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리산입니다.
두 달 전입니까?
여름도 한창이던 8. 11.
국골에서 피서를 즐기고 귀경을 하기 위해 들른 인월터미널.
거기서 대전의 늑대형님을 만났습니다.
지리산을 내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구석구석 샅샅이 훑고다니는 분.
당연히 산꾼으로서의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두 달 후 지리산의 색깔이 바뀔 때 쯤 지리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그날 지리산 산living 지식인 도솔산인 님이 함께 하신다는군요.
반가울 따름입니다.
그 약속은 10. 12.로 정해졌고 어김없이 그 날은 다가오는군요.
그렇게 12일 토요일 저녁을 늑대형님과 치밭목대피소에서 지낼 것이니 그날 오전은?
그때 도솔산인 님을 만날 것이니 그렇다면 그 분이 개통한 '점필재길'을 보고 그곳에 접근하기 위한 루트는 서산대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벽송사 능선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점필재 루트를 타고 진행하다 하봉헬기장에서 좌틀하여 치밭목대피소로 향하는 게 미답인 루트를 답사하는 신선한 맛도 있으며 거리를 조금 더 단축시킬 것도 같군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전체 구간이 거의 비탐구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러다 비탐 전문가가 되는 거 아니야?'라는 자조 섞인 자문자답을 해봅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즉 지리산이라는 큰 틀을 놓고 생각하자는 겁니다.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입니다.
굳이 육당 최남선의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詩)며 정신입니다. 문자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육당의 이 '산하' 자리에 바로 '지리산'이라는 고유명사로 치환한다고 하면 그 뜻은 크게 변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지리산!
그 지리산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가령 산꾼이든 학자든 글쟁이든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라면 자연은 보호되고 동식물의 개체는 증식할 지 몰라도 지리산의 역사, 철학, 시 그리고 정신이 조금은 퇴색될 것만 같습니다.
오랜만에 1무1박3일로 계획을 세웁니다.
바쁜 와중에도 동생이 토요일 하루를 할애해 주겠다고 하니.....
2019. 10. 11. 23:50 버스를 타기 위해 남부터미널로 갑니다.
장거리 택시 손님을 태우기 위해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는 여전하고......
단풍철이어서 그런가요?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마다 만원입니다.
정시에 출발한 버스는 인월을 경유하여 03:25 마천정류장에 도착합니다.
03:31
지리북부능선에 보름달이 환하게 걸렸고.....
날이 훤해지기를 기다리며 걸어야 하니 굳이 택시를 불러 벽송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걸어가기로 합니다.
지도 #1
03:52
의탄교로 임천을 건넙니다.
의탄교를 이용하여 람천을 건넌다. 그리고 마천면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이 물을 임천으로 불러야 한다. 이곳 주민들이 예전부터 부르던 이 물 이름이 바로 임천이다. 임천 부근의 지금 모습은 기록에 나오는 풍경과 사뭇 다르다. 예전과 달리 수차례의 홍수나 태풍 등의 여파로 넓어진 강폭으로 수량이 그리 많지 않게 느껴지는 임천을 건너면서 좌측으로 창원리 채석장에서 조성 중인 석불을 보게 된다. 물을 건너면서 저 임천의 어느 돌이 예전 그 ‘노디돌’이었는가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 의중동 등으로 형성된 의탄마을이다. 이 부근 마을이 조성된 경위를 찾아볼까? 살펴보면 마천면의 군자리나 덕전리의 ①백무동은 ‘마고할미’가 백百 명의 자식을 무당巫으로 보냈던 바, 이들과 접신을 위해 찾는 새내기 무당들과 치성을 드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도꾼들을 위하여 세워진 마을이다. 산내의 ②입석리는 실상사의 사하촌으로 그리고 이 함양의 ③의탄리나 금계동은 벽송사, 금대사, 안국사 등의 사하촌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그렇게 형성된 마을에 이런 저런 이유로 흘러들어온 피란민들이 함께 자연스럽게 모둠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지리산 주위의 여느 마을이 안 그러겠냐마는 이 의탄마을은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540년 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을 보고는 바로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점필재를 잠깐 만나볼까? 항상 지리산행에 목말라 하던 그가 함양군수로 부임한 해가 1470년이다.
무릉도원이라 여겨졌던 의탄마을
그래서 그는 1472년 음력 8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도착한 이 의탄마을은 그를 유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점필재는 동행했던 유호인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와 어우러져 으뜸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1611년 4월 3일 남원부사로 근무하던 어우당 유몽인도 인월쪽에서 백장암 ~ 군자사를 거쳐 지금의 송전리 부근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어름터의 두류암에 들렀다가 천왕봉을 가는 도중에 이 의탄촌을 지나면서,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며 점필재를 회상하기도 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18쪽
둘레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직진하는 도로 위의 이정표에 낯익은 지명들이 눈에 들어온다. 추성은 지난 구간 자세히 봤고 그 아래 칠선계곡과 서암정사, 벽송사 등 귀에 익은 사찰 이름을 보게 된다.
칠선계곡의 명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이곳에서 거론하는 것이 오히려 새삼스럽다. 계곡 트레킹으로 이름 높은 울진의 응봉산999m의 덕풍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장의 길이를 가진 곳이 바로 이 지리의 칠선계곡이다. 또한 설악산 천불동계곡 그리고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는데 주저하는 이가 없다. 천왕봉에서 의탄에 이르는 약 18km의 등로인 칠선계곡은 제4부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 졸저 전게서 120쪽
임천....
그리고 신 의탄교.
본선本線은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경유하여 부용암도 보면서 지리북동부의 산줄기 중 하나인 벽송사 능선도 잠시나마 맛보며 걸을 수 있는 루트이다. 단조로운 의중마을~모전마을의 지선 구간보다는 역사의 한 장을 맛본다는 점에서 일단 벽송사 루트를 따라가 본다.
- 졸저 전게서 120쪽
의평마을을 지나 지리산둘레길의 벽송사 본선을 따릅니다.
그 길은 곧 마을과 벽송사를 잇던 소위 옛길로 마을 사람들은 불공을 드리거나 지리산으로 사냥이나 임산물 체취를 위해, 스님들은 탁발이나 만행을 위해 지나던 길이었을 겁니다.
04:35
이 각자를 보면 서암정사에 거의 다 온 것이죠.
벽송사로 들어가는 둘레길은 사실 옛길로 산의 사면을 따라 가는 좁은 길이다. 의평동에서 추성리나 벽송사를 잇는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뚜렷한 이 길이 마을 사람들과 절의 스님의 통행을 도와줬으리라. 부처님 말씀이 팍팍한 생활에 하나의 빛이 되기를 갈구하면서 지났을 그들의 마음이 집채만 한 바위에 각자한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는 글씨에 담겨져 있는 것만 같다. 퇴색한 간판의 안내글에도 그런 취지의 글이 적혀있다.
- 졸저 전게서 121쪽
04:39
서암정사입니다.
해우소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서암정사는 색다른 사찰이다
<사진 3〉 서암정사의 석물들. 볼거리가 아주 많은 사찰이다.
좌측으로 몇 단 안 되는 계단에 올라서면 너른 주차장이 나온다. 서암정사瑞嵓精舍는 예상 외로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다. 깔끔한 표지석 안으로 들어서면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어삼천계御三千界라고 쓰인 두 개의 석물이 우측의 사천왕을 새긴 부조와 함께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즉 百千江河萬溪流 백천강하만계류 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냇물,
同歸大海一味水 동귀대해일미수 바다에 가니 한 물 맛이로다.
森羅萬象各別色 삼라만상각별색 삼라만상 온갖 모습이여,
還鄕元來同根身 환향원래동근신 고향에 돌아오니 본래 한 뿌리이니.
셀 수 없이 많은 강과 하천도 바다로 들어가면 하나가 되듯, 삼라만상도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하나라는 뜻이니 이제부터 화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라는 의미 같다.
대방광문이라는 석문은 일주문 역할을 하는 듯하고 그 안으로 펼쳐지는 대웅전이나 금니법당, 석굴법당 등은 오히려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 절을 창건한 원응 구한 큰스님은 원래 이웃한 벽송사에서 행자생활을 거쳤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지금의 이 서암정사 자리에 오니 이곳의 상서로운 바위를 보고는 어떤 인연을 깨닫고 불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유난히 민족의 비극이 치열하여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지리산에서 바로 이곳을 억겁의 인연과 대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인연지因緣地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정면으로 금대암과 금대산904.1m을 보면서 좌측으로 창암산924.9m 아랫자락에 있는 두지터도 볼 수 있다는 게 산꾼들에게 있어 서암정사가 갖는 자랑이다. 대웅전 뒤의 현판에 쓰인 진공묘유眞空妙有 즉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니 모든 것이 실체가 없으면서 존재하는 모양’이라는 글이 범상치 않게 들린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는 다른 말인가?
- 졸저 전게서 121쪽
04;56
그러고는 벽송사로 오릅니다.
벽송사의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강원인 청허당을 봅니다.
서암정사를 나와 좌측 된비알을 따라 오른다. 우리나라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자처하는 벽송사로 오르는 길이다. 경암의 벽송암기에 의하면 벽송사의 창건주 벽송대사가 스승인 법계정신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지 삼 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절을 짓고 벽송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때가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얘기들이 들려온다.
가령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수행을 하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숙종 30년(170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환성대사가 중건하였다.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이기도 한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는데 국군이 야음을 타 불시에 기습, 불을 질러 당시 입원 중이던 인민군 환자가 많이 죽었다. 이때 다시 법당만 남기고 사찰이 소실되면서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 지금도 절터 주변을 일구면 인골이 간혹 발견된다고 한다.
사실 벽송사는 실상사와 더불어 지리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러니 벽송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1520~1604) 휴정이다. 이 절집의 청허당은 강원講院으로서 휴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하였다. 위 벽송대사가 선종 60조이니 서산대사 휴정은 그의 법손격인 62조이다. 많은 선사를 배출한 절집이라는 얘기이다. 서산대사하면 빠뜨리기 어려운 게 바로 삼가귀감三家龜鑑이고 단속사며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삼가귀감三家龜鑑부터 볼까? 삼가三家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禪家, 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하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이들을 토대로 세 권의 귀감을 썼다. 하나가 선가귀감禪家龜鑑이고 둘이 도가귀감道家龜鑑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儒家龜鑑이다. 서산대사는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이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과 본성이 그대로 부처(선가), 성인(도가), 군자(유가)임을 깨닫게 하고자 저술하였던 것이다. - 졸저 전게서 123쪽
04:57
본격적으로 산길로 오르기 전 사찰 우측에 있는 누각을 봅니다.
벽송사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미인송과 보물 제474호 삼층석탑을 보고 벽송사를 빠져나오려는데 좌측으로 누각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장승 두 기가 서 있다. 예전에는 사찰 밖에 서 있던 것을 청허당 바로 뒤로 옮기면서 각閣을 세웠다. 좌측 장승은 금호장군禁護將軍, 우측 장승은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명찰을 각 달고 있다. 이는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를 막는 이른바 토속신앙의 비보裨補역할을 수행하는 신장상神將像이다.
그러니 이는 ‘법우화상’의 설화와 실상사 입구의 상원주장군 등의 석장승과 함께 지리산의 토착적 고유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이 장승은 우리나라의 산신숭배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이 신앙은 잡신을 거쳐 수목신앙樹木信仰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단군의 신단수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마을 어귀의 ①솟대나 ②장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③서낭당으로 발전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솟대는 삼한 시대의 소도蘇塗의 다른 말로서 개인이 가정에서 임시로 세우는 신간神竿이나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세우는 것도 있겠지만 삼한시대에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비록 도망자라 할지라도 체포할 수 없다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는 취지의 기능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신의 역할도 하게 되었고 수살목水殺木도 되었다.
또한 수목신앙은 장승으로도 발전하게 되는데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하여 마을 입구(벽사辟邪장승), 사찰 입구(사원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곳(비보장승)에 많이 세웠다. 사실 보통 장승이라면 이정표나 마을의 수호신, 사찰의 경우에는 경계표지의 역할(노표장승)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장승들도 지리산으로 오면 그 역할이 달라진다. 즉 불교가 지리산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민속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인데 가령 실상사의 석장승 3기나 벽송사의 목장승 2기 등이 토속신앙과 불교를 이어주는 예이다.
한편 남창 손진태(1900 ~ ? )는 선왕당이나 적석단을 누석단 즉 서낭당으로 명명하면서 “(서낭당은) 고대의 산신사 또는 산신제단이며 또 길 가는 이의 부적이기도 했으며, 마을 간의 경계였으며 그 자체로 신神이기도 했다.”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지리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누석단 즉 서낭당의 신과 산신은 여신이고 성황신이나 칠성신은 남신으로 이해하면서 전자는 우리 고유의 신이며 후자는 중국 전래의 신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좀 주의할 게 있다. 이렇듯 지리산신은 여자이어서 이에 터 잡아 성모신앙이 발전하게 된 것인데 제석봉의 제석당 만큼은 남신인 천신을 섬겼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부계 사회의 산물로 지리산도 고조선 이전 부족사회의 성모를 섬기는 모계사회에서 천신을 섬기는 부계사회로의 변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니 천왕성모는 그 전환기의 민간신앙으로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126쪽
이제부터 산길로 접어듭니다.
05:15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지리산 둘레길에서 벗어나 순수한 벽송사능선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면서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에서 벗어나 휴천면을 만나면서 이제부터 마천면과 휴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좌틀하여 그 면계를 따른다면 지리산의 명소 용유담으로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죠.
龍遊潭이라....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의 유원지 역할을 했던 이 용유담은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죠.
지리산 유람의 명소였던 용유담
고개 하나를 넘으면서 한결 뚜렷해진 길을 따르면 이제 마천면을 지나 휴천면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좌측으로 너른 강물이 보이게 되니 이곳이 바로 임천이다. 아니 이곳이 바로 용유담이니 여기부터는 엄천이라 불러야겠다. 지금은 폐사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동강마을 맞은편에 엄천사라는 큰 절이 있어 이곳 주민들은 예전부터 임천이 아니고 엄천이라 불렀다. 엄천사하면 법우화상이 떠오르고 마적도사가 연상된다. 그리고 용유담이 있었으니 부근에 용(유)당이라는 당집도 있었다.
용유담과 용(유)당에 관한 선인들의 글을 볼까? 용유담이 지리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조구명 1724)‘
그러니 토속신앙을 주재하는 무속인들은 이곳의 용유당을 제1차 기도터로 생각했고 이곳에서 기도발이 먹히지 않으면 백무당이라는 하당으로 갔고 거기서도 안 풀리면 제석당이라는 중당이 있는 제석봉으로 그러고도 안 되면 성모사라는 상당이 있는 천왕봉으로 간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입문 단계 무속인들이 찾아야 하는 곳이 이 용유당이라고 하면 백무동의 당집들은 초급, 제석당은 중급 그리고 상당인 성모사는 고급 정도 수준을 갖춘 이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런 토속신앙의 요람이라 할 이 용유담에서 불교가 들어오면서는 어떤 변화가 일었을까?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긴 하지만 민속학자인 이능화(1869~1943)의 조선무속고를 보자.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면 한 손으로는 금속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는 그림 부채를 가지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또 법우화상法祐和尙을 부른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다.
옛날 지리산智異山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法祐和尙이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이 대단했다. 하루는 한가로이 있는데, 갑자기 산의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물이 흘러온 곳을 찾아 천왕봉天王峯 꼭대기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면서 인간세계에 유배流配되어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의 술법術法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중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딸 여덟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다. 이들에게 무당의 술법巫術을 가르쳤는데, 금속방울을 흔들고 그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창하고 또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다니면서 무당의 일을 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 번 지리산 꼭대기로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하고 접신接神을 해야 한다고 한다.
위 법우화상은 앞서 얘기한 엄천사를 창건한 '국사'라고 칭해지는 승려이다. 그리고 엄천사는 조금 전 본 점필재의 글에 나오는 '엄천리'라는 곳에 있었다고 하고,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1/50,000 지도의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엄천교’ 부근 '절터'라는 지명이 바로 그곳이다.
이 법우화상의 일화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가를 보여준다. 즉 불교는 우리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면서 조화로움을 택한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 실상사 앞의 석상이나 장승, 조금 전 본 벽송사의 목장승 등이 다 이렇게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화해 혹은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모든 사찰에 삼성각, 칠성각을 둔 것이나 당집에 불상을 모셔 놓은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이륙의 유지리산록(1463)을 보면 "산 속에 있는 여러 절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성모에게 제사하지 않는 데가 없다."고 쓴 흥미로운 대목 역시 이러한 점을 반증해 준다.
<사진 6〉 다양한 모양을 한 용유담의 바위. 인터넷에서 가져왔다.
그나저나 용유담이란 곳이 어떤 곳인데 이렇게 많은 풍류가객들이 이곳을 노래했을까? 용유담은 조선 말 유학자인 강용하(1840~1908)의 화산12곡에 나오는 지명 중 1곡에 해당하는 곳이다. 즉 1곡인 용유담부터 시작하여 12곡인 엄천강 하류의 함허정에서 끝나는 절경을 노래한 시에 나오는 지명이다. 여기서 화산은 물론 법화산이다. 법화산은 법화경 즉 묘법연화경에서 따온 불교 용어인데 아무래도 유학자들이 불교적인 냄새를 지우고자 화산이라 불렀던 것 같다. 참고로 보통 마을의 진산을 화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진산을 꽃봉우리에 비유하는 의미에서 많이 붙였다. 이 화산花山을 좀 더 화려하게 부르려 화산華山이라 부르거나 아예 비단으로 두른 산이라고 하여 금산錦山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 강용하의 무산유집武山遺集 화산12곡에 나오는 지명은 각 그 부근의 바위에 각자刻字되어 있다. 그러니 그 각자刻字 바위를 찾으며 강 하류로 내려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이 각자와 시에 속에 숨겨져 있는 일화나 설화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그 기쁨을 배가 시켜준다.
- 졸저 전게서 129쪽
지도 #2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입니다.
어름터로 내려가는 길이죠.
05:42
756.9봉을 지나 지도 #2의 '나'의 곳입니다.
이곳부터 비탐구간이 시작되는군요.
아무쪼록 이글의 일부분이 지리산의 사료를 남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06:41
이제 날이 밝아 헤드랜턴은 가방 안에 넣습니다.
그러고는 997.5봉 바로 아래에 있는 조망터로 내려갑니다.
제일 먼저 우측으로 두류능선이 보입니다.
좌측에 구름에 살짝 가린 두류봉1617.4m과 그 우측의 영룡봉1478.8m이 명확하게 보이는군요.
영룡봉 앞으로 향운대 능선이 우측으로 내려오고,
두류봉 우측으로 국골사거리 부근이 보이고 그곳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쑥밭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좌측으로 소위 '옛길'로 두류봉에서 바로 청이당 계곡으로 내려오는 능선도 보이고.....
그러니 저 영룡봉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국골사거리에서 이 앞으로 내려와 좌측으로 이어져 이를 산경학山經學으로 이야기하면 곧 덕천지맥이요 지리산으로 좁혀 이야기하면 바로 지리동부능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 좌측으로 눈을 돌리면,
좌측이 새봉1322.3m이고 그 우측 안부를 지나 산청(진주)독바위도 보이는군요.
저 새봉은 앞으로 원래의 이름인 초령으로 불러줘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이따 초령草嶺에서 하기로 하죠.
쑥밭재 뒤로 써리봉 능선과 중봉이 보이고....
두류능선 우측으로 영신봉이 보이고 그 우측의 반야나 토끼봉 등은 구름에 살짝 가려졌군요.
20분 정도 농땡이를 치다 자리를 뜹니다.
07:42
고마운 안내글.
여기서 좌틀하여야 와불산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와불산이라....
말 그대로 臥佛山이니 부처님이 입적을 할 때의 누워 있는 모습을 한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한 봉우리라는 얘깁니다.
이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사찰로는 견불사이며, 마을로는 견불동입니다.
그러니 이 모습은 멀리서 봐야 제 모습을 볼 수 있지 사실 이 봉우리에서는 그냥 감만 잡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그저 1164.9로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오류입니다.
일단 올라가 보죠.
07:47
와불산1164.9m에서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제가 앞으로 말년을 보낼 곳인 중황마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등구재니 삼봉산이니 법화산...
주절주절....
바로 아래 솔봉능선이 보이고...
그 뒤로 임천 건너 법화산992.9m이 보이니 그 좌측이 오도재 건너 임천지맥의 삼봉산1186.7m입니다.
그 좌측으로 투구봉1032.5m도 보이지만 우측 멀리 남덕유나 금원산 등을 보려는 건 아직 욕심입니다.
그 삼봉산 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좌측 앞으로 등구재 넘어 백운산으로 내려와 금대봉이 되고....
그리고 그 뒤로 지리서부능선의 맹주 바래봉1186.2m과 덕두산1151.5m이 보입니다.
법화산의 저 능선은 산천의 금서면과 만나는 곳으로 진행하게 될 테고....
아!
그리고 조금 이따 만나게 될 독녀암獨女巖.
예전에는 함양독바위라고도 불렸죠?
-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
이따 다시 봅니다.
왕등재봉과 이어지는 왕산과 필봉산.
그리고 그 뒤의 남강지맥의 황매산.
그만 나가죠.
08:10
지도 #2의 '다'의 곳인 삼거리입니다.
우틀하면 초령으로 가서 덕천지맥에 접속하게 되고 좌틀하면 독녀암이나 꽃봉산으로 진행을 하게 되니 아주 중요한 삼거리입니다.
그리고 도솔산인 이영규님의 이른바 '점필재 루트'와도 이곳에서 접속하게 됩니다.
가방을 놓고 비무장으로 진행합니다.
08:11
상내봉입니다.
이 바위 봉우리와 와불산에 대해서 이견이 많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나 일반 등산 지도도 혼란스럽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정리해 볼까요?
와불산臥佛山은 미타봉彌陀峰이다
<사진 8〉 인터넷에서 퍼온 겨울의 와불산 정경.
한편 독녀암 뒷 라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지도를 보면 와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와불산은 말 그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한 산이라는 것인데 그 참모습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송전리의 견불사이다. 마을로는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동네가 바로 휴천면 문정리의 견불동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보기에는 견불사見佛寺를 따라오기는 어렵다. 어쨌든 견불사니 견불동이니 하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고 저 와불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표기된 와불산에 대해서 논의가 있다. 와불산의 위치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와불산을 상내봉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또 국제신문이나 부산일보 산행 안내 개념도에는 1164.9봉에 상내봉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며 2003년도 제작한 ‘사람과 산’ 지도에는 삼거리 부근을 상내봉으로 표기하고 있는 등 제각각이다. 어찌된 일일까?
먼저 옛 선인들은 이 부근의 지형을 어떻게 봤을까? 선조들이 부른 이름 그대로 불러주면 될 것이니 꼼꼼하게 산행 기록을 챙긴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산록’을 보는 게 아무래도 믿음이 간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문제의 대목이다. 의론대 삼반석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향로봉과 미타봉이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 봉우리가 다리 밑에 있었다.”는 말은 점필재가 산행기를 작성할 때 착각 내지는 착오로 인한 표현 같다. 실제 현장에 임해보면 의론대 앞의 능선은 벽송사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그 능선에는 문제의 석봉 이외에는 이렇다 할 봉우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청군에서 촬영한 와불산.
좌측 사진의 A는 1164.9봉이며, B는 덕천(웅석)지맥의 새봉에서 가지를 치는 벽송단맥에서 독녀암 능선을 가지 치는 삼거리 좌측의 1213.9봉으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와불산으로 표기된 봉우리, C는 1193.3봉 그리고 D는 독녀암1117.5m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처님이 입적할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는 명백하게 ‘A'의 곳이다. 굳이 와불산이라고 한다면 A'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함양군에서도 이 1164.9봉에 ‘臥佛山1161m’라는 정상석을 세워놓기도 하였었고 그 들머리에는 누군가가 ‘와불’이라고 바위에 표기까지 해 놓았으며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부처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니 ‘1164.9봉=와불산=와불’이라는 데 별 의심이 들지 않는다.
한편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편에 보면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는 까닭에 무릇 이 열두 곳의 명산을 사찰이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고 적었을 만큼 우리나라의 산 이름은 불교식 이름이 많다(불교지명설). 산에 사찰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모습같이 생긴 봉우리도 승려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으리라.
일반적으로 부처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통상 부처님이라고 하면 과거불인 비로자나불과 현생불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미래불인 아미타불로 구분되는데 이 아미타불을 그냥 미타불 즉 미륵불로도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승려들 특히 점필재 김종직의 산행에 지로승 역할을 하고 있는 해공과 법종은 당연히 미타봉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1164.9봉=와불산=와불=부처바위=미타봉’으로 보면 될 것이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미타봉은 해결되었다. 문제는 의론대에서 본 두 개의 봉우리 중 이제 남은 향로봉이다. 그리고 이 향로봉은 점필재가 한꺼번에 거론한 만큼 두 봉우리는 인접한 봉우리에 있어야 한다. 실제 산행에 임하면 위 참고도의 1213.9봉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오뚝이같이 생긴 바위가 뚜렷하게 조망처 역할을 하고 있다. 혹시나 그 위로 안개구름이 피어오르거나 사람이 올라서서 두 손을 뻗는 모습을 한다면 영락없이 향로와 같은 모양새이다. 그러면 산 이름으로서의 향로봉과 상내봉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문제는 이곳이 경상남도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힌트는 지리남부능선 상에 있는 악양의 진산 형제봉이 주었다. 즉 형제봉을 성제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경상도 사투리가 '형>성' 같이 ‘ㅎ’이 ‘ㅅ’으로 음운변화를 일으킨단다. 그러니 향로봉도 향로봉>상로봉>상내봉’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쉽게 수긍을 할 수 있다.
<사진 10〉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와불산 주변.
정리를 하자면 ‘A’는 와불산=와봉=미타봉=1164.9m, ‘B'는 지금 부르는 대로 향로봉=상내봉=1213.9m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C'는 1193.3봉 그리고 'D'는 그대로 독녀암으로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111쪽
08:22
갈리길에서 우틀하고.....
08:30
그러면 안락문이라는 각자를 두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극락정토가 안락安樂이니 그곳으로 드는 문이라는 애기 같습니다.
Stairway to Heaven 정도가 되려나?
이곳을 통과하면,
아까 와불산에서 보던 함양독바위 즉 독녀암이라는 바위 5개로 이루어진 바위를 보게 됩니다.
08:36
독녀암입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암(獨女巖)이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척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기거하면서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 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 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 점필재 김종직 전게서
독녀암을 두고 산 아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각각이다.
산청 쪽의 화개 사람들은 상투를 닮았다고 상투바우라 하고,
함양의 휴천사람들은 독아지를 닮았다고 장독바우라 부른다.
또 한 마천 쪽 사람들은 筆鋒이라 부르기도 하기에
마천의 60번 도로 위에서 확인해 보니 붓끝을 닮기도 했으나
가장 두드러진 형상은 유림 쪽에서 본 상투 모양의 독바위 모습이다.
일반적인 상용어는 동부능선상의 진주 독바위와 구분을 위해 함양 독바위라 부르고 있다.
- 지리 99팀. 가객 님 글
독녀암을 빠져나와 좌측 길을 따릅니다.
잠시 솔봉 능선에 있는 의론대와 선녀굴 그리고 고열암터를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08:51
그러고는 의론대입니다,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 점필재 전게서
오늘 새벽 지나온 벽송사 능선 뒤로 창암산924.9m이 아주 높게 보입니다.
그 뒤로 두류능선이 흘러내리고 있고....
두류능선과 저 창암능선 사이로 국골과 칠선계곡이 있을 것이고....
솔봉.
그리고 이 솔봉능선과 좌측의 벽송사능선 사이에는 선녀굴골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점필재는 이 의론대에서 향로봉과 미타봉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고 했던 바, 이는 졸저에 설시한 대로 오기일 것이니 좌측으로 보이는 저 와불산이 미타봉 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향로봉은 나무에 가려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여기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고 이따 현장에서 확인토록 하죠.
창암능선 뒤로 지리북부능선의 영원령과 영원봉1290.5m이 보이니 그 좌측 뒤로 뿌옇게 반야봉이 보이는군요.
좌측으로 빠져 조금 더 내려갑니다.
의론대 바로 아래에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1933~2004)이 은거하고 있던 곳인 선녀굴이 있다. 선녀가 살았어야 할 선녀굴이 이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굴이 되었다는 자세한 얘기는 7구간에 있는 그녀의 고향인 삼장면 내원리 안내원에 가서 들어보자.
- 졸저 전게서 145쪽
지도 #2의 '라'의 곳에서 좌틀하여 조금 더 들어가면,
09:08
좌측으로 큰 바위 아래로 굴이 하나 보입니다.
이곳이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과 그의 일행 2인 등 3인이 숨어 있던 곳입니다.
석간수가 괴어 있고....
이 수많은 희생자들 중 세인들의 기억에 떠나지 않는 인물이 정순덕이라고 하면 좀 지나칠까? 제5구간 점필재 루트를 걸을 때 의론대 바로 아래에 있던 선녀굴이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1933~2004)의 은신처라고 할 때 잠깐 얘기했던 그 정순덕이 바로 이곳 사람이다.
정순덕은 누구인가?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도 더 깊숙이 들어가면 안내원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이 정순덕의 고향이다.1949년 그녀의 나이 16살 때 반란군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온다.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를 그 시골구석에 그들이 들어옴으로서 그녀의 평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토벌군의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을 떠나게 된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서 1950년 5월 그녀 나이 17살에 3명의 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던 까막눈의 18살 성석조와 혼인을 한다. 얼마 뒤 한국전쟁은 발발했고 인민군이 삼장면에도 들어왔다.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은 부역을 해야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인민군들은 떠났고 국군이 들어오자 부역자들 색출 작업이 시작됐고 빨갱이로 몰린 남편 성석조는 지리산으로 떠났다. 그 다음 얘기는 뻔하다. 빨갱이 가족이 된 정순덕은 경찰과 국군으로부터 모진 구타와 위협을 받게 되고 이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남편을 찾겠다며 무조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이후 상상도 못한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는.... 문제는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54년 6명의 빨치산이 남게 되었고 이후 1963년 11월 12일 함께 있던 남자 빨치산 이홍이는 사살됐고 정순덕은 그녀의 고향인 내원리에서 체포됨으로써 그 긴 빨치산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전향서를 쓰지 않아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전향서를 작성하여 23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였다가 2004년 인천에서 사망한 게 마지막 빨치산이라는 정순덕 여인의 일생이다. 이념이 무엇인지 사상이 무엇인지 철학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 여자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휘말려 망친 그녀의 인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 졸저 전게서 210쪽
이 정순덕의 주검은 한북정맥(대한산경표 상으로)이 지나는 앵무봉 아래 보광사 연화공원에 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묘역이죠.
그 묘비명epitaph은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전사
하나된 조국의 산천에
봄꽃으로 돌아 오소서!"
그들이 거처하던 굴인데 이중으로 되어 있고 불을 피어도 굴 앞으로는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밖으로 통하는 연통 역할을 하는 다른 구멍이 있다고 하는군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작은 구멍에 그 큰 동굴이 있었다니....
09:14
다시 되돌아 나갑니다.
09:30
의론대로 오르고....
전에는 미타봉.
지금은 와불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상으로는 1164.9봉.
09:36
고열암터를 향해 올라갑니다.
09:36
고열암古涅菴 터입니다.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기와와 석축이 예전에는 어느 정도 규모의 절이었음을 알려주고....
09:44
독녀암 삼거리를 지나,
09:58
아까 지나쳐 온 상내봉으로 오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뒤에 보이는 봉우리를 와불산으로 표기하여 놓았지만 그렇게 볼 이유가 하나도 없음은 위에서 상세히 기술하였습니다.
즉 이 봉우리는 향로봉에서 음운변화를 일으켜 현재의 상내봉으로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마침 도히님이 붉은 티를 입고 있어 향로에 불을 피운듯한 느낌이 제대로 나는군요.
상당히 오르기 위험한 곳인데 다행히 도히님이 암벽이나 빙벽을 한 분이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올라 향로불 같은 포즈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예전 향로봉.
지금 상내봉.
그 상내봉에서 덕천지맥의 흐름을 봅니다.
지맥은 저 뒤에 보이는 웅석봉을 지나 덕천강이 남강을 만나는 곳까지 흐를 것입니다.
10:02
다시 와불산 삼거리입니다.
이제 잡목과,
산죽밭을 지나 덕천지맥 상의 동부능선에 오를 것입니다.
지리에도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된비알을 치고 올라,
지도 #3
11:03
초령으로 오릅니다.
'새봉'이라 불리는 곳이죠.
이곳이 산청군 삼장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갈리는 곳이니 곧 함양과 산청 즉 예전 이름인 산음의 군계인 곳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지금은 이렇게 '새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옛 이름이 있다면 그렇게 불러주는 게 맞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이 작업의 완성자는 존경하는 학자 산꾼 '도솔산인'님입니다.
즉 도솔 님은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 일록'에서 '초령(草嶺)을 넘었다. 초령은 함양과 산음(山陰)으로 나뉘는 두 갈래길의 분기점이었다.'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감수재가 청이당 길을 놓치고 독바위골에서 상류암으로 올라 독바위 양지골을 트래버스하여 새봉과 독바위 사이의 안부로 올라가 새봉에 도착하는데 이때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由分也'라는 글을 보고는 초령은 함양과 산음 즉 산청의 갈림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본 것이죠.
그러니 여기서 嶺은 단순히 고개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산봉우리'嶺으로 독해해야 한다는 점도 주의를 요하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由'가 '田'으로 잘못 표기한 것도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여하튼 옛 지명을 하나하나 복원하는데 갖은 정성을 다 쏟는 도솔산인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상내봉 우측으로 흘러내리는 능선.
곧 군계입니다.
능선 바로 뒤로 꽃봉산이 보이는군요.
꽃봉산의 옛이름은 곧 花巖이죠.
화암花巖의 위치가 현 지명과 일치하지 않아 문제이다. 도솔산인 이영규는 ‘巖’이 바위나 언덕, 낭떠러지라는 뜻뿐만 아니라 ‘산봉우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花巖은 곧 꽃봉산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동강마을 뒤편의 733.9봉의 현 지명이 꽃봉산이니 옛 지명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예전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우회하는 코스보다는 지름길을 이용하여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 터, 그렇다면 점필재 일행은 위와 같이 화암 즉 꽃봉산 아래 어딘가에서 쉬고 엄천강을 따라 진행하다 적조암 루트를 타고 바로 능선으로 달라붙었을 것이다. 바로 이 길이 암자와 암자를 잇는 곧 당시의 산길이자 등로였으며 천왕봉으로 오르는 지름길이었으니 말이다.
- 졸저 전게서 145쪽 각주2)
11:09
죽은 산죽.
우측으로 도솔암 가는 선명한 길을 지나면 죽은 산죽 밭을 지나게 된다.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삼필사설三必死說을 떠올리게 된다.
- 졸저 전게서 493쪽
야간 보행자를 위한 이한검 대장님의 배려.
진주독바위 전위봉.
11:20
진주독바위 혹은 산청독바위로 오릅니다.
진주독바위는 진주암이라는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지 지명 진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굳이 지명을 갖다 붙이자면 산청독바위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라고도 보이지만 ....
그리고 누누이 반복하지만 저 새봉이 곧 초령입니다.
이제는 초령으로 부릅시다.
주위를 조망합니다.
언제봐도 좋은 지리의 동서남북이 다 들어옵니다.
깃대봉936.5m과 웅석봉1099.9m이 나란히 서 있군요.
그러고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왕등재라고 표기되어 있고 멸실된 3각점(산청311)이 방치되어 있는 깃대봉936.5m으로 오른다. 예전에 가락국과 관련하여 "피신한 가락국의 구형왕이 서왕등재로 피신하여 신라에 항거를 할 때 이 동왕등재에 깃발을 꼽아 신호를 주고받음으로서 이 동왕등재의 지형지물을 이용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특히 '깃대봉'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깃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의 대부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측량 사업을 실시할 때 삼각점 대용으로 꼽았던 깃대에 유래한 것이므로 이 전설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편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동부능선 구간에 왕등재가 두 곳에 표기되어 있다. 즉 깃대봉인 936.5봉과 1048.6봉을 지나 만나는 왕등습지 등이 그곳이다. 생각건대 왕등재王登岾는 한자 표기 그대로 왕,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지났던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936.5봉은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얘기해주듯 고개가 아니고 봉우리이며 왕등습지 역시 주위가 운동장의 스타디움 같이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이는 이 둘러싼 산줄기에서 왕산으로 향하는 줄기 하나가 가지를 치고 있음이 이곳은 고개가 아니라 봉우리인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이들 두 왕등재는 ‘岾재’라는 이름을 갖기에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현장에 임해보면 지막리 절골과 유평리 밤밭골을 잇는 즉 903.4봉과 993.5봉 사이에 있는 고개가 왕등재라는 이름을 갖기에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럴 경우 동왕등재라고 부르는 936.5봉은 그대로 깃대봉, 서왕등재는 왕등습지로 정리하고 절골과 밤밭골을 잇는 고개를 왕등재로 이름하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521쪽
조개골....
중앙의 비둘기봉1481.8m.
저 봉우리 뒤에 오늘의 숙박지인 치밭목대피소가 있습니다.
중봉과 써리봉 능선.
좌측 하봉과 중앙의 두류봉.
두류봉에서 내려오는 좌측의 옛길.
곧 산청군 삼정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군계가 되는 곳이죠.
그리고 우측의 국골사거리에서 내려오는 능선.
산사태 난 곳 바로 우측 위로 바위가 보이는군요.
지리10대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향적대, 문창대, 영신대, 소년대와 함께 '천왕 5대'에는 포함되는 향운대입니다.
청이당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좌측이 옛길, 우측이 국골사거리에서 내려오는 길.
그러니 좌측이 두류봉, 우측이 영룡봉.
두 곳이 만나는 곳이 바로 앞의 쑥밭재.
써리봉 능선 뒤로 황금능선의 구곡산.
그 좌측 뒤가 지리태극의 수양산.
두류능선 뒤로 좌측의 만복대.
그리고 그 우측으로 큰고리봉...
세걸산....
서부능선의 바래봉과 덕두산.
그 앞으로 북부능선이 흘러내리고....
금대봉과 백운산.
좌측 창암산.....
우측 앞이 아까 올라온 벽송사능선.
삼봉산, 법화산..........
그 뒤로 백두대간 백운산.
와불산과 그 뒤로 함양의 대봉산.
그리고 그 뒤로 희미하게 남덕유산.....
좌측 상내봉.
새봉 아니 초령.
덕천지맥.
좌측 뒤로 남강지맥의 황매산.
좌측 맨 뒤가 양천지맥의 정수산과 그 우측의 둔철산.
그 앞이 덕천지맥의 웅석봉.
그리고 깃대봉.....
웅석봉 우측으로 그 유명한 '달뜨기능선'.
웅석봉에서의 진행은 2등급삼각점(산청26)을 확인한 다음 초소방향으로 나간다. 헬기장을 나가면 바로 삼거리이다, 여기서 삼장면을 만나는데 좌측 삼장면과 단성면의 면계가 이른바 달뜨기 능선이다.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 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 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 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 7권에도 빨치산이 황석산을 넘어 둔철봉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에서 달뜨기능선을 보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 졸저 전게서 518쪽
10분 정도 머무르다 내려옵니다.
그러고는 아쉬운 마음에 다시 진주(산청)독바위를 돌아보고.....
다시 산죽밭으로 들어서고....
12:14
그러고는 쑥밭재입니다.
그러고 나면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졸저 전게서 524쪽
한편 이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된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쑥박재>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 수긍이 간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설에 한 표를 던진다.
- 졸저 전게서 524쪽 각주 9)
청이당 계곡으로 내려가 1시간 정도 점심을 먹고 물을 보충한 다음 일어납니다.
14:07
국골사거리까지는 그냥 걷습니다.
무조건 올라가는 길이니 그저 걷기만 합니다.
국골사거리 조금 좌측으로 올라왔습니다.
14:26
이제 두류봉도 목전입니다.
국골의 좌골에 해당하는 날끝산막골을 지나,
14:30
두류봉 조망터에서 지리의 서부를 봅니다.
좌측이 국골.
그 좌측은 초암능선.
그리고 그 뒤가 칠선계곡.
그 뒤가 창암능선.....
한신계곡....
소갈비뼈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지리의 지능선들...
촛대봉 ~ 영신봉 ~ 반야봉 ~ 만복대.....
영랑대.....
멀리 서부능선의 바래봉.
그 우측으로 백두대간의 고남산과 요천지맥의 천황산.
14:44
청이당으로 가는 옛길 갈림길....
15:04
드디어 비둘기봉과 치밭목대피소가 보이는군요.
그 뒤로 달뜨기능선.
15:10
영랑대로 오릅니다.
천왕봉에서 시작한 덕천지맥의 능선이 차례대로 줄을 섰습니다.
우측부터 제석봉 ~ 천왕봉 ~ 중봉 ~ 그리고 바로 앞이 소년대가 있는 하봉.
오늘 가지는 못하는 천왕봉.
아까 얘기가 나왔으니 감수재 박여량(1554~1611)의 얘기를 잠깐 들어볼까요?
그가 1610년 6박7일의 일정으로 이곳을 지나면서 천왕봉에 올라 한 말입니다.
백두대간을 꿰고 있었으며 지리산을 두류산이라고 한 어의가 명확해 집니다.
역시 조망하면 영랑대입니다.
반야봉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만복대와 정령치 그리고 고리봉...
그 앞으로 삼각고지에서 가지를 치는 지리북부능선의 영원봉과 삼정산.
그 앞으로는 좌측의 영신봉이 보이니 한신바위와 좌고대까지 확인할 수 있고...
창암능선과 바로 앞의 초암능선....
우측 바래봉, 덕두산...
앞의 창암산....
이럴 때 자연스럽게 남명의 글을 하나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능선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소의 갈비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소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영랑대와 소년대는 그야말로 지리 제일의 조망터이다
영랑대와 소년대는 하봉에 있는 바위봉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영랑대에서 소년대를 가자면 로프를 잡고 주의를 기울여 진행해야 한다. 하봉에서 초암능선을 내려서기도 한다는데 오금이 저려서 내려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중봉과 천왕봉이 지척이다. 주변을 조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곳이 사실 이곳이다.
- 졸저 전게서 527쪽
국골........
임천지맥의 삼봉산.
우측 지나온 두류능선.
우측으로 오전에 돌아본 독녀암.
멀리 대봉산에 남덕유까지....
비둘기봉.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하봉, 중봉......
영룡봉.
법화산과 오도재 그리고 삼봉산.
........
하봉으로 가려면 로프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15:24
초암능선 가는 길에서는 좌틀.
15:31
그러고는 하봉으로 오릅니다.
소년대에서 영랑대를 보고....
..............
가을로 가고 있고....
우측 제석봉.
어서 오슈.
15:49
그러고는 하봉 헬기장입니다.
이곳부터 아래에 있는 샘터까지는 5년 전 가본 경험이 있지만 그 이후부터 치밭목대피소까지는 미답.
10분 정도 쉬다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웬걸!
길이라는 게 도대체 없습니다.
도사목倒死木과 잡목으로 길을 찾기란 애시당초 기대를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주의를 기울이며 겨우겨우 나아가자,
16:35
조개골 상단부인데 큰 산사태가 났군요.
그러니 여기서 건너편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마저도 길찾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조개골의 흐름과 예전 치밭목대피소로 이어지는 루트 중 가장 가까운 곳을 찾습니다.
바로 지도 #3의 '바'의 곳입니다.
거기까지 무조건 골치기를 합니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이라 어렵군요.
스틱 끝단이 휘어지기까지 하고.....
대원 중 한 사람은 허리를 삐끗하고....
저 끝이 바로 가장 근접한 포스트가 되는 곳이군요.
16:54
그 끝에는 역시 우리같은 사람이 걸어놓은 표지띠가 보입니다.
바로 '남부군'팀입니다.
정치색이 좀 강한 팀이라고는 하던데....
바로 제대로 된 길을 만나게 되는군요.
다 왔습니다.
17:20
대피소에 도착하니 도솔산인님과 늑대형님 일행이 먼저 식사를 하고 계시는군요.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내일 일정을 얘기한 다음 간단하게 씻고 따뜻한 대피소 안에서 푹 잠을 잡니다.
치밭목 대피소의 이력은 진주사람 민병태 부부와 함께 한다. 1971년 정부의 국립공원 산장 설치 계획의 일환으로 세워지기는 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가장 늦게 개발된 동쪽 코스에 있는 대피소이다. 또한 이 부근에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이홍이 등이 1963년 말이나 되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 등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인산장으로 장기간 방치되던 이곳을 지킨 이가 바로 민병태로 1986년부터 이 대피소를 보수하여 관리하였다. 최근 필자가 이곳을 들렀는데 최신식 건물로 신축되었는데 이곳도 노고단 대피소의 고 함태식 선생 케이스 같이 민병태씨도 공단 직영의 미명하에 밀려났다는 얘기가 들린다.
- 졸저 전게서 초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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