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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15-A 구간(당재 ~ 신촌마을 ~ 원기마을 ~ 목아재)8.1km

 

 

이제 지리산 둘레길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3월 초에 비가 자주 와 그 시작이 좀 늦었지만 제 특유의 '몰아치기' 전략으로 7회 정도로 마무리 짓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 구간은 지리산 둘레길 제15구간에서 빠져나간 기선岐線인 목아재 ~ 당재 구간입니다.

거리가 8.1km에 불과하지만 코스가 주는 압박감은 상당합니다.

 

즉 지리산 둘레길의 기선岐線이 두 곳에 불과하지만 다른 한 곳인 '서당마을 ~ 하동읍' 구간과는 달리 이 구간은 교통이 영 불편하기만 합니다.

물론 이 구간(당치마을 ~ 당재)을 중복되는 구간으로 보고 걷는다면야 문제 없지만 왕복 구간을 되도록이면 피하는 지맥꾼들의 습성상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이 접속 구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도를 보니 우선 당재를 잇기 위해서는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목통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목아재는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의 하리마을 부근이 보입니다.

 

거리가 짧으니 만큼 산행을 마치고 세이암을 찾아보기 위하여 들머리를 목통교 부근으로 하고 그 다음 연곡사와 화엄사를 찾아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탐사를 병행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매천 황현의 매천사 답사는 서비스 정도일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여러 곳을 들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겠군요.

 

03:00

오늘은 위와 같은 여정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차를 가지고 나섭니다.

350km라.....

집에서 목통교까지의 거리인데 지리산 둘레길 보다도 더 멀군요.

중간에 한 번 쉬면서 잠깐 눈을 붙이고.....

구례터미널에 들러 구내에 있는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우선 구례 매천도서관에 있는 동상을 촬영하여야 하니 그곳에서 선생을 뵙습니다.

 

 

지난 번 놓친 사진입니다.

분명 실내체육관 부근에 있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복기를 하다보니 구례도서관에 있다고?

네비에 구례도서관을 치니 엉뚱하게 시내에 있는 구례공공도서관으로.....

 

 

구례군 매천도서관이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세 군데에서 매천과 만나게 됩니다.

그 처음이 운봉입니다.  운봉에서 그는 동학농민 항쟁을 직접 목도하게 되죠.

 

매천 황현(1855~1910)은 원래 광양 사람이었다. 1833년 별시 보거과에 일등으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한미한 시골 출신인 것을 알고 2등으로 낮추자 조정의 부패함을 절감하고는 나머지 시험을 포기, 귀향한다. 하지만 아버지ㅡ이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1888년 생원시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정부는 수구파 저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다시 귀향한다. 그러고는 식솔들은 데리고 백운산 서북쪽의 구례 만수동에 자리를 잡고는 시문 짓기와 역사 연구 및 경세학 공부에 힘쓴다. 다시 구례 광의면 월곡마을로 이사한 매천은 동학농민운동의 소용돌이가 잦아들자 '오하기문'을 지었고 그 뒤 '매천야록'을 저술한다. 1905년 11. 일제가 을사저약을 강제 체결하자 김택영이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구례에서 '호양학교'를 세우고는 신학문 교육에 참여하였으나 1910. 8. 한일합방이 되자 통분하고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1681~1763)은 "조선의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으로 남명 조식(1501~1572)을 꼽았습니다.  재야의 처사로 살면서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의 독행篤行에 일생을 바친 분으로 무사적 기상을 선비적 기품과 조화시킬 것을 강조하였었죠.

그러니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과 정우재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하여 국난을 타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역사가 증명을 합니다.

 

반면 유교적 지식인들이 이른바 '동비東匪의 난亂'으로 비하해 불렀던  동학농민운동을 매천은 어떤 시각으로 봤을까요?

매천 정도의 반수구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던 인물의 시각이 궁금해집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매천과 전봉준은 1855년생인 갑장입니다. 전봉준은 민초들을 이끌고 봉건왕조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매천은 신분제도를 부정하는 동학교도들을 단죄하고자 야사野史 성격의  '오하기문聞'까지 집필할 정도로 부정적이었습니다.

 

다만 뜻밖에도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의 특성이나 질서정연한 농민군을 보는 데서 일부 '긍정적'인 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령 "관군은 행군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일삼는 데 반해 적賊(동학농민군)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하였다."라거나, "(동학농민군)의 형벌에는 사형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비록 큰 죄를 지더라도 죽이지는 않고 주리를 틀어 겁을 주기만 한다. 도인(동학농민군)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라거나 "노비와 주인이 함께 입도한 경우에도 서로 '접장'이라고 부르며 법도를 따랐다. 예가 공손했다.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기술하였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사료에도 같은 취지로 기술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매천은 신분제적 질서를 부정하는 농민군의 봉기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나 농민군의 엄격한 규율, 질서 있는 행동 등은 실사구시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였다는 점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하에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존경하는 데서 심열성복心悅性服-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며 순종함-이 되었고..."라고 썼던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매천이 당시의 부정부패한 수구세력들을 비판하는 위치에 섰지만 스스로 유학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군들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을 연곡사까지 쫓아가 통분의 눈물을 흘리고는 그 다음날 자결까지 하는 애절함을 보였으나 정작 관군과 왜군의 연합군에 저항하는 동학교도들을 '동비東匪'라고 비난까지 하였던 매천을 순수한 유학자라고 봐야 할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남명의 제자들이었다면 어떤 자세로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봤을까 하는 점도 궁금해집니다.

매천은 연곡사에서 그리고 광의면을 지나다 한 번 또 만나게 됩니다.

어쨌든 일단 선생을 배알했으니 이제 터미널로 갑니다. 

터미널에서 성삼재 올라가는 버스가 03:40으로 10분 단축됐군요.

밤 기차 타고 와서 식당에서 밥먹고 올라가기 빠듯해졌네요.

성삼재에서의 마지막 버스가 17:30이 됐고....

7편에서 6편으로 한 회 줄어들었습니다.

밥 먹고 느긋하게 오늘 들머리로 갑니다.

 

 

가는 도중 석주관에 들러,

 

 

칠의사 묘소도 참배하고,

 

 

일두 정여창의 악양정도 들릅니다.

 

석주관 칠의사에 대해서는 지난 구간에서 자세히 살펴봤고.....

그리고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 선생이라.....

선생은 함양 사람으로 점필재 김종직(141 ~ 1492)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김굉필과 더불어 조선조 유학을 크게 일으킨 인물입니다. 하동 섬진강가에 악양정을 지어 강학을 하였는데 -성종의 부름으로 하는 수없이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땅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에 죽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무오사화 이후 쇠락해진 것을 1899년 향내 사림에 의해 덕은사 경내에 중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곳이 예전에는 절터였다는 것이죠.

일두가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악양에 이르러 지은 시 한 편을 볼까요?

악양이라는 시인데 유람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면에는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크고 넓은 세계로 향하는 학문적 구도의 세계를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풍포범범롱경유           부들 풀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데
秋 사월화개맥이추           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었네
간진두류천만첩           두류산의 수많은 골짜기 모두 돌아보고
고주우하대강류           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내려오네

일두의 지리산 관련 기사는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자세하게 나온다.

특히 속두류록의 마지막을 일두가 장식했으니 14박 15일간의 일정을 마친 일두는,

"솔松과 대竹 둘 다 좋지만 솔이 대만 못하고, 바람과 달 둘 다 청량하지만 바람은 중천에 그림자를 드린 달의 기이함만 못하며, 산과 물 둘 다 인자仁者, 지자知者가 좋아하는 바이지만 산은 공자께서 "물이여! 물이여!라고 탄식한 건만 못합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대와 함께 길을 떠나 악양성으로 나가서 큰 호수에 이는 물결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피날레치고는 너무 시적입니다. 

 

최근의 글을 볼까요?  동암집東菴集을 남긴 진주 사람 동암 이현욱(李鉉郁 1879-1948)은 나라가 망하자 향리에 은거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성현의 글을 익히면서, 쇠퇴해가는 도道를 바로잡는 것을 일생의 책무로 삼았습니다.

그의 글 '기記遊' 지리산 특히 이 악양정과 관련한 기사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악양 땅을 지나가면서 고소성 봉황대 소상포 동정호 군산 낙안봉 등 여러 곳의 뛰어난 경치를 두루 구경하였다. 또 십여 리를 가니 악양정이 있었고, 몇 층으로 포개진 빼어난 봉우리들이 나열해 있었다. 그 뒤에는 한 줄기 길을 따라 긴 강이 띠를 두른 듯하였고, 그 앞에는 마치 이상한 기운이 그 사이로 엉기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성유가 말하기를, “여기가 일두 정선생의 유허지이다.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에 부들 풀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데/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두류산 천만봉 두루 다 구경하고/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내려오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길과 이 언저리가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지도 #1

 

자, 그러고는 화개면으로 들어 쌍계사 옆으로 흐르는 화개천을 따라 범왕리로 올라갑니다.

범왕리는 칠불사와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곳이고.....

그러니까 화개면 전체가 고운 최치원과 함께 역사 유물 덩어리라고 보면 됩니다.

의신으로 가면 남부군 이현상이 있고 또 의신사와 신흥의 신흥사 터.

이들은 영신사와 함께 삼신봉이 그 이름을 갖게 한  이유가 됐고 그리고 세이암.

칠불암의 아자방과 영지.

그리고 쌍계사, 불일암, 불일폭포......

08:40

범왕천 위에 놓여 있는 목통교입니다.

梵王이야 인도라는 나라 더 좁게 들어가면 마유타국을 이야기 하는 것이니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맞물려 있는 이름이고.....

그렇다면 목통은?

당재로 오르는 등로가 생기게 된 주원인이 바로  황장산 때문입니다.

黃獐山이라고 쓰죠?

누런 노루가 살던 산?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자에 목 항()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을 가진 누를 황()’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황장산은 백두대간 날라리봉에서 분기하는 산줄기에 있는 봉우리로 이 봉우리에는 그 유명한 불무장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구간 즉 날라리봉(삼도봉) ~ 흰듬등 ~ 불무장등 ~ 통꼭지봉 ~ 당재 까지는 비탐구간으로 되어 있고 이후 구간인 당재 ~ 황장산 ~ 촛대봉 ~ 탑리 구간만 탐방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바로 이 당재가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서 탐방가능한 구간이라 등로 사정이 양호한 것입니다.

이정목을 따라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정말 괜찮군요.

이른 아침 등로가 주는 선물인 거미줄과의 다툼 빼고는 다 양호합니다.

이정목도 있고.....

고로쇠 수액을 뺀 흔적.

정말 이래도 나무에게는 괜찮은 건가요?

곰 쓸개에 호수를 박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리.....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올려다 보이는 능선 위로 빛이 보입니다.

09:14

당재입니다.

황장산을 지나면 당재가 나온다. 당재라 하면 서낭당이나 당집을 연상하여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는 곳을 연상하기 쉽다. 우리 옛말에는 을 뜻하는 고대어 중에 혹은 이 있다. 은 유사하게 , , 등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산에 있는 고개를 보고 옛사람들은 단순히 산을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넘이라 하였을 것이다.

 

+넘이 > 닥너미 >당너미 >당재로 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당재라는 지명이 지리산에도 2개가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 상당히 많은 지명이다. 그런데 구례군지에는 당산나무가 큰 재 밑에 있어 당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참 성의 없는 기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당재가 목아재에서 올라오는 둘레길 기선岐線이니 이 길을 따라 농평마을과 당치마을로 내려가 연곡사를 들를 수 있다.

 

황장산 가는 길.

걍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기 되는 이 길을 따라 진행하면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지리산 둘레길 제15-A구간이 마무리 되는 곳임에도 아무런 표지판이나 안내판이 보이질 않습니다.

10여 분 머물다가 농평마을로 내려갑니다.

09:28

6분 정도 내려오니 둘레길 이정목이 나오는군요.

0.8km 진행했다는...

그런데 아까는 왜 안 보였던 걸까요?

샅샅이 찾아봤었는데.....

왕시루봉은 미세먼지에 가렸고....

지도에는 운해사로 나와 있는데 여기는 상운사로 표기되어 있군요.

개쉬키들이 몹시 짖어대는군요.

민박지들이 즐비한 당치마을을 지나,

도장동 삼거리를 빠져 나옵니다.

09:57

그러고는 지도 #1의 '가'의 곳 피아골 삼거리입니다.

우틀하면 연곡사를 지나 피아골로 올라가게 되는데.....

여기도 지금 한참이나 지리산 구석으로 들어온 곳인데 피아골까지는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하는데.....

지리산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좌틀하여 내려오면,

보건소까지 있고.....

10:01

민박집 겸 슈퍼에서 우틀하면 내서교를 건너 토지초교 연곡분교장 앞을 지나게 되고...

거기서 좌틀합니다. 

지도 #2

 

그러면 멀리 오늘의 종착역인 목아재가 보이는군요.

10:06

그러고는 남산마을 삼거리입니다.

여기서는 아랫길을 따릅니다.

하염없이 아스팔트 길을 따릅니다.

무료해 지는군요.

우측으로 동매산262m이라고 지도에 나오는 봉우리를 지나고.....

목아재 우측이 봉애산이겠고....

이런 산속에 북 카페......

뒤를 돌아 오늘 출발점인 당재를 보고.....

10:19

소소 팬션 쪽으로 우틀합니다.

so so?

그저 그런 집?

좌측으로 통꼭지봉908.8m 그 우측이 당재.

10:27

지도 #2의 '가'의 곳의 외딴 집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고는,

가족묘가 좌측으로 큰 나무가 보이는데 거기서 바로 우틀하여야 합니다.

그 묘지는 광산 김씨 가족묘인데 여기서 만연히 걷다가는 직진하기 십상입니다.

이제부터는 외길입니다.

10:35

오늘 구간의 마지막 마을인 원기마을로 들어서서는 좌측 뒤로 목아재를 봅니다.

건너편으로 촛대봉727.9m이 우뚝 서 있고.....

원기마을을 빠져나와서는 그저 임도만 따릅니다.

임도가 거의 끝나고 목아재까지 카운트를 셀 즈음 목아재에서 어른 한 분이 내려오시는군요.

목아재 ~ 당재 구간을 끝으로 오늘 지리산 둘레길을 졸업하시는 분이시군요.

이 분도 이 구간이 교통이 안 좋아 제일 뒤로 미뤘는데 버스 기사가 잘못 내려줘 오늘은 고생 좀 하셨다고 하시는군요.

서로를 축하해주며 헤어집니다.

11:11

그러고는 목아재입니다.

여기서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300km가 되는 둘레길을 7구간으로 나눠 걸었으니 열심히 걸은 것 같습니다.

둘레길을 완전히 마무리하기 뒤해서는 연곡사나 화엄사 등 몇 곳을 더 들러야 하고 산줄기도 몇 군데를 더 둘러봐야 한 권의 책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별 감흥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너무 쉬워서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