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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백두대간4

백두대간 구간 진행(복성이재 ~ 여원재 ~ 주지봉)

 

백두대간을 지나다 보면 흔히들 놓치기 쉬운 것이 몇 가지들 있습니다.

물론 대간 줄기를 크게 놓고 봤을 때 사소한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냥 지나쳐도 별문제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알고는 지나가자는 취지에서 몇 가지 케이스를 놓고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 크게 관심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그의 명저 심춘순레에서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문자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국토의 70%가 산인 우리나라.

이 산들의 이음인 산줄기 중 나라의 관문인 백두산을 떠나 가장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가장 긴 산줄기가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을 하며 바다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물줄기와 산줄기를 내어놓습니다.

예로부터 幹은 줄기요 脈은 가지라 했습니다.

도선국사의 옥룡기에서 출발한 우리 조상들의 산줄기에 대한 인식이 백두산과 두류산의 이음이라는 인식에 이르러 산경표가 만들어지고 백두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하나밖에 없는 간이니 대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백두대간은 자연스럽게 지방을 경계하는 기준이 되게 되고 그 대간을 사이로 양 지방은 서로 언어, 풍습을 달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결과가 되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지도를 통하여 그런 것들을 인식하며 걸었고 또 걷고 있습니다.

 

저는 백두대간의 이번 구간을 걸으면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1. 올바른 대간길을 꼭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첫 번째가 매요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소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요 교회의 모습

매요 교회는 행정구역상 남원시 운봉읍 매요리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며 이 매요리의 매요마을 뒷동네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도계, 시계, 군계,역할을 하는 이 백두대간이 이곳에서는 남원시와 장수군의 경계가 되는 시계市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지도 #1에서 보듯 우리는 편하게 도로를 따라 걸어 남원시와 장수군과의 경계가 되는 대간길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죠.

곧 지도에서 구분하는 보라색깔의 시계를 따라 걷지 않아 508.1봉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죠.

지도 #1

 

그런데 사실 이 매요교회 뒤로 가면,

밭이 있고 민가가 대간 길에 가로놓여 있어 그 집 좌우로 이동을 하려 하면 잡목과 포도밭이 길을 막습니다. 

즉 매요교회 뒤로 넘어가 지도 #1의 '가'에 접속하면 이렇게 민가가 가로막고 있어 대간꾼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어쨌든 4륜구동의 엔진을 가진 대간꾼들은 그걸 헤치고 진행하여,

508.1봉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는 알만한 사람들이나 산악회의 표지띠도 보이고 그다음부터는 ,

수월하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나주 임씨 묘 앞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매요마을을 지나자마자 우틀하여 만나는 지도 #1의 '나'인 것이죠.

올바른 대간길을 따라 가느냐 하는 것은 그러면 백두대간 길로 갈래? 아니면 신백두대간 길? 원백두대간 길? 등 여러가지 논의를 낳습니다.

어느 길로 가느냐는 각자의 몫이라는 얘기죠.

하지만 백두대간을 걷는 의의를 놓고 보자면 최소한 이런 길이 있다는 것쯤은 인식하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주지사住智寺 소고

 

지리산 천왕봉에는 성모묘라는 사당이 있어  성모석상을 모시고 제를 올렸었죠.

진양지를 보면  "향적사는 천왕봉에 있다. 성모묘聖母廟의 향화香火를 위해 건립됐다."라고 기재 되어 있습니다.

향화란 세간에서는 제사지내는 것을, 절에서는 불공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얘기는 진양지 뿐만이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석봉 남쪽 그러니까 장터목대피소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던 이 향적사는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죠.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이 주지사 또한 향적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여원재를 향하다 올려다 본 주지봉(오른쪽 석봉)

지리산에는 소위 기돗발이 먹힌다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묘향대, 문수대, 금강대 등 이른바 지리 10대라 불리는 곳들은 특히 그러하여 국립공원에서 철저한 단속을 하기 전까지는 늘 기도꾼들로 붐빌 정도였습니다.

지리산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고 하여 지리 10대에는 들지 못하는 주지봉.

이 주지봉에는 자연 석굴이 있고 주지봉 정상 또한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어 이 주지봉의 기를 받기 위하여 늘 기도꾼들로 붐볐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기도꾼들의 향화와 뒷바라지를 위해 어떠한 시설물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일 터.

그것이 바로 주지암입니다.

지금도 이 석굴에는 부처님이 아닌 단군할아버지라는 석상을 모시고 있다고 하니 토속신앙을 신봉했던 기돗꾼들의 얘기들을 어느 정도 사실史實로 인식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지도 #2

 

현행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주지사住智寺 부근을 보면 주지봉이 그저 이렇게 648.3봉 옆에 위치한 것으로만 나와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영조때(1724~1776) 간행된 해동지도에는 注之山이라는 이름으로,

대동여지도에도 같은 이름으로,

1870년대에는 周之峯으로 불리던 이 주지봉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취를 감추고는 해방 이후에는 제 이름 대신 오히려 사찰 이름만 올려져 있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간신히 해발 648.3이라는 무명봉으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보자면 이 주지봉은 백두대간길에서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엄격하게 산줄기를 따라 걷자면 여기서 좌틀하여 사면치기를 하면 안 되고,

이 사거리 즉 주지사와 주지봉 그리고 백두대간길로 갈리는 여기서 좌틀하여 대간길을 이어가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거리에서 이 부처님 좌측으로 들어 약 100m 만 진행하여,

이 사다리에 의지해 올라가면,

빛바랜 제 예전 표지띠도 볼 수 있고,

제단 같은 곳에서,

지나온 고남산847m과 방아산성 그리고 산성 뒤로 요천지맥의 천황산910m과 고남산 좌측으로 멀리 팔공산1149m도 볼 수 있습니다.

고남산 우측으로는 계관봉이 보이고 그 우측 라인이 임천(연비)지맥.

그 임천지맥의 연비산 우측으로 오봉산879m과 팔량재 우측의 삼봉산1187m도 볼 수 있으니 그 앞의 황산699m이 낮게만 보임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여원재에서 24번 도로를 따라 이백면을 거쳐 남원으로 나가는 도로를 보면서 제일 뒷줄에 있는 산줄기가 요천지맥이라는 인식도 합니다.

저 위로 올라가 볼까요?

부처님의 수인手印이 통인이라고도 불리는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계십니다.

발원문을 새긴 석판들....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공간.

이곳에 오르니 중앙에 황산과 그 뒤로 오봉산 그 좌측으로 연비산이 더 선명하며 그 우측으로는 북부지리의 삼봉산까지 보이는군요.

수정봉과 구름에 가린 만복대.

이런 조망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들러야 하는 이 주지봉은 대간길에서 10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고지도에도 나와 있는 봉이기도 하니 백두대간에 속한 봉우리라 봐야 할 것입니다.

참,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적산赤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불렸었던 저 고남산에 관해 재미있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운봉의 옛 지도나,

1872년 고지도,

그리고 김정호의 동여도를 보면 지금의 고남산이 적산 赤山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赤과 관련하여 지리산 빨치산과 연관 지으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지도 제작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허무맹랑한 얘기죠.

 

즉 이는 국어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적산의 赤은 '박, 밭, 불' 등의 뜻을 가진 지명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바뀐 이름입니다.

그러니 원래는 '아래 아'를 써서 'ㅂ.ㄺ산' 즉 산악숭배사상의 소산인 '신성한 산'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황산전투를 앞두고 이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을 하고 제를 올렸던 것이죠.

그러니 적산赤山인 이 고남산을 태조봉이나 고조봉高租奉, 제왕봉帝王峰, 일광산日光山 등으로 부른 이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노령 蘆嶺은 어디인가?

 

얼마 전 유리나라의 대표적인 익스트림 산행 클럽인 'J3 클럽'의 방장인 배병만 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청담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팔도론을 보면,

'남원 동쪽으로 노령을 넘으면 운봉현이 나온다. 지리산 북쪽의 고개 팔량치 위에 있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큰길이다. 고을 앞에는 황산이 있는데 고려말에 우리 태조께서 이곳에서 왜구를 크게 섬멸하셨다'

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노령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책을 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오직 제 책만이 그것을 설명해 주는데 선뜻 자기 확신을 못 하겠다는 게 그 요지였습니다.

 

글쎄요.....

그래 도대체 남원의 노령은 지금의 어디겠습니까?

 

일단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고개는 세 개 정도입니다.

그 첫 번째가 24번 도로가 지나는 여원재(1597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통영대로와 부분적으로 겹침)이고, 

두 번째가  현재 갓바라재라고 불리는 입망치,

그리고 세 번째가 주천면 사람들이나 정령치를 넘은 달궁 사람들이 남원장을 가기 위해 이용하던 구룡치 정도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단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을 봅니다.

 

갈대가 많아서 노치마을이라고?

이 노치마을 뒤편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전면에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 다섯 그루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을 들여 가꾼 곳이다. 그 나무 바로 밑에 당산제단이 있다.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는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로 지역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한편 마을에서는 자신의 동네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노치마을은 수정봉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갈재’라는 이름이 산에 갈대가 많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에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갈대라고 한다면 바다나 강가의 물이 있는 곳에 자라는 식물 아닌가? 그런데 산꼭대기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를 써서 蘆峙마을이라니!

 

이는 국어학적으로 보아 이 마을의 생김새를 보고 가져온 이름이 변하여 현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즉 예로부터 이 마을은 주촌면과 운봉읍의 경계였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백제와 신라의 국경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갈라지다', ‘갈리다’라는 의미를 갖는 마을이었다.

 

갈라산이나 갈미봉 같은 이름의 '갈'도 칡이나 갈대와는 관계없이 '산꼭대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이라는 특유의 의미를 지닌 봉우리들이다. 이 '갈라지다'라는 말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훈차訓借하여 칡'葛'을 쓰다 보니 난데없이 칡이 많이 나는 봉우리가 되었고, 음차音借를 하다 보니 갈→갈대→갈대 노蘆를 써서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갈대가 많은 산’이 노령蘆嶺 혹은 노치蘆峙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점잖게 주촌면과 운봉읍을 가르는 마을 혹은 峙를 감안하여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던 고개가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령산맥의 노령蘆嶺의 옛 이름이 갈재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추령秋嶺이 가을 단풍이 예뻐서 추령이 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가르다→갈→가을→‘가을 秋’가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59쪽

 

그렇다면 1751년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말한 노령은 지금의 어디인가요? 

1895년 김정호의 청구요람을 보면 백두대간 길은 선명함에도 남원 동쪽에 노령이라는 고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살펴보자면 적어도 ①여원재라는 이름은 이성계의 황산대첩이 있었던 1380년 정도에 생긴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임에도 청담이 이를 모를 리 없었으니 여원재는 탈락. 

한편 1897년 이전의 남원부지도를 보면 백파방과 백암방이 보이는데 이들 마을은 1897 고종 때 현재의 이백면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게 됩니다.

그러니 위 지도의 이백면의 옆도로가 이순신 장군이 통영대로를 이용해 합천에 있던 권율 장군을 만나러 가다가 운봉에서 그가 순천으로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다시 되돌아 나와 밤재를 이용해 구례로 갈 때 이용했던 길입니다.

여원치에서 내려와 통영대로에서 갈라져 남원 방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하는 입장으로 길을 봅니다.

②이제나 저제나  남원에서 여원재를 가기 전 이백에서 바로 과립리를 지나 운봉으로 가는 샛길이 있다면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대각선 방향으로 진행하는 게 더 빠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샛길을 지나자마자 마을이 나온다면 아무래도 그 길을 택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고개의 이름이 노령으로 불렸다면 그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적당한 이름이 없었던 자신들의 마을을 이 고개의 이름을 따서 노령蘆嶺마을 혹은 蘆峙마을로 불렀을 겁니다.

그렇다면 위 고지도에 보이는 상원천방 아래  노치촌이 보이고 이 노치촌이 현재도 노치마을로 불린다면 그 마을 부근에 있는 고개가 그 이름이었던 흔적으로 보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이 노치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개는 단 하나 지금의 입망치고개라고 여겨집니다.

일제강점기 지도에도 선명하게 길이 나 있었으나 이름이 없던 고개.

최근에 이르러 국립지리정보원에서는 이 고개 부근에 운봉 쪽에는 갓바래라는 지명이 있고 이백면에는 과립리라는 지명이 있자 '笠'이 삿갓 즉 갓이고 '바래'는 望의 훈이 '바랄'임에 착안하여 거꾸로 笠望峙라는 한자를 만들어내 결국 갓바래재 혹은 입망치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그 노령의 흔적이 노치마을 즉 노치촌이고, 그 이름의 어원은 갈대가 아니라  원백두대간에서 곡중분수계로 갈라지는 맥의 흐름을 읽은 우리 조상들의 날카로운 지리 감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산림청에서 제작한 안내판에도 여지없이 노치마을의 유래가 "갈대가 많아...."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인터넷의 폐해입니다.

 

③위 남원부지도의 노치촌 옆을 지나는 소로가 60번 도로와 같이 움직이는데 여기는 구룡치九龍峙라는 어엿한 다른 이름이 있어 설득력을 잃습니다.

 

이렇게 배병만 방장님과는 대화를 끝맺었습니다.

 

지겨우시겠지만 하나를 더 말씀드리자면,

위에서 언급한 백두대간의 곡중분수계에 대해서 꼭 알고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지도를 보니 구룡치 부근에서 지선支線 하나가 우측으로 빠져나가는 게 보인다. 구룡폭포 지선이다. 사실 보는 이에 따라 1구간의 하이라이트는 오히려 구룡폭포로 볼 수도 있다. 구룡폭포는 정규 둘레길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명승지로서 갖는 무게 때문에 이렇게 순환코스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이 책에서는 이런 구간을 지선支線이라 부른다.

 

백두대간은 생물生物이다

 

문제는 이 구룡폭포가 가지고 있는 지위의 문제이다. 구룡폭포로 내려가는 원천천은 물줄기가 좁고 상당히 빠르다. 관련하여 좀 어렵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관련된 문제이니 짚고 넘어가자.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신생대 제4기 정도인 2~3백만 년 전에는 백두대간이 지금의 고남산~여원치~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백면과 주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다가 728.8봉에서 덕치리 방향으로 꺾여 지금의 구룡폭포를 넘어 906.2봉~1109.3봉을 지나 잠시 서시지맥 길을 따라 만복대로 가는 루트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생대 제4기 이후 우리나라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다음 이 부근에서 두부침식頭腐浸蝕으로 인해 하천쟁탈stream piracy이 일어났다. 

 하천 쟁탈로 바뀐 백두대간길

 

살펴보면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다음 북류 및 동류하여 엄천강을 지나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 쪽으로 골짜기를 더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그 유역을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60 도로 중 백두대간이 지나는 ‘가’~‘나‘ 구간의 좌측은 하천쟁탈의 흔적으로 지금은 주천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舊 주촌천' 즉 무능하천은 물이 흘러 그 물은 북동진 하여 람천에 합류되어 남강→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곧 낙동강의 최상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럴 경우 고리봉~고기3거리~노치마을~759.2봉의 라인은 백두대간이 아닌 것이 된다. 반면 만복대~1109.3봉~906.2봉~728.8봉~ 759.2봉(일명 덕운봉) 라인이 원백두대간 라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의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라인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divide in v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재 운봉 고원의 남서쪽에 치우쳐 위치한 백두대간의 분수계가 수만 또는 수십만 년 후에는 고원의 중앙부로 이동될 가능성이 높다.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여! 고리봉에서 내려와 고기삼거리~노치마을의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 약 2km 구간을 그냥 걸을 일이 아니다. 도로 왼편은 섬진강 최상류 지류인 원천천 유역으로, 원천천이 두부침식으로 분수계를 넘으면서 과거 낙동강 최상류 구간을 쟁탈한 곳이라는 사실과 도로 오른편은 여전히 낙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면서 원천천은 급경사의 사면을 따라 활발하게 두부침식을 하면서 분수계를 넘고 하천쟁탈을 하였기에,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동강 최상류 구간보다는 침식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 바닥의 고도는 왼편이 오른편에 비해 10m가량 더 낮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래야 백두대간이 더 재미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는 둘레꾼들도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53쪽 이하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갖는 759.2봉과 구룡폭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