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육당 최남선이 지리산에 들어와 어떤 글을 남겼는 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겨우 찾아본 것이 1928. 3. 28.부터 약 50일 간 호남과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시대일보에 기고한 원고를 모은 심춘순례라는 책에서 나오는 내용 정도입니다.
당시 육당은 오산의 사성암에 대한 이야기나 구례로 들어와 화엄사만 살짝 터치하고 가면서 남긴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 이어 지리산근참기 혹은 두류산근참기를 남겼더라면 이 지리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그렸을까요?
날렵한 그의 필체는 유순하거나 빼어나지 만은 않은 지리의 아름다움을 불함문화론을 곁들여 멋지게 표현했을 것만 같은데......
지리가 아름답다?
하긴 그 육당조차도 '금강은 총명 지혜가 꽃부리처럼 피어나고 불꽃처럼 휘날리는 또렷한 재사才士를 만난 것 같고, 지리는 도덕 교화를 깊이 감추고 비밀스레 보관하고 있는 둥긋한 도인을 만난 것 같다'고 하였는데 지리가 아름답다?
지리산은 '마치 커다란 어미새가 남해의 머리에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물로 들어가려는 수많은 병아리를 엄호하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하였거늘 지리가 아름답다?
외형에 치우친 지리에 대한 감상이라 일축합니다.
그저 겉에서 본, 남들이 이야기하니까 그렇게 따라서 얘기하는 그럴 듯한 단상이라고 봅니다.
제가 못 찾아 못 읽어봐서 그렇지 그 정도로 지리산을 가볍게 보았을 육당이 아닙니다.
흔히들 우리나라 3대 계곡이라 하면 한라산의 탐라계곡,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그리고 지리의 칠선계곡을 꼽는다고들 합니다.
30년 전에도 그런 의견에 토를 달았던 저인데 제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는 칠선의 아름다움이 지리의 그것을 대변하는 말로 적합한지 지리의 속살로 들어가 볼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약속은 번번이 취소되었습니다.
순전히 비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수요일만 집중하여 내리는 비와 갑작스러운 태풍 소식 때문이었건 것이죠.
다른 곳이라면 우중 산행을 강행해도 되련만 칠선만큼은 그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용이고 사고의 원인이라는 것쯤은 지리산을 몇 차례 다녀온 사람이라면 하다못해 귀종냥이라도 해서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추석 연휴 마지막 날로 일정이 다시 잡힙니다.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라고도 불리는 칠선계곡으로 들어갑니다.
마천을 들러 백무동으로 가는 지리산행 버스의 남부터미널 출발 시간은 23:50.
준비시간이 아주 널널합니다.
집을 나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잠깐 졸고 나니 마천입니다.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한검대장님과 고남님 등을 만납니다.
지도 #1
원래 추성동에서 천왕봉은 14km라고 하면서 소요시간은 7시간을 잡습니다.
그러나 최근 추성동에 주차장이 생기면서 들머리는 추성동 주차장이 되어버렸고 추성동 주차장 ~ 천왕봉 구간은 9.7km로 못박혀 버렸습니다.
물론 소요시간은 진행하는 사람들의 능력이나 관심사에 따라 틀리겠지만 공단에서는 8시간을 제시합니다.
그러니 칠선에 들은 이들은 필선에 관한 한 문외한들로부터 "무슨 10km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데 8시간? 기어서 가도 그 시간은 안 걸리겠다!"라는 질타를 감수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도 그 시간을 잡습니다.
04:00
추성동 주차장을 나와 지리의 품으로 듭니다.
칠선.
일곱 명의 선녀가 어찌되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저 칠선七仙입니다.
다만 1976년 그의 나이 60에 홀연히 칠선계곡 어디론가로 살아졌다는 우천 선생의 얘기만 들릴 뿐입니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 우천 허만수 기념비에서 인용
04:23
칠선교를 건너고 표지띠가 즐비한 끈에 제 것도 하나 달고....
04:26
두지동 마을을 지납니다.
멀리서 보면 이 마을이 뒤주斗庋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라합니다.
이 뒤주의 경상도 사투리가 두지라는 말이고.....
실제 지난 번 벽송사 능선으로 진행하다 바라보던 이곳의 모습이 움푹 들어간 형상으로 보여 그렇게 우긴다면 할 말은 없겠더군요.
이따 하산은 위 화살표 표시에서 내려올 것입니다.
직진합니다.
천왕봉까지는 9.7km랍니다.
비선담까지는 법정탐방로이고 그 이후는 5, 6, 9, 10월 등 4개월 동안 예약을 해야 월요일에 탐방을 할 수 있는 조건부 법정탐방로 구간입니다.
제가 거의 30년 전 이곳을 찾을 때는 저같은 신참들은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칠선이 1997년 '예니'때 심하게 훼손되어 복원 차원에서 그 이듬해부터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복원이 되자 얼마 전부터 사전예약제라는 시스템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개방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립공원이 탐방로를 통제하는 이유는 보통 자연 보호와 희귀 동식물 보호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등로의 난이도로 인해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인명 사고에 대한 면피용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적어도 이곳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칠선교로 의탄천을 지납니다.
추성리 아래에 있는 의탄리는 의탄천으로 인해 얻어진 이름입니다.
의탄천은 이 의탄리 어귀에서 람천을 만나 흡수된 뒤 이름도 임천으로 바꿉니다.
의탄교를 이용하여 람천을 건넌다. 그리고 마천면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이 물을 임천으로 불러야 한다. 이곳 주민들이 예전부터 부르던 이 물 이름이 바로 임천이다. 지난 구간 얘기했었다. 이 물줄기의 원천인 주촌천은 둘레길 1구간 행정리에서 서부능선의 세걸산에서 내려오는 람천에 흡수되어 람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고. 그러고는 인월을 지나면서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풍천을 흡수하고는 성삼재에서 내려오는 만수천을 받아 이후 백무동의 덕천천, 칠선계곡과 국골의 의탄천 등 작은 하천 여러 개를 더 받아 이곳 마천부터는 임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고.
그걸 시각을 달리하여 그 부근 마을이 조성된 원인을 찾아볼까? 산내면의 군자리나 덕전리의 백무동이 ‘마고할미’가 백百 명의 자식을 무당巫으로 보내 접신을 위해 찾는 새내기 무당들과 치성을 드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도꾼들을 위하여 세워진 마을이라면 백일리는 실상사의 사하촌으로 그리고 이 함양의 의탄리나 금계동은 벽송사, 금대사, 안국사의 사하촌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흘러들어온 피란민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모둠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체
그 의탄천은 지리산의 지류들이 만드는 물들의 합수로 이루어진 물줄기입니다.
주변을 살펴볼까요?
그러니까 이 의탄천은 지리의 창암능선과 벽송사 능선이 울타리가 되니, 그 사이의 칠선계곡과 국골 그리고 허공달(다리)골에서 내려오는 물들의 합수물合水物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이 지도만 머릿속에 넣으면 이 부근의 그림은 절반 그려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강의 한 지류인 이 임천이 람천에서 임천 그리고 엄천으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이 엄천으로 바뀐 물은 남강을 만나 산청에서는 경호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 단성을 지나서는 다시 남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04:37
나무 계단을 오르고....
04:45
매물賣物로 나왔다는 쉼터.
05:19
선녀탕을 지납니다.
날이 어두운 게 불만.
05:25
옥녀탕.
05:35
그러고는 비선담.
3.9km를 올라왔고 천왕봉까지는 아직 5.8km 남았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법정탐방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제재없이 올라올 수 있는 마지막 코스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른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아무 것도 못 보고 간다는 것이 너무 억을 합니다.
명색이 칠선계곡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인 칠선계곡인데!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 조금 더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우측 계곡으로는 이 어둠 속에서도 시퍼런 색깔의 물이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소리는 아니더라도 바탕음은 "쿠 쿵 쿠 쿵"에 윗음은 "솨아아야" 소리의 이음 같습니다.
아주 요란해서 옆 사람의 얘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05:36
너무 억을합니다.
비선교를 지납니다.
감시초소를 지나.....
05:40
4km를 헛걸음한 느낌입니다.
몇 개의 폭포를 지났는지, 그 폭포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비경을 지났습니다.
하지만 본 것은 라이트가 보여 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나마 오늘 '광부용' 정도의 헤드 랜턴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나마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도 #2
이건 또?
06:18
이 깊은 골짜기에도 빛이 들어오는군요.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06:30
이게 칠선폭포?
이 바위 저 바위를 뚫고 ...
어떤 것은 그 사이를 비집고...
어떤 건 튀틀고 흐르다 약한 바위의 틈을 갈며 내려오고....
칠선은 진화 중입니다.
소沼는 없습니다.
어느 개그 우먼의 멘트가 들려옵니다.
'칠선에 관한 한 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좌로 틈을 비집고 물을 흘러내리고 다른 큰 물줄기는 벽에 부딪치면서 호弧의 굴곡을 더 깊게 합니다.
계속 두드리고...
계속 갉습니다.
바닥은 반들반들합니다.
이 와중에도 후답자를 위해 야간밴딩을 하는 우리 이한검 대장님.
06:55
이건 또 무슨 폭포?
대륙폭포?
부산 대륙산악회가 자신들의 산악회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라고요?
가평의 유명산이 생각나는군요.
어쨌든 이 대륙폭포는 물의 양 만큼이나 유속도 대단해 떨어지는 물소리가 장난이 아닙니다.
07:15
좀 잠잠한 듯한 분위기로 바뀌더니,
다시 또 하나의 물줄기가 굉음을 냅니다.
그 상층부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그냥 이런 사진들을 다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진은 그 분위기의 1/100도 연출을 할 수 없는 건 비단 촬영술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아무리 능수능란한 사진작가라 해도,
적어도 칠선에서 만큼은 그 분위기와 멋스러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 내지는 소화해 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다른 곳은 몰라도 이 칠선만큼은 이를 주제로 시나 소설 하다못해 에세이조차도 쓸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걸 달리 그러니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그저 "이 칠선 계곡 만큼은 원시 상태의 지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죠.
칠선은 폭포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가끔은 이렇게 사태로 크고 작은 바위나 돌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도 발목을 조심하며 지나가야 하기도 합니다.
이곳은 예니의 흔적같이 보입니다.
07:26
이런 것쯤은 여기서 폭포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좀 안 된 마음에 무명폭포라는 보통 명사 뒤에 '-'라도 붙여 '무명폭포-10' 정도로 특정시켜 부르고 싶기도 하지만 칠선에서 만큼은 용납이 안 됩니다.
이곳이 '조건부 탐방구간'이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증거물.
이곳이 법정탐방 구간으로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당연히 계단이 설치되어야 했을 곳이죠.
그러니 이곳을 그런 규제 속에 보존을 해야할 당위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맨손체조의 팔다리 운동.
한 무명폭포의 상단부 모습.
하나는 좌측으로 크게 휘돌고 나머지 네 개는 흐드러지게 떨어지고.....
그 폭포의 상단부.
이건 또 세 개로 나뉘어 떨어지고.....
이건 빙빙 휘돌아 내려가고.....
여기서 몇 바퀴 돈 다음 다시 돌아나가고....
너무 아쉬워서 동영상 촬영을 하나 했습니다.
이건 직선 + 시계 방향 호폭.
얘는 4단 짜리....
07:50
좀 진정합니다.
까치고들빼기?
예니의 흔적.
이런 길이 나타나면 길찾기에 주력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계곡에는 선답자의 표지띠가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데 이곳은 사정이 다릅니다.
혹여 누가 달았더라도 1주일 안으로 다 제거됩니다.
그러니 길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진행하던 길이 막히게 되면 분명 이 계류를 건너게 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바위나 돌이 있기 마련이고 그 바위의 한 면 혹은 양면은 산꾼들의 발디딤으로 조금 마모된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계류 건너 방향을 보면 그 들머리인 듯한 곳에 통로가 보입니다.
지도 #3
정겨운 증거물.
너무 파란물.
그 상단부.
또 하나의 폭포.
작은 거 하나를 가지 치고.....
이걸 지폭支瀑이라고 하나?
08:31
이제 2.2km 남았네요.
지도 #3의 '가'의 곳인데 이제 1155고지이니 아직도 800고지를 더 올려야 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 위로 뭔가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도토리였습니다.
지천으로 널린 도토리가 애들 겨울 양식으로 잘 쓰이겠죠.
얘들이나 지리산 사람들은 이렇게 풍요로움 때문에 지리를 떠나지 못하게되는 것이겠죠.
투구꽃인가요?
이런 건 연폭포連瀑布?
두 갈레로 갈리는 이 부근에 오면 폭포는 거의 끝이라고 보면 됩니다.
09:10
이 정도에 왔으면 무섭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이곳까지 5시간 걸렸는데 앞으로도 2시간은 더올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9.7km를 오르는데 7시간이나 걸렸다?
그런데 실상 따지고 보면 그 이유를 이제는 확연하게 알 것 같습니다.
등로의 난이도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진 촬영 + 풍경 감상 + 감상에 이은 수다떨기 등으로 본업보다는 부업에 시간을 많이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의견 제시에 모두들 동조합니다.
고도를 올리는 돌계단.
한참이나 돌계단을 밟습니다.
09:21
이제 남은 거리 1.2km.
대간길 0.2km를 제외하더라도 칠선길은 아직 1km 정도 남은 겁니다.
등로는 바짝 섰습니다.
좌측으로 가짜 통천문을 보고....
바위 위에 올라서 자란 소나무.
화전민 움막 자리?
언제 설치했나요?
새로 설치한 계단을 지납니다.
천왕봉 정싱은 아무래도 안개비가 흩날릴 것 같습니다.
얇은 여름용 바람막이를 입고 멀티프를 목 위로 올립니다.
그러고는 추억 속의 마지막 철계단으로 올라,
목책을 넘으면 선계仙界를 떠나 속계로 돌아옵니다.
이한검 대장님 한 컷 하시고 서둘러 천왕봉으로 오릅니다.
천왕봉 바로 아래 있는 천주天柱라는 각자刻字.
이 천왕봉이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이라는 얘기겠죠.
남한 최고봉은 지리산.
지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
그렇다면 천왕봉에서 제일 높은 곳은 어디고 그 이름은 무엇인가요?
석양 노을을 본 뒤 성모사로 들어가 서로를 베개 삼아 누었다.
바람이 노한 듯이 휘몰아쳐 판잣집을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성모사를 지키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익숙해지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서 우리를 안심시켰다.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日月臺)로 나와 앉아 허사(虛詞) 한 곡주를 쾌연히 연주하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 박장원 두류산기(1643년)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의 출입을 볼 수 있어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 대의 전후좌우에 이름을 새긴 것이 무려 수백 수천이지만 오래된 것은 깎이고 갈라져 판별하기 힘들다. 그 바라는 바는 모두 이름을 남겨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그 이름자가 뚜렷한 것을 손꼽아 헤아려보면 가장 오래된 것도 2백년 내외에 불과하니 처음 2백년 전에 석면에 새길 때에는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앞의 것이 닳아 없어지고 뒷사람이 그 자리에 다시 새긴 것일까?
예.
일월대입니다.
10:28
요즘 고남님과 함께 지리산을 휘젓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하루 신세 잘 졌습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하산길을 서두릅니다.
통천문을 지나,
제석봉을 지납니다.
제석봉의 고사목.
맞은 편이 향적대로 내려가는 들머리.
바로 이 부근을 뚫고 제석당터로 진입하려 했으나 잡목이 가로막고 있어 후퇴하여,
11:15
장터목 대피소 취사장으로 가서는 밥과 간식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합니다.
11:59
40분 정도 놀다가 장터목 대피소를 나옵니다.
12:12
백무동으로 내려가다 지도 #3의 '다'의 곳에서 팻말을 보고는 안으로 들어섭니다.
장터목에서 10분 정도 거리입니다.
12:16
코끼리바위에서 우틀하면서 사면을 따라 진행합니다.
희미하긴 하지만 제대로 길이 잘 나있습니다.
12:24
제석당 터와,
바로 옆 제석천을 확인합니다.
간신히 폐허가 된 제석당(帝釋堂) 터에 이르렀다. 천왕봉을 올려다보니 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보다 더 큰 것이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없는 하늘과 같았다. 다음으로 제석봉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나 상봉에 비하면 발돋움을 하여도 미치지 못할 듣하였다. -중략-
저물녘에 제석신당(帝釋新堂)에 올랐다. 이 또한 신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층층이 늘어선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모두 내 앉은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왔다. 앉아 있자니 몸은 풀어지고 마음은 오롯하여, 희이(希夷)의 경지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사에 미련이 없었다.
봉우리 중 가장 높은 것은 영신봉∙좌고대∙영랑봉(永郞峯)∙신녀봉(神女峯)∙반야봉∙무주봉(無住峯)∙백두봉(白頭峯)∙지장봉(地藏峯)∙미타봉이다. 우뚝 솟아 있는 것도 있고, 불쑥 홀로 하늘에 매달린 것도 있고, 구부정하게 몸을 굽힌 듯한 것도 있고, 다소곳이 엎드린 듯한 것도 있어서 뾰족하고 우뚝하고 쭈뼛하고 겹쳐진 모양을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깊숙한 구역은 제석동(帝釋洞)∙나한동(羅漢洞)∙월락동(月落洞)∙대암동(臺巖洞)∙실상동(實相洞)∙엄천동(嚴川洞)∙백복동(百福洞)이다. 구불구불 뻗은 산줄기도 있고 빙 두른 산줄기도 있으며, 확 트여 넓은 골짜기도 있고 뻗어나가다 굽이쳐 되돌아오는 듯한 골짜기도 있었다. 오목하고 휑하고 우묵하고 움푹한 계곡이 푸른빛과 흰빛으로 어우러져 숨김없이 드러나 보였다.
기이하도다. 궁벽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조물주가 빼어난 경관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마침 밤에 된서리가 내려 나뭇잎들이 한껏 붉게 물들고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어, 원근의 지역이 진하게 보이기도 하고 엷게 보이기도 하였다. 마치 천만 겹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충 같기도 하고, 3백 리나 펼쳐진 비단 휘장 같기도 하였으니, 부유하도다. 승려 일원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빈도가 이 산에 머문 지 10년이 다 되었습니다. 매년 가을에 자주 사람들을 안내하여 이 당에 올라 이런 관경을 본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 가을처럼 눈부시게 찬란한 모습을 본 적이 아직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양대박 두류산기행록(1586년)
참고도 #1
장터목에서 위 참고도 #1의 팻말 있는 곳(A) 까지 내려와 금줄을 넘어 등로를 따라 오른 후, 희미하긴 하지만 사면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5분 안으로 'B'의 곳에 당도하게 됩니다.
제석당을 향해 오를 때 길이 매우 가팔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기도 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하기도 하였다. 내가 “비록 달아나려 해도 달아날 수 없겠구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전 분이 “도망친 죄인을 잡아오는가?”라고 농담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보이는 곳곳에 매를 잡는 움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매를 잡은 사람 수를 물어보니 한두 사람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아! 움막을 엮고 덫을 설치하여 만리 구름 속을 나는 매를 엿보니, 높고 낮은 형세로 말하자면 현격한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매가 끝내 덫에 걸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제압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됨을 어찌 돌이켜보지 않으랴? 또한 기구를 설치해놓고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끝내 매를 잡는 사람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잡히는 매의 수도 알 수 있겠다.
제석당 앞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온 골짜기에 안개가 짙게 깔리고 바람소리가 윙윙거렸다.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막막하고 어렴풋한 세계에 허다한 생물들이 은연중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할뿐, 인간의 지혜로서는 세세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곳에 올라보니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쪽∙서쪽 방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곤히 한숨 자고 난 뒤 저녁밥을 먹었다.
제석당의 규모는 제법 넓어 들보의 길이가 거의 23~4자 정도나 되었다. 좌우의 곁방을 제외하고 가운데 삼 칸의 대청이 있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흙을 바르지 않고 판자로 둘러놓았다. 다시 지은 연유를 물었더니,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약한 노파의 힘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순식간에 큰일을 이루었으니, 미혹되긴 쉽고 이해하긴 어려운 사람 마음에 대해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 박여량 두류산일록(1610년)
물도 있고 터도 넓어 텐트 세 동 정도는 충분히 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석당 터를 뒤로 하고 다시 돌아 나갑니다.
아쉬움에 다시 돌아보고...
뒷라인이 제석당 터가 있는 곳입니다.
창암능선은 백무동 하산 코스와 일부분 겹칩니다.
13:02
소지봉입니다.
소지봉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드릴 때 유독 지리산의 산신만이 이를 거부하여 소지(燒紙; 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가 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지리산을 불복산 또는 반역산이라 부르고 역적을 지리산 기슭으로 귀양을 보냈다고 하는 설이 그 하나고 다른 설은 백부동의 무속인들이 제를 지낸 다음 그 지방 등을 이곳에 태워야 기돗발이 잘 듣는다고 하여 소지봉이 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입니다.
그 소지봉 옆에 바위에는 이렇게 고남님의 선배님께서 소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고 있군요.
13:08
누석단累石壇을 지납니다.
13:32
일반 등산지도에는 이곳을 소지봉이라 표기해 놓았죠?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곳(지도 #2의 '다')입니다.
13:37
이곳에서 직진하면 창암능선으로 좌틀하면 백무동으로 진행하는 일반 등로입니다.
직진합니다.
13:54
1157.8봉을 지나고,
14:43
망바위가 있는 9613봉을 지납니다.
사람이 그다지 많이 다니지 않더라도 등로는 명백합니다.
15:06
849.8봉을 넘으니 이제 두지터 삼거리도 거의 온 모양새입니다.
15:16
여기서 창암능선은 마치고 우틀하여 두지터로 향합니다.
좌틀하면 옛 인민군 사령부가 있는 곳을 지나 하백무로 가게 됩니다.
두지터 내려가는 길에 폐허가 된 옛 농장을 보고...
15:30
그러고는 두지터 마을입니다.
이 마을도 활력을 잃은 듯 쓸쓸합니다.
15:33
새벽에 걸었던 길에 다시 회귀합니다.
꼬박 11시간 반 만이군요.
너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아!
좌측이 서암정사 그리고 우측의 서암정사의 사부 격인 벽송사가 보이는군요.
16:01
다시 돌아온 추성리 주차장.
한가합니다.
조금만 더있으면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닐 것이라는 주차장 관리인의 전언입니다.
아쉽군요.
가슴 한 군데가 텅 빈 것 같이 아쉽기만 합니다.
천왕봉에서 주변을 살펴보지 못해서 그랬나?
어쨌든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산행이었습니다.
칠선이 어땠나고요?
다른 곳도 아닌 칠선을 이야기하라고요?
말씀해 드리죠.
오직 모를 뿐!
그나저나 칠선은 한 번 더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뜯어봐야지 그냥 주마간산 격으로 볼 그 런 곳이 아닙니다.
남원역에서 교룡산을 보고는 열차에 오릅니다.
오늘 21.5km를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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