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작년 말에는 출간되었어먄 했습니다.
원고를 넘겨주고 출판사에서 교열을 마치고 디자이너에게 넘어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디자이너 曰 사진 용량이 너무 작다는군요.
원고에 첨부된 사진 원본을 달라고 하는데 아뿔사 컴퓨터에 너무 많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어 부득불 이를 정리하다 이미 다 버려버렸군요.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사진뿐.....
다행히 능선에 있는 사진들이 아니라 대부분 둘레길에 있는 그것들이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는 수 없군요.
사진 작가라면 출사出寫라고 하지만 저의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하나요?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 아름다운 그곳을 또 한 번 즐기게 되는 것이니 사실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올초부터 일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배부른 말이기도 하지만 책이나 산과 관련된 일로 바쁠 땐 사실 돈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럴 땐 저같은 사람에게는 일을 의뢰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누구 소개받아서 오는 분들이라면 정중하게 다른 이들을 소개해주기라도 하는데 이 분은 워낙 큰 고객이라....
열흘 정도를 꼼짝 못하고 일을 해대느라 온몸이 굳어지는 병(?)까지 얻었으니....
그 바람에 토요일 스케쥴이 펑크나고 정형외과로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현오玄悟와 걷는 지리산' 책자 발간이 늦어지게 된 이유입니다.
1. 14.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몸도 추스렸으니 출발해야죠.
남원에 있는 렌터카 업체로 전화를 하여 차를 렌트하고 광명과 남원 간 KTX 열차를 예매합니다.
05:25 열차를 타고 07:07 남원에 도착합니다.
날이 어두워서 그런가 아직 렌터카 사장님은 보이시지 않고 곧 도착은 하신다고 하는군요.
07:20
'남원 가가렌터카' 사장님을 만나 그 회사로 이동하여 차를 인도받고 시동을 겁니다.
우선 첫 방문지는 지리산 둘레길 첫 구간이 시작되는 남원시 주천면 원천천이 지나는 곳입니다.
08:18
이번 사진이 이건데..
원래 사진이 더 나은 거 같습니다.
원천천 사진인데 사진을 게재한 취지는 다음 내용때문입니다.
이정목의 빨간색 화살표의 방향을 따라 개울 돌계단을 건너 삼거리에서 직진을 하면 지리산 둘레길 홍보관이 나온다. 계속 직진하는 마을길을 따르면 원천천이 둘레길을 가로 막는다.
원천천은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들에게는 그저 건너면 그뿐인 물줄기이지만 산줄기 산행을 하는 산꾼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백두대간 상에 있는 만복대1433.4m 부근에서 서시지맥(신산경표에서는 견두지맥)이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이기 때문이다. 이 물줄기는 고기리를 지나 구룡폭포를 거쳐 이곳으로 오면서 몇 개의 작은 지천들을 흡수하게 된다. 그러고는 남원시내로 들어가다 요천을 만나고, 그 요천은 요천지맥이 끝나는 지점에서 섬진강에 흡수된다. 이 요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을 산꾼들은 ‘합수점合水點’이라고 부른다. 원천천은 잠시 후 구룡폭포 옆을 지나면서 자세히 얘기한다.
그런데 새로운 용어가 나왔다. 지맥枝脈이라는 개념이다. 둘레길 제11구간과 제3부에서 자세히 볼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아직 산행 경험이 부족하니 개념이 확실하게 와 닿지 않는다. 아직은 둘레길을 시작하는 시점이다. 이 용어는 계속 나올 것이니 반복해서 듣다보면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복잡한 것은 뒤로 미루고 우선 예습 하나! 지맥이란 30km이상의 산줄기를 얘기한다는 점만 일단 알아두자.
이 백두대간이나 낙남정맥, 서시지맥, 요천지맥 등의 대간大幹이나 정맥正脈, 지맥枝脈이라는 산줄기 개념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지리 교과서에서 배운 산맥山脈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산줄기와 물줄기 이야기를 많이 할 것이다. 그렇게 둘레길을 걷다보면 마지막 구간이 끝나 다시 이 주천면으로 들어올 즈음이면 어렴풋이 우리나라 산줄기에 대해서 눈이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걸 알려준다.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산줄기와 산맥의 차이점 중 하나는 산줄기는 물을 만나면 거기서 맥을 다하게 되는데 반해 산맥은 물줄기와는 상관없이 물을 건너기도 하고 물을 가르기도 한다. 산맥은 인간의 생활과는 무관한 지질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개념인 반면 산줄기는 해발고도, 물자의 이동, 교통 등 인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그것이다. 산의 연결성을 따지는데 산맥이 어떻게 산줄기를 따를 수 있으랴!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며 우리나라 모든 산의 근원이자 10대강의 수계이기도 한 백두대간! 한 마디로 우리나라의 자연의 상징이자 한민족 인문학의 기반이 되는 산줄기이다.
이거 한 장 찍고 60번 도로를 이용해 육모정을 지나 지리산북부관리사무소를 통과합니다.
이제부터 지리산 서부의 서시지맥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이게 운일!
곳곳에 결빙이 된 채 도로가 방치되어 있군요.
음지 특히 커브길에서는 혹시나 차가 밀리면서 돌게 되지나 않을까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오르니 호랑이휴게소가 있는 곳.
이 도로 가장 넢은 곳에 오른 것이죠.
이제부터 운봉고원이 시작된다는 얘기.
08:42
잠깐 긴장을 푸느라 고기3거리 대간 올라가는 길을 보니 못보던 시설물이 생겼습니다.
공단에서 차단기를 세웠습니다.
08:33
두 번째 사진.
눈에 익은 노치마을이죠?
이곳이 지리산 둘레길이 백두대간과 만나는 유일한 곳입니다.
갈대가 많아서 노치마을이라고?
이 노치마을 뒤편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전면에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 다섯 그루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 가꾼 곳이다. 그 나무 바로 밑에 당산제단이 있다.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는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로 지역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사진 8〉 노치마을의 마을 쉼터
한편 마을에서는 자신의 동네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노치마을은 수정봉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갈재’라는 이름이 산에 갈대가 많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에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갈대라고 한다면 바다나 강가의 물이 있는 곳에 자라는 식물 아닌가? 그런데 산꼭대기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를 써서 蘆峙마을이라니!
이는 국어학적으로 보아 이 마을의 생김새를 보고 가져온 이름이 변하여 현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즉 예로부터 이 마을은 주촌면과 운봉읍의 경계였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백제와 신라의 국경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갈라지다', ‘갈리다’라는 의미를 갖는 마을이었다.
갈라산이나 갈미봉 같은 이름의 '갈'도 칡이나 갈대와는 관계없이 '산꼭대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이라는 특유의 의미를 지닌 봉우리들이다. 이 '갈라지다'라는 말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훈차訓借하여 칡'葛'을 쓰다 보니 난데없이 칡이 많이 나는 봉우리가 되었고, 음차音借를 하다 보니 갈→갈대→갈대 노蘆를 써서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갈대가 많은 산’이 노령蘆嶺 혹은 노치蘆峙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점잖게 주촌면과 운봉읍을 가르는 마을 혹은 峙를 감안하여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던 고개가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령산맥의 노령蘆嶺의 옛 이름이 갈재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추령秋嶺이 가을 단풍이 예뻐서 추령이 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가르다→갈→가을→‘가을 秋’가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이 의미 있는 노치마을을 지나면서 주촌면을 떠나 이제부터는 운봉읍으로 들어선다. 좌측 노치마을 뒤로는 덕운봉(759.2m)부터 우측 끝 수정봉까지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정면으로는 멀리 바래봉이 눈에 들어온다.
배가 고프군요.
운봉시내에는 먹을 곳이라고는 일찍 문을 연 분식집.
라면 한 그릇 시켜 먹습니다.
그러고는 또 가야죠.
운봉초교에서 좌회전하여 서림공원으로 들어섭니다.
08:47
남쪽 방어대장군 뒤로 비석 여러 개가 줄지어 서있다. 운봉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군데로 모은 것이란다. 그 중 제일 좌측에 있는 우측 상단이 깨진 비석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일목장군 ‘박봉양 장군비’라고 표기된 이 비석에 새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跡碑라고 새겨져 있다. 갑오년에 도적을 때려잡은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라는 말일 게다.
<사진 2〉 서림공원의 비석들. 제일 좌측이 ‘박봉양의 갑오토비사적비.
박봉양과 갑오토적사적비
1894년 11월 박봉양은 지방의 유생, 향리들을 주축으로 민보군을 편성하여 수성군과 함께 남원에서 경상도로 진출하려던 김개남, 최승우, 남응삼의 농민군에 대항할 준비를 한다. 당시 농민군은 요천이 뒤로 흐르는 남원 산동의 부동촌에 배수의 진을 친 다음 관암재에 진을 친 박봉양의 운봉 민보군과 맞서게 된다. 그러던 11. 14. 농민군이 백두대간 상의 방아치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되었고 이 사적비는 민보군이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비석이다.
이왕 갑오농민항쟁 얘기가 나왔으니 지리산과 관련해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이 지리산은 근대에 들어 집권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의 피난처가 된다. 부패한 관리들에 대항하는 농민항쟁은 지리산 남동쪽의 소읍 단성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불씨는 환곡還穀 문제였다. 즉 단성현감 임병묵과 이서吏胥들의 폭정을 중앙정부와 대구 감영에서조차 모른 척하자 결국 단성농민항쟁이 터졌고 이는 1862년 진주농민항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덕산농민항쟁을 거쳐 드디어 영호남이 합쳐져 동학농민전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1894년 1월 10일 전라북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시작된 전봉준의 동학농민전쟁은 농민군이 전라도를 장악하게 되자 일본군은 민씨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우게 된다. 1894년 10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패하자 그동안 주눅 들어 있던 유생과 부호 층들은 민보군을 결성하여 농민군을 학살하는데 참여한다. 이때 농민군이 들었던 기치와 지리산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이화(1937~ )가 들려주는 얘기가 답이 되려나? 즉 “전라좌도와 경상우도를 품 안에 둔 지리산은 체제로부터 탄압받거나 배척당하던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주었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변혁 세력들의 근거지로써 그 역할을 다해 왔다.”고 하였다.
누가 이겼느냐에 상관없이 송기숙은 소설 '녹두장군'을 통하여 농민군 전봉준, 김개남 등이 주둔하고 있던 지리산 권역인 남원의 교룡산성이나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들여져 있는 백두대간 상의 여원재 등을 설화적 공간으로 상정하여 역성혁명을 이루려는 민중들의 정치적 지향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한다.
동학농민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매천
이에 반해 매천 황현(1855~1910) 같은 유학자들은 대부분 '강상綱常의 윤리倫理'를 부정하고 무력으로 관아를 점령하는 전봉준이나 김개남의 동학군을 붓으로 심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즉 당시 유교적 지식인들은 동학농민운동을 이른바 '동비東匪의 난亂'으로 비하해 불렀다.
매천 역시 신분제적 질서를 부정하는 농민군의 봉기인 이 동학농민운동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학운동의 소용돌이가 잦아들자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바탕으로 쓴 역사서를 통하여 이를 다시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이 기록이 바로 '오하기문梧下紀文'이다. 다른 이도 아닌 매천 같은 사람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시 유학이라는 게 양반 층 혹은 일부 계층의 의식 속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하겠다. 다만 동학운동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매천이지만 긍정적인 면도 함께 보았다. 즉 그는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농민군의 엄격한 규율, 질서 있는 행동 등을 실사구시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였다는 점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매천은 1905년 11.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구례에서 '호양학교'를 세우고는 신학문 교육에 참여하였으나 1910. 8. 한일합방이 되자 통분하면서 절명시 4수를 남기고는 치사량의 아편을 복용하고 자결한다. 지리산의 올곧은 정신을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09:14
사실은 람천을 지나면서 이성계의 황산도 한 장 찍었어야 했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도대체가 보이질 않으니....
아쉬움을 가지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고는 이성계의 황산대첩 기념비지를 들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비전마을도 거의 다 왔다. 좌측으로 어휘각이 보이고 그리고 연이어 황산대첩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도 보인다. 대첩교를 건너 먼저 어휘각을 본다. 이 어휘각은 태조 이성계가 1381년 황산대첩의 공이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닌 휘하 장수와 병사들의 공이라 하여 8원수 4종사의 명단을 바위에 새긴 후 그 위에 각을 세워 후손들에게 그 뜻을 기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뜻은 565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 탈 없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17일 새벽 저 잔인한 왜적은 이런 귀한 뜻이 새긴 바위의 글자를 정으로 쪼아 그 흔적을 없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 있던 황산대첩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각난 황산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는 각閣의 이름이 대첩비각大捷碑閣에서 파비각破碑閣이 되었고 이런 연유로 어휘각의 바위는 지금 그 흔적만 볼 수 있게 됐다.
1901년 겨울 이곳을 지나던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分次郞는 ‘조선기행록’에도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서 이곳을 이렇게 그렸다. 그런데 이 고토 분지로는 누구인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산줄기를 하는 산꾼들에게는 신경준이나 김정호 못지않은 유명한 인사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여기서 고토분지로를 등장 시킨 이유는 그가 기존 우리나라의 산줄기 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즉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는 우리나라 지리교육의 근간을 완전히 바꾸게 된 근거를 제공했다. 애초 우리 민족은 백두대간 이하 1정간 13정맥이라는 산줄기와 그 주위를 에워싼 한강, 대동강, 낙동강 등의 물줄기들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며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백두대간이니 낙동정맥이니 하는 산줄기를 우리 산맥 체계로 알고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런 우리 민족의 산줄기 인식 체계를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통하여 지질학적 개념 가령 태백산맥이니 낭림산맥이니 하는 산맥 체계로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산줄기의 중심 백두대간은 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대륙의 관문인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최고봉이자 문수 신앙의 성지 지리산까지 간단없이 이어지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이다. 고토 분지로는 그 백두대간이라는 나라의 큰 산줄기를 다섯 조각으로 토막을 냈다. 그러면서 그것도 모자라 그 토막에서 백두산은 완전히 빼버렸다. 그러고는 그 토막에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 인식 개념인 산줄기를 한자화한 ’산맥山脈‘ 개념을 도용하여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어휘각과 파비각이 있는 황산대첩 사적지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이 부근이 비전마을碑殿村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사실 지리산을 유람하던 옛 선비들에게 이 비전마을은 하나의 성지순례지 같은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펼치던 청계도인 양대박(1543~1592)은 1586. 9. 3. 이곳을 지나면서 비전마을의 유래를 설명한다.
느지막이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황산의 비전에서 잠시 쉬었다. 이 비석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칭송한 비다. 전殿은 비碑를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비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보다 25년 정도 지난 1611. 3. 29.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은 지리산 산행을 하고는 유두류산록을 남겼는데 그의 글에는 비전을 세우게 된 경위가 들어 있다.
요천을 거슬러 올라 반암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1578년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이 전액篆額을 썼다.
대첩비지 바로 옆에는 동편제로 유명한 가왕 송흥록과 박초월이 생가가 있습니다.
그러니 위와 같이 비전마을은 비전碑殿이 있어서 비전마을이지 비전碑前이어서 비전마을이 아니다. 비전을 지나 마을로 들어설라치면 판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과 송만갑의 출생지가 바로 이곳 비전마을의 첫 번째 집인 것이다. 송흥록의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고 열린 문으로 들어서면 깨끗하게 정돈된 몇 채의 초가가 판소리에 문외한인 이들을 친숙하게 맞아준다. 근처 황산 기슭에 ‘국악의 성지’가 있으니 이 일대가 다 동편제의 메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사진 5〉 송흥록 생가.
운봉은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을이며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명창 박초월의 고향이기도 하다. 박초월이 살았던 집 역시 위 송흥록의 집과 함께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이밖에 운봉은 남원이나 구례 등과 접해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명창들은 서로 오가면서 공부도 하고 친하게 지냈을 것이다. 이렇듯 운봉은 국악인들의 고향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속의 고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남원과 지리산 일대가 판소리의 본고장이 되었을까?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있지 않았을까? 뒤에 15-A 구간에서 칠불사를 들를 때 거문고 얘기와 함께 다시 들어볼 것이다.
구도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09:37
군화동을 지나 구도로를 따라 걸으면 화수교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두 기의 탑이 보인다. 좌측 비에는 원명당 종범대선사부도탑이라고 적혀 있고 우측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이라고 적혀 있는데 우측 비에는 자잘한 글씨로 복잡하게 뭔가가 적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칠불'부터 계승되어온 법통을 써 놓은 것이다.
<사진 6〉 종범대선사부도탑비와 법계도비
쉽게 얘기하면 불가의 족보인 것 같다. 기독교로 얘기하면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인가? 제1불인 비바시불부터 7조인 석가모니불까지 적혀 있고 그 다음이 전법원류傳法源流 제1조 마하가섭을 시작으로 아난존자, 제27조 반야다라까지가 서천조사 즉 인도사람이고 제28조가 보리 달마를 시작으로 제33조 혜능을 거쳐 제56조 청공까지는 중화조사로 중국사람 그리고 우리나라는 제57조 태고 보우를 시작으로 제61조 지엄, 제63조 휴정, 그러고는 제78조가 바로 이 원명 종범 스님으로 적혀있다. 그런데 파派에 따라 제78조를 향곡 혜림, 제79조는 진제 법원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불조정맥佛祖正脈를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법계도法系圖가 된다.
이런 걸 여기 왜 세워놓았나 하는 의심이 생기더군요.
여기 종범선사는 야구선수 이종범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월로 들어와 구인월로 들어서서는,
09:35
지리태극종주의 들머리이자 날머리인 구인월마을회관을 보고...
구인월 마을회관은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이다
지리서부능선을 진행한다는 것은 곧 지리태극종주 루트 중 북서쪽 구간을 진행한다는 것과 같다. 지리태극종주⊃지리서부능선이기 때문이다. 그 종주 코스의 들머리이자 날머리가 바로 이 구인월 마을회관이다. 그런데 지리태극종주 코스는 보통 사리마을회관을 들머리로 하여 날머리로 이곳을 잡는다. 그럴 경우 90km가 넘는 길을 40시간 넘게 잠도 자지 않고 걸어 수면 부족과 체력 소진으로 탈진상태에 있을 태극산꾼들의 종착역인 이곳은 참으로 신비한 장소로 여겨진다. 분명 그 '힘듦과 피곤함'이 절정에 달했음에도 이곳에 도착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람과 희열'로 승화가 된다. 이 이상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이 ‘구인월 마을회관’을 필자는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이라고 부른다.
인월에서 구인월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월교를 건너야 한다. 월평리가 인월리로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이제는 월평마을이 월평리의 흔적만 말해줄 따름이다. 그 인월리의 구인월마을회관이 이 코스의 시작이다. 그러니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인 구인월마을회관을 지나면 재실齋室을 지나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는 덕두산을 가리키고 있고 덕두산과 구인월마을(월평마을)은 3.4km의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09:40
그러고는 흥부자연휴양리입니다.
사실 여기서 멀리 인천지맥의 팔량재를 찍고 싶었습니다.
기존 사진도 역시 용량이 작다고 하니...
<사진 7〉 흥부자연휴양림에서 본 팔량재.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 조경남이 활약하던 곳이다.
산모퉁이를 돌아드니 우측 아래로 흥부자연휴양림이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멀리 임천지맥의 흐름이 보인다. 우측 투구봉으로 오르는 능선 바로 좌측의 고개가 바로 팔량재(치)다. 그 고개를 넘으면 함양군 함양읍이니 저 팔량재가 곧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되는 셈이다. 저 팔량재가 왜 중요할까? 저 팔량재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곳이다. 곧 백제로서는 아막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성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최소한 3차에 걸친 대공방전이 있었다고 하니 저 팔량재는 백제는 신라를, 신라는 백제를 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팔량재가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왜구가 등장한다. 진포대첩에서 패배한 잔류군이 김천, 상주를 거쳐 팔량재를 넘었고,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로 들어온 왜구는 남원성을 치기 위하여 이 팔량재를 넘어야 했다. 연전연승을 거두던 왜구들에게 나라의 정규군들은 다 도망을 가게 되자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장정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의병에 가담하여 싸움터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때 주천면 은송리의 젊은 유생 조경남 장군은 백전백승의 명의병장이었다. 산청, 함양, 곡성, 구례, 순창 할 것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로 왜적들을 무찌르고 다녔다. 때마침 조장군은 전라도 출신 8명의 장사와 어울려 이 곳 고개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들은 힘을 합해 팔량재에 성을 쌓아 왜적과 대항하여 크게 이겼다. 이와 같이 8명의 어진 장사가 이 고개에서 왜적을 대파 하였다는 유래로 그 후 고개 이름을 ‘八良岾팔량재’라 일컫게 되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못지않은 위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특히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 활동이 다수 나오는데 위 곽재우가 남명 조식의 외손주 사위이고 내암 정인홍, 김성일과도 연결이 되니 다 경의敬義를 중시한 남명학파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사진이 작더라도 그대로 놔둬야겠습니다.
인월을 나오면서 중군동을 지나 마천방향으로 향합니다.
그러다가 산내에서 장항동으로 들어서서....
09:55
<사진 3〉 장항동 당산나무.
정면에 보이는 큰 건물이 일성콘도이니 그 뒤가 꾀꼬리봉391.1m이고 둘레길은 바로 그 좌측으로 진행할 것이다. 장항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당산나무를 만난다. 당산나무 앞에는 ‘노루목 당산 소나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노루목과 장항. 같은 말이다. 노루목을 한자로 쓰면 獐項이니 말이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는 황장산의 황장이나 함양 유림면 장항리와도 같은 말이다.
장항마을 입구의 시멘트 도로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안내판은 둘레길과 신선길을 안내한다. 여기서 출발한 신선길은 ①팔랑마을~뱀사골~달궁마을을 잇는 길로 갈 수도 있고 ②바래봉으로 갈 수도 있는 길이다. 그러니 이 길을 따라 우측으로 올라가면 산내교를 건너 861번 도로와 만나게 되고 그 길은 곧 반선~달궁~성삼재로 이어지게 된다.
10:08
60번 도로를 따르다 백일리에서 우틀하여 실상사로 들어섭니다.
해탈교 다리를 건너자마자 정면으로 이 비석이 보입니다.
우측 상단을 보면 허연게 뭔가 훼손된 흔적입니다.
불교와 토속신앙의 결합
위에서 언급했듯이 지리산은 승도僧都다.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문수신앙의 발원지로 지리산 특히 반야봉을 꼽는다. 이렇게 불교가 전래되자 기존 지리산의 성모신앙과 산신신앙도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우리 고유의 지리산의 토착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가는 것이다.
즉 지리산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산신이 부처나 보살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무불巫佛 대립을 겪게 된다. 아니 대립이라기보다는 서로 조화롭게 융화하는 모습을 지리산은 보여준다.
<사진 5〉 실상사 앞에 있는 석장승. 토착신앙과 불교의 융합을 설명해 준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거의 방사형으로 흘러진 이 골짜기의 구석구석은 무속인이 지키고 있었다. 즉 원래 지리산은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근거지였다. 그러다 풍수지리를 장착한 승려들이 들어오면서 산자수려山紫秀麗한 명당을 가려 역사상 수많은 명승名僧들이 배출된 거찰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리산이 승도僧都로 변화를 하게 되니 지리산은 산까마귀도 염송念誦을 할 정도로 문수보살의 가피력이 충만한 곳이 되었다.
<사진 4〉 실상사.
우측으로는 지리북부능선의 삼정산 줄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우측 아래 입석리 들판 한가운데 신라천년의 고찰 실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신라 5교9산의 선문 중 가장 먼저 실상산문으로 개창한 선종의 대표적 사찰이다. 잠깐 예전에 공부했던 국사 교과서를 더듬어 우리나라 불교에 대해서 살펴볼까? 지리산은 불교를 떠나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전래
기원 전 2년 경 전한 시대에 중국으로 전래된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고구려가 처음이다. 물론 이전 고조선 시대의 우리나라는 춘추시대부터 중국과 교류를 하였기 때문에 고조선 사람들도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림왕 2년(372년)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내온 것을 시작으로 2년 후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난사伊佛蘭寺를 지은 게 한국 사찰의 시작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 이전에 민간에서 불교를 믿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이는 공식적인 나라간의 외교를 통하여 들어온 절차였다.
한편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이 뒤늦은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에서 들여왔다. 이때 왕이 직접 나가 마라난타를 맞았으며 궁중에 초청해 환대했다. 이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도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신라의 경우는 대륙과의 소통이 없었음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뒤떨어진 상태에 있어 백제보다도 수십 년 늦게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①고유 신앙과 ②귀족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신라에게 있어서만은 국가 차원이 아니라 민간으로 먼저 불교가 들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전래된 날짜에 대해서는 설이 갈린다. 어쨌든 이는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이것은 곧 이미 민중 사이에 불교가 널리 알려져 있어 후에 불교가 공인된 다음에는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 그 전래는 이미 뿌리를 내린 토착종교와 완고하고 배타적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게 된다. 그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신라의 고대 불교는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즉 전국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신봉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고대국가에서는 왜 불교를 수용했는가? 아니 불교가 단기간에 삼국시대의 주류 종교로 부상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토착종교 문제를 극복했다. 즉 지리산 주변 국가인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 사회에는 소도蘇塗라는 토착종교가 있었다. 소도는 토템신앙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종교의례를 주도하던 천군이 곧 부족국가를 주도하던 제사장이자 지도자였다. 곧 소도는 불교의 사찰과 같았고 천군은 종교의례를 주관한다는 측면에서 사찰의 승려와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가 수용된다고 하니 천군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6개의 부가 결합한 연맹체 국가였었다. 이는 각 연맹체에 소도가 따로 있었을 것이고 이 소도의 대표자가 곧 연맹체의 대표자였다. 그러니 이 연맹체를 초월한 강력한 중앙권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누구나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왕이 바로 법흥왕이었으며 그 수단이 곧 이차돈의 순교였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연맹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경림에 흥륜사라는 사찰을 세웠으며 이는 신라 왕실이 신성한 석가족이며 신라는 부처님 나라 즉 불국토로 이상화되었다. 그 결과 불교가 공인된 지 채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경주는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즉 절들은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많은 도시였다.
둘째 지배계급에 영합했다. 이렇듯 불교는 집권세력에만 영합하는 종교였을까? 물론 불교에는 사종四種 즉 승려·무사·상공민·노예가 평등하다는 계급평등 사상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과응보설·윤회설과 같은 숙명사상 즉 현실 생활이 빈곤한 것은 전생의 죄악에 대한 업보라는 지배계급에 극히 유리한 설도 있었다. 그래서 귀족 계급들은 그들에게 절을 지어주고, 토지를 기부하고, 종까지도 주어 승려들의 생활을 보호해 주었으며 심지어 귀족 출신의 승려 가령 원측이나 원효, 의상 등에게는 높은 지위까지 주었으므로 그들은 귀족계급에게 불리한 설은 버리고 그들에게 유리한 사상만 전파하였다.
그러다 보니 승려 자신이 귀족화하게 되어 광대한 토지와 종들을 가지게 되었으니 백성들은 체념적이고 복종적인 민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현실고現實苦와 사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극락왕생을 설명하여 안심케 하며 그들의 세계관을 넓혀주기는 했다.
10:36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가 되는 곳에 석상용장군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때 귀화한 명나라 사람으로 석성의 자손이 대표적이며 왜군 즉 항왜降倭로는 김충선이 유명하다. 김충선은 조총과 화약제조법 등을 전수하기도 했다.
10:49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수행을 하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숙종 30년(170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환성대사가 중건하였다.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이기도 한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는데 국군이 야음을 타 불시에 기습, 불을 질러 당시 입원 중이던 인민군 환자가 많이 죽었다. 이때 다시 법당만 남기고 사찰이 소실되면서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 지금도 절터 주변을 일구면 인골이 간혹 발견된다고 한다.
<사진 4〉 벽송사 정경. 실상사에 비해 보물이 없다.
사실 벽송사는 실상사와 더불어 지리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러니 벽송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1520~1604) 휴정이다. 이 절집의 청허당은 강원講院으로서 휴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하였다. 위 벽송대사가 선종 60조이니 서산대사 휴정은 그의 법손격인 62조이다. 많은 선사를 배출한 절집이라는 얘기이다. 서산대사하면 빠뜨리기 어려운 게 바로 삼가귀감三家龜鑑이고 단속사며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삼가귀감三家龜鑑부터 볼까? 삼가三家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禪家, 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하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이들을 토대로 세 권의 귀감을 썼다. 하나가 선가귀감禪家龜鑑이고 둘이 도가귀감道家龜鑑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儒家龜鑑이다.
서산대사는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이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과 본성이 그대로 부처(선가), 성인(도가), 군자(유가)임을 깨닫게 하고자 저술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삼가귀감과 단속사 그리고 성여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사 성여신이 혈기왕성한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이 삼가귀감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삼가 중 유가儒家의 글이 맨 뒤에 편철되어 있는 것과 사찰에 형상이 괴이한 사천왕 등 불상을 조성한데 격분하여 불경을 간행하는데 쓰이는 목판은 물론 절까지 불 질렀다는 것이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벽송사가 잠깐 등장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왜놈들을 피해 벽송사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다. 벽송사에 은거하며 지리산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곳 지리에 밝은 최노인을 만나려는 목적이었다. 그때 추성리, 칠선 계곡 그리고 국골 등의 지명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 5〉 벽송사의 사원장승 두 기. 비보장승이다.
벽송사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미인송과 보물 제474호 삼층석탑을 보고 벽송사를 빠져나오려는데 좌측으로 누각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장승 두 기가 서 있다. 예전에는 사찰 밖에 서 있던 것을 청허당 바로 뒤로 옮기면서 각閣을 세웠다. 좌측 장승은 금호장군禁護將軍, 우측 장승은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명찰을 각 달고 있다. 이는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를 막는 이른바 토속신앙의 비보裨補역할을 수행하는 신장상神將像이다.
그러니 이는 ‘법우화상’의 설화와 실상사 입구의 상원주장군 등의 석장승과 함께 지리산의 토착적 고유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이 장승은 우리나라의 산신숭배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이 신앙은 잡신을 거쳐 수목신앙樹木信仰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단군의 신단수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마을 어귀의 ①솟대나 ②장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③서낭당으로 발전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솟대는 삼한 시대의 소도蘇塗의 다른 말로서 개인이 가정에서 임시로 세우는 신간神竿이나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세우는 것도 있겠지만 삼한시대에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비록 도망자라 할지라도 체포할 수 없다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는 취지의 기능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신의 역할도 하게 되었고 수살목水殺木도 되었다.
또한 수목신앙은 장승으로도 발전하게 되는데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하여 마을 입구(벽사辟邪장승), 사찰 입구(사원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곳(비보장승)에 많이 세웠다. 사실 보통 장승이라면 이정표나 마을의 수호신, 사찰의 경우에는 경계표지의 역할(노표장승)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장승들도 지리산으로 오면 그 역할이 달라진다. 즉 불교가 지리산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민속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인데 가령 실상사의 석장승 3기나 벽송사의 목장승 2기 등이 토속신앙과 불교를 이어주는 예이다.
한편 남창 손진태(1900 ~ ? )는 선왕당이나 적석단을 누석단 즉 서낭당으로 명명하면서 “(서낭당은) 고대의 산신사 또는 산신제단이며 또 길 가는 이의 부적이기도 했으며, 마을 간의 경계였으며 그 자체로 신神이기도 했다.”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지리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누석단 즉 서낭당의 신과 산신은 여신이고 성황신이나 칠성신은 남신으로 이해하면서 전자는 우리 고유의 신이며 후자는 중국 전래의 신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좀 주의할 게 있다. 이렇듯 지리산신은 여자이어서 이에 터 잡아 성모신앙이 발전하게 된 것인데 제석봉의 제석당 만큼은 남신인 천신을 섬겼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부계 사회의 산물로 지리산도 고조선 이전 부족사회의 성모를 섬기는 모계사회에서 천신을 섬기는 부계사회로의 변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니 천왕성모는 그 전환기의 민간신앙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진 2〉 임천 뒤로 석불을 조성 중인 채석장과 그 너머로 법화산이 보인다.
의탄교를 이용하여 람천을 건넌다. 그리고 마천면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이 물을 임천으로 불러야 한다. 이곳 주민들이 예전부터 부르던 이 물 이름이 바로 임천이다. 임천 부근의 지금 모습은 기록에 나오는 풍경과 사뭇 다르다. 예전과 달리 수차례의 홍수나 태풍 등의 여파로 넓어진 강폭으로 수량이 그리 많지 않게 느껴지는 임천을 건너면서 좌측으로 창원리 채석장에서 조성 중인 석불을 보게 된다. 물을 건너면서 저 임천의 어느 돌이 예전 그 ‘노디돌’이었는가를 유심히 살펴본다.
11:34
그러고는 함양군 휴천면으로 들어갑니다.
휴천면 하고도 문정리입니다.
둘레길이 우측으로 휘어지면서 송문교가 보인다. 엄천 가운데 바위섬 방향으로 작은 다리가 하나 더 놓여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소나무와 바위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와룡대臥龍臺이다. 물론 와룡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이다. 와룡대 거북바위 옆에 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화산12곡의 주인공 강용하(1840~1908) 등 8인이 계契를 조직했다는 내용이 담긴 유적비로 1985년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이 계는 일반적인 친목계와는 그 성질을 달리하는 계이다.
<사진 8〉 와룡대에 모인 계원들 이름이 새겨진 각자.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를 잃은 백성의 슬픔에 현인 즉 제갈량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이 대臺를 와룡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니 이는 자결이나 의병 활동은 하지 못하더라도 일제에 부역하지 않겠다는 계원들의 최소한의 다짐이자 저항이었을 것이라는 평이다.
如龍踞石臥川陽(여룡거석와천양) 용이 웅크린 듯한 바위가 냇가에 누웠는데
誰錫嘉名意自長(수석가명의자장) 누가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그 뜻이 오래 가게 했나.
無柰遺民多曠感(무내유민다광감) 나라 잃은 백성은 지난 감회를 가눌 수 없는데
豈令神物老空場(기령신물로공장) 어찌 신물만 늙어 빈 곳을 지키도록 두었나.
晦翁當日尊眞影(회옹당일존진영) 회옹은 지난날 진영을 그려 존숭했고
皇叔何年訪草堂(황숙하년방초당) 황숙이 초당을 찾았던 것은 그 언제였던가?
難禁英雄無限淚(난금영웅무한루)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을 그치지 못하게 하니
高風千載動遐方(고풍천재동하방) 높은 풍모는 천년 후 먼 곳까지 감동시키네.
그러나 강용하의 시에는 그런 다짐 외에 이곳을 가거지可居地로 여겼던 일두 정여창(1450~1504)과 사관이었던 탁영 김일손을 그리는 시도 운치가 있고 글도 멋있다.
"산이 북쪽에서 뻗어 내리다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괸 곳이 있었다. 그 아래 겨우 10여 호쯤 되는 민가가 있었다. 탄촌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정백욱이 "이 마을은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문필봉 앞이 더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앞으로 5 ~ 6리 정도 더 가면 오래된 절이 있는데 엄천사라 하였다.
12:04
산청·함양 학살사건-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
우측으로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 1.2km’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야겠다. 제주 4·3 사건이 국가에 의한 과도한 진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던 것처럼 이 산청·함양 사건 역시 이에 못지않은 민간인에 대한 극악무도한 국군의 학살 현장이다. 이 사건은 거창양민사건과 더불어 한국 전쟁 기간 중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들 중 하나이다.
때는 중공군 개입 뒤 1·4후퇴 시기인 1951년 2월 7일이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었던 이날 지리산 동쪽 큰 산들 사이, 해 뜨고 지는 것으로 시간을 아는 두메산골인 가현·병곡·점촌(산청군 금서면)과 서주리(함양군 휴천면) 등 네 마을 양민 705명(어린이, 여성, 노인 85%)이 남원·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의 ‘보11사 작명5호 견벽청야堅壁淸野’ 명령을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에 의해 2월 7일 아침부터 11일 사이에 수행한 양민 학살 작전닷새 만에 느닷없이 떼죽음을 당하고 세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가 된다.
학살 작전을 벌인 이유가 최덕신 11사단장의 민간인에 대한 ‘견벽청야’ 전술, 4·3 사태 진압군이었던 9연대의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여기에 지휘관과 전쟁 자체의 부도덕성이 얽혔고 거기에 더하여 양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여야 할 만큼 전세가 다급하고 전과가 부실했던 탓도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이게 임천과 엄천의 역사다. 그런데 느닷없이 동강이라니? 桐이라면 오동나무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지역에 오동나무가 많이 나서 특별하게 이 구간만 동강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데 이 지역에는 오동나무가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더욱이 이렇게 작은 마을에 강江이라는 글자로 마을 이름을 만드는 경우도 없어 이도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또 중국에서 가져온 얘긴가? 화산 12곡 전문가 얘기를 들어보자.
동강桐江의 지명이 중국 고사에 비롯되었음은 마을 주변에 桐江과 유관한 엄뢰嚴瀨가 있기 때문이란다. 1170년 무렵 중국 남송시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강호를 떠돌면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대복고(戴復古:1167~ ?)의 낚시터釣臺 라는 시 한편을 살펴보자.
萬事無心一釣竿 만사무심일조간 세상일에 무심한데 오직 하나 낚싯대라
三公不換此江山 삼공불환차강산 삼공 벼슬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
平生誤識劉文叔 평생오식유문숙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까닭에
惹起虛名滿世間 약시허명만세간 헛된 명성만 세상 가득 드러냈네.
이 시는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BC37년 ~ AD43년)을 위한 헌사獻詞다. 그러니 엄광의 입장이 되어 쓴 시라는 얘기다. 엄광은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 6년 ~ AD 57년)와 친구였다. 광무제(자字가 문숙文叔)는 황제가 되자 믿을 만한 사람을 곁에 두고자 어린 시절의 친구 엄광을 불렀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됐음에도 오히려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광무제 유문숙이 사람을 보내 찾았으나 엄광은 양가죽 옷을 걸치고 냇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그렇게 촌부로 살다 죽었다.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 간 엄광의 모습은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혹은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엄광이 낚시질하던 곳이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였기 때문이다. 남송南宋의 시인 대복고가 ‘낚시터釣臺’를 쓴 이유도 그의 절개를 찬탄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이 시는 엄뢰嚴瀨와 관련된 고사임을 알 수 있는데, 아름답고 운둔하기 좋은 곳을 지칭하는 지명이기에 엄천변의 마을 이름으로 삼았을 것이다.
<사진 2〉 엄뢰대. 감수재 박여량의 글을 참조하자.
그러면 엄뢰는 어디 있는가? 감수재 박여량은 1610년 9월 2일부터 8일까지 7일간의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쑥밭재를 거쳐 지리동부능선을 타고 진행하다 방곡으로 하산을 해서는 마지막 날을 손곡(엄뢰 바로 옆 마을)에 있는 최함씨의 계당溪堂에서 보내고 다음과 같이 그 날을 기록했다.
좌수 최응회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 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그러니 엄뢰는 이 엄천이 동강마을을 지나 베리산373.6m의 적벽에 부딪히며 휘돌아 가는 곳이란다. 지금은 60번 도로가 지나가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그 위에서 바라보는 엄뢰대는 선인들이 벼슬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은둔해 살면서 세월을 낚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무위자연을 좇는 노장사상이 저변에 깔린 분위기이다.
점심 때가 지났습니다.
금서면 자혜리에서 산청읍으로 향하다 보니 화계리에서 다시 60번 도로를 만납니다.
가락국의 구형왕릉 유적지를 지나 왕산과 필봉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을 보다 보니 동의보감 마을이라는 산청군이 자랑하는 휴양지를 지납니다.
신청읍에 들어가서 예전에 들렀던 해장국집으로 들어가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13:08
산청 꽃봉산 한 장 찍고....
그런데 여기서 성심원으로 가는 길을 네비가 헤매면서 안내를 하는군요.
그리고 기억과는 달리 강변으로 길이 계속 이어지질 않았군요.
다시 산청으로 돌아와 3번 도로를 타고 성심원으로 진행합니다.
환아정이라는 정자
<사진 4〉 영남 3대 누각 중 하나였던 환아정. 인터넷에서 퍼왔다.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산청지에는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가(경호강)에 임해 굽어보고 있다. 현감 심린이 건립할 때 당시 저명한 선비였던 화산(花山) 권반權攀(1419∼1472)이 우군 왕희지의 고사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우암 송시열과 백헌 이경석의 기문이 있다.”고 적었다.
권반이 ‘백아환자白鵝換字’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1950년 3월 1일 01:00 원인 불상의 화재로 또 소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는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고는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 정유재란 뒤 복원한 환아정을 본 김회석(1856~1934)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그렸는데 이런 환아정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남주헌(1769~1821)은 함양군수 재직 중이던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산행 도중 산음에 들러서는 이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이렇게 그렸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필자 주 왕희지)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둘러보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山鏡水繞空臺 계산경수요공대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춘년상사회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왔네
그러면서,
籠鵝已去沙鷗至 농아이거사구지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난봉동객래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그런데 그 경호강과 어우러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회계산이 어디인가?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나와 있는 이 회계산이 현대 지도에는 위치가 불분명하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고 하고,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럴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산청군 하수 종말 처리장 옆에 있는 231.7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정도의 조망의 봉우리에 그 수려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까?
13:35
성심원을 들르고..
이 성심원은 한센인 요양시설로 1959년 개원하였으니 벌써 만 60년이 다 되어간다. 재단법인 프란체스코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로 지금은 한센생활시설인 ‘성심원’과 중증장애시설인 ‘성심인애원’이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뒤로는 웅석봉이,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설립된 성심원은 처음 개원 당시에는 40여 명으로 시작을 하였으나 지금은 600명이 넘는 큰 천주교 공동체 마을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유의배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본당 주임신부로 40년을 한결같이 이들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단성면 운리로 넘어가 광제암문 각자를 찾고 그러고는 하동으로 넘어가야겠죠?
그 길은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1001번 도로에 석대산으로 넘어가는 한재를 지나가고 웅석봉으로 오르는 어천마을 길도 보게 되니 말입니다.
14:01
어천마을입니다.
여기서 이 엄청난 표지석과 그 뒤의 웅석봉을 보게 되는군요.
백두대간의 들머리를 이 웅석봉으로!
아주 재미있습니다.
웅석봉으로 올라가는 또 다른 루트를 보게됩니다.
여기서 한재를 넘기 바로 전에 좌측으로 석대산 등상로라는 표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곧 진행하여야 할 곳입니다.
14:05
단속사지는 무조건 들러야 할 곳이죠.
단속사 소고
8세기경 신행이 창건하여 북종선을 받아들이고 고려 무신정권 최우의 아들 만종이 출가한 그곳은 과연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강회백의 정당매는 비록 그의 증손 강용휴가 다시 심은 것이긴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어떤 모습으로 버티고 있을까? 호기로운 성여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1001번 도로를 만나는 사거리 우측으로 마을이 보인다. 탑동마을이다. 한가운데 탑도 보인다. 바로 저곳이다. 단속사지 동탑이다. 탑이 있는 마을이어서 탑동마을이다. 우측 금계사에서 직진하여 탑동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금륜대라는 작은 절집을 지나면 바로 좌측으로 정당매각이 나온다.
<사진 3〉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각.
비각 안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측의 ‘통정대부 강선생 수식 정당매비’는 1847년에 후손인 강세주, 강택주가 세웠고, 우측의 비는 1915년 새로 지은 것으로 이 비를 세울 때 비각도 함께 세웠다. 비각 안에는 강회백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를 걸어놓았다. 이 비에서 얘기하는 매화나무는 비각 바로 맞은편에 있다. 비록 시멘트로 덧씌워져 있어 매화나무 본래의 모습은 아니겠으나 6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꽃을 피운다. 이 매화나무의 주인공 강회백의 손자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이 나무는 자신의 할아버지 강회백이 이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절의 뒤뜰에 심었던 매화 것이라 한다.
"우리 조부 통정공께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조부께서 정사를 바르게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기에 단속사 스님들도 조부의 덕을 생각하고 그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조부를 본 듯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정당매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렇듯 강회백의 손자 용휴가 심은 나무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2013년 이 정당매의 일부를 다른 나무에 접목하여 후계목으로 관리하고 있다. 사람도 자손으로 그 가계를 이어가듯 이 정당매도 이제는 손자를 본 모양새다. 그러니 굵은 모습의 시멘트 옆에 새롭게 올라오고 있는 나무가 바로 후계 정당목이다. 이 정당매는 하즙 선생의 원정매, 남명 선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삼매山淸三梅’라고 불린다.
우측 단속사지로 나간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년(748년)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의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서 단속사 승려의 말을 인용하여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이 단속사는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찰이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선종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 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 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이전의 단속사는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교종을 통하여 깊숙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런 단속사가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으로 인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의 활동은 김헌정金憲貞(신라 하대의 왕족으로 생몰년 미상)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학창시절에 배운 교종과 선종을 잠깐 보자.
교종은 경전에 의거한 교리해설을 위주로 한다. 그러기에 문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교종은 삼국 시대에 불교 경전이 유입되면서 수용되었다. 불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에 식자층識者層인 지배계급을 위주로 전파가 되었다. 원효의 법성종, 보덕의 열반종, 자장의 계율종, 의상의 화엄종, 진표의 법상종 등이 교종에 속한다.
반면 선종은 인도사람으로 중국으로 들어온 달마 대사의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安心觀壁)” 깨달음을 구한 후, 참선하라는 가르침을 중시하였다. 그 후 혜능이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不立文字),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으로 직접 터득하고(敎外別傳 直指人心),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見性成佛).”라 이야기하고, 마조도일이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라 하며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의 고양을 강조하면서 체계화된다.
이러한 선종을 익힌 도의 국사가 신라 헌덕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신라에 전해지나, 당시 왕즉불王卽佛 즉 ‘왕은 곧 부처’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을 때여서 왕권 불교인 교종의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을 펼 수가 없었다. 그 후, 선종은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이 대두하던 6두품 및 지방 호족 세력의 환영을 받는다. 선종이 복잡한 교리를 떠나 심성의 도야에 치중하는 단순한 수양 방법을 택하고 있어 호족과 평민들의 호감을 산데다가 선종 자체가 개혁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 건설을 꾀하는 6두품과 호족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잠깐 남효온(1454~1492), 김일손과 같이 걸어 보자. 1487년 9월의 남효온이나 1489년 4월의 김일손은 우리와 같이 산청에서 곧바로 웅석봉을 통하여 점촌을 지나 단속사로 온 게 아니라 당시는 단성현이어서 현내리란 이름으로 불렸을 단성면 소재지를 통하여 들어왔다. 웅석봉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제암문廣濟嵒門은 고운의 필체가 아니다!
<사진 4〉 광제암문 각자. 이 글은 최치원이 쓴 게 아니다.
그들이 출입하던 예전 단속사 입구는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단속사지에서 약 2.7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으니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라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단속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널리 세상을 구하라!’라는 취지의 이 글을 사찰에서는 주로 대문 입구에 새겨 놓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가짐을 다지게끔 해주었다. 그런데 고운 최치원이 새긴 걸로 알려진 이 글에 대해 논의가 있다. 사실 이 글이 고운의 필체라는 근거는 중종25년(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晉州편 불우조佛宇條에 있었다. 즉 ‘불우 단속사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는 글이 그것이다.
남효온은 “진주 여사등촌을 출발하여 단속사로 향하였다. 동구에 ‘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는데, 그 뒤 김일손은 “단성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최고운의 친필이라고 전한다.”라고 두류기행록에서 적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19년 발행된 조선금석총람의 단속사동동구석각斷俗寺東洞口石刻에 의하면 이 글은 고려 성종 14년(995)에 석혜? 스님이 쓰고 석효선 스님이 각자한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일본인 학자가 이 글을 탁본하는 과정에서 이끼를 걷어내다 바로 옆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統和十三年乙未四月日통화십삼년을미사월일 즉 성종 14, 995. 4월일, 書者釋惠? 刻者釋曉禪서자석혜? 각자석효선, 즉 글을 쓴 자는 승려 석혜?이고, 새긴 자는 승려 석효선’이라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쓸 때 자료를 수집해 온 사람의 성격이 좀 덜렁대는 스타일이었나?
그 정도였던 단속사가 김일손이 방문했을 때인 1489년 4월에는 절이 황폐화되기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 세금 등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쇠락의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사진 5〉 단속사지 석탑.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즉 지금은 보물 72호와 73호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 두 기만이 예전의 화려했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 있다던 화승畵僧 솔거의 유마상은 찾을 길이 없고 다만 고려시대 최고의 명필 탄연의 비는 숙명여대에 소장되어 있다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글에 나오는 광제암문이 문제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 단속사지에서 2.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
개천가 바로 옆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것 정도.
폰의 오룩스 GPS를 열고 정확하게 이동 거리를 측정합니다.
차 미터기보다 더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죠.
2.67km를 지날 때 언덕길을 넘게 되면서 좌측으로 있는정자가 뭔가를 암시해줍니다.
혹시 저 우측 개천가에 있는 바위 부근 어딘가에 새겨진 글이 아닐까?
도대체 저 바위 부근이라도 저기서 어떻게.....
일단 개천으로 내려가서 바위를 살펴보며 둘러보기로 합니다.
우측 시멘트도로는 민가로 들어가는 길이라 이내 끊기고....
신발끈을 제대로 묶고 좌측 바위를 보며 내려가는데 좌측 정자 뒤로 뭔가가 보입니다.
황급히 그 정자 뒤로 올라갑니다.
좌측 민가 주거 침입입니다.
아!
기적같습니다.
‘널리 세상을 구하라'
어쨌든 여기부터 아까 당간지주가 있고 석탑 두 기가 있는 그곳까지가 단속사지 경내였다니 정말 큰 절 맞는 거 같습니다.
이제 볼 거 봤으니 이제는 하동의 악양으로 가야겠습니다.
1시간 20분이 걸린다니....
그렇게 하동을 다는 도중 낙남정맥의 돌고지재를 지나면서,
반가운 후배 '코털싸나이'를 만납니다.
9정맥을 150일만에 끝냈나 어쨌나.....
지루하게 하동을 지나 대축마을로 들어서서....
15:36
문암송을 봅니다.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오면 우측으로 조그만 봉우리가 보인다. 이름하여 아미산峨眉山이다. 중국 사천성四川省 아미현縣의 남서쪽에 있으며 중국 불교의 성지인 아미산峨眉山3092m을 차용하였다. 원래 아미산은 오대산, 보타산, 구화산 등과 함께 중국 불교 4대 성지로 꼽히는 곳 중 하나인데 특히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영장靈場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이 대축마을의 뒷동산이 호사가들에 의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순전히 악양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 해주듯 문암정이라는 정자가 나오고 그 뒤로 천연기념물 제491호 문암송이 나온다. 높이 12m, 둘레 3m 크기의 이 문암송文岩松은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소나무의 씨앗이 바위틈에 떨어져 그것을 비집고 올라와 이런 규모로 컸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하게도 보였을 것도 같다. 주민들은 계契를 조직하여 보호할 정도로 문암송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고 한다.
동정호의 악양루에서 몇 장 건지고.....
악양에 들어서면 학창시절 그렇게도 외워댔던 두보(712~770)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가 들려온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57세 때 유랑 중 악양루에 올라서 느낀 그 감상을 읊은 5언율시인데 여기서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자.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옛날 동정호에 대해 말을 들었더니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누나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 오나라와 초나라는 동남쪽으로 갈라졌고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 하늘과 땅은 항상 호수 위에 떠 있구나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 친한 벗은 한 글자 편지도 없으니
老去有孤舟 노거유고주 늙어감에 외로운 배만 떠 있도다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 군마는 고향 관산의 북쪽에 있으니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 악양루의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노라
악양루에 올라 말로만 듣던 동정호를 바라보며 그 광대하고 장려한 모습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데 처해진 나라의 현실과 병들어 늙어 방랑하는 자신의 처지에 눈물을 흘리는 두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편 지금의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는 1937년경에는 이 부근에 있었다. 오랜 세월 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폐사 직전의 것을 1947년 지금의 악양교 옆으로 옮겼으나 이 역시 제대로 관리가 안 돼 2012년 동정호 안에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
그럼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고을이자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악양으로 들어가 볼까? 그 악양의 첫 번째 마을이 바로 대축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악양면 축지리의 대축마을이다. 대봉감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16:09
이제 구례의 운조루만 보면 되는데 당연히 가는 길에 석주관을 들러야죠.
직진하여 내려가면 이내 편백나무 숲을 지나게 되는데 주변에 바위들이 많다. 이 돌들도 석주관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주변에 돌이 많아야 석성을 쌓기 쉬웠을 테니까 말이다. 시끄러운 물소리를 내는 큰 개울 하나가 나온다. 이 골짜기가 석주곡이니 이 물이 석주곡수이겠다. 석주곡이나 석주곡수는 모두 석주관 때문에 생긴 말이다. 석주곡수길은 바윗돌로 자연스럽게 연결한 산중 징검다리가 정겨울 뿐만 아니라 언제나 풍부한 수량의 물이 흘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이순신 백의종군길’과도 만나는데 이는 이미 남원에서 본 바 있다.
역사의 현장 석주관
석주관이라. 고려시대에는 석주진이라 불렸던 석주관의 ‘관關’은 국경이나 국방상 요지의 통로에 두어서 외적을 경비하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화물 등을 조사하던 곳을 말한다. 곧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동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좌우로 산세가 기구하고 강변에 길이 있는데 사람과 말이 가까스로 지난다. 북쪽에는 커다란 협곡이 있고, 그 안에 수십 리의 큰 강이 있다. 고려 말기에 왜를 막기 위하여 강의 남북 쪽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 여기에서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석주관’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의할 때 지금의 도계가 아닌 이 석주관을 경계로 경상도와 전라도 등 양도兩道가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주관은 우리나라의 지형 그리고 지리산의 지형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얘기다.
<사진 2> 석주관 칠의사 유적지.
앞서 얘기한 바 있다. 영·호남을 잇는 3대 관문은 안음(함양)의 황석산성, 운봉의 팔량재 그리고 이 구례의 석주관이었다. 이들 관문은 동서 즉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황석산성은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쌓은 석성이고, 팔량재는 임진왜란 때 조경남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왜구를 지키던 곳이며, 고려 말에는 진포대첩 시 운봉을 넘어온 왜구의 잔당들이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에게 대패를 한 곳이다. 이 석주관은 왜군이 영남으로 들어와 호남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었다.
이런 지형적인 특성이 임진왜란 때 안타까운 사건을 유발하였고 이는 구한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왜구를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이 바로 석주관성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남의 부호 왕득인이 9월 22일 이곳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고 11월 8일에는 그의 아들 왕의성과 선비 5인이 의병을 이끌고 화엄사의 승병과 함께 전투를 벌이다 3,500여 명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이때 순절한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라고 하여 묘소와 추념비를 세웠다. 이 일대가 칠의사 및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옥쇄 전투를 펼친 피의 전장이다. 그래서 이 곡수를 피내 즉 혈천血川이라고도 부른다.
이렇듯 중요한 길이었으니 이곳들을 지킴으로서 호남의 곡창지대를 왜군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어 그들의 병참기지화 하려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끔 하였던 것이다. 또한 1597년 파직 당하여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군수군총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 등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로 구례군에서는 이 길을 특히 ‘조선 수군 재건로’라 이름하였다.
1597. 9. 22.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자모장 왕득인이 군사 50명을 데리고 숙성치를 넘어와 조경남 진에 이르러 비책을 논의한 다음 석주관으로 간다. 구례사람들의 따뜻한 대접을 받는다.”
16:22
운조루에 들러 연당과 함께 한 장 거집니다.
길 건너 계족산 부근은 미세먼지 때문에 촬영불가!
운조루의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진 5> 내죽마을의 인공수로.
되돌아 나와 내죽마을을 지난다. 대나무竹와 토지천川의 시내가 있는 곳이라 하여 내죽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측 수로를 따라 걸어 하죽마을을 지난다. 이 수로는 토지천의 풍부한 물을 오미리의 너른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인공수로이다. 노고단에서 성삼재로 갈 때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벌로 돌리기 위한 무넹기와 같은 원리이다. 너른 오미벌을 보고 걷다보면 우측으로 전통 한옥집이 보인다. 운조루다. 1776년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안동 출신 류이주가 지은 99칸 목조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이 운조루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곳이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시쳇말로 ‘가진 자의 의무’를 보여준 곳이라는 것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타인도 열게 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는 이 글귀는 이 운조루의 쌀독에 적힌 글이다. 류이주 선생은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다 이런 글귀를 써 놓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이 와서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가 먹을거리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이는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나눔의 삶 곧 베풂의 정신을 알려주는 예다.
운조루 대문 앞마당 건너편에 연당蓮塘이 있는데 원래는 약200평 규모였으나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강 건너 오봉산174.8m과 삼태봉207.6m이 화산火山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든 것이고 또한 풍수지리와도 관련이 있다고 하니 그 내용이 궁금해진다.
풍수지리라! 산세나 지세 그리고 수세 같은 자연을 판단하여 이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학문이 바로 풍수지리 아닌가? 우리의 전통 지리학이다. 이 풍수지리에서 땅을 해석하는 방법 중 금환락지형이라는 게 있다. 한자로 쓰면 ‘金環落地’일 것이니 곧 이 일대의 땅들이 여인들이 쓰는 가락지 그 중에서도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가락지는 여인네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정표로서 아기를 낳을 때나 성행위를 할 때만 빼놓는 것이니 곧 '출산',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그러니 결국 이 일대가 풍요와 부귀가 마를 날이 없다는 곳인 천혜의 길지吉地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당자리가 바로 이 운조루가 있는 곳인데 다만 맞은 편 섬진강 건너에 있는 오봉산과 삼태봉이 화산火山이어서 이 화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이 연당을 만들게 된 것이란다.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다.
운조루 앞 정자 옆에는 둘레길 이정목에 빨간색 화살표가 두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남쪽 원내마을 방향과 서쪽 배틀재 방향 두 군데다. 어디로 가야하나?
필자는 지리산 둘레길을 크게 본선本線과 지선支線으로 나누었다. 그러면서 본선本線이란 말 그대로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는 주 루트라는 것이고, 지선支線은 본선에서 가지를 친 노선으로 여기에는 ①접근의 편의성을 고려한 구간 가령 하동읍 ~ 서당마을 구간 혹은 ②본선으로 루트를 잡기에는 거의 산행 수준이어서 난이도가 좀 있는 곳 가령 제3구간의 선화사(구 황매암) 구간, 제4구간의 벽송사 구간 등으로 나눴다,
본선本線, 기선岐線 그리고 지선支線
그런 지선 중에는 가령 하동읍~서당마을, 목아재~당재 같이 독립된 구간인 경우도 있지만 제3구간의 삼신암 루트 혹은 제6구간의 선녀탕 루트 같이 선택적인 의미를 갖는 구간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지선 중에도 하동읍~서당마을, 목아재~당재 등과 같이 그 성격이 본선 같아 필히 진행하여야 할 곳을 특히 기선岐線으로 불러 준본선準本線으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하였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사) 숲길이 분류한 오미~구례~난동18.9km 구간이나 오미~방광의 14.7km 구간이 좀 애매하다. (사) 숲길에서는 이 두 구간을 분명히 본선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즉 이 제17구간의 들머리인 오미마을이 구례읍을 거쳐 난동마을로 진행하는 약 18.9km의 구간과, 황전마을 ~ 한수마을을 거쳐 방광마을로 진행하는 약 12km 구간의 공통된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어 오미마을을 날머리로 한다고 해도 난동마을이 같은 들머리가 되니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 두 루트 중 "어느 루트가 주 루트로 17구간이라는 구간 순위를 먼저 가져야 하는가?"라는 점도 난처하다.
이 길을 기획한 (사) 숲길이 둘레길을 소개할 때 오미~난동 구간을 먼저 올렸으며 이 구간 거리가 약 6.9km 더 길기도 하며 또한 그 구간에 상당한 규모의 '지리산 둘레길 구례안내센터'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 구간을 제17구간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오미~방광 구간은 제18구간으로 보아 이 구간만큼은 환종주로 이어가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그럴 경우 난동~방광의 2.7km 구간을 따로 본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그러니 산꾼인 필자는 이 두 구간만큼은 (사) 숲길의 구간 나눔을 무시하고 환종주로 이어가기로 한다. 아니 산꾼이 아니고 초보 둘레꾼이라 하더라도 1구간을 시작하여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는 다리 근육이 어느 정도 두꺼워졌을 법도 하다. 그렇다면 아침 일찍 일출과 동시에 구간을 시작하여 좀 길게 걸어보는 거다. 방법은 오미를 출발하여 구례 시내를 거친 다음 난동(18.9km)에 도착하여 다시 본선인 산동~난동~방광 구간 중 난동에 접속하여 역으로 난동~방광~오미14.7km 구간을 걷는 것이다. 그러면 비록 33.6km의 거리가 좀 길다 싶지만 그 다음 구간은 자연스럽게 난동~산동이 될 것이며 그 구간도 13.2km에서 10.5km로 2.7km가 줄어들었으며 이왕 자신감이 붙었다면 내친 김에 산동~주천 구간15.9km을 이어 난동~산동~주천의 26.4km도 한 번에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둘레길 제17구간을 이렇게 상정하는 이유는 그만큼 난이도가 ‘C'일 정도로 저급이라는 데 있다. 시종일관 평지를 걸으니 누구나 충분히 걸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계족산에서 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나 지리남서부의 줄기란 줄기, 산이란 산은 다 보면서 갈 정도로 눈요깃감도 충분하다. 거기에 더하여 구례시내를 감싸고도는 서시지맥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 이런 걸 클라이막스climax라고 했던가? 아니면 하이라이트highlight라 했던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지리 103. 운조루의 주소이다. 지난 구간 잠깐 언급했던 오미마을은 ‘운조루’로 대변된다.
백의종군길과 함께 걷다
<사진 2> 운조루 앞 이정목. 여기서 본선은 두 갈레로 갈린다.
원래 18:58 차를 예매했는데 그 앞의 차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남원에서 17:32 열차가 자리가 있군요.
취소하고 다시 예매를 합니다.
화엄사 IC를 지나 육모정 IC로 내려옵니다.
제 시간에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하여 마무리를 하고 그 사장님 차로 남원역으로 이동 광명역에 내려 마을버스로 집에 오니 19:30이군요.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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