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25.
지난 주 컨디션 난조(?)로 중도 포기했던 늘재~버리미기재 구간을 잇기 위하여 구간 예습에 다시 돌입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사실 지난 주 나를 중도 포기하게 하였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어느 산악회에 관한 정보였다.
즉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산악회에 있는 OO산악회는 매달 대간 산행을 무박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마침 4. 24. 무박 산행이 버리미기재~배너미평전까지 진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날 산행의 차편은 그 차를 이용하고 그 구간 산행은 나름대로 진행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심어져 있는 안일한 나의 사고가 결국 지난 번 늘재~버리미기재 구간의 산행을 단순한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하산을 강요하였고, 결국 그 일이 오늘의 산행을 있게 한 것이다.
1주일 전부터 비는 이미 예보되어 있었다.
사실 비가 오는 건 그렇게 두려울 바 없었으나 조망이 전혀 되지 않아 대간 구간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구간을 혹시나 놓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4. 24. 23:50 산악회의 버스가 출발하는 서울 오목교 역에서 25인승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출발.
인원은 11명으로 그 산악회의 대원들은 항상 같이 진행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 너무나 친근해 보였고 팀웍 또한 만만치 않게 보였다.
4. 25. 03:00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버리미기재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시간이 될 때까지 취침을 한다면서 대장님은 소등을 한다.
한 대원의 코고는 소리가 유난스러워도 나는 밤을 새울 수 없었으니 나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였고 다행히 20분 정도는 잔 것 같다.
버리미기재.
버리(보리)와 미기(먹이)의 합성어라고 하는 이와 '보리나 지어먹던 궁핍한 곳'이라고 보는 이, '벌어 먹이다'라는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한 지명이라고 보는 이 등 그 지명의 유래를 생각하는 이에 따라 달라지나 그 공통된 의미는 궁핍한 화전민의 신산한 삶을 보여주는 그것이라 하겠다.
05:00.
기상을 하고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하의는 집에서 미리 스타킹에 오버트라우저를 입어 비에 대비를 하였는데 밖에 비가 오고 있는지라 상의에 우의까지 입고 배낭은 커버를 씌워야만 하였다.
나는 미리 대장님께 "나의 오늘 구간은 사다리재까지 진행을 하고 봉암사가 있는 와야리 쪽으로 하산을 하여 그곳에서 1박한 후, 내일 새벽에 다시 이 곳 버리미기재로 와서 늘재로 진행을 한 다음 상주나 괴산으로 가서 서울로 돌아 올 예정이다. 혹시 중간에 제가 없어져도 그런 이유에서이니 이해해 달라. 대간 진행 끝난 다음 대원들과 함께 산행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겠다. 오늘은 정말 미안하다."는 취지의 말을 하였고, 대원들은 대장님의 인솔로 오른쪽 철책을 우회하였고 나는 그 대열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약 10여분 오르자 예상보다 비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날이 밝아오면서 거친 오르막을 오르느라 대원들의 몸도 어느 정도 달구어진 상태라 대원들은 큰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장비를 점검하느라 잠시들 우의를 벗고 헤드랜턴도 벗느라 분주하다.
이곳에서 기회를 얻은 나는 대장님에게 이야기를 하고 일행에 앞서 먼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즉 나는 '홀대모'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이내 나의 앞에 나타나는 예습을 하던 중 사진을 통해 보았던 '바위 밑 지지목'을 촬영을 해보았으나 날씨와 아직 날이 완전히 밝아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는 것만큼 사진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OO산악회 대원들의 떠드는 소리가 그리 먼 곳에서 들리는 것은 아니어서 '홀대모'의 일원인 나는 당연히(?) 그들과의 격차를 벌이기 위하여 speed up 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긴급 구조 안내판도 지나면서 그렇게 약 30분 정도를 오르는데 갑자기 오른발 뒤꿈치가 당기면서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들과의 차별화를 위한 나의 무리가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평소 몸 상태를 고려하여 볼 때, 분명 내리막이나 평탄한 곳을 걷게 되면 이내 호전되곤 하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어서 그런 지형이 나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속도는 더 늦춰지고 길은 설상가상 격으로 로프까지 설치되어 있는 급경사로 이어져 있어 "혹시나 오늘 또 산행을 포기하여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 와중에도 평소 같으면 애기암봉이나 원통봉 그리고 멀리 완장리 같은 곳들이 조망이 될 바위 위에 서 보기도 하였으나 날씨는 나에게 온통 하얀 구름만이 시야를 가려 하얀 안개 혹은 구름만 보여 줄 뿐 내가 원하는 그림은 보여주지를 않는다.
완장리.
현재의 한자어로는 完章里라 쓰지만 그 어원은 浣腸에서 왔다고 한다.
즉 조선시대 우복 정경세는 이곳의 산수의 기묘함과 수려함에 감탄하여 이르기를 '可以 浣腸云' 즉 '골짜기가 탁 트여 창자가 시원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안개와 구름으로 꽉막힌 오늘은 전혀 그ㅓㄴ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곳을 지나자 등산로 양 옆으로 푸른 새싹이 길을 터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완만한 길이 발의 통증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주고 있어 '어이구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갈림길이 나타나며 그 곳이 절말 갈림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출입금지 표지판을 뒤로 운행을 계속한다.
06:20.
정확하게 한 시간 걸려서 장성봉(해발 915.3m)에 도착한다.
정상석과 삼각점(속리 24, 1992 복구) 그리고 구조표시목이 설치되어 있는 장성봉 정상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며 왼쪽으로 난 급경사로 막장봉 갈림길을 향한다.
결국 이곳에서는 대야산 정상까지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대화산은커녕 조항산은 물론 그 뒤로 청화산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오른발 뒤꿈치의 고통은 완전히 없어졌다.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 막장봉(887m)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부터 다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가 갈리는 도계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왼쪽 막장봉 길을 버리고 대간길로 가는데 또 출입금지 팻말이 길을 가로막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그냥 길만 따라 표지띠만 따라 걷는 무미하고 무료한 산길이다.
반면 촬영할 시간도 소비하지 않고, 조망할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이렇게 안개비 속에서 바람이 땀을 식혀주니 역설적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 조건이 있겠는가.'하는 생각도 든다.
877고지를 지나자 갑자기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상당히 빨리 걸어온 느낌이다.
아니 시간 낭비할 '거리'가 없이 그저 걷기만 하였으니 상당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을 밖에...
헬기장을 지나자 '내무부'라는 기관 명칭 사용 시 설치한 '국립공원 사각 말뚝'이 완만한 오름 경사를 따라 몇 기 서 있었고, 그렇게 꽉 막힌 조망은 전방 10m 정도가 가물가물한데 갑자기 바람이 왼쪽 사면의 비구름을 걷어가는 것 같아 재빨리 카메라로 그 순간을 포착해 보지만 벌써 다른 구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악휘봉(845m)이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면서 또 출입금지 팻말이 서 있고 그 뒤로 평편한 821고지가 나타나는데 사실 장성봉을 지나고 여기까지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라 올 수 있었다.
마침 앞에 놓여 있는 바위를 이용하여 사진을 한 장 찍기는 하였는데 나의 인상이 참 불쌍하기도 하다.
다른 홀대모의 증명사진은 나름대로 힘 있는 모습인 거 같았었는데 내 모습은 영....
바로 뒤로 난 그러니까 오늘 구간으로는 처음인 철 계단을 통하여 은티재를 향하여 내려온다.
오랜만에 보는 삼현여고 표지띠.
여학교의 그것같이 참으로 귀엽고 깔끔하다.
미술선생님 디자인인가?
잠시 눈앞에 바람이 불고 구름이 걷히는 것 같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지만 앞에 보이는 능선과 봉우리가 과연 어디이고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저 길이 있으면 가고 로프가 있으면 잡고 내려가는 그런 지루한 산행이 계속된다.
다만 비를 맞고 물기를 먹어서인지 나무의 푸른색은 그 푸름을 더 하는 것 같고 나무의 갈색도 그 물기로 인하여 더 짙어진 느낌이다.
이윽고 서낭당이 있는 은티재(오정봉 고개)에 도착.
드디어 봉암사 통제구간이 시작되는 곳에 도착을 한 것인데 봉암사로 내려가는 방향으로는 목책이 쳐져 있고 그 너머로 경고판이 누군가에 의해 뽑혀져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은 날씨가 게이는 듯도 한 그 즈음에 호젓한 그 길은 나를 주치봉(683m)으로 이끄는데 여전히 오른쪽 봉암사로 향하던 길들은 여지없이 목책으로 그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참으로 모진 산꾼들이 스님들의 수행을 저리도 방해를 했었는지...
바로 주치봉(683m)에 이르고 그 봉우리를 내리 서는가 싶더니 곧 호리골재 3거리이다.
구왕봉까지는 50분 거리란다.
빗물을 머금은 꽃 봉우리들이 그 물을 마심으로써 곧 그 봉우리를 터뜨릴 듯 팽팽해져 있으나 여전히 시야는 막혀 있고 다만 큰 바위들이 바닥 길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벌써 구왕봉(877m)이다.
화이트 보드에 글자를 새겨서 거꾸로 바닥에 박아 놓은 모습이 돌을 가지고 올라와 정상석을 만들어 놓은 것보다 훨씬 간결하고 재치 있어 보이지만 어쩐지 가짜 정상 같고 힘들게 이곳까지 올라온 산객을 우롱하는 느낌이 드는 게 뒷맛이 좀 개운치가 않다.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서는 구간은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이다.
로프를 잡고 나뭇가지나 뿌리를 잡고 내려와야만 할 정도의 급경사인데 오늘은 물기로 인하여 모든 것이 미끄럽고 손에 낀 장갑은 이미 물에 젖어 그 효용가치를 잃은 지 오래였으며 다만 그 축축함이 맨손으로 다른 물체를 만질 때의 이질감을 느끼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그 찝찝함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드디어 산객들에게 악명 높은 지름티재의 감시 초소가 나온다.
그런데 스님들이 비닐 막사를 지어서 그 곳에서 출입자를 통제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산불 감시초소 같은 것이 산객들을 통제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가까이 다가가니 아무도 없는 초소였고 오른쪽 목책 뒤로는 역시 스님들이 지키고 있다는 비닐 막사가 보였다.
역시 예의 그 안내판이 걸려 있었고 희양산 등산로가 폐쇄되었다는 안내판에는 대간길인 성터와 시루봉은 돌아가라는 취지의 글이 적혀 있었다.
작년 촛불 집회 때 그들이 보여준 나에 대한 배신적인 행태에 대해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속으로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착한(?) 나는 목책을 넘지 않고 그 안내판의 말을 듣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짙은 안개비 속에서 한 5분간을 내려가도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고 이내 또 소위 '알바'를 하고 있다는 상황을 직감한 나는 지도를 꺼내들고 보니 내가 가는 길은 하산길인 은티마을로 가는 길임을 직감하고 다시 원위치 하고 팻말의 안내문을 살펴보았으나 여전히 성터, 시루봉 가는 길은 안내되어 있지 않고 그 팻말의 뒤는 그 날씨에서도 희미하게 길을 볼 수 있어 목책을 우회하여 그 희미한 길인 봉우리로 올라서는 길에 진입하여 자신 있게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참으로 희한하다.
아무리 찾아도 표지띠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큰 바위 아래로 장난스럽게 버팀목을 받쳐 놓은 것을 보고는 등산로임을 확인하고 계속 오르기를 약 10분 정도.
'대간 삼형제'라는 표지 띠를 발견하고는 내가 가소 있는 그 길이 대간 길임을 확신하고 열심히 바위틈을 헤집고 약 20분 정도를 올랐는데 여전히 표지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두 가지 생각이 나를 혼동시킨다.
하나는 지금 이 길이 아니고 다른 길로 우회하여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공파나 사찰파가 제 아무리 깨끗이 표지띠 철거 작업을 하였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완벽하게 청소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다른 하나는 흐름상 지도에서 명백히 보여 주듯이 분명히 길은 직선상의 오르막 길 하나뿐이니 무식하게 계속 오르다보면 희양산 갈림길이 나오리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너무 표지띠가 없었다.
당연히 사람 지나간 흔적이야 비 때문에 다 지워졌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섬뜩한 생각에 다시 뛰어 내려가 그 표지판 앞에서 지도를 꺼내들고 다시 위치 수정 작업을 실시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입에서는 다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쓰펄"
봉암사 스님들의 수행 결과 나오는 염력 내지는 관(觀)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자신들을 마음속으로 비난하였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간단하게 미천한 중생에게 카운터 펀치를 하나 날렸던 것이다.
즉 길은 오직 외길.
그 길밖에 없는 것이다.
전망이 되지 않아 앞을 제대로 식별을 할 수는 없지만 지도를 보고 길의 흔적을 보아도 다른 어떤 길을 찾을 수 없고 표지띠는 더 올라가다 보면 분명히 나타날 것이고 '대간 삼형제'는 이곳을 통과한지 며칠 되지 않은 전답자들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연풍과 가은을 넘나들던 가장 빠른 길인 이 지름티재.
1,600여 년간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생명수 같은 존재인 소중한 가람인 봉암사.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았다면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을 터라는 신라 9산 선문의 하나인 희양선문의 봉암사.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맹세로 '봉암사 결사'로 혁신의 싹을 피운 성철, 법전, 청담 스님 등의 봉암사.
"한국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던 서암 스님의 봉암사.
그 곳을 씩씩거리며 지나자 일갈하듯이 아니면 나를 다시 깨우쳐 주려는 듯 즉 나는 분명히 멍한 상태에서 오르다 무엇에 홀렸는지 다시 원위치하는 우(宇)를 범했던 것이다.
그렇게 50분 정도의 알바를 끝내고 다시 힘들게 너덜지대를 지나 가파른 경사를 로프까지 타며 힘들게 오르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를 가로 막는다.
희양산(998m) 갈림길이다.
어차피 희양산 정상에 올라 봤자 조망은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또 봉암사 스님들의 경고를 무시할 경우 또 어떤 재앙(?0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희양산 입산을 포기하고 아래쪽으로 내려서자 돌 축대 같은 것이 보인다.
성터이다.
멀리 조금 개인 구름 사이로 중리마을의 흔적이 보이고 길옆으로는 멧돼지의 흔적이 보인다.
이윽고 배너미평전에 이른다.
너른 공터에 앉아 싸가지고 온 김밥을 먹으려 하니 그 김밥의 내용물은 쌀이 아니라 얼음이다.
억지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한 줄을 먹었는데 나의 배고픔에 비하여 그 맛은 별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이런 날씨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가보다.
시루봉(914.5m) 갈림길을 지나 작은 너덜지대를 지나자 이곳으로도 시루봉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지목(956m)이 보인다.
그 갈림길에서 시루봉으로 가는 길에는 잡목이 벌목된 흔적이 있는데 그것들이 억새풀과 어울려 어지러이 널려 있는 모습이 오히려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풀밭을 근자의 대간길에서는 못재(비재 너머 견훤과 관련된 못) 이외에서는 별로 기억에 없다.
그 호젓한 길을 걸어가는데 홀대모 '초은님'의 표지띠가 힘을 북돋아 준다.
암릉지대를 몇 번 오르내리자 바위와 낙엽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길이 나타나고, 이를 지나자 이만봉(989m)이다.
오석으로 만든 정상석에는 백화산이 4.7km 남았음이 선명하게 보이고 나는 그 앞에서 조그만 바위를 삼각대 삼아 인물 사진 한 장을 남긴다.
10분 정도 지나자 바로 곰틀봉(960m)이 나오는데 그 뒤의 절경일 법한 절벽이 모두 그 구름과 안개 때문에 안타까움만 남기고 이제는 하산길을 준비해야할 시간이다.
바람이 더 거세지고 몸은 젖어 이제는 저체온 증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15:23.
사다리재에 내려섰다.
20km의 마루금 운행시간은 알바시간 50분 포함하여 10시간 3분.
알바시간 50분을 제하면 9시간 13분.
원래 내 계획은 지도상에 나와 있는 사거리에서 성골 방향으로 하산하여 다음날 다시 배머리기재에서 늘재로 역주행하려 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방향으로의 길은 보이지 않고 다만 분지리의 안말 방향의 길만 너무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고 표지판도 또 그렇게 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주저하다간 무엇에 걸려도 단단히 걸릴 것 같은 두려움에 더 지체하지 않고 안말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결정.
35분 걸려 안말 마을에 도착하자, 이곳은 버스가 다니지 않으며 연풍택시를 불러야 한단다.
여름 휴가철에나 운영할 법한 매점에 붙어 있는 택시 스티커를 보고 안기사님(011-663-0456)에게 전화를 하니 곧 출발하겠으니 잠시만 기다리란다.
연풍 시내까지 7,000원이며 마침 다음날이 연풍초교 개교 100주년 기념 체육대회라 연풍면 전체가 시끄럽다.
너무도 친절한 안기사님.
자신은 위 행사 때문에 내일 버리미기재까지 같이 갈 수가 없다며 다른 기사님(류산오, 011-785-1255)을 소개하여 주었다.
나는 그가 안내해 준 행운여인숙에서 샤워를 한 후, 주인 아주머니의 배려로 휴대용 개스 랜지와 냄비를 빌려 계란라면을 끓여먹으면서 못 먹었던 도시락으로 그 따뜻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었는데 소주 한 병으로 피곤한 몸을 눕히기 힘들 것 같아 조금 더 먹고 20:00 정도에 잠에 들었다.
조망이 안 되는 산행은 약간은 무료한 느낌이 드는데, 대간 길을 걷는다함은 그 대간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의 산하를 감상하자는 의미가 큰 것이라 믿고 행한 것인데 오늘 산행은 거기에 크게 못 미쳐 약간은 불만스럽다.
'백두대간 > 백두대간(2009. 3. 17.~2009.9.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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