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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백두대간4

백두대간 속리산 구간 - 일기예보가 빗나가길 그렇게 염원했건만.......

8월 28일 ~ 9월 4일.

아니 9월 5일 새벽 5시 40분이 도착 예정시간이니 9월 4일이 아닌 9월 5일로 보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이번 베트남 출장 일정입니다.

떠나기 이틀 전 영대장님으로부터 멋진 코스를 제보받습니다.

밤티재 가기 전에 견훤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는 거 같은데 그 루트를 이용해 봤냐는 것입니다.

참고도 #1

바로 이 루트(녹색선)입니다.

문장대에서 헬기장으로 들어서서 암벽구간을 지난 다음 밤티재로 빠져나가기 바로 전 봉우리에서 우틀하여 진행하는 능선.

등고선을 보건대 아주 부드러운 능선이었습니다.

이번 대간 구간의 하산길은 그 루트를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항전을 하던 산성의 흔적이 있었던 것을 복원한 것인데 그 산성의 주봉인 547봉을 지나 메인도로인 #32 도로에 떨어지는 루트이니 여러모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군요.

하여간 영대장님의 미끼 투척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일찌감치 "혹시 자리가 비게 되면 한 자리 부탁합니다."라고 신청을 해놓고 베트남으로 떠납니다.

판시판과 사파 일대 그리고 닌빈의 여러 곳의 취재를 흡족하게 마치고 귀국 준비를 합니다.

다행히 귀국하기 전날 빈자리가 났다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입금을 하고 일기예보를 검색합니다.

아뿔싸.......

비 소식 & 온종일 흐림!

그렇다면 문장대 지나 바위 구간을 지나기 쉽지 않을 텐데......

 

여독이 풀리지 않은 채 수지구청으로 나가 반가운 얼굴들을 만납니다.

그러고는 너무 짧은 운행시간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목적지인 갈령에 버스는 도착합니다.

갈령도로개통기념표석

 

보슬비가 내리는 게 꼭 벌레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 찝찝한 느낌을 줍니다.

물과 친하지 않은 휴대폰의 특성상 그리고 일반 카메라보다는 갤폰의 촬영 성능을 지나치리만큼 신뢰하는 저로서는 오늘 촬영은 종을 친 셈!

Que sera sera......

 

그건 그렇고 葛嶺이라....

갈령, 갈미산, 갈미봉, 가리산, 가리왕산, 관모봉, 갈모봉 등 이른바 '갈'자 계열의 지명을 보면 ①葛의 경우 칡과 연결시키거나, ②渴의 경우는 사람이나 말이 그 고개(갈고개)나 산(갈뫼)을 오르다 보면 목이 말라지기 때문에 목마름과 결부시키거나, ③곡식이나 장작더미를 쌓아놓은 형상을 보고 지었다고 하거나(加里山), ④대가리와 같이 사람의 머리(높은 곳) 형상에서 따온 삿갓이나 갈모〉 갈미 등의 갈미봉, 갈모봉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지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두 우리나라에 우리 글이 없던 때 중국의 한자를 써서 그 이름을 부르다 보니 차용한 한자가 저마다 달라 파생된 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洛陽이었고,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 고령가야가 자리 잡고 있었던 점에 착안해 이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낙동강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가야伽倻나 가락伽落이 우리의 옛말 '이리저리 갈라져 있다.'라는 말이니 옛말 '가ᄅᆞ 혹은 ᄀᆞᄅᆞ' 즉 '갈라진다. 나누어진다'라는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이 기념비의 뒷면을 보면,

"이보오 길손들아!  天下의 風流客이 葛嶺 높은 고개 뜻 없이 넘을쏜가!"라 써서 여기서는 그 '갈葛'을  '높다'는 의미로 사용한 듯싶은데 저는 이와는 달리 이를 산줄기학 즉 산경학山經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살펴보건대 도선국사의 옥룡기를 보면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지금의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를 신라말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즉 산의 나라에서 산줄기와 물줄기에 기대어 살던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면면히 관통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큰 산줄기(幹)를 보았을 것이고, 그 산줄기에서 갈라지는 가지줄기를 脈이라 하여 그 흐름도 읽으며 이를 또한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모든 산줄기와 물줄기의 근원이 되는 산줄기라 하여 幹이라 불렀고 그 幹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큰 산줄기이니 특히 대간大幹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산줄기의 위계를 감안하여 대간 아래 1 정간 13 정맥을 파악하여 이를 산경표에 올렸던 것이고 또 여기에 더하여 대간이나 정맥에서 가지를 치는 다른 지맥支脈의 흐름도 당연히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시인 묵객이나 풍수지리가들이 이 갈령을 지나면서 이 큰 산줄기(대간)의 흐름에서 상주 쪽으로 갈라져(葛) 내려오는 이 가지줄기를 보았던 것이죠.

이 지맥支脈을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은 갈령 ~ 갈티재 ~ 작약산 ~ 태봉산의 이음으로 보아 도상거리 약 47.9km의 작약지맥芍藥枝脈이라 불렀으며, 저희같이 물줄기를 중시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이 갈령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인 이안천이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인 낙동강에 합수되는 것을 보고 이 물줄기의 이름을 따 이안지맥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간단하게 갈령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여기서 가지를 치는 이안지맥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날씨 때문에 사진 촬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시간이 새벽이어서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속리산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되었군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16. 12. 24. 지인들과 이 구간을 진행한 사진이 있어 그 사진을 인용하기로 합니다.

마침 때도 때인지라 시원한 설경을 맛보면서 걷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지도 #1

 

표석에는 이곳이 해발 443m, 하지만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는 수준점에는 454.9m로 나와 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고,

 

49번 도로 건너 이안지맥이 우측 두루봉 874m으로 연결되는 라인을 봅니다.

올라가는 지맥 라인 좌측으로는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임도도 보이는군요.

우측으로 고개 좀 돌리니...

예.

그렇습니다.

천황봉입니다.

파인더 안으로는 좀 희미하긴 하지만 형제봉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제가 천왕봉이라는 이름보다 천황봉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 말씀드리기로 하죠.

오르는 도중 한검선사님을 만납니다.

선사님의 표지띠에 누군가가 '사드 철거'라는 구호를 쓴 것을 보니 최소한 8년 전 이전에 단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도 이렇게 새것이라니.....

사실 오늘 선사님은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을 역逆으로 진행해 문장대 정도에서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아니면 거기서 그냥 화북 쪽으로 하산하려고 했었습니다.

즉 '배려의 화신'이신 선사님은 우리도 초행길인 위 참고도의 녹색선 즉 '밤티재 전 봉우리 ~ 견훤성' 루트를 자신이 직접 거꾸로 진행하여 개척을 한 다음 표지띠를 달아놓아 우리의 진행에 도움을 주려했었던 것이죠.

그런데 비가 오는 날씨 문제로 우리가 그 구간을 포기하자 선사님께서도 그 일정을 변경 그저 청화산을 오르는 걸로 자신의 오전 일정을 마치고 자신은 오후 일정 때문에 대전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귀책사유로 진행은 하지 못했지만 한검선사님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그 정도로 하고....

그러고는 갈령삼거리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여기서 대간길에 접속합니다.

정말 오래된 이정표....

우리가 올라온 갈령 방향.

비재 방향.

형제봉 방향을 따릅니다.

갈령삼거리가 710 고지 정도 되니까 831m의 형제봉까지는 고도를 좀 올려야 합니다.

저 바위봉이 형제봉.

이 형제봉은 주위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좌로 틀어 올라가야죠.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이 시간.

안타깝지만 그저 보슬비 속에서 형제봉은 오르지 못하고 바위봉인 이 형제봉을 된비알로 우회하느라 대기시간이 좀 길어집니다.

 

마음속으로나마 형제봉을 올라가 봅니다.

이 형제봉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그리고 화북면 등 삼개면이 만나는 삼면봉입니다.

비재 건너에는 지난 구간 지나온 봉황산 740.6m이 크게 자리하고 있고,

진행방향으로...

가운데...

음..

천황봉입니다.

속리의 최고봉인 천황봉.

보통은 천황봉이나 천왕봉이 있으면 비로봉이 없을 법한데 이 속리만큼은 두 이름의 봉우리를 다 가지고 있군요.

어찌 보면 좀 욕심이 많은 산인 것 같습니다.

 

비로봉과 천왕 혹은 천황봉이 양립할 수 없는 이유?

뭐 꼭 양립할 수 없다는 것보다는 두 개의 최고가 한 곳에 있기에는 좀 벅차다는 것이죠.

삼국지의 제갈 량과 사마 의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이유를 좀 살펴볼까요?

 

우리 민족 최고最古의 신앙은 산악 신앙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환웅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를 거쳐 늘 우리 민초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천왕(황)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산이든 명산에는 천왕(황) 봉에 제단 즉 제천단을 두고 제사를 드렸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고....

따라서 이 천황이나 천왕은 어느 산에서도 최고봉이라는 뜻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비로봉은 불교 신앙의 한 단면입니다.

즉 불교에서 부처님 중 가장 으뜸인 부처님은 비로자나불입니다.

그러니 불가의 기운이 가득 찬 산에서는 그 최고봉을 비로봉이라 불렀음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습니다.

금강산, 묘향산, 오대산, 치악산, 소백산 등 이른바 비로 5봉이라고 하는 산에 비로봉이 최고봉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려시대 이후에 비로봉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이 속리산의 경우를 법주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생각해 봅니다.

짐작건대 불교국가인 고대시대부터 비로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많이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속리의 최고봉은 이미 천황봉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명찰인 법주사를 창건한 다음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최고봉이 아닌 다른 봉에 붙이긴 붙여야 할 텐데...

결국 남의 봉우리 이름을 빼앗을 수는 없어 부득불 다음 고봉 1031.9m에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 천황봉에 이르는 대간길이 너무 뚜렷하게 보입니다.

앞의 641.5봉을 하여 우측으로 틀어 진행하다 다시 중앙으로 꺾어 진행하는 대간 라인이 확실하게 잡힙니다.

그러나 우측으로 조항산, 대야산, 희양산, 조령산 부근이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아쉬워지는군요.

 

바로 우틀하여 급경사를 내려갑니다.

이제부터 상주시와 보은군의 도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피앗재입니다.

여기서 좌틀하여 내려갈 경우 만수리에 있는 피앗재산장을 만나게 됩니다.

대간을 1박 2일로 하거나 충북알프스를 할 경우 이 피앗재산장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죠.

641.5봉으로 올라 우틀하고,

뒤를 돌아 형제봉을 봅니다.

지도 #1의 '다'의 곳은 조망이 좀 되는 곳입니다.

천황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좌측으로 한남금북정맥 라인의 흐름이 경쾌하고....

 

이 부근에서 아침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이상하게 제가 가지고 간 막걸리는 탄산이 다 없어졌는지 밍밍하기만 하고.....

하는 수없이 배바위님의 붉은 뚜껑의 소주로 입맛을 다십니다.

몸이 으스스하여 빨리 일어납니다.

725.8봉을 지나....

지도 #2

지도 #2의 '라'의 곳에 있는 헬기장을 지나,

703.2봉을 통과합니다.

천황봉은 우뚝 솟아 있고.....

마지막이 가팔라 보입니다.

만수동의 깊은 계곡을 봅니다.

그 뒤로 희미하게 구병산이 보이고...

형제봉은 봉우리 끝만 살짝 보이고.....

이제 된비알이 시작됩니다.

도화리 이정목

우리는 조금 이따 이 백두대간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하는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보통 대간을 마치고 한남금북정맥을 할 때 그 첫 구간에 들기 위하여 그 들머리와 가장 근접한 곳을 택하여 오르게 되는데 그 들머리가 바로 이곳 도화리입니다.

참고 사진 #1  천황사 전경

그리고 그곳에는 천황사가 있는데 이 절 뒤로 이곳으로 오르는 등로가 나 있습니다.

예전 저는 이 천황사를 시작으로 이곳으로 올라 한남금북정맥 산행 제1구간을 시작했었죠.

물론 그때도 홀로 산행이었습니다.

'홀대모' 정신에 투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산죽밭을 힘들게 헤쳐 지나가는데 길이 갈립니다.

좌측은 한남금북정맥길 그리고 우측은 대간길이죠.

잠깐 좌측으로 들어 바위를 확인하며 추억에 젖어 봤습니다.

다시 나와 직진을 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안내판.

이 안내판 뒤로 진행하여 좌측 바위를 지나면 아까 그 산죽밭 좌측에서 넘어오는 길을 만나 정맥길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북진을 하면서 지리산 영신봉에서 낙남정맥,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이미 만났고 여기서 한남금북정맥길을 만났으니,

 

이제 정맥과의 만남은 매봉산 삼수령에서의 낙동정맥만 남았군요.

그런데 사실 산경표를 지금에 와서 보면 실제와 조금 안 맞는 부분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를 새롭게 정리한 책이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이죠.

신산경표는 방금 얘기한 이 한남금북정맥을 없애고 호서정맥이라고 다시 명명하고 그 정맥의 끝은 안흥진에서 금강 하구로 돌립니다.

이것 말고 여러 가지 케이스들이 있지만 이는 여기서 왈가왈부하기엔 너무 할 말이 많고...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합니다.

 

마지막 피치를 올립니다.

 

그러고는 천황봉으로 오릅니다.

대원들이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습니다.

 

저는 천황봉으로 불렀는데 정상석에는 천왕봉이라 표기되어 있군요.

천왕봉과 천황봉.

어떤 게 맞을까요?

 

천왕봉인가, 천황봉인가?

“형, 근데 천왕봉이야, 천황봉이야? 예전에 신문에 떠들썩했던 한 기사가 생각이 나네.”

벌써 10년이 됐나? 한때 신문 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기사가 하나 있었다. 산 이름과 관련하여 일제 잔재 청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증폭시켰던 일이었다. 바로 천황봉(天皇峰)이냐 아니면 천왕봉(天王峰)이냐에 관한 논쟁이었다.

논쟁의 불씨는 녹색연합이 던졌다. 1991년 환경문제의 대안을 고민하면서 만들어진 배달환경연구소가 있었다. 이 연구소가 확대·개편되면서 출범한 게 녹색연합인데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동안 꾸준하게 백두대간, 연안해양, 탈핵운동(脫核運動) 등을 이끌면서 SOFA 협정에 환경조항이 들어가게끔 하였으며 왕피천 지역을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케 하였고, 4대 강 문제, 백두대간 보호법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는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무효화 등 많은 가시적인 성과를 일궈냈다.

예전 천황봉 정상석

 

문제의 핵심은 천황(天皇)이 일본의 왕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는 일제가 천왕(天王)이었던 것을 임의로 바꾼 것이므로 일종의 창지개명(創地改名)에 해당한다. 고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서라도 원래의 이름인 천왕봉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은군도 힘을 보탰다.

 

반면 이 개명작업에 시종일관 반대를 한 이가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선생이었다. 선생의 지론은 간단했다.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진실한 기록을 통하여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정통성 회복과 정체성 확립, 민족정기 회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천황(天皇)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련의 산 이름 변경고시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자.

 

천왕봉으로의 개명을 찬성하는 이들은 녹색연합과 보은군의 연합군이다.

우선 녹색연합은 2005년 2월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이름 보고서’에서 ‘천왕봉’이 맞는다고 주장하는데 이어 산림청도 2007년 8월 20일 충청북도에 ‘지명정비’ 협조 공문을 보냈다. 녹색연합은 이 보고서에서 “일제 때 땅 이름을 바꾼 ‘창지개명’ 작업의 하나로, 속리산 천왕봉이 일본 왕을 뜻하는 천황봉으로 바뀌었다”라고 밝혔다. 그 증빙자료로 고지도인 ‘팔도군현지도’, 법주사 소장 고지도뿐만 아니라 1911년 5월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만든 ‘한국지형도’ 등을 제출하면서 이들 지도에는 천왕봉으로 되어 있지만, 1918년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지도부터 천황봉으로 바꿨다고 덧붙였다.

이에 보은군은 향토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지명위원회(위원장 이향래 군수)를 열고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가 일제 잔재로 지적한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개명키로 의결했다. 위원회는 개명 근거로 대동여지도, 팔도군현도 등 고지도와 1930년 법주사 호영 스님이 그린 법주사도(法住寺圖) 등에 ‘천왕봉’으로 표기돼 있고,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 고서에도 속리산 정상에 ‘천왕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점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개명작업을 반대하는 이는 민간지리학자 박성태 선생이 홀로 고군분투한다. 선생의 지론은 이렇다.

첫째, 일제가 만든 1:50,000 지형도에는 천황(天皇)이란 이름을 가진 봉이나 산이 아홉 개나 있다. 속리산 같은 유명산에도 있지만 사천시와 통영시의 작은 섬에도 있다. 속리산 같은 큰 산이면 모를까 어디 있는지도 모를 봉이나 산까지 찾아 일일이 천황이란 이름으로 바꿨을까?

둘째, 일제는 같은 한자어인 천황(天皇)이라도 일본 것과 우리나라 것을 구분해서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일제가 만든 지형도를 보면 우리가 천황(天皇)이라고 부르는 산이나 봉 이름은 그대로 天皇山 또는 天皇峰으로 기재하고, 자기네 문자로는 그들이 천황을 의미하는 てんのう(덴노)를 쓰지 않고 외래어표기인 가타카나로 チョンハン 또는 チョンフヮン으로 써서 천황에 가까운 음으로 기재했다. 그래서 속리산 천왕봉은 물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 심지어는 조그만 섬에도 천황산이나 천왕봉을 그대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셋째, 천황(天皇)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나 봉은 우리 고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고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천황봉(天皇峰)이나 천황산(天皇山)은 우리 선조가 만들어 쓴 이름이지 일제가 만든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은 고전의 예로 윤휴(尹鑴, 1617-1680)의 백호전서(白湖全書) 제24권 기(記) 세심당기(洗心堂記)에 ‘…起步於庭 相與指點 文壯天皇 雲煙面目…’라 하여 속리산의 문장대와 천황봉이 나옴을 든다. 그리고 계속하여, 조선 후기 실학파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천지편(天地篇) 지리류(地理類) 동부(洞府) 세전우복동도기변증설(世傳牛腹洞圖記辨證說)을 거론하여 ‘…一去槐山 一去尙州 俗離山天皇峯南幹也… 俗離山天皇峯 在洞北爲祖 洞右白虎外 天皇峯兩間少下…’라 하여 속리산 천황봉이 나옴 등을 거론한다.

그리고 고지도의 예로는, ①1872년 전라도 영암군 지방지도에 월출산 천황봉이 있고, ②전라도 장수현 지도에 장수읍 동북쪽 지금의 노곡리 뒷산에 천황봉이 있으며, ③전라도 용담현 지도에 지금의 천황사가 있는 곳에 천황산이 있다. ④광여도의 전라도 구례현 지도에는 지금의 천황봉이 천황산으로 기재되어 있음 등을 든다.

 

어쨌든 한 민간지리학자의 노력도 헛되이 속리산 천황봉은 2007년 12월 26일 천왕봉으로 변경고시 되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뻔히 어떤 대답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묻는 장감독은 자기의 생각을 굳히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박성태 선생이 내 사부 같은 존재라서 장감독이 오해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천왕이라 하면 나는 육당 최남선의 글을 떠올리게 돼. 그의 불함문화론을 거들먹거릴 필요 없이 《백두산근참기》를 읽던 생각이 난다 그거지. 즉 1927년 그가 백두산을 오르던 중 허항령 부근에서 만난 사당을 보면서 감격을 하던 장면이 떠올라. 그는 이 사당에서 목주(木主)에 ‘천왕지위(天王之位)’라고 쓰인 글을 발견하게 되지. 거기서 그는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국사대천왕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돼. 그러면서 환웅이 천왕인데 그 용례(用例)가 산으로 와서는 지리산의 천왕봉, 속리산의 천왕봉이 되고 민간으로 가서는 태백산의 천왕사(天王祠), 대구 달성의 천왕당(天王堂) 등이 된다고 했어. 그러니 천왕은 곧 삼국시대의 천군(天君)이라는 것이지. 육당의 글은 어찌 보면 일제와 상관없이 속리산은 천왕봉으로 불렀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그런데 천황의 사전적 의미로는 ①옥황상제를 가리키기도 하고 ②일본의 임금을 일컫는 말이라고 해.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신앙과 관련하여 옥황상제를, 일본에서는 현실적인 자기네 왕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이지. 그리고 박성태 선생이 지적하듯이 우리나라의 많은 산에도 이미 천황산 혹은 천황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이미 많이 존재하고 있었잖아. 이런 점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옥황상제와 관련한 민간신앙과 함께 일제 이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는 순수한 우리의 고유 이름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아.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 후 각 산의 이름을 고시할 때 천황봉으로 불렀던 것은 그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니겠어?”

“그렇다면 형은 ‘천황봉파’라는 것이네. 좋아. 그렇다 치고 계룡산도 명산 아냐? 민간신앙에서는 속리산보다 더 신령스러운 곳이라고도 보는데 거기도 천황봉이 있잖아?”

좋은 지적이다. 천황봉이 천왕봉이어야 한다면 속리산보다는 오히려 계룡산이어야 하지 않을까?

계룡산 천황봉의 천단

 

“왜 아니겠어. 녹색연합은 그때 계룡산 천황봉도 문제 삼았었지. 그런데 1914년 제작해 1928년 수정된 1:50,000 지형도를 보면 계룡산에는 ‘연천봉(742.9m)’만 기록돼 있고 천왕봉은 보이지 않았거든. 그래서 ‘만약 지도가 생긴 1928년 이후부터 1945년 사이에 지명이 붙여졌다면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근거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천황봉 이전에는 상봉 및 상제봉으로 불렸기 때문에 일제의 잔재라고 판단하기도 어렵다.’는 공주시와 공주향토문화연구원의 반대의견에 따라 거부되었지. 더욱이 천황봉은 대한민국 정부가 1998년 8월 17일 자로 새로 고시한 지명이기도 해. 사실 지금도 계룡산 주봉은 주민들 사이에서도 천황봉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상황이야.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천황봉 바로 옆 쌀개봉에서 가지를 치는 용수지맥의 첫 봉우리가 천왕봉(608.6m)인 점도 크게 한몫을 거들었을 거야.”

“형, 그런데 예전부터 이 봉을 천왕봉이라고 불렀으니까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던 거 아니야?”

“그건 천황사의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지. 조금 이따 이정목을 볼 거야. 지금도 천왕봉 아래 대목리에 가면 천황사라는 절이 있어. 물론 창건연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가자.”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18쪽


여기서 보는 속리의 주릉.

좌측 뾰족한 높은 봉이 관음봉 982.9m.

그 옆 볼록 솟은 선 봉이 문장대 1031.7m.

앞에 있는 암봉군 중 중앙에 가장 높은 봉이 비로봉 1031.9m.

 

우측 중앙 관음봉 좌측으로 눈을 돌립니다.

폭 가라앉은 곳이 속사치.

그 좌측 고봉이 묘봉 874.8m.

묘봉은 정상석이 있는 곳과 지도에 표기한 곳이 다르죠?

충북알프스 종주를 하면서 파악했던 사실입니다.

충북알프스.

정말 멋진 종주구간입니다.

그런데 공단에서 문장대~속사치 구간을 막아놔서.....

한남금북 정맥 방향....

내려오면서 천황봉을 돌아봅니다.

 

장각동 빠지는 길.

지도 #2의 '바' 법주사로 떨어지는 삼거리를 지나,

운님 사진에서 가져왔음

 

석문 앞에서......

우측 뒤로 천황봉을 보고....

모자 고릴라 바위에서......

자작나무님 사진에서 가져왔음

나도.....

지도 #3

 

입석대 부근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군요.

가지고 온 곡차가 아직 남았다고 하면서 착석을 권유하시는군요.

상원산님이 직접 담그셨다는 밀주에, 족발에, 전에......

세 통을 털고...

어서 신선대에 가서 한 잔 더 하시죠.

낙석방지를 위한 시설물 공사 때문에 신선대 ~ 문장대 구간이 폐쇄됐었는데 마침 오늘 04시를 기해서 개통이 됐군요.

운님 사진에서 가져왔음.

 

신선대에 도착하니 이미 대원들이 거나하게 판을 벌려놓았습니다.

운님 사진에서 가져왔음

 

지도 건네주는 동동주를 한 잔 거나하게 목 넘김 합니다.

 

제가 한 잔 사려고 했는데 무산이 되고........

한 잔 했더니 이런 거 오르기도 힘이 드는군요.

지나온 신선대 능선....

곧 오를 문장대.

 

좌측은 법주사로 하산하는 길.

예전 번창하던 매점 자리는 완전히 복원이 됐고......

여기서 또 배바위님이 배낭에서 묵혀놓았던 빨간딱지 한 병을 또 꺼내시는군요.

아....

또 약해지는 이 마음....

끝나려는가 했더니 또 한 통.....

그것에 이것저것 하도 주워 먹다 보니 배가 동그랗게 나오는군요.

'닝기럴! 오늘 산행도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네!!!!'

가방을 벗어놓고 문장대로 향합니다.

피알레빈님 사진에서 가져옴

 

철계단을 내려와 두 개의 정상석이 있는 우측으로 목책이 보인다(지도의 ‘다’의 곳). 관음봉을 거쳐 묘봉으로 진행할 수 있는 루트다, 하지만 여기부터 북가치까지는 비탐방구간으로 묶여 있다. 보은군의 야심 찬 ‘충북알프스’ 사업이 여기서 멈춘 느낌이다.

 

- 졸저 전게서 232쪽 

문장대를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고....

 

속리산이라는 이름의 유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릴라 모습을 한 상고내석문이 나온다. 그러고는 신선대로 오른다. 신선대 매점은 산에 있는 그것으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공원 내의 매점일 것이다. 기르던 황구는 하산시켰다 하고 아직도 도토리 막걸리는 예전의 맛을 잃지 않았다. 막걸리 맛 속에서 고운 최치원의 시 한 수를 읊조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道不遠人 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는구나

 

山非離俗 俗離山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은 산을 떠나려 하는구나

 

“이 시의 俗離山 때문에 이 산을 속리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며?”

“그럴 거 같지? 그런데 이 시를 해석할 때 ‘사람(속세)이 산을 떠난다.’고 했잖아. 그게 올바른 해석이기도 하고.”

“그러네. 그럼 속리산은 어디서 온 이름이야?”

“고운 최치원은 한국문학의 비조(鼻祖)로 평가받지만 사실 뼛속까지 중국인이었잖아. 열두 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거기서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는 속리산을 얘기할 때 우리말 어법대로 ‘속세를 떠난다.’의 의미로 이해하잖아. 그런데 한문 어법에 맞춰보면 그 말은 이속(離俗)이 되어야지 속리(俗離)는 아니잖아. 그러니 최치원 같은 대가가 한문을 몰라서 그렇게 썼겠어? 그러니 그게 아니고 지난번 ‘백수리산’을 얘기할 때 ‘수리’에 대해서 얘기했잖아. 이 속리도 마찬가지로 ‘수리’의 변형에 불과해. 즉 ‘높은 산’이라는 거지. 거기에 법주사와 같은 절집이 있으니 종교적 색채까지 덧붙여 누군가가 한자까지 동원하여 속리산(俗離山)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거야. ‘시루, 수레, 서리, 싸리’ 등도 다 고구려말 ‘수리’의 변형에 불과한 거야.”

이전의 속리산 이름은 구봉산 혹은 이자산으로 불렸다. 물론 산경표에는 속리산과 구봉산을 전혀 다른 산으로 취급하고 있기는 하다.

 

칠형제봉 능선을 바라보면서 지나면 이내 문장대(1031.7m)이다. 그런데 속리산 하면 천왕봉보다 이 문장대가 더 속리산 취급을 받고 있다. 높이만 봐도 27m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생김새가 갖는 특이함 때문에 그런가?

 

원래 운장대였던 문장대에서의 조망도 거침이 없다. 일망무제(一望無際)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런데 이 웅덩이들은 뭐야? 이런 거 관악산에서도 본 거 같은데.”

“맞아. 아까 《동국여지승람》 얘기할 때 ‘가마솥 같은 구덩이’라는 표현 나왔지? 이런 지형을 나마(gnamma)라고 부르는데 이 지형의 생성 과정과 관련이 있겠지. 유독 이 부분으로 침식과 풍화가 집중됐겠고.”

 

- 졸저 전게서 230쪽 이하

 

이제 아쉬운 하산길이 시작됩니다.

너무 이른 시간의 하산입니다.

 

500m 정도 내려가다 보니 우연찮게 선샤인 총무님과 발을 맞추게 되는군요.

자연스럽게 노래가 흥얼거리며 나오는군요.

Sunshine on my shoulders makes me happy
Sunshine in my eyes can make me cry
Sunshine on the water looks so lovely
Sunshine almost always makes me h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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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님! 그런데 오늘 뒤풀이 주메뉴가 뭡니까?"

"도장봉 식당에서 닭볶음탕으로 준비했는데요......."

"네? 도장봉 식당. 닭볶음탕이요? 그러면 저는 다시 문장대까지 갔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먼저 내려가세요."

식탐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저로서는 이 상태로 내려가서는 그 음식의 찐 맛을 느낄 수 없을 터, 다시 소화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올라가다 보니 아까 내려올 때 산인사를 나눴던 아주머니들이 저를 기억을 하고는 "뭐 잃어버리고 내려왔수?" 하시는군요.

피알레빈님 사진에서 가져옴

후미 대원들도 "아니? 현오님  왜 도로 올라가세요?"

"문장대에 뭘 놓고 내려왔네요. 빨리 갔다 올게요."

피알레빈님 사진에서 가져옴

문장대를 찍고 내려와서는 후미대원들과 합류를 합니다.

피알레빈님 사진에서 가져옴

주차장으로 내려와 시원한 물에 몸을 씻고 식당에서 예전의 그 맛을 다시 기억해 내며 낯설기만 했던 오늘 속리산 구간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