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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치밭목대피소의 하룻밤 그리고 그 이튿날....(써리봉 ~ 장구목~ 무재치기 폭포~ 윗새재)

 

치밭목 대피소의 이력은 진주사람 민병태 부부와 함께 한다. 1971년 정부의 국립공원 산장 설치 계획의 일환으로 세워지기는 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가장 늦게 개발된 동쪽 코스에 있는 대피소이다. 또한 이 부근에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이홍이 등이 1963년 말이나 되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 등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인산장으로 장기간 방치되던 이곳을 지킨 이가 바로 민병태로 1986년부터 이 대피소를 보수하여 관리하였다. 최근 필자가 이곳을 들렀는데 최신식 건물로 신축되었는데 이곳도 노고단 대피소의 고 함태식 선생 케이스 같이 민병태씨도 공단 직영의 미명하에 밀려났다는 얘기가 들린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그렇게 1971. 9. 1. 세워진 지리산의 치밭목산장이 지금은 현대식 시설의 치밭목대피소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초라하고 불편하기만 한 시설이었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버킷리스트bucket list에 올릴 그런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서와 북으로는 덕천지맥이, 남으로는 써리봉 능선이 둘러싸여 있어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

동쪽 뿐인 이곳.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하늘 뿐인 이곳.

지리산 속에 홀로 남겨진 고도孤島와 같은 곳입니다.

글쎄요....

고도하니까 갑자기생각 나는 게 있습니다.

사뮈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Godot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혹시 지리산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그런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기에 꼭 한 번 머물고 싶었던 곳입니다.

예전에는 민병태님의 손향기가 묻은 당귀차가 그리울 때 들르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공단 직원들에 의해 인간미가 없어진 '사무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한 분 한 분 지리산을 떠나는 이들....

작년에는 '지리산 365일'의 최화수 님도 가고....

얼마 전에는 지리산 달인 성락건 님도 떠났다고 하니 그 지리산 신선님들은 지금 저 하늘나라에서 새로운 지리 루트를 뚫고 계시려나?

지난 5월 황금능선을 가기 위해 들렀을 때의 시간이 05:09이었는데 지금 시간이 06:30이니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그때 들었던  Uriah Heep의 Sunrise를 입속으로 웅얼거립니다.

늑대형님이 나오시는군요.

지난 밤 개념 없는 녀석들 때문에 잠을 설치셨나보군요.

이른 새벽에 짐을리려면 나가서 꾸리셔야지 ....

자, 그럼 출발할까요?

오늘은 간단하게 장구목이로 돌아 무재치기 폭포로 나오는 루트를 택합니다.

06:41

잘 쉬었다 갑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다행히 산 그것도 지리산에 오니 보이는 게 맨 산 밖에 없군요.

어제 지나온 루트입니다.

앞줄 중간 우측이 초령草嶺.

새봉이 아닙니다!

중앙 바위봉이 산청독바위라고도 불리는 진주독바위.

그 좌측으로 쑥밭재.

그 뒤로 겹쳐서 보이는 능선이 벽송사 능선으로 좌측이 와불산 우측이 상내봉.

그리고 임천 건너 그 뒷라인이 법화산.

그 뒤로 함양시가지가 보이니...

좌측 백운산부터 우측 대봉산 너머 남덕유와 장수덕유를 감상할 수 있군요.

그러니 그 우측으로 황석산 ~ 거망산으로 이어지는 남강지맥의  흐름이 힘차게 느껴지는군요.

한편으로는 퇴로가 막힌 남부군이 저 등로를 타고 정수산으로 이동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들 중 한 명의 외침이 들리는군요.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 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 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 이태 저 '남부군' 중

 

바로 앞이 비둘기봉.

비둘기봉 뒤로 덕천지맥이....

그리고 그 뒤가 왕등재봉에서 가지를 쳐 나간 왕산과 필봉산.

멀리 황강지맥의 가야산과 수도산도 보이고....

남강지맥의 황매산.....

그 앞으로 횡천지맥이 흐르고....

07:12

그리고 써리봉으로 오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 1586.7봉이 써리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 바로 위에 있는 봉을 써리봉으로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마야계곡으로도 불리는 중봉골.

황금능선의 흐름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끝에는 구곡산이 자리하고 있죠.

정면으로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죠.

그 우측에는 낙남정맥에서 벗어나 있는 오대주산.

그 뒤 우측의 금오산.

 

봉우리 두 개를 넘어 도착하는 만월봉1280.4m에서 삼각점(연곡434)을 확인하고 큰 등산안내도도 본다. 인상적인 주목 한 그루를 보고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면 1등급 대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응복산1360.0m이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174개의 1등급삼각점 중 이게 그 하나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중에는 鷹伏山의 응이 매자여서 매복산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매가 웅크린 형상이란 말인가?

 

이미 수리높은 곳또는 맨 꼭대기를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고 여기서 파생된 말이 사라’, ‘사리’, ‘’, ‘’, ‘시루’, ‘’, ‘싸리’, ‘수락등 여러 가지 형태라는 건 이미 봤다. 당연히 높은 곳을 나는 새() ‘수리독수리도 여기서 나온 이름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이 수리를 한자로 표현하면서 취()자를 쓰는 건 사실 시간 문제였다. 영취산(靈鷲山), 취성산(鷲城山)이 그 가장 비근한 예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이다. 그리고 그 매의 한자인 응()이 응봉(鷹峰)이 된다거나 매봉이 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니 이런 이름의 산을 볼 때에는 주위 산보다 높은 곳을 일컬음이니 비약하여 수리 모양’, ‘매가 많이 사는 곳등의 얼토당토않은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따라서 응복산도 응봉산의 잘못된 표기이리라.

같은 취지로 위의 매복산도 매봉산 혹은 매봉의 오기이다.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65쪽

수리봉 소고(小考)

 

.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졸저 전게서 298

두 번째 줄 중간에 법계사가 숨어 있고 그 좌측으로 문창대가 보입니다.

이 중산리의 직등코스로 오르다보면 우선 만나는 곳이 법계사이다. 연곡사, 화엄사, 대원사 등과 함께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집이다. 법계사가 1380년 고려 우왕 때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왜구 잔당에 의해 불태워졌을 때 일시 무속인들이 들어와 법계당이라는 이름으로 가건물을 운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제석당과 같은 당집의 형태였다.

 

한편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문창대이다. 고운 최치원이 법계사에 머물 때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명상에 잠겼던 고대高臺로 장터목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하며 기도발이 받는다는 지리 10대 중 하나이다. 문창이란 고려 헌종이 고운 최치원을 문창후라 시호한데서 유래하며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고는 신라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松岳 즉 개성을 얘기함)은 푸른 소나무다.’라고 하여 왕씨의 고려 창업을 예언했다는 데서 이런 예우를 받은 것이다.

 

문창대 논란

그런데 이 문창대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1373.9봉이 아닌 망바위 바로 위로 표기되어 관심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19781026일 로타리 산장(지금의 로타리 대피소) 기공식에 앞서 이 산장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남명의 13대손 조재영은 진주산악회와 함께 기존 문창대에 대해 다른 곳을 문창대(기존 문창대에 대하여 신문창대라 함)라고 제시한다. 진양지 2의 내용 즉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해석해 보면 (법계사)절 서쪽 수십 보 거리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이다.’를 첫째 근거로 든다. 이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방향으로 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나오는 좌측의 너럭바위를 얘기한다. 그러고는 두 번째의 근거로 그 바위 아래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문창대를 처음 알린 이는 바로 진양지를 발간한 부사 성여신이다. 그의 칠언고시 형태로 쓴 유두류산시를 보면,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고 문창대를 그렸다.

 

유석이 축융봉 아래에는 옛부터 상봉사(上封寺)가 있었으니, 천왕봉 앞에 어찌 벽계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일찍이 서로 왕래하던 승려 선응(禪應)과 함께 도모하여 세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붕을 나무기와로 얹고, 판자로 벽을 막아 창을 내놓으니, 방이 한 몸 누이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만 가진 것 없는 승려들이라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오는 사람이 반드시 식량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만 하였다.

 

 

암자의 맞은편에는 이른바 문창대(文昌臺)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석굴 속으로 기어서 몇십 길을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진 4신 문창대에서 본 원 문창대.

 

이렇듯 문창대는 법계사 동쪽에 있는 봉우리 즉 세존봉에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였으니 법계사에서 바라본 문창대의 모습과 같다. 반면 신문창대는 사실 위와 같이 성여신의 표현대로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의 외형을 갖추지 못한 점 가령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도 아니며. 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 주변에는 日出峰. 혹은 陸象山 등 조잡한 각자들이 많이 새겨 있어 이 각자 역시 이들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 각자의 제작 연대 또한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문창대는 그저 각자가 되어 있는 바위 정도로만 인식되어도 무난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인들의 산행기에 원 문창대가 지금의 장소와 너무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구 문창대원 문창대로 보게 하는 이유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07쪽 이하

그 라인 뒤로 낙남정맥의 삼신봉과 외삼신봉이 보이니 그 뒤가 호남정맥의 백운산과 도솔봉이 그 우측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그 좌측의 특이하게 생긴 봉우리는 저 백운산에서 가지를 친 수어(억불)지맥의 억불봉이고....

맨 좌측이 금오산.

아침 햇살이 교묘하게 산줄기와 골을 비추니 눈에 보이는 색깔과 다른 빛으로 다가옵니다.

도히님이 주시하는 곳은?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그리고 우측의 수양산....

그러니 大지리산입니다.

너무 오래 지체했습니다.

오늘 진행은 일단 황금능선을 따르다 1528.5봉에서 좌틀하여 장구목으로 갈 것이니 금줄을 넘습니다. 

07:21

금줄을 넘자마자 우측으로 또 조망터가 나오니....

좌측 천왕봉, 중앙이 써리봉 그리고 우측이 조금 전 본 써리봉 조망터. 

우측부터 늑대, 도솔산인, 홍운, 현오, 고남....

홍운 님은 지리산 산행 횟수가 650회라고 하니 다른 산은 모르시나?

황금능선길이야 익히 알고 있는 곳이지만....

07:42

1528.5봉을 지나자 이제부터는 없는 길을 찾으며 가야 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지리산이니 어디든 길은 있기 마련....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 다니는 길을 찾아....

'산천나그네'님은 이런 델 뭐하러 오셨나?

이런 곳에도 비경이 숨어 있으니.....

아주 멋진 곳입니다.

그나저나 아침을 먹어야죠.

박배낭에는 없는 게 없군요.

가지고 간 고기도 풀어 놓고....

한 40분 정도 먹고 일어납니다.

키 낮은 풀이 온 세상을 녹색으로 빛나게 하고....

조망터가 하나 나오긴 하는군요.

황금능선.

좌측의 덕산과 그 뒤로 진양호도 보이는군요,

저 진양호에서 어제 본 덕천강이 그 맥을 다하게 되겠죠.

앞 대원사 능선.

그 뒤가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눈이 오기 전 저 대원사능선을 한 번 가야할 텐데....

좌측 바른골.

그렇죠.

산죽이 없으면 지리산이 아니죠.

어른 키를 훌쩍 넘길 정도의 산죽밭입니다.

앞서 가는 대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박배낭을 지고 가는 이들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닐 것 같습니다. 

09:50

장구목입니다.

여기서 바른골로 내려가 안장당골로 가려했으나 박배낭이 부담이 되어 무재치기 폭포로 돌아가 윗새재로 가자고 하시는군요.

여기서 좌틀하여 헬기장을 지나 무재치기 폭포로 갑니다.

산죽.

노각나무. 

이 사진을 언제 찍으셨나.....

바른골 상단부.

헬기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역의 연속입니다.

앞에서 리딩하는 홍운님이나 그 뒤에서 박배낭을 매고 진행하는 도솔님이나 고역스럽긴 다 마찬가지....

그렇게 약 20분 정도 산죽 터널에서 먼지를 털며 진행하니,

11:21

겨우 헬기장으로 올라섭니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좌측 숲으로 들어,

정규 등로로 들어옵니다.

11:31

여기서 좌로 틀어,

무재치기 폭포로 들어갑니다.

관광을 즐기는 분들이 아니라면 실제 무재치기 폭포를 구경한 사람은 드뭅니다.

1,000m 이상의 고지에 이 정도 규모의 폭포라면 써리봉과 치밭목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지리산의 그 많은 폭포 중 3단 여덟갈래의 절묘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이 무재치기 폭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흔치 않습니다.

여덟 갈래로 넓게 퍼져 흘러내리는푹포에 무지개가 어린다고 하여 붙여진 무재치기 폭포!

이 무재치기 폭포는 지리산 화대종주를 하는 이들의 50km의 끝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그 코스에서는 유일한 폭포이며 등로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찾아들어가지 않는다면 그저 놓치기 십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장당계곡으로 내려갈 이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고 싶은 마음 한량입니다.

그만 나가야죠.

12:07

다른 대원들은 대원사 방향으로 내려갔겠고....

우리는 새재 방향으로 갑니다.

오늘 한 8km 정도 걸었으니 이틀 동안 32km 정도 걸었는데 거리로는 별 게 아니지만 난이도는 상당했습니다. 

덕천강 물로 피로를 푼 다음,

마을로 나갑니다.

이제 다시 속계로 돌아왔군요.

늑대형님.

만나서 반가웠고 다음에 지리에서 또 뵙죠.

도솔선생님도 빨리 감수재길을 마무리 하셔야지요.

영랑대 박산행.

일정을 맞춰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원사 주차장에서 나머지 대원들을 만나 원지로 이동하여 귀경을 합니다.

이틀 동안 산행을 하는 동안 대원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기량에 맞는 산행 멋지게들 즐기십시오.

저는 백두대간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