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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8구간 (운리 ~ 덕천지맥 접속 ~ 백운계곡 ~ 지리태극종주 접속 ~ 마근담~ 덕산)

 

 

 

지리산 둘레길 중 단속사지와 웅석봉으로 인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구간 하나를 지났습니다.

바로 이어서 제8구간을 시작합니다.

제7구간의 날머리이자 제8구간의 들머리인 운리마을은 이름이 갖는 뜻 그대로 구름과 관련이 있는 마을입니다.

서西는 지리태극종주능선으로, 동東은 덕천지맥 능선으로 그리고 북北은 웅석봉이 가로막고 서 있으니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남사천을 따라 입석리로 드나드는 통로가 유일했을 겁니다.

그나마 언덕이 조금 낮은 곳인 백운산 들머리나 마근담재 등을 이용하여 사리나 백운리로의 탈출은 그나마 답답한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니 분지 형태의 운리는 풍부한 수량의 남사천이나 백운천 덕에 아침이면 안개 혹은 구름이 덮힌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충분하였겠죠.

그래서 운리雲里입니다.

 

이런 기후 조건에는 감 농사가 제격인 것 같습니다.

산이 온통 감나무 단지더군요.

운리에 있는 유일한 유통업체인 슈퍼가 문을 닫았습니다.

캔맥주 한 통 마시려던 시도는 물거품이 됐고 빈 속으로 출발합니다.

아직 배낭에는 새벽에 산 김밥 한 줄이 있으니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도 #1

10:53

운리 주차장을 출발합니다.

개천을 건너자마자 바로 우측으로 들어갑니다.

SK텔레콤 이동기지국을 지나 좌측으로 진행하니,

11:00

원정마을의 당산나무가 둘레꾼을 맞이해 줍니다.

마을로 들어설 때에는 항상 긴장이 됩니다.

혹시나 목줄이 풀린 개쉬키가 인사를 하러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방어할 수단이라고는 바닥에 있는 돌맹이 뿐인데 그나마 이렇게 포장이라도 되어 있으면 그것도 찾기가 수월하지 않더군요.

다행인 것은 외딴 집에서 키우던 개농장들이 지금은 철수하여 그나마 그들을 만나지 읺는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스틱을 가지고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좌측의 낮은 봉 우측으로 틀어 우측에서 내려오는 산자락 사이로 진행하게 되겠군요.

11:09

수로를 우측에 두고 진행하면서,

잠시 빠져나온 원정마을을 돌아봅니다.

11:16

굴곡이 있는 임도를 따르면,

지도 #1의 '가'의 곳의 정자가 있는 쉼터를 지나게 됩니다.

뒤로 조망이 트입니다.

우측으로 운리 마을이 낮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뒤에 있는 작은 봉우리 우측을 싸고 돌아나왔습니다.

그 봉우리 뒤가 탑동마을이고 거기에 단속사지가 있었습니다.

성심원을 빠져나오면서 보았던 중앙에 뾰족하게 뒤어나온 792.8봉을 이번에는 뒤에서 보게 되는군요.

그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아까는 높아서 보이지 않던 석대산535.5m 정상 부분도 어느 정도 제 모습을 보여줍니다.

폐 아스팔트가 깔린 임도.

토양을 오염시키는 요소 아닌가요?

재활용이 아니라 오염물질 무단 투기로 이해해야 할 듯.

11:41

그렇게 무료한 길을 꾸불꾸불 걷다보면 바로 좌틀하여 돌계단을 살짝 올라서야 하는 곳이 나옵니다.

 

정자를 지나 백운산 갈림길을 지난다. 이 백운산은 웅석봉을 지난 덕천지맥의 삼장면 법계리와 덕산면 운리의 경계에 있는 960.6봉에서 가지를 친 줄기에 있는 산이다. 백운산은 여기도 있지만 지난 번 (마천)금대암에서 백운산904.1m을 봤으며 뒤에 화개를 지나면서 섬진강 건너의 호남정맥상의 백운산1228m도 볼 수 있다. 몇 개만 더 짚어볼까?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장수의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상 백운산1278.9m, 제천시 백운면에 있는 섬강지맥상의 백운산1086.1m 그리고 경기도 이동면과 강원도 사내면 경계인 한북정맥상의 백운산903m 등이 굵직한 명함을 내민 우리나라의 주요 백운산들이다.

하나같이 그 지방에서는 고봉이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들인데 이 역시 ᄇᆞᆰ사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곳이 아주 중요한 곳이죠.

밋밋한 이곳이 양 옆의 봉우리들을 이어주는 안부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길입니다.

지도 #1의 '나'의 곳으로 이 안부가,

좌측으로는 백운산516m과 안부 우측의 477.6봉을 이어주는 루트인 것입니다.

사진의 우측 봉우리가 백운산인데 도무지 조망이 잘 되지 않고 477.6봉은 바로 붙어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이 역시 조망 불가!

이 안부가 바로 덕천지맥을 잇는 곳이라는 인식만 하고 통과합니다.

덕천지맥에 대해서는 지난 구간에 자세하게 말씀드렸죠.

이내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게 되고.....

조금 전 본 백운산이 슬쩍 보이는군요. 

지도 #2

12:14

좌측으로 계곡 물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옵니다.

너덜지대를 지나자마자,

12:16

바로 백운계곡이 나오는군요.

지도 #2의 '다'의 곳입니다.

안내판은 역시 경상대학교에서 수고해 주셨군요.

이 지리산과 경상대학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최석기 교수나 최원석 교수 그리고 강정화 교수 등의 연구 활동 덕인 거 겠죠.

 

안내판에 소개된 남명의 시 한 수를 봅니다.

 

天下英雄所可羞(천하영웅소가수)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는

一生筋力在封留(일생근력재봉류) 일생의 공이 유()땅에만 봉해진 것 때문

靑山無限春風面(청산무한춘풍면) 끝없는 청산에 봄바람이 부는데

西伐東征定未收(서벌동정정미수)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평정하지 못하네.

 

해석을 봐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이 글을 쓰면주석을 보니 내용인즉슨,

()나라 고조가 공신(功臣)들을 책봉할 때 장량(張良)에게 제()나라 땅 3만호에 왕을 봉하였다.

그러나 장량은 유() 땅에 봉해지는 즉 유후(留侯)만으로 충분하다며 사양하였다.

그 후 장량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신선술을 배워 일생을 깨끗이 보전하였다.

그러나 사양할 줄 몰랐던 한신과 팽월 등은 천하를 평정하지도 못하고 결국 토사구팽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두고 한신이나 평월 같은 천하 영웅들은 장량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라는 얘기다.

 


명종의 등용에 자신의 무능을 내세워 상소문을 올리면서까지 애써 고사하는 남명과 비견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장량을 닯고자 하는 선생의 뜻을 읽을 수 있는 한 수의 시였습니다.

이 물이 백운천이 되어 덕문교 아래에서 덕천강에 흡수될 것입니다.

백운동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일단 주위를 둘러봅니다.

너른 반석하며....

남명 선생이 이곳을 놀이터 삼아 오셨고 시까지 남기신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백운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니 백운동 마을이다. 이 백운동의 다른 이름은 삼유동 三遊洞이다. 남명이 산천재에 터를 잡기 전 말년을 지낼 자리를 물색하러 다니던 중, 한 번 들렀던 곳이란다. 그리고 산천재에 터를 잡은 후 두 번 더 들렀다고 하니 무던히도 갈등을 느꼈던 듯 싶다. 백운동을 유람하며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이 소나무가 수백 년 후까지 남명과 백운동을 연결하는 문학창작의 소재가 되었다.

바쁜가? 좀 바쁘더라도 여기까지 왔으니 백운동 계곡의 물줄기 맛 좀 보자. 남명 선생 南明先生도 여기 와서는 신발을 벗고 쉬어갔다는 곳杖屨之所 아닌가! 그냥 지나친다면 아무래도 남명 선생께서 섭섭해 할 것 같다. 그러니 백운동 각자도 보고 1893년 단성 법물에 거주하던 물천 김진호(1845~1908) 등 백운동칠현이 새긴 南明先生杖屨之所란 각자도 찾아보자.

 

그러고 보니 백운동칠현이 새긴 이 각자는 법계사 서쪽의 바위에 새겨진 孤雲崔先生杖屨之所를 연상시킨다. 이 각자는 고운 최치원이 제석봉 남쪽에 있는 향적대의 바위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 시궁대矢弓臺(일명 고운대孤雲臺)가 있는 문창대를 연상시킨다. 이 바위가 고운 최치원의 문창대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기존의 문창대와 비견되어 신문창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여름날 아주 더운 날을 골라 이 백운동을 찾아 선생의발자취를 한 번은 더듬어 봐야겠습니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그 백운동 마을이 나옵니다.

가지고 온 김밥을 먹고 직진하여 산죽 밭을 지납니다.

12:44

그러면 만나는 곳.

지도 #2의'라'의 곳으로 바로 지리태극종주 길입니다.

아주 중요한 곳이죠.

이에 관해서도 지난 구간 때 자세히 얘기했죠?

여기서 이 안부를 지나며 단성면과 헤어지고 이제부터는 시천면입니다.

천왕봉의 중산리가 있는 시천면 말입니다.

그 시천면으로 이제 드는 겁니다.

좌측의 태국종주길입니다.

이 길로 진행하면 수양산502.2m을 지나 시무산402.7m을 거쳐 SK주유소 앞으로 떨어집니다.

이따 그 들머리를 확인할 겁니다.

둘레길은 직진하여,

임도길로 내려옵니다.

마근담이라.....

마근담은 막힌담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니 이곳이 얼마나 오지인가는 짐작할 수 있겠다.

 

민가 두 곳이 있는 삼거리에서 크게 좌틀합니다.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시멘트 길을 따라 무조건 내려가면 되는군요.

외길입니다.

.............

무슨 용도?

창고인가요?

벌꿀을 채취하기 위한 준비...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 어쩝니까?

마근담 계곡도 여름에는 좀 시끄러운가요?

마근담교 바로 아래에는,

여름에 평상을 대여해 주고 대여료를 받겠군요.

주차장 시설도 어느 정도 해놓았고.....

수석 전시실 같은 범상치 않은 집.

요란합니다.

저 돌을 운반하려면 지게차와 크레인을 동원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구 집입니까?

................

이제 수양산 옆으로 붙었습니다.

13:46

문수암을 지납니다.

아주 운치가 느껴지는 암자.

템플 스테이까지 한다네요.

온 산이 다 감나무 밭.

그런데 날씨 탓인지 꽃이 피질 않았네요.

좌측은 수양산 우측은 시무산402.7m 자락.

감나무가 조용합니다.

수양산.

사리를 빠져나오면서 본 수양산과 시무산.

20번 도로를 보면서 둘레길 반대방향인 단성 쪽으로 좌틀합니다.

14:09

둘레길에서 빠져나온 이유는 아까 얘기하였다시피 덕산교를 건너 SK주유소 바로 앞,

그 좌측에 있는 지리태극종주 들머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임도길 우측으로 표지띠들이 산꾼들을 맞이하기 위해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시천면 면소재지가 있는 사리 시내로 들어오자면 우측으로 다리 하나가 보인다. 덕산교다. 그 앞으로 나지막하게 봉우리 하나가 보이는데 바로 시무산402.7m이다. 이 다리 건너 입구가 ‘J3 클럽의 배병만 방장이 만든 지리태극종주 코스의 들머리이자 날머리이다. 즉 인월의 구인월 마을로 들머리를 잡았을 경우 이 덕산교가 날머리가 되며 반대방향으로 코스를 잡을 경우 이 덕산교가 들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리마을회관 ~ 수양산502.3m ~ 웅석봉 ~ 하봉 ~ 천왕봉 ~ 지리 주릉 ~ 성삼재 ~ 고리봉 ~ 바래봉 ~ 구인월 마을로 이어지는 약 87km의 거리를 진행하는 이들의 산행 능력에 따라 1회 혹은 2 ~ 5회로 나누어 종주하게 되는 것이다. 능력자들은 이도 모자라 1회에 왕복종주를 하기도 한다. 분당의 해밀산악회의 송병연 회장은 48시간 50분에 왕복으로 그 지리태극종주를 마쳤으니 대단한 기인이다.

다시 돌아나갑니다.

시천면 덕산은 아무래도 남명 동네입니다.

비단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그리고 원리교 건너 덕천서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덕산 자체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남명의 사상과 이 지리산을 떼어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리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도 이 덕산에 위치하고 있을 겁니다.

시천 혹은 덕천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덕산은 남명 조식(1501~1572)의 고장이다. 물론 남명의 고향은 합천 삼가이다.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을 세우고 문인들 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남명은 12차례에 걸친 지리산행을 통하여 스스로 '방장산인'이라 부를 만큼 지리산을 경외하며 지리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고는 백운동 등 세 곳 정도를 물색하다 결국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진주 일대는 남명학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덕산은 구도의 극처極處인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이상적 장소였다. 물론 덕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었겠지만 조식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하게 덕이 있는 인물이 사는 골짜기로 인식되었을 게다.

 

안으로 들어갑니다.

깨끗하게 정돈된 기념관.

좌측으로 남명 선생의 동상과 선생의 이력을 담은 글이 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념관은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많은 후학들......

책과 유품.

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손때 묻은 책.

교지.....

......................

건너에 있는 산천재로 갑니다.

내력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산천재와 남명매.

지리산 국공원 50주년 기념공원과 멀리 구곡산961m.

그가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한 곳을 산천재山天齋라 이름했다. 산천이라는 말은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에 해당되는 간괘艮卦와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가 합쳐진 모양이라는 것이다. 괘사卦辭 즉 그 말을 풀어보면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남명의 이러한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로 지리산 천왕봉을 택한 것이며 산천재는 지리산 천왕봉을 가장 가까이 두고 좌로는 수양산502.3m, 우로는 검음산(현재의 비룡산554.6m으로 추정)을 각 둔 천혜의 길지로 자신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덕천벼리德川遷로 나가면 이른바 두류산 온갖 골짜기를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문을 입덕문入德門이라고 불렀다.

 

덕천벼리가 무엇인가?

삼장천과 살천이 만나는 곳이 양당촌에서 합류하여 덕천이 된다고 했다. 덕산에 있는 산청조식유적지를 보고 원리교를 건너 덕천서원으로 들어선다. 우측의 덕천 골짜기 물은 두 산의 협곡 가운데로 빠져 나간다. 시내를 따라 5 ~ 6리를 가다보면 돌을 깎아 놓기도 하고 흙을 붙여놓기도 하면서 겨우 통행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를 덕천벼리德川遷라 한다. 도구 陶丘 이제신(1536 ~ 1582)이 바위면에 입덕문이라 새 글자를 새겨 놓았으니 덕산에 들어가는 이들은 모두 이 길을 통해야 한다고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 산천재에 들어서면 지난 구간 단속사에서 본 정당매를 떠올리게 된다.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수령 440년의 매화나무는 남명매로 불리며 원정 하즙이 심었다는 원정매와 더불어 산청 3라고 한다.

 

지리산을 이야기할 때 남명을 빠뜨린다는 것은 지리에 얽힌 인문지리人文地理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 이제부터 남명 얘기를 좀 풀어보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얘기들이다.

 

일단 남명하면 대비되는 이가 바로 남명과는 갑장인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학창시절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인물은 물론 남명보다는 퇴계이다. 벼슬을 할 만큼 했고 도산서원까지도 세웠으며 온건하기도 한 인물이기도 했으며 더욱이 우리가 쓰고 있는 1,000원 권 지폐의 인물이기도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제도권 안의 재조在朝세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지리산으로 오면 모든 게 달라진다. 퇴계 뿐만 아니라 율곡이 온다고 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지리하면 남명이다. 남명은 처사적 생활로 현실을 비판하며 수기修己의 방법으로 '경의敬義'를 중시하여 '실천'을 강조하였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서 비판자적인 위치에서 현실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퇴계는 평생 관직 생활을 통하여 수하의 많은 문인들을 정계에 포진시켜 놓았던 만큼 현실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현실생활을 강조하였다. 이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경상우도를 기반으로 한 남명의 이러한 사상은 '남명학파'로 불리게 됐으며이러한 자세는 임진왜란 당시 손주 사위인 곽재우, 김면, 정인홍, 박경신 등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런 그의 개방적인 사고는 불교에 대해서도 그러하여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과도 교분을 가져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입장을 가졌다. 이는 자칫하면 성리학 일변도에서 획일화 될 수 있는 위험성을 탈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남명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남명의 제자 중 이순신과 관련한 인물이 정탁鄭琢(1526~1605)이다. 당시 권율의 장계로 이순신이 체포되었고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애서 임금을 기만했다고 하는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 죄와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은 직무유기 죄 등이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기로 작심하였었다.

 

당시 판중추부사로 있던 정탁은 이순신을 구명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다. 조정 내부에서 이순신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순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조정에는 없었다는 얘기다. 류성룡만이 이순신의 인물됨과 무죄를 믿고 있었으나 그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변론은 삼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탁의 상소만이 유일한 이순신의 구명을 위한 공론화 된 의견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정탁의 상소로 이순신은 단 한 차례 고문을 당한 다음 결국 같은 해 음력 41일 출옥을 해 '백의종군' 길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남명과 이순신이 연결이 되는군요.

이순신의 백의종군 길은 남원과 구례에 걸쳐 있으니 16구간 이후부터는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쯤 되면 그의 시 한 수를 들어봐도 크게 사치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이런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될 것이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좁게는 시천천과 덕천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중심에 놓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좁게 얘기한다면 시천천 즉 살천과 삼장천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니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적參考書的 풀이''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할 수는 있겠다.

 

밖으로 나갑니다.

14:14에 구간을 마치고 다음 구간을 더 진행해도 될 만큼 시간과 체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간인 덕산 ~ 위태 구간은 거리가 9.7km밖에 되지 않아 6시도 안 돼 마칠 수 있음에도 그럴 경우 위태에서 숙박을 하지 않는 한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접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어쨌든 덕천서원까지 들르려 하였으나 거기를 들른다 해도 다시 돌아나와야하기 때문에 여기서 끊습니다.

덕천서원을 예습할까요?

 

삼장천과 살천이 만나는 곳이 양당촌에서 합류하여 덕천이 된다고 했다. 덕산에 있는 산청조식유적지를 보고 원리교를 건너 덕천서원으로 들어선다. 우측의 덕천 골짜기 물은 두 산의 협곡 가운데로 빠져 나간다. 시내를 따라 5 ~ 6리를 가다보면 돌을 깎아 놓기도 하고 흙을 붙여놓기도 하면서 겨우 통행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를 덕천벼리德川遷라 한다. 도구 陶丘 이제신(1536 ~ 1582)이 바위면에 입덕문이라 새 글자를 새겨 놓았으니 덕산에 들어가는 이들은 모두 이 길을 통해야 한다 - 두류전지는 기록하고 있다. 덕산입구의 입덕문을 지나 수령이 400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덕천서원에 이른다. 덕천서원은 그의 사후 4년 뒤인 1576년 문인 정인홍, 최영경, 하응도 등이 세웠다. 덕천서원 앞에 세심정과 문인 오건과의 아름다운 일화가 전해지는 송객정, 면상촌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곳이다. 후세 문인들에게 있어 덕산은 남명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남명을 만나기 위해 덕산을 찾았고, 그곳에서 남명을 그리는 문학작품들을 읊었다. 특히 한말을 전후한 시기 지리산 권역 문인들은 지역의 선현인 남명을 정신적 지주를 삼아 난세를 극복하려는 동질감이 형성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수많은 문인이 덕산에 와서 남명이 생전에 찾았던 지리산에 여러 유적을 탐방하고 작품을 남겼다. 덕산은 남명 문학 및 지리산권 한문학의 진원眞源이었다.

 

그러니 이곳은 그가 만년에 거주하던 산천재와 더불어 남명 정신을 계승하고 후학들을 결집하는 대표적 공간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찾는 이도 없는 적막한 곳이 되었다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그마저도 1870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0년에야 다시 복원되었다. 건축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이곳을 찾는 후학들은 여전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임의식과 처세를 남명에게서 찾고자 했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1609년 내암 정인홍의 노력으로 사액서원이 됐다. 그리고 1614년에는 영의정 추증과 문정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는데 이는 순전한 내암 정인홍의 노력 결과이다.

 

여기서 잠깐 1611년 광해군에게 올린 정인홍의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자세히는 퇴계변척소‘)’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이 문묘에 배향될 때 스승인 남명이 배제되면서 오히려 노장사상에 물들어 학문의 깊이가 없다.’라고 폄훼당한데 분개한 상소문으로 성호사설에 실려 있다. 골자는 두 사람은 모두 유학하는 사람으로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 이들을 구하지 못한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였다.”면서 그들과 남명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이 소에 대해 퇴계의 문인들은 물론 서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받아 정인홍은 유생 명부에서 삭제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나 이런 일련의 사태는 광해군의 분노를 사 김상헌 등 서인들은 파면 당하기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2년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인홍은 거꾸로 서인들로부터 정치보복을 당했으며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에 의해 와해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덕산버스정류장에서 원지 나가는 버스를 타고는 원지에서 남부터미널행 버스를 타고 귀가합니다.

여유만 있으면 내일 하동까지 진행하면 두 번 정도로 마칠  있는데 개인 사정으로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군요.

다음 주 끝낼 수 있으려나?

13.9km를 3시간 21분에 걸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