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드디어 발간 !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9세기 말엽 조선땅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자원, 운송과 관련한 갖가지 이권 탈취를 위한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을 때, 1894년 내부적으로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항거인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미 치안 능력을 상실한 조선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일본군의 개입이 결국 청일전쟁으로 비화하게 되며 여기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조선땅 지배를 노골화하기 시작한다.

이미 운산금광채굴권이나 경성의 석탄채굴권, 두만강, 압록강 및 울릉도 산림 채벌권 등 각종 이권을 확보하고 있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1904년 2월 결국 러일전쟁을 일으켜 1905년 5월 조선 영토인 남해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게 된다.

                          

그러고는 같은 해 7월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와 ‘카스라 테프트 조약’으로, 영국과는 ‘영일동맹조약’ 갱신으로 그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받으면서 미국에게는 필리핀에 대한, 영국에게는 인도에 대한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지지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독자적인 지배를 양해 받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조선에서 손을 떼게 만들기에 이른다.

한편 1897년 화폐제도를 금본위제도로 바꾼 일본은 이미 경부선 철도 부설권에 이어 직산 금광 채굴권을 손에 넣고는 본격적으로 금을 비롯한 광물자원 쟁취에 뛰어들기 위하여 국비로 독일 유학까지 마친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를 1898년부터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대만 등지의 지질 조사에 참여 시킨다.

이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고토는 1900년 겨울1 조선에 들어와 조랑말 4마리와 대원 6명의 빈약한 인적·물적 장비를 가지고 자신의 학문적 업적 혹은 학계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연구 성과물을 내기 위하여 하루 20km 내외를 주파하는 강행군을 하게 된다.

그렇게 1900년~1901년 겨울과 1901년~1902년 겨울 266일 동안 답사한 기록을 엮은 것이 1903년 발표한 조선산맥론(A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다.

여기서 고또는 조선이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반도이며 외양은 토끼 모양을 하고 있고 이는 꾸부정한 노인이 중국을 향해 예를 표하는 형상이라는 등 학문 외적인 언급을 하다가 이 조선지질의 연구에 결정적 힌트를 제공한 사람이 독일의 지질학자 리히트호펜과 고체라고 밝히고 있는 바, 고체는 1884. 당시 조선의 총세무사(현 관세청장)였던 묄렌도르프{한국명 목인덕(穆麟德)}의 초청으로 이미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지질을 어느 정도 탐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쨌든 고토는 이 답사를 위하여 주요 읍과 읍을 통하는 간선도로나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고개 등을 이용하여 이동을 하였는데 이때 고토는 분명히 조선의 산줄기

       체계에 대하여 인지2를 하고 있었고, 그 산줄기 체계는 지형에 맞는 정확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요 관심사는 지질조사였고 이를 통해 일본 정부에 자원 수탈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해 주는 데 있었으므로, 자신이 조사한 자료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지질 구조선을 바탕으로 이를 40개 정도의 산맥으로 분류하여 여기에 자신이 지나온 산이나 고개 이름을 붙여 차령산맥이니 노령산맥이니 마식령산맥이니 하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 후, 고토의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아베 일행이 1903년 조선에 들어와 고토와 비슷한 형태의 지질조사를 하였으며, 러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일본 정부는 이를 토대로 본격적으로 조선은 물론 만주까지도 광법위한 지질조사를 하게 되었다.

즉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지질 즉 땅속의 광물자원을 파악하여 이를 수탈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조선의 지형이나 지질 구조를 연구하여 그것을 인문학적 관점으로 보려는 의도는 전혀없었던 것이다.

한편 1904년 일본의 정치지리학자인 야쓰쇼에이는 '한국지리'에서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고토분지로의 지도를 단순화시켜 오늘날의 산맥계통도와 유사한 지도인 '조선산계도'를 만들었고, 1905년 조선이 통감부체제로 들어가자 일본은 우리의 교육제도까지 통제를 하면서 마침내 1908년 대동서관에서 편찬한  당시의 지리교과서인 고등소학대한지지에서 '우리나라의 산지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하지 못하니 야쓰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한다.'고 하면서 소위 신식 지질개념이 전래의 산줄기 인식을 대신한다고 천명하기에 이른다.

즉 우리의 전래 산줄기 개념과는 상관없이 고토가 임의로 그은 40여 개의 산맥 중 13개로 추려낸 산맥에 함경산맥을 하나 더 추가하여 1910년 이전인 1908년에 지금의 산맥도가 완성되게 되고 이것이 지금 우리 교과서에 올려진 지도인 것이다.

이때 정연호는 1906년 '최신고등대한지지'에서 백두산과 백두산에서 비롯된 우리 산줄기를 그렸으나 당연히 배포금지도서가 되었고 1910년 육당 최남선에 의해 결성된 '조선광문회'에서는 1913년 택리지, 도리표에 이어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에 혼란의 위기감이 오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여 서둘러 우리 산줄기 체계의 족보와도 같은 산경표를 영인본으로 출간하게 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산경표는 과연 무엇인가?

산경표의 저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1712~81)이라고 전해왔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신경준의 저술인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 輿地考〉와 〈산수고 山水考〉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것임은 분명하다. 내용 구성을 보면, 백두산을 시작으로 하여 1개의 대간(大幹)과 1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 등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했는데, 이는 지금의 우리나라 산맥 분류 체계와 전혀 다르다. 15개의 산줄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오대산·태백산 등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산에서 시작하여 함경북도 동쪽을 향하는 장백정간(長白正幹), 지리산 남쪽으로부터 낙동강·남강 남쪽을 돌아 김해로 이어지는 낙남정맥(洛南正脈),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시작하여 평안도의 강계·철산·용천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청천강 북쪽의 청북정맥(淸北正脈), 낭림산으로부터 영변·안주·자산·삼화를 향하는 서남향의 청천강 남쪽의 청남정맥(淸南正脈),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곡산·수안을 거쳐 장산곶까지 이어지는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에 있는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백두대간의 식개산 분기봉에서 시작하여 포천·양주·고양·교하에 이르는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漢北正脈), 태백산 동쪽 매봉분기봉에서 시작하여 울진·영해·경주·양산·동래로 이어지는 낙동정맥(洛東正脈),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청주·음성·죽산으로 이어지는 한강 남쪽과 금강 북쪽 사이의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죽산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돌아 안성·용인·안산·김포에 이르는 한남정맥(漢南正脈), 죽산 칠장산에서 안성·공주·천안·홍주·태안 등 충청도 서해안으로 뻗는 금북정맥(錦北正脈),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남원·장수·진안으로 향하는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진안 조약봉에서 금산·공주·부여에 이르는 금남정맥(錦南正脈), 진안 조약봉에서 시작하여 전주·정읍·담양·광주·장흥·순천·광양에 이르는 호남정맥(湖南正脈) 등이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뻗어나간 갈래를 지칭한다. 위와 같은 산지 분류 체계는 강의 수계(水系)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산줄기는 물을 가르는 선이며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대원칙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 국토 전체가 산줄기의 맥으로 연결되어 있는 점, 백두산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점 등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 체계를 보여주고, 지금과 다른 과거의 산줄기 이름 등을 알려주는 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육당은 일제의 회유에 무릎을 꿇었다고는 하나 장준하가 "육당의 친일은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함이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육당의 이 산경표 영인본이 없었더라면 산경표는 영영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이 되고도 일제의 교과서를 그대로 답습하여 태백산맥으로 지리 공부를 하던 우리들에게 위 영인본이 나온지 70년이 흐른 1980년에 이르러서야 이 산경표는 겨우 우리들 품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

즉 1980년 지도학자 이우형은 인사동의 고서적 주인으로부터 낡아빠진 '山經表'라는 책을 한 권 얻게 되는데, 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면서, 머릿속으로는 산 하나 하나를 이어가면서 우리의 산줄기가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가짜인지 확신하게 되었으며, 어느 게 땅속에 있는 지질 구조선이고 어느 게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형인 산줄기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고는 이우형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우리의 산줄기는 태백산맥이 아니고 백두대간이라는 것을....

그 태백산맥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가 우리나라의 광물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작업으로 우리 산줄기 체계와는 관계없이 그어 놓은 땅속 지질구조선에 임의로 붙여놓은 이름을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들의 강요에 의하여 쓰던 것을 해방 이후에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썼고 그것이 마치 우리의 산줄기인양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이우형은 강연도 다녔고 신문에 기고도 하였다.

당시 이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산에 다니는 산악인들이었다.

태백산맥을 종주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고 이내 '백두대간 종주'라는 캐치플레이어를 내걸고 우선 남한쪽의 백두대간 종주 산행에 나섰고 몇몇 사람들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정책적으로 급조된 태백산맥이라는 이름 대신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을 교과서에 넣자며 흥분하기 까지도 했다.

그러나 지리학계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된 기존 지리학자들은 산맥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산맥의 생성 원인과 지질 등을 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면서 특유의 어려운 지질학적 용어를 동원하며 "산맥의 '산'자도 모르는 산악인들이 왜 까부느냐. 산이나 열심히 다녀라."하는 식이었다.

1997년 이번에는 조석필이 나섰다.

조석필은 지도학자인 이우형과는 달리 의사이자 산악인이었다.

조석필은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저서를 통하여 왜 산맥이 아니고 산경표에 의한 산줄기여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며 이른바 '산경표파'의 전도사로 떠올랐다.

조석필은 "문제는 고토의 논문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고토의 산맥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아니 쓰고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게을음에 있다. 고토만큼이라도 이 땅을 돌아다니며 체계적인 조사를 한 적이 없는 우리의 무신경에 있다.'라고 자탄을 한다.

산줄기를 걷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까지도 서서히 백두대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오르내리게 됐고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백두대간보존법까지 제정되게 되었다.  

그리고 백두대간은 상업광고에도 실리게 됐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백두대간이나 그 하위개념인 정맥을 걷는 사람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일반인들에 의한 산줄기 연구는 계속되어 신경수는 산줄기를 산경표의 기본원리인 산자분수령에 의한 수(樹)체계로 인식하여 남한의 산줄기를 1대간 9정맥 18기맥 118지맥 22분맥 850단맥으로 구분하는 성과를 냈으며, 박성태는 산경표를 재구성하여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대간 12정맥 12기맥 12지맥 등 주요 산줄기를 45개로 잡은 다음 30km급 이상 지맥을 150개로 세분한 신산경표라는 책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그러고는 우여곡절 끝에 2003년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이 제정 공포된다.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한국 지리학회의 태도는 여전했다.

이럴 때 당시 국토연구원 부원장이었던 김영표는 2004년 GIS기법에 의한 새로운 산맥도를 제시하면서 결국 이 지도는 대동여지도와 거의 같다며 기존 산맥체계론에 반기를 든다

즉 김영표는, "제가 찾아본 세계 각국의 지리학 사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산맥이란 '일정한 규모와 연속성을 가진 산봉우리들'이며 '형성 요인과는 상관없는 지형(without reference to genesis)'이라고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땅 속에서 요만큼이 바위고, 조만큼이 흙이라도 땅 위로 일관되게 솟아 있으면 산맥이라는 거지요. 그래도 지질학적인 분류가 일리가 없지 않기에 지질 현황도까지 다 컴퓨터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토씨의 측정이 틀렸더군요. 지질학적으로도 많은 산맥들이 유령이 되어버렸던 겁니다."리고 이야기 한다.

이제는 산줄기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의 산악인에서 이제는 일반인들까지 답사가라는 이름으로 산경표 상의 산줄기인 백두대간 9정맥은 물론 그 하위 개념인 기맥, 지맥 등을 다니면서 온나라의 산줄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백두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진리'가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준희'라는 닉을 가진 부산의 최남준 같은 이는 나무로 산패를 만들어 전국의 산줄기를 돌아다니며 봉우리나 줄기 요소요소에 부착을 해 답사가들에게 오아시스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대구의 김문암 같은 이는 정상석이 없는 산봉우리에 산패를 다는 작업을 오늘도 외롭게 하고 있다.

여기에 부산의 산벗 남도생은 파킨슨병과 싸우는 힘든 투병 생활 중에도 각 지방자치단체나 산림청 등의 잘못된 우리 산줄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지금도 전화나 문서로 오류를지적해 주는 등 20여 년간 홀로 우리 산줄기 이름 찾기에 전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지리학계 내부에서도 산맥개념을 재정비하여야 하지 않느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해방이 된 지 어언 70년.

내 나라를 찾은 지 70년이나 흘렀지만 106년 전 태백산맥에 빼앗긴 백두대간은 아직도 아이들 지리교과서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더 흘러야, 얼마나 더 고토를 떠올려야 우리의 산줄기 백두대간을 아이들 지리교과서에서 읽을 수 있게 될까.

  1. 고토는 본격적인 자원 수탈의 목적으로 1903년에 들어온 아베와는 달리 자신의 입지가 전보다 약화된 것을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에서 관심을 두고 있던 조선지질연구를 다른 사람들에 앞서 악조건 하에서도 자발적으로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정부의 물적, 인적 지원 없이 겨울철에 조랑말을 타고 움직여야 하였으며 혹시 모를 신변의 안전문제로 조선인 목장을 하고 다녔다. [본문으로]
  2. 이 논문에서 고코는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을 훌륭한 지리학자로 소개하였고 그이 저서 조선팔역지를 들면서 그 안의 내용인 백두산~철령~금강산~태백산~덕유산~새로운 가지 등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줄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 내용은 정확하다고 까지 인정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