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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치밭목 대피소로 오른 지리산(윗새재 ~ 치밭목 산장 ~ 천왕봉 ~ 촛대봉 ~ 세석대피소 ~ 한신계곡 ~ 백무동)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배 '만수대장'님이 운용하는 '목동산악회'에 '지리산 화대종주' 공지가 뜬 게 3개월 전입니다.

1무1박3일로 진행을 하겠다는 겁니다.

연하천 정도에서 1박을 하고 2일 차에는 반야봉까지 답사한 다음 화엄사를 통해 구례로 내려와서는 맛집에 들러 뒷풀이를 한 후 귀경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다만 대원사 ~ 치밭목대피소 구간이 좀 지루하니 이걸 윗새재 ~ 치밭목 대피소로 바꿔 진행하겠다고도 하고....

그렇게 보란듯이 떡하니 올려만 놓고  말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뒤 전화를 해서는 주저리주저리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습니다. 

무언의 압박입니다.

할 수 없이 9월 28일 화대종주를 거꾸로 진행하는 대화종주에 참석은 하되 금요무박으로 함께 시작하여 토요일 신행 중간에 아무 데서나 탈출하여 귀가를 한다는 조건을 답니다.

 

남부터미널에서 대원들과 만납니다.

두 분은 여성으로 이미 낯익은 분들이고 즐기산님과 산골짜기님은 처음 뵙는 분.

만수대장님과 함께 6명이 22:40 출발하는 원지 경유 진주행 버스에 오릅니다.

이게 웬일.

중간에 버스가 고장이 나 옥산 휴게소에서 뒷차를 기다리느라 1시간 20분을 훌떡 까먹습니다.

가까스로 3시에 원지에 도착하여 택시 2대로 분승하여 윗새재로 갑니다.

밤이지만 낯익은 곳들을 지나면서 머릿속으로는 연신 그 주위의 산세를 그립니다.

어느덧 유평으로 들어서 그 지겨운 유평계곡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갑니다.

03:45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하고......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9. 29. 토요일

2. 동행한 이 : 목동산악회 종주팀

3. 산행 구간 : 윗새재 ~ 치밭목산장 ~ 써리봉 ~ 중봉 ~ 천왕봉 ~ 제석봉 ~ 촛대봉 ~ 세석대피소 ~ 한신계곡 ~ 백무동

4. 산행거리 : 20. 8km

구 간

거 리

출발 시간

소요 시간

비 고

윗 새 재

 

03:51

 

 

치밭목대피소

4.8

05:41

110

 

써 리 봉

06:22

41

중 봉

3.1

08:01

99

천 왕 봉

0.9

08:48

47

장 터 목

2.1

10:04

76

촛 대 봉

12:13

69

세석대피소

3.4

12:20

07

 

백 무 동

6.5

15:31

191

 

20.8 km

11:40

의미없음

실 소요시간

 

산행기록

지도 #1

두 분이서 심심하니 한 차로 가시지....

03:50

윗새재 마을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천왕봉까지는 8.8km, 치밭목 대피소까지는 4km.

공단에서 측정한 거리이니 아주 정확합니다.

지리산 산신령님께 삼배를 올리고 안으로 듭니다.

지리산의 공기는 역시 틀리군요.

시원하다못해 폐부 깊숙이 서늘하면서 청량한 기운을 담뿍 넣어주는 지리산의 공기.

깊이 넣었다가 크게 내뱉는 심호흡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덕천강 상류를 건넙니다.

아주 의미 있는 물줄기입니다.

지리산 중봉의 동부능선과 구곡산으로 향하는 황금능선 사이에서 발원한 물은 이후 조갯골과 심밭골 그리고 한판골 등 숱한 크고 작은 물줄기들을 받아 덕천강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진주시 귀곡동 부근에서 남강에 흡수되는 약46.72km의 물줄기입니다.

그러니 백두대간이 천왕봉에서 끝난다는 통설에 의할 때 천왕봉에서 분기한 산줄기는 중봉 , 하봉을 거쳐 밤머리재 ~ 웅석봉 ~ 백운산을 거쳐 남강과 이 덕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마무리 되는 도상거리 약 57km의 덕천(웅석)지맥이 됩니다.

또한 최근 꾼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지리4대 태극종주와도 유관한 물줄기이기도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유의미한 그런 물줄기입니다.

그렇게 물을 건너고, 

지루한 계단도 올라,

03:50

10분 만에 대원사 즉 오리지날 화대종주길인 '삼거리'를 만납니다.

직진을 하면서 이제부터는 '화대'루트를 걷습니다.

글을 쓰고나니 어감이 이상하군요.

화엄사의 華와 대원사의 大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구례군 마산면의 화엄사와 산청군 삼장면의 대원사를 잇는 루트로 도상거리 약48km의 거리입니다.

대간이나 정맥 등 이어가기 산행이 대세로 자리잡은 지금 그래도 태극종주 코스와 함께 아직까지 산꾼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종주 코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찰 다 548년 연기조사에 의해 건립된 사찰들이라는 겁니다.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해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신라 진흥왕 5, 백제 성왕 22, 고구려 안원왕 14)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544),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는 설(‘동국여지승람), 그리고 754(경덕왕 13) 황룡사 승려 연기조사가 발원하여 지은 것이라는 설(‘754년 설) 등이 있다.

 

우선 ‘544설에 대해서는 당시 화엄사가 있는 곳이 백제 땅 구례현이었으니 관련 사적기에 신라 연호(가령 진흥왕 5)를 쓸 수가 없다는 점, 백제의 승려보다 신라의 승려 가령 자장, 원효, 의상 등이 더 많이 거론된다는 점, 1978년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8월부터 화엄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는 이른바 동국여지승람설은 그 부기를 보면 '當更考 '다시 고찰해야 한다.'고 씌어져 있어 해석의 여지를 남겨놨으며,

 

‘754설은 鷰起 祖師緣起 祖師를 명확히 구분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중관대사 해안(1567 ~ ? )1636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이나 경암의 화엄사기 등 여러 사적기에 나온 기록을 든다.

 

그러나 구례속지에 '544년에 천축국 승려인 緣起祖師가 세웠다."는 기록 그리고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국가 시책에 따라 백제연호를 무시하고 모든 걸 신라 연호로 고쳐서 사용토록 하였음을 볼 때 544년설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한편 신라 진흥왕 5년이자 백제 성왕 22년인 서기 544년에 이들 사찰을 건립한 연기조사를 알기 위해서는 세 명의 연기조사가 있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鷰起緣起 그리고 煙起가 그들이다.

 

그렇다면 연기조사鷰起祖師는 누구인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리산 한 자락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마을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찾았더니 계곡에 독경소리가 흘러나오는 움막이 있었다. 얼마 뒤 독경을 마치고 나오는 스님과 마주쳤는데 그 분은 피부색도 다르고 입고 있던 가사도 달랐으며 무엇보다 언어 소통이 안 되었다. 다행히 양나라 스님으로부터 한문은 배웠다고 하기에 글로 대화를 나눈 결과 나는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오게 되었으며 이 나라 백제에는 '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인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읽고 있던 경은 부처님의 최고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고는 저녁 공양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피리를 꺼내 부니, 흡사 머리는 용 같고 이마에 외뿔이 달렸으며 몸은 거북이고 크기는 열 자가 넘어 보이는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 날아와 그 스님 곁에 앉더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부처님 나라에서 온 그 스님이 을 타고 다니니 연기존자鷰起尊者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 뒤 우리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연기존자가 법문을 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지은 곳이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다음 해 가을 법당을 완공하였으니 이때가 544년이었다. 주민들은 이 절의 이름을 연기사鷰起寺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존자는 자신이 화엄경의 소의경전으로 수행을 하고 있으며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화엄사華嚴寺로 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여 그렇게 정했다. 鷰起祖師는 이 화엄사뿐만 아니라 연곡사와 법계사, 대원사도 함께 창건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화엄사상은 신라의 그것보다 근 100년이나 앞섰으니 그 화엄사상을 흠모하여 백제의 화엄사상을 배우러 온 승려 가령 원효나 의상 등 신라의 승려들이 많았고 그들의 행적이 화엄사와 함께 자주 거론됨은 승전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당시 원효(617~686)는 화랑의 장교 출신으로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의 '추성楸城'이나 '성안城內의 말달린 평전'과 관련 있는 인물임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덕천지맥의 지리동부능선에 영랑대소년대하는 지명이 신라 화랑과도 무관치 않으니 지리산은 신라와 백제의 승려들 간에는 교류의 장이어서 원효가 화랑시절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왔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원효와는 여덟 살 연하이기는 하나 결의형제였던 의상(625~702)은 당나라에서 화엄을 배우고는 부석사를 창건한 뒤 자신이 배운 화엄사상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었는데 유학파도 아닌 원효가 이미 화엄에 대해서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즉 원효가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웠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강추强推로 의상도 화엄사로 와서는 실상을 파악하고는 해동의 연화장 세계가 바로 이 화엄사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677(신라 문무왕 17)에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주위를 석각의 화엄경石經을 둘렀다고 봉성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화엄사를 중창까지 한 의상은 이런 인연으로 연기조사緣起祖師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으니 이 緣起祖師는 의상대사(625~702)를 말한다.

 

그리고 煙起祖師는 백두대간 얘기를 할 때 나오는 옥룡기의 도선국사(827~898)의 별호로 59산 동리산파의 혜철(785~861)의 제자이며 섬진강 건너 오산 사성암의 4성 중 1인인 연기조사를 말한다. 23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행을 하다 광양 백운산 아래 백계산의 지세가 왕성함을 보고 그곳에 머무르며 옥룡사를 창건했다. 이 옥룡사 덕에 1895년 옥룡면으로 승격된 옥룡사 주변 마을은 지금도 광양시 옥룡면으로 불린다. 정작 옥룡사는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고 지금은 한 개인의 선산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안에 있는 개인 사찰은 동백사로 불리다가 백계사라는 이름을 거쳐 지금은 옥룡사로 불린다. 사실 도선국사에 대해서는 옥룡기가 중요하며 이는 뒤에 또 보기로 한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잘 관리된 산죽밭과 바위들을 타고 오르다 보니,

예의 가파른 나무 계단이 나옵니다.

05:41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인기척도 없습니다.

늘 쓸쓸하기만 한 치밭목대피소.

민대장님은 안에 계신가?

들른 지가 하도 오래되다 보니....

좌측에 취사장도 생겼고....

10분 정도 머무르다 다시 산길로 접어듭니다.

06:08

이건 무슨 바위인고?

06:12

날이 푸르게 밝아 오고 있습니다.

아!

뭔가 불길한 예감이.....

오늘도 제대로 지리를 걷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확 솟아오릅니다.

멀리 있는 줄기들의 골谷은 아침 안개에 묻혀 있고 그나마 가까운 것들은 윤곽이 뚜렷합니다.

바로 앞 조금전 지나온 치밭목 대피소 뒤의 1434.6봉(최근에는 작명가들로 인해 '비둘기봉'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 같음)이 보이고 그 뒤로 동부능선이 그리고 그 뒤로는 왕산과 필봉산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우측으로...

"만수대장님 이리 와 보소! 저기 우측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거.....?"

"그게 어딘가요?"

"우리 아까 남부터미널에서 대장님이 저한테 저기가 어디냐고 묻던 곳!"

"아! 저기가 황매산?"

06:22

그러고는 써리봉입니다.

써레봉이라고도 하죠.

그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곳이 써리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공단에서는 조금 더 올라간 곳이 써리봉이라고표기되어 있죠?

그것과 상관없이 전에는 "멀리서 볼 때 농기구인 써레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친절(?)한 안내문이 그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써리봉이 관연 농기구 '써레' 같이 생겼나요? 

 

수리봉 소고(小考)

 

.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98쪽.

 

이 써리봉에서 가지를 치는 줄기는 아무래도 구곡능선이라 불렸던 '황금능선'입니다. 저 황금능선은 지금도 어른 키만한 산죽으로 악명이 높은데 1979년에는 오죽했을까요?

당시 세석산장(당시 부르는 이름은 '대피소'가 아닌 '산장'이었음) 관리인인 정원강 님은 낫 한 자루를 들고 이곳으로 옵니다.

새로운 루트 개척인데 아마도 이런 수고를 자처하는 일은 그의 사부님 역할을 했을 지리산신 우천 허만수 님에의 모방이었을 겁니다.

며칠을 들여 등로를 개척한 정원강 님은 혼자만의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덕산의 덕천강가로 이어지는 갈'之' 자 모양이 능선을 바라봅니다.

마침 늦은 가을 서산으로 떨어지는 노을의 붉은 빛이 아니 형형색색의 빛이 지리의 찬 바람에 푸른 산죽이 물결 칠 때 그 잎 색깔이 빛에 반사되면서 누러면서도 검은 빛으로 넘나드는 것을 봅니다.

흡사 황금의 표면이 검은 색을 띄는 게 아닌가 하는 착시 현상까지 느끼게 된 것이죠. 

그날 이후로 정원강 님은 이런 경험을 구곡능선을 타고 온 산꾼들의 여러가지 물음에 관련 답변 중 하나로 들려 줍니다.

그 경험이 여러 꾼들에게 퍼지게 되면서 많은 꾼들의 또 다른 경험이 되어 약간은 각색이 되고 부풀여지기도 하여 지금의 황금능선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구곡산 우측으로 중산리 지나 신천리 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뾰족한 주산828.2m이 보입니다.

오대산으로도 불리는 저 주산은 낙남정맥의 갈미재 부근에서 분기한 줄기로 원내재, 갈치재를 지나 오대주산642.6m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다른 한 줄기는 남명 조식 선생께서 중히 여기셨던 비룡산554.6m으로 가기도 합니다.

 

저 주산 그러니까 오대산에는 그 유명한 수정사가 있었습니다.

 

지네재를 내려가면 온통 대나무 밭이다. 운치 있는 대나무 밭을 빠져나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백궁선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예전의 오대사이다. 터만 남아 있다가 지금은 그 터에 새롭게 백궁선원이라는 국선도 수련장이 들어섰는데 CC-TV로 감시를 한다며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지금은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 뒷산이 주산828.2m으로 보통 오대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중태리의 오대주산642.6m과도 구별해야 한다. 이 두 산의 구별의 기준은 생긴 모양이다. 지리산에서 볼 때 유별나게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게 오대산인 주산이다.

진양지에 따르면, “오대산에 있다. 살천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줄지어 서 있는데 그 형상이 돈대처럼 생겼다. 오대사는 수정사라고도 하는데 고니 알 만한 수정 구슬이 있어서 여의주라고도 불렀다. 은실로 묶어 보물로 전해져 내려왔다. 오대사 승려의 말로는 물이 반 정도 담긴 동이에 구슬을 담그면 물이 즉시 넘친다고 한다. 오대사 뒤편에는 국가소유의 대밭이 있다.” 고 적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정사 주지 진억으로부터 지리산에 폐사한 오대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수많은 봉우리가 둘러싸 있고 온갖 골짜기가 함께 모여들어 성현이 은거하는 곳이 있는 듯했다. 대각국사여기는 큰 법이 머물 곳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서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그리하여 시주할 사람을 모집하고 순현이 몸소 장인들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아 서둘러 조성하니 모두 86칸이었다. 수정 구슬 하나를 끈으로 묶어 무량수불상앞에 매달아 신심을 보여주는 표시로 삼았고 그 모임의 이름을 정했다. 1123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12910월에 마쳤다. 낙성법회를 사흘간 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탁영 김일손(1464~1498)1489414일부터 보름간 지리산 산행을 하면서 4. 20. 이곳을 들렀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오대산수륙정사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고 씌어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다. 다 읽어보니 고려 때 학사 권적이 송나라 소흥 연간에 지은 것이었다. 절에는 누각이 장대하고 방이 매우 많으며 깃발이 마주 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도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해는 저물고 비도 내려 절에서 묵었다.”

 

지리산 수정사기는 권적(1626~1679)이 수정결사水精結社와 창건주인 진억이 폐사되었던 오대사를 새롭게 창건하게 된 내력을 쓴 글로 동문선 제64권에 실린 글이다. 여기에는 대각국사 얘기도 나오며 수정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경위도 나오며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수정사 낙성법회 때 지금은 폐사되어 없어진 함양 엄천의 엄천사 주지가 초빙 강사로 왔었다는 얘기도 나온다는 것이다. 엄천사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해 주는 글이다.

오대(수정)사 삼거리를 나와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오대주산 60m’라는 뜬금없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를 무시하고 직진한다. 시양골을 우측으로 진행하여 마을 외곽을 돌아 봉우리 사면을 따라 걸으면 걷기 편안한 숲속이다. 다시 임도로 나와 시멘트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600여 년 전 이 길을 청파 이륙(1438~1498)이나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쌍계사 불일암에서 불지령을 지나 묵계재에서 오대(수정)사로 갈 때 걸었던 길이라 생각하니 그분들이 그리워진다, 임도를 따라 전원주택지를 지나면 1014번 도로가 지나는 궁항마을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낙남정맥의 고운孤雲능선이 삼신봉에서 흘러내리고 중앙에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묵계재 아래로 삼신봉 터널이 보입니다.

그러니 그 뒷능선이 시루봉에서 가지 쳐 내려오는 횡천지맥이며 그 좌측(사진 주산이라는 글자 우측)의 봉긋 솟은 봉우리가 바로 지리산의 남쪽 끝 금오산875.1m입니다.

 

앞에서 두 번째 줄기가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으로 중앙에 문창대가 보이고 그 뒤로 낙남정맥의 맹주 삼신봉1290.7m이 보입니다.

그 좌우로 외삼신봉, 내삼신봉이 명백하고 그 뒤의 억불산과 백운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도솔산이 훤히 보이는군요.

바람은 좀 차갑게 부는데 모두들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

도대체 지리산은 왜 생겨서 사람을 이리도 집착하게 만드는지......

상常에 집착하지 마라 했거늘!

그런데 여기는 그냥 산이 아닌 지리산인 걸요?

중봉을 보고 오릅니다.

아!

이제 진양호에 그 뒤 남해바다!

"저게 정말 바다예요?"

"저 좌측이 시천면사무소가 있는 덕산이니까 조금 전 건넜던 덕천강이 저 덕산 옆으로 흘러 저 단성쪽을 지나 그 남서쪽의 진양호로 흘러들어가면서 남강에 흡수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남강의 풍부한 물을 낙남정맥 너머에 있는 곤양벌에 물을 나눠주기 위하여 낙남정맥을 뚫고 댐을 만들어 가화천에 물을 흘려주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낙남정맥을 하다가 물을 건너게 되는 곳이 한 군데 있는 데 바로 저곳입니다."

만수 대장님이 한 마디 거듭니다.

"형님 책을 보니 내일 우리가 진행하는 곳에 무넹기라는 곳도 노고단 물을 구례로 넘겨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라 그랬잖아요?"

"바로 제대로 읽으셨습니다. 거기도 그렇거니와 지리 주릉을 보면 노고단에서 무넹기 쪽이 아니 문수리의 덕은내로 흘러내리는 물을 우측으로 끌어서 마산면 오미리의 너른 들에 물을 대게끔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같은 예라 볼 수 있을 거예요."

 

되돌아 나와 내죽마을을 지난다. 대나무와 토지천의 시내가 있는 곳이라 하여 내죽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내죽교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다른 곳과는 달리 슈퍼가 하나가 있다. 더운 날이면 음료수 한 잔 마시고 가도 되겠다. 우측 수로를 따라 걸어 하죽마을을 지난다. 이 수로는 토지천의 풍부한 물을 오미리의 너른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인공수로이다. 노고단에서 성삼재로 갈 때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벌로 돌리기 위한 무넹기와 같은 원리이다. 너른 오미벌을 보고 걷다보면 우측으로 전통 한옥집이 보인다. 운조루다. 1776년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안동 출신 류이주가 지은 99칸 목조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이 운조루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곳이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시쳇말로 가진 자의 의무를 보여준 곳이라는 것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좌측 골짜기 사이로.....

좌측이 조금 전 올랐던 써리봉.

이 황금능선의 휘어짐을 보통 之로들 표현합니다.

06:45

아!

드디어 천왕봉과 중봉.

곁들여 지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얘기는 얘기를 낳고.....

구름 밑에 가렸던 태양이 그것을 뚫고 나옵니다.

마치 새가 세상을 만나기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무척이나 원망스럽기만 한 헷세의 소설 그 중에서도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푸르기만 한 하늘이라는 바탕에 구름이 제 각각 다른 모습으로 퍼져있고...

그걸 배경으로 가을이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고인이 된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를 틉니다.

음악 듣기로는 아무래도 LP가 제격입니다.

그렇게 듣고 그렇게 음악을 배웠기 때문이죠.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07:07

아직도 이곳이 써리봉이라고 믿는 굳은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지도 #1의 '가'봉우리입니다.

만수대장님은 무엇을 사진에 그리도 열심히 담으시는고!

두 분.

대간을 열심히 다니시더니 기량이 무척 좋아지셨더군요.

그저 처음부터 계속 '와우!"만 연발하십니다.

제가 미리 분명하게 말씀드렸죠?

"오늘 단 한 순간도 힘들다는 말 안 나오게 해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다음엔 뭐가 나올까? 어떤 정경이 펼쳐질까?'하는 궁금증과 '여기서 계속 머무르며 이 순간에 빠지고 싶다.'라는 생각들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을 느끼게 해드릴게요"라고.....

자, 중봉으로 오릅시다.

중봉만큼은 조금 힘들 겁니다.

앞에 지나온 치밭목 대피소가 너무 예쁘게 보입니다.

그 뒤가 속칭 비둘기 봉.

그 뒷줄이 동부능선이자 덕천지맥 능선.

중앙 맨 뒤가 황매산.

07:39

이제 300m 남았습니다.

너무 더딘 진행 속도입니다.

07:54

고도를 높입니다.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 보는 지리남동부의 모습.

이제 맨 뒤로 지리동부능선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남해 바다가 훤해지고 .....

07:59

하봉 갈림길에 올라서면서 이제부터 지리동부능선 혹은 덕천지맥과 같이 진행합니다.

아!

중앙 우측의 가야산1433m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구름이 되어 황매산을 덮은 뒤 이곳 지리산으로 날아듭니다.

대화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와우!"라는 감탄사 밖에....

그러고는 염화미소 같은 미소만 빵싯이 짓습니다.

만족!

대만족이라는 얘기죠.

한 마디 건넵니다.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제석봉 그리고 그 좌측의 촛대봉.

그 너머 왕시루봉.

그리고 중앙에 반야봉과 그 좌측 노고단.

그리고 그 노고단 바로 좌측 뾰족봉.

그 봉이 바로 무등산이네요.

"무등산이요? 무등산도 보여요?"

"그럼요. 그 반야봉 좌측의 만복대도 저렇게 가깝게 보이는데 무등산 쯤이야! 만복대 우측으로 뚝 떨어져 흙 같은 게 보이는 곳. 거기가 정령치고 그 바로 우측에 솟아오른 게 고리봉 아닙니까...... 그리고 보세요. 이 바로 앞이 창암능선이니  그 뒷줄기가 덕평봉에서 흘러내리는 오공능선 그리고 그 뒤가 삼각고지에서 내려가는 지리북부능선 아닙니까!"

"아!... 아!...."

그래도 지리산을 몇 번씩은 와 본 분들이라 이름은 알고들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지리북부를 보려면 천왕봉으로 가야합니다. 어서들 갑시다."

사진을 찍고....

산줄기를 물어 보고....

저는 대답을 해주고....

시간은 마냥 흐르고......

"어서 좀 갑시다"

마야계곡.

중봉골로도 부릅니다.

마야계곡이라는 이름은 천왕봉에 있던 성묘사에서 모셨던 성모상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에서 따 온 이름입니다.

지리산 특유의 지모신앙과도 연결이 됩니다.

천왕봉은 마야부인과 위숙황후(고려 태조의 어머니), 반야봉은 마고할머니와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가 모셔집니다.

이렇듯 지리산 만큼은 여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쌍계사의 삼성각에 여신이 모셔져 있는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멀리 남해가도 보고.....

지도 #2

그 좌측으로 조금 전 올라온 능선과 중앙에 치밭목대피소.

우측으로 웅석봉1100m과 그 우측으로 동부능선 그리고 달뜨기능선.....

"웅석봉이요? 처음 들어보는 산 이름이에요. 그리고 달뜨기 능선은 또 뭡니까?"

 

웅석봉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볼까? 이 웅석봉 정상에 곰바위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고도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모든 산이 그렇겠지만 특히 지리산은 신성’, ‘신령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 ‘’, ‘’, ‘고마’, ‘구마등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면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검산’, ‘검암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巖’, ‘劍山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이다. 그 한자어가 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곰바위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봉은 그저 신성스러운 산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헬기장에서 정면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른다. 웅석봉에서 좌측 삼장면과 단상면의 면계가 되어 내려가는 산줄기는 997.5봉을 지나 백운산516m을 지나게 되는데 웅석산 ~ 910.6봉 까지의 구간을 달뜨기 능선이라고 부른다. 예전 빨치산들이 이 달뜨기 능선으로 떠오르는 처연한 달을 보며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즉 하봉 아래의 조개골쑥밭재언저리에 마련한 비밀 아지트에서 덕천강 건너편 웅석봉 남쪽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처연한 달을 바라보는 빨치산들의 한과 설움이 그 이름에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필경 '딸띠기'라 불렀을 그 능선은 지금 오히려 너무 밝은 달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칠선계곡.

좌측이 창암능선 그리고 우측의 짧은 능선이 초암능선.

그 초암능선 좌측의 대륙폭포가 눈에 선하군요.

바래봉은 구름에 덮여 있고.....

천왕봉을 오르면서 중봉을 봅니다.

좌측 아래로 중간에 금대산과 백운산이 등구재를 넘어 삼봉산으로 오르는 모습이 힘찹니다.

그러니 그 우측으로 오도재와 그 우측의 법화산.

그리고 그 뒤로 남덕유에서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라인이 명백합니다.

그 우측으로는 수도산1317m에서 단지봉1327m 그리고 가야산1433m으로 이어지는 황강지맥.....

"도대체 어디를 둘러봐도 장관이 아닌 곳이 없네요!"

말수가 적던 '산골짜기'님의 일성입니다.

08:48

그래서 천왕봉이라는 의미가 여러 개 있을 수 있지만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은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천왕봉이라는 명칭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건대, 이 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철령(鐵嶺) 등이 되었고, 다시 뻗어내려 동쪽으로는 오령(五嶺)팔령(八嶺)이 되고 남쪽으로는 죽령(竹嶺)조령(鳥嶺)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이어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르러 그쳤다. 이 산을 두류산이라 한 것이 이런 연유 때문에 더욱 극명해진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출을 보려 올라왔던 이들도 다 하산을 하고 ...

예기치 않게 천왕봉 정상은 우리 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쭙잖게 천왕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보고....

3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입니다.

배경인 하늘의 구름이 볼만합니다.

천왕봉에서도 제일 높은 일월대를 확인하고....

 

석양 노을을 본 뒤 성모사로 들어가 서로를 베개 삼아 누었다.
바람이 노한 듯이 휘몰아쳐 판잣집을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성모사를 지키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익숙해지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서 우리를 안심시켰다.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日月臺)로 나와 앉아 허사(虛詞) 한 곡주를 쾌연히 연주하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 박장원 두류산기(1643년)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의 출입을 볼 수 있어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 대의 전후좌우에 이름을 새긴 것이 무려 수백 수천이지만 오래된 것은 깎이고 갈라져 판별하기 힘들다. 그 바라는 바는 모두 이름을 남겨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그 이름자가 뚜렷한 것을 손꼽아 헤아려보면 가장 오래된 것도 2백년 내외에 불과하니 처음 2백년 전에 석면에 새길 때에는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앞의 것이 닳아 없어지고 뒷사람이 그 자리에 다시 새긴 것일까?

 

  - 강계형 두류산록(1924년) 

 

여기서 강계형은 엄천, 용유담과 관련한 화산12곡의 강용하의 차남입니다.

이 천왕봉이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이라는 얘기겠죠?

중봉과 하봉 라인.....

다음 지리산은 동강 쪽에서 올라와야겠군요.

동강에서 807.4봉을 거쳐 와불산에서 독바위 쪽 좀 보고 다시 되돌아 나와 새봉으로 온 다음 청이당에서 두류봉 ~ 영랑대 ~ 하봉의 소년대 등을 다시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러고는 문창대와 법계사 삼층석탑을 보고는 중산리로 하산할까요?

성묘사 터도 많이 변했군요.

우측 촛대봉 능선의 시루봉.

그 좌측의 낙남정맥의 삼신봉.

그리고 그 뒤의 호남정맥 백운산 등.

좌측 앞 줄의 촛대봉과 그 우측의 왕시루봉.

무등산, 노고단, 반야봉이 명백합니다.

09:10

칠선계곡 입구를 지나면서 천왕봉에서 빠져나옵니다.

20분 넘게 놀았군요.

아쉬운 마음으로.....

중산리를 보고.....

제석봉은 좌측으로 이어집니다.

봉우리를 좌측으로 돌아 제석봉으로 향해야....

칠선 계곡........

통천문을 지나면서....

저 제석봉도 좌측으로 돌아야죠?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 현 제석봉)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 현 중봉)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정면으로 연하봉을 봅니다.

저 좌측으로 숲을 뚫고 진행하면 제석당터인데 지난 구간 확인했던 곳이죠.

지난 번 찾았던 제석당 터로 잠깐 가볼까요? 

그낭 이한검 대장님과 함께 찾았던 제석당 터에서 그 규모와 제석천이라는 물줄기만 확인했었죠?

위 이대장님 뒤로 '帝釋堂朴魯翊屋壬戌七月日'라고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입니다.

 

간신히 폐허가 된 제석당(帝釋堂) 터에 이르렀다. 천왕봉을 올려다보니 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보다 더 큰 것이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없는 하늘과 같았다. 다음으로 제석봉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나 상봉에 비하면 발돋움을 하여도 미치지 못할 듣하였다. -중략-

저물녘에 제석신당(帝釋新堂)에 올랐다. 이 또한 신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층층이 늘어선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모두 내 앉은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왔다. 앉아 있자니 몸은 풀어지고 마음은 오롯하여, 희이(希夷)의 경지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사에 미련이 없었다.

봉우리 중 가장 높은 것은 영신봉∙좌고대∙영랑봉(永郞峯)∙신녀봉(神女峯)∙반야봉∙무주봉(無住峯)∙백두봉(白頭峯)∙지장봉(地藏峯)∙미타봉이다. 우뚝 솟아 있는 것도 있고, 불쑥 홀로 하늘에 매달린 것도 있고, 구부정하게 몸을 굽힌 듯한 것도 있고, 다소곳이 엎드린 듯한 것도 있어서 뾰족하고 우뚝하고 쭈뼛하고 겹쳐진 모양을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깊숙한 구역은 제석동(帝釋洞)∙나한동(羅漢洞)∙월락동(月落洞)∙대암동(臺巖洞)∙실상동(實相洞)∙엄천동(嚴川洞)∙백복동(百福洞)이다. 구불구불 뻗은 산줄기도 있고 빙 두른 산줄기도 있으며, 확 트여 넓은 골짜기도 있고 뻗어나가다 굽이쳐 되돌아오는 듯한 골짜기도 있었다. 오목하고 휑하고 우묵하고 움푹한 계곡이 푸른빛과 흰빛으로 어우러져 숨김없이 드러나 보였다.

기이하도다. 궁벽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조물주가 빼어난 경관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마침 밤에 된서리가 내려 나뭇잎들이 한껏 붉게 물들고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어, 원근의 지역이 진하게 보이기도 하고 엷게 보이기도 하였다. 마치 천만 겹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충 같기도 하고, 3백 리나 펼쳐진 비단 휘장 같기도 하였으니, 부유하도다. 승려 일원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빈도가 이 산에 머문 지 10년이 다 되었습니다. 매년 가을에 자주 사람들을 안내하여 이 당에 올라 이런 관경을 본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 가을처럼 눈부시게 찬란한 모습을 본 적이 아직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양대박 두류산기행록(1586년)

 

제석당을 향해 오를 때 길이 매우 가팔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기도 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하기도 하였다. 내가 “비록 달아나려 해도 달아날 수 없겠구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전 분이 “도망친 죄인을 잡아오는가?”라고 농담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보이는 곳곳에 매를 잡는 움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매를 잡은 사람 수를 물어보니 한두 사람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아! 움막을 엮고 덫을 설치하여 만리 구름 속을 나는 매를 엿보니, 높고 낮은 형세로 말하자면 현격한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매가 끝내 덫에 걸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제압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됨을 어찌 돌이켜보지 않으랴? 또한 기구를 설치해놓고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끝내 매를 잡는 사람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잡히는 매의 수도 알 수 있겠다.

제석당 앞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온 골짜기에 안개가 짙게 깔리고 바람소리가 윙윙거렸다.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막막하고 어렴풋한 세계에 허다한 생물들이 은연중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할뿐, 인간의 지혜로서는 세세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곳에 올라보니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쪽∙서쪽 방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곤히 한숨 자고 난 뒤 저녁밥을 먹었다.

제석당의 규모는 제법 넓어 들보의 길이가 거의 23~4자 정도나 되었다. 좌우의 곁방을 제외하고 가운데 삼 칸의 대청이 있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흙을 바르지 않고 판자로 둘러놓았다. 다시 지은 연유를 물었더니,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약한 노파의 힘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순식간에 큰일을 이루었으니, 미혹되긴 쉽고 이해하긴 어려운 사람 마음에 대해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5일(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 박여량  두류산일록(1610년)

 

이하 도솔산인 이영규 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러던 제석당이 폐허가 되었고 다시 시간은 20세기로 넘어옵니다.

개벽 제34호에 실린 지리산보(1952년 4월 1일 刊)를 보면,

현재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의 편리를 키 위하야 山上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開山式하랴 한다. 本山이라 할지.

라고 게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까지도 이곳에 제석당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제석봉 부근의 주목이 정원수는 물론 일반 가구의 재료로 한창 인기가 있던 시절이라 쇠파이프를 레일 삼아 소가 끌어 내렸던 시절이라니....

그러니 결국 이승만 정권하에서 부를 누리던 정권의 실세가 연루된 도벌꾼이 제석봉에 불을 놓아 증거인멸을 획책할 때 같이 소실된 것 같습니다.

# 참고사진, 도솔산인 이영규님이 찾아 공단에 제보한 각자刻字.

 

'帝釋堂朴魯翊屋壬戌七月日'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즉 박노익이 임술년 7월에 건립했다는 것이죠.

그 옆의 제석천이 있습니다.

이 제석천의 본 이름은 감로천이었습니다. 

확대시켜 보면,

 

그 탁본입니다.

감로천이라는 글자가 명백합니다.

 

향적사터로 내려가는 길을 잠시 보고 장터목 대피소로 들어가 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고는 그걸 안주 삼아 가볍게 한 잔 합니다.

10:54

마천 쪽은 아무 것도 보이는게 없어지고....

50분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이제 연하봉이 남았죠?

11:06

예전에는 일출봉이라는 팻말이 있었는데 드디어 떼어냈군요.

일출봉은 웬 일출봉?

사실 예전에 제일 헷갈리던 이름을을 가졌던 봉우리가 바로 이 일출봉이었습니다.

지리산에서 천왕봉 다음으로 일출의 제 맛을 볼 수 있었던 곳.

그래서  야영이 허용된 시절에는 장터목 산장이 비좁을 경우 아니 일부러라도 이곳으로 올라 야영을 즐겼습니다.
굳이 주봉인 연하봉과 구별하자면 장터목 직전에서 살며시 솟은 봉우리.
야영이라는 단어를 지리산꾼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제거하려했나요?

이제 그 흔적까지 없앴습니다. 

 

일출봉 연봉.

촛대봉과 연하봉.

.................

연하선경.

제석봉과 구름에 덮힌 천왕봉.

괴암.

일출봉 일대.

뒤를 돌아보고.....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야죠.

그저 즐길 뿐!

연하봉과 천왕봉.

..................

촛대봉과 구름에 가린 영신봉.

12:13

그러고는 촛대봉입니다.

천왕봉은 완전히 가렸고.....

한신계곡이 그 이름을 갖게된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아울러 운장바위에 대해서도 설명해 줍니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영신봉은 지리산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그러니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올라오는 사람들은 이곳 시루봉甑峰1703.1m(지금의 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어요. 그 민초들이나 무속인들 중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다고 하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사람들은 저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니 우리가 올라온 '한신계곡'이란 지명은 바로 저 한신바위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증봉(甑峯, 현 촛대봉)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源, 세석고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坑]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세석을 세석답게 보려면 아무래도 촛대봉 능선에서 보는 게 제일입니다.

몇 명의 산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내려가지를 않아 목책 안으로 진입을 하지 못합니다.

이 촛대봉은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아마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 중 가장 많은 이름을 갖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을 보면,

 

45일 갑술일.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높이 솟은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은 위에 있어,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곳에 있고 종들은 높은 곳에 처하게 되었다.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인데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 사자봉은 촛대봉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도솔산인님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역시 불교식 이름으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탔다는 대서 유래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사자 한 마리 안 사는 우리나라에 웬 사자봉?"이라고 했던 의문이 비로소 풀립니다.

한편 김종직과 하달홍은 이 촛대봉을 중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특히 김종직은 증봉甑峰이라고도 부른다고 했으며,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 송병선은 촉봉燭峰 그외 시루봉, 수리봉, 취봉鷲峰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이 그것입니다.

일행들과 함께 벽소령까지 가서 음정으로 하산을 하려했는데 별 의미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귀가 시간이 더 늦을 것 같습니다.

12:20

세석대피소에서 점심 겸 송별식을 하기로 합니다.

오늘 저녁에 마실 소두 좀 나눠 마십니다.

송별주 치고는 너무 거창하고...

이제는 대피소에서의 음주는 남들 눈을 의식하여야 하니 그거 하나는 좋습니다.

 

그 좌석에서 오고간 한 마디.

"오늘 분명 제가 단 한 순간도 힘들다는 말 안 나오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각설하고 힘드신 적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구동성 "만족에 대만족!"

"오늘은 어디를 둘러봐도 장관이 아닌 곳이 없었어요."

"경치도 경치지만 봉우리나 산 하나하나에 얽힌 얘기 듣다 보니 너무 긴장되고 집중되고 그러다 보니 힘들만 하면 또 환희의 감탄사를 연발해야 했고...."

예, 분명히 약속을 지켰습니다.

해단식 할때 또 멋진 얘기가 오고가겠죠?

딱 한 시간을 채우고 13:20 아쉬운 이별의 악수를 나누고 저는 한신계곡으로 그분들은 오늘의 시착지인 연하천 대피소로 갑니다.

저의 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신바위를 정탐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산하면서 지난번 못 본 한신계곡의 정경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13:29

등로에서 좌측으로 벗어나 한신바위로 접근합니다.

평범한 길입니다.

바위는 그저 그런 것.....

기어 올라갑니다.

바위의 상단 부분은 길이 약 30m 정도 되는데,

천왕봉까지 조망이 가능합니다.

우측 촛대봉.

삼신봉의 낙동정맥과 호남정맥의 백운산.

폭은 약 5m 정도 되는 아주 큰 바위입니다.

아!

안타까운 죽음을 봅니다.

1994. 5. 29.

대구분이군요.

벌써 24년 전.....

잘 생겼습니다. 

지도 #3

지난 번 날이 밝으면서 보았던 실폭.

이런 연폭은 폭포같지도 않고.

이런 길을 올라왔었나?

새벽에만 다니다 보니 기억에 없습니다.

14:26

이런 폭포는 폭포 같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제가 바로 며칠 전 칠선계곡을 다녀온 데 있습니다.

"이래 봬도 나 칠선계곡 다녀온 사람이야!"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시큰둥......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나들이 폭포 지나 두 물이 합치는 곳이라고 하는데 계곡이 보이지도 않아 부득이 그바로 아래의 곳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탁영지소纓之所를 상정합니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이렇게 지리산 산행을 마친 점필재는 이 탁영지소에서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이른바 하산음下山吟입니다.

 

杖藜纔下山 :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서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 : 여정을 함께한 사람(제자)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우리가)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

.............

15:03

거의 다 왔군요.

세석길을 나서고......

15:31

주차장으로 들어서려는데 버스 한 대가 막 나옵니다.

달려가니 차를 세워주는군요.

무조건 인월로 나갑니다.

거기서 씻을 수도 있고 버스나 기차를 탈 수도 있으니 .....

인월버스정류장으로 전화를 걸으니 16:05에 남원으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다고 합니다.

Korail 앱을 여니 남원- 광명 KTX가 17:26에 있는데 좌석이 없군요.

그냥 입석을 예매할까 하다가 인월에 내리려는데 좌석 하나가 뜨는군요.

잽싸게 자리를 예약하고 16:03에 인월에 내려 버스를 갈아탄 다음 남원으로 갑니다.

16:40에 남원 터미널에 내려  바로 앞에 있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은 후 남원역으로 가니 열차가 들어옵니다.

19:15에 광명역에 도착하여 지리산으로 전화를 하니 방금 연하천에 도착하여 저녁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하는군요.

이 글을 쓰는 시간이 16:19.

궁금해서 전화를 거니 화엄사로 하산 후, 구례로 나와서 삼겹살집에서 뒷풀이를 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전원 무사히 하산하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