장유록 한 곳에만 나옵니다.
그가 1783년 3. 28 ~ 5. 4. 까지 산행을 하면서 기록한 내용 중에 들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벽송사의 역사는 짧습니다.
김선신의 두류전지에는,
벽송대사는 정덕 경진1520년에 지리산에 들어와 초암을 지어 거처했다.
후세 사람들이 큰 사찰로 증축하여 벽송이라 했다.
함양군에 속한다.
벽송대사는 지리에 능통하여 수행을 도와줄 명당을 찾다가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어 마침내 법계를 열었다.
전후로 마음을 깨친 사람이 일곱 명이다.
천왕봉의 한 산맥이오른쪽으로 돌아 50여 리를 가서 역류하면서 형국을 맺었는데, 북동쪽으로 들어가 북북동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판천, 송대천은 승룡乘龍이 되고 금대수, 추성뢰는 창문이 되며 종고수, 용유담의 긴 연못은 몇 리나 둘러싸고 흐르면서 현무가 된다.
수효봉과 귀쌍봉이 오도산을 받치고 있어 그 안을 안락하고 밝게 하며 금대산이 화표가 된다.
막는 문과 조성한 터가 평평하고 바르며 온화하고 그윽하다.
지맥은 황토의 언덕이다.
절터 밖에는 모두 험준한 자갈밭이다.
거주하는 승려들이 자연스레 담박해져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량은 청소를 안 하더라도 먼지가 생기지 않는다.
혹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당하니 이런 까닭으로 재물을 꾀하는 무리는 가지 않는다.
표주박을 찬 운수납자나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물녘에 나갈 뿐 암자를 지킬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
벽송, 서산, 회당 세 분 조사와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 경암의 벽송암기
라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도로를 따라 벽송암으로 올라 갑니다.
너른 단이 있고.....
저 수령 300년이 넘은 저 소나무는 벽송사의 상징이기도 하죠.
미인송과 도인송입니다.
지엄 선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벽송碧松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저런 소나무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청허당.
오늘은 선승들의 설법을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군요.
벽송지엄 선사로 인하여 지리산에는 70명의 제자들이 퍼져서 수행에 전념하게 됩니다.
지리 북쪽에는 이 벽송사와 영원사 남쪽에는 쌍계사, 칠불사, 신흥사, 의신사 등에서 벽송의 가르침 대로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들 사찰들의 승려들은 동문인 바, 교류가 잦았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리 북쪽의 벽송사와 영원사 그리고 남쪽의 칠불사, 쌍계사 등 그들이 오가던 지리 주릉 고개가 당시의 이름이 벽송령이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碧松嶺이었던 것이죠.
어쨌든 그 70명의 제자 중 9명이 해탈을 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문중입니다.
그 벽송이 가장 아끼던 제자 3인 중 한 명이 서산대사라고 하니 그 혜안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벽송령은 부른 이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다 이 고개에서 보는 달빛이 너무나 교교하다 하여 碧宵嶺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견으로는 택리지의 이중환(1690~1752)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택리지의 산수편을 보면 지리산에 관한 찬사가 이어지다가 '벽소운동과 추성동 역시 명승 ·명지이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연히 碧宵雲洞은 골짜기를 표시한 것이지만 벽소령과 무관치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서정적인 운치가 가미 되어 "달밤에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고 맑아서 푸르게 보인다.'라고 발전하여 지리10경에 선정되기에 이릅니다.
창암능선 아래 두지터를 보고.....
보물 제474호로 지정된 보물.
신라말이나 고려 초의 양식으로 보인다는데...
그래서 이 탑으로 인해 벽송사 이전에 이곳에 이미 다른 사찰이 존재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케 합니다.
너무 관광에만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하긴 이것도 공부의 일환이니.....
벽송사를 빠져 나가면서 입구의 둘레길로 붙으려 하는데 우측에 각閣이 하나 보입니다.
아차!
이 급한 성격 때문에...
차분한 성격의 '산으로'님 아니었으면 놓칠 뻔 했습니다.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는 명찰을 찼습니다.
일부에서는 변강쇠와 옹녀를 여기에 갖다 붙이기도 하는데 이를 가루지기 타령과도 연관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헛된 이야기 같고....
차라리 이를 우리 고유신앙과 불교신앙의 결합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지난 번 지리북부능선을 하고는 하산 중에 봤던 실상사의 장승과 같이 봐야 한다는 것이죠.
벅수, 벅시, 법수라고도 불리는 이 목장승은 본시 마을 입구나 관로官路 등 공공장소에 세워서 악귀의 퇴치나 비보碑補의 역할을 수행한 것(벽사신앙辟邪信仰)이라면 이것이 사찰 앞으로 오면 위와 같이 불교가 들어오면서 외래 종교인 불교가 우리 고유신앙을 포용한 산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귀중한 자료를 확인합니다.
이 목장승 앞에서 바로 능선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편안한 길을 만나,
다시 둘레길에 접속합니다.
지도 #2
06:21
그러고는 지도 #2의 '가'의 곳에서 지리산 둘레길을 버리고 직진을 합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안내하는 일부 지도에는 의중 마을 ~ 벽송사 구간을 마친 뒤 다시 되돌아나오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벽송사에서 우틀하여 벽송능선을 타고서는 여기서 좌틀하여 모전마을 ~ 용유담으로 진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을 주선인 4구간에서 비켜나는 곳으로 지선으로 표시하였습니다만 사실 이곳을 주선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지리산 둘레길과 헤어졌어도 여전히 벽송능선의 등로는 대단히 양호합니다.
뭐 이 정도임에야......
06:34
756.9봉을 통과합니다.
06:42
지도 #2의 '나'의 곳에서 막힙니다.
다시 돌아 나가야겠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이 지역 출입통제의 목적이 '야생가시오갈피나무 자생지' 보호에 있다고 하는군요.
중요 야생식물인 가시오갈피 나무!
저나 산으로님이나 나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나뭇가지 한 번 꺾어본 적이 없는 인물들!
물론 공단에서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규정을 정한 것이지 저희같은 특정 인물을 보고 만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마음가짐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금줄을 넘습니다.
정해진 등로만 조심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진행합니다.
풀 한 포기, 나뭇가지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씁니까.
다 저희가 무던히도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며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의 재산인데.....
지리에 이처럼 부드러운 능선이 있었던가?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지만 산으로님이 경험한 최고의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능선이라고 하니!
06:55
782.7봉을 넘어오고 있는 산으로님.
메모할 게 많아 바쁘십니다.
부드럽지만 조망이 없다 보니 별로 할 게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그리고 나뭇가지 하나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을 뿐!
그러다 보니 907.5봉도 그냥 패스.
07:41
지도 #2의 '다'의 곳에서,
오랜만에 바위 구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만,
우측으로 뭔가가 보입니다.
들어가 보죠.
조망터로군요.
중봉1874.6m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하봉1754.7m에서 이어지는 두류능선이 보입니다.
지난 번 진행한 곳이죠.
그 좌측으로는 황금능선이라 불리는 줄기 하나가 가지치고.....
울퉁불퉁한 써리봉1586.7m이 그 능선의 시작입니다.
농기구인 써레를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죠?
그럴까요?
수리봉 소고(小考)
“형.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이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ㅅ'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98쪽
그러니 수리봉이나 써리봉, 써레봉 심지어는 설악산까지도 그 이름의 어원은 같은 셈입니다.
중봉에서 우측으로 하봉과 두류능선,
그 두류봉 앞으로 지난 번 들렀던 향운대의 바위가 하얗게 드러난 모습으로 보입니다.
앉은 김에 시원한 바람을 쐬며 담소를 나누며 풍경을 즐깁니다.
예전 선비들이 여기에 기생과 소리꾼을 대동하여 음주가무를 즐겼다고요?
그런 건 지리산신이나 마고 할매를 모욕하는 것이니 건전하게 간식을 먹으면서 남은 공부가주를 두어 잔씩 나눠 마십니다.
정말 좋습니다.
이럴 때 나오는 노래.
산울림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와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
정말 좋다는 말만 연발!!!!
희미하긴 하지만 그 우측 멀리 반야봉이 보이고....
가기 싫지만 또 일어나야죠.
08:48
다시 삼거리로 나옵니다.
55분을 눌러 앉았습니다.
08:50
그러고는 바위에 '와봉'이라는 표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직진을 하지말고 좌틀하라는 얘깁니다.
어차피 1164.9봉을 오르기 위해서 오르려 했던 봉우리이니....
그나저나 1164.9봉의 속명이 '와봉'?
그 옆의 와불산에서 따온 臥峰?
암봉이군요.
기대를 갖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현오님. 빨리 올라 오세요. 죽입니다."
"안 그래도 올라 갑니다.!"
와!
좌측 하단 금대산851.5m.
금대산부터 올라 갑니다.
백운산904.1m.
점필재 김종직이 지나고 김일손도 지났던 등구재.
그 앞에 흐르는 구불거리는 강이 임천.
그러니 그 뒤의 희미한 줄기가 지리서부능선의 마지막인 바래봉1186.2m과 덕두산1151.5m.
우측으로.....
우측 중앙이 임천지맥의 맹주 삼봉산1186.7m.
그러니 그 좌측이 팔량재에서 올라온 투구봉1032.5m.
삼봉산 우측에 움풀 들어갔다 다시 나온 봉이 오도봉1036.5m.
희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일 건 다 보이는군요.
삼봉산 우측 중앙이 법화산992.9m이어야 하는데 사실 저 중앙에 보이는 법화산 삼거리봉과 높이가 같아 그 삼거리봉으로 봐야 맞을 거 같습니다.
우측으로...
아!
우측으로 독바위가 보이는군요.
저 독바위는 함양에 있다고 하여 특별히 함양독바위라고 부릅니다.
09:04
또 10분을 까먹습니다.
하지만 그 여운은 쉽게 가라 앉지 않는군요.
감격스러웠습니다.
내려가서 와불산을 향합니다.
선생님을 뵙는군요.
09:17
지도 #2의 '라'의 곳에 있는 와불산 삼거리입니다.
좌틀하여 와불산1213.9m으로 향합니다.
09:19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와불산은 아무런 조망이 없습니다.
09:23
오히려 나오다 들어갈 때 봤던 바위 위로 올라가 동부능선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는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요.
지난 번 왕산을 갈 때 보았던 그림입니다.
왕산925.6m과 필봉산838.2m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고동재를 봅니다.
그리고 그 우측으로 웅석봉 좌측뒤로 둔철산823.4m와 그 좌측의 정수산829.8m까지 보이는군요.
다음에 진행할 지리 동쪽의 봉우리들입니다.
지리 둘레길을 할 때 눈여겨 보았던 양천(정수)지맥의 봉우리들....
한시라도 빨리 올라가서 와룡산이니 상여봉 등 산청의 산들을 보고 싶군요.
덕천지맥의 왕등습지봉을 봅니다.
지도에는 왕등재라고 나왔지만 왕등재는 고개이고 또 그곳은 습지이기 때문에 그 위에 있는 봉우리를 아예 왕등습지봉으로 부르자는 얘깁니다.
09:25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좌틀합니다.
드디어 산죽구간이 시작되는군요.
왜 안 보이나 그랬습니다.
09:46
조금씩 고도를 높입니다.
10:00
바위 구간을 지납니다.
기대해도 좋을까요?
와불산에서 동강으로 늘어지는 능선이 보이고......
중앙 하단이 오봉리에서 그 좌측으로 산청 · 함양 사건 추모공원이 있는 방곡리입니다.
그 뒤로 흐르는 물줄기가 엄천으로 잠시 후 산청으로 들어가면 남강과 만나 경호강이라는 이름으로 단성으로 흐르게 되죠.
그 우측이 왕산입니다.
아까 본 왕산과 필봉산이고......
로프를 이용하여 바위 구간을 오르면,
10:07
드디어 새봉입니다.
지난 번 이곳에 들었을 때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삼봉산은 볼 수 있군요.
오봉리와 방곡리.....
삼거리로 나가,
10:08
새봉 글자를 확인하면서 여기서 덕천지맥에 접속합니다.
반가운 분의 표지띠를 확인하고.....
10:13
며칠 전 본 죽은 산죽밭.
삼사필설三必死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죠.
이 산죽은 열매를 맺었었나 봅니다.
10:38
지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진주 독바위로 올라갑니다.
그러고는 두류능선을 봅니다.
하봉에서 두류봉을 거쳐 영룡봉으로 흐르는 줄기입니다.
우측 두류봉 아래에 향운대도 보이는군요.
중봉과 그 좌측의 황금능선.
톱날 같은 게 아까 보았던 써레봉.
하도 오돌도돌해서 실제 써레봉의 본 봉우리는 찾기가 힘들군요.
이렇게 보니까 확실하게 보이는군요.
저 비둘기봉 바로 뒤가 치밭목산장이죠.
그 좌측으로는 황금능선의 끝 구곡산961m도 보이고......
대원사 계곡......
그 뒤로 도토리봉과 웅석산.
우측 금대산, 백운산과 중앙의 지리서부능선.
향운대.
실컷 감상하고 내려가려는데 아래에서 산객들 소리가 들리는군요.
내려가 보니 남자 1명에 여자 2명이 일행인 젊은 친구들이 방향을 못 잡고 있습니다.
종이 지도 없이 트랭글에 깔아온 전자지도만 가지고 산행에 임하셨군요.
새재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면서 천왕봉이 목적지라고 합니다.
지도를보니 그들이 출발한 곳은 새재가 아니고 윗새재입니다.
청이당으로 진행을 한 다음 역으로 내려와 이 진주독바위까지 온 것이더군요.
방향을 일러준 다음 청이당까지 같이 동행하려 했는데 발걸음이 워낙 무거운 친구들이라 우리 먼저 그냥 진행합니다.
10여 분 놀다 갑니다.
10:53
1276.2봉을 통과합니다.
우측으로 선명한 길이 보입니다.
능선을 따라 허공다리 루트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 청이당에서 허공다리로 내려가는 길을 본 고로 그 길을 택하기로 하였으므로 직진합니다.
편안한 등로는 계속되고......
11:06
1260.8봉입니다.
여기도 우측 허공다리 길로 가는 길이 선명합니다.
이 길로 내려갔어야 편하게 진행하였을 겁니다.
우리는 기억에 따라 다시 직진합니다.
11:12
그러고는 청이당 4거리입니다.
①직진하면 국골사거리, ② 좌틀하면 청이당 계곡을 거쳐 하봉으로 진행하는 천왕봉으로의 지름길 그리고 ③우틀하면 허공다리골로 진행합니다
우리는 허공다리골로 하산하기로 하였으니 우틀하면 됩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점필재 김종직, 유두류록
청이당은 당집으로 예전에는 이런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 유몽인, 유두류산록
유몽인도 이 길을 따라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청이당 전에 옹암甕巖을 지났다고 하니 진주독바위를 옹암으로 부른 듯합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청이당 계곡에 가서 물 좀 마시고 가죠.
덕천지맥이나 동부능선을 하는 꾼들에게 이 청이당 계곡은 그야 말로 오아시스입니다.
야영 장소로도 더 없이 좋은 청이당 터!
따라서 공단직원들의 주요 단속 지점 중 하나인 곳입니다.
다시 사거리로 돌아 나갑니다.
그러고는 직진하여 허공다리골로 들어섭니다.
11:34
초입은 선명합니다.
그러나 이내 길은 희미해지더니 사라지고 맙니다.
계곡을 겨냥하며 내려가는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지도 #2의 '마'의 곳에 이르니 팬스가 나오는군요.
용도는 모르겠으나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으니 이럴 경우 우리는 적극 협조를 해야 합니다.
희귀 동식물을 보존하는 구역이라고 하니....
팬스를 따라 가지만 이내 이것도 없어지고 다시 오리무중.
11:45
드디어 계곡을 만납니다.
너른 반석에서 20분 정도 놀다 일어나기도 하고....
폭포는 우회하기도 합니다.
12:36
정리되지 않은 계곡.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곳 아닌가요?
12:42
표지띠가 보입니다.
지도 #2의 '바'의 곳인데 ....
그래도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12:44
작은 폭포 하나 보고.....
12:53
지도 #2의 '사'의 곳인데 여기서 1260.8봉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합류합니다.
12:58
그러고는 드디어 길을 만납니다.
이제부터 진도가 팍팍 나가겠군요.
13:02
그런데 갑자기 부도 한 기를 만납니다.
이곳이 두류암터로군요.
그런데 지난 번 필자가 답사한 바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면 법성 스님 다음에 다른 분이 또 기거를 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그 분이 춘삼이 인지 혹은 영감 님인지.....
김영조(1842~1917)는 1867년 약관의 나이에 유두류록을 남겼습니다.
"언덕을 넘어 두류암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라고 이 부근의 정경을 묘사했습니다.
바로 옆에 축대를 쌓은 흔적이 보이고 제법 터가 너르니 이곳이 두류암터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혹시나 이 부근 어디에 석상용 대장님의 묘가 있는 건 아닐까 기대가 커집니다.
"석상용 대장님! 어디 계십니까! 모습 좀 보여 주십시오!"
큰 소리로 대장님을 불러 봅니다.
눈은 크게 부릅뜨고 혹시나 옆에 두고 지나치게 되지나 않을까 촉을 세웁니다.
레이더 장치 까지 가동!
소로를 따라 무덤이 있을 만한 흔적은 다 뒤지면서 내려갑니다.
등로가 계곡 쪽으로 흘러 내려가는데 우측으로 비석 같은 것의 머리 부분이 살짝 보입니다.
혹시나?
"산으로님! 잠깐! "
13:08
두류암터에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아니 약 3분 정도의 지근 거리에 있는 지도 #2의 '사'의 무덤입니다.
비의 앞면에는 의병장석상용지송덕비義兵將石祥龍之頌德碑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친일파가 날뛰던 구한말에 지리산을 무대로 활약을 한 의병의 수는 적진 않습니다.
그러나 석대장 팀은 순수하게 지리산 사람들로 구성된 의병이라는 점에서 색다르다 하겠습니다.
사실 석대장의 출생 이력은 남다릅니다.
즉 석대장의 13대 조부는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을 때 원병 파견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런 사실로 이여송이 조선으로 파병을 나오게 된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정적들로부터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 추궁을 당하여 처형 당하게 되자 둘째 아들 천은 조선으로 피했으나 장남 담潭은 유배되었습니다.
그후 담은 복권되었고 유배도 풀렸으나 이미 쓰러진 가세를 만회할 방법이 없어 조선으로 가는 방법을 택하게 됐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고 하여 '수양군'에 봉하고 ''해주 석씨'로 사성하여 황해도에 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자 청에서는 이 두 형제를 잡아오라 명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을 산청으로 숨기고 전답을 내리니 이곳이 산청군 생초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은공을 잊어버린 관리와 토호들의 수탈로 이들은 나라에서 준 전답도 빼앗긴 채, 지리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으로서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추성리에 터를 잡은 이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농사는 물론 사냥까지 해가면서 재산을 일궈 어느 정도 가산도 모으게 되었습니다.
본시 화전민촌은 주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마을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여러 명이 단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1907년 9월.
일제는 총포화약에관한 법률을 만들어 포수들의 총까지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리산의 벽송사에도 일본군이 주둔을 하는가 하면 뱀사골, 백무동, 칠선 계곡 등에 거주하는 화전민들 까지도 못살게 굴 정도가 되자 추성리에서 그나마 글을 익혔던 석상용은 인근 화전민들과 남원, 함양, 산청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지리산 의병부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성삼재 전투, 벽소령 전투, 쑥밭재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의거는 1907년 말부터 1912년 석상용이 일본군에게 잡힐 때까지 무려 5년이 넘게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석상룡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5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50세의 나이로 순국을 하게 됩니다.
이 무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생 채룡이 산중에서 돌을 깎아 손수 만든 무덤이고 송덕비입니다.
비의 뒷면에는 그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읽어 볼까요
"公字龍見世稱飛虎將軍 공의 자는 용현이고, 세상에서 부르기를 비호장군이라 하였다.
勇力絶大見國家危亡起義OO 용력이 뛰어나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智異山中斬倭兵甚多 지리산에서 왜군을 무수히도 많이 죽였다.
竟被日憲投獄經五年放還 마침내 일본 헌병에 잡혀 투옥되어 5년 뒤에 나왔으나,
因此疾痛 年辛難庚申十月含憤而別世 옥중의 고질로 인해 경신년 10월에 울분을 머금고 돌아가셨다.
辛酉正月初十日
아! 나쁜 일본놈들.
그리고 친일파 모리배들....
혹시나 몰라 가지고 온 술을 따라놓고 석대장님께 절을 올립니다.
산으로 님도.....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전적비 하나가 보입니다.
눈여겨 봤던 곳입니다.
잠깐 차를 세우고 위 전적비를 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전적비에는 '의병장 석상룡 선생 전적비'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석상룡 선생은 1907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성삼재, 벽소령, 쑥밭재 전투 등을 통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린 선생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될 때까지 5년 간 지리산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생의 13대 조부가 석성石星이라는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이여송의 군대가 조선을 지원토록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결국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으로 처형되고 그의 자손들 또한 귀양을 가거나 처형을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맏아들 담潭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 하여 '수양군'에 봉하고 조선에서 살게 하였는데 이 석상룡 대장이 바로 그 자손이라는 겁니다.
한 번 충신 집안은 영원한 충신 집안인가 봅니다.
2013. 12. 13. 금대암 ~ 금대산 ~ 백운산 ~ 등구재 ~ 삼봉산 ~ 오도봉 ~ 오도재 ~ 법화산 ~ 도정마을 산행을 하기 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60번 도로 변에 있는 석상용 대장의 전적비를 답사하고 쓴 글입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군요.
찾을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왔는데 실제로 석대장님을 만나게 되다니!
"아! 기분 좋다!"
혹시나 뒤에 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 표지띠 하나를 그 입구에 걸어 놓고 나옵니다.
13:23
이 작은 고개를 넘으면서 좌틀하여 품개동으로 들어갑니다.
13:48
금줄을 넘으면서 비탐구간에서 빠져 나옵니다.
지도에 어름터라 표기된 곳입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우리 지리산을 더욱 사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가시오갈피나무 때문에 비탐구간으로 지정하였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입니다. 수고 하십시오."
바로 우측으로 그 유명한 어름터 독가촌이 나옵니다.
주인장은 가까운 출타하셨는지 문을 활짝 다 열어놓으셨습니다.
이후 임도로 편히 내려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배낭을 진 7명 정도의 팀을 만납니다.
무심코 "안녕하세요. 수고들 많으십니다."하고 산인사를 건넸는데.....
맨 마지막 분 옷을 보니 공단 직원이로군요.
이 분들은 자원 조사를 나온 공단 직원이었습니다.
뻔히 비탐 구간 산행을 하고 나오는 걸로 알고는 있지만 이곳은 탐방가능 구역!
"저 아래도 직원 한 분이 있을 건데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 가십시오."
양희은의 '하늘'을 불러봅니다.
허공다리골의 본 이름(?)은 '허공 달 골'(골짜기가 넓어 허공에 걸린 달이 아름답게 보이는 골)'이라고 하는데...
14:02
좌측 계곡에 멋진 정자 하나를 봅니다.
방치되어 있는 이 범종은?
14:05
훼손된 다리를 건너,
허공달골의 맑은 물을 한 모금 입에 넣습니다.
새벽에 올랐던 벽송능선.
저 능선과 이 계곡이 있어 오늘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14:11
광점동 마을입니다.
벽송대사로 인해 얻어진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세조가 벽송의 스승인 벽계정심 선사를 떠받들자 유생들이 극심한 반대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들의 탄압으로 법계정심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은거를 하게 되었는데 김천 화악산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생들이 처들어갔고...
하는 수없이 선사는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서는 부득이 보살 한 사람을 얻어 살면서 속인 행세를 하였다는군요.
생계를 위해 일은 해야 했을 터!
선사는 광주리를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여기서 광주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고 광주리를 만드는 가게니 광점 그러고는 광점동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는군요.
이런 곳을 빠져나오면서 Bob Dylan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합니다.
시인Dylan Thomas(1914~1953)를 좋아한 나머지 짐머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밥 딜런이 된 그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진정이 되어서 좋습니다.
그의 음악을 사용한 동명 영화의 Knockin' on heaven's door의 라스트 씬도 잊혀지지 않지만 이렇게 멋진 산행을 멋진 이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한 걸음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복받은 사람이군요.
석장군 님은 우리로 인해 울화병이 조금은 삭아 지셨을라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아니 그 거창한 목적보다는 이웃이 왜놈들의 총칼에 죽어가는 것을 보고 어찌 그가 비분강개하여 총을 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I can't shoot them anymore.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죽음은 우리가 맞아야 할 고통이겠지만 행복하게 맞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밤 시간이 허락되고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다면 토마스 얀 감독의 같은 이름의 영화를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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