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선계곡.
대한민국 최고의 계곡이죠.
길이로 보나 아름다움으로 보나....
예전에는 자유롭게 다니던 그곳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자연보존을 위한다며 1999년 추성리 ~ 천왕봉 구간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칠선계곡이나 그 주변 능선을 오르내리던 산객들의 발길이 끊기게 되었고 추성리 주민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갑자기 생계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칠선 계곡을 열어주세요...."
주민들의 생계와 관계된 일인지라 공단에서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노릇!
비선담까지의 4.3km만 열어놓는 타협을 하게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산꾼들이 난리를 피웁니다.
"칠선 계곡을 돌려주세요...."
이번에도 공단에서는 생색만 냅니다.
5, 6월과 9, 10월에 매주 월, 토 60명만 들여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죠.
해밀에서 여름철 피서겸하여 칠선계곡을 명산 산행으로 안내한다고 하는군요.
칠선 계곡 쪽을 볼까요?
최근 지리산을 다닌다고 하면서 여러 곳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추성리 부근에 있는 곳이 두류능선이니 벽송사능선이니 하는 곳들입니다.
지도 #1
칠선계곡은 약30년 전 한 번 다녀온 곳이니 꼭 다시 한번 들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약으로도 천왕봉까지 진행할 수 없는 곳이기에 비선담까지 들어갔다 되돌아 나온다는 것은 영 꺼름칙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용유담을 뒤져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갈등이 생기는군요.
용유담이냐 아니면 칠선계곡 맛보기냐!
아침에 눈을 뜨면서 용유담으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빠뜨렸던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지선인 벽송사 ~ 용유담 구간도 이참에 마무리 짓기로 합니다.
아!
용유담이라!
꿈속에서나 거닐던 곳인데 드디어 용유담에서 선인仙人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요.
그런데 예전에 스크랩 해놓은 참고도니 지도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군요.
현장에서 부딪쳐 봐야겠군요.
괜히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용유담에 갔다가 헛고생이나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운좋게 어느 정도 소득이 있고 시간이 좀 남으면 견불사에 가서 와불산 구경도 하기로 하지요.
10:19
봉회장님과 백총무님께 고하고 저는 벽송사 방향으로 나갑니다.
슈퍼에서 캔맥주 두 통을 사고....
서암정사 입구를 지나,
벽송사로 들어섭니다.
벽송대사는 1520년에 지리산에 들어와 초암을 지어 거처했다. 지금 서 있는 삼충 석탑이 그 앞마당이었으리라.
옛 절집의 이름은 전해지는 것이 없고 후세 사람들이 큰 사찰로 중창하여 벽송이라 했다.
함양군에 속한다.
벽송대사는 지리에 능통하여 수행을 도와줄 명당을 찾다가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어 마침내 이곳에서 법계를 열었다.
두류전지는 경암의 벽송암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표현한다.
전후로 마음을 깨친 사람이 일곱 명이다. 천왕봉의 한 산맥이 오른쪽으로 돌아 50여 리를 가서 역류하면서 형국을 맺었는데, 북동쪽으로 들어가 북북동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판천, 송대천은 승룡乘龍이 되고 금대수, 추성뢰는 창문이 되며 종고수, 용유담의 긴 연못은 몇 리나 둘러싸고 흐르면서 현무가 된다. 수효봉과 귀쌍봉이 오도산을 받치고 있어 그 안을 안락하고 밝게 하며 금대산이 화표가 된다.
막는 문과 조성한 터가 평평하고 바르며 온화하고 그윽하다. 지맥은 황토의 언덕이다. 절터 밖에는 모두 험준한 자갈밭이다.
거주하는 승려들이 자연스레 담박해져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량은 청소를 안 하더라도 먼지가 생기지 않는다. 혹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당하니 이런 까닭으로 재물을 꾀하는 무리는 가지 않는다. 표주박을 찬 운수납자나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물녘에 나갈 뿐 암자를 지킬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 벽송, 서산, 회당 세 분 조사와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벽송사는 講院이었고 금대암은 그 禪房이었다.
조계종단에서 보는 우리나라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선맥禪脈을 살펴볼까?
우리는 이미 2구간 군화동을 지나 60번 도로가 지나는 화수교 목전에서 살펴봤던 ‘원명당 종범대선사부도탑’과 그 우측의 '나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 비를 떠올려야 한다.
제1조는 인도의 석가모니의 제자로서 염화시중 미소의 주인공인 마하가섭이고,
제28조는 인도인으로서 동쪽으로 가서 중국에서 선종을 창시한 보리달마,
제57조는 조선 선종의 초조初祖인 태고보우,
제60조가 벽계정심이고, 제61조가 벽송지엄(1464-1534년), 제62조가 부용영관(1485-1572년),
제63조가 청허휴정(서산, 1520-1604년), 제67조가 환성지안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분 중에서 벽송, 부용, 서산, 환성 등 네 분이 이 벽송사에서 수행을 하였다니 벽송사를 가히 조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룬 곳이라 할 만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벽송사'가 있는 지리산에서 한국 불교 법통을 네 분이나 배출하였으니 지리산이 품어내고 있는 인문적 힘이 얼마나 큰 지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민군과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던 곳이어서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전소되었던 것을 다시 중창한 것입니다.
청허당은 청허 유정 서산대사를 기리는 뜻에서 붙여진 당호입니다.
서산대사하면 삼가귀감三家龜鑑이 떠오릅니다.
서산에게는 세 권의 귀감이 있습니다.
하나가 선가귀감이고 둘이 도가귀감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입니다.
삼가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합니다.
서산은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붕이라는 선의 정신입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삼가귀감을 이야기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죠?
바로 부사浮査 성여신(1546~1632)입니다.
단속사에 불을 지른....
지난 번 진행한 산청의 산줄기 중에서 발췌합니다.
단속사라!
불교의 선종과 교종의 만남을 보여주던 단속사!
휴정(1520~1604, 서산대사)이 삼가귀감을 저술하면서 유가의 글을 맨 뒤에 둔 것에 분개하여 젊은 혈기에 단속사에 불을 지르기도 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의 분기탱천한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잠깐 단속사를 봅니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지금은 보물 72호와 73호로 지정된 동·서삼충석탑 두 기와 당간지주만이 예전의 화려했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보물인 탑 두 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탑동마을의 단속사로 들어가 볼까?
참고 사진 : 단속지의 동서 삼층석탑
1487년 9월의 남효온이나 1489년 4월의 김일손은 우리와 같이 산청에서 곧바로 웅석봉을 통하여 점촌을 지나 단속사로 온 게 아니라 당시는 단성현이어서 현내리란 이름으로 불렸을 단성면 소재지를 통하여 들어왔다. 웅석봉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보고 이곳에 들었다 했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년(748년)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 의하면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위하면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그 절의 승려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참고 사진 : 단속사지의 정당매
이 단속사를 얘기하려면 매화나무 자세히는 정당매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안(1417~1464)의 조부 강회백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할 때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 매화나무가 ‘정당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김일손의 ‘정당매 시문후’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단속사가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 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 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단속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에서 비롯되는 바, 이들의 활동은 김헌정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신이 입적하자 신행은 중국 선종 6조인 신수의 법손法孫 지공에게 사사師事해서 크게 깨달은 후, 759년 단속사에 머물면서 북종선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하지만 교종과 선종을 아우른 북종선은 신라 중대왕실이 무너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단속사의 규모는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알 수 있다. 김일손은 그가 이 단속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절이 황폐화 되지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그런 절이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과 세금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중에서 발췌
벽송사 능선으로 오르는 길 옆으로 부용암이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법사였던 부용영관 스님의 법명을 따서 붙인 암자입니다.
이를 놓치지 말아야....
부용암에서 맞은 편 산을 바라 보고......
돌계단을 따라 올라
11:20
지리산 둘레길이 용유담으로 빠지는 갈레길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벽송사 능선 ~ 와불산 ~ 새봉으로 가는 길은 직진.
그리고 4구간 지선인 용유담 방향은 좌틀합니다.
둘레길은 역시 평범합니다.
엄천 건너 법화산 가는 봉우리를 보고....
아!
드디어 엄천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임천이라고 표기되었죠?
수량이 아주 부족해 보입니다.
실개천 하나를 건너고....
11:54
지도 #1의 '가'에서 둘레길 본선에 합류합니다.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은 우틀하여 이어가면 되겠죠?
자명선원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드디어 용유담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옵니다.
11:57
여기서 반야정사 법당 우측에 있는 요사채로 옆으로 가면 될 것을 루트를 제대로 몰라,
11:57
용유교를 건너면서,
좌측과,
우측을 살펴본 다음 다리를 건너 우측 바위 밑으로 내려갑니다.
12:07
그러고는 멋진 용유교를 건너,
도도히 흐르는 엄천의 물을 봅니다.
다리 우측 바위에 붙습니다.
좀 위험하긴 하지만 캠프라인을 신었으니 ....
그런데 각자刻字는 고사하고 선인들이 머문 흔적을 볼 수가 없군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고....
목이 말라 캔맥주 한 캔을 따고는 김밥 한 덩이와 함께 마시고 있는데.....
강 건너 맞은 편에 빨간 글씨가 보이는군요.
아!
이쪽이 아니고 길 건너라는 말인가?
이쪽에도 분명 몇 개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저 부근이렸다!
60번 도로로 힘들게 올라갑니다.
길가에 있는 구룡정을 보고....
이 구룡정은 용유담의 아홉 용과 마적도사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후대에 세운 것입니다.
다음에 자세히 얘기하죠.
우틀하여 용유교를 다시 건너 반야정사 요사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전 본 각자刻字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아!
드디어 용유담의 각자를 대합니다.
이런!
글자 하나가 잘렸습니다.
빨간 글씨가 먼저 눈에 띄는군요.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 "이곳은 인종임금(재위 1544-1545)이 강현(姜顯 1486-1553)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겠군요.진양강씨 강지주의 문집에 나오는 얘기로 당나라 때 이태백을 한번 보고 적선인(謫仙人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한 하지장이 낙향할 때 황제 현종이 경호(鏡湖=鑑湖)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일화에 견주어, 강씨 문중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혜평은 강현의 시호이고 13세손 순기라는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1800년 이후에 새긴 것이라 합니다.
그 우측을 보면 희미하지만 반가운 이름이 있군요.
바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입니다.
40세인 1470년에 함양군수로 내려와 근무하였는데 이때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유자광의 글을 불태웠었죠.
1472년 지리산을 산행하면서 쓴 '유두류록'은 훗날 문인들의 산행기에 모범이 됩니다.
점필재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흔적이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좌측으로는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그리고 남명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도 보이는군요.
재미있는 내용이 있군요.
어디 한 번 볼까요?
우선 일두 정여창입니다.
일두 정여창은 지리산 둘레길 악양을 지날 때 언급한 적이있습니다.
거기에는 섯바위 즉 삽암揷巖에 대한 소개글이 있습니다.
이곳이 취적대입니다.
1744년 황도익 선생은 ‘두류산유행록’에서 “또한 녹사대錄事臺가 있으니 한유한韓惟漢이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사람은 떠나가고 축대만 덩그렇게 남았는데, 강물은 변함없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한유한의 맑은 풍모를 상상하자 감회가 절로 일어났다. 바위 벼랑에 새겨진 취적대取適臺 세 글자는 자획이 거의 마모되어 있었다.”
그러니 취적대는 곧 녹사사대이고 녹사대는 곧 모한대입니다.
한유한이 낚시를 드리웠던 곳이기에 취적대라 불렀고, 한녹사라고도 불렀으니 녹사대였으며 한유한을 그리는 곳이라 하여 모한대가 된 것입니다.
이하 제가 준비하고 있는 자료에서 가져옵니다.
안내판은 “주민들은 이 삽암(鍤巖‧꽃힌 바위)을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고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그런데 섬진강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좌측에(송남 이세립 松南 李世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악양의 부자 이세립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새겼다 한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가 되었다.
서 있는 두 개의 비 중 좌측에 있는 비는 진주사람 권도용(1877~1963)의 작품이다. 이 비에는 “사대부 노태현 등 30여명이 선인들의 훌륭한 행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매년 춘삼월과 가을 구월에 모여 시를 읊으며 옛 사람의 유풍을 추모하고자 일종의 계契를 조직하였다. 또한 장차 비를 세워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도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번에 남쪽으로 섬진강 따라 유람하다가 이 대臺 앞에 이르러 근처에 이세립李世立 공이 바위 벽면에 모한대 세 글자를 크게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사적을 기록한 비는 없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앙모의 정을 금할 수 없어 애오라지 몇 마디 소감을 적고 돌아간다.”고 적혀 있다.
좌측 비 앞면.
좌측 비 뒷면.
이 비에 적힌 중요한 사실史實로는 남명 조식 선생이 한유한을 정여창(1450 ~1504), 조지서(1454 ~1504)와 더불어 세 군자라 칭송하였다는 말과 다만 정여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번의 사화에 휘말려 부관참시 되는 욕을 보았지만 한유한은 먼저 기미를 알아채고는 물 깊고 산 높고 험한 곳으로 자취를 감춰 하늘이 준 수명을 마쳤으니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계속하여 남명의 유두류록은 일두 정여창이 기거하던 집까지 거론한다.
“도탄에서 1리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정선생 여창이 살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천령 출신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주신 분이다. 처자식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뒤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필자 주 :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향토사학자들은 도탄을 지금의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한다고 한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으니 600여m 정도 떨어진 곳이며 삽암에서 10리 그러니까 5.7km 정도의 거리에 일두一蠹 정여창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취적대는 곧 삽암鍤岩이다. 고려말 ‘한유한(생몰년生沒年 미상)’ 선생이 지리산에 들어와 은둔하면서 낚시하던 곳이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바위에 선생이 직접 취적대라 새겼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한유한은 누구인가? 고려 무신집권기 당시 도교, 신선 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최충헌이 전횡을 휘두르자 난이 날 것을 예감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은거하고는 세속과 연을 끊었다. 조정에서는 서비대원 녹사의 직을 주면서 회우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은거하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선인의 계보를 정리한 ‘청학집’에는 한유한을 고려 때의 ‘선파仙派’ 가운데 한명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지리산의 은자(隱者)였다가 은거지 지리산을 벗어나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던 정여창과 조지서는 갑자사화 때 각각 부관참시와 참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고, 임금의 부름에 불응하였던 한유한은 관직을 피하여 더 깊숙한 지리산으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絲綸入洞踰垣走(사륜입동유원주) 임금 명이 고을에 들어감에 담 넘어 달아나니
方丈千秋獨一仙(방장천추독일선) 방장산에는 천년 동안 유독 이분만 신선 같다
한유한을 노래한 조선 중기의 문인 박민(朴敏, 1566~1630)의 시이다.
- 사륜絲綸 : 임금의 조서
그런 한유한이 역시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순전히 남명 조식 덕분이다. 즉 남명은 1558년 4월 지리산 유람에 나서서는 산행기 형식으로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쓰면서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龍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揷巖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이 바위가 삽암이며 섯바위입니다.
마모되어 해독이 불가능한 취적대取適臺.
이 글은 한유한 본인이 직접 쓴 것이고 모한대는 한유한을 기리는 이세립이 쓴 것이며 비는 권도용의 작품인 것입니다.
이 권도용은 천왕봉 아래 법계사의 중창기를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는 며칠 뒤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 구간을 하면서 일두 정여창의 악양정에 들어 일두의 흔적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 선생이라.....선생은 함양 사람으로 점필재 김종직(141 ~ 1492)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김굉필과 더불어 조선조 유학을 크게 일으킨 인물입니다. 하동 섬진강가에 악양정을 지어 강학을 하였는데 성종의 부름으로 하는 수없이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땅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에 죽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무오사화 이후 쇠락해진 것을 1899년 향내 사림에 의해 덕은사 경내에 중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곳이 예전에는 절터였다는 것이죠.
일두가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악양에 이르러 지은 시 한 편을 볼까요?
악양이라는 시인데 유람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면에는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크고 넓은 세계로 향하는 학문적 구도의 세계를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風蒲泛泛弄輕柔 풍포범범롱경유 부들 풀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데
四月花開麥已秋 사월화개맥이추 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었네
看盡頭流千萬疊 간진두류천만첩 두류산의 수많은 골짜기 모두 돌아보고
孤舟又下大江流 고주우하대강류 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내려오네일두의 지리산 관련 기사는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특히 속두류록의 마지막을 일두가 장식했으니 14박 15일간의 일정을 마친 일두는,
라고 하였으니 피날레치고는 너무 시적입니다.
한편 점필재나 박여량이라면 몰라도 남명 조식 선생 이름이 각자된 것은 좀 의외입니다.
즉 김종직은 쑥밭재를 지나면서 바위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으며 박여량은 상류암 암자의 벽에 일행들의 이름을 썼습니다.
하지만 남명의 경우 바위 위에 이름을 새겨 자신을 만고에 알리려는 선비의 정신을 비판했고 부사 역시 남명의 제명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했던 것이다.
남명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중간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혀질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두예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 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유두류록
한편 그 이름들 아래 장구소杖屨所가 눈에 들어옵니다.
장구소 혹은 장구지소杖屨之所는 지팡이[杖]와 짚신[屨]을 끌고와 놀던 곳이니 이름난 사람이 거닐던 자취를 가리킨다. 가끔 구(屨) 대신 리(履)를 써서 장리지소(杖履之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구(屨)와 리(履)는 뜻(*신발)이 같아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관용적 표현은 장구지소였다. 전국의 명승지에는 웬만한 곳에는 다 ‘누구누구杖屨之所’라 새겨져 있습니다.
지리산의 장구지소하면 법계사 옆 가짜 문창대에 ‘고운최선생장구지소’가 있고 왕산에도 ‘농은민선생장구지소’가 있죠.
장구소 혹은 장구지소하면 최우선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이죠.
이 각자는 법계사 바로 좌측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글씨인데 로타리산장을 처음 연 조재영이 발견하여 이곳을 (신)문창대라 이름하였는데 부사 성여신의 기록 즉
"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 (하략)"
에 따라 (구)문창대가 여전히 문창대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있죠.
논거는 이렇습니다.
신문창대의 생긴 형상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石臺의 조건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고, 그냥 지리산 산길 아무데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두루뭉실하게 생긴 바위덩어리 형태를 하고 있다. 바위의 남쪽 상단에 [孤雲崔先生杖屨之所 (고운 최선생 장구지소)]라는 각자가 가로로 새겨져 있으며, 글씨체는 수려하지 않고 조잡하며 각자를 새긴 연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나, 이 각자가 이곳을 문창대라고 주장하게 된 근거가 된다. 또한 신문창대는 등산로에서 보면 오히려 약간 꺼진 듯 자연스럽게 바위 위로 접근이 가능하다. 따라서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서 가볼 수 없다.’고 한 성여신의 글에 나타나는 문창대의 형상과는 많은 차이가 나며 후대에 여러 사람들이 증언한 문창대의 이미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전무하여, 그 연대미상의 각자를 제외하면 이곳을 문창대라고 볼 만한 근거가 마땅치 않다.고 한다.
또한 장구소는 덕산의 백운동에 가면,
남명 선생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강씨들 세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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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龍游潭.
용유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역시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입니다.
“해공은 군자사로,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조태허․유극기․한백원은 용유담(龍遊潭)으로 구경갔다. 나는 등구재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그는 함양군수 시절(1471~1475) 용유담을 언급한 시 11편을 남겼다고 합니다.
물론 그전부터 용유담으로 불렸겠지만, 용유담은 군수를 잘 만나 세상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이 동국여지승람으로 1481년 발간된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하 '엉겅퀴 님'들을 인용합니다.
이 책 함양군 형승(形勝)조를 보면,
「용유담(龍遊潭) :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 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중의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국역 : 한국고전번역원)
최석기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용유담 관련 기록을 봅니다.
①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흔적이 남아 있네(靈怪千年跡 蒼崖有裂痕)”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② 1611년,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③ 1640년,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리산기(智異山記)
「그 아래 용유담은 홍수나 가뭄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유담의 물은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깊은 골짜기에 너럭바위가 있고, 양쪽 벼랑 사이로 물이 흐른다. 바위 위에는 돌 구더이[石坎 석감], 돌 구멍[石竇석두], 돌 웅덩이[石坑석갱]이 있어 마치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 듯, 규룡(虯龍)이 서려 있는 듯,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물은 깊어 검게 보이는데, 용솟음치거나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빙빙 돌거나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기도 한다.」
④ 1724년,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의 유용유담기(遊龍游潭記)
「먼저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하였다. 용유담은 지세가 깊고 그윽하였으며, 바위들이 모두 개의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물길이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용당(龍堂)이 맞은편 언덕에 있었는데, 나무로 엮어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하여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를 건너자니 아찔하고 벌벌 떨려서 건널 수가 없었다. 다리 옆의 바위들을 넘어서 동쪽으로 백여 보를 가니, 큰 바위가 언덕에 붙어 가로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둥글기도 하고, 타원형이기도 한 것이 패옥 같았고, 움푹 파인 곳은 술잔과 술통 같았다. 그 너머 몇 길이나 되는 바위에는 길 같은 흔적이 굽이굽이 이어졌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하였다. 갈고 다듬은 듯 반질반질하여 그 형상이 지극히 괴이하였다. ‘용유담’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략〉
지리산 북쪽에 펼쳐진 천석(泉石) 가운데 이 용유담이 가장 빼어나다. 나는 그 기세와 장관이 좋아 조우명(趙遇命)에게 바위의 남쪽 벽면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그 아래에 내가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石抉川駛龍怒神驚]”라는 여덟 글자를 적었다. 후에 석공을 시켜 새겨 넣도록 하였다.」
⑤ 1790년,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의 방장유록(方丈遊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들이 시내에 쌓여 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그 기괴한 형상을 이루 다 이름 붙이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로 하나의 물길이 열려 큰 돌구유에서 수만 갈래의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여울은 요란스럽게 쏟아져 요동쳤다. 아래에는 1만 이랑이나 되는 큰 못을 형성하였는데, 곧장 몇 리나 뻗어 있었다. 두 골짜기가 솟구쳐 있고 솔숲 그늘이 뒤덮여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 못을 따라 올라갔는데, 정신과 기운이 침침하여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 위 5가지 모두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에서 인용)
경화대庚和臺.
庚은 나이를 말하고 和는 같다는 말이니 동갑계를 만들고 이를 기념하여 새긴 글입니다.
그리고 지난 번 공부한 바에 의하면 더 많은 각자들이 있고 이에 대한 재미있는 뜻들이 있건만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이를 찾는다는게 여간 고역이 아니군요.
다시 공부해서 한 번 더와야겠습니다.
그때는 화산 12곡 전부를 봐야겠죠.
무속인이 치성을 드린 흔적이 보이는군요.
샘물은 식용으로는 좀 글쎄요.....
포트 홀.
강 건너에는 무수히도 많은 포트 홀이 있는데 이쪽에는 별로.....
악어바위 혹은 용바위.
입에 거품을 물고 있군요.
상당히 강력한 물길.
소리도 아주 시끄럽습니다.
용유교 쪽으로는 조용히 흐르고.....
그러니 이 정도로 깎였고.....
두꺼비 같이 생긴 바위인데 촬영 각도가 잘못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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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없고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이 물이 바로 칠선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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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교까지 걸어가는데 다시 땀 범벅.....
시간이 좀 남는군요.
작년에 법화산에서 내려오며 관찰하려고 했던 와불산臥佛山을 또 놓친다면 아쉬움이 클 것 같습니다.
와불산을 제대로 관찰하기 좋은 두 곳이 있죠.
바로 견불동見佛洞과 견불사見佛寺입니다.
견불사로 올라갑니다.
용유담에서 2km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견불사 대웅전 뒤에 있는 건물에 조망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여름이라 아무래도 제대로 된 와불의 모습이 나오질 않는군요.
늦은 가을이나 겨울에 봐야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다는군요.
하긴 그렇군요.
부처님의 누워 계시는 모습의 두상이 나오긴 하는군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추성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15:15.
아!
그런데 그랜드산악회에서도 이곳을 찾았군요.
손에 이끌려 막걸리 한 통을 비우고 차에 오릅니다.
오늘 용유담 방문은 30%의 만족.
불만족하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긴 했는데 시간이 오래되다보니 기억에서 다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한 번 더 방문하야 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