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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지리산 두류능선에서 왕산 ~ 필봉산 이어가기(추성리 ~ 용룡봉 ~국골사거리~왕등습지~고동재 ~왕산 ~ 필봉산)

 

"지리산에 두류산이 있기나 한 거요? 지리산의 옛 이름이 두류산이었다면 그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백두대간의 시작은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1915m이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은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 등이라고도 했다. 이들 중 두류산(頭流山)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해석해 보면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라는 뜻이다. 즉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이 지리산까지의 이음이라는 인식이 고스란히 이 두류산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들 이해했다. 사실 지리산을 이 산을 타다보면 지루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억지 얘기도 가끔은 등장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의 형태였던 것이다.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 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아마 제가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의 지리산 구간에서 얘기한 내용을 보고 하는 얘기 같습니다.

좀처럼 믿겨지지 않는다는 얘기겠죠.

저는 산 특히 산줄기에 관한 한 그것들과 관련된 지식이나 경험 얘기는 군대에서 얘기하는 소위 '짬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봅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나서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에서는 권위자라 할지라도 산에 오면 그런 것들은 다 필요없어 집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 재직 시절 지하철 본부를 방문하고서는 지하철 운전하는 운전자에게 "(지하철 운전은)30분이면 배워 운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 그 거만함이나 자신감 혹은 그런 무모함도 산으로 오면 별무소용입니다.

 

아무리 신체 조건이 좋고 체력도 좋으며 머리가 똑똑하다 하더라도 그가 일단 산으로 들어와 쉽게 강호의 고수님들을 뛰어 넘을 것 같지만 산만큼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잘 낫다 하더라도 산에서 만큼은 그 고수님을 따라 잡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산이 아직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고수님을 이길 수단이나 방법이 없는 현실 속에서 월반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지도를 보세요! 지도를 !"

 

예. 그렇습니다.

지도 보는 훈련도 안 되어 있고 그 흔한 등산 지도 나아가 영진지도 같은 책 한 권도 소장하고 있지 않은 그분이 고수님을 뛰어넘으려 하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얘기죠..

 

"지도도 안 보면서 어떻게 산을 가려고 해요? 종이 지도는 항상 들고 다녀야 한다니꺼요. 혹시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면 모를까....."

답답해 하지만 보통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 걸 모르겠습니까?

 

"지리산 동부능선을 보면 바로 나와 있잖아요. 頭流峰1617.4m라고... 그리고 전복 모양으로 된 것이 바위 구간이라는 얘기니 암봉이라는 얘기일 거고 그러니 거기에 오르면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지도 한 장 펴놓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얘기를 떠들어 대니 보통 관심 있는 사람의 경우 눈을 크게 뜨고 경청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지도를 만지작 거리다가 다른 대화로 유도하기 일쑤입니다.

"지도에는 무궁무진한 정보가 담겨있어요. 산에 가기 전 이것만 들여다보고 가더라도 반 이상은 알고 가는 거예요!"

뻔히 지레 겁을 먹고 산행에 동참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일단 말을 꺼낸 이상 마무리는 져야죠.

"그래요. 형이 두류산 얘기를 하였으니 이 두류봉을 봅시다. 지겹겠지만 또 백두대간 얘기를 해야겠네요. 그러기위해서는 또 산경표를 꺼내야 하고.....누누이 얘기하지만 산경표는 우리 후손들이 산줄기 산행을 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책이나 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시죠?

 

저의 경우 산경표를 펼치기만 해도 머리가 그윽해집니다.

정성껏 말았던 족자를 펼치자 한 폭의 동양화 속에는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는 산의 이음이 굵거나 혹은 가늘게 그려져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오고 그 흐름은 바람에 긴 풀 이파리가 흐느적 거리듯 위로 때로는 아래로 물결칩니다.

그러고는 한 줄기가 옆으로 가지를 치는가 했더니 그 사이로는 졸졸 거리며 물이 흘러 나옵니다.

이때 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도포자락을 날리며 몇 명의 선비가 지로승指路僧을 앞세우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입산入山이라 했습니다. 

어머님의 몸체와 같은 산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몸가짐도 조심하였습니다.

신발은 당시의 등산화인 일부러 느슨하게 삼은 오합혜五合鞋를 신어 작은 미물이라고 혹시나 밟게 되지나 않을까 조심하였습니다.

 

그분들이 알았던 조선시대의 그 산줄기가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일본인 지질학자가 우리 땅에 들어온 1900년 그 겨울 이후 갑자기 없어지고 우리 교과서에는 태백산맥이라는 산맥 이름들이 한반도 지도 위에 아무렇게나 그어졌습니다.

족자가 찢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윽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던 산줄기는 큰 폭음 소리와 함께 잘라지고 물줄기는 막혀 녹색의 부유물이 뜨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경표는 수거되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고 우리의 산줄기는 입산이 아니고 등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암흑기는 8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긴 시간이 지나 민간인 학자들에 의해 하나하나 그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조상님들의 유지 즉 "산경표를 선용하고 산맥에 가려 있던 우리 산줄기를 시러 펴더록 하라!"는 말씀을 받든 그분들은 없는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신산경표니 대한산경표니 하는 자료들이 가까스로 우리들 손에 쥐어지게 됩니다.

아직 나라 즉 산림청이나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이런 데 관심이 없죠?

대학에 있는 학자라는 사람들은 일부러 숨기고 싶어하니 드러나는 것도 별반 없으니까 말입니다. 

산경표에서 대간의 끝은 지리산입니다.

천왕봉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백두대간은 취령에서 낙남정맥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취령에서 백두대간이 그 맥을 다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낙남정맥이 가지를 친다는 말만 하는 겁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지리산에서 끝나고止於智異 취령 이하는自鷲嶺以下 곁줄기를 이루므로 則爲傍支 낙남정맥이라 한다故今洛南正脈."고 하였으니 낙남정맥의 시작은 영신봉이 아닌 취령鷲嶺이라고 본 것 뿐입니다.

그러니 지리산은 지리산 전체입니다.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진주도 지리이고 하동도 지리이니 남쪽으로 가면 남해바다를 만나는 곳.

동쪽은 남강 그리고 서쪽은 섬진강 까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지리산은 넓기만 합니다.

 

어쨌든 지금의 지명에 의하면 두류봉은 지리동부능선 상에 있습니다.

산경학으로 들어가면 신산경표에서는 웅석지맥 안에 있다고 하고 대한산경표에서는 덕천지맥 안에 있다고 합니다.

이 두 지맥을 놓고 보면 주행은 같은 방향인데 이름만 달리한 꼴입니다.

산줄기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상위점은 다음에 지맥을 얘기할 때 더 하기로 하고 오늘은 덕천지맥이라는 대한산경표의 지맥 이름으로 얘기합니다.

지도는 사부님이신 박성태 선생님의 신산경도에서 빌려옵니다.

참고도 #1 덕천지맥

 

산경표가 조선시대 사람이 그 시대의 시각으로 산줄기와 물줄기를 본 것이라면 신산경표나 대한산경표는 현대인의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의 시각으로 산줄기와 물줄기를 본 것입니다.

그 중에서 신산경표는 산경을 중시한 반면 대한산경표는 물줄기 즉 수경水經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시각차가 곧 두 표의 다른 점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대한산경표는 이 지맥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가지를 치며 분기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덕천강에 주목합니다.

그 덕천강이 자기보다 상위 등급의 강으로 자기보다 상위등급의 산줄기 즉 여기에서는 그 산줄기는 백두대간이 되고 물줄기는 남강이 됩니다.

그러니 이 덕천강이 이 남강에서 만나는 곳 즉 합수점에서 이 지맥도 산줄기로서의 맥을 다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게 위 개념도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줄기의 기본 기준은 도상 거리가 30km가 넘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우리의 명산들이 여러가지 능선 이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들 능선 이름은 사실 고토 분지로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즉 고토분지로의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지질학적 산맥 분류 개념이 우리 지리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배웠다면 분명 능선 이름은 산줄기 이름으로 가칭  'OO단맥', 'OO여맥'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정이 있게 하기 위하여 재조 지리학자들이 손을 놓고 있을 1970년 ~1980년 경 대한민국의 산꾼들은 지리산 주릉에서 가지를 친 산줄기를 능선이라 이름하고 그 각 능선마다 의미 있는 이름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우선 주릉에서 4개의 방위각을 설정하여 지리 동서남북 능선이름을 붙입니다.

또 이 4방위 외에 물을 만나러 가는 산줄기들을 가만히 놔두고 보질 않습니다.

그러고는 창암능선이니 형제봉능선이니 고운능선이니 하는 이름들을 붙입니다.

그 중 하나가 두류능선입니다.

덕천지맥이라는 지맥枝脈 개념을 모르던 시절이니까 지리 주릉 → 지리동부능선 → 두류능선 정도의 위계질서가 성립합니다.

그 두류능선은 두류봉 부근에서 함양 마천의 추성리 부근 마을에서 끝나는 걸로 그렸습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신산경표나 대한산경표를 알기 전이었습니다.

 

"알 것 같아요?"

머리가 좀 뒤숭숭할 겁니다.

"글쎄 그런 건 같은데.... 그러면 그 두류봉이라는 곳 올라갔다 바로 내려오는 것이냐? 도로 내려 올 걸 뭐하러 올라가고 그러냐...."

결국 그 선배는 이번에도 산행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냥 인근 산이나 다녀오라는 저의 권유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산주의 의미도 못 알아듣는 불량 선배 같으니라고......

 

신경질적으로 산으로님께 카톡하나 보냅니다.

미끼입니다.

"추성리 ~ 두류능선 ~ 국골사거리 ~ 동부능선(덕천지맥 구간)의  왕등습지) ~ 왕산 ~ 필봉산 ~ 산청!  가실거유?"

덕천지맥이라는 얘기와 거기서 이어지는 왕산과 필봉산 정도면 분명 물을 것입니다.

"왕등습지에서 왕산이 이어지긴 하는데 그곳 등로 사정이 어떤가요?

물었습니다.

바로 미끼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죠.

대한산경표를 제시한 산행의 고수 산으로님이 안 물을 리가 없는 것이죠.

산줄기이고 거기서 가지를 친 지맥支脈 가자는 것인데 그것도 지리산인데 안 물을 리가 없는 것이죠.

"지맥枝脈을 다 마치고 나니 다리에 힘이 빠져서요...."

너스레라는 것을 다 알죠.

"능선 타고 가는 건데 길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태초에 길이 없었으니 우리가 가니 길이 되었고 뒷사람들이 따라오니 등로가 되었다!"

 

지방선거를 한다면 또 하루 쉬는 시간을 주는군요.

사전 투표를 마치고 실제 투표 날에는 지리로 듭니다.

서초남부터미널에서 예의 백무동행 23:50 버스를 타고 마천에 내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반트럭을 얻어 타고 추성리로 들어섭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추성楸城에서 온 지명입니다.

추성이 속한 마천馬川의 지명은 성안에 있는 말달린 평전으로 인해 얻어진 지명이라고 합니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지리산 두류능선의 기슭에 위치한 추성楸城은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최대 인문지리서인 신동국여지승람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90번지에 위치한 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부른다. 의탄소義呑所56리 거리인데 우마牛馬가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추성의 삼국시대 때의 이름은 마천성馬川城이었다. 신동국여지승람 및 고지도에 등재된 것을 보면 추성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인 듯하며, 인근에 호두나무가 많이 자생한 것을 연유로 추성楸城으로 불리어지게 된다. 그래서 성의 외곽에 위치한 마을 이름도 추성리이며, 조선시대 때부터 이 마을의 호두는 나라의 진상품이었고 현재도 지역특산품이다.

 

위의 기록을 근거해 본다면 지금까지 추성을 두고 가야 구형왕의 피난지라고 전해오는 설은 잘못 전해져 오는 역사의 가설임을 알 수 있다. 고서의 기록에는 추성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수비성이라고 하나 실제 답사를 해보면 특정한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내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석성의 둘레는 약 2km가 되며, 면적은 7만 여 평에 이른다. 석성의 통로이었던 동문과 북문의 위치도 뚜렷하다.

 

성의 내부에는 높이 10m 되는 망바위를 비롯하여 군마의 조련길을 비롯하여, 수비군의 초소 내지는 망루의 건물터로 추정되는 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 추성이 자리한 지대는 지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천혜의 요새이다. 성의 서남 방향으로는 험난한 국골과 초암능선이 성의 위치를 감쪽같이 막아 주고 있으며, 그 뒤에는 창날 같은 창암산 줄기가 외산으로 둘러져 있다. 또한 성의 동북쪽으로는 벽송사능선이 가로막았고, 그 너머 엄천강 건너에 금대산과 백운산 등이 산 첩첩으로 포개져 있다. 사방의 트인 곳이라고는 오직 마천에서 운봉으로 나가는 길뿐이다.

트인 길 끝으로는 운봉고원 너머로 신라와 백제가 수차례 혈전을 치렀던 모산성이 멀리 보인다.

 

추성계곡은 곧 칠선계곡이기도 합니다.

초암능선과 창암산 능선 사이의 계곡이 바로 칠선계곡이죠.

반면 이 두류능선은 국골에 모든 걸 의지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래서인지 국골과 두류능선을 이어 걷는 분들도 자주 눈에 띕니다.

 

그런데 이 두류능선을 진행하면서 꼭 살펴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지리10대 중 하나인 향운대입니다.

물론 부르는 이에 따라 금강대를 10대에 넣기도 하고 금강대가 곧 향운대라고도 부르는 이들도 있으나 어쨌든 이 이름의 논의는 고사하고 이 향운대를 들러야 할 필요성은 분명 있게 됩니다.

두류능선 산행의 정당성이 향운대 하나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만들어진 겁니다. 

"명분이 있다 아닙니까!"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6. 13. 수요일

2. 동행한 이 : 산으로님

3. 산행 구간 : 지리산 두류능선 + 덕천지맥(동부능선) + 왕산 (추성리 ~ 향운대 ~ 영룡봉 ~ 국골 사거리 ~ 청이당 ~ 외봉 ~ 왕등습지 ~ 고동재 ~ 쌍재 ~ 왕산 ~ 필봉산 ~ 정각사)

4. 산행거리 : 25.21km

구 간

거 리

출발 시간

소요 시간

비 고

추 성 리

 

03:50

 

 

영 룡 봉

7.91

08:13

203

20분 휴식

국골 사거리

0.78

08:57

44

10분 휴식

외 봉

3.78

10:47

110

왕등습지

2.62

12:23

96

20분 휴식

고 동 재

1.98

13:58

95

20분 휴식

쌍 재

2.25

14:45

47

왕 산

1.80

16:07

82

10분 휴식

필 봉 산

1.10

16:52

45

 

정 각 사

2.99

17:51

59

 

25.21 km

14:01

12:41

실 소요시간

 

산행기록

 

 

지도 #1

03:50

저는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산으로님은 작은 메모지를 꺼내 시간이나 주요 장소 등을 기록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 일정을 시작합니다.

추성리 마을의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03:57

전원 주택지 공사 현장을 지나,

04:03

칠선암을 지납니다.

칠선암의 입구는 추성동보다는 오히려 광점동입니다.

이곳 주민들이 두류봉을 부르는 이름은 아마도 '두리봉' 같습니다.

아무럼요.

두리봉〉두류봉이죠.

개쉬키들과 한 바탕 소란스러운 일전을 벌인 뒤 성안마을 방향으로 오르는데,

04:20

좌측으로 출입금지 표지판이 보입니다.

추성마을을 떠난 지 30분만에 두류능선 초입에 다다른 것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성안마을가는 길.

금줄을 넘습니다.

그러고는 좌틀하여 능선을 따릅니다.

이내 철제 팬스를 만나 그 옆을 따라 오르게 되고.....

04:36

의외로 등로 사정이 좋습니다.

산꾼들이 많이 드나들었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최근보다는 20세기 시절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 20세기에 내무부에서 설치한 경계석이,

자주 눈에 띕니다.

04:42

817.5봉에 오릅니다.

조망이 답답합니다.

산에서는 밤이 일찍 내리고 아침은 늦게 찾아옵니다.

사위가 밝아오기는 했지만 온통 작은 물방울이 모든 걸 휘감고 있어 습한 기운만 느껴집니다.

"오늘 비소식 없잖아요?"

"예. 구름만 많이 낀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우측으로 푹 꺼진 고개를 보니 며칠 전 거닐었던 지리북부능선의 영원령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바로 옆 능선이 초암능선으로 하봉까지 진행하는 능선이고 그 다음능선이 창암능선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우측의 큰 봉우리가 창암산924.9m이니 영원령은 마음속으로만 그려야겠습니다.

05:25

1072.8봉은 그저 부드러운 능선 중의 한 마디에 불과합니다.

볼 것도 없고 그저 오르기만 하는 분위기가 좀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 두류능선은 이름값도 못하는 것 같은데...."

"아침 공기가 참 맑습니다."

선문답을 나눕니다.

"하여간 배선생님은 안 가신 곳이 없으시네."

하긴 다니는 곳이 산이요, 보시는 것이 지도이고, 쓰는 것이 산행기이신 분인데.....

카톡으로 제가 이곳에 있음과 선생님께 알현드렸음을 고해드립니다.

05:52

지도 #1의 '나' 부근에 이르자 암군이 시작됩니다.

06:00

그러더니 로프도 나옵니다.

지도 #1의 '다'의 곳입니다.

바위가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은 곧 암봉이 나오고 그렇다면 훌륭한 조망터가 준비되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닙니다.

예전 신라나 백제가 이 부근을 추성으로 삼고 전투에 대비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06:07

능선 옆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지도 #1의 '라'의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깁니다.

그렇죠!

이걸 보기 위함이었죠!

좌측의 하봉부터 중봉 -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의 동부능선과 천왕봉 ~ 제석봉 ~ 연하봉,

그리고 그 우측으로 촛대봉과 영신봉 그리고 칠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파노라마 처럼 펼쳐집니다.

예전에 천왕봉을 그냥 쉽게 상봉이라 불렀던 이유를 여기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하봉으로 올라 중봉을 거쳐 상봉으로 올랐던 것입니다.

천왕이 단군이고 주신이니 천왕봉이라 불렀던 것은 신앙을 가졌던 이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단순, 무지한 이들은 그저 상봉이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동부능선이니 주릉이니 또는 북부능선이니 하는 구분은 일단 산에 들어오면 다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설명의 편의와 학문의 필요성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잘난 척'하려는 본심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보고 즐기기만 해도 즐겁고 고마운 지리입니다.

그래서 산에 들어오면 단순해지고 무식해지며 겁을 상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첫 조망을 그냥 보내기 아깝습니다.

가방을 열고 산으로님과의 건배를 위해 중국술을 꺼냅니다.

오늘은 '공부가주'를 준비했습니다.

작은 한 모금을 넣어 입속에 그윽하게 퍼지는 향을 느낍니다.

식도를 따라 가슴으로 젖어들어가는 액체가 뇌를 자극하고 말을 시킵니다.

저 하봉의 바위가 소년대....

하봉 자체를 영랑대라고 부르기도 했고....

그러니 예전 신라의 화랑들은 영랑의 지휘 하에 3,000명의 무리들이 이 두류능선으로 올라 노고단까지 행군하는 훈련도 하였고.....

두류봉 너머에 있는 마암을 점필재 김종직은.....

추성에서 이 능선을 따라 올라 천왕봉을 넘은 의상은 화엄사로 가서는 화엄사상을 배우고는....

그러고는.....

그 좌측의 봉우리 같지도 않게 생긴 두류봉.

그저 암봉에 불과하죠.

8분 정도 머물다 일어납니다.

06:55

석문입니다.

조금 더 괜찮은 위치에 자리했다면 통천문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도 있었겠나?

07:01

바위가 많다보니 굴도 많습니다.

충분히 비, 바람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07:03

지도 #1의 '마'의 곳입니다.

완전히 박터로군요.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며 산꾼끼리 운우지정을 나눈다면.....

어디 봅시다.

바로 앞의 영룡봉1478.6m

그리고 그 뒤의 하봉.

그런데 구름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영신봉을 건너 넘어오고....

국골과 칠선골에서도 거대한 구름이 지리를 덮고 있습니다.

그러니 간신히 보이던 반야봉도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군요.

이 정도라도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만 합니다.

지나온 봉우리를 살짝 돌아보고.....

07:10

다시 되돌아나가 바위봉우리 하나를 지나면서 이제 대강 향운대 갈림길을 온 거 같아 GPS를 열어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온 지도로 찾아가는 향운대의 초입이 처음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식하게 퐁;느를 잡은 후 치고 내려가면 잠시 후 희미한 길을 만나게 됩니다.

07:26

사람이 살던 흔적을 봅니다.

이 굴이 '임영감굴'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춘삼이 굴'이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굴 주위로는 비닐 등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으며 바닥에는 한기를 막을 수 있는 스티로폼 같은 것도 있는데 좀 불결해 보여 자세히 들여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서 산죽을 뚫고 조금 더 들어가니,

07:29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막아서니 이곳이 향운대로군요.

향운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여기서 암자을 짓고 수행을 하던 곳이라는 말도 떠도는데.....

그런데 대臺가 궁금하시죠?

대臺가 무엇일까요?

대臺하면 속리산의 문장대, 삼각산(북한산)의 백운대가 먼저 떠오르는군요.

큰 산에 가면 바위가 많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크고 의미가 있는 '바위 봉우리'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智異山에도 문창대, 향적사지 앞 금강대, 가섭대 그리고 조금 전 얘기했던 하봉의 영랑대와 소년대 등이 이에 해당되겠습니다.

좀 깊이를 더 하면 '지리 10대'가 거론될 것이고....

우측으로 세존봉1368m의 문창대가 지리10()’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며 오르는 것도 의미 있다. 지리10대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도발이 좀 먹힌다는 수도처. 대부분 수려한 암벽이 있고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  졸저 전게서   34 쪽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臺'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智異山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수도처에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르는 점을 십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라 칭한다 합니다.

 

지난 번 노고단 아래에 있는 문수대에서 수행 중인 스님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바위는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효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많다는 것이죠.

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것은 비단 스님들의 수행 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산신으로부터 영험함을 전수받는 데에도 상당한 효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천년 간 사제지간에 전승 혹은 같은 직업군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험담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히 신비스러운 바위 주변에 '토굴'들이 많다 보니 큰 바위를 일컫는 '대臺'가 '토굴'의 이름에 붙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는 의미로도 들리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라는 어느 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어느 분이 이곳을 방문하여 1000원을 시주하고 무언가를 기도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형상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폰의 GPS가 작동을 이상하게 하기 시작합니다.

사진 촬영도 제대로 안 되고....

어떤 신기神氣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절터.....

그리고 그 우측의 석간수.

고여 있는 물이어서 이런 상태로는 식수로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보니 우측으로 두류봉 정상이 보이는군요.

저기서도 이곳이 그렇게 보일라나?

07:40

돌아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루트는 예전에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이 아닌 선답자가 그저 목표 지점만 정하고는 그저 막무가내식으로 걸은 루트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는 지점은 그런 마구잡이 길이 아닌 정확하게 등고선의 사면을 따라 나가는 길을 찾으며 진행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의 등고선을 정확하게 보고 현장에서는 선답자들의 흔적에 최대한 근접되게 걷는 게 중요합니다.

주요 point마다 표지띠를 다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08:03

그렇게 해서 아까 통과했던 정규 등로에 정확하게 일치 시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저희 뒤를 따라오는 후답자들의 경우 향운대를 답사하려는 의도가 있을 경우 편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겁니다.

갈 길을 가야죠.

08:08

세 번째 로프 구간을 지납니다.

스틱을 떨어뜨려 놓고 줄을 잡고 내려갑니다.

상당하죠?

08:13

우측의 영룡봉1478.3m을 오릅니다.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

거대한 운해가,

초암능선과 창암산 능선을 덮었고 좌측에서는 한 떼의 구름이 백두대간을 넘어 영신봉 앞으로 넘어오고 있씁니다.

음......

하봉.

이 정도 날씨만 유지해줘도 감지덕지 하겠습니다.

김종직은 저 하봉 일대를 영랑대라 지칭했습니다.

'영랑永郞이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데,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산수 사이를 찾아다녔는데 일찍이 이 봉에 올랐기에 이름이 생긴 것이다.'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기록의 핵심적인 부분은 영랑대의 어원을 화랑의 우두머리인 永郞이 삼천문도를 거느리고 올랐던 역사에 두고 있습니다 

'영랑이 무리를 거느리고 영랑봉을 올랐다.'라는 대목은 하봉의 영랑대와 그 지척의 거리에 있는 추성의 말달린 평전과의 역학관계에서 추정을 해보면, 3,000명의 무리는 영랑이 이끄는 신라의 군사들이었음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그 옆의 소년대도 화랑의 의미와 크게 달라 보이지않습니다.

 

한편 느닷없이 나타난 영룡봉이라는 이름도 영랑봉 〉영룡봉으로 음운이 바뀌면서 이에 적당한 한자로 붙이게 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산경 개념이 아닌 능선 개념으로 볼 때 영랑대와 이 영룡봉은 한 줄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순식간에 반야봉을 가립니다.

그러고는.....

08:23

작은 바위봉을 넘으면서,

구름에 덮힌 하봉과 시야에 가린 두류봉 전위봉을 봅니다.

국골과 칠선골을 덮은 운해.

어라!

그런데 좌측 허공다리골에서도 구름이 몰려오는군요.

이따 그 방향으로 갈 건데 그렇다면 운무 속을 거닐 게 되는 건 아닌지....

잘못하다가는 안개비도 맞을 수 있겠군요.

하봉.....

지나온 영룡봉을 보는데....

향운대가 보이는군요.

지도 #2

그러고는 국골사거리입니다.

지도 #2의 '바'의 곳입니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국골로 진행하고 직진은 두류봉과 하-중-천왕봉으로 그리고 좌측이 우리가 가는 동부능선 즉 덕천지맥 방향압니다.

그 길로 들어섭니다.

이한검 대장님을 만납니다.

기억을 더듬습니다.

2018. 5. 9. 13:56

이한검 대장은 지리태극종주 단독 등정에 나섭니다.

그러고는 밤머리재 ~ 왕등습지를 지나 익일 03:55 그러니까 덕산을 출발한 지 딱 12시간이 흘러 이한검 대장은 청이당을 통과합니다.

그때 제가 위로차 이한검 대장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 날 대화 내용입니다.

"이대장님"

"예, 선배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지금 어때요? 힘들지? 춥지는 않은가? 지금 어디?"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질문만 퍼붓습니다.

모든 게 다 궁금했기 때문이죠.

"지금 청이당 통과했는데 비가... 이슬비가 조금씩 내려요..... 춥고 너무 졸립네요....."

"비가 와? 그럼 어째? 청이당에서 좀 잘 걸 자지도 못했겠네. 왕등재 데크...."

"그런데 곰쉬키가 짱박아 놓은 걸 다 훔쳐갔어요. 그래서...."

"그렇지 그놈들이 후각은 발달했으니까..... 그나저나 그 녀석들이 인사는 안 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예절교육은 확실히 시켰는데!"

"그냥 호루라기 불어서 쫓았어요. 근데 여기 왠 귀신들이 이렇게 많아요?"

"거기 예전에 당집이 있었고 빨치산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어. 걔들이니까 그냥 인사만 하고 빠져나오슈."

"예. 걸으면서 잠깐 졸았더니 그 사이에...."

"괜찮으니까 간식 먹으면서 살살 진행하슈. 저체온 조심하고. 정신 놓지 마시고!"

"예. 근데 선배님은 잠도 안 자고 뭐하세요?"

"이 대장님이 남 신경 쓸 때요! 자 이제 정신 좀 들었을 테니 천천히 쉬지 말고 걸으슈."

그날 무사히 구인월에 도착을 하여 무지원 단독종주에 성공을 했던 이한검 대장입니다.

이 표지띠를 달던 날이 정확하게 2018. 5. 10. 04:05경입니다.

이 표지띠를 보며 오늘 또 이한검 대장이 생각나는 것은 그와 함께 하지 못한 안타까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 이해합니다.

운무 속을 걷습니다.

습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09:24

청이당 3거리입니다.

지도 #2의 '사'의 곳이죠.

진주독바위 부근의 쑥밭재에 대응하여 '아래 쓱밭재'라고도 하죠.

위에 보이는 길이 우리가 내려온 곳.

좌측으로 내려가면 물을 구할 수 있는 청이당 계곡이 나오고 거기서 사면을 치고 진행하면 소위 두류새길입니다.

요즘은 보통 그 루트를 이용하여 지맥 산행이나 태극종주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두 번이나 그 길을 이용하기도 하였고.....

참고도 #2

 

 위 참고도의 '가'루트가 그것인데 이 루트를 진행하면 아무래도 사면치기를 하는 느낌이 들어 지맥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을 갖기 십상입니다.

그렇다고 '나'의 루트를 이용하려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길이기에 국골까지 진행을 하기도 하고 그 길을 온전한 지맥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런 논란에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산꾼들이 가장 많이 보는 지도인 '영진지도'가 한몫을 거들었습니다.

영진지도 1:25,000 지도를 보면, 

참고도 #3 

극토지리정보원 지도의 두류봉 위치가 '가'의 곳인 것을 영룡봉 위치에 표기하였고,

국골사거리에서 청이당으로 진행하는 루트는 그리지 않은 대신 두류봉인 '가'의 곳에서 청이당으로 진행하는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삼장면의 군계를 따라 등로 표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진파' 산꾼들은 무조건 위 붉은 선을 따라 진행하였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같은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사람과 산' 지리산 지도에도 마찬가지로 그려져 있으니 괜히 영진지도만 탓할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맞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저는 갖습니다.

어쨌든 이 청이당에서 산청군 삼장면을 만나 이제부터는 산청군과 함양군의 군계를 따라 걷게 됩니다.

 

이 청이당이라는 곳은 이름 '堂'이 얘기해 주듯 당집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의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 이곳에서 영랑재까지는 길이 매우 가파라 봉선의기에......"라고 기술한 것에 머릿속으로나마 예전의 청이당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청이당 터 옆계곡 물은 산꾼들이나 유람하는 이들의 식수 보충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예전의 등로는 지금과 같이 군계를 따르거나 국골 사거리 방향이 아닌 오리지널 지맥길을 이용했다는 것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그 갈림길에서 초행자들로 하여금 혼돈을 하지 말라고 볼펜으로 길 표시까지 해 주신 친절한 이한검 대장!

복받으실 겁니다.

표지띠의 초록색은 야광 비닐이죠.

야간 산행때 무지 도움이 됩니다.

비록 가까운 날에 공단 직원들에 의해 제거될 것이지만 옆에 제 표지띠를 기댑니다.

09:34

1260.8봉을 지납니다.

1276.2봉 전위봉은 그저 이런 산죽 뿐.....

행복한 마음으로 걷고 있지만 신발 안 양말은 바지를 타고 내려오는 물로 이미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스패츠가 아쉬운 곳입니다.

09:52

1276.2봉 까지 그 산죽밭은 계속됩니다.

눈에 익은 바위가 나옵니다.

진주독바위 입니다.

로프를 잡고 오릅니다. 

10:03

손과 폰에는 이미 빗물로 젖어 지문 인식이 안됩니다.

노크 기능도 미끄러움 때문인지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장갑으로 간신히 닦아 독바위 정상에서의 사진 한 장을 남기지만 세상은 모두 흰색과 회색의 무채색 뿐.....

사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내려옵니다.

하긴 눈으로 본 것도 아무 것 없습니다.

독바위에서 내려와 좌측 바위 뒤로 가서 간식을 먹습니다.

예전에 그 더운 여름 어느 날 이곳에 앉아 땀에 전 티를 말리던 기억이 나는군요.

공부가주 한 모금 씩 마시면서 몸을 데웁니다.

안개비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며 한기까지 옵니다.

일어나야죠.

20분 정도 쉬었다 일어납니다.

10:32

덕천지맥이라는 표지띠도 하나 달고.....

10:43

쑥밭재는 체크도 못하고.....

말라 죽은 산죽밭을 지나,

10:47

지도 #2의 '아'의 곳에서 아주 중요한 표지석 하나를 봅니다.

표지석은 세 가지를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이 1322.3봉인 새봉이라는 것과 일반적인 진행은 우측 화살표 방향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직진을 하면 알바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바라는 말은 그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직진할 경우 예전에는 상대봉으로 불렸던 와불산1213.9m으로 가서는 함양독바위나 득녀암 방향 혹은 동강리 방향으로 진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덕천지맥이나 지리동부능선을 진행하는 이들보다는 한 수 높은 분들에게 하여주는 얘기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 코스는 조만간 제가 지날 루트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와불산臥佛山은 글자 그대로 산의 모양이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새로 지어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올린 이름입니다.

이 모습은 송전리의 견불사나 휴천면의 견불동에서 가장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하는군요.

저는 법화산에서 내려오면서 의식적으로 이 모습을 보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았으나 실패한 기억이 있습니다.

관찰 위치가 위 두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제 함양군 마천면을 벗어나 산청군 금서면을 만납니다.

고로 지금부터는 금서면과 삼장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11:17

조망도 할 수 없고 특징도 없는 길을 그냥 묵묵히 걷습니다.

11:22

기억상의 이곳은 조망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일 텐데....

조릿대 군락지를 헤쳐가며 그냥 걸을 뿐.....

지도 #3

11:34

비가 오지 않음에도 안개비로 인하여 이미 다 젖은 상태입니다.

11:40

길 옆에 있는 969.5봉에서 4등급 삼각점(산청438) 찾는 것도 귀찮기만 합니다.

11:49

923.9봉을 지나,

11:57

외고개를 지납니다.

그런데 이곳을 고개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12:18

왕등습지를 거의 온 것 같습니다.

지도 #3의 '자'의 곳으로 여기서 능선을 타고 진행하여 고동재로 가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일단 습지를 보고 와야겠죠.

12:23

왕등습지를 봅니다.

지도 #3의 '차'의 곳입니다.

고산습지인 이곳은 1996년 여름에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내륙에서 발견된 산지습지 중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암산 용늪은 유전자보호구역,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은 출입금지만 시켜놓았지 다른 어떤 보호를 위한 조치를 하는 지는 모르겠군요. 

여기서도 물을 구할 수는 있으나 습지에서의 물은 고여 있는 물이 흘려 내려오는 것이라 식음에는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취수를 포기합니다.

머릿속으로는 지난 번 지리둘레길을 할 때 봐두었던 고동재 부근의 계곡물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왕등재라는 지명에 좀 의문이 있습니다.

왕등재를 한자로 표기하면 王登岾라 하여 왕이 오른 고개라는 의미가 되고 이를 구형왕과 연결 시킵니다.

왕산도 마찬가지이며 추성도 비슷하지만 이는 추성을 가야로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신라와 연결시키는 것이 타당하기에 무시하기로 합니다.

다만 물이 있는 습지이기도 한 이곳을 고개라고 부르기에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굳이 이곳을 외곡마을과 수철리를 잇는 고개로 우기면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조금 이따 직접 발품을 팔면서 찾아보겠지만 이곳을 고개로 볼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지도 #3의 '카'의 곳이 유평리의 밤밭골 마을과 수철리의 절골을 잇는 고개로 그곳을 왕등재라고 부르는 게 나아 보입니다.

12:28

다시 삼거리인 지도 #3의 '자'의 곳으로 돌아 나갑니다.

초입에 길은 희미하게 나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도저히 뚫고 진행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다시 습지로 나와,

습지 좌측의 로프를 따라 사람이 지난 흔적을 찾아보려 노력을 해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좌측으로 치고 올라가 능선에 붙습니다.

그러고는 이제부터 온전하게 금서면 안으로 들어가 진행을 합니다.

12:38

길은 없습니다.

오직 능선을 따라 그 중에서도 사람이 다닐 만한 곳을 찾으며 걷다보니 팔뚝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하는군요.

완전히 지맥 산행 모드입니다.

왕등습지 ~ 고동재 구간은 일반인들이 이어가는 루트는 아닐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약초꾼도 지나간 흔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같이 정신 나간 사람이나 무한도전 팀의 표지띠만 간혹 보일 뿐......

독도의 달인 산으로님도 조금은 버거워 하는 모습.

혼자 왔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13:10

이런 길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곳도 있었으나 나뭇가지의 저항이 없어 간신히 사진 촬영이 가능하였기에 몇 장 남은 사진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제 왕등재를 지나면서 안개비에서는 벗어났습니다.

이 바위 아래 큰굴 하나를 보는데 이 부근은,

지도 #4

13:23

유일하게 이 구간에서는 조망이 되는 곳으로 수철리와 우측으로 산청시내도 보입니다.

왕산.

고도를 떨어뜨리기 시작합니다.

980m 정도 되는 왕등습지에서 560m 정도 까지 고도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13:38

고동재입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500ml 빈 통 두 개를 들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세 구비를 돌아도 물의 흔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기는 너무 가물었나?

너무 내려가는 거 같아 다시 돌아 올라오는데 반갑게도 둘레꾼 세 분이 내려옵니다.

산에서는 물을 구걸하는 게 아닌데 여기는 산이 아니니....

"여차저차 왕산 ~ 필봉산.....그러니 어쩌구 저쩌구.....곧 내려가면 매점도 있고 수철리....슈퍼 ...."

한 분이 배낭에서 물 한 통을 내어주시는군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서둘러 올라갑니다.

저 같으면요?

저는 있는 거 다 줍니다.

동병상련.....

우측으로 들어갑니다.

이곳부터 쌍재까지는 둘레길이니 공포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쌍재 ~ 왕산까지의 오르막 길은 일반 등로라 산청군이나 산림청에서 잘 관리하고 있을 겁니다.

명산 산행이 좋은 점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빵 좀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일어납니다.

14:16

족보에도 없는 삼각점을 지나고.....

14:17

조망이 있는 곳에서 지리의 능선을 봅니다.

14:17

산불관리초소가 있는 641.4봉을 오르기 전 좌측 조망터에서 방곡리를 봅니다.

좌측 아래로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관이 보입니다.

둘레길을 할 때 그 맞은 편 방곡천을 건너 계곡을 따라 쌍재로 올라왔었죠.

그 계곡 즉 쌍재로 오르는 길에는 상사폭포라는 것도 있었고....

14:31

641.4봉입니다.

뿌옇긴 하지만 천왕봉도 보이는군요.

둘레길 할 때의 이곳은 무척이나 조망이 좋았었는데.....

저 뒤로 보이는 와불산도.....

왕산과 필봉산.....

앞의 능선끝은 밤머리재 바로 전의 도토리봉과 좌측의 기산.

좀 늦었습니다.

서둘러 내려갑니다.

내려오는 길에 이정목 위에 누군가 빠뜨리고 간 물 한 통도 줍고.....

14:45

쌍재입니다.

아픔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쌍재.

1951. 2. 7. 산청 양민학살 사건 때 첫 희생자가 난 곳이 바로 이 아래 있는 쌍재 마을이라고 하죠.

공비 토벌을 빙자하여 애꿎은 민간인을 학살한 그 지휘관이라는 인간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인지....

일제하에서 부역하던 인간들이 국군으로 모자만 바꿔썼으니 제 동족을 알기를 뭐같이 본 것 아니겠습니까?

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 정도입니다.

이 이정표를 봐뒀기 때문에 쌍재 ~ 왕산 루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의 이정표가 세워졌다는 것은 관리 상태 혹은 지자체나 산림청의 관심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니....

14:50

한 시간 일정으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어랍쇼.

근데 이게 웬일.

이정표에서 틀어 오르자마자 묘지가 나오고...

그러고는 끝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길은 물론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습니다.

지도의 능선을 따라 대강 길의 흔적을 가늠하고 올라가기는 하지만 이건 아까 왕등습지와는 다른 또 다른 고역입니다.

그저 이런 길을 뚫고 올라가야 하는.....

올라갔는지 내려왔는지 목포의 한 산악회 표지띠가 걸려있기는 한데.....

아마 그 길을 안내한 대장님은 그날로 탄핵 당했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왕등습재를 지나며 봤던 정신나간(?) 무한도전 클럽 표지띠도 가끔 보이고....

15:19

가파르더라도 이 정도면 양호한 것이겠고....

무엇때문인지 배가 살살 아파오는군요.

가파름이 아니라 길 찾기가 더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15:35

지도 #4의 '타'의 곳이 조망이 좀 있는 바위입니다.

뒤를 돌아 봅니다.

중앙 뒷편이 왕등습지 뒷 봉우리이니까 그 가운데가 고동재입니다.

기산 뒤의 웅석봉은 희미해서 보이질 않습니다.

천왕봉은 희미하고 그나마 중봉과 하봉은 윤곽만 볼 수 있습니다.

15:41

이제 거의 다 왔군요.

16:07

2등급삼각점(산청 21)과,

정상석이 있는 왕산입니다.

왕은 가야의 마지막왕 구형왕을 이야기한다고 하나 쌍재 ~ 왕산 루트는 누구에게나 절대 권할만한 그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양옆으로의 길은 당연히 무지 좋습니다.

16:17

10분 간 쉬었다 일어납니다.

이정표 중 쌍재 1.5km의 방향표시는 도대체 누가 한 것인지....

이 이정표를 세우고 그 길로 진행은 해봤는지....

이 이정표를 보고 하산길로 잡았을 어느 팀은 길 찾으며 내려가느라 고생 좀 했을 겁니다.

버스표를 문의합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가 18:35에 있다고 하니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봉화산이 해발5227.7m임에도 저렇게 납짝한 걸 보니 저 금서면 특리 방향에서 보는 이 왕산9256m의 위용이 대단할 거 같습니다.

오똑하게 서 있는 필봉산.

봉우리 끝이 아주 탐스럽습니다.

여전히....

바로 앞은 수철리 그리고 그 뒤가 지막리입니다.

지막리의 우측 개천을 따르는 방향으로 지막계곡 야영장이라는 펼침막을 볼 수 있었습니다.

 936.5봉 부근에서 모아져 내려오는 향양천이고 그 물줄기를 따라 조성된 지막 계곡 유원지’는 여름철이면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라는 전언입니다.

16:36

여우재입니다.

여우가 살던 곳이어서 여우재인가요?

여시굴은 여우굴?

 

곰이 살았을 법한 여시굴을 지나면 여시골산으로 오르게 된다. 땅 이름이나 산 이름이 혼란스럽기는 여기도 마찬가지다. ‘여시란 말에 착안하여 여지없이 여우를 동원했다. 하지만 지명의 경우 여시는 우리말의 엿다, 옅다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이 여시골산의 경우는 물이 깊지 않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러니 여시굴이 다만 그러한 산에 있는 굴에 불과한데 여우까지 동원한 것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다. 한편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정상석이 있는 이곳을 그저 618.8봉으로만 표기하여 놓았다. 반면 영진지도는 대간외 387.7봉인 삼각점봉을 여시골산으로 표기하여 놓았고, ‘사람과 산지도도 그 삼각점봉을 385.4m로 같은 이름으로 표기하여 놓았다. 하지만 '김형수 555' 등산지도 만큼은 이 봉우리가 여시골산625m이라고 하고 있고 김천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천덕산을 지난 다음 만나는 621.1봉을 여시골산으로 표기하였다. 산 이름이 아주 복잡한 지역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75쪽

여우재부터는 계속 오르막입니다.

우측으로는 로프로 안전시설을 해놓았을 만큼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입니다.

16:52

산청 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필봉산.

이 산의 정기를 받고 문필가들이 많이 태어났다고요?

이제 오지의 탈을 벗어야겠지요.

문필봉으로도 부른답니다.

좌측 왕산 우측이 910.2봉인데 거의 일자로군요.

서둘러 내려갑니다.

17:14

684.8봉 안부입니다.

여기서 좌틀하여 동의본가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하여 편하게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우틀하여 왕복사 방향으로 진행을 할 것인가!

그림을 그려온 대로 왕복사를 택합니다.

그 길의 초입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300여 m 진행을 하니 또 길의 흔적이 없어집니다.

다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그러고는 겨우 만난 임도.

지도에도 나와 있지않은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버스 표를 예매하고 택시를 부릅니다.

17:51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계곡에서땀 좀 씻으려해도 물이 없습니다.

이 부근은 물이 메마른 곳인 것 같습니다.

18:00

택시를 타자마자 폰을 열어 오늘 선거 내용을 보려는데 막 출구조사결과가 나왔군요.

14  : 2 : 1

터미널로와서는 표를 찾고 깨끗한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편의점에서 캔 맥주 큰 걸로 두 통을 사서 하산주에 갈음합니다.

다음은 황금능선?

수고하셨습니다.