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입니다. 호는 점필재(佔畢齋)로 본관은 선산(善山)입니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자신을쫓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던 바, 이는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 되어 결국 붕당 정치의 시원이 되게 된 것이죠.
소위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는 순간입니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먼저 함양군수를 자처했을 당시 점필재는 자신의 직속 상관인 경상도 관찰사 유자광( ? ~ 1512)과는 남이의 옥사 사건으로 인해 감정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부임지인 함양의 학사루에는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면서 지었던 시의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를 본 점필재가,
결국 그 현판은 철거되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이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유자광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자 출신으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유자광은 더욱 점필재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 유명한 조의제문 사건이 터지게 되고 이는 무오사화로 이어지게 되죠.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을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습니다. 항우는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의제를 강에 던져 죽입니다. 김종직은 단종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는 풍설을 듣고 중국의 고사에 빗댄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의 사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김종직을 부관참시 시키고 숱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게끔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이 터지게 된 빌미를 제공한 사건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즉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자신의 스승 김종직의 위와 같은 내용의 꿈을 꿨던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의 관기(官妓)와 놀아났다는 등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이 내용을 삭제해 줄 것을 김일손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이게 거절이 되자 김일손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됩니다.
이때 마침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입니다.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고 일두 정여창은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김종직의 사상과 학문적 경향 그리고 행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 점필재는 천석고황泉石膏肓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지리산 산행을 꿈꿉니다.
어쩌면 퇴계가 소백산을 꿈꾸며 순흥부사를 자원했듯이 점필재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쨌든 김종직은 유두류산록을 써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끊을 수 없는 연緣을 만들었으며 김일손 또한 그러하였으며 일두 정여창은 고운 최치원, 한유한 등과 더불어 지리산 은인이 됩니다.
나는 영남(嶺南)에서 나고 자랐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아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느라 나이 이미 마흔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년, 성종2년)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고개만 들면 푸르게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던 1472. 3. 관동지방에 살던 조태호가 놀러와서는 지리산 산행을 청하여 제자인 유극기를 불러 위 취지를 설명하고 단폴하게 인원을 꾸려 산행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금년(1472년, 성종 3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 점필재의 문인인 조위1454~1503)가 관동(關東)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류산을 함께 유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생각해보니, 몸은 날이 갈수록 파리해지고 다리의 힘도 더욱 노쇠해지니, 이번 해에 유람하지 못하면 다음 해를 기약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어, 보름날 밤에는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감상하고, 다음날 닭이 울면 해 돋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런 다음 사방을 두루 유람한다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유극기를 불러 조태허와 《수친서(壽親書), 송나라 진직이 지은 책으로 노인을 봉양하는 구체적인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에 ‘유산에 필요한 도구〔遊山具〕’를 살펴보고, 유람에 휴대할 것을 약간 더하거나 줄였다.
이때 지로승으로 해공을 불렀고 승려 법종도 합류하였습니다.
당시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승려이 모습은 여러 가지입니다. 불교 굥전을 읽을 줄 아는 승려들을 보면서 호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비인륜적인 가르침이라 여기고 멸시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지리산 부근에 수행을 하던 승려는 보통 세 가지 군群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가 지로승指路僧으로 선비들이나 신도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승려이고 또 하나는 남여승藍輿僧으로 가마를 메는 승려이며 마지막 하나가 바로 승려 고유의 수행을 하는 수행승修行僧으로 이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 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해공과 법종은 여기서 만큼은 지로승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 14일, 무인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
1472. 8. 14. 점필재 일행을 지리산 주봉 등정을 목포로 대장정에 오르게 됩니다. 관아를 떠난 일행은 엄천을 건넙니다.
잠깐 지리산의 물줄기를 살펴볼까요?
의탄교를 이용하여 람천을 건넌다. 그리고 마천면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이 물을 임천으로 불러야 한다. 이곳 주민들이 예전부터 부르던 이 물 이름이 바로 임천이다. 지난 구간 얘기했었다. 이 물줄기의 원천인 주촌천은 둘레길 1구간 행정리에서 서부능선의 세걸산에서 내려오는 람천에 흡수되어 람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고. 그러고는 인월을 지나면서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풍천을 흡수하고는 성삼재에서 내려오는 만수천을 받아 이후 백무동의 덕천천, 칠선계곡과 국골의 의탄천 등 작은 하천 여러 개를 더 받아 이곳 마천부터는 임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고.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이 임천이 용유담을 지나면서 엄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니 점필재 일행은 용유담 하류 부분을 건넜다는 얘기가 됩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10. 03. 수요일
2. 동행한 이 : 홀로
3. 산행 구간 : 동강리 ~ 적조암 ~ 상내봉 ~ 새봉 ~ 중봉갈림길 ~ 치밭목대피소 ~ 윗새재
4. 산행거리 : 24.55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동 강 리 |
|
06:47 |
|
|
적 조 암 |
5.28 |
08:01 |
74 |
|
상 내 봉 |
6.43 |
10:27 |
146 |
|
새 봉 |
2.75 |
11:31 |
64 |
|
중 봉 |
3.08 |
15:34 |
243 |
20분 휴식 |
치밭목대피소 |
2.45 |
16:56 |
82 |
|
윗 새 재 |
4.56 |
18:12 |
76 |
|
계 |
24.55 km |
11:25 |
11:05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점필재가 귀청을 하는 장면은 등구재를 지나 오도재를 넘는 루트를 이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지리산에 드는 루트도 그곳이라고 단정짓기는 쉬워보이지 않습니다.
참고도 #1
물론 산길로 진행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화암이란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니 시발점은 엄천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점필재의 흔적을 따르기 위해 음력 2018. 8. 23. 23:50 버스를 타고 함양으로 내려갑니다.
도착하니 02:30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PC방을 찾는데 부근에 찜징방이 있군요.
이게 웬 떡?
한 시간 정도 자고 나와 터미널 옆 해장국집에서 이른 아침까지 먹을 수 있으니 아주 순조롭습니다.
오늘 들머리인 동강리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되는데 이 버스는 시외버스 터미널가는 좀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06:20
버스를 전세 내어 휴천면 동강리로 향합니다.
휴천에서 유림을 거쳐 동강으로 접어듭니다.
06:47
동강리에서 내려 조금 더 뒤로 올라갑니다.
백성들에게는 어진 수령이었던 점필재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는 차 한 톨 나지 않는 함양군에 차세茶貢이 부과되어 백성들은 차값을 들고 전라도에 가서 사가지고 와서는 이를 바치느라 폐해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관에서 스스로 다른 곳에서 빌려 납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삼국사기를 열람해 보고는 신라때 당나라에서 다종茶種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도록 한 사실을 보고는 부로父老들을 만날 때마다 다종을 찾아보게끔 부탁을 하여 결국 엄천사 북쪽 대숲에서 다종을 발견하여 그 땅에 다원茶園을 만들게 하였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인 겁니다.
그때의 기쁨을 점필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欲奉靈苗壽聖君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新羅遺種久無聞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如今 得頭流下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且喜吾民寬一分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竹外荒園數畝坡 (대숲 밖 거친 동산 일 백여 평의 언덕에)
紫英烏紫幾時誇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但令民療心頭肉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不要籠加粟粒芽 (무이차 같은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옆에는 점필재가 지리산 산행을 했다는 코스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코스를 당시 지명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점필재의 유산기와 그가 지은 시에 나오는 지명이나 설명을 지금의 그것들과 정확하게 일치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닐 것입니다.
기록에 나오는 암자는 사찰은 거의 다 폐사가 되었고 부근에 살던 이들은 이미 다 고인이 된 지 오래니 무엇을 보고 찾아가야 하나요?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기에는 그 역사자료들이 다 기록으로만 묻히는 안타까움이 있을 것은 뻔할 터!
지리 99팀과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이 나섰습니다.
이 기록은 도솔산인님의 엄청난 자료들을 바탕으로 어쭙잖게 흉내를 내 본 글입니다.
엄천사 터는 맞은 편 동호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엄천을 건너기 전 엄천사가 얘기나 듣고 건넙니다.
좌측 엄천 너머 손곡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그 길 우측에는 엄천사 절터가 있는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절터’로 표기되어 있다. 문화재청 조사에 의하면 엄천사는 신라 때 창건되어 19세기 중엽까지 운영되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유물이 발굴되는 장소로 보아 대규모 사찰로 운영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엄천사 때문에 이 강이 엄천이 된 것이다.
이 엄천사는 신라 헌강왕 때 창건한 사찰로 선왕들의 위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찰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헌강왕은 초대 주지로 당시 금산사 주지였던 법우화상을 임명하는데 이 법우화상은 엄천국사가 된다. 헌덕왕은 낙성식에 참석하여 '(신라 왕실은) 부처님 뜻을 엄하게 가져 그 복을 받는 후손이며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 후세까지 그 복을 받으리라는 의미'로 친히 엄천사라 명명하였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그러나 어딘 지 찾을 수 없어서 단념하고 그냥 나옵니다.
엄천 건너편에 왕산과 필봉산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쌍재와 고동재.
두 고개 다 지리산과 왕산을 잇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 좌측으로 보면 엄뢰와 관련한 엄뢰대가 있고 그 좌측은 베리산373.6m입니다.
베리산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산 이름이다. 엄천사가 있던 절터 뒷산으로 엄천 쪽으로는 상당히 급경사이다. 이런 ‘벼랑’을 뜻하는 말을 우리 중세국어에는 ‘별ㅎ’ 또는 ‘벼로’라고 썼다. 지금의 ‘빗’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같은 뜻의 단어가 지방마다 다르게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데 ‘벼루’, ‘베르’, ‘베리’, ‘비리’, ’비랭이‘, 벼락’, ‘베틀’, ‘비락’ 등이 이 예에 속한다. 그러니 베리산은 상당히 경사가 급한 산이라는 말일 것이니 산의 지세와 이름이 꼭 같다. 제18구간의 ‘베틀재’가 같은 의미의 고개이고 경기도 가평의 조종(명지)지맥의 빗고개도 결국 같은 내력을 가진 고개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엄천교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따라야 할 적조암 안내판을 봅니다.
우측의 꽃봉산733.9m은 연기가 나고 있는 방향의 임도를 통해 오를 수 있는 곳으로 그 뒤로 계속 치고 오르면 우리가 진행하는 곳과 상내봉에서 만나게 됩니다.
좌측 왕산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측으로는 활인산에서 내려오는 줄기.
그리고 그 다음 줄 우측이 법화산과 그 좌측의 삼봉산 줄기가 뚜렷하고.....
그 좌측이 지리 서부능선 줄기입니다.
마치 한 줄로 연결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엄연히 임천의 전신인 람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이 이정표가 안내해 주는 곳이 공개바위가 있고 꽃봉산이 있는 곳이지 지리산 방향은 비탐구간입니다.
이곳은 기억에도 생생한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이 시작되는 곳이죠.
엄천 강가를 따라 걷습니다.
아!
좌측으로 상내봉(지도에는 와불산으로 표기되어 있음)과 함양독바위라고도 불리는 독녀암이 보입니다.
여기서 둘레길을 만나 잠시 함께 진행하다가,
07:32
정자가 있는 지도 #1의 '가'에서 좌틀하여 둘레길과는 헤어집니다.
적조암을 따릅니다.
포장도로 우측으로 민가가 있고,
08:01
해동검도무술원을 지나 적조암에 이릅니다.
조용한 사찰에서는 독경 소리가 아침의 적막을 깨뜨리고....
그 바로 위의 민가 좌측으로 후비고 들어갑니다.
지도 #2
08:12
그러면 과수원 옆으로 아주 명백한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을 점필재길로 상정하고 따릅니다.
등로는 예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출입금지 팻말.
그렇다면 앞으로도 길은 아주 좋을 것이라 는 약속으로 들립니다.
08:14
진행 방향으로 독녀암이 보이고 그 뒤가 상내봉으로 좌측은 아까 잠시 보았던 꽃봉산에서 올라오는 루트.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상내봉을 나가면 상내봉 삼거리가 나오고 우틀하면 상내봉을 경유하여 벽송사로 진행하는 벽송사능선.
그냥 직진하면 새봉에서 덕천지맥을 만날 것이고 거기서 우틀하여 진주(산청) 독바위를 만난 다음 청이당터에서 국골 사거리 방향을 버리고 예전 구루트로 진행하여....
한 가지 이 방향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가능하면 좌측 계류를 건너지 말고 우측을 고집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길은 명백하고....
그에게 지나온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길을 인도하게 하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산죽비트를 지나고,
08:58
지도 #2의 '나'의 곳에서 절터 같은 곳을 확인합니다.
사기그릇도 보게 되고.....
우측 능선 길로 오르는 길에는 멧선생 목욕탕도 있더군요.
좌측으로 갈림길이 보이는데 도솔산인님에 의하면 이 길이 바로 지장사터로 가는 길이라는 것 같습니다.
점필재 일행도 여기서 지장사 갈림길을 인식하였으나 들렀는지 아니면 그냥 통과했는지 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1리쯤 더 가니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조태허와 한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절이 내려다보였다.
지장사 갈림길을 지나 약 550m 지나지 우측 능선으로 달라붙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10리를 약5.7km로 환산해 보면 정확하게 1리 정도 간 거리입니다.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이니 바위만을 사진으로 남기기에는 나무에 가려 좋지 않으나 올라갈 수는 있군요.
09:15
아!
바로 앞이 법화산.
중앙에 금대산과 백운산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등구재가 보이며 그 라인은 삼봉산까지 보이고 그 좌측으로 서부능선으로 이어져 덕두산 ~ 바래봉이 명백하며 만복대와 정령치 그리고 큰고리봉까지 보이며 그 앞줄의 북부능선 삼정산도 명백합니다.
그러니 점필재가 본 금대사가 보이는 곳.
맞습니다.
그런데 삼봉산 라인과 서부능선 사이로 뭔가가 보입니다.
당겨보니...
예.
백두대간의 고남산이군요.
바로아래에는 문수암이 보이고...
점필재가 본 홍련암과 백련암은 어디에 있었던 절들인가요?
5분 정도 머무르다 자리를 뜹니다.
이제부터 능선을 타고 진행하니 길은 부드러워집니다.
이한성 회장님.
도대체 안 가는 데가 없는 산악회.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지어져 있는데, 절벽 밑에 두 샘이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너른 바위가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 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 되어 보였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덩굴〔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승려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이 있는데,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선열암은 여기서 약 100여 m 떨어진 곳이지만 찾을 수 있을까에도 의문이 들어 그냥 통과합니다.
우측으로 독녀암을 우히하는 길을 버리고 좌측 바위지대로 달라붙습니다.
거대한 바위 지대.
좌측으로 공룡능선 1275m 봉 같이 우뚝 솟은 두 개의 큰 바위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런 바위가 서 있으며,
그 두 쌍의 바위 사이에는 로프가 설치된 바위가 또 있군요.
올라갈까 생각해 봤는데 저 끈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 양 옆에는 암벽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핀들을 박아놨는데 그걸 누군가가 훼손하였고....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려는 공단 측의 배려로 보입니다.
이 바위는 일명 함양독바위라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아까 이곳을 올라올 때 이미 한 번 봤던 봉우리 앞에 특 튀어 나온 바위들의 집합체.
'독바위'라 불리는 이런 형태의 바위가 지리산에는 세 곳이 있습니다.
지금 이 함양독바위라고도 불리는 독녀암과 조금 이따 만날 산청독바위라고도 불리는 진주 독바위 그리고 남부능선에 있는 하동독바위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행정구역 명칭이 앞에 붙어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이름들이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가 최근에 부르기 시작한 것을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따라 부르면서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무책임한 지도 제작자들이 한몫 거들었을 겁니다.
즉 예전 이름은 다른 이름일 것인데 확실한 고증도 없이 아니 이에 대한 인식도 없이 "다른 지역에서 부르니까 내 지역도...."라는 식입니다.
위와 같이 점필재의 '유두류산록'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분명 이 바위가 독녀암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그런 이름으로 불린 지명이라는 것입니다.
지명은 보수적입니다.
그러니 함양 독바위는 후대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개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혹은 나서기 좋아하는 어설픈 어느 산꾼에 의해서 변조된 지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분명하게 독녀암으로 불러야 하고 그렇게 재정작되어야 할 지명입니다.
결국 이런 작업이 선인들의 사료를 통해 본래의 제 이름을 찾는 작업의 초석이 되는 걸로 이해합니다.
도솔산인 같은 분들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냅니다.
거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여기서 의론대로 가자면 이곳에 오르기 전에 보았던 우측의 희미한 길로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갈등을 느낍니다.
하지만 혼자서 거기까지 갔다 다시 온다는 게 시간적으로 부담이 됩니다.
예정된 코스로 돌자니 아무래도 귀가 시간에 대한 압박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고열암 등도 무시하고 통과하기로 합니다.
아쉬운 것은 점필재 선생께서 의론대에서 향로봉, 미타봉을 살폈다는 구절 문제입니다.
이것을 직접 선생이 앉았던 현장을 찾아 같은 곳에서 같은 눈높이를 이들을 관찰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생략하고는 선답자들의 해석에 맡긴다는 게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것이고 나아가 이는 한 번 더 이곳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다가올 것이니 말입니다.
하기야 이런 곳들을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 더 찾는다한들 저에게는 더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여건이 제약으로 다가오니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다 보니 ....
어쨌든 이들 향로봉과 미타봉에 대한 해석은 조금 뒤로 미루고 어쨌든 아쉬움만 남깁니다.
다만 오늘 진행하는 코스에서 청이당터로 진행한 다음 바로 새재로 하산을 하면 많은 시간을 이 부근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동부능선을 타고 이곳으로 하산하는 방법도 교통 사정이 좋은 함양으로 진출할 수도 있으니 고려해 봄직도 합니다.
이 석문을 통과하여,
못 오른 바위의 뒷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山'이군요.
우측 벽에 안락문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고는 석문을 하나를 더 빠져 나가면,
10:05
이곳도 안락문이라는 또 하나의 각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안락문이라는 석문에는 두 개의 각자가 새겨져 있는 셈입니다.
10:18
1193.3봉은 우회하여,
10:27
1213.9m으로 오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이 1213.9봉이 와불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은 이렇게 답답합니다.
사방이 꽉 막힌 것이죠.
그럼에도 와불산이라!
와불산은 이름 그대로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도의 어느 산의 모습하고도 같다고 하고....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이 예전부터 미래불인 아미타불의 형태와 같다고 하여 (아)미타봉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와불산으로 올랐던 것이고.....
문제는 이 이름들을 확정짓는데 봉우리의 생김새와 지도의 위치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근의 형태를 제일 잘 관찰할 수 있다는 견불동 즉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서 볼 때의 형상이 지도와는 match up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천면 창원리에서 본 와불산
송전리에서 찍었을 와불산(지리 99에서 퍼옴)
즉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놓고 볼 때 송전리 내지는 창원리에서 보면 이 부근이 이렇게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참고도 #1
그러니 결국 위 참고도 #1의 A, B, C를 위 사진의 아니 점필재의 미타봉, 향로봉과 현재 산꾼들이 부르고 있는 상내봉, 와불산 등과 어떻게 일치시키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우선 올라오는 루트는 위 지도의 독녀암1117.5m - 와불산C - 상내삼거리B - 1164.9봉A이고, 사실 이 부처님 머리 부분은 지도의 'A' 부분이고 실제 능선은 뒤로 넘어가서는 상내삼거리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도상의 와불산C은 발 정도에 위치한 산인 것입니다.
그러니 두상 부분인 A를 와불산 혹은 와봉臥峰으로 보는 게 맞고 그렇다면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1213.9봉을 와불산으로 표기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제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현장에는 함양군에서 설치한 정상석도 있었으며,
2018. 6. 24. 필자가 촬영한 사진.
그 암봉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렇게 누군가가 표시까지 해두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인의 눈에는 와봉 내지는 와불산으로 보이겠지만 예전의 승려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췄겠냐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 즉 예전 승려들의 눈에는 이 1164.9봉의 암봉이 (아)미타불로 보였던 것(불교지명설)입니다.
이에 대해서 '지리99팀'에서는 산 아래에 사는 주민들이 이 'A'를 부처바위 혹은 상노봉, 상내봉이라고도 부른다는 증언을 종합하여 상내봉이라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원을 점필재의 미타봉에서 찾았습니다.
즉 부처바위이니 (아)미타봉이라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부처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과거불인 비로자나불과 현생불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로 구분되는데 이 아미타불을 그냥 미타불로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견해에 의하더라도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와불산1213.9m은 명백하게 잘못된 표기이며 이는 1164.9봉을 와불산 = 미타봉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즉 부처바위 = 미타봉 = 와불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로써 와불산의 부처님 형상이 눈에 들어오고 또 이해도 갑니다.
다만 상내봉이 미타봉이며 와불산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점필재 선생을 만나봅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즉 '의론대의 삼반석에 올라 서쪽을 보니 향로봉과 미타봉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분명 점필재 선생이 관찰한 것은 복수의 봉우리인 향로봉과 미타봉이었으니 이제 향로봉의 실체만 확인하면 될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무명봉이었던 'C'가 언제부터인가 상내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찾아보니 부산의 국제신문이 2000년 산행 안내를 하면서 상내봉이라고 이름을 붙여 개념도를 만들었던 것이 꾼들에 의해 퍼지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랬었군요.
삼거리로 나가는데,
좌측으로 기묘한 형태의 오뚝이 바위를 만납니다.
예습을 할 때 보았던 사진이 생각납니다.
바로 이 사진이었습니다.
1213.9봉 바로 옆에 달라붙은 이 사진이 향로봉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도솔산님이나 솔레이님이 제시한 사진입니다.
즉 바위의 생김새가 향로이며 사람이 올라가 두 손을 뻗으니마치 향로에서 연기가 오르는 모습이라는 것이고또 그럴 듯해 보입니다.
점필재 일행도 의론대에 앉아 미타봉을 살펴본 후, 위치상으로는 위 미타봉에 비해 더 멀어 작아보이기는 하지만 1213.9봉 바로 옆의 오뚝이 모양의 바위에 주목한 것입니다.
물론 점필재 이전의 사람들에 의해 이 이름이 붙여졌으니 그도 이곳을 보고 향로봉이라 부른 것 아니겠습니까?
문득 지리남부능선을 탈 때 하동 악양의 형제봉1116.2m이 경남 사투리에는 성제봉이라도 불린다고 하면서 이중으로 정상석이 세워져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향로봉이 상로봉이 되고 상로봉이 상노봉- 상내봉은 될 수 없는 건가요?
그렇군요. '지리99팀'에서는 일찍이 이 문제를 지방 방언과 연결하여 '향로봉>상로봉>상내봉 으로 '형>성' 과 같이 음운변화 하게 되어 상내봉이 되었다.'는 나름의 연구 실적을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이는 도솔산인님도 같은 취지입니다.
그렇게 하여 1213.9봉 = 상내봉으로 확정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필재의 기록에 의하면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즉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 바 이는 실제 지형과 배치됩니다.
즉 의론대는 해발 1000고지 정도여서 1200고지가 넘는 이 두 봉우리가 발 아래 있다는 얘기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겁니다. 산행기를 적으면서 오기를 하였거나 혹은 기억력의 착오로 보입니다. 글 하나 볼까요? 요즘 도솔산인님과 발을 맞춰 선인들의 답사산행을 하고 있는 솔레이님의 글인데 이 오뚝이 바위를 상내봉으로 확정하기 까지의 고민이 담겨 있는 진솔한 글이기에 소개합니다. 오뚝이바위 형상이 영락없는 향로를 닮아있다. 이렇듯 지명이란 생각나는 대로 막 지어서 부르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게 깨끗하게 정리된 느낌입니다.
여기서 우선 지리 동부 쪽을 조망합니다.
앞줄이 왕산과 필봉산 그리고 그 뒤가 황매산이고 그 우측이 정수산에서 척지고개를 지나 그 우측이 둔철산이고.....
그 앞 잘린 라인이 웅석봉 라인인 가산.
그 앞줄이 왕등재봉에서 고동재로 내려오는 라인.
조금 우측으로 돌리니 왕등재봉에서 도토리봉 ~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덕천지맥 뚜렷하며 그 우측의 달뜨기능선도 볼만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지나가게 될 새봉.
이 글 때문에 제가 진행했던 산행에서의 사진들 가령 지난 번 왕등재봉이니 왕산 앞 그러니까 쌍재와 고동재 사이에 있는 둘레길의 641.4봉 등지에서 이쪽을 보고 찍은 사진들에는 안타깝게도 이 부근이 미세먼지로 흐리게 나와 이 오뚝이 바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군요.
아깝습니다.
"알아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다음을 기약합니다.
상내봉 삼거리를 지납니다.
여기서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마천면을 만나게 되니 이곳이 곧 삼면봉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니 우틀하면 능선은 벽송사 능선과 이어지고 그 첫봉우리는 암봉인 1164.9봉 즉 미타봉이자 와불산입니다.
이제부터는 함양군 휴천면을 버리고 마천면과 금서면의 군계를 따라 걷습니다.
15일,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짐을 싸는 인원을 줄여서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나무 덩굴이 깊숙이 우거진 숲속으로 나아갔다. 큰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좁은 길에 넘어져 있으면서 외나무다리 역할을 하였는데 절반쯤 썩어 있는 가지가 그래도 땅을 지탱하고 있어 행마(行馬)와 같은 모습이여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아홉 고개, 바로 구롱(九隴)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언덕을 지나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 등나무 덩굴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10:49
싸립재를 지납니다.
지도 #2의 '다'의 곳입니다.
아마 점필재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좀 내려간 곳으로 진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의론대에서 보았던 미타봉이니 향로봉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독녀암 ~ 상내봉 ~ 새봉 까지는 사실 이 싸립재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고개가 보이지도 않는데 주릉에 닿기까지 9개의 고개 즉 구롱九隴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새봉에 오르기 전 좌측으로 조망터가 나옵니다.
상내봉은 보이건만 그 좌측의 미타봉 즉 와불산은 안 보이는군요.
왕산과 필봉산.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11:31
새봉삼거리로 오릅니다.
이제 지리동부능선이자 덕천지맥으로 오른 것입니다.
여기서 산청군 삼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평탄한 능선으로 이어집니다.
이제부터는 마천면과 삼장면의 군계를 따라 걷습니다.
지도 #4
죽은 산죽.
三必死說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곳을 쑥밭재로 표기하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쑥밭재는 청이당 부근에 있는 것으로 여기서는 조금 더 가야합니다.
조망처에서 잠깐 뒤를 돌아보면 새봉이 보이고.....
11:52
그러고는 독바위입니다.
자세히는 진주독바위이죠.
좌측으로 들어가 바위에 매달려 있는 로프를 잡고 독바위로 올라갑니다.
뻥 뚫린 조망이 사방을 다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이 독바위 때문에 함양독바위(독녀암)이 생겼고 하동독바위가 생겼습니다.
어쨌든 이 독바위는 최근 생긴 이름에 틀림없습니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항아리를 닮았다는 설, 홀로 서 있는 바위라는 설 등이 있지만 보통은 독甕같이 생겨서 그렇게 부르는 게 일반적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옹암甕巖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두류봉1617.4m이 보이고 우측 영용봉1478.6m 아래로 향운대가 보이는군요.
저 향운대는 아주 기氣가 센 곳으로 기억됩니다.
갑자기 폰의 GPS가 말을 듣지 않더군요.
지리북부능선과 멀리 서부능선.
우측 중앙이 금대산과 백운산.
써리봉과 비둘기봉.
중앙 도토리봉 뒤로 웅석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달뜨기능선.
우측 골짜기가 대원사골.
삼봉산과 법화산.
그 뒤로 백운산과 덕유산까지 명백합니다.
그 좌측으로 서부능선과 북부능선 그리고 중앙에 백운산903.8m과 그 뒤로 좌측에 살짝 숨은 게 고남산 그리고 중앙에 우뚝 솟은 게 요천지맥의 천황산909.6m.
솔레이님 사진 한 장 가져옵니다.
이게 진주독바위 모습입니다.
아니 단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이한검 대장님의 표지띠가 땅에 뒹굴고 있습니다.
주워서 깨끗이 닦아 적당한 곳에 매답니다.
이로부터 몇 리 가지 않아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13:00
쑥밭재로 가는 도중 부산, 진주에서 왔다는 다섯 분들을 만나 위스키에 막걸리 한 잔 얻어 먹습니다.
그러고는 쑥밭재에 이릅니다.
여기서 좌틀하여 국골사거리 방향을 버리고 청이당터로 내려갑니다.
수량이 풍부한 청이당 계곡.
이 옛길을 따라 오르면 희미하기는 하지만 흐름만 따른다면 별로 걱정할 것 없습니다.
13:53
잠시 등로를 벗어나 좌측으로 붙어,
마암을 다녀옵니다.
물은 있지만 식수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관리만 잘하면 석간수로는 그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14:08
상당한 되비알을 치고 올라 두류봉에 오릅니다.
아!
미칠 듯한 이 조망.
바로 앞 국골.
그 좌측이 초암능선이니 그 너머가 칠선계곡이겠고 중앙에 볼록 솟은 것이 창암산.
그 우측이 백운산.....등구재... 삼봉산.
아!
반야봉
좌측 제일 뒤가 반야봉.
그러니 만복대에 정령치...서부능선...
그 앞줄이 삼각고지에서 북부능선.....
남명 조식의 시가 떠오르는군요.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 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초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산줄기 하나 하나가 소의 갈비뼈를 연상시키긴 하는군요.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14:32
영랑대입니다.
발목을 붙들립니다.
하지만 가야죠.
두류능선 그 우측이 벽송사능선.
그냥 여기에 짐을 풀어놓고 하루든 이틀이든 그냥 머무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점필재는 화랑이 이곳을 노닐러왔다고 표현을 하지만 어디 그렇겠습니까?
아래 말달린 평전 등에서 훈련을 하며 올라왔었겠죠.
제석봉 우측의 촛대봉 평평한 영신봉과 노고단 그리고 반야봉.
좌측부터 중봉과 천왕봉 그리고 중앙의 제석봉.
저 하봉 소년대에는 한 무리의 꾼들이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군요.
초암능선.
좌측으로 박회성이 있을 것이고.....
소년대 쪽에서 사람들이 이리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로프도 잡고.....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가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하게 트여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모두가 삼나무, 노송나무, 소나무, 녹나무로 그 중 3분의 1이나 말라 죽어 뼈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 간간이 마치 그림처럼 단풍나무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서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치우쳐 주먹처럼 굽었으며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물로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곳곳에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었는데,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거나 누울 만하였다. 청이당 이하에는 오미자나무 숲이 많았지만, 이곳은 오미자나무는 없고, 다만 땅두릅〔獨活〕과 당귀(當歸)만이 있었다.
14:42
한 무리의 산꾼들은 소년대에서 영랑대로 저는 그 반대로 진행을 합니다.
오늘은 어찌 아는 사람 하나 못 만나누?
영랑대에 도착한 그 무리들을 봅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천길만길.
초암능선 창암산 그리고 금대산과 백운산 둥이 일렬로 줄을 섰고.....
반야와 만복대 등...
백두대간은 크게 휘돌아 가는 모양새.
15:03
지도 #4의 '라'의 곳의 하봉헬기장을 지나면,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게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가 하봉 샘터를 지나 조개골이나 치밭목대피소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창녕의 화왕산은 정상 전체의 56,000평 분지는 그 자체가 배모양인데 화산 폭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곳의 배바위는 화산 폭발 이전부터 강물에 깎인 흔적이라고 합니다.
반면 지리산은 위 화왕산과 같은 화산대에 있었으면서도 분화구 흔적은 빙하기에 파인 흔적 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지질학자가 아니면 백악기시대 화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얘기죠.
즉 한반도는 약 30억년 전 바다였던 것이 지각변동을 거쳐 융기되어 형성된 육지라는 것입니다..
강원도 시멘트 석회석이 바로 예전에 바다 속이란 증거이고 그러니 이곳의 선암船巖 즉 배바위라는 것을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인지.....
법종 스님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군요.
바위를 치고 올라,
15:34
정규 탐방로 안으로 들어옵니다.
여기서 저는 점필재길과 작별을 하고 나름 하산 모드로 돌아갑니다.
점필재길은 향적사와 영신대 그리고 좌고대를 거쳐 한신능선으로 하산을 하였습니다.
그 길은 이전에도 가 본 곳이기도 하니 오늘 계획에는 없던 루트이기도 합니다.
저의 여기서의 계획은 써리봉 ~ 늦은목이 ~ 순두류 ~ 버스승차 ~ 중산리로 이동하여 원지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하려고 하였는데 순두류 ~ 중산리 버스가 운행 시간이 넘어 도착할 것 같군요.
그럴 경우 중산리까지 최소 5.5km 정도는 더 걸어야 하니 그럴 경우 이곳부터 약 10km 정도이니 답이 안 나옵니다.
윗새재도 8km이니 짧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택시를 불러 덕산까지 가서 목욕을 하고 원지로 이동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치밭목대피소와 비둘기봉.
하봉과 우측의 진주독바위, 새봉 그리고 상내봉, 1193.3봉과 그 너머의 독녀암.
대단합니다.
동부능선의 왕등재봉과 그 뒤의 왕산 능선.
16:22
가짜 써리봉을 지납니다.
두 명의 산객이 드론을 날리는데 아주 멋있군요.
저걸 빨리 실무에 활용해야 하는데.....
황금능선.
진짜 써리봉에서 마냥 감상을 하다 내려갑니다.
멀리 낙남정맥의 삼신봉.
16:56
치밭목산장.
물도 안 마시고 하산을 서두릅니다.
17:30
새재삼거리.
여기서 위새재까지는 3km.
서두릅니다.
지겨운 나무 계단을 내려가,
18:08
현수교를 건너,
18:12
윗새재에 도착합니다.
아직 택시는 도착하지 않았군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덕산목욕탕이 노는 날이라고 하는군요.
계곡에서 잠깐 씻는데 온몸이 덜덜 떨리는군요.
약식으로 씻고 18:50 버스를타고 원지로 나옵니다.
넉넉하게 19:50분 버스를 예약하고 원지 단골 갈비탕집으로 가서 홀로 하산식을 하고 버스에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