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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백두대간 1구간 보충산행 (백무동 ~ 영신봉 ~ 영신암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장터목대피소 ~ 향적암 ~ 천왕봉 ~ 문창대 ~ 중산리)

 

2017-09-10 0401__20170910_0401.gpx

아무래도 개운치 않습니다.

찜찜한 게 뭔가 가슴에 맺힌 게 있는 거 같다는 얘기입니다.

 

 

전에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었을 때에는 그저 선조들의 지리산을 보는 시각만 보았었습니다.

지금과는 좀 다른 지명을 보고 바위를 보는 눈 그리고 계곡의 소沼를 보는 관점 그리고 산 아래와 산을 올려보는 그 정도만 인식하였습니다.

당시의 생활상을 엿보는 데에만 만족을 하였다는 얘깁니다.

거기에 한시漢詩가 나오니 대충 읽고 장 수만 넘기면 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좌고대坐高臺라는 곳을 올라보고 영신대靈神臺라는 얘기를 듣고 그리고 계족산까지 듣게 되니 내가 책을 잘못 읽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후손들을 위하여 귀한 글을 남긴 선조들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순전히 ''도솔산인'이라는 분을 만난 게 화근이었습니다.

 

선생은 한학자이자 도인이었습니다.

갑자기 꺼낸 영신대 얘기에 혹하고 좌고대 얘기에 눈이 멀게된 것입니다.

2017. 9. 3. 백두대간 3회차 첫 구간을 할 때 영신봉에서 우연찮게 그분을 조우遭遇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유듀류록遊頭流錄를 읽은 적이 있고 나아가 졸저拙著에 그 기행문의 내용을 인용한 사실을 말씀드리자 그 분께서는 바로 그 얘기들을 풀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이끌리 듯 좌고대에 올랐고 하지만 별 다른 감흥 없이 귀가를 해서는 확인차 다시 그 책을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김종직을 읽고 남효온(1454~1492)을 만나고 김일손(1464~1498)을 보았습니다.

이쯤되니까 남명 조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4박5일을 지리산 여행을 한 점필재와 같이 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구간만이라도 그 흔적을 따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진행하던 문창대도 이참에 방문하기로 합니다.

 

현장에 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역시 혼자가는 방법보다는 안내산악회를 따라가는 게 시간과 경비 절약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삼재 ~ 천왕봉 ~ 중산리 코스를 택하면 제 걸음으로 11시간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럴 경우 영신봉과 촛대봉 부근 그리고 문창대에서 제대로 된 답사를 하지 못할 것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악회에서는 B코스로 백무동 ~ 천왕봉 ~ 중산리로 운용을 하는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면 백무동으로 해서 한신계곡으로 오르면서 점필재가 하산한 첫나들이 폭포 부근도 보면서 영신봉으로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주위도 둘러보고  그러고는 촛대봉과 시루봉이라 불리는 1578봉도 보는 여유를 부려봄직도 할 것입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천왕봉 성모사의 BC 역할을 했다고 하던 향적암 흔적을 들러도 괜찮을 것입니다.

향적암을 통하여 제석봉으로 올라 통천문 ~ 천왕봉으로 오르는 루트도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향적암에서 성모사까지 매일 향을 올리려 왕복을 하였다는데 저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집니다.

그러니 점필재와는 역방향입니다.

 

지리 10대를 우산 살펴보기로 하죠.

우측으로 세존봉1368m의 문창대가 지리10()’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며 오르는 것도 의미 있다. 지리10대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도발이 좀 먹힌다는 수도처. 대부분 수려한 암벽이 있고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4쪽

- 이번에 답사해 본 결과 문창대가 있는 세존봉의 높이는 1373.9m였습니다.

 

지리 10대十臺를 살펴 볼까요?
문수대, 우번대, 묘향대, 서산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금강대 등이 그것들입니다.

무슨 대학교 이름을 나열한 것 같죠?

어쨌든 각 대臺에 관한 얘기는 내용을 복잡하게 하니 여기에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할까요.

아니 일부 구간은 산행이라기 보다는 답사여행일 것입니다.

노모께서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는 죽전으로 나갑니다.

죽전에 도착하여 산악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근데 이게 웬일.

갑장인 '반장'님이 시간에 맞춰 나오시는군요.

그렇게 되면 준족인 반장님은 성삼재 ~ 중산리로 진행을 하고 저는 백무동 ~한신계곡 ~ 세석으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되겠군요.

중산리 식당에서 하산주를 한 잔 곁들이자는 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버스는 성삼재에 그 종주 대원들을 내려주고 백무동으로 향합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7. 9. 10. 일요일

2. 동행한 이 : 해올, 산수산악회

3. 산행 구간 : 백무동 ~ 세석대피소 ~ 영신봉 ~ 영신사 터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장터목 대피소 ~ 향적암 터 ~ 천왕봉 ~ 세존봉 ~ 문창대 ~ 중산리

4. 산행거리 :21.29km

구 간

거 리

출발 시간

소요 시간

비 고

백 무 동

 

04:02

 

 

영 신 봉

7.0

06:52

172

세석삼거리

3.51

09:24

152

40분 휴식

촛 대 봉

0.63

09:39

15

장터목대피소

2.76

10:53

74

10분 휴식

천 왕 봉

2.28

13:00

127

15분 휴식

중 산 리

5.11

15:39

159

 

21.29 km

11:37

10:32

실 소요시간

 

 

산행기록

 

지도 #1 

04:02

눈에 익은 백무동 주차장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들른 다음 복장을 갖추고 인도로 나갑니다.

저 슈퍼의 베트남 여성은 잘 살고 있으려나.....

 

어쨌든 1472. 8. 14. 4박 5일 동안의 지리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점필재를 종들이 맞이한 곳이 이 부근이려나?

골짜기 입구에는 초라한 사당이 있었는데, 종들이 말을 끌고 먼저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도를 일견하고,

보름달에서 하현달로 가고 있는 중이군요.

아주 밝습니다.

04:09

공단 초소를 지나,

장터목 대피소 갈림길을 지나면,

아취형 문이 나옵니다.

세석길이라고 하는군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지리의 품으로 듭니다.

500m 마다 안전구조목이 세워져 있고.....

산사태를 대비한 공사도 한창입니다.

04:30

1.2km를 올라왔군요.

거리는 국공 초소 기준입니다.

시간이 지금 04시 30분.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곳이 지도 #1의 '가'의 곳이니 의미심장한 곳입니다.

지도를 볼까요? 

참고도 #1

소나무 중에 큰 것은 백 아름이나 될 듯한데 산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모두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가파른 곳을 내려와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진 곳에 이르렀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산기슭에 진동했다.  

................

우리 네 사람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입을 헹구고 언덕을 따라 지팡이를 끌면서 걸었는데 매우 즐거웠다.

 

점필재 일행들은 한신능선을 따라 내려와 참고도 #1의 '라'의 곳에서 물을 건너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하산을 했을 것입니다.

즉 반야봉도 가보고 싶어했지만 발이 부르트고 기력도 다 한 그 즈음에 그들이 할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리 능선에 오른 그들은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험하고 가파른 한신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루트를 택하였을 것입니다.

04:38

한신계곡을 건넙니다.

예전에 한신계곡으로 산행을 할 경우 한 곳은 신발을 벗고 계곡을 건너야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비올 때나 비온 다음에는 피해야 하는 루트였죠.

1980년대 중반까지도 그랬습니다.

04:46

물소리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또 다리 하나를 건너고.....

05:33

어둠 속에서 별 볼 것도 없고.....

이정표를 지나,

지도 #2

05:58

지도 #2의 '나' 부근에 오니 이제 좀 훤해지는군요.

랜턴을 벗어 배낭 안에 넣습니다.

좌측으로는 폭포도 보이고.....

06:30

아름드리 나무를 지나니,

06:30

대간 라인에 올라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삼신봉이군요.

대간길로 내려오면서 좌측을 보니 촛대봉이고,

정면으로는 세석,

그리고 우측으로는 영신봉이지만 그 봉 전체를 보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06:40

세석 사거리입니다.

이따 다시 올 곳이니 여기서 우틀하여 영신봉으로 향합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촛대봉 우측의 제1봉 볼록 나온 게 사자 머리같이 보이기도 하려나?

점필재 김종직은 시루봉, 증봉甑峰이라 하였고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이라 하였으며 유몽인은 사자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보는 이마다 다르게 보이는 촛대봉은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드는 봉우리 같습니다.

이따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죠.

산경표로는 낙남정맥 그리고 산경표를 되찾기 전에는 지리남부능선의 삼신봉을 봅니다.

저여원沮原이라 불렸던 세석평전.

그 위로 보이는 촛대봉이 그저 촛대의 형상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촛대봉 우측의 1578봉.

김형수555 지도에는 저 봉이 시루봉이라고 나와 있죠?

낙남정맥 라인이 외삼신봉까지는 일렬로 섰습니다.

그러면 대간꾼이라면 누구나 기념 사진 한번 촬영하고 지나가는 곳입니다.

진짜 영신봉은 바로 뒤지만 그곳도 비탐구간!

오늘 탐사작업을 위하여 부득이 금줄을 넘습니다.

참고도 #2

그 금줄을 넘어서면 지금은 복원작업이 한창인 (구) 헬기장을 만납니다.

우선은 여기서 우틀하여 루트 A로 진행을 합니다.

이 루트가 영신사 가는 길로 어쩌면 예전에는 암봉을 피해 이 루트로 진행을 하여 대간길을 이어 가지 않았을까요?

길은 명백합니다.

반야봉 방향입니다.

길이 너무 좋군요.

혹시나 걱정을 했었는데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가까이는 칠선봉, 멀리는 반야봉 그리고 그 좌측이 노고단입니다.

노고단 뒤가 종석대입니까?

파란 하늘과 구름의 멋진 조화!

큰새계곡이 상당히 깊습니다.

이 정도의 높이니 대성폭포의 크기도 어림할 수 있겠습니다.

기왓장의 흔적입니다.

이 영신암은 기와를 얹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입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덮였는데, 거처하는 승려가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나 거처하는 승려 또한 한둘에 불과하다. - 이륙 지리산기  1463. 8.

이곳입니다.

너른 곳이 영신암 터입니다.

참고도 #2의 '거'의 곳입니다.

절터 바로 뒤로는 제단이 보입니다.

영신사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뿐이었다. 절의 북쪽절벽에 가섭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 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 그 목에 난 흠잡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고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聖母像과 가섭상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은 아닐까?

가섭상은 어디 있을까요?

저의 작은 눈으로는 보이질 않는군요.

집에 돌아와 복습을 하는데 역시 도솔산인님의 글에는 이 석가섭의 그림이 나오는군요.

제단 바로 위 암벽이었습니다.

그 제단은  석가섭 제단이었고.....

도솔산인님의 사진을 보니 '刃斫亦被島夷兇' 표기까지 해두셨습니다.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에 나오는 시구를 찾으신 겁니다.

대단하신 정성입니다.

석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여 절벽을 타고 좌고대 부근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행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은 서쪽에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유몽인의 이 글이 주릉에서 영신암에 이르는 또 하나의 루트를 제시해 주고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종직이나 남효은은 저와 같은 루트를 이용한 반면 유몽인 능선을 이용하여 절벽으로 내려온 듯 보입니다.

이 루트는 좌고대로 오르는 루트이기도 합니다.

큰새계곡...

상당히 깊습니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다. 산세가 검각보다 더 험하였는데 108번 굽이친 형세가 수직으로 떨어진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걸었다.  -유몽인 전게서

의신사義神寺까지 가는 여정의 험준함을 유몽인은 이렇게 표현하였군요.

대성골 너머 우측으로 호남정맥의 끝 백운산이 보입니다.

좌고대로 올라가는 벼랑을 보고 자리를 뜹니다.

대간길로 가는 루트는 칠선봉 방향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좌고대와 암봉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반대방향에서 숲을 헤치고 내려오는 인기척이 들립니다.

아니 이런 곳에 웬 산객이....

당진에서 오신 분입니다.

이 영신암터를 알고 일부러 오신 겁니다.

이 분은 명절을 이곳에서 보내려 한다는군요.

안부 인사를 나누고 저는 대간길로 향합니다.

07:25

다시 대간길로 빠져 나왔습니다.

지도 #2의 '다'의 곳이자 참고도 #2의 '나'의 곳입니다.

점필재는 여기서 좌틀하여 참고도 #2의 '다'의 곳으로 가서 잠시 쉰 후 한신능선을 타고 하산하였을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 섬진강 조수가 불어난 것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바로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이었다. 밥을 먹고 모두 절의 서북쪽으로 가 봉우리 위에서 쉬었다. 멀리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리 쯤 되었다. 그러나 발이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해서  가보고 싶었지만 강행할 순 없었다.

 

책 주석에는 위 봉우리가 영신봉인 것 같다고 씌어 있긴 합니다.

우틀합니다.

07:27

지도 #2의 '라'의 곳에 있는 174계단을 올라,

조망을 한 번 한 후,

지도 #2의 '마'의 곳에서 좌고대를 봅니다.

역광이 그 멋있는 모습을 방해하는군요.

가섭전의 북쪽 봉우리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다. 그 중에 하나는 아래가 반들반들하고 위는 뾰족하며 꼭데기에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넓이는 겨우 한 자 정도였다.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 예불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종자 가은데 옥곤과 염정이 그 위에 거뜬이 올라 절을 하였다. 나는 절에서 바라보다가 급히 사람을 보내 그들을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다

 

07:39

좌고대 뒤쪽 봉우리(지도 #2의 '바'의 곳)에 올라보지만 좌고대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저 칠선봉과 반야봉만 조망하고 돌아섭니다.

대성골......

07:50

다시 영신봉입니다.

촛대봉......

다시 안으로 들어서서 이제는 영신봉에서 남진입니다.

참고도 #2의 루트 'C'입니다.

오리지널 낙남정맥을 걷게 되는군요.

사실 2013년 낙남을 할 때에는 이 코스로 올라오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택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다른 의미에서의 땜빵을 하는 구간이 되기도 하는군요.

지도 #3

위에서 내려다 보는 영신사의 위치는 불분명하고......

나무에 가렸기 때문입니다.

잠시 영신봉을 돌아봅니다.

역시 산죽이 시작됩니다.

이런 산죽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멧선생때문에 산죽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우측을 주의하며 걷습니다.

07:57

등로 우측에 살짝 빠져 있어 빠뜨리기 십상입니다.

지도 #3의 '사'의 곳입니다.

자살바위라고도 부르는 낭떠러지.

가섭존자를 바라보는 비로나자불의 형상이어서 비로봉이라고 일컫는다고 합니다.

1611년 유몽인이 유두류산록에서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라고 부른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 비로봉에서 가섭을 봅니다.

그래서 창불대唱佛臺인가?

조금 당겨볼까요.

얼른 그 창불대로 가서 비로봉을 봅니다.

반야봉.......

돌무덤.

창불대에서 다시 비로봉을 본 후,

우측으로 세석평전의 세석대피소와 그 너머 연하봉 ~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을 조망합니다.

과연 세석의 저 너른 곳을 평원 혹은 평전이라 부를만 합니다.

일렬로 선 낙남정맥과 삼신봉과 우측의 내삼신봉.

촛대봉과 우측의 1578봉.

08:09

지도 #3의 '아'의 곳에서 조망터 한 곳을 더 만나고.....

아쉬움에 돌무덤 한 기를 더 보고 빠져 나옵니다.

08:16

샘을 보니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08:16

원래 낙남정맥은 우측으로 조금 더 붙어 진행을 했어야죠.

어쨌든 이 부근이 4년 전 낙남정맥에 접속하던 길 부근입니다.

지도 #3의 '자'의 곳입니다.

줄을 넘어 좌틀하여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08:31

거림삼거리를 지나,

세석대피소로 오르기 전,

세석천에서 물을 보충합니다.

오늘 아침은 라면에 햇반입니다.

김치도 없이 그냥 말아먹기로 합니다.

119 구조대가 올라왔는데 대피소에서 환자가 발생한 거 같습니다.

거림에서 1시간 반만에 뛰어올라왔다고 하는데....

환자 수송을 위해 2시간 정도 후에 헬기가 뜬다고 하는군요.

지금 기상 상태로는 헬기 이륙이 어렵다나 뭐하다나.....

공단 직원들은 청소하느라 바쁘고....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가지고 갑시다.

09:23

40분 정도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섭니다.

09:24

2시간 44분만에 다시 제자리입니다.

우틀합니다.

 

지도 #4

좌측부터 창불대.

볼록 나온 봉이 비로봉 그리고 우측의 영신봉.

알고 보니까 모든 게 확실하게 보이는군요.

09:39

그러고는 촛대봉입니다.

촛대1봉1703.1m으로 가서 바로 아래에 있는 1578봉을 봅니다.

이 촛대봉을 점필재 김종직은 시루봉, 증봉甑峰이라 하였고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이라 하였으며 유몽인은 사자봉이라고 하였음은 이미 얘기했습니다.

 

수리봉 소고(小考)

 

.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졸저 298쪽 이하

이와같이 이 산은 떡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증봉 혹은 시루봉이 아니라 이 수리가 시루로 변한 것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효온이 이곳을 계족봉이라고 부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계족산이라고 하면 우리가 갑천(식장)지맥을 하면서 지나는 대전의 계족산424m이 대표적입니다.

그 유래를 보면,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는 말도 있고,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고자 닭을 풀어놨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여기서 도솔산인님의 계족산 얘기를 들어봅니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 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니 계족산의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와같은 뚯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입니다.

저여원沮原이라 불렸었죠?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沮原)에 다다랐다. 단풍나무가 길을 막고 서 있었는데 줄기는 문설주처럼 서 있고 가지는 문지방처럼 휘어져 있어 그곳을 통해 나오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아도 되었다.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새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었다.

천왕봉 방향.

촛대 1봉.

사자봉이라.....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살지 않았음에도 유몽인은 이 촛대봉을 사자봉이라 불렀으니....

세석과 반야봉을 한 번 더 보고.......

좌측의 비로봉과 창불대도 마지막으로 봅니다.

09:52

장터목까지 2.7km라...

아름다운 곳이니 천천히 둘러보면서 가야겠죠.

09:58

산모퉁이를 돌아 서서히 촛대봉에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좌측으로 연하봉 머리가 살짝 보이고......

 1578봉과 촛대봉.

 좌측부터 1693.봉(공단에서는 연하봉), 연하봉,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

10:27

점점 멀어지는 촛대봉.....

 촛대봉, 영신봉 그리고 반야봉.....

 반야봉 뒤 우측이 만복대....

가운데 라인이 삼각고지에서 가지치는 지리 북부능선.

10:28

한 그룹이 내려오고 있군요.

10:38

공단에서는 이 1693.6봉이 연하봉이라고 표기하여 놓았는데 사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표기된 1723.4봉보다 이 봉이 더 모양새가 좋긴합니다.

우측으로 제법 그럴 듯한 바위도 보이고....

남효온은 향적암을 지나 소년대에 올랐다고 하였는데 그 소년대가 어디인가요? 

하봉에도 소년대가 있으니 좀 헷갈리긴 하겠군요. 

10:41

저 연하봉의 바위봉이 소년대인가?

10:43

그 연하봉을 지납니다.

공단에서는 일출봉이라 표기하여 놓았군요.

10:53

드디어 장터목 대피소입니다.

걸터 앉아서 좀 쉬다가 일어납니다.

누가 데리고 왔는지 강아지가 열심히 재롱을 피우는군요.

녀석 발바닥 좀 아프겠습니다.

11:07

다음 코스는 향적암입니다.

香積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가 퍼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양간을 얘기한다고 하는군요.

육당의 신춘순례에서 배운 대목입니다.

향적암은 제석봉으로 오르다 우측으로 빠져도 된다고 하지만 가지고 온 개념도를 따를 경우 중산리쪽으로 내려가다 적당한 곳에서 좌틀하여 길도 없는 곳을

쑤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없는 길 쑤시고 들어가는 것은 지맥 산행에서 충분히 경험한 것이라 별로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멧선생들의 서식처가 많아 그들과 원치 않은 만남이 일어나게 되지나 않을까 그게 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천왕봉 정상에서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는 분들을 보면서 우틀합니다.

물을 보충하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좌측을 주시합니다.

길 비슷한 곳이 나오면 무조건 쑤시고 들어갈 심산입니다.

11:25

좀처럼 마땅히 들어갈 만한 곳이 나오질 않는군요.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시간과 힘만 소비합니다.

그러다 이 고사목이 있는 사이로 틈이 보입니다.

무조건 치고 들어갑니다.

아래 참고도 #3의 '자'의 곳입니다.

참고도 #3

 

나무를 뛰어넘고 잔가지를 비켜가며 진행합니다.

하긴 뭐 이런 것쯤은 지맥 산행을 하면서 많이 단련되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만나는 멧선생 집때문에 잠깐이나마 모골이 서늘해지기도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칼바위 골에서 올라오는 길흔적과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이 길은 1487년 9월 29일 법계사로 하여 천왕봉으로 오르려던 남효온이 '알바'를 하여 우연찮게 향적암으로 올라온 그 길인 듯 싶습니다.

29(을축). 가끔 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서 산길을 표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으며 길을 가다가 문득 법계암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산에서 비를 만나 석굴 아래서 유숙하려 했는데 얼마 뒤 비가 개어서 다시 길을 떠나 향적암에 다다랐다.

- 남효온 지리산 일과

11:45

20분만에 향적사 터에 도착합니다.

사방은 꽉 막혀서 조망이 없으나 남쪽으로 큰 바위가 보입니다.

그 바위가 향적대인 듯 싶습니다.

그 위로 올라갑니다.

문앞의 반석에 나와 멀리 바라보니 살천이 굽이굽이 흐르고 여러 산과 바다의 섬들이 운무사이로 다 보이기도 하고 반쯤 보이기도 하였다. 꼭대기만 보이는 것은 마치 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투만 보이는 것 같았다. 산의 정상을 보니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어제 내가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 곁에 있는 흰 깃발만이 남쪽을 향해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승려가 내게 알려준 그곳이었다.

- 김종직  유두류산록

 

과연 천왕봉에서 촬영에 여념이 없는 산객들과 성모사가 위치한 바위 부근이 다 보입니다.

그러니 만약 흰 깃발이나 태극기가 휘날린다면 분명 그 존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우측 아래로 국수봉1038.2m이 높이 솟아 있고....

11:50

우측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질퍽질퍽한 터가 나오고 제단 하나가 보입니다.

여기가 향적암 터인가?

바위틈에서 나온 물이 나무 홈통을 따라 졸졸 흘러 물통에 떨어지고 있었다.

석간수이지만 양이 미미하여 식수로 사용하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제석봉으로 가는 길은 명백합니다.

이 향정암을 BC로 하여 매일 성모사에 향을 피우러 다녔다고 하니 그 정성이 놀랄만 합니다.

이제 길찾는 어려움은 없어졌습니다.

가끔씩 표지띠도 보이고.....

그러고는 드디어 제석봉에서 지나는 산객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혹시나 그분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잰걸음으로 금줄을 넘습니다.

12:20

이 안내판 맞은 편에서 건너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얘기를가 하고 싶어집니다

"혹시 향적암이라고 아시나요? 창불대는요? 그러면 영신암도 못들어봤어요?"

그분들이 그것들에 대해 관심이 있건 없건 붙잡고 얘기해 주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그런 것쯤은 기본으로 알아야 하지않나요?"하면서 그들을 막 무시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가슴이 뻥 뚫립니다.

뭔가를 제대로 해냈다는 자부심 때문 일 겁니다.

연하봉을 보면서 촛대봉, 영신봉을 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

고사목들을 보면서 발걸음을 빨리합니다.

칼바위골 뒤로 삼신봉이 보이고....

12:25

김종직은 이 제석봉을 중산이라고 불렀죠?

함양군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북쪽 제2봉을 중산(현재의 중봉)으로 여긴다. 반면 마천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시루봉(甑峰)이 제1봉이 되고 이 중산이 제2봉이 된다.

12:31

저 바위봉을 돌아서면,

12:42

통천문이죠.

음각된 글자를 좀 당겨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계곡인 칠선계곡.

그 끝에 창암산이 보이는군요.

뒤를 돌아봅니다.

앞이 제석봉 그 뒤가 연하봉과 촛대봉 그리고 그 좌측의 1578봉.

12:56

굳게 잠겨진 칠선계곡입구.

이 길로 하산하는 길은 정말 지루합니다.

지금은 예약 탐방제를 실시하고 있죠.

중봉과 하봉이 보이고.....

12:59

그리고 성모사 자리에서 제단을 봅니다.

아뿔사.

이 분이 제물이 되셨군요.

그곳에 막 앉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인터넷에서 귀한 사진 한 장 찾았습니다. 

딱 그자리 맞죠?

예전에 성모상이 올라올 경우를 대비해서 이렇게 보호 장치를 하려고 했는데 천왕사에서 거부하여 결국 이 구조물도 철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모에게 고유한 뒤, 함께 신위 앞에 술을 두서너 순배 돌리고서 마쳤다. 사당 건물은 세 칸뿐이었다. 엄천리 사람이 새로 지었는데 나무판자로 지은 집으로서 못질이 매우 견고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버리기 때문이다. 사당 안 벽에는 두 승려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른바 '성모'는 삭상인데 눈과 눈썹그리고 머리 부분에 모두 색칠을 해 놓았다. 목에 갈라진 금이 있어 그 까닭을 물으니 "태조께서 인월에서 왜구를 물리치던 때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칼로 석상을 쪼개고 갔는데 후세 사람들이 다시 붙여놓았다."라고 하였다.

- 점필재 김종직 유두류록

그리고 사실 이 천왕봉에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왜구와 광신도 때문에 사라진 성모상이 그것이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성모상은 천왕봉을 지키다 14세기 말에 왜구에 의해 훼손당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복원하여 놓은 그것을 1970년대 몰지각한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또 훼손하였었다. 그것을 천왕사 주지 혜범이 어렵사리 찾아서 지금은 이 성모상을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 나도 들어 봤어. 14세기말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연관된 얘기지. 그 전쟁이 화포를 이용한 해전으로서는 세계 최초였었다고 하잖아. 서양의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이나 앞섰었고.”

인물로는 천왕봉의 이 성모상과 고토 분지로, 최무선, 이성계 등과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진포대첩, 황산대첩을 연결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 근데 진포대첩이나 황산대첩 때 왜구 그 잔당들이 여기까지 와서 여기 있던 성모석상의 목을 쳤다? 이게 무슨 얘기야?”

그게 참 재미있어. 나중에 해당되는 대목에서 또 얘기하자. 그리고 성모상 얘기는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보면 자세히 나와. 나아가 후세 사람들이 그걸 다시 붙여놓았다는 말도.”

조금은 의아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그 성모는 누구야?”

기록에 의하면 15세기 정도에 이 천왕봉에는 성모묘(聖母廟)라고 하여 세 칸짜리 작은 사당이 있었어. 거기에 이 성모석상이 모셔져 있었고. 여기서 맑은 날을 보지 못할 경우 이 석상에 기도를 하면 날이 갠다고 했데. 속설에는 이 성모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고 하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고 나와 있고.”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3쪽 이하 

 

하산길을 내려다 봅니다.

세존봉이 보이고 문창대가 보이는군요.

저는 법계사 헬기장에서 직진을 하여 저 세존봉 옆 문창대를 지나 '가'에서 우틀하여 칼바위 부근에서 기존 등로에 접근할 요량입니다.

기대반 우려반입니다

13:04

어쨌든 그래도 한 장은 찍어야겠죠?

언제나 부산한 천왕봉.

다시 하산길을 확인한 다음,

시끄러운 곳을 피해 중봉 쪽이나 조망하려 합니다.

중봉에서 갈라진 황금능선입니다.

써리봉1586.7m이 보이고 그 뒤로 멀리 희미하게 웅석봉1099.9m이 보입니다.

내려오면서 제석봉과 연하봉, 반야봉을 봅니다.

천왕봉을 내려오면서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보통 일반적인 산꾼은이 제대로 안 보는 그림이죠?

조금 더 내려오면서 보니까 촛대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영신봉은 머리 부분만 살짝 보입니다.

촛대봉이 괜히 촛대봉이 아닙니다.

영신봉이 낙남정맥과 지리남부능선 때문에 좀 잘 나 보이는 거지 뽀대야 촛대봉이 한두 수 위입니다.

위치가 어디든 잘 나 보이지 않습니까?

13:35

개선문이라고 하지만 저는 개천문開天門에 한 표를 던집니다.

통천문에 대응하는 개념 아닙니까?

입구에도 통천길이라고 해놓고는.....

세존봉이 더욱 확실해 집니다.

13:59

법계사를 지납니다.

전화기를 켜보니 반장님이 3시 정도 하산하시겠다고.....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지도 #5

14:00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

14:03

헬기장에서 직진을 하여 금줄을 넘습니다.

14:07

처음에는 그저 이 정도입니다.

이 정도의 등로 사정이라면 오히려 시간이 단축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문창대 석문입니다.

파리와 날벌레들이 하도 날아들어 사진을 제대로 남기지 못합니다.

목 뒤로는 '살인 진드기'가 달라붙는 느낌을 갖게 하고.....

끈적끈적 마치 정글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뭔가 기분 나쁜 기운이 도는 것 같습니다.

동쪽에 걸처앉은 세존봉에는             東蹲世尊峰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石角如人立

서쪽에 문창대 서있으니                    西峙文昌臺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孤雲遺舊跡                 - 성여신의 유두류산시 중

14:15

세존봉 정상의 모습입니다.

문창대는 건성으로 지납니다.

한 바위봉에 올라 주위를 봅니다.

천왕봉과 중봉.

황금능선......

잠시후 지나게 될 1333.2봉과 삼거리봉 그리고 그 뒤로 국수봉 라인이, 그 뒤로는 치밭목능선의 높게 솟아 있습니다.

14:15

1333.2봉을 지나,

14:41

여기서 직진을 하면 순두류 마을로 진행을 하여 포장도로 혹은 셔틀버스를 이용해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능선을 타기로 작정한 이상 별다른 고민없이 우틀합니다.

여기서 고행이 시작됩니다.

14:43

이게 비극의 서곡이 될 줄은.....

계속되는 산죽은 2m 정도의 밭까지 형성해 놓았습니다.

거리는 약 200m 정도되고....

발밑이 근질근질해지고.....

이 정도 높이의 산죽밭은 낙남정맥을 할 때 삼신봉을 지나 외삼신봉 부근에서 보던 것들입니다.

고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된비알로 조망은 하나도 없고.....

15:25

그렇게 내려온 갈림길부터의 약45분이라는 시간은 무척 긴 시간이었습니다.

눈에 익은 정규 등로입니다.

15:34

통천길을 빠져나와,

15:39

법계교를 건너 이제 환속還俗을 합니다.

점필재나 유몽인, 김일손, 남효온, 이륙, 성여신 등을 따라 걸은 두류산.

아니 지리산.

다른 건 몰라도 남명 조식을 극복했다는 점만은 스스로 대견해하고 싶어집니다.

반장님과도 시간이 거의 맞아 떨어졌군요.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고 땀에 전 옷을 갈아 입습니다..

주모가 갖다주는 안주거리와 반장님이 말아주는 소맥을 목으로 넘기니 무엇이 부러울소냐!

가섭을 보면서 염화미소를 느꼈으니 은근한 나의 미소를 대작하는 반장님만 알고 있으리.....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오대사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 산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곳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두자미杜子美의 "방장산方丈山은 바다 건너 삼한三韓에 있네"라는 구절을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임진년 1472. 추석이 5일 지난 날. 점필재 김종직.

* 두자미는 두보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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