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에서 멋진 일출 동영상을 촬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이번 주 수요일 일정은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정해졌었습니다.
그런데 동행하기로 했던 이들의 사정변경으로 인하여 제 일정이 모호해집니다.
그렇다고 근교 산으로 가기도 그렇고....
일기예보를 봅니다.
화요일(10. 29.)은 비온 후 갬.
수요일(10. 30.)은 맑음.
그렇다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천왕봉 일출 장면을 떠올립니다.
가장 빠른 버스는?
원지는 이미 틀렸고...
그렇다면 백무동?
23:50 버스는 서상까지 들렀다 가니 예정 도착시간이 03:40.
백무동 ~ 장터목 6km.
장터목 ~ 천왕봉 1.7km.
7.7.km를 3시간에?
천왕봉 일출 시간이 06:50분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계획입니다.
'시외버스 모바일' 앱을 열어보니 당해 버스는 저를 포함 3명 밖에 안 되는군요.
아무리 재수 없어도 그 사람들이 서상을 가는 사람일까?
둘 다 백무동이거나 함양 혹은 마천이기만 하다면 적어도 20~ 30분은 덕을 볼 수 있고 올라가는 루트를 장터목을 들르지 않고 곧장 제석봉으로 오르는 루트를 선택한다면
적어도 15분 정도를 벌 수 있다?
The dice is cast.
운에 맡기기로 합니다.
그런데 마침 '청계산쥔' 형님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11월 제 산행 일정에 대한 문의로군요.
이러쿵 저러쿵....
그리고 오늘 사실 이러저러한 계획이 있음을 메시지 말미에 알려드립니다.
바로 당장 함산하자고 하시는군요.
산행보다는 동영상 촬영을 위한 산행이라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니....
"지리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겠다!"
여전한 남부터미널.
승객은 모두 네 명.
다행히 두 분은 같은 일행으로 함양을 가는 분들.
다행입니다.
기사 님이 액설레이터를 좀 세게 밟아주기를 기대하면서.....
서상은 통과.
함양에 두 분을 내려드리니 잠이 좀 깨는군요.
인월, 마천 통과.
03:10
백무동 터미널에 도착하는군요.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하차합니다.
03:20
복장을 갖추고 서서히 지리산의 품으로 안깁니다.
여전히 공단 초소의 라이트는 환하게 비추고....
03:21
한신계곡과의 갈림 삼거리입니다.
장터목까지의 공식적인 거리는 5.8km
주저할 것 없이 좌틀합니다.
04:01
하동바위를 지나고....
4일(을사).
맑음. 박대주와 박대일이 고을 수령의 일 때문에 두 기생을 데리고 절의 문밖에서 작별하였다. 우리는 승려에게 업혀 실덕탄(實德灘)을 건넜다. 실덕탄의 좌우에 실덕∙마촌(馬村)∙궁항(弓項) 등의 마을이 있었다. 곳곳에 감나무가 서 있는데, 감이 한창 익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산 속에 사는 백성들이 이 감을 따서 생계를 꾸려간다.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였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겨우 백모당(白母堂)에 도착했다. 차를 마신 뒤에 안국사의 승려 숭혜(崇惠)가 술과 과일을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말을 놓아두고 나막신을 신고서 따라온 자들에게 단단히 일러 방곡(方谷)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비로소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올라 지나온 곳을 굽어보니 점점 높고 멀게 느껴져, 이른바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비탈길을 따라가는데 해를 가린 나무들이 거의 수십 리나 늘어서 있었다. 바로 우리동(于里洞)이었다. 우리동 중간쯤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은 조금 움푹하였는데 ‘하동암(河東巖)’이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하동태수가 이곳에 이르러 지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이 바위 아래서 묵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매우 피곤하여 열 걸음에 한 번씩 쉬었는데, 쉴 때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함께 간 승려가 쉴 적마다 재촉하기를 “해가 서쪽으로 지려 하는데 갈 길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도 이 바위 밑에서 자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장난 삼아 말하기를 “예전부터 ‘하동암’이라 불러왔지만, 이제는 ‘합천암(陜川巖)’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 박여승이 합천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한 농담이었다. 하동암에서 겨울 5, 60보쯤 오른 뒤 스스로 안도의 숨을 쉬면서 “우리들은 하동암을 지나 꽤 멀리 올라왔네”라고 하였다. 이른바 “50보 달아난 자가 1백 보 달아난 자를 비웃는 꼴”이었다.
겨우겨우 옛 제석당(帝釋堂) 터에 도착하였다. 올라서 좌우의 바위와 골짜기를 조망하고,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온 산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회나무가 아니면 붉게 물든 나무였으며, 붉게 물든 나무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푸르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이 뒤섞여 서로 비추어서 마치 비난에 수를 놓은 것 같았다.
- 1610. 9. 5.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중에서
04:25
참샘을 지납니다.
지리산 모든 샘의 이 스테인리스 국자는 후배 '몽화' 님의 노고 덕분이고....
이정목 상으로 2.6km 그러니까 버스 종점부터 약 3km 가까이 왔는데 1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되었군요.
좀 빠르군요.
04:40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창암능선에 접속합니다.
제석봉에서 흘러내리는 능선이죠.
이제부터 줄곧 오르기만 하던 길에서 오르내림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겠죠.
04:44
공터를 지나,
05:17
소지봉을 지납니다.
소지봉 바위 한 쪽에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
제법 많이 컸습니다.
천왕봉까지는 3.2km인데 일출시간까지는 1시간 반 정도 남았군요.
잘 하면....
05:39
그러려면 어쨌든 장터목을 들르지 않고 바로 제석봉으로 오르는 루트를 이용합니다.
희미한 길이지만 그래도....
06:05
제석봉 바로 아래에 있는 정규 등로로 다시 합류합니다.
전망대 바로 옆이죠.
아!
드디어.....
동쪽 지평선 저 너머로 붉은 기운이 깔렸습니다.
천왕봉에는 개미 새끼 같은 모습으로 랜턴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고....
장터목에서 자고 일출을 보기 위하여 오르고 있는 꾼들이겟죠.
우측 광양 방향으로 불빛이 훤하고....
조바심을 부추깁니다.
과연 볼 수 있을까.....
06:20
이제 랜턴도 필요 없어지고....
조금 전 올라온 창암능선.
좌측의 백무동과 인월 방향과 우측의 추성동 방향의 불빛이 아직도 남아 있고....
06:23
그러고는 통천문입니다.
향적사도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김종직이나 김일손의 기록에 의하면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되어있다. 석문石門으로 불리던 통천문을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가파른 골이 하나 보인다. 통신골이다. 천왕봉의 신에게 오르는 길이니 통신골通神谷이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승려들의 경우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유학자들의 경우는 배움과 유식遊息 그리고 공자부터 남명에 이르기까지의 선인들을 닮기 위하여 그리고 토속 신앙의 무속인들의 경우는 천왕봉의 영험한 기를 얻기 위한 여정이었을 것이니 通神谷이 맞을 것이다. 최근 공단에서는 이름이 분분한 통신골을 천주골로 통일하자는 의견을 피력한다. 천왕봉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니 천주골天柱谷로 하자는 얘기다.
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문은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서쪽에 있으니 서문이라고도 불리는 통천문通天門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에 있으니 동문이라고도 불리는 개천문開天門이다.
하늘에 오르려면 반드시 통천문을 통과해야
통천문이라는 각자刻字 안으로 들어설라치면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말 때문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도 있으리라. 시인 고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 만큼은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음산한 기운 속에 성모사에서 잠을 자던 점필재는 밤에 달이 환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고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로다.”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59쪽
잠시 뒤를 돌아봅니다.
제석봉에 일출봉 그리고 촛대봉과 우측의 반야와 그 좌측의 왕시루봉.
낙남정맥 그 줄기 좌측으로 오똑 솟은 금오산.
하동의 금오산59m입니다.
아!
우측의 촛대봉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시루봉.
그 뒤로 내대천 너머 삼신봉이 좌측의 낙남정맥과 우측의 남부능선으로 갈립니다.
그 남부능선 뒤로 백운산과 억불봉 그리고 도솔봉이 확실하게 보이고....
그러니 수어(억불)지맥의 윤곽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고....
좌측으로는 옥산도 뚜렷합니다.
남명 선생의 표현대로 황소의 갈비뼈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그림입니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남명의 글을 하나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능선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소의 갈비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소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 졸저 전게서 526쪽
조금 우측 촛대봉을 중심으로......
바로 앞 제석봉 그리고 그 뒤의 반야봉.....
북부 능선의 영원봉과 삼정산을 중심으로.....
06:33
칠선 계곡 입구를 지나,
06:40
천왕봉에 도착합니다.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의 바람은 붑니다.
손가락은 금방 곱으고....
어쨌든 '오즈모 모바일 3'에 폰을 삽하고 촬영을 시작하는데.....
이런 조작 미숙으로 제대로 촬영이 되지 않았군요.
06:48
아!
억을 해라!
잽사게 해체 후 수동으로 촬영 시작.
겨우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을 잡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오즈모 모바일 3'에 폰을 장착하는 작업을 하고는 다시 찍어보고....
춥기도 하고...
이제는 또 배도 고파집니다.
주위에서 소란스럽게 환호성을 질러대던 이들도 하나둘씩 하산하고.....
우선 뭐 좀 먹죠.
따뜻하게 해가 들어오는 곳에 둥지를 틀고 가지고 온 떡을 먹습니다.
청계산쥔 형님은 떡국에 물을 부어 데우고....
천왕봉에 우리 외에 사람이 없을 때도 있군요.
천왕봉 정상석도 많은 변천을 겪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예전 사진을 보면 1960년대 나무 기둥 같은 것에 천왕봉이라고 한글로 표기하여 세운 것이 있었다. 그 후 진주산악회에서 세웠다고 하는 오석烏石에 앞면에는 ‘天王峰‘, 뒷면에는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라는 남명의 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정상석이 1982년 경남도지사 이규호와 당시 민정당 실세였던 권익현이 지금의 정상석을 세우면서 뒷면에 '慶南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썼다가 후에 여차여차한 이유로 '嶺南人'으로 바뀌었다가 언젠가 지금의 '韓國人'으로 다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졸저 전게서 471쪽
07:45
천왕봉에 올아온 지 벌써 한 시간.
중앙 우측 구름이 모인 곳이 덕산.
형님이 지리산을 그렇게 여러 번 왔었는데 그저 걷고 가기만 했으니 오늘은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 달랍니다.
그러시죠.
지리산을 배우고 싶다 하셨으니......
우선 조금 전 올라오다 본 그림 방향을 먼저 보기로 합니다.
맨 앞줄 부터 볼까요?
아까 본 그대로 다시 복습을 하고.....
그러고는 저 낙남정맥과 백운산의 호남정맥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물론 백두대간의 영취산과 조약봉까지....
아직 물줄기는 이해를 못하시지만 그래도 산을 많이 다니신 분이라 이해를 빨리 하시는군요.
수어지맥과 억불지맥의 차이에 대해서는 지도가 있어야 하는 관계로 다음으로 미룬다 하였으니....
3. 지리산의 지맥枝脈
지맥은 대간과 정맥의 하위개념이다. 즉 대간大幹〉정맥正脈〉지맥枝脈이니 지맥은 산줄기 계급 체계의 제일 하위에 있는 개념이다. 물론 기맥, 분맥, 단맥, 여맥도 상정할 수 있지만 너무 세분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논란만 부추기는 격이니 여기서는 언급을 피한다.
지맥이라는 계급이 붙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①‘산줄기 요건’으로 백두대간이나 정맥 그리고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지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여야 한다. 그리고 ②‘물줄기 요건’으로 그 줄기가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합수점형)여야 하며, ③마지막으로 ‘산줄기의 길이 요건’으로 그 도상거리가 30km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다만 ②요건의 경우 산줄기를 조금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를 두는 바, 가령 관련된 물줄기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울타리형)이나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산줄기형)의 경우 등이 그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합수점형, ㉯울타리형, ㉰산줄기형 등 세 가지가 유형에 해당되어야 한다. 좀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산줄기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차근차근 살펴보자.
㉮ ‘합수점合水點’형의 예
위 개념도는 백두대간 지리산 입구인 여원재에서 고리봉을 지나 만복대 ~ 반야봉으로 진행하는 대간능선과 대간길의 만복대 바로 앞에서 가지를 쳐 밤재 ~ 견두산 ~ 형제봉을 지나 서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33.2km의 가지줄기 개념도이다.
이를 위 지맥의 3요건에 대입시켜본다.
보다시피 이 가지 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줄기이니 ①요건에 합당하다. 그리고 이 줄기가 백두대간 만복대 부근에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서시천이라는 물줄기가 발원을 하는데, 이 서시천이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인 섬진강과 합류되는 합수점인 개념도 ‘A'의 곳에서 이 줄기의 맥이 잠기게 되니 이 역시 ②요건에 합당! 그리고 이 가지줄기의 도상거리는 33.2km가 되므로 기본 요건인 30km를 넘으므로 이 역시 요건 ③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이 가지줄기는 枝脈이라는 계급을 얻게 되고 그 이름은 강 이름인 서시천을 따서 ’서시지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고유명사가 된다.
㉯울타리형의 예
합수점형에 비해 설명이 조금 복잡해진다. 산줄기가 여러 개 나오긴 하지만 원리는 같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좌측 개념도의 주主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백두대간에서 큰 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이 가지를 쳐 나가는 모습이다. 그 가운데에서 보청천이 발원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맥 이름이 암시하듯 이 산줄기는 금강의 북쪽을 진행한다. 그러므로 이 보청천이 10대 강 중 하나인 금강과 만나는 합수점을 보면 된다.
그런데 이 보청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두 개의 산줄기가 잠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산경표 상으로는 팔음지맥과 금적지맥이 그것이며 대한산경표 상으로는 보청지맥과 보청북지맥이 그것이다.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필자가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한산경표의 이름으로 얘기를 이어가겠다.
똑같은 물줄기로 들어가는 두 산줄기의 우선권은 그 산줄기가 속한 주산줄기의 계급이나 세력에 따른다. 이 경우 백두대간〉정맥이므로 이 물줄기는 백두대간 몫이다. 따라서 보청천과 금강의 합수점으로 잠기는 줄기는 대간에서 분기한 줄기이므로 ①의 요건을 충족하고 합수점으로 갔으니 이 역시 ②의 요건을 충족한다. 마지막으로 이 가지 줄기의 도상거리가 57.7km가 되니 지맥이라는 계급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 지맥의 이름은 물줄기 보청천의 이름을 따 보청지맥이라 명명한다.
이렇듯 ‘합수점’형인 이 보청지맥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보청천으로 들어온 다른 줄기가 문제이다. 즉 이 줄기 역시 한남금북정맥이라는 정맥에서 분기 되었으므로 ①요건은 충족하며 이 산줄기의 도상거리가 약 49.6km가 되므로 이 역시 ③요건을 충족한다.
다만 합수점은 합수점인데 주主산줄기가 아닌 부副산줄기이기 때문에 위 보청천에 밀리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보청천의 북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므로 이런 경우는 지맥의 유형 ‘②울타리형’으로 보아 지맥에 편입시키기로 한다. 엄격한 해석보다는 산줄기를 유용하게 사용하자는 취지이다. 따라서 보청천의 북쪽으로 잠기는 산줄기이므로 이름은 ‘보청북지맥’으로 명명한다.
㉰산줄기형의 예
위에서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의 유형을 ‘산줄기’형이라고 분류한다고 했다. 이는 혹시나 합수점형이나 울타리형으로 분류될 경우 모두 잔가지 가령 여맥이나 단맥 등으로 처리되어 지맥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됨에 따라 선조들이 물려주신 이 소중한 산하를 유용하게 선용하지 못하는 불합리함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라 이해하면 된다.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인 합수점으로 가지 않는 특수한 경우니 이를 산자분수령의 예외 유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이나 하천을 동원할 수도 없으니 물줄기 이름을 붙이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그 산줄기가 마무리되는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을 따서 명명하기로 한다.
물론 이 경우도 ②의 합수점 요건에만 예외가 되기 때문에 ①, ③조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위 참고도의 경우 금북정맥의 구수산에서 3.2km 진행한 곳에서 가지를 쳐 태안군 이원면 내리의 후망산 부근에서 잠기는 산줄기는 ‘이원’면의 이름을 따서 이원지맥이라 하고 같은 방법으로 금북정맥의 솔개재에서 1.2km 진행한 곳에서 가지를 쳐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 부근에서 잠기는 산줄기는 대산읍의 이름을 따 대산지맥이라 명명하기로 한 것이다.
이게 지맥을 보는 원리입니다.
수어지맥의 경우 이를 신산경표의 억불지맥도 같은 경로로 진행을 하지만 위와 같이 논리를 설시하지 못한 점이 옥의 티 같은 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형님.
이해되십니까?
지도를 보고 그 원리를 지속적으로 봐야됩니다.
지리 주릉.
예전에는 지리 주릉을 반야봉 ~ 천왕봉으로 봤는데 1988년 이후부터는 성삼재 ~ 천왕봉이 된 느낌입니다.
순전히 교통의 편의성 때문입니다.
반야뵹 우측으로 만복대가 선명하군요.
만복대에서 정령치를 거쳐 세걸산 ~ 바래봉 ~ 덕두산....
서부(북)능선이자 지리태극종주 코스.
황홀하시죠?
그리고 창암산 너머 임천을 지나며 보이는 능선을 봅니다.
저 능선은 백두대간의 봉화산부터 내려오는 능선으로 임천과 남강의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게 되므로 임(엄)천지맥이라고 하죠.
참암산 맞은편에 있는 봉우리가 금대봉 그리고 백운산 푹 꺼진 곳이 등구재 그러고는 그 뒤 제일 높은 봉우리가 삼봉산이고 그 우측으로 꺼진 게 오도재.......
예전에 이곳을 지난 점필재가 영신봉을 지나 백무동에 내려서서는 저 등구재를 지나 오도재를 넘어 함양으로 돌아갔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이 앞의 계곡이 그 유명한 칠선 계곡이고....
그런데 이 청계산 형님은 무슨 산귀신 같습니다.
제대로 다 알아 들으시는 것 같으니.....
중봉과 하봉.
하봉은 크게 소년대와 영랑대로 이루어졌고.....
그리고 그 뒤가 오도재에서 이어지는 법화산.
그 뒤가 함양.
그 뒤가 대봉산과 그 뒤로 남덕유.....
제일 뒷 라인이 수도산과 가야산.
그 줄기가 곧 황강지맥.
중봉 우측 라인이 이 천왕봉에서 가지를 치는 덕천지맥으로 덕천강과 남강이 만나는 진양호 부근까지 진행하는 줄기이고,
앞에 툭 솟아 잇는 봉우리가 감수재 박여량에 의하여 초령으로 새봉이라고도 불리는 봉우리이며,
그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이 덕천지맥 왕등재봉에서 갈리는 줄기의 끝인 왕산과 필봉산이고,
그 뒤 우측에 봉굿 솟아 있는 줄기가 남강지맥의 황매산입니다.
"저기가 황매산인가? 거기서 보던 지리산이 바로 여기?"
"예. 그렀나이다."
그리고 우측 맨 앞이 웅석봉.
저 웅석봉 라인이 바로 달뜨기 능선이라고.....
존경하는 글쟁이 산악인 박인식은 웅석봉을 이렇게 얘기한다. “지리산은 어디서 보아도 그 산세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워낙 넓은 산자락 탓이다. 그래서 ‘한국의 산’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지리산은 애매모호한 추상화로 인식되기 쉽다.(중략) 웅석봉에서 바라보아야 지리산은 추상화의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웅석봉은 이런 봉우리이다. 어디서 보아도 지리산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웅석봉에서 만큼은 다르다는 얘기다. 박인식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웅석봉이 정리됨을 느낀다.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서 웅석봉이라고?
웅석봉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볼까? 이 웅석봉 정상에 곰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고도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모든 산이 그렇겠지만 특히 지리산은 ‘신성’, ‘신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神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감’, ‘검’, ‘곰’, ‘고마’, ‘구마’ 등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면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산이나 커다란 바위 등과 관련하여 ‘검산’, ‘검암’ 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山’, ‘劍巖’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곰’이다. 그 한자어가 ‘熊’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 곰바위〉 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봉은 그저 ‘신성한 산’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웅석봉에서의 진행은 2등급삼각점(산청26)을 확인한 다음 초소방향으로 나간다. 헬기장을 나가면 바로 삼거리이다, 여기서 삼장면을 만나는데 좌측 삼장면과 단성면의 면계가 이른바 달뜨기 능선이다.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 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 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 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 7권에도 빨치산이 황석산을 넘어 둔철봉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에서 달뜨기능선을 보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 졸저 전게서 516쪽
그리고 바로 앞으로 떨어지는 능선.
저 앞에 이동통신 송수신 탑 바로 앞이 로타리 대피소가 있는 곳인데 그 조금 더 앞이 법계사.
그리고 바위가 보이는 봉우리가 세존봉입니다.
그 좌측으로 '之'자 모양으로 멋지게 휘어가는 능선이 바로 구곡능선이라 불리던 황금능선이고요.
"저게 황금능선이야?"
"예. 그 능선의 끝이 구곡산인데 바로 덕산 마을의 뒷산 격이 되기도 하고요."
그 구곡산 뒤에 구름이 낀 곳이 진양호.
우측에 아까 보던 금오산.
아!
그런데 청계산 형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신백두대간에 대해서 물어보시는군요.
주저리주저리......
"이렇게 얘기해 주니까 이햬까 빠로 가네."
너무오래 머물렀습니다.
08:38
이제 그만 내려가시죠.
제가 천왕봉에 수십 번 올랐지만 오늘 같이 오래 머물렀던 덕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늘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내려가는 하산길입니다.
그러면서 삼신봉과 백운산을 보면서 복습을 하고....
그리고 천왕샘을 만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데...
동영상으로만 담고 사진 촬영을 못했으니...
편집되지 않은 허접한 동영상입니다.
09:12
그러고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로 나갑니다.
개선문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문은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서쪽에 있으니 서문이라고도 불리는 통천문通天門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에 있으니 동문이라고도 불리는 개천문開天門이다.
이 바위가 개선문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유래를 살펴보면..
1957년 당시 부산대에 재학중이던 성산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당도한 뒤 다음과 같이 그 소회를 적었습니다.
이 정도 오르면 개선장군들 이라고 생각하고 이 곳을 "개선문"이라고 명명했다.
그런가요?
그저 그런 느낌이었다는 것이겠죠.
써리봉 능선.
일출봉능선과 시루봉.
내려오면서 보는 정경은 아까 위에서 보든 것과 사뭇 다릅니다.
청계산 쥔 형님은 그걸 즐기고 계십니다.
삼신봉도 이제는 아주 높게 보이고...
호남정맥의 백운산은 없어지고 그 우측의 도솔봉만 보입니다.
금오산은 여전한데 생김새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09:55
그런데 신문창대에는 공사자재인 돌만 하나 가득 쌓여 있습니다.
문화재를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는 건가!
여기서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입니다.
05:25
거기서 남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 하나.
세존봉입니다.
거기에 우측으로 귀 모양을 한 바위 하나!
아까 얘기한 문창대입니다.
곧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文昌臺라는 얘기죠
목책을 넘어서 너른 바위 위로 갑니다.
우측의 커다란 바위!
여러 개의 각자들이 눈에 띕니다.
이 바위가 문창대와 관련하여 중요한 얘깃거리가 회자됩니다.
그런데 이 문창대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1373.9봉이 아닌 망바위 바로 위로 표기되어 관심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1978년 10월 26일 로타리 산장(지금의 로타리 대피소) 기공식에 앞서 이 산장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남명의 13대손 조재영은 진주산악회와 함께 기존 문창대에 대해 다른 곳을 문창대(기존 문창대에 대하여 ‘신문창대’라 함)라고 제시한다. 즉 ‘진양지 2권’의 내용 즉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해석해 보면 (법계사)절 서쪽 수십 보 거리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이다.’를 첫째 근거로 든다. 이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방향으로 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나오는 좌측의 너럭바위를 얘기한다. 그러고는 두 번째의 근거로 그 바위 아래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문창대를 처음 알린 이는 바로 진양지를 발간한 부사 성여신이다. 그의 칠언고시 형태로 쓴 ‘유두류산시’를 보면,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고 문창대를 그렸다.
유석이 축융봉 아래에는 옛부터 상봉사(上封寺)가 있었으니, 천왕봉 앞에 어찌 벽계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일찍이 서로 왕래하던 승려 선응(禪應)과 함께 도모하여 세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붕을 나무기와로 얹고, 판자로 벽을 막아 창을 내놓으니, 방이 한 몸 누이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만 가진 것 없는 승려들이라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오는 사람이 반드시 식량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만 하였다.
암자의 맞은편에는 이른바 문창대(文昌臺)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석굴 속으로 기어서 몇십 길을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진 4〉 신 문창대에서 본 원 문창대.
이렇듯 문창대는 법계사 동쪽에 있는 봉우리 즉 세존봉에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였으니 법계사에서 바라본 문창대의 모습과 같다. 반면 신문창대는 사실 ①위와 같이 성여신의 표현대로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②대臺의 외형을 갖추지 못한 점 가령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도 아니며. ③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 주변에는 日出峰. 혹은 陸象山 등 조잡한 각자들이 많이 새겨 있어 이 각자 역시 이들 중 하나로 여겨지며, ④이 각자의 제작 연대 또한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문창대는 그저 각자가 되어 있는 바위 정도로만 인식되어도 무난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인들의 산행기에 원 문창대가 지금의 장소와 너무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구 문창대’를 ‘원 문창대’로 보게 하는 이유이다.
- 졸저 전게서 208쪽
10:01
신문창대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옵니다.
그러고는 법계사로 들어갑니다.
안면이 있는 보살님과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이 법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에 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전해집니다.
우측으로 소나무 숲길 사이로 난 돌계단을 내려가면 화엄사 사하촌 숙박지구 옆으로 떨어진다. 새롭게 단장에 열중인 숙박지구를 빠져나가 화엄사 입구로 나간다.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해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년, 백제 성왕 22년, 고구려 안원왕 14년)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544년’ 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는 설(‘동국여지승람’설), 그리고 754년(경덕왕 13년) 황룡사 승려 연기조사가 발원하여 자은 것이라는 설(‘754년 설) 등이 있다.
연기조사의 화엄사, 연곡사, 법계사, 대원사
그러나 구례속지에 '544년에 천축국 승려인 緣起祖師가 세웠다."는 기록 그리고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국가 시책에 따라 백제연호를 무시하고 모든 걸 신라 연호로 고쳐서 사용토록 하였음을 볼 때 544년 설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한편 신라 진흥왕 5년이자 백제 성왕 22년인 서기 544년에 이들 사찰을 건립한 연기조사를 알기 위해서는 세 명의 연기조사가 있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鷰起와 緣起 그리고 煙起가 그들이다.
그렇다면 연기조사鷰起祖師는 누구인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리산 한 자락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마을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찾았더니 계곡에 독경소리가 흘러나오는 움막이 있었다. 얼마 뒤 독경을 마치고 나오는 스님과 마주쳤는데 그 분은 피부색도 다르고 입고 있던 가사袈裟도 달랐으며 무엇보다 언어 소통이 안 되었다. 다행히 양나라 스님으로부터 한문은 배웠다고 하기에 글로 대화를 나눈 결과 “나는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오게 되었으며이 나라 백제에는 ‘연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인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읽고 있던 경經은 부처님의 최고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고는 저녁 공양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피리를 꺼내 부니, 흡사 머리는 용 같고 이마에 외뿔이 달렸으며 몸은 거북이고 크기는 열 자가 넘어 보이는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 날아와 그 스님 곁에 앉더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부처님 나라에서 온 그 스님이 ‘연鷰’을 타고 다니니 연기존자鷰起尊者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 뒤 우리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연기존자가 법문을 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지은 곳이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다음 해 가을 법당을 완공하였으니 이때가 544년이었다. 주민들은 이 절의 이름을 연기사鷰起寺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존자는 자신이 화엄경의 소의경전으로 수행을 하고 있으며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화엄사華嚴寺로 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여 그렇게 정했다. 이 鷰起祖師는 이 화엄사뿐만 아니라 연곡사와 법계사, 대원사도 함께 창건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화엄사상은 신라의 그것보다 근 100년이나 앞섰으니 그 화엄사상을 흠모하여 백제의 화엄사상을 배우러 온 승려 가령 원효나 의상 등 신라의 승려들이 많았고 그들의 행적이 화엄사와 함께 자주 거론됨은 승전국勝戰國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당시 원효(617~686)는 화랑의 장교 출신으로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의 '추성楸城'이나 '성안城內‘의 말달린 평전'과 관련 있는 인물임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덕천지맥의 지리동부능선에 ’영랑대‘니 ’소년대‘ 하는 지명이 신라 화랑과도 무관치 않으니 지리산은 신라와 백제의 승려들 간에는 교류의 장이어서 원효가 화랑시절 덕천지맥을 이용해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길상봉(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왔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원효와는 여덟 살 연하이기는 하나 결의형제였던 의상(625~702)은 당나라에서 화엄을 배워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한 뒤 자신이 배운 화엄사상을 원효에게 은근히 과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유학파도 아닌 원효가 이미 화엄에 대해서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이유인즉슨 원효가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이에 원효의 강력한 추천强推으로 의상도 화엄사를 방문하게 됐고 그러고는 그 실상도 파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동의 연화장 세계가 바로 이 화엄사라는 것을 확인한 의상은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주위를 석각의 화엄경石經을 둘렀다고 봉성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화엄사를 중창까지 한 의상은 이런 인연으로 ‘연기조사緣起祖師’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으니 이 緣起祖師는 의상대사(625~702)를 말한다.
그리고 煙起祖師는 백두대간 얘기를 할 때 나오는 옥룡기의 도선국사(827~898)의 별호로 5교9산 동리산파의 혜철(785~861)의 제자이며 섬진강 건너 오산 사성암의 4성 중 1인인 그 연기조사를 말한다. 23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행을 하다 광양 백운산 아래 백계산의 지세가 왕성함을 보고 그곳에 머무르며 옥룡사를 창건했다. 이 옥룡사 덕에 1895년 옥룡면으로 승격된 옥룡사 주변 마을은 지금도 광양시 옥룡면으로 불린다. 정작 옥룡사는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고 지금은 한 개인의 선산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안에 있는 개인 사찰은 동백사로 불리다가 백계사라는 이름을 거쳐 지금은 옥룡사로 불린다. 사실 도선국사에 대해서는 옥룡기가 중요하다.
- 졸저 전게서 372쪽
몹쓸 사람들의 낙서!
그나마 그 낙서 밑에는 이 법계사의 창건 내력과 중창을 거듭하게된 내역 등이 자세히 각자 되어 있습니다.
특히 청신녀 신덕순 보살님의 얘기가 많이 들어 있군요.
돌아나오는 길에 그 상을 뵙고....
법계사는 병란과 화재로 수난을 많이 당한 절이었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을 보면 7권에 토벌군을 피해 이동하던 춥고 배고픈 남부군이 법계사에 들른 장면이 나온다. “도중에 천왕봉 중턱에 있는 법계사 마당을 지났다. 가람은 불 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천왕봉을 등지고 남해를 굽어보는 기막힌 조망이다. 어느 대원의 말이다. “이 절은 부유한 절이었다. 가을이면 시량柴糧이 그득하게 광에 쌓였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모든 길이 막힌다. 이듬해 해동될 때까지 외계와의 왕래가 일체 단절된다. 중들은 뜨뜻한 절방에 앉아 떡이요, 엿이요, 단술 등을 해먹으며 겨울을 보냈다. 얼마나 팔자 좋은 중들이었던가.”
- 졸저 전게서 207쪽 각주
그래서 이 법계사에도 대웅전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관계로 불상이 없습니다.
10:40
법계사 일주문 앞의 감로수가 새로운 장치를 했습니다.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
10:56
문창대의 바위들 보면서 내려갑니다.
성여신은 진양지에 이곳을 오르기힘들 정도의 이런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1:09
그러고는 망바위입니다.
이곳에 오르면 진주와 남해를 볼 수 있다고 하니 형님께서 바로 오르시는군요.
그러나 잡목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시니....
옛날과 지금은 그만큼 환경이 다르니....
이곳부터 장터목 삼거리까지는 된비알입니다.
11:32
삼거리를 지나 좌틀하면,
바로 현수교가 나오고....
칼바위를 지나면,
11:58
통천길 문입니다.
그런데 순두류 삼거리에 세워져 있던 우천 허만수 선생님 추모비가 보이질 않습니다.
공단사무소에 가서 물어보니,
법계교 건너기 전 이 표지석 뒤로 들어가면 보이게끔 잘 조성해 놨답니다.
다시 돌아서 아곳을 들어갑니다.
우천 허만수 선생의 추모비가 있는 곳입니다.
지리산의 전설 우천 허만수 선생은 이 세석에 움막을 지어놓고 생활을 하면서 등로를 개척하고 지도를 제작해 나눠주고, 길을 잃은 산꾼들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산꾼들 구조 활동도 하는 등 지리산을 사랑하며 도인 같은 생활을 하였다. 33살 때 지리에 들어와 30년 가까이 지리산 생활을 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천 선생.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지리산에서 영생하기 위하여 홀연히 사라진 것이라고 하던데... 그런 지리산 중에서도 세석이다.
- 전게서 444쪽
이 중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으로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루트이다. 관리동에서 법계교를 건너면 속세에서 법의 세계 즉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굳이 부처님 세계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세는 떠난다는 얘기다. 그러면 영원히 지리산의 신선이고자 했던 우천 허만수 선생의 추모비에 묵념을 한 번 올리고 갈 일이다. 우리가 산 그것도 지리산에 드니 그렇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 전게서 206쪽
법계교에서 보는 천왕봉
12:27
단골인 거북식당을 지나,
주차장 뒤 구곡능선을 보며,
12:29
남명선생을 뵙니다.
이쯤 되면 남명의 시 한 수를 들어봐도 크게 사치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그 유명한 두류산가頭流山歌이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둘레꾼 혹은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될 것이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좁게는 시천천과 덕천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중심에 놓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參考書的 풀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졸저 전게서 200쪽
황금능선이라는 상호의 카페를 지나 천왕사로 향합니다.
12:55
약수사를 지나면서,
미륵부처님을 뵙고,
12:58
천왕사로 듭니다.
조성 중인 불사.
안내판을 보고,
성모상을 뵙니다.
이와 같이 지리산 성모신앙의 중심에는 성모석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성모석상이 적어도 네 번이나 수난을 당하였다. 그 처음이 고려 말이다. ①황산대첩으로 이성계에게 대패한 왜구 잔당들은 화개재로 올라 영신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와서는 천왕이 자신들을 돕지 않았다고 하면서 성모석상의 목을 두 동강을 냈으며, 두 번째가 ②조금 전 얘기한 16세기 경 관서지역의 시승詩僧이었던 천연 사건인데 이 천연이 천왕봉으로 와서는 성모사 안에 있는 성모상을 보고는 이를 끌어내 부수고 바위 밑으로 던져 버렸던 것이고 그리고 ③1945년 11월 누군가가 성모석상을 보쌈하여 새끼줄로 감아서는 어디론가 버려졌는데 산청군 삼장면 ‘최기조’란 농민의 집에서 발견되어 두 달 뒤 다시 천왕봉으로 올라왔으며 ④마지막 하나가 1972년 2월 일어난 사건으로 이번에는 종교분쟁이었다 즉 타종교의 광신도가 천왕봉 노천암대에 있던 성모상을 보고는 우상숭배를 한다며 어딘가로 유기한 것이었다. 그것을 이듬해인 1986년 1월 12일 두상 부분은 진주의 비봉산 기슭 과수원에서, 몸통부분은 같은 해 5월 9일 천왕봉 아래 통신골에서 각 발견되었다. 이를 찾아낸 이가 바로 천왕사의 주지 혜범이었다. 혜범은 그때까지만 해도 수행만 하던 승려였는데 꿈에서 천왕 할매를 만났고 그 천왕 할매가 정확하게 장소를 알려줘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혜범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천왕사로 지었던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사건이었다.
한때 덕산의 두류산악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성모상을 훼손시키지 못하게 철창을 만들어 성모석상을 천왕봉으로 복귀시키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혜범스님은 요지부동이다. “성모할매에 대한 해코지가 반복되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또 천왕봉으로 올려드립니까?”
- 졸저 전게서 466쪽
지금은 폐지된 천왕제.....
버스 시간이 촉박하여 거의 뛰듯 터미널로 나옵니다.
우선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는 표를 끊어 13:40에 출발하는 버스에 오릅니다.
차표는 덕문교 부근까지만 끊습니다.
덕산 시내를 지난 버스는 소리담을 거쳐 덕문정이 있는 낯익은 곳을 지납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다시 뒤로 돌아갑니다.
덕문정을 방문하는 차량들의 주차장이 있는 곳.
그곳에 있는 입덕문을 봅니다.
지리산을 이야기하려면 그 출발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입덕문은 스승을 만나러 들어가는 문
둘레길은 우회전 하여 인도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만 외도를 해야겠다. 중요한 공붓거리를 놓치기 아쉬워서이다. 이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덕산교를 지나 지리태극종주의 끝이자 시작인 시무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곡점13km, 시천4km’의 교통 표지판 좌측으로 수준점(105.6m, 점의 번호01-00-31-02) 옆에 ‘입덕문入德門’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표지석이 보인다.
<사진 4〉 입덕문 표지석.
예전에는 덕천벼리德川遷라 하여 좁은 석문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일반 백성들은 이곳을 두류산 온갖 골짜기로 드나들 수 있는 입구로 여겼겠지만 남명을 흠모하는 선비들은 스승의 체취가 남아 있는 덕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여겨 몸가짐을 새롭게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좌측 덕천강을 따라 덕산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너른 반석은 남명 선생이 처음 덕산동을 찾았을 때 지리산 대문 격인 이곳에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갓끈을 씻었다는 탁영대濯纓臺와 제자들과 시를 나누던 곳인 덕암德巖 등이 옛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0년 경 도로공사를 하면서 자연석문인 입덕문은 없어졌다. 이를 1960년경 후학들에 의해 결성된 ‘입덕문보승계入德門保承契’의 계원들이 도로변에 세워놓았던 ‘入德門’이라 새겨진 표지석을 1982년 확장공사를 하면서 안쪽으로 다시 옮겼는데 이런 내용을 담은 ‘입덕문기’도 함께 세워져 있다.
- 졸저 전게서 189쪽
그런데 그 옆을 보면 구구절절이 뭔가가 적혀 있습니다.
이 글을 도구 이제신이 썼다는 얘기로 이 글은 김선신의 두류전지에도 나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각자를 쓴 이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남명학연원에서는 두류전지 기록에 의하여 도구라고 하였는데, 이에 분성배씨 종친회가 분연히 들고 일어난 것이다. 즉 눌암訥庵 박지서의 도구대기陶邱臺記를 보면,'德川遷公題其巖曰入德門 其後裵參知大維書而刻 덕천벼리는 공公(도구 이제신)이 그 바위의 이름을 입덕문이라 지었는데, 그 후 參知 배대유가 繼書하여 그걸 새겼다.'는 내용 때문이다. 이는 하진달(1778~1835)의 역헌문집에도 나오고, 성섭(1718~1788)의 교와문고에도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J3클럽'의 배병만 방장도 필자에게 이를 직접 확인해 주었다.
- 졸저 전게서 189쪽 각주 8)
덕천강가로 내려가 탁영대도 확인합니다.
원지로 나가 귀경하려는 시간이 다가오는군요.
아무래도 산천재와 덕천서원은 못 볼 것 같습니다.
서둘러 덕산교 부근으로 가서 지리태극종주 들머리와 지리산둘레길 8구간 이정목을 보기 위하여 나갑니다.
구곡산.
천왕봉과 중봉.
지리태극종주 들머리로 가는데 갑자기 큰 안내판 하나가 나옵니다.
내용인즉슨 백두대간의 끝은 천왕봉 - 웅석봉 삼거리 ~ 수양산 ~ 사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전국 산악인들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명 선생의 시에 나오는 양단수가 두물머리이고 이는 명당혈이 있다는 등 좀 횡설수설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15:11
덕산교 건너 지리산 둘레길 8구간 이정목에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길건너 덕산슈퍼에서 표를 끊고 15:25에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원지로 나갑니다
늘 천왕봉을 보며 사는 덕산주민들.
덕산 사람은 이데올로기 투쟁의 희생자
이런 곳이 덕산이니 아무래도 덕산 주민들에게 지리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심은 대단할 것이다. 면면이 ‘지리산 정신’이 흐른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찍 ‘두류산악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지리산을 바라보며 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매년 이어지는 천왕제가 그걸 반증한다. 반면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빨치산이 지리산으로 쫓기듯이 몰려들어왔을 때 지리산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덕산도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들도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지리산이 베풀어주는 것에 비하면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애써 자위한다. 그래서 지리산을 떠나지 못한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 졸저 전게서 210쪽
오늘 찍은 동영상을 분석해 보고 며칠 뒤 다시 와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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