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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지리태극종주 3구간(천왕봉 ~ 밤머리재)

 

천왕봉 정상석

자칭 산꾼이고 싶어 하는 산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간 길을 되도록이면 피해 가고 싶어 합니다.

나름의 색깔로 자기만의 산행을 하고 싶어해서겠죠.

 

그래서 그들은 지도를 펴놓고 자기만의 코스를 개발하기로 합니다.

언제 누구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는 능선과 능선을 잇는 등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멀리는 나라의 백두대간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가까이는 지맥이나 단맥은 조석필, 박성태, 신경수, 박흥섭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것입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다 바라본 촛대봉과 시루봉

눈을 지리로 좁힙니다.

워낙 너르디너른 산자락을 가진 지리산이었기에 그들은 지도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이리저리 작도를 하기에 바빴을 겁니다.

그러고는 동쪽의 최고봉인 천왕봉과 서쪽의 최고봉인 반야봉을 그은 다음 접근성을 놓고 또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처음에는 노고단 고개 즉 코재와 천왕봉을 잇는 능선을 주릉으로 한 다음 나머지 줄기에 방위까지 동원하여 동서남북으로 구분을 하게 되기에 이릅니다.

주릉이외에 동부능선, 서부능선, 남부능선 그리고 북부능선이 이렇게 하여 탄생을 하게 됩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다 바라본 연하봉과 제석봉 그리고 반야봉과 그 좌측의 길상봉(노고단)

그렇게 그들은 20년 정도 그 방위를 따라 산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서쪽만큼은 그 줄기가 서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 향하고 있음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는 서부능선이 아니라 서북능선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동쪽도?

그런 의심을 갖고 동쪽을 살피다 보니 동쪽의 끝 역시 웅석봉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줄기가 있음을 눈치 채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그림을 쳐다보다보니 지리의 서쪽과 동똑의 모양이 교묘하게 처럼 물결모양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기에 이릅니다.

그러고는 그 물결모양이 곧 태극문양과 닮았음을 확인하고는 선을 이은 다음 그 길을 지리태극종주라는 이름으로 걷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시태극종주코스는 J3의 방장 배병만에 의해 다듬어져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다 바라본 황금능선과 그 뒤의 달뜨기능선

해밀의 종주팀이 이번에는 그 지태종주를 기획합니다.

그걸 일시종주로 진행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건만 웬일인지 자제를 하여 4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한다고 합니다.

서북능선구간 + 주릉 + 동부능선구간인데 아무래도 동부능선은 좀 난이도가 있으니 점잖게 두 구간으로 나누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동부능선 구간을 진행하자면 천왕봉까지 올라가는 접속구간이 필요한데 이 중산리 ~ 천왕봉 구간이 사실 만만치 않습니다.

구름에 가려진 중봉 너머의 하봉

천왕봉을 오른 다음 중봉과 하봉까지 하고 추성리나 와불산 너머 동강 혹은 실상사 쪽으로 내려오면, 아니 조금 더 진행하여 왕등재에서 우틀하여 윗새재 정도로 하산만 해도 괜찮겠건만 동왕등재봉에서 도토리봉에 이르는 5개의 소위 ‘마의 구간까지 진행을 하여야 한다면 말 그대로 곡소리가 나오는 난코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누군가에게는 그걸 진행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그 무엇이 있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긴 하죠.

그러니 그걸 진행하고 난 다음 맞이하는 4코스인 밤머리재 ~ 사리마을 코스는 그야말로 어린애 손목비틀기 정도이니...

그 코스를 진행하기 위해 중산리로 갑니다.

통천길로 들어서서.....

칼바위를 지나 출렁다리를 건너,

장터목 삼거리에서 돌계단이 시작합니다.

진주가 보인다는 망바위를 지나,

로타리 대피소를 지납니다.

 

로타리 대피소는 남영 조식 선생의 13대손인 조재영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그 후 공단으로 기부 채납되었다. 천왕봉 아래의 천왕샘도 ‘지리산의 인간 백과사전’이라 불린 그의 작품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08쪽 각주

 

법계사를 지나고....

신문창대에서 바라본 문창대(2023. 10. 13. 촬영)

신문창대에서 문창대를 보고자 잠시 신문창대 너럭바위에 들렀건만 아직은 시간이 일러 그저 며칠 전 지나면서 보았던 이 그림만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개천문을 지납니다.

동쪽으로 붉은 기운이 들기 시작합니다.

조재영 선생이 발굴한 천왕샘

천왕샘은 말라 있고....

그러고는 천왕봉에 오릅니다.

좌측으로 멀리 황강지맥의 가야산 라인이 보이니 중앙이 남강지맥의 한우산?

춥기도 하고.....

중봉 뒤로 하봉 그리고 그 뒤로 두류봉......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런데 오히려 지리 서북능선의 세걸산 위로는 만월이 아직도 제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봉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마야계곡을 지나는데 일출이 시작되는군요.

아직도 천왕봉 정상에는 많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고.....

중봉에서 가지를 치는 써리능선.

우측으로는 황금능선이 갈리고 좌측으로 조개골을 내면서 능선은 비둘기봉으로 오르다 평지에 치밭목대피소 자리를 만들었군요.

천왕봉과 그 우측의 촛대봉.

이제 중앙에 치밭목대피소가 확실하게 보이는군요.

하봉의 영랑대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동부능선 비탐구간으로 들어갑니다.

선암.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를 매어두었는데, 방게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물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즉 한반도는 약 30억 년 전 바다였던 것이 지각변동을 거쳐 융기되어 형성된 육지라는 것이다. 강원도 시멘트 석회석이 바로 예전에 바다 속이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이곳의 선암船巖 즉 배바위라는 것은 법종이 과연 그런 근거로 이야기한 것인가? 그렇다면 법종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 졸저 전게서  527쪽 이하

그래도 가을이니 걸을만한 곳입니다.

하봉으로 올라,

소년대를 보고....

지나온 중봉과 천왕봉 그리고 우측의 일출봉까지 봅니다.

영랑대....

좌측이 창암산.

그 뒤로 희미하게나마 금대봉과 삼봉산을 봅니다.

영랑대로 오르는 로프길.

영랑대에서 하봉과 중봉, 천왕봉 그리고 우측의 일출봉까지 봅니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남명의 글을 하나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능선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소의 갈비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소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 졸저 전게서 526쪽 이하

멋지죠?

반야까지.....

두류라인.

좌측이 국골.

초암능선과 두류능선 사이의 골이죠.

그러니 그 아랫마을이 추성리.

좌측이 창암산

영룡산 우측의 법화산과 오도재 좌측 뒤로 삼봉산 라인까지 간신히 볼 수 있습니다.

국골.

초암산.

창암산.

멀리 바래봉도 그저 낮게만 보이고......

사거리에서 우틀합니다.

직진하면 추성리로 좌틀하면 국골로 떨어지는 곳입니다.

우틀하여 청이당 터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물보충을 하고......

그런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국공이 순찰을 안 도는 듯.....

푸우님의 이 표지띠는 7·16 사태를 떠올리게 하니....

 

 

그러고 나면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졸저 전게서 524쪽

진주(산청)독바위를 지납니다.

저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새봉.

새봉은 아주 의미 있는 봉우리이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와불산과 상내봉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그 상내봉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벽송사능선으로 진행하여 와불산1164.9m을 들르게 되고 직진하면 상내봉1213.9m을 만나 여기서 직진하면 독녀암으로 가게 되고 우회전하면 꽃봉산733.9m으로 진행하는 등 다양한 코스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독녀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른바 점필재 루트이기도 하다. 이 새봉을 지나면서 산청군 금서면과 헤어져 함양군 마천면으로 들어오게 되니 이제부터는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삼장면의 군계를 따라 걷게 된다.

 

- 졸저 전게서  523쪽

와불산 방향은 구름에 덮여 있고....

마당바위에 앉아 잠시 쉬어갑니다.

또 길을 떠나고.....

어서 왕등재가 나와야지....

좌측으로 왕산과 필봉산이 보이기 시작하니 능선 중앙에 뾰족봉이 왕등재봉일 것이니 앞으로 서너 봉우리만 지나면 왕등재가 나올 것입니다.

우측으로 대원사가 있는 새재 방향도 보이고.....

동쪽으로 올수록 만추의 분위기......

멀리 구곡산도 보고....

산죽밭을 지나니....

윗새재 삼거리.....

만추.....

이만희 감독을 떠올리고....

..............

부스럭 부스럭.....

가을비 찬 바람에..

https://youtu.be/fUKLFjh4NVI?si=gbWSyA0wNQP8xeyB

그다지 붉지는 않고....

그래도 이만하면....

그러다 보니,

왕등습지.

먹어도 가한 물.

하지만 혼탁해서...

왕등재를 지나면서 더없이 편안한 길을 걷다보면 가끔씩 산죽이 나와 발을 더디게 한다. 조망이 트이는 곳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맛보며 진행하면 이내 왕등습지이다. 해발 900고지가 넘는 곳에 습지라니! 소양지맥의 대암산 용늪보다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습지 내에 뻐꾹나리·창포 등 58종의 습지식물과 붉은배새매·까막딱따구리 등 천연기념물과 삵·담비 등의 멸종위기야생동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잘 보존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왕등습지 바로 아래에 구형왕릉과 관련한 성터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한때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옛 절터일 것이라는 반론에 묻힌 상태이다. 왕등습지에서의 진행이 좀 어렵다. 습지를 빠져나와 좌측 숲속으로 희미한 길을 따라 직진해야 정상 등로로 이어진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크게 좌회전하는 모양새가 되는 길이다.

 

- 졸저 전게서 522쪽

드디어 앞에 동왕등재봉이라고도 불리는 936.5봉입니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도토리 5개봉을 지나게 되고 그러면 밤머라재이겠군요.

 

그러고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왕등재라고 표기되어 있고 멸실된 3각점(산청311)이 방치되어 있는 깃대봉936.5m으로 오른다. 예전에 가락국과 관련하여 "피신한 가락국의 구형왕이 서왕등재로 피신하여 신라에 항거를 할 때 이 동왕등재에 깃발을 꼽아 신호를 주고받음으로서 이 동왕등재의 지형지물을 이용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특히 '깃대봉'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깃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의 대부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측량 사업을 실시할 때 삼각점 대용으로 꼽았던 깃대에 유래한 것이므로 이 전설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편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동부능선 구간에 왕등재가 두 곳에 표기되어 있다. 즉 깃대봉인 936.5봉과 1048.6봉을 지나 만나는 왕등습지 등이 그곳이다. 생각건대 왕등재王登岾는 한자 표기 그대로 왕,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지났던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936.5봉은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얘기해주듯 고개가 아니고 봉우리이며 왕등습지 역시 주위가 운동장의 스타디움 같이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이는 이 둘러싼 산줄기에서 왕산으로 향하는 줄기 하나가 가지를 치고 있음이 이곳은 고개가 아니라 봉우리인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이들 두 왕등재는 ‘岾재’라는 이름을 갖기에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현장에 임해보면 지막리 절골과 유평리 밤밭골을 잇는 즉 903.4봉과 993.5봉 사이에 있는 고개가 왕등재라는 이름을 갖기에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럴 경우 동왕등재라고 부르는 936.5봉은 그대로 깃대봉, 서왕등재는 왕등습지로 정리하고 절골과 밤밭골을 잇는 고개를 왕등재로 이름하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521쪽

 

동왕등재봉이라고도 불리는 그 936.5봉을 지납니다.

드디어 우측으로 59번 도로가 보이고 그 뒤로는 웅석봉과 딸뜨기능선입니다.

우측 끝이 도토리봉이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그저 908.8봉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병주의 지리산에는 어엿하게 도토리봉으로 나오는 산 이름이죠.

이제 왕산과 필봉산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군요.

지나온 왕등재봉.

저 왕등재봉 우측으로 갈리는 능선이 지리산 둘레길 고동재를 지나 왕산으로 이어지겠죠?

848.5봉을 지나,

시 한 수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한 곳을 지납니다.

그러고는 도토리봉입니다.

된비알을 내려오니.....

맥주와 막걸리가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군요.

다음 구간 오르는 곳.

이렇게 밤머리재에서 오늘 산행을 마감합니다.

지리태극종주 구간 중 가장 험한 곳.

잘 즐기면서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