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알찬 둘레길 트레킹이 되기 위하여,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고, 듣고, 걷기 위하여,
그래도 걷고나면 남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기기 위하여,
그리고 나 스스로도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남는 잔영殘影을 만들기 위하여.....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이면 지리산?
남한에서는 가장 덩치가 큰 산을 걷는다는 자부심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것보다는 이 지리산이 다른 곳과는 달리 유달리 우리 민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는 점도 한몫을 할 겁니다.
자세한 것은 https://1kthlg2.tistory.com/1222?category=533487를 를 참조하시고 여기서는 간략하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위주로 보고자 합니다.
차례를 봅니다.
1.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2. 둘레길 이정목里程木
3. 원천천과 하천쟁탈 그리고 백두대간
4. 난중잡록의 저자 의병장 山西 조경남
5. 구룡치와 달궁
6. 원백두대간이 지났던 구룡폭포
7. 지리서부능선
8. 백두대간이 지나는 노치마을
9. 람천 (주촌천 -람천 - 임천 - 남강 - 낙동강)
10. 운봉 雲峰
지리산은 우리 민족이 만든 산입니다.
그리고 둘레길은 거기에 기대어 살던 민초들의 생활이고 역사입니다.
곧 지리산이 갖고 있는 역사지리, 인문지리, 문화지리를 보면서 대원들 상호간의 대화를 통해 그것들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그게 곧 이 지리산 둘레길을 답사하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각설하고 1구간의 포인트를 짚어보겠습니다.
1.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우리가 수지구청을 출발하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소재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 앞에 도착하면 이 안내판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 대각선 방향에 자리한 지리산둘레길 지역센터 초소(Jirisan Trail Local Center).
그런데 그 초소 좌측으로 낯익은 분이 보입니다.
우리가 세종대왕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놈들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한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안내판입니다.
이 '지리산 둘레길' 중 상당 부분 즉 1구간과 16구간 ~ 20구간 등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와 겹쳐진다는 것입니다.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명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4월 1일에야 다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그에게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터에 임하라는 백의 종군'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제수 받기 전까지 백의종군하며 움직인 동선動線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고 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데 4월 24일부터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도원수 권율이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된다.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다.
즉 오수교차로 ~ 월평 주유소 ~ 사매교차로 ~ 오리정 휴게소 ~ 여원재 ~ 운봉초등학교 ~ 주천 외평마을(현 위치) ~ 밤재 ~ 구례로 이어지는 루트가 남원 구간 53.1km에 해당하게 되는군요.
그러니까 서울 의금부 ~경상남도 구간 161.5km, 전라남도 구간 123.2km을 포함하여 총 640.4km의 구간 중 남원 구간이 53.1km이고 남원 구간 중 운봉초교 ~ 외평마을 ~ 밤재 구간인 약 20km 구간은 둘레길과 겹치게 됩니다.
백두대간을 할 때 여원재에서 보았던 이 안내판이 여원재 ~ 운봉 초교 구간을 안내했던 기억이 슬며시 나시죠?
이 정도로 대강 알아보고 이제 구간을 진행하죠.
2. 둘레길 이정목里程木
주지하다시피 오늘 구간의 들머리는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입니다.
둘레길 최고의 도우미는 이정목里程木!
그리고 그 우측으로 이정목을 본다. 둘레꾼들은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와 이 이정목里程木(=이정표里程標, milestone)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이 이정목은 갈림길 즉 삼거리나 사거리에는 반드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둘레길의 첫 구간부터 마지막 구간까지 이 이정목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혹여 갈림길에서 이 이정목이 보이지 않는다면 필히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가 확실하게 이 이정목을 확인한 다음 자신의 진행방향을 확정지어야 한다.
그리고 이정목의 화살표는 검은색과 빨간색이 일관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둘레꾼이 진행하고 있는 방향을 얘기한다. 순順방향과 역逆방향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는 지리산 둘레길이 환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둘레꾼들의 진행상 편의를 고려해 고안해 낸 방법이다. 그러니 둘레꾼들은 한 방향으로 구간을 이어가든 자신의 능력 혹은 교통의 편의 등을 고려하여 역방향과 순방향을 적당히 섞어서 진행하든 아니면 순방향이나 역방향의 구간을 거리에 맞춰 적당히 끊거나 이어서 걷든 그건 순전히 둘레꾼 자신의 몫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2쪽
우리는 순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니 주천 ~ 운봉 구간 14.7km이 되겠군요.
역방향(검정 색)으로 걷는 이들은 주천 ~ 산동 15.9km가 된다는 것이죠.
3. 원천천과 하천쟁탈 그리고 백두대간
그러고는 원천천을 건넙니다.
산줄기 산행을 하는 꾼들에게 이 원천천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줄기입니다.
즉 백두대간 상에 있는 만복대1433.4m 부근에서 서시지맥(신산경표에서는 견두지맥)이 가지를 칠 때 전라남도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서시천인 반면 전라북도 방향으로 발원하는 물줄기가 바로 이 원천천입니다.
이 물줄기가 중요한 이유는 200만년 전 이전에는 이 물줄기가 사실은 요천에 흡수되어 섬진강으로 가는 물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촌천으로 합류하여 람천이 되어 임천이 된 다음 남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두부침식으로 인한 하천쟁탈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물줄기인 원천천이 되어 요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백두대간과 약 200만년 전의 백두대간과는 위치에 있어 차이가 난다는 설명이 곁들여집니다.
산줄기 즉 백두대간을 알아보기에 앞서 우리가 그동안 사회 교과서 혹은 지리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질학적 개념의 산맥에 관해 잠깐 알아보면,
태백산맥에 태백산은 없다?
“그러니까 태백산 부쇠봉에서 온전하게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얘기지?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잠시 백두대간을 몰랐었을 때 그때는 태백산맥이라고 불렀잖아. 그 태백산맥은 이 태백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아니겠어? 그런데 태백산맥은 여기서 어떻게 낙동정맥 방향으로 이어지는 거야? 분명 낙동강을 건너야 할 텐데.”
“중요한 지적이야. 사실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개념은 전혀 다른 거야. 백두대간은 분수계의 개념인 반면 태백산맥은 지질학적 개념이라 볼 수 있지. 땅속에 있던 지질구조선을 얘기하는 거니까. 그게 지리학에 편입이 된 건 순전히 지형의 형성 과정 파악에 필요했기 때문이었어. 즉 거의 평평했던 지구에 화산 활동을 동반한 단층이나 습곡작용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구조선이 발달하게 됐다는 것. 그러니까 지각변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단층, 습곡, 산맥 등을 구조선이라고 하잖아. 산맥 얘기할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어쨌든 그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을 지나면서 침식 ∙ 풍화작용을 거쳐 현재의 형상을 갖춘 게 분수계인 산줄기잖아. 그러니까 백두대간을 이렇게 정의하면 될 거야. ‘지각변동에 의하여 형성된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침식, 풍화작용을 통하여 현재의 산줄기가 만들어졌다. 그 산줄기는 분수계 역할을 하는데, 그 중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가장 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한다. 이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로 나라의 모든 산과 모든 물이 여기서 흘러나가니 백두산은 그들의 조종(祖宗)이라 불린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예전엔 학교에서 구조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줄기 개념도 아닌 엉성한 산맥 개념만 가르치고 배웠던 게 우리 기성세대에게는 큰 약점이었어. 당시 지리학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니까.”
“지리 교육이 잘못 됐다는 거 아니야?”
“고토 분지로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근대 지리교육이 지금껏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지리학계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거지. 지금은 사실 학자들이 여기서 벗어나려는 흔적이 많이 보여.”
“그럼 예전에는 태백산맥 종주를 어떻게 한 거야?”
“말은 태백산맥 종주였는데 산맥을 종주한 게 아니고 실제는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 일부를 이어서 걸은 것이지. 백번 양보하여 그 당시 개념으로 얘기하더라도 태백산맥을 걸은 게 아니고 태백산맥의 분수계만 걸었다는 것이지. 산맥 = 분수계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면 산맥은 사람이 걷거나 종주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
“그래도 명색이 태백산맥인데 태백산은 지나야 했을 거 아니야!”
“결론을 우선 보자면 그들이 걸었던 태백산맥에는 태백산이 없었어. 즉 태백산맥 안에는 태백산이 없었던 거야!”
그랬다. 태백산맥은 태백산을 품어야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당연히 구조선은 분수계와 달라 태백산맥이라 하면 산줄기의 분수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지괴(地塊)나 산괴(山塊)를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백산맥은 당연히 태백산을 품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28쪽 이하
백두대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관계된 곳에서 살펴봅니다.
4. 난중잡록의 저자 의병장 산서山書 조경남
17번 도로를 따르면 도로 우측으로 잠시 후 진행할 안솔치 마을을 봅니다.
내송마을內松(안솔치)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필자 주 ; 많은 전공 중 가장 중요한 공은 팔량재 전투에서의 승리인데 뒤에 또 보겠습니다.
여기서 조경남 장군(1570∼1641)이 중요한 이유는 지리산은 조경남 의병장 같은 의병 활동을 하던 분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그 정신은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을 강조한 ‘경의敬義’사상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오죽하면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의병이나 승병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지요.
지리산에서 팔량재하면 두 곳이 떠오릅니다.
지리서부(북)능선 상의 운봉읍 산덕리와 산내면 내령리의 경계에 있는 팔랑치와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인월의 경계에 있는 팔량재 등이 그것이죠.
후자가 군사적으로 요충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팔량재는 백두대간의 봉화산에서 발원한 임천지맥(신산경표에서는 연비지맥)이 지나는 곳으로 경상도에서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오는 왜군을 저지하면서 이를 격퇴하였던 곳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남원군 주천면 운송리(남원부 원천 내촌리) 출생의 의병장 조경남은 13세인 1582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임진, 정유란에 자신이 의병으로 유격활동을 한 내용과 당시 국내외 정세, 남원성 싸움 등을 그대로 기술하고 또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주요 전란과 그 밖의 역사적 주요 변화 내용, 당시의 풍속,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낱낱이 적었다. 그 문체가 수려하고 간결하여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순 한문체로 썼다. 전후에도 집필을 계속하여 병자호란 2년 후(1638년)까지 장장 57년간이나 써온 일기체 역사서로써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버금간다.
조경남은 둘레길 16구간 석주관에서 만나고, 20구간 밤재에서 또 만나게 됩니다.
이 조경남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나오는데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천안 부근의 소사(직산) 전투 이후 남원으로 집결 중이던 사명당 부대를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는 구절이 있다. 초원이란 중국 남부에서 온 원숭이라는 의미다.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경리(파견대장) 양호는 원숭이 300마리로 부대를 꾸렸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는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원숭이의 ‘猿’자도 모르는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그저 중국의 시나 글에 나오는 원숭이 얘기만 듣고 그들의 글에도 원숭이를 썼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양호는 마카오에 와있던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아프리카 모잠비크 출신의 노예들로 용병 한 팀을 꾸렸을 것이다. 흑인이라고는 보지도 못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 눈에는 아마도 글로만 읽던 원숭이로 비췄으리라.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도 '경리 양호 치제문'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 임진왜란은 단순하게 조선과 왜구 간의 전쟁 정도가 아니라 명나라까지 참여한 중일전쟁의 양상을 넘어 여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사까지 참여하였으니 한편으로는 명나라에서 후금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거대 세력의 이동을 보여주기도 하는 어찌 보면 국제 전쟁이었다.
- 졸저 전게서 393쪽.
당시 선조는 관군과 의병이 공을 세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명군의 공을 높이기 위해 이 전투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선조의 태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송마을을 빠져나오면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개미정지에 도착합니다.
개미정지에 얽힌 얘기를 하나 들어보면,
임진왜란 당시 조경남 장군이 솔정지에서 잠시 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개미가 발굼치를 깨물어 잠에서 깨어나보니 왜군이 내송마을 서어숲까지 밀고 올라와 있어 개미들 덕택에 큰 화를 면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설화이기는 합니다.
어쨌든 예전에는 남원부와 운봉현을 이어주는 큰길로 남원장에 왔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쉼터였다고 합니다.
울창한 서어나무숲이 하늘을 가리고 여러 개의 의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걸으면 이정표가 있는 솔정자라고도 부르는 솔정지를 만나게 됩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볼 수가 없군요.
솔정지
솔정지는 20여년 전만 해도 나무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고개를 오르기 전에 땀을 식히고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5. 구룡치와 달궁
좀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면 이내 586.2봉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이 부근을 구룡치라고 부르는 거 같습니다.
구룡치
구룡치는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 (음력 7월 15일) 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달궁이 어디입니까?
달궁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지리서부능선 중 정령치를 넘어와야 하는데....
달궁은 마한의 효왕이 진한의 추격을 피해 이곳에 궁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죠?
최근에는 남부군과 관련하여 이현상이 있던 남부군 사령부 기동부대가 있었던 곳이기 합니다.
고리봉을 내려오면서 덕동마을로 하산하는 이정목을 만나고는 이내 새롭게 단장한 동물이동통로와 휴게소가 있는 정령치이다. 휴게소의 화장실 뒤로 가면 언양골을 타고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의 달궁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 달궁은 861번 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달궁 가는 길
산내면 대정리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861번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달궁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이곳이 예전 마한의 왕이 쫓겨 와 만든 도성의 흔적이라는 취지의 글만 쓸쓸하게 적혀 있다.
이 달궁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줄기로 람천을 만나 임천 ~ 엄천이 되어 남강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의 불행한 근대사를 다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달궁에서 열리는 '10월 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대치 부대가 피아골을 떠나 달궁으로 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달궁에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물론 소설 속 하대치의 속내는 멀리서나마 그의 마음 속 영웅 이현상을 보기 위함이었겠지만 어쨌든 깊은 골짜기 안에서도 달궁은 남부군 사령부가 들어앉을만한 비교적 커다란 장소로 묘사된다.
그런 달궁이 2천 년 전으로 올라가면 처음 지리산이 열린 날이 된다. 즉 2천 년 전 인간이 처음 지리산 달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신비를 간직한 마한의 피란 도성 달궁의 역사는 그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궁전을 ‘달의 궁전’이라 불렀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의 깊고 좁은 골짜기에 2천 년 전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한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된 것이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과 진한에 쫓긴 마한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그것이다.
황령黃嶺과 정령鄭嶺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岾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년(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는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사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여 있어 지정학적으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 졸저 전게서 477쪽 이하
참고로 '달의 궁전'의 달은 달月을 얘기하기도 하나, 여기서 달은 達이고, 달은 곧 月이니 達=月=高=頭 즉 모두 '높다'라는 뜻의 우리 옛말입니다.
고로 달궁은 높은 곳에 있는 궁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이곳 지형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선요원을 앞세운 하대치의 부대는 바위투성이인 험한 피아골을 치올라 임걸령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담배 한 대씩을 말아 피운 그들은 곧장 심원계곡을 타고 내렸다. 내리막길 심원골은 피아골에 비하면 너무 심심할 정도로 험한 데라고는 없었다. 피아골이 남성적이라면 심원골은 여성적이었다. -중략- 심원골 용소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은 그들이 달궁골로 접어들어 돌고개를 지나 달궁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경이었다. - 태백산맥 10권 27쪽 피아골
6. 원백두대간이 지났던 구룡폭포
이정목을 지나 만나는 삼거리.
여기서 우틀하면 구룡폭포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구룡폭포로 행선지를 잡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그저 직진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길이 원백두대간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이상 산꾼들이라면 특히 백두대간 냄새라도 맡았던 분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이유가 없죠.
백두대간은 생물生物이다.
문제는 이 구룡폭포가 가지고 있는 지위의 문제이다. 구룡폭포로 내려가는 원천천은 물줄기가 좁고 상당히 빠르다. 관련하여 좀 어렵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관련된 문제이니 짚고 넘어가자.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신생대 제4기 정도 그러니까 200~300만 년 전에는 백두대간이 지금의 고남산 ~ 여원치 ~ 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백면과 주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다가 728.8봉에서 덕치리 방향으로 꺾여 지금의 구룡폭포를 넘어 906.2봉 ~1109.3봉을 지나 잠시 서시지맥 길을 따라 만복대로 가는 루트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생대 제4기 이후 우리나라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다음 이 부근에서 두부침식頭腐浸蝕으로 인해 하천쟁탈이 일어났다
살펴보면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다음 북류 및 동류하여 엄천강을 지나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 쪽으로 골짜기를 더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그 유역을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60 도로 중 백두대간이 지나는 ‘가’~‘나‘ 구간의 좌측은 하천쟁탈의 흔적으로 지금은 주천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舊 주촌천' 즉 무능하천은 물이 흘러 그 물은 북동진하여 람천에 합류되어 남강→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곧 낙동강의 최상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럴 경우 고리봉~고기3거리~노치마을~759.2봉의 라인은 백두대간이 아닌 것이 된다. 반면 만복대~1109.3봉~906.2봉~728.8봉~ 759.2봉(일명 덕운봉)라인이 원백두대간 라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의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라인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divide in v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재 운봉 고원의 남서쪽에 치우쳐 위치한 백두대간의 분수계가 수만 또는 수십만 년 후에는 고원의 중앙부로 이동될 가능성이 높다.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여! 고리봉에서 내려와 고기삼거리~노치마을의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 약2km 구간을 그냥 걸을 일이 아니다. 도로 왼편은 섬진강 최상류 지류인 원천천 유역으로, 원천천이 두부침식으로 분수계를 넘으면서 과거 낙동강 최상류 구간을 쟁탈한 곳이라는 사실과 도로 오른편은 여전히 낙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면서 원천천은 급경사의 사면을 따라 활발하게 두부침식을 하면서 분수계를 넘고 하천쟁탈을 하였기에,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동강 최상류 구간보다는 침식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 바닥의 고도는 왼편이 오른편에 비해 10m가량 더 낮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래야 백두대간이 더 재미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는 둘레꾼들도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53쪽 이하
60번 도로 우측 운봉읍 주촌리에 위치한 명상센터에서 바라본 곡중분수계
능선 좌측으로 보이는 원백두대간길과 노치마을에서 올라 759.2봉에서 현재의 백두대간길이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7. 지리서부능선
이내 나무 의자 뒤로 회덕마을이 보이는 쉼터에 도착합니다.
우측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 매점을 지나면서 뒤로 서시지맥에서 가지를 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봅니다.
멀리 중앙 좌측으로 만복대1433.4m가 보이고 그 만복대 좌측 높은 봉우리가 고리봉1305.4m입니다.
백두대간에 속하는 봉우리들이죠.
그러니 그 좌측 연봉들이 지리서부능선이고....
“서부능선은 또 뭐야?”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사람같이 집요하게 물어온다.
“영신봉과 삼각고지에서 일부 얘기했던 거야. 서북능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천왕봉 ~ 밤머리재의 동부능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면 돼. 근데 사실 이 서부능선은 방향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서북능선’이 맞는다고 우기기도 하지. 그런데 서북능선하면 설악산의 ‘대청봉 ~ 끝청 ~ 귀청 ~ 안산’ 구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리동부능선에 대(對)한 개념이니 일반적으로 서부능선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들 해. 그리고 보통 이 성삼재 ~ 천왕봉 구간을 주릉(主稜)이라고 하잖아. 이게 다 예전에 백두대간을 몰랐을 때 능선 산행을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러니까 산을 기준으로 본다면야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중심이고 기준 아니겠어? 하지만 접근성과 등로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성삼재와 천왕봉을 중심으로 봐야 하겠지.”
스틱으로 반야봉 방향과 고리봉 방향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얘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결국 천왕봉에서 중봉 ~ 하봉 ~ 왕등재 ~ 밤머리재 방향으로 가는 줄기를 동부능선. 천왕봉에서 이 성삼재까지를 주릉. 그리고 성삼재에서 고리봉 ~ 바래봉 ~ 인월 방면으로 가는 줄기를 서부능선. 그렇게 동서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남북능선도 하나씩 만들어야겠지. 그래서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가는 루트를 북부능선 그리고 영신봉에서 삼신봉을 거쳐 형(성)제봉으로 가는 줄기를 남부능선이라고 하는 거지. 예전에는 산깨나 다녔다는 꾼들이라면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지리에 들어와서 이들 루트를 헤집고 다녔어.”
발목 스패츠를 잊지 않고 착용하면서 묻는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많나?”
“글쎄. 예전보다야... 어쨌든 이우형 선생이 산경표를 찾은 해가 1980년이잖아. 그러고 나서도 그 산경표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게 대개 약 1988년경이라고 봐. 그러니까 1988년경 이전까지만 해도 이 지리산에서는 이들 루트가 능선 종주하는 꾼들의 로망이었다고 봐야지. 그러다가 이 루트들이 대간이니 지리태극종주, 덕천지맥이나 서시지맥, 횡천지맥 등 지맥 산행이 활성화되면서 요즘은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야. 더군다나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관리의 어려움 그리고 야생동물의 서식지 보존, 희귀 동식물 보존 차원에서 많은 구간을 비탐방구간으로 지정해서 놔서 다니기도 쉽지 않아졌고.”
“그런데 지리태극종주 루트를 보니까 서부능선 + 주릉 + 동부능선의 변형인 거 같던데?”
“응. 그렇게 봐도 무방하긴 하지. 태극종주는 다음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야.”
- 졸저 전게서 76쪽
개울을 건너자마자 이충무공 백의종군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아까 주천면 면소재지에서 보았던 백의종군로를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부터는 그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죠.
멀리 바래봉1186.2m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이군요.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고리봉, 우측 끝이 만복대.
그리고 앞 우측 제방이 고기저수지.
그러니 이 운봉고원은 동쪽으로는 지리 서부능선이 가로 막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을 보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등로가 살짝 보이고 그 너머로는 백두대간 마을로 유명한 노치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운봉 고원은 서쪽 분지벽과 남원의 요천 사이에 많은 단층선이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옛날부터 정령치에서 여원치를 거쳐 봉화산에 이르는 천혜의 국경 방어선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이 요새지 운봉과 남원을 경계로 백제와 신라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섬진강 수계인 남원분지와 낙동강 수계인 운봉고원 사이의 분지벽을 따라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산성 10여 개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경계선을 따라 산성 사이를 연결하던 2중 순라로가 잘 닦여 있다고 합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방아산성은 다음 구간에서 이야기 합니다.
역사적으로 운봉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 세 지역의 접경지역으로 고령가야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562년 6가야는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으니 이 운봉 지역 역시 신라 땅이었다는 얘기입니다.
8. 백두대간이 지나는 노치마을
마을 뒤편으로 오르면 소나무 다섯그루가 병풍처럼 서 있으며 바로 나무 밑에는 당산제전이 있습니다.
수령 500년의 소나무들로 마을 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란히 서있는데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리적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 드려서 가꾸었다고 합니다.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는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입니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노치마을에는 노거수와,
대간 조형물도 있습니다.
한편 마을에서는 자신의 동네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산 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노치마을은 수정봉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서 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그 런데 아무래도 이 ‘갈재’라는 이름이 산에 갈대가 많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 라는 것에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갈대라고 한다면 바다나 강가의 물이 있 는 곳에 자라는 식물 아닌가? 그런데 산꼭대기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를 써 서 蘆峙마을이라니!
이는 국어학적으로 보아 이 마을의 생김새를 보고 가져온 이름이 변하여 현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즉 예로부터 이 마을은 주촌면 과 운봉읍의 경계였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백제와 신라의 국경 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갈라지다’, ‘갈리다’라는 의미를 갖는 마을이었다.
갈라산이나 갈미봉 같은 이름의 ‘갈’도 칡이나 갈대와는 관계없이 ‘산꼭대 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이라는 특유의 의미를 지닌 봉우리들이다. 이 ‘갈라 지다’라는 말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훈차訓借하여 칡葛을 쓰다 보니 난데없이 칡이 많이 나는 봉우리가 되었고, 음차音借를 하다 보니 갈→갈대→갈대 노蘆 를 써서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갈대가 많은 산’이 노령蘆嶺 혹은 노치蘆峙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점잖게 주촌면과 운봉읍을 가르는 마을 혹은 峙를 감안하 여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던 고개가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령산맥의 노령蘆嶺의 옛 이름이 갈재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추령秋嶺이 가을 단풍이 예뻐서 추령이 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가르다→갈→가을→‘가을 秋’가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졸저 전게서 60쪽
백두대간이 지나는 이 노치마을을 지나면서 주촌면을 떠나 이제부터는 운봉읍으로 들어섭니다.
멀리 바래봉이 눈에 들어옵니다.
좌측 노치마을 뒤로는 덕운봉부터 우측 끝 수정봉까지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조금 더 진행하니 좌측으로 고남산846.8m이 보이고....
저 고남산을 보면 백두대간을 할 경우 지나쳐야 하는 바로 앞의 방아재(치)를 생각해야 하고 그 전의 연재 혹은 여원치를 떠올려야 합니다.
방아재는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과 연재와 고남산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태조 이성계는 조금 이따 만날 비전마을의 황산대첩비 그리고 황산과 연관지어야 하기도 합니다.
다음 구간에서 자세히 봅니다...
나지막하지만 어쨌든 산은 산입니다.
산으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해발 546.1봉이나 되는 곳이죠.
운봉읍을 봅니다.
중앙에 운봉의 진산 성산533.5m이 보이고 그 뒤로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1237.4m이 우뚝합니다.
서어나무숲
행정마을에 있는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은 곳으로, 수백 년된 서어나무들이 아름드리 줄지어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서어나무 숲을 보려면 다시 되돌아 나가 행정교를 건너 진행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다리가 새로 놓아져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군요.
9. 람천 (주촌천 -람천 - 임천 - 남강 - 낙동강)
람천입니다.
이 람천은 운봉벌을 적시다 인월에서 풍천을 만나 광천이 되어 산내에서 만수천을 만나 임천이 됩니다.
두류전지를 보면 "동천은 정령 아래에서 흘러나와 운봉읍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광천에 합류한다. 광천은 운봉의 적산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황산을 지나 풍천에 합류한다. 풍천은 비조치에서 흘러나와 운봉현을 지나 인월역에 이르러 광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산내동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람천의 옛 이름은 동천이었군요.
두류전지는 지리산의 물줄기를 세 개로 봅니다.
위 동천을 첫 번째 물로 보고, 두 번째 물줄기는 수분재에서 발원하는 섬진강 그리고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청천이 되었다가 남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를 세 번째 물줄기로 보는 게 그것들입니다.
이제 운봉읍도 지척입니다.
봄이면 벚꽃이 둘레꾼들을 유혹할 것 같습니다.
10. 운봉雲峰
운봉은 구름雲에 산봉우리峰을 씁니다.
두류전지에 의하면 "운봉은 원래 신라 모산현이었다. 운봉 고을은 두류산의 뒤편 허리등성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고도를 헤아려 보면 3분의 1 정도에 위치하여 항상 운기가 조망을 가린다. 그래서 운봉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고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면,
『삼국사기』지리지 고령군조에 기록되어 있는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鼓王)의 어원을 근거로 운봉이란 지명에 대해 그 유래를 추정하여 보았다.
이(伊)는 다스린다는 위(上) 즉 최고의 뜻이다. 진(珍)은 우리말 고어의 ‘들’또는‘지역’의 한자 표기이고, 아시(阿鼓)는 작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진아시(伊珍阿鼓)는 여러 작은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伊)의 수장(首長)으로 대가야 왕을 뜻하고, 진아시(珍阿鼓)는 이하 대수장 또는 상위 수장이 다스리는 가야의 작은 분국을 의미한다.
소국가를 뜻하는 진아시(珍阿鼓)는 진아지(珍阿只) → 진아기(珍阿己) → 진애기→지내기로 음전(音轉) 되었다.
이러한 고어는 아영면 월산리에 마을 지명으로 남아 있다. 구지(舊至), 신지(新至), 외지(外至) 마을이 그것이다. 구지는 구지내기, 신지는 신지내기, 외지는 바깥지내기로, 각각 옛날(舊) 지내기, 새(新) 지내기, 바깥(外) 지내기 마을이란 뜻이다.
가야 연맹체는 소국가들이 강한 혈맹 관계를 유지하던 형제국가 들이었다는 점과, 마을 부근에 위치한 두락리 고분은 규모나 출토 유물로 추측컨대 가야의 상위 수장급 고분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임을 상기할 때, 가야연맹체의 상위 수장급 소국이 존재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아영면 월산리에 존재했던 집단도 맹주국인 고령의 대가야에서 혈연적으로 분파한 소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운봉의 지명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문헌에 기록된 운봉의 고호(古號)는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아영성(阿英城)․아막성(阿莫城)․운성(雲城)․운막(雲莫)․운봉(雲峰)․경덕(景德) 등이다. 이 중에 무산․아영․운막․경덕 등은 오기이며, 운성은 조선 초기 태종의 사위인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작호이다.
또는 아시는 여신(女神) 또는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후에 여성 또는 모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다. 즉 진아시는 지역을 다스리는 어머니(여신)를 뜻한다.
고대에는 산신을 엄산이라고 했는데 엄은 암컷 자(雌), 즉 어머니의 뜻으로 아막의 지명 유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이진아시→ 높은 평원을 다스리는 여신 → 고원의 성모→ 산신→ 엄산 → 어미산 → 암악(雌岳) → 아막(阿莫)
운봉의 고호인 아막(암악)은 모산(母山)으로 차자(借字)되고, 운봉(고원)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진아시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운봉의 지명 변천 과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된다.
① 아막(阿莫) → 아막산성(阿莫山城)→(莫→오기→暮)→아모산성(阿暮山城)→(阿 탈락)→모산성(暮山城)→(훈차)→모산성(母山城)
② 아막(阿莫)→(莫→오기→英)→아영(阿英)
③ 아막(阿莫) → 모산(母山) → 운봉(雲峯)
직진하여 운봉초교 사거리로 갑니다.
좌틀하여 직진하면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봅니다.
그러고는 서림공원 100m 전에서 1구간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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