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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7구간(성심원 ~ 십자봉 입구 ~ 웅석봉 하부 헬기장 ~ 점촌마을~ 단속사지 ~ 운리)

 

지리산 둘레길 제6구간에 이어 제7구간을 바로 이어갑니다.

 

지도 #1

 

07:05

성심원 본관에서 바로 우틀하면 (사) 숲길에서 운영하는 지리산 둘레길 성심원 쉼터가 있습니다.

그 쉼터 앞 마당으로 좌틀하여 우측으로 보면,

 

정면으로는 예쁜 소나무 숲이 보이고 둘레길은 우측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측으로 오르자마자 왼쪽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르다,

 

뒤를 돌아봤습니다.

축대를 만들어 안전하게 둘레길을 이어가도록 해 놓으셨군요.

 

07:12

그러고는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십자봉 입구라고 표기되어 있군요.

십자봉이라....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나 '김형수555'에도 안 나온 산 이름입니다.

이곳에서만 특유하게 부르는 이름인데 웅석봉에서 내리로 하산하거나 이 성심원으로 하산하는 도중에 있는 900.2봉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등로를 이용한다면 752.7봉을 거쳐 십자봉 ~ 웅석봉으로 진행이 가능하다는 거죠.

 

우리는 둘레길을 하는 중이니 직진을 합니다.

둘레길은 아까 십자봉으로 올라가는 지능선들을 피해 진행하다 보니 꼬불꼬불 굽어졌습니다.

 

07:25

우측으로 '기도의 집'이 나오고,

 

좌측으로 폐가 한 곳을 지나,

 

'절대 출입금지'라고 지봉智峰님이 쓴 팻말이 붙은 삼거리에서 우틀합니다.

이제 고도를 조금씩 높여갑니다.

 

07:36

그러면 지도 #1의 '나'가 나오고 이곳이 어천마을로 빠지는 삼거리입니다.

정면으로 어천마을 건너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792.8봉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저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청계리가 나오고 거기에는 청계저수지가 있습니다.

이따 확인할 곳이죠.

우틀합니다.

 

07:39

다시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119농원이 나오는데 둘레길은 아래쪽입니다.

좌틀합니다.

 

민가 한 채를 지나,

 

07:44

차단기를 지나면,

 

맑디맑은 개울을 지나면서 목을 축입니다.

개울 지나자마자 바로 우측으로 능선으로 달라붙게 되어 있군요.

 

07:59

지도 #1의 '다'의 곳인데 이제부터 진짜 오르막입니다.

둘레꾼들에게는 '상급' 구간으로 분류될 법한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부터 산청읍을 버리고 단성면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제가 준비해 놓은 자료를 볼까요?

 

이 물줄기를 건너면 산청읍을 벗어나 예전에는 단성현이었던 단성면丹城面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 단성면의 옛 지명 단성현은 신라시대에는 적촌현과 궐성현이었다. 결국 으로 바뀐 것이다. 무슨 뜻일까? 이나 은 우리나라의 ᄇᆞᆰ사상의 산물이라 봐야한다.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의하면 신라의 개국 당시부터 이란 제사장을 뜻하는 계급이었다. 남자무당인 박수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ᄇᆞᆰ의 변형이 곧 ’, ‘’, ‘’, ‘등인 것이다. 그것들이 한자가 들어오면서 ’, ‘’, ‘’, ‘’, ‘이 되었으며 붉을 의 경우 단순하게 같은 색깔의 한자어인 붉을 으로 바꿔 쓴 것이지 그 뜻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고 신성시 하였던 신라인이나 가야인들은 赤村즉 신성한 마을을 丹村으로 바뀌게 된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백두대간상의 소백산을 끼고 있는 충청북도 단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단양의 옛 이름이 赤山이었으며 은 산이나 고개를 나타내는 말이니 적산 = 단양이므로 이 단성의 옛 이름이 적성이었음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계족산의 경우 鷄가 닭 - 달 - 뫼(산)이고 足이 발 - 밝이므로 곧 계족산은 신성한 상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지맥꾼들에게는 워낙 등로를 잘 닦아놔서 '중하' 정도로 분류될 곳이죠.

 

어쨌든 둘레꾼들에게는 등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오늘 구간의 유일한 곳이라 보면 됩니다.

그러니 이런 구간은 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땀 좀 흘리게 무조건 치고 올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하나 유념할 게 있습니다.

뒤로 터지는 조망이 있다면 반드시 확인하고 가야죠.

 

뒤를 돌아 좌측을 보면 산허리에 밭과 민가가 보이고 그 뒤로 정수산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저 정수산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 등산지도에는 앞의 높은 봉우리841.3m가 정수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반면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뒤의 좀 낮은봉829.8m이 정수산으로 표기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정상석도 높은 봉인 841.3m에 위치해 있고 ....

이 모든 걸 주관하는 관청이 국토지리정보원이므로 829.8봉을 정수산으로 봐야겠죠.

 

그리고 그 뒤에 일렬로 서 있는 봉우리!

그렇죠.

황매산1112.8m입니다.

이 산청과 합천의 경계에 있는 산이죠.

횡재를 한 느낌입니다.

여기서 황매산을 볼 수 있다니!

저 황매산 줄기는 남강지맥 소속이고 저 정수산은 양천지맥 줄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둘레꾼들에게는 좀 어려우니 조금 이따 덕천지맥 얘기하면서 맛이나 보기로 하죠.

 

그리고 그 우측의 봉우리.

사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진행했었죠.

바로 둔철산823.4m입니다.

정상 바로 좌측에 안테나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는데....

 

조금 당겨보니 안테나가 보입니다.

 

08:46

그러고는 웅석봉 하부 헬기장입니다.

지도 #1의 '라'의 곳입니다.

그러니 기껏해야 45분 정도 올라온 거리입니다.

이 헬기장 좌측으로 진행하는 능선은 아까 보았던 792.8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청계리로 떨어졌죠?

 

정면으로는 웅석봉 전위봉이 보이고.....

 

그 경계에 웅석봉1099.9m이 있다. 웅석봉은 지리의 동쪽을 책임지고 있다. 예전에는 동부능선이라고 많이 불렸으나 1980년 산경표가 알려진 이후로는 덕천지맥(대한산경표) 혹은 웅석지맥(신산경표)으로 불리고 있다. 이따 또 보겠지만 이 지맥은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일부 지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웅석봉을 조선지도에는 유산楡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웅석산 정상에 곰바위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신성’, ‘신령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 ‘’, ‘’, ‘고마’, ‘구마등이 거기서 나온 변형어이다. 그러니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며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검산’, ‘검암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巖’, ‘劍山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이다. 그 한자어가 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곰바위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산은 그저 신성스러운 산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지리산 자체가 신성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람이 몹시 드셉니다.

진행방향은 시멘트 임도를 따라가도 되고,

 

바로 우측의 표지띠를 따라도 됩니다.

우회하여 편하게 가느냐 가파르지만 좀 짧게 가겠느냐의 차이입니다.

 

08:56

삼거리에서 일단은 웅석봉을 따르고, 

 

지도 #2

 

08:57

그러고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좌측을 따릅니다.

웅석봉은 우측으로 올라가고.....

 

저 임도는 웅석봉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이고....

 

아!

좌측으로 청계저수지가 보이고 그 뒤로 진양호가 보입니다.

남강은 저 진양호로 흘러들어가 곧 낙동강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저 진양호 바로 뒤로 낙남정맥이 가로 막고 있고.....

실은 저 진양호는 인공호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걷고 있던 남강은 저 낙남정맥에 가로막혀 남해로 바로 못 들어가고 낙동강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낙남정맥의 남쪽에 있는 진주 일대가 물이 부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로를 뚫어 이 남강의 어느 정도의 물을 낙남정맥 이남의 땅으로 공급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러니 그 수로가 막혔던 고개도 일종의 '무너미'에 해당하겠군요.

그렇다면 비로 그 옆의 산군 중 제일 높은 게 사천에 있는 와룡산801m이겠네요.

 

임도를 따라 편하게 내리막이 시작됩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능선.

'신산경표'에서는 웅석지맥이라 불렀고 '대한산경표'에서는 덕천지맥이라 부르는 능선입니다.

그리고' J3클럽'의 배병만 방장은 지리태극종주라 이름하고 이 능선의 끝 사리에서 시작을 하여 인월까지 선을 이어보니 마치 태극의 문양과 같다고 하여붙인 이름입니다.

또 하나 아주 가슴 아프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달뜨기 능선'이라는 이름입니다.

둘레길 우측으로 웅석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은 997.5봉을 지나게 되는데 이 구간을 달뜨기 능선이라고 부른다. 예전 빨치산들이 이 달뜨기 능선으로 떠오르는 처연한 달을 보며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즉 하봉 아래의 조개골쑥밭재언저리에 마련한 비밀 아지트에서 덕천강 건너편 웅석봉 남쪽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처연한 달을 바라보는 빨치산들의 한과 설움이 그 이름에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필경 '딸띠기'라 불렀을 그 능선은 지금 오히려 너무 밝은 달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념 투쟁의 현장을 능선 하나하나 골짜기 구석구석 깊게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 이 지리산일 겁니다. 

 

이 임도를 내려가다 보면 새로 조림하는 나무들이 눈에 띌 정도로 많습니다.

수목 개량인가요?

 

09:49

임도차단기 좌측으로,

 

성불정사가 있고, 

 

10:07

17분 정도 룰루랄라 하면서 내려가면 또 차단기가 나옵니다.

 

10:07

민가 두어 채가 나오고....

우측의 한 민가는 완전히 철공소를 차려놓은 듯 맥가이버 아저씨는 기계를 만지는 데 여념이 없으시군요.

앞의 508.8봉 뒤로 석대산 줄기가 내려가는데....

이쯤에서 주변 줄기를 정리해 볼까요? 

 

참고도 #1

우선 간단하게 위 개념도를 봅니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정리해 놓은 표表 혹은 책을 산경표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산줄기의 족보입니다.

그 산경표를 보면 1대간 1정간 13정맥이 그려져 있는데 이중 남한의 것만 보면 1대간 9정맥입니다.

그리고 이 산경표에 착안하여 정맥 이하의 개념인 기맥岐脈과 지맥枝脈을 만드신 분이 박성태 선생님의 신산경표입니다.

이 신산경표의 위대성은 산꾼들에게는 거의 국보급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지금 위 개념도가 신산경표를 토대로 작성태 선생님이 직접 제작한 개념도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선생님 혼자서 작업을 하시다 보니 몇 가지 오류가 보입니다.

그 오류를 지적하며 새로 선을 보인 게 바로 '산으로' 박흥섭의 대한산경표입니다.

그 차이라는 게 바로 산경표의 대원칙이라 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충실했느냐 여부입니다.

즉 산줄기가 그 맥을 다하는 곳은 그 산줄기를 내놓은 두 물줄기의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얘기입니다.

좀 어려우므로 제 기록의 이전 산행기를 보면 더 쉬울 것 같고.....

 

일단 백두대간은 백두산 ~ 지리산까지의 이음이니 천왕봉에서 끝나는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됩니다.

그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는 밤머리재 ~ 웅석봉 ~ 백운산을 지나 덕천강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산줄기의 도상거리가 30km를 넘으니 지맥이라는 계급을 갖게 됩니다.

그 이름을 신산경표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나 저명한 산의 이름을 딴다 하였으니 웅석지맥이 되는 것이고 대한산경표에서는 물줄기를 중시하므로 당연히 그 가지 산줄기에서 나오는 물줄기의 이름인 덕천강을 따서 덕천지맥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개념도를 보면 덕천지맥의 경우도 'A' 곳과 'B'의 곳으로 그 합수점의 위치가 나뉘는데 이는 덕천강이 끝나는 곳인 어디인가를 보는 관점에 의한 차이입니다.

즉 덕천강과 남강 여기서는 진양호와의 합수점을 보는 건데 진양호가 만들어짐에 따라 그 잠기는 곳의 위치가 달라져 생긴 것이냐 아니냐의 시각 차이 입니다.

좀 어려운 얘기이니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다만 J3 배병만의 지리태극종주 코스는 합수점을 중시한 게 아니고 모양을 중시한 것이므로 이와는 별개입니다.

문제는 인월과 덕산(사리)를 잇는 약 90km의 능선을 구간을 나눠서 걷느냐 라니면 일시에 걷느냐 그것도 아니면 왕복을 한 번에 걷느냐 하는 등 여러 가지 진행방법이 있습니다.

 

10:10

지도 #2의 '마'의 곳으로 점촌마을 입구입니다.

우측으로 들어가면 청계저수지가 나오고 바로 점촌마을이 보일 겁니다. 

 

지도 #5

 

10:21

조금 걸어나오니 저 탑동마을 한가운데 탑이 보입니다.

바로 단속사지 동탑이로군요.

탑이 있는 마을이어서 탑동마을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매불망 꿈속에서도 그리던 단속사지입니다.

갑자기 김일손이 되며 성여신이 됩니다.

그리고 남명 조식도 됩니다.

빨리 가봐야죠.

 

우틀하여 금계사를 따르고,

 

그럼요.

얼마나 고마운데요.......

 

우측 금계사.

직진하여,

 

탑동마을 안으로 들어섭니다.

 

좌틀하여 나오면 금륜대라는 작은 절집이 보이고,

 

10:29

그러고는 정당매각입니다.

안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좌측의 통정대부 강선생 수식 정당매비를 1847년에 후손인 강세주, 강택주가 세웠군요.

자신들의 선조인 강회백이 이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절의 뒷뜰에 심었던 매화라고 합니다.

강회백의 손자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우리 조부 통정공께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조부께서 정사를 바르게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기에 단속사 스님들도 조부의 덕을 생각하고 그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조부를 본 듯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정당매라 부른다.' ​  

우측의 비는 1915년 새로 지은 것으로 이 비를 세울 때 비각도 함께 세웠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편액도 걸려 있고..........

 

이 비각 앞에는 문제의 그 정당매가 있습니다.

이 단속사를 얘기하면 매화나무 자세히는 정당매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안(1417~1464)의 조부 강회백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할 때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 매화나무가 정당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김일손의 정당매 시문후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정당매는 하즙 선생의 원정매와 남명 선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 삼매라고 하는군요.

원정매을 보려면 원정마을 까지 가야겠군요.

 

그런데 이 정당매가 너무 늙어서 2013년 이 정당매의 일부를 다른 나무에 접목하여 후계목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글입니다.

 

그러니 굵은 모습의 시멘트 옆에 새롭게 올라오고 있는 나무가 바로 후계 정당목이군요.

이 시멘트도 방부 처리를 한 것이고....

고사한 지 이제 4년 정도 됐지만 푸른 손자나무 처럼 금방이라도 가시 움이 돋을 것만 같군요.

 

이렇게 잘 보존해야겠지요.

 

그러고는 단속사지로 갑니다.

단속사라는 절은 없어지고 이 두 기의 탑만이 융성했던 옛 단속사의 흔적만을 보여줍니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지금은 보물 72호와 73호로 지정된 동·서삼충석탑 두 기와 당간지주만이 예전의 화려했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보물인 탑 두 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탑동마을의 단속사로 들어가 볼까?

 

14879월의 남효온이나 14894월의 김일손은 우리와 같이 산청에서 곧바로 웅석봉을 통하여 점촌을 지나 단속사로 온 게 아니라 당시는 단성현이어서 현내리란 이름으로 불렸을 단성면 소재지를 통하여 들어왔다. 웅석봉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보고 이곳에 들었다 했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748)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 의하면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위하면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그 절의 승려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이 단속사가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찰이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인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 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 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단속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에서 비롯되는 바, 이들의 활동은 김헌정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도신이 입적하자 신행은 중국 선종 6조인 신수의 법손法孫 지공에게서 師事해서 크게 깨달은 후, 759년 단속사에 머물면서 북종선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교종과 선종을 아우른 북종선은 신라 중대왕실이 무너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 신행사비 :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 북문으로 나와 곧장 시내를 하나 건넜다. 덤불 속에 비석이 있는데 병부령 김헌정이 지은 승려 신행의 비명이었다. 당나라 원화 8(813)에 세운 것이었다. 돌의 결이 거칠고 나빴으며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 낮고 읽을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탑에서 서탑으로.... 

 

동탑.

 

서탑.

 

서탑에서 동탑으로...

예전의 단속사의 규모는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알 수 있다. 김일손이 이 단속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절이 황폐화 되지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그런 절이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과 세금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10:39

사명대사 유정에게 주었다는 남명 선생의 시비를 보며 단속사지를 빠져 나갑니다.

그런데 유정과 성여신이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고 나가야겠습니다.

* 부사 성여신은 23세 때 지금은 터만 남은 산청군 단성면의 단속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였는데, 서산대사 휴정이 삼가귀감三家龜鑑 - 선가, 도가, 유가 등 삼가의 교훈 중 귀감을 삼을 만한 글을 모아 정리한 책-을 편찬하면서 유가儒家의 글을 맨 뒤에 둔 것을 발견하고는 이에 분개하여 책판과 단속사에 불을 지를 정도로 호기가 넘치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뭔가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군요.

1001번 도로를 따라 나오는데 우측으로 뭔가 보입니다.

축대를 뛰어 올라 무덤 앞으로 다가가 보니

 

단속사  당간지주입니다.

 

신라시대의 영화는 어디로 갔고....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군요.

직진하여,

 

다물편생교육원을 지나니,

 

 

10:49

운리마을 버스정류장 앞입니다.

슈퍼하시는 분은 어디로 출타하셨는지 문을 바궈놓으셨고....

여기서 둘레길 7구간 13.4km를 마칩니다.

3시간 40분 정도 걸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